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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여범왕주자궁(譬如梵王住自宮)하야 : 비유컨대 범왕이 자기의 궁전에 머물러 있으면서 다른 데는 한 데도 안가면서
보현삼천제범처(普現三千諸梵處)하니 : 보현 널리 나타낸다. 삼천대천제범처에 모든 범처에, 삼천대천 세계의 모든 범처에 널리 다 나타난다.
일체인천함득견(一切人天咸得見)호대 : 일체 인천이 모두 보지만
실불분신향어피(實不分身向於彼)인달하야 : 실제적으로 홍길동처럼 분신술을 쓰는 것도 아니다.
몸을 나눠 나퉈서 그곳에 간 것은 아니다.
화엄경 승수미산정품(昇須彌山頂品)을 해석할 때 청량국사가 이렇게 비유한 바가 있다.
맑은 강에 삼주(三舟), 배 세 척이 있다. 남쪽으로 가는 배, 북쪽으로 가는 배, 정주하는 배가 있어서 저 하늘의 달을 대한다.
두 척의 배가 강남이나 강북으로 갈 때, 강남으로 가는 배는 달이 강남으로 간다 하고, 강북으로 가는 배는 달이 강북으로 간다고 안다. 그러나 정주(停住)해 있는 배에는, 멈춰 있는 배에는 달이 가거나 오거나 하지 않더라.
이런 얘기들은 우리가 ‘부처님의 몸을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내용이다. 화두하고도 똑같다.
이런 데서 좀 소견이 열려야 된다.
옛날에는 어려웠겠지만 요새는 어떤가?
집집마다 텔레비전이 있는데 MBC 화면 따로 있고 KBS 화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채널도 한 채널이고, 레이어도 한 레이어다.
똑같은 화면, 똑같은 레이어에서 투명이 되기도 하고 불투명이 되기도 한다.
갖가지의 몸이 없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의 몸도 없고, 갖가지 몸도 없고, 오직 허공신이다.
레이어도 한 레이어이고 똑같은 레이어에서 투명하게 되어서 그 채널, 번지수만 착착착 바뀔 뿐이다.
제불현신역여시(諸佛現身亦如是)하사 : 부처님의 현신도 또한 이와 같아서
일체시방무불변(一切十方無不徧)하시니 : 일체 시방에 두루하지 않은 곳이 없다. 그 몸이 무불변(無不徧)이다.
그러니까 이런 데도 텅 빈 허공에 승속이 꽉 찼다 한다.
라디오를 잔뜩 백 대 갖다 놓으면 백 대의 라디오가 다 나온다. 텔레비전을 여기 천 대를 갖다놓으면 천 대 텔레비전에서 전파가 다 잡히고 다 나온다.
여기는 허공이라 아무것도 없는데 사실은 가득 차 있다. 이것을 또 있다고도 하면 안 된다. 없는 것은 이(理)라고 하고 여기에 가득 차 있는 것은 이가 가득 찬 것이고 그것을 진공(眞空)이라고 한다.
그 채널에 맞는 텔레비젼을 갖다 놓든지 그것을 고정시켜 놓으면 그 전파, 주파수가 조금도 차이 안 나고 맞으면 KBS MBC가 다 적절하게 탁탁탁 음이 터져 나온다.
원래 소리는 크고 작은 것이 아닌데 큰 스피커를 갖다 놓으면 소리가 커지고 작은 스피커를 갖다 놓으면 작게 나온다.
소리는 크고 작은 것은 없고 계곡의 소리도 ‘아’소리 ‘어’소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 그렇다.
모양도 그렇다.
크고 작은 것은 없고, 색깔도 크고 작은 것이 없기 때문에 무색성향미촉법이 바로 여래의 출현이다.
부처님은 어떻게 나타나시느냐?
무색성향미촉법이라. 그래서 모양없는 것으로, 무상으로 위종한다. 또 무성으로 위종한다.
그렇게 되어있다.
이것은 아무리 우리가 알고 싶어도 아만종자 때문에, 아집이 있기 때문에 잘 알아지지는 못한다. 지식적으로 분석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사람이 언제 알아지느냐?
자비로울 때 알아진다고 한다.
여래출현품에도 그렇게 나와 있다.
문수보살이 방광 삼매를 정수리로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보현보살의 무엇이 일어났다고 나와 있는가?
기대자비심(起大慈悲心)이라, 자비심이 일어났다.
보현보살이 우리에게 설해주는 것도 지금 보현보살의 설법이잖은가? 이것은 자비심으로 해서 일어났다.
자비심은 삼매에서 기인하기 때문에 예의 없고 무자비한 사람들은 그것이 되지 않는다.
제일 처음에 예경을 잘하라. 그다음에 참회를 하라. 따라서 기뻐하라. 그다음에 권청하라 회향하라. 보현행원이 그냥 임의대로 써놓은 것이 아니다.
예의없는 사람들은 자기반성이 없고, 자기반성이 없는 사람들은 남 좋은 일에서 수희동참 하지 않는다. 수희동참 하지 않는 사람들은 남에게 권청하지 않고 권청하지 않는 것은 회향되지 못한다.
이것은 기신론에서는 싹 줄여서 다섯 가지로 해놓았지만 보현행원품에 가면 그것을 잡아 째서 열 가지로 구체적으로 열거한다.
예경제불이 1번 그다음에는 칭찬여래 그다음은 수희공덕하고 참제업장하고 이렇게 나오지 않는가?
그것이 전부 순서대로 되어있다.
제가 만든 것도 아니고 경전에 자세하게 나와 있기때문에 인생에 대해서 금방 판단을 할 수가 있다.
