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에 임자도에 온 김에 대광 해수욕장을 들른다. 해수욕장이 꽤나 크고 모래사장이 너무 좋다. 그곳에서 점심을 먹고 진리 선착장으로 도착하니 배 시간이 30분정도 남아 있다. 선착장 주변을 구경하다가 ‘임자면 관광 안내도’ 와 함께 ‘문화관광부 선정 2004년 1월 문화인물 우봉 조희룡 유적지 안내’라는 제목 아래 써진 안내판을 보았다.
‘ 조선 문인화가의 대가 우봉 조희룡(1789-1866)은 자신이 3년간 유배생활을 했던 임자도 이흑암리의 바닷가 오두막집을 ’만 마리의 갈매기가 우짖는 집‘이라는 의미의 만구음관이라 명명하고 시서화 활동에 전념하였다.
일찍이 우봉는 중인층 예술인들과 함께 벽오시사를 결성하여 조선적 문인화의 세계를 개척하였다. 그의 화론은 이념 보다는 기량을 중시하는 수예론(手藝論)과 그림 그리는 행위 자체에서 즐거움을 찾고자하는 유희론(遊戱論)을 내세웠고, 남의 뒤를 따르지 않는 ‘불긍거후(不肯車後)’의 독창적인 화법을 구사하였다.
우봉이 임자도에 유배온 것이 1851년 8월이었다. 그의 나이 63때였다. 세도정치가 판치던 암울한 시기에 권력다툼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우봉은 그의 황당하고 쓸쓸한 마음을 유배지 주위의 자연을 그리는 것으로 달랬다. 이런 그의 심정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그림이 ‘거친 산, 찬 구름 그림‘이라는 의미의 황산냉운도이다. 차차로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되자 우봉은 임자도의 바위를 그리면서 새로운 화법을 개발하고, 자신의 그림 생애를 뒤돌아보며 화론을 집대성하였다.
그런 우봉의 3년간 유배생활을 한 만구음관은, 소치 허련이 정통 남종 문인화를 집대성한 진도 운림산방과 쌍벽을 이루는 , 조선적 문인화의 메카로 내세워서 전혀 손색이 없다.
이 안내문에도 이흑암리에 있는 기념비와 마찬가지로 ‘조선적 문인화의 세계를 개척’ 하였다는 문구와 ‘수예론’ 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다. 도대체 조선적문인화는 무엇이며 수예론은 무엇인가? 남종 문인화와 조선적 문인화는 어떻게 다른가?
이에 대한 해답은 추사 김정희와 우봉 조희룡의 예술관에서 찾을 수 있다. 제주도에서 유배를 살던 시절 추사는 그의 서자 김상우에게 이런 편지를 쓴다.
‘ 난초를 치는 법은 또한 예서를 쓰는 법과 가까워서 반드시 문자향과 서권기가 있은 다음에야 얻을 수 있다. 또 난을 치는 법은 그림 그리는 법칙대로 하는 것을 가장 꺼린다. 만약 그림 그리는 법칙을 쓰려면 일필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조희룡 같은 무리는 나에게서 난초 치는 법을 배웠으나 끝내 그림 그리는 법칙 한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의 가슴속에 문자의 향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위 글은 이른바 문자향(文字香 :문자의 향기)과 서권기( 書卷氣 : 책의 기운)가 있어야 문인화 라는 추사의 화론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글이다. 그런데 ‘조희룡 같은 무리는 난초치는 법을 그림 그리듯이 하고 있다’ 했는데, 여기서 그림 그리는 법칙이 바로 손재주 즉 수예(手藝)이다. 다시 말하면 추사는 전통적인 남종 문인화의 문자향과 서권기를 중요시 여긴 반면에 조희룡은 문자향, 서권기 보다는 그림 그리는 재주 즉 손재주(手藝)를 중요시한 것이다. 우봉은 문인화가 비록 사의를 드러내는 것이기는 하나 문자향과 서권기만으로는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는 문인화는 양반들 선비들의 전유물이나 여가로 하는 장르가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예술 장르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자향, 서권기 보다는 손재주(手藝)가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 글씨와 그림은 모두 손재주이다. 재주가 없으면 비록 총명한 사람이 종신토록 배워도 잘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손끝에 있는 것이지 가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저서 석우망년록에서)
( 실제로 그는 매화를 그리는 데 ‘장륙매화(丈六梅花)’를 창안하고 소략하였던 꽃그림에서 수만 송이가 만발한 매화도로 발전시켰다. 이어 선비의 고결함을 상징하던 매화를 대자대비한 부처의 마음으로 탈바꿈 시켰고 더 나아가 매화 줄기의 전체적 구도를 비상하는 용으로 대체함으로써 그림 전체에 격렬한 역동성을 부여하였다.)
