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정부군 수십명이 손목이 묶인 채 반군 세력 ISIS에 붙잡혀 있는 모습. 이 사진은 ISIS가 웹사이트를 통해 2014년 6월 14일 공개했다. 이라크군 대변인은 “반군이 이라크 정부군 포로를 학살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밝혔다.
최근 이라크가 중동의 화약고로 새삼 떠오르고 있습니다. 반군(叛軍)인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ISIL)’는 북부 지역 대부분을 장악한 채 정부군과 대치하면서 대규모 종파간 내전(內戰)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수니파 반군들이 시아파 정부군을 집단 처형하는 장면을 인터넷에 올리기도 했습니다.
2003년 이라크 전쟁 취재
저는 2003년 미군이 바그다드를 점령한 직후인 5월 1일부터 약 20일간 이라크에 머물며 전후(戰後) 이라크 상황을 취재한 적이 있습니다. 이라크 수도인 바그다드뿐 아니라,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인류 문명 발상지 중의 하나인 힐라(바빌론), 수니파 밀집지역인 바그다드의 서쪽 도시들, 시아파 성지(聖地)인 남쪽의 나자프 등을 방문했습니다.
이라크를 다녀온 지 10년이 넘었지만, 평화가 완전히 정착하지 않고 쉴새 없이 들려오는 폭탄 테러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이 와중에 2011년 미군이 철수하였고, 이후 이라크에 질서가 잡혀 가는 것이 아니라, 종교문제, 소수민족 문제, 이웃 국가 간의 이익관계가 뒤엉켜 사태가 상당히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저는 2003년 이라크를 방문했을 당시 후세인의 30년 독재로 피폐해진 이라크의 모습과 자유를 얻은 이라크인들의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한 모습을 동시에 보았습니다.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는 무척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황토 빛의 저층 건물이 즐비하고, 길은 넓고 정비가 잘 되어 있습니다. 땅도 기름져 관개수로만 잘 정비된다면 아무 농작물을 심어도 잘 자랄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바그다드 시내는 낡은 차에서 내뿜는 매연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시커먼 연기는 바그다드 하늘에 짙게 드리워져 있어 멀리서 보면 두꺼운 구름층처럼 보였습니다. 주유소마다 기름을 넣기 위해 땡볕 아래에서 수백m씩 줄을 선 자동차 행렬과 전쟁으로 일거리를 잃은 사람들이 외국인들이 머무는 호텔주변에 장사진을 치면서 일당 직이라도 달라며 호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후세인 동상이 있던 바그다드 시내 파라다우스(faradaws:천국) 광장 부근에서는 온갖 종류의 정치 집회와 시위가 매일 벌어졌습니다. 쿠르드족 자치를 달라는 시위부터, 특정 종교 지도자를 지지하는 시위, 후세인과 그 잔당들을 처벌하라는 시위, 학생들의 시위 등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저항세력이 조직적인 결집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팔루자 시민, "유 아메리칸. 유 다이"(너 미국인이었으면 죽었다)
2003년 5월, 이라크에서 취재 중인 필자. 바그다드 서쪽 외곽지역.
외부 세계와 오랫동안 단절되었던 이라크인들은 무척 순박했고, 호기심이 많았으며, 특히 사진 찍히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이라크 사람들은 한국에 특히 호감(好感)을 가지고 있었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코레아” 하면서 엄지손가락부터 치켜 들었습니다. 2002년 월드컵 때 보여준 한국의 축구 실력에 감동을 한 듯 만나는 사람마다 축구 이야기를 했습니다. 또한 삼성, 현대 등 우리나라 기업 이름을 부르며 “넘버 원”이라며 지켜 세웠습니다. 당시에 요르단에서 바그다드까지 들어가는 600km의 고속도로를 한국의 현대건설이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후세인 독재로 외부와 교류가 활발하지 않았는데도 이라크 거리에는 한국산(産) 중고차가 많이 돌아다니고 있었고, 특히 한국산 1t 트럭과 봉고 트럭이 많이 보였습니다.
하루는 바그다드에서 서쪽으로 150km 떨어진 라마디 지역에 취재하러 가는 길에 팔루자 시내에서 잠시 사진을 찍고 있는데, 그 지역 사람들이 저와 저를 안내하고 있던 이라크인 압바스씨를 빙 둘러싸기 시작했습니다. 수니파 저항군의 근거지인 팔루자는 현재 반군들이 장악한 도시 중의 하나 입니다. 한눈에 봐도 분위기가 바그다드와는 무척 다른 것이 저를 둘러싼 사람들의 눈에는 적의(敵意)가 번뜩였습니다.
