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재진의 한국 나들이]
2.나의 고모님
나의 작은 고모님 금례씨는 금년 나이 여든이시다.
고모님께선 62년 전 고향으로 시집 가셨다가 이번 처음으로 친정이라 찾아오셨다. 80할매 친정 나들이 하는걸 누가 봤을까? 그것도 머난먼 이국땅에로, 그의 아버님 오라버님도 저세상 가신지가 오래고 안 계시는 친정으로… 혹시 여름철이나 됐더란면 백두산 관광에라도 이름을 걸텐데. 고모님께선 우리들을 만나뵈러 오신 것이다.
2월 26일에 오셨다가 3월 9일에 돌아가셨다. 연길에 딱 10일간 체류하신 것이다. 조금만 더 계시다 가시라고 그처럼 만류 했건만 좀처럼 말을 들으시질 않으셨다. 조카들이 어머님 모시고 잘 사는걸 봤으니 시름을 싹 놓으셨다는 것이고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 새해 농사차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였다. 팔십 고령 파파 할매가 농사를 짓다니, 이곳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나의 고모님께선 절라남도 강진군 군동면 중산리라는 시골에서 홀로 사신다. 큰 딸님 덕례씨는 병환으로 이세상을 뜨셨고 큰 아들 재홍씨는 교통사고로 아쉽게 갔다. 고모부는 여섯해나 누워 앓으시다가 작년(05년) 11월에 저세상으로 가셨다. 작은 아들 재원이는 인천에서 살고 있고 작은 딸 덕희는 부천에서 살고 있다. 고모님께선 일찍이 친정에 한번 와 보시고 싶었으나 누워계시는 환자 때문에 집을 비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난 년초에 고모님께선 그곳의 풍속대로 점쟁이를 찾아가 일년 운수를 보아달라고 하였다. 점쟁이가 첫마디로 하는 말이 “먼길 다녀오심에 평생 못한 소원 성취 하리다. 가는 길은 있어도 오는 길은 없으니 길행이요…” 가는 길은 뭐고 오는 길은 또 뭔지 나는 모른다. 고모님은 점괘가 마음에 쏙 들었으나 넉넉치 못한 자식들에게 부담 주기 미안하여 그 소원을 차마 입밖에 번지실 수가 없었다. 한평생 모든 것을 자식들에게만 받쳐오신 제일로 존경스럽고 제일로 불쌍하신 나의 고모님이시다.
얼마 안되는 논밭은 고모부님께서 앓아누우시자 페경 해버리고 지금은 800평 가량의 남새밭을 홀로 가꾸고 계신다. 무우나 감자 강냉이따위를 심어 자식들한테 보내주고 가을이 되면 큰 며느리 큰 사위(큰 아들과 딸은 없지만) 작은 딸 작은 아들 앞으로 고추가루를 열 둬키로씩 골고루 보내준다.
매일같이 동이 트기 바쁘게 자리에서 일어나 기음을 매시고 해가 뜨면 각가지 남새들를 캐여 이고 지고 읍내로 가신다. 중산리에서 강진읍까지는 이십여리 길, 경운기차(手扶机)나 만나 얻어 타는 날이면 운수가 좋은 날이라고 한다. 마을 뻐스를 타려면 돈을 내야하지 않겠는가? 뻐스놀이로 호광 부리면 남는 돈이 없다. 운수가 사나워 경운기차를 못 잡으면 하는 수 없이 뻐스를 탄다. 정심 식사는 집에서 품고 간 삶은 강냉이나 고구마 감자따위 뿐이다. 갖고 간 남새를 다 팔고난 후 허리를 펴며 이마에 손그늘을 지우고 해을 본다.