기신무수불가칭(其身無數不可稱)이나 : 그 몸이 수가 없어 말로 할 수 없지만
역불분신불분별(亦不分身不分別)이로다 : 몸 나누는 일 없고 분별도 없도다. 여기에서 부처님은 무엇과 같아야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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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의왕선방술(如有醫王善方術)에 : 부처님을 의왕에 비유한다. 예컨대 의왕이 있어서 선방술이라. 좋은 약방문, 남을 치료 잘하는 처방술을 가지고 있는데
약유견자병개유(若有見者病皆愈)라 : 모두 보는 대로 병개유라. 환자를 보는 즉시에 병이 모두 다 나아버린다.
명수이진약도신(命雖已盡藥塗身)하야 : 그런데 안타깝게도 편작 화타도 죽어야 되니까 이 명의가 돌아가실 때가 되었다.
명이 비록 다해서 약도신이라. 약을 몸에 발라놓았다.
우리가 지금 화엄경을 읽는 것은 부처님 몸에 발라놓은 약을 뜯어 먹는 것이다. 그래서 영산불멸이라고 한다. 당신께서 돌아가신다 하더라도 경전을 남겨 놓아서 생전의 당신과 똑같이 우리가 수행할 수 있는 길을 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이렇게 비유를 해놓았다.
영기작무실여초(令其作務悉如初)인달하야 : 온갖 일을 하는 데 예전과 같듯이
최승의왕역여시(最勝醫王亦如是)하사 : 최승의왕, 부처님께서도 또한 이와 같아서
구족방편일체지(具足方便一切智)하야 :방편을 구족해서 일체지혜를 구족하였다.
온갖 방편과 온갖 지혜를 다 충분히 구족하였다.
귀의불양족존(歸依佛兩足尊)이지 않은가. 복과 지혜를 완전히 구족하셔서, 방편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대자비심이라고 이야기한다. 자비심, 자비, 일체지라고 하는 것은 지혜라고 한다. 지혜와 자비가 충만하다. 서로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일체지혜가 없으면 잔꾀만 있어서 방편을 안 쓰고 편법을 쓴다.
이석묘행현불신(以昔妙行現佛身)하시니 : 예전처럼 부처님의 몸 묘행으로 현불신이라. 몸을 나타내거든
중생견자번뇌멸(衆生見者煩惱滅)이로다 :중생이 보는 사람마다 다 번뇌가 없어진다. 견아형자득해탈(見我形者得解脫).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결코 들어도 드신 것도 아니고 일찍이 불사를 하면서 한 번도 쉰 적이 없다, 이렇게 말씀을 하신다. 앞부분 법문에서 그렇게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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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여해중유보왕(譬如海中有寶王)하야 : 비유컨대 바다 속의 보배 왕들이
보출무량제광명(普出無量諸光明)이어든 : 널리 무량한 모든 광명을 낸다.
중생촉자동기색(衆生觸者同其色)이며 : 광명이 자기 몸에 닿으면 동기색이라. 그 빛과 같아지고 훈습이 된다, 이런 뜻이다.
이런 대목에서 대표적으로 우리가 참고해야 할 품은 광명각품이다. 부처님의 광명이 나에게 닿아서 나의 광명이 발현하는 것 이것을 우리는 광명각품이라고 한다.
광명각품의 그 유명한 구절 중에 한 구절이 ‘봉행불교상섭심(奉行佛敎常攝心) 불교를 봉행한다고 하는 것은 항상 마음을 잘 챙기는 일이다’라는 구절이다. 광명각품에 나오는 문수보살의 게송이다.
일체처의 문수보살이 그렇게 말씀하신 바가 있다.
경전은 이렇게 치밀하다.
여래출현품을 보는데도 광명각품이라든지 수미정상게찬품이라든지 야마천궁게찬품이나 범행품이나 이와 같은 것이 한덩어리로 뭉쳐져서 나온다.
제가 경전을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니까 헷갈리실 것이다.
그래도 전체로 왔다 갔다 하면 화엄경을 보는 힘이 좀 나아질 것이다.
할 일도 없는데 왔다갔다 해야지 어떻게 하겠는가.
제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저는 가만히 있는데 생각이 왔다 갔다 한다. 광명각품으로 갔다가 범행품으로 갔다가 생각이 그러는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약유견자안청정(若有見者眼淸淨)인달하야 : 그 빛을 보는 이는 눈이 청정하듯이, 나온 김에 조금 잘라놓고 이야기하자.
훈습이라고 하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정훈습(淨熏習)과 염훈습(染熏習)이다.
청정하게 훈습되는 것이 있고, 찌들려서 오염되게 지져분하게 훈습되는 것이 있다.
그러니까 압습악자(狎習惡者)는 장악지견(長惡知見)이라.
악한 사람들 냄새나는 사람들과 같이 놀면 같이 냄새나고, 맑은 사람들하고 같이 놀면 계속 맑은 것이 훈습이 된다.
오늘은 다른 얘기도 있지만 여러분들께서 일반적으로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해드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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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상(相)을 이야기하는데도 거의 마음의 본체를 이야기하고 있다. 마음의 본체, 불생불멸(不生不滅) 부증불감(不增不減) 달이 떴다가 기울어졌다가 찌부러졌다가 하더라도 달이 원래 증감이 없다. 이런 이야기도 나왔다.
무증무감(無增無減)이라고 앞부분에 나왔다.
지난달에 했는데도 희한하게 홀딱 다 까먹었다.
부증불감(不增不減)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이와 같은 것은 마음의 본체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마음의 본체를 우리가 흔히 일러서 진여(眞如)라고 하고 여래출현(如來出現)이라고 하고 여래(如來)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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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본체를 여래라고 한다.
