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중간에 서서 다시서기를 해 보려하오.
조그만 했을때 일기를 써서 하루를 반성하고 내일의 보람됨을 꿈꾸라 배워왔소.
그러나 지금으로써는 이렇게 새로이 일어서 볼려구 하오.생의 중간에 서 말이오.
앞으로의 내 길은 그동안의 어떠한 생각 그리고 판단,느낌 , 모든것이 과거와 연관 되어질 것이오.
반성해 보고 또 다시 느껴보고 다시 행할수 없는 잘못을 뉘우치고 새롭게 태어나려 하오.
군대의 4년 반 이라는 시간은 나를 새로 태어나게 만든건 아니었소.
새로 태어날 생각으로 지원했지만 그게 아니었소 하지만 헛되지 않았소.
군을 마치고 나오니 이렇게 새로 태어날 엄두를 감히 갖게 만든 것이오.이제 시작이오.
이 편지글은 당연히 내 자신에게 보내는것이 맞을 것이오. 허나 누군가 훔쳐보아 줬으면 하는바램이오.
누군가 나와 공감하는 이가 있다면 또 기쁨과 보람됨이 있다면 가능한한 많은이가 훔쳐 보구서
나와같이 다시 일어서 보길 바라오.
어느 시골이었소...가난한 농부는 그저 사랑을 원했소.
그리고 아이들이 생겨났고.여느 농부처럼..2남 4녀까지 얻게 되었소.
또한 난 그들중 막내로 태어났던 것이오.
조그맣고 핏덩이가 맺힌 아이는 커다란 눈으로 그저 울음소리를 제외하고는 너무도 조용한
일상이었소.시골동네의 한적하고 깨끗한 ..그리고 순수한 안방에서의 한낮이었다오.
집은 시골의 골목안쪽에 난 기와로 얻혀진 그리고 싸리문의 부엌.조그만 창고 옆으로 소마굿간. 앞으로는 거름자리.
그옆으로 강아지집과 화장실.옆은 돼지우리..헛간..이런 풍경이 있는 시골집.
마당과 뚤방.마루.그리고 안방과 웃방. 건너방이 있었다오.
수개월이 흐르고 아기는 조용하는 법을 깨닿고 조용해 지기 시작했소.
그리고 배가 고프면 울음이 나왔고 아프거나 슬플때 눈물이 나온다는 걸 알때..
어머니는 어머니젖가에 빨간 옥토진끼-빨간약-을 바르고는
" 아가! 엄마젖에서 피가나네..아파서 그런거란다.이제 그만 먹자~!"
이렇게 아기는 순순히 엄마말에 수긍하며 젖을 뗐다오..
이제는 제법 걸음걸이가 익숙해지고 강아지마냥 엄마를 따라다닐 무렵이 되었소.우리집 강아지
'검웅이'와도 많이 친해졌소.
시골의 농번기..모내기가 한창일때 인부들의 새참을 챙겨 나가시는 엄마를 따라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논으로 나갔소. 그리고는 부족한 일손탓에 어머니가 신발을 벗고 논으로 들어가시면
못줄잡이를 따라 한칸한칸 어머니의 곁을 결코 떨어질세라 논두렁에 쪼그리고 앉길 반복 했소..
제법 혼자서도 놀때가 되었고, 친구들을 만났소. 동네에는 여자애가 셋 남자애가 넷이었소.
꽤 많은편이었오. 그때까지는 그래도 시골동네에 아직은 기계보다는 직접 손으로 일을 했을때라오.
어른들은 논밭으로 일을 나가실때면 동네 꼬마들은 모두 냇가에 가서 소꿉놀이나, 물장구를 쳤소.
물도 맑고, 산밑의 동네는 너무도 깨끗하고 조용했었던 곳이라오.
국민학교를 입학을 했소. 학교까지는 약 3~4km 떨어져 있는 곳이였소. 그때 걸음으로 약 30~40분 걸어야
했는 거리인데 아버지 자전거를 -자전거에는 삽자루가 껴있기도 했는데.- 타고 학교를 간적도 있소.
어느 애들처럼 개구장이 일수도 있지만 조용했다오. '내성적'이라는게 나를두고 하는말이란걸 알았는데
그래서 생활기록부에는 항상 '내성적'이라고 적혀있었던 것 같소.그렇다고 특별히 다른아이들과 다를건 없었는데.
