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비의 교육 바른 선비를 만드는 교육은 우선 올바른 인격을 도야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원만한 인격을 갖추지 못한다면 어떤 일도 해낼 수 없다. 그래서 선비 되려는 자에게 가장 먼저 교육시키는 것은 바른 마음을 닦는 일이다. 그런 다음 선비는 국가와 천하를 바르게 하는 ‘제가치국평천하’(齊家治國平天下)의 책무를 배운다. 국가와 천하를 바르게 하는 임무를 다할 때 참 선비가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른 인격을 닦어도 사회에 대한 임무를 다하지 못하는 사람은 참된 선비라고 할 수 없다.
선비는 원만한 인품과 사회적 임무를 배울 뿐 아니라 예술적 감수성을 풍요롭게 만드는 각종 예술 활동을 배우기도 한다. 선비는 서예를 쓰고 시를 지으며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기도 한다. 선비는 그런 예술 활동을 배우면서 그 내면을 맑은 감성으로 충만하게 하고 그것을 다시금 인격 도야의 재료로 활용한다. 이런 교육 과정을 통해 참 선비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선비의 교육에 졸업이란 없다. 아무리 높은 칭송을 받는 선비라도, 언제나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여기며 더 높은 완성을 위해 쉬임 없이 공부한다. 공부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공부하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선비의 참모습이기 때문이다. '선비 되기'의 교육은 끝없이 계속되며 선비는 영원한 학생으로 살아간다.
2) 조선시대의 학교
조선 시대의 교육은 조정에서 주도하는 관학(官學)과 지역의 선비들이 운영하는 사학(私學)으로 나뉘어 있었다. 관학은 궁극적으로 유교의 이념을 유지하고 필요한 관료를 양성하는 데에 있었다. 관학은 한양에서는 대학에 해당하는 성균관(成均館)과 중·고등학교에 해당되는 중학(中學)·동학(東學)·서학(西學)·남학(南學)의 사학(四學)에서 이루어졌고, 지방에서는 조정의 지원을 받는 향교(鄕校)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조선 시대의 교육은 관학보다는 사학(私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각 지방의 선비들은 주로 한 스승을 중심으로 학문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그 학문 공동체의 장소가 바로 서원이었다. 서원은 지역의 교육을 담당하였을 뿐 아니라 지역 사회의 도덕적 교화를 주도하기도 하였다.
서원 교육은 중앙 관료를 양성한다는 단순한 목적에서 진행된 것만은 아니다. 서원의 교육은 그보다 더 본질적으로 '도학(道學)의 실현'과 '참된 선비 만들기'라는 참교육 실현에 큰 비중을 두었다. 서원 뿐 아니라 초등학교 과정에 해당하는 서당이 곳곳에 설치되기도 하였다. 서당은 아동들에게 글을 깨우쳐주고 예절바른 몸가짐을 가르쳐주는 기초적인 교육 기관이었다.
3) 교육의 변화과정
조선 초기의 지식인들에게 부여된 임무는 조선의 건국을 정당화하고 새 국가의 운영에 필요한 통치 이념과 질서를 만들어내는 일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 초기의 교육은 국가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유능한 관료를 양성하는 데에 그 목적이 놓였고, 학생들의 목표도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진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 체제가 안정기에 접어들던 조선 중기부터 교육의 목적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 시작되었다. 진정한 선비의 길을 탐구한 사림(士林)의 선비들은 부귀나 출세가 아닌 자기 수양만이 진정한 학문의 목적이라고 주장하였고, 교육의 목적은 과거 급제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기 수양과 사회 정의 실현을 사명으로 여기는 참된 지사(志士)를 양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과거를 위한 교육에서 대의(大義)와 명분을 위한 교육으로 탈바꿈해 간 것이다.
사림의 선비들은 각 지방에 서원을 건립하고 참교육의 이상을 실현해갔고, 교육의 주체도 관학에서 사학으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물론 사림의 서원이라고 해서 과거를 아예 등진 것은 아니었지만, 과거는 출세를 위한 목표가 아니라 대의와 명분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해졌다.
