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란 기본적으로 오락으로 인식되어 있지만 사실상 영화의 기능은
다양하다. 영화가 드라마가 되기 전에 그 기본기능은 어떤 이미지를
기록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다큐멘터리야말로 영상이라는 매체의 가장 순수한 형태일 것이다. 때때로 극영화들 중에서도 일종의 세미다큐멘터리 성격을 띠는 영화가 있다. ‘불을 찾아서’는 전적으로
하나의 허구이며 드라마지만, 그 허구가 선사시대의 생생한 모습을
그대로 전달하려는 목적을 띤다는 점에서 일종의 다큐멘터리적인 성격을 갖는다. 기록이 아닌데도 일종의 기록처럼 느껴지는 영화인 것이다.
▲‘불을 찾아’ 떠나는 우람족 세사람
이영화는 몇만년 전의 인간들, 즉 직립, 원시적 옷, 도구 사용, 원시언어, 사회생활 등 가장 기본적인 생존조건을 갖추게 된 인간들이 본격적으로 ‘인간적인 것들’을 발견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2001년 스페이스 오딧세이’ 초반에서 그리고 있는 시대보다는 좀더
후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전체는 불을 잃은 후 ‘불을
찾아’ 떠나고 불을 찾은 뒤 다시 돌아오는 여정을 그리고 있지만, 그
사이를 메우고 있는 것은 인간이 어떻게 정말 인간이 되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단순히 생물학적 의미의 인간에서 벗어나 종교, 문학, 정치,
웃음, 제의(祭儀), 사랑, 사유를 갖추게 된 그런 인간의 탄생이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불이 인간 생존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었던 시절, 우람족이라는 한
원시종족의 일상사가 그려진다. 동물의 가죽을 사용한 옷들, 나무를
깎아 만든 무기들, 불을 가운데 두고서 무리를 이루어 자는 모습들이
그려진다. 그러던 중 네안데르탈인들이 쳐들어오고 그 과정에서 우람족은 보금자리에서 쫓겨나 늪지대에 머물게 된다. 가장 절망적인 것은 불이 꺼졌다는 사실이다. 부족의 노인은 세 사람의 용사들(나오, 아무카르, 고무)에게 불을 찾아오라는 특명을 내린다.
▲천신만고끝에 이룬 사랑의 결실
세명의 용사는 사자들에게 쫓겨 나무 위에서 잠자기도 하고, 또 늪에
빠지기도 하면서 정처없이 불을 찾아 다닌다. 그러던 중 멀리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발견하고 불을 사용하는 종족이 있음을 알게 된다. 나오, 아무카르, 고무는 이 식인종들을 급습해 불을 얻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그 종족에게 붙잡혀 있던 또 다른 부족의 한 처녀인 이카를 구하게 된다. 이후 영화는 주인공 나오와 이카의 사랑이야기에 초점을
맞춘다. 물론 현대인의 사랑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띠게 되지만.
뒤쫓아온 식인종들이 그들을 급습하려 할 때, 한 무리의 거대한 코끼리 떼(의 조상)가 나타난다. 이때 나오는 이 무리의 우두머리에게 풀을
바침으로써 위기를 모면하게 되며 식인종들도 쫓아내게 된다. 이것은
곧 종교의 탄생을 암시한다. 경외스러운 존재에게 제의물(祭儀物)을
바치는 행위를 통해 종교가 탄생한 것이다. 또 그들을 따라온 다른 부족의 처녀는 아무카르의 머리에 돌멩이가 떨어진 것을 보고 웃음을
터뜨린다. 세명의 용사는 웃는 모습을 처음 보았기 때문에 놀란다. 웃음이야말로 또 하나의 인간적인 것인 것이다. 처녀가 웃는 것을 보고
세명의 용사들은 함께 웃는다. 함께 웃을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나오를 따라가던 이카는 자신의 부족에 가까이 왔음을 알고서 그 부족한테로 돌아간다. 나오 일행도 그들의 길을 떠난다. 그러나 길을 가던 나오는 문득 이카가 생각나고 다시 발걸음을 옮겨 이카가 떠난 곳으로 간다. 오로지 순간적 충동이나 종족 보존이라는 이유만으로 성행위를 하던 원시시대에 처음으로 진정한 사랑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나오가 이카와 같이 누웠던 자리에 누워 이카를 그리워하는 모습은
인간에게 사랑의 감정이 탄생하는 순간을 그린 감동적인 장면이다.
이카의 부족을 찾아간 나오는 거기에서 놀라운 것을 배우게 되는데,
바로 불을 만드는 방식이다. 이미 있는 불을 빼앗거나 보존하는 것이
전부였던 우람 부족에게 처음으로 불을 만드는 방식이 알려진 것이다. 막대기를 비벼 불은 만드는 것을 처음 본 나오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나오는 이 부족에게 동화되어 일종의 씨받이가 된다. 아무카르와 고무는 이런 나오를 구출해 자신들의 부족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늪에 빠진 이들을 이카가 구해 준다. 그리고 이카는 나오를 따라
우람족에게 가게 된다. 이카와 나오는 사랑을 나누는데 이카는 나오를 정면에서 끌어안는다. 다른 짐승들처럼 후미에서 성교를 하던 인간이 처음으로 서로 얼굴을 마주보면서 성교를 하게 된 것이다.
▲‘인간적인 것들’의 소중함 일깨워
어렵게 우람족에게 거의 다온 나오 일행에게 같은 종족의 다른 경쟁자가 나타난다. 그들의 대장은 원래 나오를 제치고 불을 찾겠다고 나섰으나 노인이 나오에게 책임을 맡기는 바람에 기회를 뺏긴 자이다.
이 자는 나오의 불을 가로채 자신이 공을 세우려 하며, 이것은 곧 권력·정치의 탄생을 암시한다. 그러나 나오 일행은 이카의 종족에게 배운 더 세련된 무기로 이들을 때려눕힌다. 권력 싸움과 전쟁, 그리고 테크놀로지를 사용한 살인 등 앞으로 인류문명을 수놓을 요소들이 여기에서 선명하게 그려진다.
부족에게 도달한 나오는 그들에게 불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치려 하나
잘 되지 않는다. 그때 이카가 나와 불을 만든다. 그 과정을 통해서 이카는 우람족에게 받아들여진다. 말하자면 최초의 결혼인 것이다. 이카는 나오의 아이를 배게 되고, 나오는 이카의 배를 보면서 생명에 대한 경외스러운 감정을 가지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오와
이카는 서로를 끌어안고 밝게 빛나는 보름달을 바라본다. 꿈과 사랑과 미래를 가진 형이상학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탄생하는 감동적인 광경이다.
‘불을 찾아서’는 인간이 어떻게 ‘인간적인 것들’을 가질 수 있게
되었는가를 묘사함으로써, 우리에게 우리가 가진 기본적인 인간적 조건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들인가를 새삼 뒤돌아보게 만든다. 어른들이
어린아이들을 보면서 새삼 인생을 배우듯이, 현대인은 원시인들을 보면서 새삼 인간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 작품 소개
‘불을 찾아서(Quest for Fire)’는 ‘베어’를 만든 장 자크 아노 감독의 1982년 작품으로, 독특한 소재를 즐겨 다루는 아노 감독의 솜씨가 잘 나타나 있다. 국제자본으로 만든 작품으로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어떻게 분업을 맡았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다.
/이정우·철학박사/철학아카데미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