그저 앞서나가기 두려워했을 뿐일지 모르겠소. 방가후면 어느친구집에 놀러가 라면을 끓여 먹기도하고
오십원짜리 핫도그를 사먹기도 하고..생라면을 뿌셔먹기도 했으니까 말이오...
집에오는길에 목이 너무말라 길가의 논두렁에 엎드려 수로의 물을 마시다 우렁을 발견해서 집에 오는
동안 그걸 많이 주워서 집에서 우렁을 넣은 조개탕같은 -아직도 그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의문인데.-
우렁탕을 먹었던 기억이 있소.
한번은 야쿠르트 값이 이천삼백원인가 하는데 추운겨울날 애들 다먹는 거 나도 먹겠다고 떼를 써 신청
해 먹고 돈을 갖다주는날 잃어버렸는데 . 아버지한테 밥상뒤집히게 혼나고 쫒겨난 적이 있소.찾아오라고....
또한 겨울날 감기에 걸린 날 낳게 하려고 가루약을 사오셔서 먹으라고 하시는 부모님 앞에서 쓰다고
투정하고 거부하는 내 뺨을 후려치시고는 먹기를 강요했던 적도 있소 . 아버지는 강했던 것이오.
겨울날 이었는데 이불에 오줌을 쌌소.그리 작지 않은 어린애였는데 실수를 한것이오.
아침나절 팬티만 입고 마당의 눈밭에서 떨어야 했소.
아버지한테 젖가락질을 배웠소. 지금은 그누구보다 젖가락질을 잘한다고 자부하고 있소.
그렇다고 아버지를 미워하거나 증오한다던지 다른 맘을 갖어본 적은 결코 없소.난 아버지를 사랑한다오.
아버지는 그렇듯 위엄하셨소.힘이 있었고 힘 못지않은 뭔가가 있었던 것인데 아직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닿지 못했소.아마 내가 아이를 낳아 그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면 그때즈음이면 느끼지 않을까 생각해 보오.
조그만 했을때까지만도 나보다 힘이 쎄다는걸 인정해야먄 했고, 그 위상에 젖어야만 했소. 그리고 항상 열심히셨소. 너무도 충실한 아버지셨던것이오..
거기에 맞추기는 힘든 어린 꼬마는 보여지는 데서만 충실하고 홀로 있을때면 벗어나고 싶었소.
일요일이면 소마굿간-소가 사는 우리-의 청소를 했는데 그건 내몫이었소 ..언제나 누군가 도움을 주려 하면 난 '내일'이기에 절대 도움을 거부했소.
내가 할수 있으면 내 혼자 하고싶었소.충실함을 표현할 수 있는 한가지 였소.보답이라면 그걸로 모든걸 갚고싶었소
일탈을 꿈꾸며 공부한답시고 엎드려 라디오를 듣기 시작했소. 누나들중 누군가 자기가 쓰던 라디오를
시골에 버렸던 것인데.. 짜마추기로 스피커를 연결하고 이어폰을 연결해서 밤이면 공부를 한답시고..
그렇지만 그러면서도 국민학교 다닐때는 우등상도..학급회장.. 체육부장등을 역임해 본 기억도 있소.
고학년이 되면서 더욱 일탈의 꿈은 먼것처럼만 느껴지고 홀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소.
낚시를 시작했소.. 밤거리를 -주로 저수지가는 길과 저수지의뚝길- 걷곤 하며 하늘의 떠다니는 달을 봤소.비를 맞으며 소리를 질렀소...
<1994.9.12>
월요일.
오늘은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국어 자습서를 보니 낱말뜻에 '배회'하는 낱말이 눈에 들어 왔다. '목적없이 이리저리 거닐며 돌아다님'
참 한심한 일인것 같다. 근데 갑자기 내가 그러는 것 같다는걸 느꼈다. 왜일까? 왜 나는 배회하고 있는걸까? 왜 나는 배회해야만 하는가?
공부가 안돼. 내일, 모레, 글피..시험 (모의고사) 9월말고사도 모의고사에 대치. 미쳐, 자신이 없다. 이런 삶이라면 난 그만두고 싶다.
시간나면 배회, 아니 언제나 난 배회하고 있다. 한심스럽게....