2. 태교와 유아교육
1) 태교
임신은 소중한 생명이 탄생하는 시작이고, 태교는 원만한 인격이 만들어지는 첫걸음이다. 그래서 우리의 옛 조상들은 임신의 과정에 대단히 신중했고 태교의 중요성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정조 24년(1800)에 쓰인 <태교신기(胎敎新記)>에서는 "이름난 의사는 병이 생기기 전에 미리 다스리고, 아이를 잘 가르치는 자는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한다."는 말로 태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전통의 태교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태교를 함께 강조했고, 임신 중의 태교만 아니라 임신 전의 태교도 매우 중시했다. 아버지는 항상 절도 있는 몸가짐과 절제된 성생활을 하고, 천지의 기운이 교합하는 좋은 날을 알아두어 아내와 동침했다. 어머니는 임신을 위해 흑염소, 잉어, 가물치 등 영양가 높은 음식을 먹고 바른 심성을 수양하였다.
평온한 얼굴과 정성스러운 솜씨, 진실한 마음을 표현하는 말, 후덕한 마음이 임신 전 어머니가 지켜야 할 태교의 사덕(四德)이었다. 이와 같은 태교의 과정은 단순히 훌륭한 아기를 낳기 위한 부모의 바람만이 아니라 훌륭한 인물을 키워내는 실질적인 교육의 첫발이었다.
2) 태교이야기
<태교신기>에는 "스승의 십년 가르침보다 어미의 열달 태교가 더 중요하다."라는 말이 있다. 이만큼 옛날 어머니들은 태교의 중요성을 깊이 알고 있었다. 신라시대의 대학자 설총은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데, 요석공주는 설총을 임신했을 때 늘 <관음경>, <승만경>, <금강경> 등의 불경을 암송하였다. 이는 부처님의 은덕을 입은 훌륭한 아들을 낳게 해달라는 바램 때문이었다. 또 공자의 어머니 안씨 부인은 매일 니구산(尼丘山)에 올라 기도드리며, 훌륭한 자식이 태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이황의 학통을 이은 장흥효의 딸 정부인 안동 장씨는 어려서부터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훌륭한 어머니의 소양을 닦았다. 혼인한 후에는 남편을 공손히 섬기고 어려운 종갓집 살림을 일으켰다. 대학자 이현일 등 자녀 열 명을 태교할 때에는, 자녀들이 공부 잘 한다는 명성보다 선량하다고 칭찬받는 인물이 되라고 가르쳤다. 이들 뿐 아니라 율곡 이이와 여류시인 매창을 키워낸 신사임당, 자식을 위해 세 번 이사한 맹자의 어머니도 훌륭한 태교를 행했던 어머니였다.
3) 태교음식
음식이 바로 사람의 몸을 구성해가듯, 임신 중에 먹는 음식은 임산부의 몸과 태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전통의 태교에서는, 모양이 삐뚤어졌거나 날짐승이 쪼던 과일, 설익었거나 철 지난 과일, 우렁이와 가재, 나귀고기와 말고기 등을 임산부가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또 비늘 없는 고기를 먹으면 난산하고 엿기름과 마늘은 태를 삭이며 개고기를 먹으면 아기가 소리를 내지 못하고 오리고기와 오리알을 먹으면 아기가 거꾸로 나오게 되며 생강을 먹으면 육손이가 된다는 등 다양한 속설이 널리 퍼지기도 했다.
