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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는 문도, 들어오는 문이라는 것도 없는 것을 무문관이라 하거니와
이 무문관을 보려고 3 년 불식 , 장자불와(長坐不臥)7년 , 묵언3년 등을
하며 수행을 하다가 수행도중 열반하기도 하면서 초개와 같이 생명을 내 놓는 경우는
흔히 있는 일이라 무문관 수행을 그렇게 어려운 관문으로 고행을 전제로 수행하는 도리인데
도대체 무문관이 당체 무엇이간대 문짝달리지 않는 세계를 보려고
목숨도 내놓은 수행을 해야 하는가 이 말입니다.
이러한 진리의 주체를 말씀하신 분은
사실 성인들이신데, 이에 대하여 우리 인간네 들은 잘 모릅니다
그러므로 성인의 말씀에 약간 익어지게 되는 선각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보편적인 삶의 문명지간에서는 대화가 되어지지도 않는 이목을 주기도 하지요.
성인들의 그러므로 보편성으로 일률적인 상식의 배경에서는 약간
도라이가 되어지는 것 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의의 주된 까닭을 구태어 논한다며는 ,
진리는 인간개념만으로서는 접근 할 수 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사의 생명논리가 인간만으로 제한 된 것은 아니지 않읍니까?
기본적으로 인간본위적인 개념은 사실상 틀린 것이지요
인간만이 이 우주지경에 주어진 생명놀음에서 주인공이 인간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만의 사고방식으로 빗장을 걸어놓은 인륜의 도라 하는 것은
이처럼 인간이외에 대한 개념을 간과 하기 때문이라고 전혀 진리에 대한
입장을 말 할 수 없읍니다
오로지 자기 입장에서 관점을 논 할 뿐이지요.
하지만 인간적 논리과 개념 생활상은 인간 이외의 주변과 함께 결부되어야 살아갈 수 있으며
생명운동을 할 수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결부된 외부 요인을 인정하고 이해해야만 자신의 생명개념을 이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포기하거나 잊고 지내는 것이 사실한 현실세계의 인간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자연계에의 보편적 정의로 본다면 선 무당이라 할 수 있고 설풍수 짓 하고
사는 것 밖에는 아니된다고 도리어 지적할 수 있읍니다.
지구에서도 제일 기생충 존재가 인간이라 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지 않읍니까? 지들만 먹고 살자고 얼마나 자연을 해악시키고
지구를 얼매나 베리고 있읍니까?
원래 하나님이나 성인들께서는 인류 문명이 이렇게 진화 해서는
아니된다고 그렇게 말씀하셨고 이미 평화롭게 살 수 있는구족을 다 해 주셨지만
인간은 진화를 잘못해서 이러한 페단적인 문명에서 한 발자욱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인의지침을 듣지 않고 마이동풍으로 지 멋대로 살아온 것입니다.
공생과 공존의 대상들 전 개념을 수단화 하고 이용화 하며
재료화 하며 인간의 덕목을 갈파한 죄는 더 이상 빠져 나갈데가 없는 곳으로
진화 되고 말았읍니다.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인간론으로서는 대화가 아니되는
진리 지간의 빗장을 풀지 못하게 되면 인간세계는 멸망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예언은 분명 맞는 것입니다.
오십페이지 셋째줄 독도는 우리땅인 것입니다.
이 빗장을 풀어내는 자리는 오로지 O 을 보는 자리입니다.
O 개념은 모든 생명놀음을 포괄합니다.
이를 보아야 합니다.
원인과 까닭과 말미암과 과정과 진행과 결과와 다시 되돌려지는 여러가지 인과를
통찰해야 성인의 말씀을 몰록 이해하기 시작한다 이 말입니다.,
O 을 모르고 진리자 인 척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것은
조금 쉽게 막말을 해댄다면 바보가 육갑떠는 것과 같읍니다.
원숭이가 육갑을 한다 하면 믿겠읍니까? 그와 같읍니다.
나는 왜 이렇게 말은 직역적으로 표현하는가?
실제로 맞기 때문입니다. 보지 못하는게 척을 하는 문화가 많기 때문이지요.
O 을 보아야 합니다.