낚시는 한낮에 파리를 끼운 바늘을 드리우고 있으면 물리는 물고기가 재미있었소..어느 여름방학에는 하나밖에 없는 형과
대나무로 만든 낚시대를 들고 주전자를 들고 낚시를 가서 잡았는데 두시간도 못되서 한주전자를 꽉채운적이 있소. 우리형님은
고기를 정말 잘 잡소. 형이 잡으면 난 바늘에서 고기를 떼기 바빴소. 그렇지만 그건 형님과 낚시할 때였소.
차차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물고기를 잡기 위함이 아니라 그져 낚시가 하고싶은 이유는 다른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는데 .고기잡는일 말고..그건.그 기다림의 ..고요함의 ...평온하고 조용함의 느낌이었소....
시간이 날때면 빈병을 수거해서 맥주병은 삼십원 소주병은 이십원씩 받아 용돈을 벌기도 했었소.
그리고 소를 냇가의 풀이 많은 곳에 매두기도 하고..깔 -소가 먹을 풀- 을 낫으로 베오기도하고 ,
날좋은 봄날은 가리나무-마른솔잎-를 포대에다 긁어모아 오기도 했고.겨울엔 생솔잎을 베다가
염소에게 뜯기기도 했었소.또한번의 어느 여름에는 마당의 가장자리에 거름을 모아두었는데 그앞에다가 볍씨를 몇알 뿌리고
형님과 난 마루에 조그만 돌맹이를 준비해두고 기다리다가 참새가 앉으면 잽사게 던져서 맞고 기절하는 참새를 잡기도 했소.
잡아놓은 참새는 그날 저녁 아버지 막걸리 안주가 되기도 하고 한점 떼어서 소금에 찍어 주시는 아버지께 감사했소.
그건 그 어떤 고기보다 보드랍고 달콤새콤이었소.
오학년정도 됐을 무렵이었소. 서울서 이모랑 동생이랑 사는 사촌여동생이 있는데 나보다 늦게 석달정도 늦게태어난
이모의 딸이 그녀의 친구들을 데리고 시골이라고 왔었소. 여름방학이었을 거요. 낮에는 냇가에 물장구를 쳤
는데 누군가 슬리퍼를 놓쳤고 . 떠내려가는 슬리퍼를 수영을 해서 힘껏 따라가 건져준 기억이 오랬동안 남았소.
저녁에는 또 누군가 주사를 맞았던 친구가 있었고 아마 어딘가 안좋았던 아이인 모양이오. 또 한아이는 불면증이 있다고
잠을 이루지 못했던 친구도 있었소. 한여름의 밤하늘은 별이 쏟아질듯 많았고 아름다웠는데 ..작은 나이임에도
잠시 그녀와 와상- 평상-에 누워 밤하늘을 감상하는 시간이 있었소. 그리고 그들이 가는 날 내게
우리집의 대문풍경이 거기엔 경운기도 탈곡기도, 그리고 내방인 건너방이 그려진 그림이 남았소. 몇일이고 몇달이고 조그만 건넛방에 붙여놨었는데 .좋은 추억을 잊지 않으려 함이었을 것이오.
중학교에 들어섰을때. 새로보는 친구들도 있고 여태 봐오던 친구들도 있었소. 새로운걸 경험하는건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것처럼 좋은 기분이기도 하다고 생각하던차에. 영어를 배운다는건 기분좋은 일이었소.
처음으로 대한는 흥미롭움 때문에 좋아했었소.그렇다고 잘하지는 못했지만.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들으며 팝을 좋아하게 되었소.
난 배철수가 속했던 솔개의 '솔개'라는 노래도 좋아하오.그리고 배철수가 진행하는 음악캠프도 좋아하게 되었소..그때들었던 리챠드막스의 NOW AND FOREVER를 아직도 좋아하오. 아끼고 좋아하는 노래가 됐소.
점심시간 전에 도시락을 까먹기도 하고 점심때는 밥만싸와서 매점으로 달려가 라면을 끓여 밥하고 먹기도 했소.그저 조용하다는건 어떤 아이들 마냥 공부만 하는 아님 놀기만 하는 아이들하고 틀리다는 것밖에 안될지도 모르겠소.
집에 오는길에 야간학습이 끝나고 집으로 올때쯤 우리 친구들 여섯은 모두 같이 걸어오곤했소 . 아마 중삼이었을 것이오.
이제는 2~30분 걸리는 거리를 하늘의 별을 보고 달을 보고 고함치고 수다떨고 하면서 우정이 싹터가는듯 했소.