안내원 압바스씨가 긴장한 모습을 처음 보았습니다. 그는 귓속말로 저에게 “이곳 사람들은 위험하니 빨리 벗어나자”고 말했습니다. 알고 보니 제가 그곳에 도착하기 바로 몇일 전 미군이 비무장 팔루자 시위대에 기관총 발포를 해서 많은 민간인이 죽었고, 미군에 대한 적대감이 극에 달해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앞서도 미군이 팔루자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디서 갑자기 동양인이 나타나 사진을 찍고 있었으니, 혹시 미군 편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안내원 압바스씨는 그들에게 내가 한국에서 온 기자라는 것을 열심히 설명했습니다. 유독 “코레아”라는 단어가 제 귀에 크게 들렸습니다. 그제야 저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의 적대감이 일부 호기심으로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때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만 내놓은 젊은 청년이 저를 바라보더니 한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말했습니다.
힐라市 인근에서 후세인 시절 집단 학살당한 후 암매장된 시신. 이러한 집단 학살지가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당시 저는 후세인 독재의 실상을 집중적으로 취재하고 있었습니다. 이라크에서 만난 사람들 대부분이 부모, 형제, 가까운 친척 가운데 한 명 이상이 후세인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슬람 사원에서 기도를 했다고, 어느 지역에서 신망이 높다고, 종교지도자란 이유로, 가족 중에 누가 체포되었다는 이유로, 친구나 학교에서 후세인과 그의 가족에게 말 한마디 잘못했다는 이유로 수많은 사람이 감옥에 가거나 처형당했습니다.
후세인은 이라크 전역에 자신의 동상을 세웠고, 70개가 넘는 대통령궁을 세웠습니다. 이라크 사람들은 저에게 "우리가 독재자 후세인에게 고통받은 이야기는 10년을 해도 다 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독재에서 해방되어 기뻐하는 이라크인들을 보면서, 60년이 넘도록 굶어 죽고 맞아 죽으면서도 어디 하소연조차 하지 못하며 노예처럼 살고 있는 북한 동포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바그다드에서 만난 한 교통 관제사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후세인에게 당한 것을 어떻게 다 이야기하겠는가. 후세인은 착한 이라크人들에게 폭력성을 심었다. 영양실조로 국민의 두뇌를 마비시켰다. 그는 이라크를 거대한 감옥으로 만들었다. 그는 이라크 국민 500만 명을 감옥에 보내 고문하거나 학살했다. 이라크의 지식인, 의사, 과학자, 기술자 등 500만 명이 국외로 강제로 추방당했다. 이라크에는 가난하고 못 배운 자만 남았다. 후세인을 피해 이라크의 지식인은 전부 이라크를 떠났다. 지금 교수가 길거리에서 담배를 팔고, 의사가 택시 운전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집이 없어 공중변소와 다리 밑에서도 자는데 그는 궁궐에서 살았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 관련자들을 반드시 처벌해야 할 것이다.”
저는 “그렇다면 왜 후세인 정권 전복에 이라크人들이 나서지 않았나”하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후세인은 가족을 인질로 잡고 젊은이들을 전쟁에 보냈다. 후세인은 주민들을 철저하게 감시했다. 부인이 남편을 배신하게 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신고하게 했다. 비밀경찰 조직이 얼마나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길에서 택시 운전사가 유도 질문을 해서 말 한마디 잘못하면 집 대신 감옥에 갔다.”
그는 “지난 30년간 아무도 변한 것이 없지만, 이제는 변한다는 희망이 있으니 기다릴 수 있다”며 “새 정부가 설 때까지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이제 이라크인들도 자유를 얻었다. 그 이상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2003년 5월 중순경 힐라市 (바빌론) 북쪽 1km 지점인 마하윌에서 1991년 후세인에게 대량 학살당한 시신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현장에는 약 3000구의 시신이 발굴된 상태였습니다. 힐라 주민들은 “이 일대에 1만여 구의 시신이 더 묻혀 있다”고 말했습니다.