한 보름간 굶어보시고 수행하시면 정신이 휠 하고 뚜껑이 열려 몸밖으로 나가게 되면
O 을 보는데 그 일주일도 못 굶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신력은 그렇게 나약합니다.
먹는데 정신이 없어지는 진화를 해서 그러합니다.
책 1만권을 읽고 논문을 수천권을 저술한다 하여 이러한 교수적 지위에 있다 한다 하여도
백날 도로묵입니다. 삼일도 못 굶습니다
깨친자들은 이러한 류의 전문가라 일컫는 지식적 엘리트 대상에게는
단 한마디로 표현합니다 " 멍텅구리" 라 합니다.
그것도 지가 멍텅구리인줄도 모르고 멍텅구리 짓을 한다 이 말입니다.
장수 벌레가 장수벌레인줄 알고 있읍니까? 그와 마찬가지 이므로
알려줄 수도 없읍니다, 사람이 장수벌레 붙잡고 애야! 니는 장수벌레다 라고 한다면
그 장수벌레가 알아듣는가 이 말입니다.
그와 같음을 논하는 자리가 무문관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사와 별개같이 느껴지는 명제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롯이 있읍니다.
장수벌레라 함은 자기가 무엇인지 자기 본래 면목도 모르기 때문에
이름을 그냥 붙여 놓은 것 뿐이지요 장수벌레는 생명입니다.
장수벌레는 자기가 생명인줄 생명개념을 모르겟지요
남을 많이아는인간들도 결국는 자기 자신을 모르고서야 무슨 대책이 나오는
가 말입니다. 그냥 먹고 살다가 죽으면 되는 것이지요.
장수벌레를 꿈꾸는것이지요.
결국 멍텅구리는 밥벌레 밖에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어서야 되겠읍니까?
속세지간은 이미 123456789 의 와중이므로 그래도 역시 O 이야기로서는 도라이라고
자기합리화로 경계하기에 바쁘지만 극복해 볼만 한 것이 O 의 정체성 을 밝히는 작업입니다.
이면에는 이렇게 논하면 자기는 전혀 뭐가 뭔지 모르기 때문에 모르는 것을 합리화 하는 요건이
미신이다, 저 사람 귀신붙었다, 미쳤다라고 합리화 시키는 것으로
위로한다 이 말입니다. 이를 저간(猪間) 이라 합니다.
욕심만 수학하게 많은 생명들 사이에 짖어대는 말 소리다 하는 것이지요.
내 입에 뭐가 들어가지 않거나 먹을 거리가 아니면 코 풀어대듯이 힐난만 하는 성품이 그렇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도라이가 보는 관점으로 일반 보편적인 인간들이 살아내는 문명 문화의
일반적인 상식 을 보게되면 그것도 이해가 된다는 도라이 지견을 말합니다.
결부되어있지요. 보다 중요한 것은 하기에 따라 다르다 입니다.
의지의 본분사가 빛의 운동이며 덕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살기 위해서는 무슨 짓을 못 할까요. 안그래요.
삼일 밥 안먹으면 도둑넘 안 되는 사람 없읍니다.
이를 저간이라하는데 돼지가 사는 동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심정이다 이 말입니다.
돼지는 무엇인가,
이것도 하늘에서 뚝 \띄어 낸 것이 아니고 하늘에서 내린 물을 돼지 라 하는 거인데
돼지는 바다라 칭할 수 도 있지요, 하늘 소식이라 규정할 수 있는 대목이니
필요악인 것입니다
단지 돼지 六 水 를 다보고 다 알고 다 이해하는 자를 聖人(성인) 이라 하는 것입니다.
壬 이 물 6水 인 六道 를 말하고 肉(고기 육) 獸(수:짐승 수) 라 육수 세계를 말합니다.
그런데 무문관을 통하고 도 라는 관점에서 해결 되는 경지가 되는
분들은 보편적인 일반 인 들의 저간의 삶이 얼마나 불쌍하고 어리석은지 모르는
심정이 일어나게 되어있으며. 이 명제는 불가분의 명제로서 반드시
이를 제도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는 회향론적인 전도의지를 지니게 된다 하는 것입니다.