가끔 난 맥주도 한잔 했던 것 같소. 비가 오는 날이면 우산을 뿌리치고 속옷까지 젖도록 맞고 오곤 했었소.
우리 동네 애들 말고는 거의 다른 이성과는 말을 하지 못했소.그저 아무말 하지 못했소..두근거림으로 ...
<1994.12.9>금요일
오늘 국어선생님께서 안 오셨다. 영어선생님이 두번 들어오셨다. 1교시4교시
내가 사탕을 드렸다. 맛있게 잡수시는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남자 애들에게 사탕 한개씩 주었다. 여자애들도 주려고 했는데
그게..주지 못하고 내가 모두 먹었다. 약 50여개를 오늘 먹었다.크윽~.
어제 아버지가 주신 사탕을 공부는 안하고 짜식이..
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소. 일기를 쓰기도 편지를 쓰기도 했소. 국민학교 오학년때 만난 서울 친구
들한테 가끔이나마 편지를 주고 받았었고 . 그리고 누나들이 가끔씩 보내준 편지를 받아보곤 답장을
쓰기도 했소. 펜팔이라는 것이 흥미로웠소 얼굴을 보지않으니 두근거림이 그렇게 심하지 않았으니.
라디오 프로그램에 사연을 보내기도 했소..소설책도 읽기 시작했소.j.w.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란책이 맘에 들었소.
그리고는 같은반 여자애들을 보면 두근거리는 맘을달랠 수가 없었소.말이라도 걸어올라치면 고개를 돌리곤 했소.
<1994.9.16>
지금은 자율학습 보충수업시간이다. 수학 선생님은 지금 앞에서 마구 떠들고 있지만 아무것도 내겐 들어오지 않는다.
왜일까? 오늘은 무슨일이 있는지 어수선하다..수학 선생님은 뭐가 저리 급한지.......
뒤에서 누가 잡아먹을려고 쫒아오는 것처럼 도망치는 사람처럼. 머리아프게 떠들며 그걸 또 응시하며 귀를 기울리는 애들은
또 뭐인가? 나도 그들 중 한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건 또 뭔가?
저 앞에 도망자처럼 쫒기는 저 선생님과 함께 난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것 같다.그래도.........
중삼때 한번은 성적이 많이 떨어졌소. 난 컨닝을 하지 못하오. 할려고 하면 심장이 두배 세배는 뛰는것같소.
지금도 거짓말을 할때는 그러하오..그러다 시간 다 뺏기지 싶어 아예 하지 않소.
한번은 갑자기 떨어진 성적에 선생님은 나에게 학급의 친구들중 가장 많은 숫자의 매를 내 종아리에 부었소. 하지만 맞고서도 아프긴 했지만 선생님이 싫진 않았소.오히려 열정의 소유자인만큼 멋있었소.
<1994.9.29>
목요일
오늘 아침 난 감 16개를 선생님 책상 옆에 두었다. 와서는 누가 가져다 놨냐고 물어보는데 이렇게 떨리기는 아직 없었던것 같다.
어제 밤에 맹구와 다퉜다. 근데 그 놈이 꼴이나서 말도 안한다. 난 잘 못한것도 없이 어제 화를 냈으나 오늘 어제 너무한거 같아서
3반에 가서 맹구한테 사과했으나, 나쁜놈이 말시키지 말래. 참내. 웃겨서 말이 안나오네..
이젠 친구사이가 깨진것 같다. 오늘은 재수가 없나 보다.
-그 선생님은 그 때 담임인선생님으로 내게 가장 많은 매를 주신 분이셨고, 맹구라는 애는 우리동네 내 둘도 없는 고향친구라오..-
<1994.9.26>
월요일.
오늘.어제인가? 어째든 사회선생님(장만익) 아버님께서 별고하셨대. 안됐지만 사회선생님이 안온다는게 다행인것 같다. 이런생각
을 하는것 만으로도 나쁜놈인데 . 이런 글을 썼으니 난 더 나쁜놈이다. 김은숙-같은반 여자애인듯하오- 아버지도 돌아가셨대.
혈압으로..오늘 2교시부터 졸업사진 찍었는데 찍으로 나가서 그 소식을 들었다. 불쌍해 죽것다.
난 아직도 배회하고 있다. 이러는 내가 싫지만, 어떻게. 나는 몰라. 오후 저녁식사시간 난 또 나쁜짓(짤짜리)를 해서 돈을 펐다.