그런데 추사가 우봉의 예술을 별로 높이 치지 않는 듯한 이 편지가 ‘완당선생전집’에 실려 조희룡은 예술적 평가에서 큰 상처를 입게 된다. 후세 사람들은 이 글을 추사가 우봉을 공개적으로 비평한 글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한편 추사는 중국 남종 문인화에서 중요시 하는 문자향, 서권기는 학식이 풍부한 선비들에게 있는 것이지 학식이 별로 없는 중인계층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그래서 중인 출신의 조희룡 부류의 사람들이 하는 ‘조선적’ 문인화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을 것이고 그런 생각이 그의 편지에 은연중 나타나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봉은 추사의 그림 수제자요 심복이라고 알려져서 우봉은 추사와 유배를 같이 가는 운명을 맞게 된다. 1851년 강화도령 임금인 철종 3년, 안동김씨가 득세하던 시절에 철종 임금의 친고조부인 진종의 위패를 모시는 것에 대하여 논쟁이 있자 당시 풍양 조씨 계열인 영의정 권돈인은 위패를 모시는 것에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철종은 권돈인(권돈인은 추사의 가장 친한 친구임)과 추사 김정희, 그리고 오규일과 조희룡을 유배 보낸다.
‘ 김정희는 몇 년 전 사면을 받아 귀양에서 풀려났으면 조용히 살 것이지 거리낌 없이 방종하였습니다. 이번 일에도 김정희는 우두머리가 되고 ... 오규일과 조희룡 부자는 액정서 소속으로서 하나는 권돈인의 수족으로 하나는 김정희의 심복으로 삼엄한 곳을 출입하고 어두운 밤에 왕래하면서 긴밀하게 준비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권돈인은 강원도 화천으로 김정희는 제주도 유배이후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조희룡은 신안 임자도로 오규일은 완도 고금도로 유배를 간다. 이 때가 추사가 66세이고 우봉은 63세이었다. 우봉은 1851년 8월에 임자도에 유배되어 1853년 3월에 해배가 된다. 만 19개월간의 유배생활이었다.
한편 우봉의 추사에 대한 예의는 눈물겹다. 1856년 10월 10일 추사가 그의 나이 71세에 별세하였을 때 그는 장례식에서 ‘조희룡이 재배하고 삼가 만사를 드리나이다.’ 란 제목의 만사를 읽으며 통곡했다 한다.
‘ 완당 학사의 수명은 70 하고도 하나
봄이 짧아 오백년 만에 다시 오신 분
천상에서 일찍이 반야의 업을 닦으시다가
인간 세상에 잠시 재상 몸으로 나타나셨네.
강하(江河)와 산악 같은 기운 쏟을 곳 없고
팔뚝 아래 금강석 같은 붓은 신기(神氣)가 있으셨지.
옛 것도 아니고 지금 것도 아닌 별도의 길을 여시어
정신과 능력이 모두 이르신 곳은 금석학 이었고
구름과 번개 무늬는 글씨로 무늬를 덮으셨다......
문물이 빛나고 평화로우면 응당 일이 있는 법
어찌하다 삿갓 쓰고 나막신 신고 비바람 맞으며
바다 밖의 문자를 증명하셨나.
공이시어! 공이시어! 고래를 타고 가셨습니까?
아아! 만 가지 인연이 이제 다 그쳤습니다.
글자향기 땅으로 들어가 매화로 피어나니
이지러진 달, 빈 산속에서 빛을 가리웁니다.
침향목으로 조각한 상(像)은 원래 잘 부쉬지니
백옥으로 속을 쪼고 황금으로 빚어내오리다.
눈물이 저같이 박복한 사람으로부터 시작 됩니다. ‘
그리고 보니 올해가 추사 김정희 선생이 별세한지 150년이 되는 해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서울 예술의 전당, 과천시에서는 추사의 150년 주기를 맞이하여 추사를 재조명하기 위한 전시회, 세미나등을 개최한다 한다. 그리고 세한도와 인연이 깊은 소전 손재형 선생, 추사의 남종화의 맥을 이었던 소치 허련 선생의 전시회도 서울 인사동에서 열리고 있다. 그런데 우봉 조희룡 선생에 대한 작품 전시회를 연다는 소식이 아직 없어 아쉽다.
한편 임자도 선착장에 세워진 ‘조희룡 선생 유적지 안내판’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서 마음이 착잡해진다.
‘ 그런 우봉의 3년간 유배생활을 한 만구음관은, 소치 허련이 정통 남종 문인화를 집대성한 진도 운림산방과 쌍벽을 이루는 , 조선적 문인화의 메카로 내세워서 전혀 손색이 없다.
그런데 실제로는 우봉의 유배지는 진도의 운림산방에 비하여 너무나 초라하다. 기념비 하나와 적거비 하나만 달랑 있다. 그곳에서 만구음관 집은 물론이고 그의 그림 한 점 , 글씨 하나, 책 한권 볼 수 없어 애처로울 따름이다. 기념관을 크게 짓고 화려하게 하자는 뜻이 아니다. 우봉 조희룡 선생의 그림과 글씨를 복사본이라도 좋으니 육암리 마을회관에다 전시하면 좋겠다. 계산하여 보니 올해가 조희룡 선생이 돌아가신지 140년이 되는 해이다. 그분의 150년 주기에는 추사 선생과 같이 그분을 재조명하는 작업이 있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임자도 진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오면서, 해배되어 서울로 가는 도중에 조희룡 선생이 쓴 시 한편을 인용하며 이 문화역사 기행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