나 와 남이라는 경계의 문짝이 이미 사라지고 결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O과 123456789 가 서로 불간분 한 관계임을 아는 자리를 무문관이라 이름하는 것과 같읍니다..
그런데 이를 알릴 장치가 만만치 않는 것입니다.
돼지처럼 욕심만 많은 인간에게 어떻게 대화를 해서 이를 이해시켜야 하는지가
고민인 것입니다.
제도 할 수가 없다! 성인들께서 내린 결론이였읍니다.
하지만 포기 할 수 도 없다, 불가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성인들께서는 나 혼자 감당해야 하리라.. 하신 것이지요
좀 무리수를 띤 무모한 전략이였읍니다.
위정자로서 출발하시기로 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매 한가지 입니다, 예수 당신께서도 홀로 다 감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위하여 몸소 몸으로 부딧히며 찾아가는 서비스를 단행하신 것입니다.
아주 친절한 서비스만 담당하신 것입니다.
요즈음도 상혼에 젖어 돈이 된다면 찾아가는 서비스를 한다 하지만
부처님 예수님처럼 이러한 서비스로서 몸과 목숨을 다 바쳐서
생기는 거 없이 전도 하시려는 위정자의 모습을 보기에는
아직은 없는 듯 합니다.
내 생각 내가 가지고 내가 산다는데 왜 이러쿵 저러쿵하는가 이 말입니다.
윤회를 해도 내가 하고
니가 죽어봤나 왜 자꾸 그따위 소리만 해서 바쁜사람 귀만 솔케 하노?
내가 죽어보고 윤회해도 내가 뭐 아나? 윤회했는지 없는지 말이다
그러이까 신경끄고 니 살림이나 잘해라.
괜시리 왕자신분도 내 버리고 맨발로 송장싼 옷 가지 걸치고 미친 넘 처럼
돌아댕기지 말고 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고정관념에 젖어 있는 생명들 한테 괜히 욕지꺼리 먹으면서도
진리의 한 말씀을 그렇게 전달하려고 애를 쓰신것입니다.
무문관으로서 서로 같기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일깨워 준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일입니다.
그러므로 스승이 필요한 것이지요
성인들께서는 만 세상에 스승이십니다.
조금 안다고 배웠다고 지 머리 자기 합리화 시키면서 뱅뱅 돌려보았자
팽이가 한번 돌다 서는 것 밖에는 없는 일인 것입니다.
이토록 진리라는 것은 어려우며 전달하기도 어떤 매개체도 없으니
꿀 먹은 벙어리 처럼 그렇게 행하다가 해탈지경에 열반하는 것이
제일 좋은 수순이라 생각하신분이 원래 붓다 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지경을 논 해야 합니다.
살아지니면서 지팔 지가 흔들고 각자 알면 되는데
무신 돈이 되나 호화로운 생활이 보장되나 그것도 아닌 것이 분명하게
왜 기를 쓰고 당신들 샘명을 아예 바쳐놓고 시작하는 전도의 말씀!
이를 이해하고 궁리해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가능한 이 진리의 세계를
우리는 분명 이해해야 합니다.
공자께서도 중용의 도를 보이시고 仁 을 실천하는 자리로서 무문관임을 그렇게 주야장차
말씀하셨거늘 이역시 우리같은 백성들을 잘 모릅니다.
성인께서 이미 인본주의에서도 실생활에 무문관을 이미 펼쳐 놓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도 모르니 참으로 기가막힐일이지요..
문짝이 없는 곳은 공간이지요. 허공을 말합니다.
그렇지요?
이를 붓다께서는 마음이라 하였고, 공자부께서는 중용이라 하였으며
예수게서는 성령이라 이름하셨지요.
이 허공은 생겨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있는지 없는지 당체 만져져야 알지요.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공간은 볼 수 있지 않읍니까?
이를 묘유(妙有) 라 이름합니다, 묘하게 있는동 없는동 있다 입니다.
만약 어느 공간에 집을 지었다 해 봅시다
집이 새로 들어서면 그 공간에 점유된 공간은 이미 없어지고 보이지 않읍니다.
집이 한칸 점유하고 있을 뿐 입니다.