난 부모님께 엄청난 죄를 짓고 만 것이다. 엄청난 중죄를 . 부모님에게 뿐만 아니라 내 자신에게도.. 언젠가부터 난 그 놀음에 눈이
멀어 계속 일기에 쓰지도 않고 했고 또 잃었다. 이런 사실도 모르고 부모님께선 열심히 공부하고 오신줄 아시고 토닥거려 주시며 애쓴
다고 , 밤잠도 설치시고 난 뭐야.. 죽일놈 공부는 지질이도 못하면서 괜히 돈만 축내고 다니는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 되어버린게 아닌가?
나는 이런 중죄를 짓어놓고도 집에 돌아가면 아무일 없는것처럼 그냥 그렇게 또 부모님 품속을 파고 들지 않는가?
난 진정 벌레만도 못한 나쁜놈이다. 난 내가 이런 나쁜 놈인줄 알면서도 난 내 이런 나를 고치려 하지 않는걸까? 싫으면서도....
엄마.빤 밤을 팔아서 얼마, 또 뭘 팔고 해서 조금씩 조금씩 돈을 모아서 날 주면, 땡볕아래서 비오는듯한 땀을 흘리며 돈 벌어 오셔서
날 주면, 난 그돈을 그 땀에 젖은 돈을 놀음에 마구 뿌려버리고 아무일 없는 것처럼 돈적게 준다고 투정이나 하고 난 정말 나쁜놈이라고
난, 내가 돈을 꼴았음에도 불구하고 난 그 돈을 되돌려 받기를 그애들이 돌려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 얼마나 바보같은생각.....
죽도록 맞고 싶다. 아님 죽든가? . 살 의욕이 생기질 않는다. 살기 싫다. 이런 나쁜놈 언제나 , 언제나 난 나쁜놈이다..
앞으로도 그럴것 같다. 그런 놈으론 살 가치가 없을 것이다. 죽어야 할 것이다. 일찍 죽어야지. 그야하구말구.
하느님이여 계시다면 나에게 천벌을 내리소서(진실이오..)
<1994.10.24>
일요일.
오늘 난 감을 땄다. 저녁때 아니 밤..민범이와 석신이가 찾아왔다. 서로 장기를 한 판 두고 나갔다.
석신이 집으로 가서 통닭 시켜 먹고 (이것은 어제 민범이 생일이었다고) 민범이가 부담했다. 우리셋만 먹었다.
지금까지 화투놀이하다가 왔다. 팔뚝맞기로 했는데 난 죽도록 얻어 맞고 한대도 때리지 못하고 왔다. 지금시각 11:16....
<1994.12.31.마지막날.>
오늘 94년 마지막날, 올 한해 동안 난 무엇을 했는가/? 남아있는게 무엇인가 ? 비교적 바르게 살았는가?no
한심하다 .진정으로 해놓은게 아무것도 없다는 말인가? 정말로 한심하도다.
오후. 난 또 후회할 만한 나쁜짓을 했다. 놀음. 화투놀이 오후에 돈을 너무 많이 잃었다. 하지만 방금 조금 전까지 해서 다시 본전을
찾았다. 쬐끔 꼴았다. 지금 12시.43분..12시 종치는걸 봤다. 멋있었다.땡~~땡~~.....집으로 와서 라디오 듣고 있다. 조금 전까지
휘관이 형집에 있다가 형만 몽땅 꼴아버린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고.내가 천원 줬어 나도 꼴았는데도 ..(돈쌧다.)
지금은 1월 1일이다.1995년..돼지띠의해.
고등학교를 들어갔소.
혼자서 살아가기가 벅찼소.소심한 성격에 홀로 외로운 밤을 보내기가 길고도 먼 나날이었소. 그나마 순한 친구들을 몇 사귀기도 했소.
아직도 그들은 내게 좋은 친구로 자리매김하고 언제라도 반갑게 연락을 주고 받고 있소. 하지만 군대가서는 모든 친구들이 과연 이만큼 소중한 친구들인지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고 나 스스로를 의심하며 내가 그들에게 그만큼 좋은 친구가 되는가를 부끄럽게 여기게 되었소.
일학년 처음으로 독립을 축하하며 포도주를 사서 축배를 들었소..아르바이트를 시작했소. 레스토랑에서..얼마안되서 쫒겨나기직전 관두고 나왔는데.
