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양 언기(鞭羊彦機) 스님 : 양치기 생활과 보살행
선사는 선조 14년(1581)에 경기 안성 (죽주현:竹州縣)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장씨(張氏)이고 아버지는 장박(張珀)이며,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에 12세의 나이로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의 현빈(玄賓)선사에게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왜구가 강산을 짓밟던 8년 풍진 동안은 은사의 슬하에서 삼장(三藏)을 이수하며 티 없이 자랐으며, 왜란이 가라앉자 사교입선(捨敎入禪)하여 제방으로 다니면서 여러 선지식을 찾았다. 선사는 19세 때 칠통을 타파하고 보임(保任)하면서 평안도 어느 목장에서 '양치기 생활'을 하면서 편양당(鞭羊堂)이라는 법호를 쓰게 되었다. 22세 때 묘향산의 청허선사(淸虛禪師)에게 입실하고 3년을 시봉하였으며 이때 스승의 진수를 체달하여 사법제자(嗣法弟子)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청허, 곧 서산대사의 법통을 잇게 된 편양 선사는 그의 법을 풍담 의심(楓潭義諶)에게 전수하였으며, 풍담은 다시 월담 설제(月潭雪霽)에게로, 월담은 환성 지안(喚惺志安)에게 전하여 편양 선사가 입적한 지 3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한국 승려 중 95% 이상이 모두 편양 문손에 속하게 되었다. 편양 선사는 서산대사의 제자 81인 가운데 가장 막내였다. 한 산중을 거느리는 조실자리에 앉은 도인들이 즐비하였으니 이 중에서도 사명(四溟), 소요(逍遙), 정관(靜觀), 편양(鞭羊)의 4대 문중을 이른바 '서산문하의 4대 문파'라고 한다.
하지만 3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사명, 소요, 정관 등 3대 문파는 그 대가 끊긴 지 오래이나 현재는 오직 편양 문손만이 크게 성하여 우리나라 전체 승려 중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편양 선사의 어느 면이 그토록 장하기에 선사의 문하만이 크게 떨치게 된 것일까. 그것은 선사가 3년간의 양치기 생활과 평양성 내에서의 보살행의 공덕이 아닌가 한다. 양치기 생활은 어떤 보수를 받고 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보림 하는 가운데 양떼들을 돌 본 것이었다. 선사는 양떼들을 자신보다 낮은 축생으로 다룬 것이 아니고 인간과 구별함이 없이 마치 적자(赤子:어린아이)와 같이 여겨 그들의 보호자가 되고 선도자가 되어준 것이었다.
또 평양성에서의 보살행이란 선사가 보림 하면서 평양성 내의 모란봉에 움막을 짓고 살았는데, 성 내에 사는 걸인들 수백 명을 한 곳에 모아 그들을 보살펴 주었다. 선사 자신이 문전걸식하는 형편인데도 수백 명의 걸인들을 친 권속같이 보살펴준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선사로서는 걸인들의 보호자 노릇을 하는 일이 수행의 한 방편인 두타행일 수밖에 없었지만, 선사는 눈이 오나 비가 내리나 가리지 않고 근 10년을 헌신하였다. 이 작복행(作福行)을 실천궁행한 공덕으로 오늘날 전체 승려의 조사가 된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서산대사 문하에는 81인의 오도제자(悟道弟子)가 있었고, 이 중에서 한 산중의 조실이 된 분만도 50여 명이나 되었다. 그 분들 모두가 편양 선사보다 법랍이 높은 선배들이었지만 그들의 후복(後福)이 편양 선사보다 못한 것은 편양 선사만큼 큰 복을 못 지었기 때문이리라. 평양성에서의 이타행을 끝내고 묘향산으로 돌아와서 선사는 다음과 같이 읊은 바 있다.
백성유방필(百城遊方畢) 많은 성에 노닐기를 마친 뒤
향악반운한(香岳伴雲閑) 묘향산에서 구름과 벗해 한가롭구나.
독좌향심야(獨坐向深夜) 홀로 앉아 밤은 깊어 가는데
전봉월색한(前峰月色寒) 앞 봉우리 달빛은 마냥 차갑구나.
선사는 귀산 후 묘향산의 천수암과 금강산의 천덕사 등 사암에서 후학을 위해 개당 강법하여 널리 교를 선양하였다. 선사는 선을 닦아 깨친 도인이면서 전등, 화엄 등 삼장을 강설하였으므로 선자(禪者)에게는 본분종사(本分宗師)이고 교학자에게는 대강백(大講伯)이었다. 이렇듯 선과 교를 쌍수(雙修)하고 병천(幷闡)한 것은 당시의 불교가 선교양종(禪敎兩宗)인 탓도 있겠지만 선교일치의 사상을 따랐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편양 선사의 사상은 어디까지나 선에 주안점을 둔 것임은 말할 나위 없다.
인조 22년(1644) 5월 10일, 이 날은 편양 선사가 세연을 거둔 날이다. 묘향산 내원(內院)은 선사의 스승이신 서산대사께서 입적하신 암자로서 스승의 최후를 지켜본 편양 자신이 또한 이 절에서 좌화(坐化)하였다. 임종에 이르러 제자 풍담의심에게 후사를 유촉하고 오되 오심이 없이 오고 가되 가심이 없이 그렇게 가셨다. 선사의 세수는 64세이고 법랍은 53세였으며 은색 사리 5과를 수습한 제자들은 묘향산과 금강산에 부도와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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