집짓기 전에 공간 어데 갔어? 아무리 찾아봐도 없는 것 같읍니다.
안그래요? 그러므로 공간은 누가 달라하면 두말도 안합니다
그냥 줍니다. 그리고도 무신 부피감을 느끼는것도 아니고 계산 때리는
것도 아닙니다, 공간은 무한하기 때문에 있다라고 할가늠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닙니다.
크기를 재어본사람 있으면 노벨과학상이나 물리상을 받을 수 있읍니다.
공간을 향하여 발질을 해도, 욕을 하고 총을 쏴대로 그냥 가만히 있읍니다.
그런데 단 한가지
공간에 몸을 의지하고자 하면 절대 아니됩니다.
공간이 용납을 하지 않읍니다. 무게를 지닌 생명에는 공간에
머물게 허락하지 않읍니다, 그러므로 공간이 아주 미끄럽습니다.
이를 인도의 바라문 교인 힌두교서에는 하늘의 신 비슈니천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몸은 신으로서 아주 미끄러운 세계라 선포하신 것이지요.
맞는 표현입니다..
빛을 머금은 공간세게는 미끄럽습니다.
기름이 미끄럽지요? 공간을 얼어있으며 기름칠 해놔서 미끄럽습니다
고로 사람이 생각을 많이 지니고 집착을 하면 그 무게 때문에
돌아가시고 난 다음 허공을 만나는데 그냥 주욱 자기 무게만치 인연을 만나
주욱 불가항력적으로 빛에 이끌려 그냥 미끄러져 이상한 자궁이 아방궁으로 여겨지면서리
그 쪽으로 들어가서 따스하게 잠 자다가 세상에 빠져 나오는 것입니다.
빠져나오고 보니 엄마가 소 이기도 하고 쥐이기도 하다 이 말입니다.
이거 제가 이야기 한 것 아닙니다.
힌두니즘의 바라문교의 베다경전에 나오는 말입니다.
같은 구멍에서 빠져 나왔다 하여 (미끄러졌다) 공자 입니다 (孔子" 구멍자식)
저항력이 O 이고 구멍이고 (空) 얼어 있기 때문입니다.
공간 위로 올라가보면 -300도 시가 됩니다, 꽁꽁 얼어있어요.
약간 녹은 세상이 안자 걸터 있게되면 그냥 죽죽 미끄러지는 것입니다.
추락하는 것은 전부 공간에 미끄러지는 현상입니다.
이 세상에 이미 다 전부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로서 무게 있는 생명은 공간에 머무르려고 하여도 미끄러져서 추락하거나 진공속의 위에는
떠 돌아다니는 미아가 될 뿐이지 공간속에 절대 합류 시키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지구는 태양은 말입니다 계속 추락하고 있읍니다.
단지 둥근 법성의 공간의 원만함에 따라 둥근모탈로 계속 추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시속 1,600키로 속도로 굴러가면 계속 미끄러지는 것입니다.
추락하면 떨어진다 하여도 계속 둥근 모탈로 돌며 떨어지는 것을 계속합니다.
공간은 무게있는 것은 가만히 안 놔둡니다.
그런데 내가 공간과 같은 주체다 라고 발상을 해 본다면 어떻게 되겠읍니까?
공간은 가만히 있지요. 집을 짓던 말던 묘하게 변하지 않게 하나로
그냥 주어져 있다 이 겁니다, 이를 우리들이 내재한 마음자리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제가 화엄경이나 주역을 공부하기위한 쉬운길을 이해하게 하기 위하여
소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론에 자주 나타내는 모 스님이 있는데 이렇게 말한다.
신은 없다.
윤회도 없다.
참 기가 맥힌 일입니다. .
어떻게 저러는지 모를 일이지요, 중생빨 돈 다 빨아먹으면서
공부하고 수행했다는 사람이 저렇게 중질 해서야 어떻게 될려는지 고민입니다.
절밥 축내고 공부하라 했더니 신이 있고 없고에 매달리고
윤회있고 없고에 매달리다가...
그렇게 지 꼬라지 그렇게 꼬여 죽으면서 윤회에 머물고 귀신이 되고 마는 코스에
접어들어서 그렇습니다.
