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의 마을버스] ③ 돈의문 밖 교남동 일대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마을버스 종로05' 노선을 따라서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마을버스 종로05는 서대문역사거리에서 출발해 통일로를 잠시 달린다. 독립문 즈음에서 행촌동의 경사진 주택가를 올라 한양도성 성곽길을 지난다. 이후 사직공원을 한 바퀴 돌고 사직로와 사직터널을 거쳐 교남동의 아파트단지에 이른다. 종로05를 타면 맛집 가득한 전통시장은 물론 유서 깊은 골목길과 성곽길, 그리고 뉴타운을 만날 수 있다.
서대문역 앞에서 승객을 기다리는 마을버스 종로05.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인왕산 자락에 들어선 행촌동 마을들
서대문역사거리를 떠난 마을버스 종로05는 통일로를 따라 독립문 방향으로 달린다. 그 도로의 이름은 원래 의주로였고, 통일로는 홍은사거리부터 임진각에 이르는 도로였다. 하지만 2009년 의주로의 도로명을 통일로라고 변경했다. 의주로는 조선시대에 한양에서 신의주에 이르는 길이었다. 그러니 통일로는 옛 의주로의 전통을 잇는 길이기도 하다.
서대문 영천시장 정류장에선 승객이 많이 탄다. 점심 무렵이었는데 장을 본 이들이 많은 듯하다. 독립문 사거리를 지나자 소형버스가 꽉 찰 정도로 승객이 몰린다. 그 구간부터 행촌동 고갯길이 시작돼 그런 모양. 실내는 좁아도 정감 넘치는 분위기다. 승객은 주로 노인층이었는데 서로들 뭘 샀는지 뭘 해 먹을 건지 대화를 나눈다.
행촌동은 과거 은행동과 신촌동을 합치며 두 동에서 한 글자씩 따왔다. 마을버스 종로05는 행촌동의 경사진 골목에 들어선 주택가를 지난다. 만약 집들이 들어서지 않았더라면 그곳은 인왕산 능선이었을 것이다. 1947년과 1969년 항공사진을 보면 해상도는 낮지만, 산자락에 마을이 들어선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독립문 사거리 근처의 한옥 골목.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이이화는 <한국사이야기>에서 1931년 조사를 인용해 “서대문 밖의 빈터에 새로운 토막촌이 형성됐고, 행촌동과 현저동이 서대문 밖에 들어선 빈민촌이었다”고 밝혔다. 일제강점기의 도시를 연구한 문헌에 따르면 “땅을 판 구덩이를 벽으로 삼고 지붕은 거적 등으로 가리는 원시주택의 형태”를 ‘토막’으로 정의했다. 최소한의 집 구조를 가진 ‘불량주택’과는 다르게 구분했다.
행촌동과 함께 언급된 현저동은 일제강점기 당시 서대문형무소가 있던 곳이다. 그 맞은편 무악동과 행촌동에는 여관 골목이 있었는데 ‘옥바라지 골목’이라 불렸다. 감옥에 갇힌 이를 면회하기 위해 올라온 지방민들이 여관에서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다 사라졌지만 옥바라지 골목을 기념하는 전시 공간과 한옥이 남아 있는 골목에서 당시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행촌동에는 공장 노동자들도 많이 살았다. 일제강점기에 독립문 사거리의 대신중고등학교 자리에 편창제사공업회사(片創製絲工業會社)라는 일본 생사회사(生絲會社)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1934년 10월경 이 회사 노동자들의 파업을 다룬 신문 기사를 보면 300여 명이 파업에 참여했을 정도로 규모가 큰 회사였다. 이 노동자들의 숙소는 행촌동 일대에 있었을 것이다.
가난한 이들이 터 닦을 수 있는 곳은 번듯한 주택가가 아닌 빈터였다. 그런 곳이 하천가와 산자락이었다. 때로는 공동묘지 주변이기도 했다. 행촌동은 인왕산 자락인 데다 도성이 지나는 곳이라 주변에 집을 지을 만한 빈터가 많았을 것이다. 그렇게 인왕산 자락은 행촌동 주택가가 됐다. 다만 토막촌이나 불량주택은 사라지고 다양한 콘셉트의 주거 공간이 들어섰다.
행촌동 경사진 골목에 들어선 주거 공간.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행촌동 넓은마당과 성곽길
행촌동을 지나다 보면 ‘넓은마당’이라는 마을버스 정류장이 나온다. 다른 정류장의 이름은 거의 건물 이름이었기 때문에 특이했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봐도 마당처럼 보이는 곳은 없었다. 근처 부동산 중개사무소 직원에게 물어보니 “예전엔 골목들이 다 좁았었는데 여기만 넓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하네요” 라며 공영주차장을 가리켰다. 바로 옆에는 경로당도 있다.