해가 아직도 소장바쯤 남아 있으니 뭐든 더 팔아 타고 온 뻐스값 반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광주리를 안고 다니며 남새를 많이 갖고 와 다 팔지 못하는 사람들의 것과 떠넘겨주고 빨리 집으로 돌아 가려는 사람들의 것을 한바구니 사 들인다. 고것을 팔아 몇푼이나 더 하겠소만은 고모님의 생각은 달랐다. 장사란 게으름 피워선 아니되고 일거에 큰 돈 바라서도 아니된다. 티끝 모아 태산이라 하였다. 그 뉘시든 장사 해 돈 좀 벌라믄 우리 고모님 요 한점만 딱 배워봐…
고모님께선 언제나 제일 늦게 어두워져서야 장터를 떠나군 하셨다. 굶주리고 지친 몸으로 이십여리 밤 길을 걸어야만 했다. 옆구리에 낀 광주리엔 남편에게 대접 할 참이슬소주 한병, 애들에게 나누어 줄 알사탕 한봉다리가 담겨져 있다. 고달픈 몸이라지만 마음만을 뿌듯하고 힘이 솟았다. 비록 힘들고 씬찮은 장사라 하지만 그 장사로 가정을 키웠다. 하기에 그는 평생 후회를 모르고 희망만을 안고 살으셨다. 자식들은 모두 출세시켜 시가지로 보냈고 령감님은 몸져 누우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광주리엔 약 봉다리 하나뿐, 소주도 알사탕도 없었다.
무정한 세월 허무한 인생이라 한탄도 하셨다. 다 떠나가고 몸 져 누우시고… 고모님께선 그래도 여전히 새벽에는 기음을 매고 해가 뜨면 읍내 장터로 나가셨다. 변함 없이 희망에 들뜬 삶을 찾아 재 출발을 하군 하셨다. 큰 손자 대학 갈 때 학비에 보탬하라고 천만원(인민페 약 팔만 여원)을 주었고 둘째 손자가 고중에 들어가니 또 오백만원 주었다. 또 다음 손자를 위해 돈을 모아야 한다는 할머니ㅡ 그가 바로 나의 작은 고모님이시다.
고모님께서 륙십 여년간 한시도 잊지 못하고 한번만이라도 다녀가고 싶으시던 친정집은 “남도 마을”을 떠난지가 오래다. 자식들 칠남매 중 둘째 딸 하나가 조선에서 사는 외에 모두다 중국 조선족 자치주의 수부인 연길에 들어와 취직하고 가정을 이루었다.
신사년 사월 사일 사시에 칠량 동백리에서 태여났다는 큰 누님 김 서례씨는 어려서부터 령리하고 이쁘게 생겨 어데로 가나 뭇 사람들의 총애를 흠뻑 받았다. 온 마을 사람들은 그애가 사주팔자를 너무도 잘 쥐고 태여났기에 장래에 기막히게 큰 인물로 될거라 예측하던 일을 고모님은 우리들 앞에서 몇번이나 자랑하며 곱씹으셨는지 모른다. “중국 현대 명인 사전”에까지 김 아무깨 그 이름이 수록 되고 소개 된바이니 옛날 고향 어르신들의 예언이 참으로 맞아 떨어진 것이라해도 과언은 아닌거고 “산좋고 물맑은 동백마을을 뜨지 않았더면 큰 누님은 한국 총통은 몰라도 총리는 됐을 겁니다.”라고 한 나의 롱담에 고모님은 연신 “그럼, 그렇구말구!”를 부른다.
큰 누님께선 정년 퇴직 한 후 한국에서 박사 공부하는 큰 애와 사업을 벌린 작은 애를 돕고자 한국에로 자주 갔었다. 인젠 필요 없게 되였다. 작은 애는 북경으로 돌아와 사업하게 되였고 큰 애 역시 박사 공부를 끝낸 후 높은 봉금도 마다하고 얼마 후면 중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법학 박사에다 몇개국의 변호사 자격증을 가졌고 또 중국말 한국말 외에 일어 영어 로어까지 정통한 그애는 능력상 제엄마를 몇곱절 초월 하였다. 비록 “명인사전”엔 언제 오를 일인진 모르지만 말이다. “청 출여 남, 승여 남(青出于蓝, 胜于蓝)”이라 했거늘 누님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누님은 인젠 한국에로 다시 갈 필요가 없게 된 것이라 마지막으로 한국으로 간 것이고 고모님은 그런 정황들을 알기나 한듯이 큰 누님 앞에 “친정 나들이” 의향을 내비치셨다.