태교를 잘 하기 위해서는 음식 뿐 아니라 행동도 신중해야 한다. 전통의 태교에서는 임산부가 조금이라도 바르지 못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살아있는 것을 죽이거나 해치는 행동, 거짓말을 하거나 헛된 욕심을 부리는 행동, 남을 미워하거나 시기하는 행동 등 선하지 못한 행동들은 모두 해서는 안 된다. 그런 행동들은 직접적으로 태아의 심성에 영향을 준다고 믿었다. 어머니의 행동이 선량해야 태아도 선량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4) 출산 후 교육
왕실이나 양반가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바로 목욕을 시켰는데, 목욕물은 매화, 복숭아, 자두나무의 뿌리, 호두를 넣어 끓인 다음, 산돼지의 쓸개를 섞어 만든 것이었다. 이것은 아기의 건강과 위생 때문만이 아니라 여러 약물들이 아기에게 흡수되어 첫 두뇌 발달과 정서 안정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었다.
생후 3세 이전에 두뇌 발달과 인격 형성이 거의 다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이미 과학적으로 입증된 바 있다. 옛 선조들도 이 점을 알고 있었으므로 영아들의 두뇌 발달과 정서 함양을 위한 여러 가지 교육법을 탐구했다. 지금도 행해지고 있는 곤지곤지나 잼잼의 놀이법 등이 바로 그것이다.
곤지곤지는 손바닥의 경혈을 눌러주어 기혈의 순환을 돕는 방법이었고, 양손을 균형 있게 이용하는 잼잼이나 짝짜궁은 뇌의 평형적인 활동을 돕는 것이었다. 요즘은 보기 힘든 부라부라좌법은 아기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아기를 들어 살살 흔드는 것으로, 아기의 척추를 곧게 세워 척수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고 뇌의 기능을 향상시켜주는 것이다.
5) 유아교육
아기가 젖을 떼고 말도 제법 할 때가 되면, 본격적으로 몸가짐 공부와 글공부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우선 <천자문>을 가르쳐 글자 하나하나를 알아가도록 가르치고, 그 다음엔 <소학>이나 <추구(推句)>, <동몽선습>등을 가르쳐서 문장을 익혀나가게 한다. 한자 교육이 주를 이루었지만 한글도 함께 가르쳤다.
이 시기의 교육은 주로 반복을 통한 암기 교육이었다. 유아는 아직 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우선 글자와 글을 반복적으로 읽고 암기하여 머리 속에 넣어둔다. 그런 다음 시간이 더해가면서 예전에 외웠던 구절들을 되뇌면서 그 의미를 자연스럽게 깨달아가는 것이다.
몸가짐의 공부는 <소학(小學)>의 내용을 직접 생활 속에서 실천하게 하는 것이다. 특히 ‘쇄소응대진퇴’(灑掃應對進退)의 몸가짐, 즉 물 뿌려서 마당을 쓸고 어른에게 공손히 응대하며 나아가고 물러남에 공경한 몸가짐을 유지하는 것을 가장 기본 사항으로 삼았다. 또 글공부를 할 때에는 욕심내어 많이 암기하는 것보다 바른 자세로 앉아 정신을 집중하여 또박또박 읽어나가는 태도를 더욱 중요하게 여겼다.
3. 초등교육
1) 서당
서당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다른 어떤 교육 기관보다도 숫자가 월등히 많았고 또 오랫동안 유지되던 사립교육기관이었다. 서당은 조정의 규제를 받거나 유림의 공론을 거쳐 설립되지도 않았다.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그 규모에 상관없이 서당을 열어 학생을 가르칠 수 있었다.
서당은 가장 대중화된 교육기관이기도 했다. 양반집 자제 뿐 아니라 평민 자녀들까지 서당에 다니며 기초 글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양반 자제들에게 서당은 더 높은 학교에 진학하기 위한 기초 과정이었던 반면, 평민 자제들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 교육의 기회였다. 이런 점에서 서당은 가장 널리 퍼져있던 기초 교육기관이었던 것이다.
서당은 운영 주체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뉠 수 있다. 가난한 선비가 생계를 위해 아이들을 가르쳤던 생계형 서당이 있는가 하면, 부잣집 자제를 위해 가정교사를 들였던 독선생 서당도 있었고, 한 집안에서 후손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개설한 문중 서당과 마을 사람들이 뜻을 모아 자치적으로 설립한 마을 서당도 있었다.
