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포항시 송라면 하송리 ‘여인의 숲’ 송덕비에 새겨져있는 글이다. 이 비는 합장을 한 두 손으로 도토리를 감싼 모습을 형상화한 것인데 숲의 무궁한 생명력과 번창을 기원하는 뜻을 품고 있다 한다.
‘여인의 숲’. 색다른 이름 만큼 이 숲이 만들어진 연유 또한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사연을 담고 있다. 조선 말기, 송라역을 관할하는 찰방(察訪)이 주재하던 곳에서 멀지 않은 송라면 하송리에는 봉수대가 있는 역촌(驛村)이 형성되어 있었고 파발이 뜨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당시 이 마을에 주막을 경영하는 김설보(金薛甫)라는 손 큰 여인이 있었는데 많은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김 여인은 돈을 벌 줄도 알았고 멋지게 쓸 줄도 알았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마을의 안위를 걱정한 이 여인은 마을의 상습적인 홍수피해를 막고자 거금을 들여 땅을 사고 느티나무, 쉬나무, 이팝나무 등을 심어 수구막이 숲을 만들어 마을에 희사했다.
어느 땐가 큰 홍수가 나 마을 북서쪽의 호룡골 저수지가 붕괴하고 소하천이 범람했는데 이 숲이 떠내려가던 볏단이며 가구며 사람들의 인명을 구했기에 ‘식생이수(食生而藪)’라 불려지게 된다.
마침내 1897년 마을사람들은 이 숲 한 모퉁이에 ‘出義捐財 壬年我藪 百堵頌德 罕覩基人 幾滅更新 銘此采隣’ 라는 글을 새긴 조그마한 송덕비를 세웠다. “재물을 희사하여 임년에 조성한 우리 숲을 백대로 송덕하노니 보기드믄 그 분이 거의 사라질 것을 다시 새롭게 하였으매 옥돌을 캐어다 여기에 새겨두노라”라는 뜻이다.
이 숲은 일제시대에 들어 큰 수난을 당하게 된다. 총대와 개머리판을 만들기 위해 커다란 느티나무를 모두 베어간 것이다. 그 이후 상수리나무 위주로 다시 만든 숲이 잘 자라 60년대까지만 해도 단오 때 이 숲에서 열린 그네뛰기, 시름판을 보러 어른을 따라온 아이들이 길을 잃을 정도로 울창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70년대 들어 당시 군수의 잘못된 판단으로 20여 채의 주택과 논이 파고들어 많은 면적의 숲이 사라지고 이제 3ha 남짓 남아 있다. 울창한 숲에 잇대어 있는 집들은 환경과 풍광은 좋을지 몰라도 이 집에 산 사람치고 잘 된 사람이 없다고 한다. 김 여인의 노여움을 산 것일까.
이와 같은 숲의 수난이 있었기에 숲의 가치를 되새기며 김 여인의 숭고한 정신을 다시 기리고 숲 사랑의 메카로 하자는 움직임이 태동되었는지 모른다. 이러한 제안은 곧 폭 넓은 공감대가 형성되었으며 2003년 6월, 많은 사람들의 참여와 축하 속에 ‘여인의 숲’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식생이수’가 ‘여인의 숲’으로 다시 태어나며 이를 기념하는 송덕비도 새로 세워졌다. 그 이후로는 “도토리를 따겠다고 나무에 돌팔매질 하거나 총질하는 사람이 사라졌다”고 산책중이던 한 촌로가 들려준다. ‘여인의 숲’으로의 부활의 의미와 성과를 단적으로 표현한 말로 들린다.
이 사업에 산파역을 한 사람은 노거수회 회장 이삼우(李森友) 선생으로, ‘여인의 숲’이라는 이름도 붙이고 비 건립을 주도하였으며 김 여인의 공덕을 기리고 뜻을 이어 발전시켜 갈 것을 다짐하는 헌시를 지어 비에 새겼다.
현재 이 숲은 상수리나무 위주로 되어있는데 이전의 주인인 느티나무도 수난의 과정에서 요행히 살아남은 것이 10여 그루 섞여 자란다. 이 외에도 쉬나무, 말채나무, 느릅나무와 같은 활엽수들과 소나무 20여 그루도 함께 어우러져 있다.
숲 안을 돌아보면 외과치료를 한 나무도 더러 눈에 띄며 느티나무, 이팝나무, 쉬나무 등 후계목들이 심은 지 얼?되지 않은 듯 지주에 받쳐져 숲 언저리에서 자란다. 이렇게 국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숲을 지키고 가꾸며 나무를 심고 있음이 다행스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