이것이 크다고 하는 것 체대(體大)는 진여자성(眞如自性)이라고 이야기한다. 모양을 갖추게 되고, 지금은 체대의 모양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무루성공덕(無漏性功德)을 구족하는 것은 상대(相大)를 말한다. 상대의 모양과 체대의 모양이 아마 여러분들께서 구분이 잘 안 가실 것이다. 상대는 마음의 모양, 심상의 모양이 크다, 심상의 작용이 크다, 이렇게 이야기한다. 심상의 본체가 크다, 라고도 하는데 본체가 크다는 것은 여기서 충분히 이야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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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상대와 용대가 있다고 했을 때 상대(相大)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원효스님께서는 훈습 중에 아까 오염된다는 염훈습(染熏習) 쪽으로 해석하는 수가 있다.
마음의 모양이 오염된다는 것은 무슨 말이냐?
마음의 모양이 있는데 이 마음이 각각의 중생들의 그 모양, 꼴에 따라서 맞춰주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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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본체, 체대(體大)의 모습은 일상무상(一相無相)이라고 금강경에 나온다.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아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시인행사도(人行邪道)라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라.
범소유상(凡所有相)이 개시허망(皆是虛妄)하다.
일상도 상이 아니다, 일념도 염이 아니다, 일념무념이라.
일상무상이라는 모습을 이야기할 때 체대(體大)는 본체를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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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것이 하나의 상이 갖추어져 있으면 잉불잡난격별성(仍不雜亂隔別成)해서 잡난해지기 시작한다.
모양이 있으면 섞이게 되고 섞이게 되면 어지러워진다.
그것을 염(染)이라고 한다. 그래서 각중생들에게 각각의 모양으로 자리 잡는 것을 상대(相大)라고 한다.
이 해석 말고 앞의 해석, 원래 해석이 또 따로 있다.
항하사 무루성공덕(無漏性功德)이 있다고 하는 상대가 있다.
그것은 본질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지금은 본질 말고 훈습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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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습(熏習), 이야기 안 하려다가 하는데 해놓고는 넘어가자.
하여튼 상대(相大)는 염훈습을 기준을 두고 바깥으로 나간다.
그런데 용대(用大)는 어떠냐 하면 용대가 염훈습일 것 같으면 작용을 하는 것은 어떤가 하면 바깥에 작용을 한다는 것은 신심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신심을 일으킨 크기만큼 자기의 작용만큼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
크게 일으킨 사람은 크게 돌아가고 작게 일으킨 사람은 작게 돌아간다. 큰 걸음을 뗀 사람은 크게 큰 걸음으로 가고 작은 걸음을 걷는 사람은 작은 걸음으로 종종걸음으로 돌아간다.
이것을 용대라고 한다.
용대는 진여를 훈습하는 청정의 힘이 있기 때문에 정훈습(淨熏習)이라고 한다.
넘어가자. 이런 이론을 해봤자 도대체가 머리에 들어오지가 않는다. 무슨 말인지도 이해가 되지도 않고, 듣기도 싫을 것이다.
중생촉자가 동기색이라는 이 말, 중생이 딱 부딪쳐서 그 색이 같게 된다고 하는 것은 용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부처님하고 같이 된다.
그런데 부처님이 중생하고 딱 붙어서 중생하고 똑같이 되는 것은 상대다. 염훈습이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 중생하고 똑같은 모습은 띄고 있지만 중생은 아닌 모습이 부처님의 거룩한 상대의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작용을 해서 부처님이 나한테 감응을 해서 내가 부처화 되는 것은 용대의 모습이다.
부처님이 자기를 고집하지 않고 중생의 모습을 맞춰주는 것은 상대의 대자대비한 모습이다, 라는 것이다.
부처님이 중생이 될 수가 없는데 불가사의하게 염훈습이 되어서 중생이 된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흔히 변역생사(變易生死)라고 하지 않는가. 중생이 도대체 부처로 돌아갈 길이 없는데 방금 여기처럼 중생이 촉자가 동기색이라 이렇게 용훈습(用熏習)으로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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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습(淨熏習) 염훈습(染熏習)
염훈습 입장에서는 상대를 가지고 이야기할 수가 있고, 용훈습(用熏習)에서는 정훈습을 가지고 이야기 할 수 있다.
이것은 제 의견이 아니고 원효스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원효스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거기에 충분한 일리가 있을 것이다' 라고 보고, 우리가 거기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 되고 내 자신의 인생을 투영시켜 봐야 된다는 것이다.
그냥 한문만 쭉 해석한다고 해서 화엄경이 해석되는 것도 아니고 화엄경이 봐 지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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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보왕역여시(最勝寶王亦如是)하사 : 부처님께서도 또한 이와 같아서
촉기광자실동색(觸其光者悉同色)이며 : 그 광명을 받은 사람은 실동색이다. 모두가 그 동색이다. 이것은 용대(用大)로 정훈습(淨熏習)이 된다는 것이다.
약유득견오안개(若有得見五眼開)하야 : 보는 이는 다섯 눈이 오안이 환히 열려서
파제진암주불지(破諸塵闇住佛地)로다 : 어둠을 깨뜨리고 부처님의 지위에 머물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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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여여의마니보(譬如如意摩尼寶)가 : 비유컨대 뜻과 같은 마니보배가, 여의마니보배는 비유 중에 열 번째 비유다.
여의마니보배가, 앞에서도 마니가 있었는데
수기소구개만족(隨其所求皆滿足)이나 : 그 구하는 바를 따라서 개만족이라. 모두 다 만족하게 해주는데
소복중생불능견(少福衆生不能見)하나니 : 그런데 소복 중생은 복이 없는 쪼가리 복 중생들은 부처님을 도대체 볼 수가 없다. 불능견 보지 못하는데 그런데 희한하게도 본다.
왜 그런가?
자유포모지의(子有抛母之意)나 자식은 부모를, 어미를 버릴 뜻이 있지만 엄마는 양무사자지심(娘無捨子之心)이라, 엄마는 자식을 버릴 뜻이 없다.
