열정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한순간에 타오르는 '격렬한 열정'이 있는가 하면, 쉽게 끓었다 식기를 반복하는 '가벼운 열정'도 있고, 흔들림 없이 목적을 실현해가는 '차가운 열정'도 있다. 조은 시인의 열정은 어떤 모습일까? 이 책이 보여주는 조은 시인의 열정은 '조용한 열정'이다. 그녀의 열정은 쉽게 눈에 띄지 않지만, 단단한 뿌리를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
조은 시인은 2년 전 「
벼랑에서 살다」라는 제목의 산문집에서 독신의 전업시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신산함과 가난한 이웃들의 생명력을 섬세하고 결기 있는 필치로 그려냈다. 「벼랑에서 살다」가 시인이 몸담고 있는 현재의 시공간을 그려냈다면, 이번 산문집에서는 그녀의 내면을 형성한 과거의 어두운 기억을 더듬어 간다. 가족 그리고 제도교육과 불화했던 날들, 죽음을 기다리며 허비했던 날들, 예민하고 우울했던 시절에 겪었던 마찰과 상처들...
그녀의 상처는 성숙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아물기도 하고, 시로 발효되기도 했다. 성장통을 깊이 앓았던 그녀의 내면을 따라가다 보면 자의식이 강했던 한 여자 아이가 한 명의 시인으로 성장하는 궤적을 그려볼 수 있다. 과거를 향한 조은 시인의 여정에는 사진작가 정경자가 동행했다. 2004년 봄, <예술가의 초상>이라는 한 TV 프로그램을 통해 만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서로에 대해 '조용한 열정'을 발견한 이들이 함께 빚어낸 16편의 글과 68장의 사진들이 흐릿하면서도 결코 잊혀지지 않을 느낌들을 열정적으로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