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21:10~15)
다윗이 놉 땅을 거쳐 가드 왕 아기스로 찾아간다.
사울의 적이므로 자신이 빌붙일 곳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곳도 사울과 다윗의 스토리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위기감을 느낀 다윗은 '미친 사람' 흉내를 내서 곤경에서 벗어나려 한다.
본격적인 다윗의 환난이 시작된 듯하다.
골리앗을 처단할 때만 해도
하나도 거침이 없는 일사천리의, 특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드디어(?) 오늘은 격조가 떨어지게도
침을 질질 흘리는 등의 미친척을 하면서 모면하려 한다.
직진남인 줄만 알았는데, 우회하는 모습이어서 어색하기까지 하다.
다윗이 이 정도라면 평범한 그룹에 속한 우리들은
예외 없이 연약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보편화의 오류를 조심하나
인간은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 같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타인의 성적 대상으로 아내를 스스로 제공하는 너무나 비겁한 행동으로
위험에서 벗어나려 한 치욕적 역사가 있지 않은가?
적절한 예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격투기를 보면
소림사에서 수련하는 사람,
태권도, 가라테, 복싱, 유도, 레슬링 등 등
각종 무도에서 신의 경지에 이른 것으로 인정받던 이들조차
가장 현실적인 투기 형태인 MMA에서
쉽게 무너지는 것을 본다.
어떤 한 분야에서 탁월함을 보인 것에
과장된 명성이 더해져서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듯 보여도
치열한 현실의 현장에서는 맥을 못추는 모습이
인간 사회의 명성이 사람을 강하게 여기게 하여도
결코 절대적 강함을 가진 이는 없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듯하다.
사실 다윗의 환난은 이제 시작이다.
오늘의 시행착오도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이성적 판단에 의해
간 곳에서 겪은 일이어서,
결국 하나님의 인도하심 없는 일과 처소는 늘 불안하다.
인간의 약함이나 선택의 문제도 결국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완전하고 불안한 것임을 교훈을 다시 되새기게 된다.
약함과 불안전함을 인정하지 않은 것도 문제이지만
약함과 불안전한 선택이 인간에게 항상 붙어 있는 일이라서
낙망, 절망에 빠져 회복불가한 지경까지 이르도록 방치하는 일도,
약함과 불안전함 선택의 가능성 때문에 몸을 움츠려서
아무런 행동도 선택도 하지 않고 복지부동의 수세적 삶을 살아서도 안 된다.
다윗이 훌륭한 것은
약한 면모를 보이고 때론 지독한 죄를 저질렀음에도
자신의 허물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결코 놓지 않고 끝까지 붙들고 갈 길을 갔다는 사실이다.
진통과 우열곡절 끝에 '승리'를 얻었고 천국의 '시민권'을 얻었다!
내, 외적인 세속적 도전을 기정사실화 화고 공존하면서
때로는 침범 당하고 빠져들지라도
나침반이 흔들리며 끝까지 북쪽을 가르치려는 투쟁처럼
내게 부여된 인생을 투쟁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스스로 외친다.
투쟁이라는 단어의 거침 때문에 곡해할 수 있으나
버티고 살아가는 근원은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절대 원리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