수행자에 대한 올바른 견햬를 피력하지 못할 시 에는
지독하고 아주 극력하게 비판해 주어야 합니다.
어정쩡하게 말하면 지가 옳은지 알기 때문입니다.
옳은지는 몰라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맞기에
아주 지독하게 욕해 주어야 합니다.
특히 수행자 아닙니까? 대중을 선도하는 주제를 떠는 데
겨유 고런 말을 한다는것은 지가 더 멍텅구리다 이 말입니다.
어떻게 그런 고정관념에 머무르고 중질 하면서
무위도식하고 공양 밥을 얻어 먹는가?이 말입니다.
고정관념이라는 것은 집착입니다. 무게를 지닙니다.
마음깜냥을 빛의 파동연구에서 실험해보면 실제 그러합니다.
집착은 무게를 가지는 소이연이 된다 이 말입니다.
무게가 있으면 밀고 당기며 결국은 임계치를 지니는데 지향하는 방향에서 반대로 뒤집어 온다 라고 하는 의미인데
이를 주역괘에서는 구덕괘(九德卦) 라고 합니다
빛의 운동을 의미하지요.
지금 모 스님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기에 윤회를 당해야 합니다..
진리의 본질 빛의 운동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이 말입니다.
진리는 무엇인가? 예수께서 말씀하셨읍니다.
"빛은 진리요 생명이라"
이거 모르잖아요? 모 스님!
지수화풍 이 빛입니다.
지수화풍이 인간한테만 구성됨남요?
신이 없다?
신의 개념이 무엇인지를 밝혀야 합니다.
인간의 몸을 구성하지 않지만 저변에 영향을 주는
것 들은 전부 신입니다.
신이란 펼쳐보이는 모든 것을 신이라 함인데
인간도 죽으면 신 이 됩니다.
부처님게서 공자님께서 예수님께서 (시대순으로) 빛을 말씀하셨읍니다.
이거 모르잖아요?
공자부님 말씀을 한번 소개하면서 빛을 이야기 해 봅니다.
역사시대에서 중고시대를 주역에서는 주와 문왕의 시대를 말합니다
상고시대는 요순임금의시대를 말하고 복희 씨 시대를 말하지요.
빛의 운동을 논 하심에
주문왕 께서는 十體九用(십체구용)을 말씀하십니다.
이 빛의 운용을 말씀하시고 해설 하신 분이 십익을 창안하신
공자 님이십니다.
이게 천부경의 기준인데 이는 추후에 소개하기로 하고 일단 차치합니다.
십은 O 이고 O이 구궁운동을 하는데 삼각운동을 합니다.
빛은 삼각형운동으로 45 도 각도를 직진하면서 돌아댕긴다
이 말입니다.
빛은 왜 직진운동을 못하는가?
O 의 십방이 둥글기 때문에 휘어집니다.
하지만 가까이 보게되면 삼각 운동으로 반경운동을 항시 한다 이 것이지요.
4 손 9리 2 곤
3진 5토 7태
8간 1감 6건 후천 팔괘의 구궁운동입니다.
대칭으로 음양으로 두개의 요소를 합치면 모두가 십이되고
사방 팔방과 중앙 하나를 더하면 자리가 9 입니다.
땅의 소식은 1 2 3 4 5 6, 7, 8, 9 로 직진운동을 함인데 선을 이으면 삼각형이 됩니다
하늘의 운동은 9 8 6,5,4,3,21 로 역으로 비추면서 十을 행합니다.
이를 십체용구라 함인데(十體用九)
공간의 십방 소식은 (덕) 땅과 인간에게는 九宮 의 빛운동을 한다 라고
하는 것을 말 합니다.
주왕은 문왕의아들이고
문왕은 주왕의 아버지 인데 문왕은 왕 을 한 것이 아니고
주왕이 무왕으로 왕위를 계승하자 문왕의 칭호를 받은 것이고
유리감옥에서 은의 허창이라는 패군 주왕에게 하도 탄압을 많이 받아
그 애로움에서 빛을 발견한 사람이 문왕입니다.