얼마 안되는 봉급을 받아봤소. 생활비를 그렇게 마련했소.그런 와중에 난 극장을 찾게 됐고 , 영화를 볼때면 내가 주인공으로 동화되어 풀어나가는 흥미진진함을 만끽하게 되었소.그뒤로도 아직까지 난 영화를 좋아하고 있소 매니아는 안되더라도 마니아 정도는 될것을 보고 있소.그때 나이의 최대 흥미거리인 삼류영화도 즐겨봤던 기억이 있소.두편정도 동시상영하는것이었고 배우는 옷을 즐겨 벗는듯했소.
그후로는 노래방 ..당구장..커피숍..신무돌리기..호프집을 전전하며 아르바이트를 했소.그리고 노가다도 나가면서 학비며 생활비를 충당했소.
고등학교를 다니던 때라 방과후면 그렇게 시간을 보냈소.야간 학습이며 자율학습이 없었소. 공업고등학교의 특성이었던 것이오.
기계과 용접을 전공했는데 ..쇠붙이를 붙이고 붙인부분의 볼록 튀어나온 부분을 그라인딩 하는 작업에서 가장 친한 친구하나가
그라인더의 칼날 부분이 깨져 튕겨나가서 다리를 다치게 했소.그친구를 업고 병원으로 뛰어가는 내가 더 정신이 없었던 기억이 있소.그친구는
이세상 둘도 없는 지금의 내 사랑하는 친구요.시골서 깨벗고 같이 물장구 치는 친구들 외에 말이오.
그리고 비가오는 날이면 자취방에 친구들의 방문이 잦아졌소.비를 좋아하는 나였고 술을 좋아하는 나였기에 비가왔다치면 막걸리 한병들고오는
소주한병 들고오는 친구들이 생겼소. 난 시골서 가져온 신김치에 우리동네에서 생산한 우리밀공장 일호의 우리밀가루를 섞어 김치전을 만들곤 했소.
친구들은 맛있다고 너무 좋아했었던 기억이 있소.신김치 볶아서 두부한모 사서 두부김치도 좋은 안주거리였소.
처음 여자친구를 사귄건 고2때 4~5월쯤이었을거요. 옆방사는 친구가 여자애들을 많이 데리고 왔소.그리고 술을 먹고 취했소.그들중 한명이.....그렇지만 난
여자를 사귀는데 서툴렀고 여자애와 말을 해본것이 이때가 처음이었던것인데 ..행동까지 자연스럽게 사귀는건 무리였소.아무일도 없이 하지만 서로 좋아함을
알것도 같았고 집이 가까웠던 터라 저녁에도 가끔 들르곤 했고 만날때마다 뜨거운 키스로 확인했지만 그이상 아무일도 없었소.그리곤 부산으로 이사가버렸소.
여자도 아마 고3때였을 거요.처음 알게 되었소. 계기는 알수 없지만 스승의 날 전후로 해서 한번 만났는데 비가 왔소 , 술을 마시고.그리고는 알게 됐던것 같소.
그후로도 몇번 여자를 사귄적이 있소.물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였지만 말이오.
인천으로 학기말에 공장 현장실습을 나갔소..아예 눌러 약 10개월 공장에 다녔소.봉급을 받았고 ..숙식을 제공받고..보험도 하나 들었소.
그러다 IMF로 인해 어려운 시기에 그만두고 지방으로 내려왔소. 광주..형님과 누님과 같이 살았소.소주방 일을 했소..사장도 좋아했고.손님들도 좋아했소.
누님은 내게 학교를 권했고. 방통대 불어불문학과에 입학했소. 학교에서도 오랜만의 영계라고 좋아들 했소.열심히 한다고 했소.
밤에는 소주방을 다니고 낮에는 학교를 갔소. 손님들 중에는 인상이 좋다며 명함을 주고..또는 연락처를 남기는 손님이 꾀 있었소. 대학가였는데..
그중에 자주오는 여자손님이 내가 맘에 든다는 거였소.그래서 사귀기로 해고 몇개월 사귄적이 있소.뽀뽀를 잘 하는 친구였소.스스로 자부하는 노래도 잘하는 친구였소.
그리고 영장을 받았소. 그때쯤 아마 여자친구를 사귀기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건데 포경수술을 했소. 봉급받은걸로..
영장받은 걸로 모든걸 접었소. 별탈없이 이때까지 흐르는 시간을 그렇게 보냈소. 그렇게 성인이 되어가며 술을 마시고 담배를 태우면서 내 몸을 망가뜨리고 있었소.