동산양개화상의 어머니가 그렇게 썼다.
부처님은 우리를 버릴 뜻이 없다.
우리는 나한테 돈이 안 되면 부처님을 언제든지 갖다 내버려 버리고 화엄경도 내버려 버리고 부처님도 내버린다.
우리는 눈치껏 살다 간다. 딱 눈치 보고 내 마음에 안 든다면 버려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젊은 스님들 몇 분이 이렇게 오신 것을 보니까 잘못 끌려 오신 것 같다.
비시보왕유분별(非是寶王有分別)인달하야 : 보배는 분별하는 생각이 없듯이
선서보왕역여시(善逝寶王亦如是)하사 : 선서보왕께서도 그와 같아서
실만소구제욕락(悉滿所求諸欲樂)이나 : 그 소구소원, 구하는 바 모든 욕락을 다 채워주지만
무신중생불견불(無信衆生不見佛)하나니 : 믿음 없는 중생은, 신심 없는 중생은 불견불이라. 이런 구절은 읽기도 싫다. 왜냐하면 우리 자존심을 탁 건드리기 때문이다.
신심 없는 중생들은 부처님을 보지 못해도 그러나
비시선서심기사(非是善逝心棄捨)로다 : 부처님께서 포기하고 버린 것은 아니다.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버리지 않는 것과 같다.
자식은 포모지의(抛母之意)라, 자식은 부모를 엄마를 포(抛) 포기하지만 자식들은 언제든지 부모를 버릴 뜻이 있고 중생들도 그렇다.
그러나 양무사자지심(娘無捨子之心)이라 부처님은 중생들을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다.
‘비시선서심기사(非是善逝心棄捨)라’ 하는 대목은 줄 그어 놓는 것이 좋겠다.
비시(非是) 아니다, 선서(善逝) 부처님께서는 부처님의 마음은 중생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중생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은 중생이 원하는 것은 다 들어준다.
大方廣佛華嚴經 卷第五十一
如來出現品 第三十七之二
3. 如來의 語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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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如來)의 어업(語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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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광불화엄경 여래출현품 51권째 들어간다. 앞에 신업이 끝났고 그다음에는 구업에 대해서 나올 것이다. 그러면 의업은 어디쯤 나오겠는가?
저 뒤 한 참 뒤에 나올 것이다.
다 아시겠지만 경전은 이와 같이 수행순서대로 구성해놓았다.
제가 지금 손을 들었다. 제가 이렇게 손을 들어서 행동을 하나 보여준 것은 지수화풍(地水火風) 중에 풍이다. 움직이니까 바람을 보여주는 것이다.
눈을 깜빡거린다든지 움직이든지 피가 돌든지, 지수화풍의 제일 밑에는 신(身)이다. 몸이 꾸적꾸적해서 움직이는 것이 제일 거친 것이다. 그런데 몸이 움직여도 그 안에 뭐가 움직이는 것인가? 생각이 움직이는 것이다. 이판사판으로 되어 있다.
지금 하는 말은 전부 어디에 묻어 있는가?
생각이 자라 나와서 말이 되었다.
우리 흔히 내가 안쪽에 화가 좀 많이 나면 말로 잔소리를 한다. 그러면 상대는 ‘좋은 말로 할 때 그만해라’ 라고 이야기한다. ‘말로 할 때 그만해라’ 이러다가 ‘그만해라 그만해라’ 하는데 말로 할 때 그만해야지 계속하고 있으면 꿀밤을 한 대 맞는다.
말이 자라서 결국은 꿀밤이 되고 꿀밤을 줘도 그대로 뽀작뽀작 계속하고 있으면 그때부터는 몽둥이 찜질을 한다.
조타삼천(朝打三千) 모타팔백(暮打八百) 아침에 삼천 대 두드려 패고 저녁에 팔백 대 더 두드려 팬다.
몽둥이를 들기까지, 몸에 주먹질이 가기까지, 말 이전에 생각이 있다. 그 생각을 우리는 흔히 분별심이라고 분별사식(分別事識)이라 한다.
분별사식(分別事識), 의식이 있기 전까지 그 앞의 것을 우리는 아집이라고 한다.
인아집 법아집 아집이라는 게 독사처럼 도사리고 있다. 그것을 화두참선할 때, 염불할 때 장물아비라고 이야기한다.
그놈을 잡아야지 행동대원인 안이비설신의를 잡아봤자 소용이 없다. 의식 속에 의근을 그놈을 딱 잡으러 가는 것을 우리는 수행이라고 하고 그때부터 수도라고 한다.
그게 또 어디에 붙어있는가 하면 저 뒤에 무명업식에 붙어 있다.
무명업식은 어디에 붙어 있느냐?
의여래장하야 유생멸심이라.
이 생멸심은 여래장에 붙어 있다. 본심, 일심, 즉심에 붙어있다.
일심이라고 하는 것은 뭐라 하느냐 하면 여래라고 한다.
일심이라고 하는 것은 여래장이라 하고 여래라고 하고 적멸이라고 하고 열반이라 하고 아뇩다라샴막삼보리라 하고 본심이라고 하고 본각이라고 하고 정각이라고 하고 여러 가지 표현을 한다. 불성이라고도 이야기한다.
그 불성에서 미끄러져서 불성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무명으로, 무명실성으로 미끄러져서 이 무명에서 붙어서 미세한 번뇌가 안쪽에서 일어났다가 그 미세한 번뇌가 구체화 되면서 아집덩어리가 되고 이 아집덩어리가 바깥으로 밀어내서 전도몽상이 된다.
전도몽상을 아집덩어리라고 한다.
전도몽상, 전도망상으로 밀려 나온 것은 망상분별이라고 한다.