문왕 아들과 강태공이가 은나라 폭정 주왕을 정복하고 주나라를 세우는
역사시대를 중고시대라 이름한다 이 말입니다.
계사하편 7 장에 보면 이러한 글귀가 나오는데
곗가하편 6 장의 하늘도리를 생행하기 위하여는 德(덕: 십방이 모여운동하는 빛)
으로 행해야 한다 라고 나옵니다.
따라서 제 7 장에서는 64 괘중에서 덕행을 갖추어 (빛) 모운것을 3 차례를 통하여
덕의 (빛의) 특징과 작용과 방법 세가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삼진구덕괘(三陳九德卦)라 합니다.
乾(건) 도인 하도팔괘에서 구덕괘 (二用九원리: 빛의 원리)
인 낙서원리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다. 이를 체십용구 라 이름하고
기자가 이를 지니고 기자조선국을 세웠읍니다.
(기자는 주왕의 할아버지뻘) 고로 천부경은 빛을 발견한
것을 말하고 우리들은 그 민족의 후예입니다.
구덕괘는 인간의 삶에서 도저이 어렵고 힘들며 아주 근심되는부분을
풀어내는 방법을 빛으로 설명하신 것을 말합니다.
빛은 덕이라 칭합니다 큰게 십방에서 아우라지는 빛의 현상이 운동하는
현상에 맞추어 인륜의윤리를정한다 이 말입니다. 덕
첮번째 1 은 천택리라 (이번 주역에 공부할 괘상) 履 는 덕의(빛)의 터전을 말하고(基)
두번째 2 는 지산겸이라( 덕을 (빛을) 쥐 자루이고 (청소할때 비짜루를 쥐는 자리)(柄)
세번째3 은 지뢰복이라 (덕은(빛은) 다시 되돌아 오니 (둥금) 이를 빛의 근본으로 하고(本)
네번째4 는 뇌풍항이라 (덕은(빛은) 덕이 항상 견고하여 변함이 없음을 말하고(恒)
다섯번5는 뇌택손이라 (덕은(빛은) 도의 닦음 修(수행) 를 말하고
여섯 6 은 풍뢰익괘라 (덕은 (빛은) 덕의 넉넉함을 말하는 裕(유)이고
일곱 7 은 택리곤괘라 (덕은(빛은) 분별함이라 辨(변) 이고
여덟8 은 리풍정괘라 (덕은 (빛은) 땅이니 地 이고
아홉 9 는 풍중손괘라 (덕은(빛은) 덕의 마름질을 하는 制 인데
4 리풍항 固 9 풍중손 制 2 지산겸 柄
3 지로복 本 5 뇌택손 修 7,택리곤 辨
8 지풍정 地 1 천택리 基 6 풍뢰익 裕
로 빛이 굴러감인데 일ㄹ 삼성사항이라 이름합니다.
천부경의 삼신사상에대하여 천인합일설로 인본을 위주로 하면
신의 작용과 함께 인륜을 세우는데
4,3,8 의 리괘 진괘 리괘로 천지망량신(산신) 이 주장하고
9, 5,1의 곤괘 황극 건괘는 일월 주왕신( 부엌신이 주장하고
2,,7, 6의 태괘 손괘 감괘 는 성진일성신이 주장한다.
이렇게 나옵니다.
수 의 순서대로 직선을 연결해서 천반 지반을 그려면 피타고라스 도해가
나오는 삼각운동으로 균형을 잡으며 생명운동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공자부께서는 여기에서 地山謙 2 의 柄 자루 목에서
예경을 강조하시고 예를 지니면 중용이라 무문관에
이르러 온 천하와 소통하고 걸림이 없다 하신 것입니다.
세상사의 어떠한 일을 행하더라도 예로서 겸손하게 지향하는 자세의 빛 운동을(덕)
하면 모두가 하나로 소통하고 장애가 없다 하신 것입니다.
예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며 덕을 실천하는 자루를 쥐고 있는 척도가 되는 것이요
이를 이미 성인께서 윤리으 덕목이라 빛의 2 항에 무문관을 설해 놓으신 것이 됩니다.
예가 없는 정치!
돌 쌍놈들입니다, 지금 정치인들을 보면 전부 예가 없읍니다.