구조를 보니 골목길 모서리에 자리한 공터였던 모양이다. 그 공간이 시유지나 국유지 등 공공용지로 묶여 있어 집을 짓지 못하다가 경로당과 공용주차장이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행촌동의 '넓은마당' 정류장. 예전에 공터였으나 지금은 공용주차장과 노인정이 들어섰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행촌동의 한양도성 성곽길을 달리는 마을버스 종로05.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마을버스 종로05는 행촌동 정상쯤에서 한양도성 성곽길을 만난다. 돈의문, 즉 서대문에서 올라오는 성곽이다. 한양도성은 인왕산을 올라 백악산으로 향한다. 다만 군데군데 잘렸다. 서울시 자료에 따르면 성곽에서 떨어져 나왔을 돌을 기초로 삼은 주택들이 많다고 한다.
종로05는 잘린 한양도성을 가로지르고 사직공원을 한 바퀴 돌아서 사직로에 들어선다. 그러곤 사직터널을 지난다. 이 터널은 1967년에 개통된 서울 최초의 교통 터널이다. 터널 개통 전에는 도심에서 독립문 방향으로 가려면 광화문사거리를 지나고 서대문사거리를 거쳐야 했으나 경복궁에서 바로 연결돼 거리가 크게 단축됐다. 사직터널 위로는 잘린 한양도성이 지난다.
옛 골목에 들어선 돈의문 뉴타운
독립문 사거리에서 마을버스 종로05는 교남동 방향으로 향한다. 서대문역사거리에서 독립문 방향으로 가다 보면 오른쪽에 보이는 동네인 교남동은 사실 작은 동 여러 개를 포함한다. 교북동, 송월동, 홍파동, 평동은 물론 행촌동도 행정적으로 교남동에 속한다. 행촌동 등의 주민들은 서류를 떼려면 교남동 행정복지센터로 가야 한다.
교남동은 만초천의 다리인 석교 남쪽에 있는 동네라서 붙여진 지명이다. 만초천은 무악재 즈음에서 시작해 한강의 원효대교 북단 아래로 흘러가는 하천인데, 지금의 영천시장 근처에 석교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만초천은 1960년대에 복개돼 지금은 거의 도로가 되었고, 영천시장도 복개된 만초천 위에 자리하고 있다.
김구 선생이 생의 마지막을 지낸 경교장. 선생의 집무실과 숙소였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교남동에 속한 여러 동에는 조선시대부터 주택가가 형성됐다. 주변에 외국 공관과 종교 시설이 있어 외국인들이 거주한 서양식 주택들도 있었지만, 중산층이 살았던 한옥도 많았다. 홍난파가 거주한 벽돌집도, 김구 선생이 생의 마지막을 보낸 경교장도 볼 수 있는데 마을버스 종로05가 근처를 지난다.
물론 교남동 일대에는 가난한 이들이 거주한 이른바 ‘불량주택’도 많았다. 다양한 계층이 사는 만큼 다양한 거주 공간들이 교남동 일대 골목들에 가득했었다.
그 골목들 일부가 ‘돈의문 뉴타운’으로 개발됐다. 골목들이 사라지고 고층 아파트단지가 들어선 것. 그렇게 지난 10여 년간 교남동 일대의 경관은 바뀌어왔다. 옛 골목의 정취 일부는 ‘돈의문 박물관 마을’에 재현돼 있다. 그리고 서울역사아카이브에서도 골목과 주택들 모습을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다.
교남동에 뉴타운 개발로 들어선 아파트단지.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옛 기상청 앞 화단의 나무들은 서울의 개화 시기를 알려주는 '표준관측나무'로 쓰인다. (사진=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공공 부지인 서울시교육청과 옛 기상청 건물은 그대로다. 옛 기상청 건물은 지금은 서울기상관측소와 국립기상박물관으로 쓰인다. 이곳에 심은 벚꽃, 매화, 진달래, 단풍나무는 서울 시민에게 계절을 알리는 ‘계절 관측목’이기도 하다. 이들 나무의 가지 한 개에서 세 개 이상의 꽃이 펴야 서울에서 그 꽃이 개화한 공식적 날짜가 된다.
마을버스 종로05는 교남동의 뉴타운 끝 강북삼성병원에서 운행을 마친다. 병원 앞 정동사거리가 돈의문, 즉 서대문이 있던 자리로 추정된다. 돈의문은 1915년에 전차 노선의 복선화 과정에서 헐렸다. 길도 함께 넓어지며 돈의문 바깥에 있던 교남동 일대는 도심과 주변부를 잇는 요충지로 성장해왔다. 마을버스 종로05를 타면 돈의문 일대의 변화를 느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