2) 선생님과 학생
어린이는 보통 7-8세 때 서당에 입학했는데, 보통 동짓날에 입학식을 했다. 입학한 후 대략 15-16세까지 서당을 다녔다. 지금으로 치면 중학교 과정까지 서당에서 마쳤던 것이다. 학생수는 적게는 서너 명에서 많게는 수십 명까지 되었고, 학생 연령은 7세에서 16세까지 다양했다. 하지만 종종 20세가 넘는 늙은 학생이 어린 아이들과 함께 글공부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서당의 개설에 어떠한 제재도 없었듯, 서당 훈장의 자격에도 특별한 기준이 없었다. 그래서 훈장들의 실력은 천차만별이었다. 경서와 역사 등에 박식한 훈장은 거의 드물었고, 대개가 주석서와 한글 언해본을 참고하며 경서의 뜻을 해독하는 수준이었다. 더구나 작문을 할 줄 모르는 수준 미달의 훈장도 허다했다고 한다. 서당은 대개 훈장과 학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비교적 큰 서당에는 접장을 따로 두기도 했다. 접장은 학생들의 통솔자이자 훈장의 수업을 도우면서 신입생들을 지도하는 조교 같은 사람이었다.
3) 교육내용
서당에서 가르치던 것은 보통 강독(講讀), 제술(製述), 습자(習字)의 세 가지였다. 강독은 소리 내어 책을 읽고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고, 제술은 글짓기와 논술이었으며, 습자는 글씨쓰기이다. 강독은 <천자문>에서 시작해서 <동몽선습>, <소학>, <명심보감>, <사서삼경>, <사기>, <통감>, <당송문> 등으로 점차 그 수준이 높아져갔다. 제술은 5언 절구나 7언 절구, 작문 등이 주를 이루었다. 학식 높은 훈장이 있는 서당에서는 여러 가지 문장 형식과 문체를 연습하기도 했지만, 규모가 작은 서당에서는 아예 제술을 가르치지 않았다.
습자는 정자 쓰기인 해서를 위주로 연습시켰는데, 이것이 익숙해지면 필기체인 행서와 초서를 가르쳤다. 책을 베끼거나 편지 쓰는 법을 가르쳐 실제로 활용하도록 하였다.
4) 서당의 일과
서당에서는 처음 학동들에게 <천자문>의 한 글자 한 글자를 반복적으로 소리 내어 읽고 글자를 암기하게 했다. 그 다음에는 <소학>이나 <동몽선습>을 같은 책을 같은 방식으로 읽으면서 문장의 이치를 깨닫게 했고, 마지막으로 학동 스스로 그 뜻을 깊이 깨치도록 이끌어주었다.
서당의 학동들에게 정해진 학년은 없었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천자문> 한 권을 몇 달에 떼기도 하고 몇 년을 읽기도 했다. 다만 훈장이 보기에 책 한 권을 완전히 소화했다고 판단되면 다른 책을 공부하게 했다. 따라서 책 한 권을 뗀다는 것은 한 단계의 공부를 마친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학동이 책 한 권을 떼면, 그 집에서 떡을 해서 서당 사람들을 대접하는 ‘책거리’ 잔치를 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강압적으로 주입시키는 지루한 수업을 한 것만은 아니었다. 학동들이 지루해할 때는 삼국지 같은 옛날 얘기로 흥미를 돋우기도 했고, 더운 여름철에는 딱딱한 경서 강독수업보다는 시를 읊고 외우는 풍류를 가르치기도 했다.
4. 중등교육 - 서원
1) 서원
정선 <도산서원> 중 일부. 서당이 초등교육기관이라면, 조선시대의 중등교육기관으로는 한양의 사학(四學)과 지방의 향교 같은 관립교육기관이 있었고, 서원 같은 사립교육기관이 있었다. 조선 중기 정치적 좌절을 겪은 사림들이 지방으로 낙향하여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는데, 이것이 바로 서원이 건립되기 시작한 시초였다.