악마의 편에 선 반전평화 운동
이라크 전쟁 당시 한국에는 좌파들의 반전(反戰)시위가 극에 달했습니다. 심지어 그들 중 일부는 이라크에까지 달려가 반전을 외쳤습니다. 반전평화(反戰平和)를 외치던 사람들은 국내에 돌아와 이라크인들의 궁핍한 모습을 전하는 데 힘을 기울였지만, “누가 이 이라크인들을 이렇게 만들었냐”는 데 대한 물음은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국내 방송사들도 이라크의 혼돈 상황을 보도하면서 “전쟁 때문에 고통받는 이라크에 빨리 평화가 와야 한다”는 방송을 수없이 내보냈습니다.
저는 도대체 그 많은 한국의 기자들과 반전평화팀의 운동가들이 이라크에서 무엇을 보고 온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들에게는 후세인의 몰락을 축하하며 거리에서 환호하는 시민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요? 후세인의 독재에 고통받으며 죽어간 그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던 것일까요?
이라크 취재 동안 저를 안내했던 압바스씨는 “후세인이 없어져서 이제 내 아이들에게도 미래가 있다”고 기뻐했습니다. 그는 “지난 35년간 그랬듯이 앞으로 35년이 지난다고 해도 외부의 도움 없이는 이라크인들 스스로 후세인을 제거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진심으로 미국의 도움을 고마워했습니다.
인권운동가인 사타르씨는 “이라크 백성들이 후세인의 사인 하나로 닭처럼 도살되고 있을 때 반전운동을 벌여 독재자 후세인에게 힘을 실어준 사람들은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2005년 7월 평택 미군기지 반대 시위에서 죽창으로 무장한 채 경찰을 공격하는 시위대.
종북 좌파들의 선악(善惡) 기준
종북 좌파들이 보는 이 세상 선악(善惡)의 기준은 오직 하나입니다. '미국을 반대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종북 좌파들은 미국을 반대하는 사람은 그가 지상 최악의 독재자이건, 인간 도살자이건 개의치 않고, 그를 위해 기꺼이 시위를 벌입니다.
이들은 이라크인들이 후세인 독재에서 고통받건 말건, 다시 후세인 세력이 집권해서 이라크인들을 도살하건 말건 개의치 않고, 미군을 반대하는 반전평화를 외치는 데 가장 앞장섰습니다.
이들은 2008년 미국 쇠고기를 먹으면 광우병에 걸린다는 선동으로 수개월 동안 폭력시위를 주도하여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을 사실상 무법천지인 '해방구'로 만들었습니다. 2002년 6월, 효순이 미선이가 훈련중인 미군 장갑차에 치여 죽자 곧바로 거대한 반미 촛불시위를 선동해 대한민국을 혼란으로 몰고 갔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세계를 경악시킨 중국의 독극물 분유 사건에 대해서는 일제히 침묵으로 일관했고, 불법조업을 단속중인 대한민국 해경을 살해한 중국 어선에 대해서는 시위는 커녕 일언반구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본질적으로 국민 안전과 자주권이라는 동일안 사안을 놓고, 이처럼 미국과 중국에 이중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이 국민 안전수호와 자주권 확보에는 애시당초 관심도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들의 궁극적 목적은 오직 하나, 반미 시위를 통해 국민을 분열시켜 국가보안법 폐지를 이끌어내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미국은 그들의 진정한 조국인 북한의 가장 위협적인 존재이며, 남한 적화통일의 가장 큰 현실적인 걸림돌이기 때문입니다.
2005년 맥아더 동상 철거시도 사건, 이라크 추가파병 반대, 평택 미군철수촉구시위, 한미FTA반대투쟁, 광우병촛불시위, 희망버스, 제주도해군기지건설반대의 배후에는 언제나 이들 종북 좌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각종 시민 단체나 정당을 내세워 활동하면서 일부는 야당을 숙주삼아 신성한 대한민국의 국회에 진출, 북한의 대남 적화통일을 위한 교두보 확보에도 성공하였습니다.
2008년 6월, 촛불시위 참가자들이 전경버스를 불태우고, 이를 이용해 바리케이트를 치고 있다. 당시 난동으로 경찰은 중상 93명, 경상 369명 등 총 462명 부상(2008년 7월 7일 현재 입원 환자는 73명) 등의 피해를 입었고, 전경버스 116대, 무전기 80대, 호출기 53대, 방패 203개, 헬멧 344개, 기타 장비 956개 등 총 1752점의 장비를 손실당했다.
이라크 내 종파 간 내전의 결과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할 것입니다. 이라크 국민들에게 적대감과 깊은 상처를 남길 것이고, 살육은 또 다른 보복을 낳고, 원한은 대를 이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