이 망상분별을 뭐라고 하냐 하면 탐진치만의견(貪瞋癡慢疑見)이라고 한다.
이 망상분별까지 나오면 생각이 마음이 변질이 되어서 세 번째 단계까지 온 것이다.
마음이 처음에는 생상(生相)으로 일어나는 마음이 있다가 안으로 쭉 버티는 주상(住相)이 있다가 마음이 변질되는 것 고장 나는 것이 있다. 생노 병들기 시작하면 병든 마음을 탐진치교만의심 삿된 소견머리 탐진치만의견이라고 하지 않는가.
마음이 세 번째 변질된 것, 업을 짓는 과정을 가지고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신삼구사(身三口四)라 한다.
신삼 몸으로 생각으로 벌어지지 않는가.
그것은 멸상이라서 생각중에 마음중에 제일 밑의 것이다.
몸이 행동하고 말로 행동하고 생각이 행동하는 것을 탐진치가 요쪽으로 붙어있지만 요쪽으로 같이 붙어서 멸상까지 같이 붙어있다.
신업이라고 하고 구업이라고 하고 지금 여기 어업(語業)이라고 하는 것은 생주이멸 중에 멸상에 해당하는 것이다.
생노병사 중에 사에 해당하고 성주괴공 중에 공에 해당하는 정도로 제일 밑엣것을 이야기한다.
그 위로 차고 올라가면 부처님은 어떠한 모습이냐? 허공같다고 한다.
그런 것을 자꾸 얘기해 놓는데 앞에서 신업이 나오고 의업이 나오고 하는 것은 우리 수준에 맞춰서 이야기하는 것이지 부처님 입장에서는 신업과 구업과 의업이 있을 수가 없다.
삼밀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순서는 뭐라고 해놓았는가?
지난 시간까지 신상은 끝났고 앞으로 다음시간에 할 것은 말로 하는 것이다.
그다음 말이 끝나면 뭐가 나오는가?
생각을 가지고 논한다.
부처님의 말이 끝나고 생각을 가지고 논한다.
그리고 나서 거기에서 나오는 대목들이 무엇이겠는가?
부처님의 지혜가 어떠냐? 부처님의 자비가 어떠냐?
이렇게 쭈욱 나올 것이 아닌가.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는 부처님의 생각이 뭉쳐진 그것뿐이다.
오직 지혜와 자비 일체종지 그 이야기가 쭉 되겠다.
잠시 쉬었다가 범행품 시작하기 전에 한 번 일독하고 나면 오늘 배우는 것이 이해가 갈 것이다.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권제오십일(卷第五十一)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 제삼심칠지이( 第三十七之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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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권제51(卷第五十一)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 삼심칠(三十七) 다시 이(二) 그러니까 37품의 제 두 번째다.
37품이라니까 여래출현품 앞에는 삼십여섯 품이 있었다.
제일 앞의 여섯 품은 소신인과(所信因果)로서 부처님의 의보(依報)와 정보(正報)에 대한 제1회차 설법이다. 세주묘엄품, 여래현상품, 보현삼매품, 세계성취품, 화장세계품, 비로자나품이 해당되고 소신 믿을 바의 인과에 대한 법문이었다.
그 믿을 바의 인과에 대해서 잘 믿어지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또한 믿음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서 십신설법을 설한 데가 2회차부터 여기 7회차까지 삼십한 품이다.
앞에 여섯 품하고 삼십 한 품을 더하니까 삼십일곱 품이 된다.
그다음에 두 품은 이세간품하고 입법계품이다. 일십일일역부일 그랬지 않는가.
이 두 품은 실천과 깨달음의 증득에 대한 것이다.
그러니까 불교의 이론은 전부 어디에서 형성되는가? 삼십한
품에서 다 정리가 된다.
삼십한 품 중에서도 불부사의법품부터가 묘각이다. 불부사의법품, 여래십신상해품, 여래수호광명공덕품, ‘여래’자가 붙은 것은 묘각이다.
보살주처품까지가 등각이다. 등각의 결과.
불부사의법부터 여래십신상해품, 여래수호광명공덕품, 보현행품, 여래출현품, 이렇게 되지 않는가?
그러니까 보현행품 앞에까지를 차별과(差別果)라고 하고 차별인과가 거기서 끝난다.
평등인과(平等因果)중에서 보현행품은 평등인(平等因)이고 여래출현품은 평등과(平等果)다.
깨달음과 수행이 원만하게 되었다.
보현행품 다음은 여래출현품인데 깨달음이 그렇게 되었다.
그래서 37-2라고 하는 것은 평등과 중에서도 두번째 이야기를 하겠다는 말이다.
앞에 여래출현품에 와서 제일 첫 번째 무엇을 다뤘는가?
‘여래출현이 이런 것이다’하면서 여래출현법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다음에는 여래신상 부처님 여래법신은 어떻게 생겼다, 이것을 말씀했다.
부처님의 법신은 부증불감이라든지 오고감이 없다든지 여러 가지로 정의를 할 수가 있다.
그리고 여래의 음성은 어떠냐?
부처님의 말씀은 어떠냐?
이것이 지금 하는 대목이다.
이 대목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 수행자가 반드시 이것을 의지해서 공부를 해야 된다’ 해서 한문은 생락하고 유인물의 한글을 좀 빨리 읽어보도록 하겠다.
<유인물> 20230501
爾時에 正念天子가 白法慧菩薩言호대 佛子야 一切世界諸菩薩衆이 依如來敎하야 染衣出家인댄 云何而得梵行淸淨하야 從菩薩位로 逮於無上菩提之道이닛고
이때 정념천자(正念天子)가 법혜보살에게 여쭈었다. “불자여, 온 세계의 모든 보살들이 여래의 가르침을 의지하여 물든 옷을 입고 출가하였으면, 어떻게 하여야 범행(梵行)이 청정하게 되오며, 보살의 지위로부터 위없는 보리의 도(道)에 이르리이까.”