서원은 사림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교육도 성리학적이고 도학적인 공부가 주를 이루었다. 진지하게 자기를 수양하고 도덕적인 이념으로 정치를 이끌어가는 진정한 선비를 양성하는 것이 서원의 교육 목적이었다. 이와 같이 서원이 유교적 국가 이념을 널리 전파하였기 때문에, 조정에서도 사액서원(賜額書院) 제도를 두어 서원을 장려했다.
서원은 교육 뿐 아니라 제향(祭享)의 역할도 담당했다. 서원에서는 학덕이 높고 충절이 훌륭한 선비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는데, 이것은 지역 유생들 뿐 아니라 어린 학생들에게도 삶의 지표를 지정해주는 나침반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제사 의식에 빠짐없이 참가하면서 훌륭한 선비상을 가슴 속에 새기고 똑같이 살아갈 것을 암묵적으로 맹세했던 것이다.
2) 서원의 생활
모든 서원에는 저마다의 원규(院規)를 두었다. 이것은 학생들이 학교 생활을 하면서 반드시 지켜야 할 교칙과 같은 것이었다. 조선의 서원에서는 송나라의 주희가 만든 <백록동서원규>와 이황이 지은 <이산원규>를 원규의 기본 골자로 삼았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기숙사규칙이나 독서 방법, 도서관 활용, 출석 등에 관한 세세한 규칙을 정했다.
학생들의 출석은 주로 <식당록>을 근거로 확인했다. <식당록>이란 식당에서 식사를 한 사람들의 이름을 적는 명부로서, 누가 밥 먹었는지를 보고 학생의 출석여부를 확인했던 것이다. 그리고 제사 등의 행사가 있을 때에는<시도기(時到記)>에 이름을 올렸는데, <시도기>란 행사 참가자들의 방명록과 같은 것이었다. 이것도 출석부의 역할을 했다.
서원에서는 서당처럼 소리 내어 암송하는 공부뿐만 아니라 선생님과 학생이 일대일로 문답하는 공부 방법도 많이 실행했다. 이런 공부 방법은 글의 의미를 깨우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을 뿐 아니라 사제 간의 진지한 교류에도 많은 보탬이 되는 것이었다.
3) 선생님과 학생
서원에는 원장(院長), 강장(講長), 훈장(訓長) 등 여러 직책의 교사가 있었다. 원장은 오늘날의 교장 선생님과 같은 사람으로 산장(山長) 혹은 동주(洞主)라고도 했다. 원장은 보통 퇴직한 고위관리나 덕망이 높은 큰 선비가 맡았다. 강장은 강의를 담당하는 선생님으로 주로 경서를 강의하고 예법을 가르쳤다. 또 훈장은 학생들의 서원생활을 지도하는 훈육교사였다. 이들은 모두 비교적 높은 수준의 학식과 품덕을 갖춘 자들로, 지역 유림들의 합의를 통해 공인받은 교사들이었다.
학생들의 입학자격은 서원에 따라 저마다 달랐지만 대체로 입학이 어려운 편은 아니었다. 보통은 생원이나 진사 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우선 입학시켰고, 다음으로는 초시(初試) 합격자를 입학시켰다. 그러나 초시에도 합격하지 못한 사람이어도 면학열이 뜨겁고 품행이 단정하면 큰 문제없이 입학할 수 있었다.