이재명은 이를 극복치 않고 무슨 정치를 해 낸다 저렇게 하는지 측은하기만 하지요.
우리들도 어느누구나 예를읠 지켜야 합니다.
생명을 포괄한일체의 진리행은 인간개념으로 인간만이 설정되는 세상으로만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천부경의 삼신사상에는 부억신이 있읍니다.
우리가 일상 먹고 불을때고 하는 부엌의 작용을 하는 정령은
신들의 조화 이며 인간모습을 짓지 않고 인위적 숟가락 사발 하나라도
그 정령의 영향을 함축하고 삶을 굴리는 것이 인생지락인 것입니다.
빛은 항시 돌아온다 라고 분명하고 復(돌아올 복)을 성인께서 말씀하셨는데
후천괘에서 동방의 3 항 지로복을 의미합니다.
생명의 출발점은 다시 되돌아 오는 것을 전제하고 復 의 개념을
담고 있는 것이 덕이요 빛의 운동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되돌아 온다면 규정입니다,윤회는 규정이라 할 수 있음인데
단지 자기의제대로 반연하여 반경을 돌고 온 빛의 십방의 덕은
이를 비추어주면서 거슬러 o 을 이야기 해 준다 라고 하는 것이
구덕괘 입니다.
이 하나만으로서 신은 있는 것이고 윤회는 있는 것입니다.
윤회는 무엇으로 하는가? 디엔에이 유전인자로 규정하여 그 소식을 펼치면서
행하고 또 다시 되돌아 오는 반복을 행하면서 생명운동한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단향 나무가 있읍니다.
향기를 내고 내음을 주변에 발산시킵니다.
우연히 한 사람이 그 나무 주변에 머물거나 지나가게 됩니다.
그 향내가 좋아 계속 거기에 머무르려고 합니다.
이에 전단향 나무가 이 냄새는 내가 낸 것이므로
당신은 이 향내를 맡지 마세요 하고 사절하는 통보를 했읍니다.
이에 그 사람이 하는 말이
향내를 발산하는공간은 서로 공유하는 주체인데 왜 공유하는
공간에 그대는향기를 발산하는 것입니까?
공간은 누구의 소유입니까, 향기를 발산하지 말아주세요.
이렇게 말한다는 어떻게 할 까요.
전단향 나무를 우리는 신이라고도 하고 요정이라고도 명명할 수 있읍니다.
신은 그러한 것입니다.
작용을 하도 주변 모두에게 결속시키는 인연작용을 함으로서
시도하던 안하던간에 향을 발산하는것은 자기 것만이 아니고
신의 작용인 것입니다.
신은 그렇게 논 해야 할 진데 . 이를 가능하지 않게 보는
신은 없다라는 그 명쾌하고 어리석은 말을 모 스님께서 한다는 것은
중고 시대 주문왕의 빛의 운동인 덕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과
같지는 않는지요.
이 세상에 보이지 않게 보이게 펼쳐져 있는 생명운동은
전부 신 이 되는 것입니다.
신이라 함은 모두가 신이므로 신이라 언급하지 않아도 될 일이므로
신을 언급하지 않는다고 부처님게서 신이 없다 말 씀 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모두가 신 입니다.
사람은 죽으면 신이 됩니다, 펼쳐 보이는 지수화풍의 빛의 운동으로 제반
다시 되 돌아 와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빛이란 이처럼 십방의 모든 생명빛들과 결부하여 간섭운동을 하기 때문에
피하고 밀고 당기면서 빛은 파동이 생기며 직진행을 하지 못하고 지그재그로
운동하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이 결부되어진 것을 빛의 운동이라 하고
예수님게서는 빛은 진리요 생명이니라 하신 것입니다.
신도 인정하고 인간도 인정하고 요정도 인정하고 모두다 인정하여 빗장을
풀면 이를 부다라 하는 것이며 (깨친자) 무문관이고.
인륜의 도로서 무문관을 실행하는 전제는 오로지 예경 입니다.
그리고 겸손해야 한다는 성인의 지침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추후 시간이 있을때 빛의 이야기를 구체화 해 보독로 소개 해 보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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