도약의 길을 걷고 싶었소. 발판을 삼을 시간이 필요하고 준비해야 할것 같았소. 군에가서 2년 4개월 있어봐야 큰 힘을 얻을 수 있을것 같지 않았소.인생은 내가 그렇게 살아온 날보다 더 긴시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오.
그래서 특전사에 지원했소.예전엔 공수부대로 통했던 그 부대말이오..사년 육개월간의 시간을 벌기로 했소. 그렇게 마음 먹고 실천에 옮겼소. 결국 그 시간이 벌었다고는 볼수 없는 시간이 되어버린듯 싶지만.부대 있는 동안이 길었고 또 한창 젊음의 시기인터라-아직 젊음의 극치를 달리고 있지만-할말이 많소.지겹더라도 들어주기 바라오.
군에서는 그랬소. 난 이토록 별탈없이 순탄한 생을 즐기면서도 괜스레 안타까움에 괴로워하며 불만을 심어가는 그런 생활이었소.그러다 군에가서는... 원했지만 알지 못하는 그런 무모함이었고 결국 뜻밖의 고생이 었던 것이오. 힘에 부쳤소. 난 그리 힘이 쎄지도 강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은 평범의 그 자체였지만 군은 그걸 바라는게 아니었고 난 그걸 발판삼으려 했지만 그건 발판이 아니었고 그저 올라야만 하는 산속의 계단이었소 ...난 버티기 바빴던 거요.
그저 전통적인 부모님과 선조들에게 타고난 고집하나로 참아 버틴것이오. 난 이겨내려고 이겨서 내것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그건 내가 이겨낸것이 아닌 참고 참아 ...버티기 작전으로 견뎌냈던것 뿐이오. 아무것도 남은것없이 그저 그 사년육개월을 버틴것이라오.그러면서 생긴 버릇이나 습관이라 함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기 짝이 없지만 난 그런 습관과 안타까움이 남을 뿐이라오.
첫휴가 나와서일거요.아마 난 걸죽하게 한잔 하고싶었을 거요. 그래서 술집을 찾고 술을 마셨을 거요. 그리고는 여관에 가서 잠을 청했을 것이고 여자가 그리워 아가씨를 찾았을 거요. 군인들이 많이들 그렇다는 건 익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오.난 그 전형적인 단계를 밟았던 것이라 생각하오.-그렇다고 모든 군인들이 그렇다는건 아니오.-군인을 군바리로 부르는건 '바리'일본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계급사회에 있어서 아래중에서 아래계급을 낮추어 부르는 그런 단어로 알고 있는데 여관에도 여관바리라는 call girl이 있었던거요. 외로운 밤을 달래기 위해 부르는 아가씨인것이오. 그렇게 하룻밤을 달래는 아가씨를 찾고 또는 서울은 그런데가 많은데 많이 다녀본 것은 아니지만 말은 많이 들어 봤소. 이쁘고 또는 젊고. 또는 servise가 좋다는 그런곳말이오. 어째거나 난 그렇게 술을 먹고 여자를 찾고 그렇게 휴가를 보내곤 했소. 집이 멀기에 짧은 휴가에는 집에가기도 힘들었던 터라 그런때면 그런 일이 자꾸 생겼던 거요.
난 술을 마시지 않으면 그 사랑이라는 행위를 하지 못할 것 같소 ..설마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부끄러움 그리고 미안함 때문이겠지만.
그렇지 않고 직업여성이라면 더욱더 불쾌한 감정과 또한 한 성인된 남자로써 할 짓이 아니라는걸 알기 때문이오.
잘못하는 일이라는걸 알면서 행하는 행위는 모르고 하는 것보다 더욱 나쁘다는 걸 더욱 절실히 느끼고 알기때문에..행위가 끝난후의
안타까움이 많이 남아서일거요. 오늘날 이 글을 쓰는 궁극적인 목적일 수도 있소. 이것은 단순한 것이 아닐거요.어쩌면 난 이 말을 하기 위해 이 글을 시작했는지도 모르겠소. 이때문에 더욱 내 삶이 맘에 안들었는지도 .. 그래서 그 누군가 이 글을 읽는 독자는 이렇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일 것인지도 ...모든건 추측에서 그저 내 머릿속에서 시작하고 그리고 이렇게 표현하는것 또한 내 머릿속에서 끝나는 것이오.