4) 교육과목
서원에서는 유교의 경전을 가장 기본적인 학습 교재로 삼았다. <사서삼경>은 물론이거니와 그 범위에서 확대되어 유교의 <13경>을 숙지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성리학 관련 서적들을 공부했다. 예를 들어 주돈이의 <태극도설>, 장횡거의 <장재집>, 이정 형제의 <이정집>, 주희의 <주자어류>, <성리대전> 등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서원의 공부가 유교 경전이나 성리학자들의 저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경전 학습과 함께 강조되었던 것은 역사 공부였다. 그래서 <사기>, <자치통감>, <송사> 같은 방대한 역사서도 함께 공부했다. 그리고 정서를 함양하고 표현력을 키우기 위해 각종 문학서적들도 공부했다. <이태백시집>, <두보시집>과 <고문진보> 같은 문학서적들이 그 교과서가 되었다.
또 역법(曆法)이나 산술, 간단한 의학지식을 쌓는 실용 학습도 간간히 이루어졌다. 하지만 깊이 있는 사상 서적이라 해도 노장철학이나 불교에 관한 책은 절대 금지되었다. 이것들은 정통 유교의 정신을 해치는 이단사설로 판정되기 때문이었다.
5. 중등교육 - 향교
1) 향교
서원이 사림들을 중심으로 각 지방에 세워진 사립학교였다면, 향교는 정부가 세우고 지원했던 지방의 사립 중등학교였다. 향교는 오늘날의 공립 중·고등학교로,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성균관보다는 낮은 단계의 교육 기관이었다. 향교는 중앙의 성균관보다는 낮은 학교로서 한양의 사학(四學)과 등급이 같았다.
원래 향교가 세워진 것은 지방에 유교 이념을 널리 전파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학생들의 교육 뿐 아니라 각종 제사 거행과 향촌의 교화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부, 목, 군, 현에 각 하나씩 설치되었고, 학생수도 부와 목은 90명, 군은 50명, 현은 30명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국가의 보조가 중단되고 흉년까지 연이어 들면서, 향교의 운영에 큰 지장이 생겼다. 결국 향교는 공교육을 담당하는 교육 기관의 기능을 잃고 점차 돈 있는 지역 유지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명분의 장소로 전락해갔다. 하지만 선비들의 활동과 특권을 보장해 주는 중요한 향촌기구로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2) 향교의 생활
향교는 서원과 동등한 중등 교육기관이었으므로, 배우는 과목도 모두 동일했다. 유교의 경전과 성리학 서적, 그리고 역사와 문학을 배웠으며, 간간히 역법, 산술, 의술 같은 실용 지식도 습득했다. 향교 안에서 학생들이 생활하는 것도 서원과 비슷했다. 선생님과 일대일 문답수업을 받았는가 하면, 각종 행사에 반드시 참석하여 「시도기」에 이름을 올려야 했다.
다만 서원과 다른 점이 있다면, 향교의 학생들에게는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학생들의 출석수와 지방 관찰사의 평가를 기준으로, 우수한 학생은 과거 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반면 출석률이 저조하고 성적도 좋지 않은 학생은 학생 신분을 박탈당하기도 했다.
3) 향교의 선생님
향교의 선생님은 중앙 조정에서 파견되는 사람들이었다. 조정에서는 문과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에게 '교수관(敎授官)'이라는 호칭을 주고 지방 각지의 향교의 교사로 파견했다. 교수관은 '교수'와 '훈도(訓導)'로 구분된다. 교수는 6품 이상의 직급으로 주나 부처럼 큰 지방의 향교에 부임했고, 훈도는 7품 이하의 직급으로 군이나 현처럼 작은 지방의 향교에 부임했다.
그러나 모든 향교에 교수관을 파견한 것은 아니었다. 많은 향교에서는 생원이나 진사 시험에 합격한 자들이 향교의 선생님이 되었다. 이런 향교의 선생님들은 당연히 정식 관리가 아니었고 조정의 녹봉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가르치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일반적으로 글공부를 한 선비들은 향교의 선생님이 되려 하지 않았다. 힘든 과거 시험공부를 해서 급제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조정에 나아가 포부를 펼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결국 향교에는 선생님이 부족했고, 급기야 향촌의 유림들이 나서서 자치적으로 선생님을 임명하고 향교를 운영해 갔다. 그 결과 중앙 정부의 향교도 점차 사립 교육기관으로 변모해갔다.