法慧菩薩이 言하사대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修梵行時에 應以十法으로 而爲所緣하야 作意觀察이니 所謂身과 身業과 語와 語業과 意와 意業과 佛과 法과 僧과 戒니라 應如是觀호대 爲身是梵行耶아 乃至戒是梵行耶아
법혜보살이 말하였다.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범행을 닦을 때에는 마땅히 열 가지 법으로 반연을 삼고 뜻을 내어 관찰하여야 하나니, 이른바 몸과 몸의 업과, 말과 말의 업과, 뜻과 뜻의 업과, 부처님과 교법과 스님과 계율이니라. 마땅히 관찰하기를 몸이 범행인가, 내지 계율이 범행인가 할 것이니라”
如是觀已에 於身에 無所取며 於修에 無所着이며 於法에 無所住며過去已滅이며 未來未至며 現在空寂이며 無作業者며 無受報者며 此世不移動이며彼世不改變이니라
“이렇게 관찰하면, 몸에 취할 것이 없고, 닦는데 집착할 것이 없고, 법에 머물 것이 없으며, 과거는 이미 멸하였고, 미래는 이르지 못하였고, 현재는 고요하며, 업을 짓는 이도 없고, 과보를 받을 이도 없으며, 이 세상은 이동하지 않고, 저 세상은 바뀌지 아니하느니라.”
此中何法이 名爲梵行고 梵行이 從何處來며 誰之所有며 體爲是誰며 由誰而作고 爲是有아 爲是無아 爲是色가 爲非色가 爲是受아 爲非受아 爲是想가 爲非想가 爲是行가 爲非行가 爲是識가 爲非識가
“이 가운데 어느 법이 범행이냐? 범행은 어디서 왔으며, 누구의 소유며, 자체는 무엇이며, 누구로 말미암아 지었는가. 이것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색(色)인가 색이 아닌가. 수(受)인가 수가 아닌가 상(想)인가 상이 아닌가. 행(行)인가 행이 아닌가. 식(識)인가 식이 아닌가.”
如是觀察에 梵行法을 不可得故며 三世法이 皆空寂故며 意無取着故며 心無障礙故며 所行無二故며 方便自在故며 受無相法故며 觀無相法故며 知佛法平等故며 具一切佛法故니 如是가 名爲淸淨梵行이니라
“이렇게 관찰하면, 범행이란 법은 얻을 수 없는 연고며 삼세의 법이 다 공적한 연고며 뜻에 집착이 없는 연고며 마음에 장애가 없는 연고며 행할 것이 둘이 없는 연고며 방편이 자재한 연고며 모양 없는 법을 받아들이는 연고며 모양 없는 법을 관찰하는 연고며 부처님 법이 평등함을 아는 연고며 온갖 부처님 법을 갖춘 연고이므로 이와 같이 청정한 범행이라 이름하느니라.”
復應修習十種法이니 何者가 爲十고 所謂處非處智와 過現未來業報智와 諸禪解脫三昧智와 諸根勝劣智와 種種解智와 種種界智와 一切至處道智와 天眼無礙智와 宿命無礙智와 永斷習氣智니라 於如來十力에 一一觀察하면 一一力中에 有無量義니 悉應諮問이니라
(文殊達天眞 普賢明緣起)
“다시 열 가지 법을 닦아야 하나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옳은 곳 그른 곳을 아는 지혜, 지난 세상 지금 세상 오는 세상의 업과 과보를 아는 지혜, 모든 선정. 해탈. 삼매를 아는 지혜, 모든 근성(根性)의 승(勝)하고 열(劣)함을 아는 지혜, 갖가지 이해를 아는 지혜, 갖가지 경계를 아는 지혜, 온갖 곳에 이르는 길을 아는 지혜, 천안통이 걸림 없는 지혜, 숙명통이 걸림 없는 지혜, 습기(習氣)를 영원히 끊는 지혜이니 여래의 열 가지 힘을 낱낱이 관찰하며, 낱낱 힘에 한량없는 뜻이 있는 것을 마땅히 물어야 하느니라.”
聞已에 應起大慈悲心하야 觀察衆生하야 而不捨離하며 思惟諸法하야 無有休息하며 行無上業하야 不求果報하고 了知境界가 如幻如夢하며 如影如響하며 亦如變化니
“또한 설법을 들은 뒤에는 크게 자비한 마음을 일으키나니, 중생을 관찰하여 버리지 아니하며 모든 법을 생각하여 쉬지 아니하며 위없는 업을 행하고도 과보를 구하지 말며 경계가 요술 같고 꿈같고 그림자 같고 메아리 같고 변화와 같음을 분명히 알지니라.”
若諸菩薩이 能與如是觀行相應하야 於諸法中에 不生二解하면 一切佛法이 疾得現前하야 初發心時에 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 知一切法이 卽心自性하야 成就慧身호대 不由他悟하리라
(大方廣佛華嚴經 梵行品 中)
“만일 보살들이 이렇게 관행(觀行)함으로써 더불어 서로 응하면, 모든 법에 두 가지 이해를 내지 아니하여 온갖 부처님 법이 빨리 앞에 나타날 것이며 처음 발심할 때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며 온갖 법이 곧 마음의 성품임을 알 것이며 지혜의 몸을 성취하되 다른 이를 말미암아 깨닫지 아니하리라.”
<유인물>
이때 정념천자(正念天子)가 법혜보살에게 여쭈었다.
이때 정념천자(正念天子)가 법혜보살에게 여쭈었다.
법혜보살은 몇 번째 설법주인가? 십주법문을 하는 세 번째 설법주다.