하지만 오늘은 이렇게 당신에게 말하는 것이오.내 머릿속을 내 비춰 주는 것이오 당신이 뭔가를 느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현재.>
난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소. 누군가 이렇듯 아무런 술렁임없이 자라온 숨여섯의 젊은 청춘에게..
너무 순탄하고 깊이 빠지지 못하는 얽매임이 없는 인생에게..
과연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 지금의 내모습으로 비추어 볼때
난 어디에도 빠지지 않고 사랑도, 공부도, 취미도, 어느것 하나 제대로 해나가지 못해고
할 줄 아는것 없이 이것저것 바람만 들어 귀에 구멍뚫고 머리를 기르고 ..
멋진 친구들의 뒷꽁무니를 쫒아 그들의 여유를 쫒아 헤매이고 방황하고 저녁이면 알코올에.,니코틴에., 도박에
빠져들고 마는 안타까운 청춘으로서....
그름을 알고서도 행하는.. 옳음을 알고서도 행하지 못하는 어리석은자여..
그대는 지금 뭘하고 있는가?
그대가 할 수 있는게 과연 무엇인가?
그대는 앞으로 무엇을 할 계획인가?
그대는 여태 뭘 했는가? 뭘 해놓았는가?
지금에야 바라보는 그 시선을 내가 집중할 수있는 무언가에 내가 할수 있는 무언가에
투자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최선을 다할 수있는 정열이 그대에게는 있지 않는가?
내 시선이 가는 그 곳에 내가 뭐든 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는가?
그 의지는 사라졌는가? 의지만으로 뭐든 해낼 수있다고 믿었던건 실수 였고 , 앞으로 그 의지에
있는 힘을 모두 투자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젠 사랑에도 빠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주최할 수없는 열정을 내가 하고 픈 일에도
쏟아야 하지 않겠는가? 장래에 당신의 설자릴 마련해야 하지 않겠는가/?
난 지금 이런 생각을 하오. 이제는 그러하오. 조금씩 내 맘속에 꿈틀대는 뭔가가 보이기 시작하고 있소. 그래서 난 그 꿈틀대는 그 맘이 가는 목적지를 향해서 난 노력을 해야하겠다는 미래에 내가 해놓아야 할 일들을 이뤄가는 과정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오.물론 완벽하지 않고 허술하기 그지 없지만,체계적이지도 못하고 확실하지 않지만말이오..지금 그걸 위해 노력해야 하는 시기에 시간적으로 투자를 할 여유가 그리 많지 않다는걸 ..혹시 그건 괜스레 느끼는 조급함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기 보다는 난 그렇게 생각하고 싶소 .이제는 이렇게 임박해 있고 난 내가 해 놓아야 할 일이 지금 보이는 가운데 거기에 맞춰 노력해야 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오. 하지만 내가 조금더 일찍 생각해봤었다면 그만큼 준비하는 시간을 충분히 갖을수 있지 않았을까는 것이오.
당신은 지금 시작해야 할 것이오.늦었다고 생각할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도 있지않소.
나또한 이제 그런 느낌을 갖지만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소. 어르신들은 넌 빠르고도 빠른 시기이라고 웃을 수도 있을것이오.하지만 많은 인생들이 그러하듯. 사람마다 다같은 인생은 하나도 없을뿐더러 살아가는 방식마저 천차만별이라고 생각하오.이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에서 더욱 새롭게 태어나리라 보는 내 개인적인 생각이오.
첫댓글길다~그러나 길지 않게 읽었소~뭐랄까~같은 남자로서 100% 같을순 없겠지만~대한민국 남자의 표준형을 보는 것 같소~그리 잘난 님도~또한 못난 님도 아니구려~내가 힘들면 옆에 있는 내 또래도 똑 같이 힘든법인데~나만 먼저 포기하면 누가 좋아지겠소~지금 출발점에 서서 인생을 다시 시작하려는 님께 박수를 쳐주고 싶소~
첫댓글 길다~그러나 길지 않게 읽었소~뭐랄까~같은 남자로서 100% 같을순 없겠지만~대한민국 남자의 표준형을 보는 것 같소~그리 잘난 님도~또한 못난 님도 아니구려~내가 힘들면 옆에 있는 내 또래도 똑 같이 힘든법인데~나만 먼저 포기하면 누가 좋아지겠소~지금 출발점에 서서 인생을 다시 시작하려는 님께 박수를 쳐주고 싶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