4) 향교의 학생
향교에는 보통 서당 공부를 마친 16세 이상의 학생이 입학했다. 향교 학생 열 명의 추천을 받고 <소학> 시험을 치러 합격하면, 양반 평민이 차별 없이 입학할 수 있었다. 또 향교의 학생이 되면 신분 차별 없이 군역을 면제 받았고, 과거 시험에 응시할 자격도 동등하게 주어졌다.
그러나 실제로 과거 시험을 응시하는 데에는 보이지 않는 차별이 여전히 존재했다. 그래서 같은 향교에서 공부한 동학이라 할지라도, 양반의 자제는 소과나 문과에 응시한 반면 평민의 자제는 주로 각종 잡과에 응시했다. 조정의 지원이 뜸해지고 향교 교육의 질이 저하되면서, 향교의 교생 중에는 평민이 많아졌다. 부유한 양반집 자제들이 점차 이름 높은 선비가 운영하는 서원으로 입학하면서, 공교육의 권위를 상실한 향교에는 가난한 평민의 자녀가 많아진 것이었다.
6. 과거
1) 선비와 벼슬길
선비는 근본적으로 자기를 수양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신념을 가진 지성인이다. 그래서 선비는 늘 벼슬길에 올라 위로 임금을 섬기고 아래로 백성을 편안히 하는 도학 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려 했다. 공부의 중요한 목표는 바로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었다. 과거 급제는 자기의 포부를 실천해갈 수 있는 첫걸음일 뿐 아니라, 본인과 그 가문에 더없이 영광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선비가 반드시 벼슬길에 올라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천하에 도가 없을 때 선비는 자기를 감추고 수양을 하면서 때를 기다려야 한다. 무턱대고 벼슬에 나가 무도한 세상에 휘말리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선 중기의 사림파 선비들은 벼슬에서 물러나 향촌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자기를 수양하고 도를 실현하여 향촌 사회에서 덕망을 쌓아갔다. 그들은 처사로 은거하고 있었지만, 그 덕망은 조정의 대신들보다 훨씬 높았다. 선비는 수기치인의 이상을 버려서는 안 되지만, 그것이 과거와 벼슬을 통해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이 조선의 향촌 선비들이 보여준 위대한 일면이었다.
2) 과거의 종류
조선시대의 과거는 문과(文科)와 무과(武科), 잡과(雜科)로 나뉜다. 이 중 가장 좋은 대우를 받는 과거는 단연 문과였다. 성리학적 이념 위에 건설된 조선에서는 지식인을 최우선으로 대접해왔기 때문이다. 문과에는 예비 시험은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가 있었는데, 이것을 합쳐 소과(小科)혹은 사마시(司馬試)라도고 불렀다. 이 시험에 합격해야만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과 하급 문관에 등용될 수 있 자격, 그리고 대과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무과는 고급 무관을 뽑는 시험으로 용호방(龍虎榜)이라고도 불렀다. 무과는 소과와 대과의 구분 없이 한 번만 치렀다. 시험과목은 각종 무기술과 격투술, 그리고 경서 및 병서에 대한 것이었다. 보통 무관 자제나 향리, 양인(兩人) 등이 응시했다. 잡과는 통역사 시험은 역과(譯科), 의사 시험인 의과(醫科), 천문 지리 역법의 시험인 음양과(陰陽科), 법률가의 시험인 율과(律科)로 구분된다. 이 역시 소과와 대과의 구분은 없었고 중인 이하의 사람들이 응시했다.