화엄경을 설하는 이가 첫 번째는 보현보살 두 번째는 문수보살 세 번째는 법혜보살 네 번째는 공덕림보살 다섯 번째는 금강당보살 여섯 번째는 금강장보살 일곱 번째는 보현보살이 다. 이들이 설법주다.
그러다 보니 여래출현품 같은 데는 보현보살이 주로 설법을 한다.
보현보살과 심왕보살과 부처님께서 7회차 설법을 한다.
법혜보살은 3회차 법문인 승수미산정품부터 설법을 하는데 3회차 법문은 승수미산정품, 수미정상게찬품, 보살십주품, 범행품, 범행품 다음에 나오는 품이 초발심공덕품 그다음 명법품이다.
법혜보살에게 여쭈었다. “불자여, 온 세계의 모든 보살들이 여래의 가르침을 의지하여 물든 옷을 입고 출가하였으면, 어떻게 하여야 범행(梵行)이 청정하게 되오며, 보살의 지위로부터 위없는 보리의 도(道)에 이르리이까.”
이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법혜보살이 말하였다.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범행을 닦을 때에는 마땅히 열 가지 법으로 반연을 삼고 뜻을 내어 관찰하여야 하나니, 이른바 몸과 몸의 업과, 말과 말의 업과, 뜻과 뜻의 업과, 부처님과 교법과 스님과 계율이니라.”
전부 열 가지다. 그러니까 외우는 것은 간단하다. 중노릇하면서 수행자인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무엇이냐? 신구의 삼업과 불법승 삼보와 거기 중앙에 주춧돌처럼 지탱하고 있는 계율에 대해서 치밀하게 공부를 해야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마땅히 관찰하기를 몸이 범행인가.”
몸이 범행일 것 같으면, 몸은 무엇인가? 가든지 앉든지 몸이라고 하는 것은 향기롭다가도 냄새가 나기도 하고 잠을 자기도 하고 이상한 짓을 많이 하지 않는가? 그런 것이 범행은 아니라는 것이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시인행사도(人行邪道)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
금강경에 나오는 구절 아닌가?
그것이 바로 이 범행품 전체를 갈무리 하고 있는 말이다.
그리고 여래출현품도 그와 똑같은 것이다. 이렇게 관찰하면 몸이 범행인가, 또 뭐가 범행인가. 말이 범행인가 뜻이 범행인가 부처님이 범행인가 교법이 범행인가 스님이 범행인가
“내지 계율이 범행인가 할 것이니라.”
이와 같이 할 것이며
“이렇게 관찰하면, 몸에 취할 것이 없고, 닦는데 집착할 것이 없고, 법에 머물 것이 없으며, 과거는 이미 멸하였고, 미래는 이르지 못하였고, 현재는 고요하며”
‘과거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 미래심불가득(未來心不可得) 현재심불가득(現在心不可得)’ 금강경에는 그렇게 하고 범행품에는 요렇게 나왔다. 유마경에도 이렇게 똑같이 나온다.
과거는 이미 멸하였고 미래는 이르지 못하였고 현재는 고요하다. 그럼 제일 중요한 것은 뭐라는 말씀인가?
현전의 일념이다. 구세십세호상즉(九世十世互相卽) 현전의 일념이 바로 제대로 된 염불이고 무념이다. 당장 정직한 것, 그러니까
“업을 짓는 이도 없고, 과보를 받을 이도 없으며”
업을 짓는 것이 없으니까 무집이라고 한다. 과보를 받을 것이 없으니까 무고라고 한다. 우리가 사성제(四聖諦) 할 때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라고 한다.
그다음에 인과가 없다고 할 때는 뭐라고 하는가?
무무명진(無無明盡) 내지(乃至) 무노사(無老死) 역무노사진(亦無老死盡) 하는 것이 바로 업을 짓는 것도 없고, 과보를 받는 것도 없다. 본래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이동하지 않고, 저 세상은 바뀌지 아니하느니라.”
없는 것이 어떻게 바뀌는가? 허공이 어떻게 뒤바뀌겠는가?
앞뒤가 어디 있는가. 꿀맛이 안팎이 없다 하듯이.
“이 가운데 어느 법이 범행이냐? 범행은 어디서 왔으며”
자꾸 왔다갔다 해서 미안하다. 이것은 여러분들께서 화엄경 제79권 입법계품 미륵보살장을 자세히 보시기 바란다. 거기 아주 친절하게 이 대목을 설해 놓았다. 문득 생각나는 대목이 그 대목이다.
“누구의 소유며, 자체는 무엇이며, 누구로 말미암아 지었는가? 이것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색(色)인가 색이 아닌가 수(受)인가 수가 아닌가 상(想)인가 상이 아닌가 행(行)인가 행이 아닌가 식(識)인가 식이 아닌가.”
반야심경에는 ‘아니다’ 해서 단정적으로 뭐라고 하는가?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수상행식(受想行識) 역부여시(亦復如是)’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 조견(照見)하니까 오온개공(五蘊皆空) 그 오온개공이 뭐다? 범행이다.
범행에서 누가 탄생하신다? 여래가 탄생하신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출가 수행하는 목적이다, 그렇게 되어있다.
“이렇게 관찰하면, 범행이란 법은 얻을 수 없는 연고며”
나왔다. 옆에 범행법은 제가 빨간 표시를 해 놓았다. 불가득고(不可得故)라.
“삼세의 법이 다 공적한 연고며”
삼세법은 개공적고(皆空寂故)라.
반야심경하고 왔다갔다 하니까 조금 개념이 잡히는가?
내가 볼 때는 조금 짜증내시는 것 같은데, 조금 짜증나시면 다음달에는 누구 한 사람을 뽑아서 하자. 여러분들이나 저나 피차 마찬가지인데 저 혼자 짐을 지고 갈 수 없잖은가?
하신다고? (안 합니다. 괜찮습니다.) 사람 놀리는 것이 재밌다. 그다음 보자.
“뜻에 집착이 없는 연고며 마음에 장애가 없는 연고며 행할 것이 둘이 없는 연고며 방편이 자재한 연고며”
범행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 아무런 후회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심무가애(心無罫碍) 무가애고(無罫碍故) 무유공포(無有恐怖)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이 바로 범행이다.
반야심경에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하지 않는가? 원리 전도몽상이라, 자유자재다.
“모양 없는 법을 받아들이는 연고며 모양 없는 법을 관찰하는 연고며”
모양 없는 무상법을 받아들인다. 무상법을 관찰한다. 아까 일상무상이라고 했지 않은가. 그래
“부처님 법이 평등함을 아는 연고며 온갖 부처님 법을 갖춘 연고이므로 이와 같이 청정한 범행이라 이름하느니라.”
이와 같은 것이 뭐다? 명위청정범행(名爲淸淨梵行)이다. 그럼 중노릇 제대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 무상(無相)이다. 본래 없다. 거기 적어 놓자. ‘본래 없다’
본래 없는 데 뭘 자꾸 따지는가. 거짓말이나 살살하고.
“다시 열 가지 법을 닦아야 하나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옳은 곳 그른 곳을 아는 지혜”
처비처(處非處)지혜, 우리 어른 스님하고 할 때 이 대목을 많이 했다.
“지난 세상 지금 세상 오는 세상의 업과 과보를 아는 지혜, 모든 선정. 해탈. 삼매를 아는 지혜, 모든 근성(根性)의 승(勝)하고 열(劣)함을 아는 지혜, 갖가지 이해를 아는 지혜, 갖가지 경계를 아는 지혜, 온갖 곳에 이르는 길을 아는 지혜, 천안통이 걸림 없는 지혜, 숙명통이 걸림없는 지혜, 습기(習氣)를 영원히 끊는 지혜이니 여래의 열 가지 힘을 낱낱이 관찰하며, 낱낱 힘에 한량없는 뜻이 있는 것을 마땅히 물어야 하느니라.”
화엄경 입법계품 80권째에 여시이해와 여시종취[여시이취(如是理趣)]가 나온다. 이와 같은 이야기가 서장에도 나온다. 문수보살을 이렇게 표현한다.
모든 것을 아는 지혜는, 지혜의 문수잖은가.
문수의 그런 천진면목을 통달한 범행이라야 이것을 듣고는 문이하고는 응기대자비심이라고 나왔다.
“또한 설법을 들은 뒤에는 크게 자비한 마음을 일으키나니”
크게 자비한 마음이 일어났다면 보현(寶賢)이 명연기(明緣起)라, 그 옆에 제가 써 놓았다.
원각경 12보살 주제를 뽑을 때 그렇게 한다. 문수달천진(文殊達天眞) 보현명연기(寶賢明緣起)라 선가귀감에도 이 대목을 서산대사께서 주(註)에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33페이지인가에 거기 보면 나와 있다. 33장, 하도 오래되어서 맞는가 안 맞는가 모르겠다.
“중생을 관찰하여 버리지 아니하며 모든 법을 생각하여 쉬지 아니하며 위없는 업을 행하고도 과보를 구하지 아니하며”
이것이 전부 다 보현행원이다.
“경계가 요술 같고 꿈같고 그림자 같고”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이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인 줄 알고 중생들을 그렇게 상없이 잘 제도한다.
“메아리 같고 변화와 같음을 분명히 알지니라.”
“만일 보살들이 이렇게 관행(觀行)함으로써”
염불하고 참선함으로써
“더불어 서로 응하면, 모든 법에 두 가지 이해를 내지 아니하여”
있다 없다 옳다 그르다, 이렇게 얘기하지 않는다.
“온갖 부처님 법이 빨리 앞에 나타날 것이며”
일체불법(一切佛法)이 질득현전(疾得現前)하야 초발심시(初發心時)에 변성정각(便成正覺)이라.
60 화엄에는 변성정각이라고 해놓았다.
정각을 여기서는 뭐라 해놓았는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고 해놓았다.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라고까지 해놓았다. 80화엄경에서는 그렇게 해놓았고, 60화엄경경에서는 즉득정각을 변성정각이라고 해놓았다.
그래서 그것을 약찬게나 의상스님의 법성게에 공히 쓴다.
초발심시변성정각(初發心時便成正覺)은 어디에 나오는 게송인가? 범행품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럼 왜 거기 넣어놓았는가? 중들의 수행이 어디에 귀결이 된다? 범행품에 딱 맺혀있다는 것이다. 이해가 갈 것이다.
지일체법(知一切法)이 일체법을 아는 것이 즉심자성(卽心自性)이다. 일체법이 전부 마음의 자성인데 자성은 있다 없다? 자성은 무소유라. 자성은 있는 바가 없기 때문에 일체법도 따라서 있을 수가 없다.
이렇게만 되어도 인생에서 많은 위로를 받는다. 아프거나 힘들거나 짜증이 날 때도 마찬가지다.
성취혜신(成就慧身)호대 이와 같이 부처님의 몸을 성취하되 불유타오(不由他悟)라, 그것은 다른 데서부터 말미암아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자성 청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자 이렇게 해놓고, 오늘 여래출현품에 여래의 신업은 끝났고 지금은 뭔가? 여래의 어업이라, 여래의 어업에 대해서 쭈욱 공부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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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워라♬♪♩ 환희로워라♬♪♩ 감사하여라!!! 대♩ 방♩ 광♩ 불♩ 화♩~~ 엄♩~~ 경♩~~~
(文殊達天眞 [寶]賢明緣起)---普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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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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