3) 과거 시험공부
옛 말에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집에서는 엿 달이는 냄새가 끊이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당분 섭취가 두뇌 활동을 촉진시켜주기 때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시험을 준비한다는 것은 당사자나 가족 모두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보통 문과의 시험은 1차 시험인 초시와 2차 시험인 복시가 있었고, 그것들은 각각 초장, 중장, 종장의 세 단계로 나뉘어 치러졌다. 초장에서는 경전에 대한 암기와 이해를 평가했고, 중장에서는 문장력을 평가했으며, 마지막 종장에서는 조정 현안에 대한 논술 시험, 즉 시무책(時務策)을 치렀다.
따라서 과거 준비생의 공부는 경전의 암송과 이해가 기본이었고, 거기에 더해 문학적 자질과 표현력도 충분히 배양해야 하며, 국정 현안에 대한 진지하고 참신한 견해도 갖추고 있어야 했다. 또 보기 좋은 답안 작성을 위해서는 서예 연습도 빠뜨리지 말아야 했다. 한 마디로 조선 사회 지성인이 갖추어야 할 모든 소양을 다 준비해야 했던 것이다.
4) 과거시험장 광경
과거 시험은 어떤 식으로 치러졌을까? 큰 시험과 작은 시험에 따라 절차상의 차이는 있었지만, 기본적인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녹명(錄名) : 응시원서를 제출하는 것이다. 성명, 본관, 거주지와 부·조·증조·외조의 관직과 이름, 본관을 기록한 사조단자(四祖單子)를 낸다.
시지(試紙) 구입 : 시험 답안지를 구입하여 녹명과 같은 사항을 기록하고, 그 위를 종이로 봉한다. 감독관이 개입하는 부정행위를 막기 위해서였다.
시험장 입장 : 시험 당일 새벽에 문을 열면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들어갈 때는 일일이 소지품을 검사했고, 입장 완료 후엔 문을 걸어 잠근다.
시험문제 풀기 : 시험은 보통 필답고사와 구술시험으로 나누어 치러졌다.
답안 제출과 채점: 수험생은 수권소(收卷所)에 답안지를 제출한다. 채점은 당일에 이루어지고 평가는 모두 9등급으로 나뉜다.
출방(出榜) : 합격자를 발표하는 절차이다. 이 자리에는 임금과 문무백관이 모두 참석한다. 장원 급제자에게는 어사화, 홍패, 양산, 주과(酒果)가 내려진다. 은영연(恩榮宴) : 임금이 과거 급제자들에게 베푸는 축하 잔치이다.
유가(遊街) : 급제자는 3 - 5일 동안 거리 행진을 한다. 이 때 풍악을 울리고 광대가 춤을 추며 흥을 돋운다. 시골 출신들은 고장 현령의 후한 대접을 받는다. 영광스럽고 경사스러운 순간이었다.
5) 부정행위
어떤 시험이든 부정행위는 있게 마련이었다. 옛날 과거 시험에서도 다양한 부정 행위가 일어났다. 컨닝페이퍼를 만드는 단순 행위에서 집단적으로 모의한 조직 부정까지 형태도 무척 다양했다. 순조 18년(1818) 성균관 사성 이영하가 올린 상소에는 8가지의 부정행위가 기록되어 있다.
차술차작(借述借作) : 남의 글을 몰래 베껴 쓰는 것
수종협책(隨從挾冊) : 책을 시험장에 가지고 들어가는 것
입문유린(入門蹂躪) : 수험생 아닌 사람이 시험장에 들어가는 것
정권분답(呈券分遝) : 미리 써놓은 답안지로 바꿔치기 하는 것
외장서입(外場書入) : 시험장 밖에 있는 다른 사람이 써서 주는 것
혁제공행(赫蹄公行) : 시험 문제를 미리 유출시키는 것
이졸환면출입(吏卒換面出入) : 감독관을 바꾸어 들여보내는 것
자축자의환롱(字軸恣意幻弄) : 답안지를 가지고 갖은 농간을 부리는 것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부정 행위가 더욱 심해져서 거의 통제가 불가능해졌다. 또 지방의 향시(鄕試)에서는 수험생들이 작당하여 시험장을 습격하고 감독관을 폭행하는 난동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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