“중국 갔다 올라믄 돈 얼마나 든다냐? 나 댕겨올란디.”
자식들 앞에선 참아 말꼭지가 떼여 지질 않던, 몇십년을 가슴속에 품고 살아 오신 버리질 못 할 념원이셨다.
“고모, 참말로 하늘의 안배입니다. 이번 일 다 마무리하믄 고모 모시고 중국에 갈라구 한겝니다. 이제 돌아가면 내 언제 또 나오겠어요.”
“오냐 오냐, 그랬냐? 오사게(매우) 반갑고 고맙다 잉…”
팔십세 로인은 너무 기뻐 어린애마냥 어쩔바를 몰라했고 그자리에서 자식들 한테 전화를 쳐 자랑 하였다.
“느그 큰 누나 중국 갈 때 날 덱고 갈란다닝껭 느그 그리들 알거라 잉.”
그 자식들도 기뻐마지 않았다. “느그들 외갓집 북간도 쓰렁바우에 있으닝껭 이제 꼭 가보고 어른들한티 인사해사 쓴다 잉.” 참으로 자장가 처럼 타령 처럼 들어온 부탁, 그러시던 어머님께서 외갓집엘 가신단데 어느 자식인들 기뻐하지 않겠느냐 말이다. 출국 수속을 밟고 항공권을 끊고 이곳 친척 인수에 맞추어 례물을 사는 등 만단의 준비를 인츰 다 끝냈다. 헌데 두달이 넘도록 누님께서 결론을 봐야 할 사무가 풀리질 않는 것이였다. 우수가 지나고 경첩이 다가 온다. 농사일은 절기를 절대 어길 수 없는 법이라고 고모님께선 중국 친정 나들이를 포기하려 하셨다.
“니가 안 가믄 나도 안 갈란다.”
“아니요, 이달 26일날 가기로 했으니 시름 푹 놔도 됩니다.”
2월 26일날 큰 누님의 친구 연란씨가 볼일을 끝내고 연길로 돌아오게 되였는데 누님은 하는 수 없이 그 친구분한테 고모님의 행차를 돌봐 달라고 부탁 했던 것이다. 25일 저녁 인천에 사는 동생 재원이네 집에 모여 고모님의 “일로평안(一路平安)”을 기원하는 만찬회를 가지였다. 식사 후 큰 누님의 큰 딸애가 고모할머님 앞에 한화 70만원을 로비로 내놓았다. 물론 절대로 받으려 하지 않았다. 이미 왕복 항공권을 끊었고 려비도 푼푼히 갖춘터였지만 누님은 15년간 가슴에 담고 밀려 온 마음의 빚을 갚고저 기어이 떠밀어 주었다.
1990년 봄, 작은 고모님께선 나의 어머님과 큰 누님의 방한(访韩) 초청서와 비행기표를 보내 왔었다. 바구니 남새 되거리 장사로 한푼 두푼 힘들게 모은 돈 60만원을 털어내고 다른 친척들과 나의 외가들까지 찾아 다니며 20만원을 더 얻어 비행기표를 샀던 것이다. 그돈 그정을 갚지 못하여 큰 누님과 우리형제들은 늘 불안하기만 하였었다. 드디여 기회가 온지라 누님께서 놓쳐버릴리가 만무하다.
이튿날 인천 공항에 와서야 배동인은 큰 조카 본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때는 이미 늦어버려 고모님은 비행기에 오르시는 수 밖에 없었다.
오전 11시 10분에 고모님께선 연길공항에 내려 검사를 마친 후 12시 10분이 되여서야 외국인 출구에 모습을 나타냈다. 나의 작은 고모님은 작은 호칭 그대로 작달막한 분이시다. 한메터 반의 키도 안 되고 얼굴은 가마잡잡하고 무지 못 생겼는데 딱 내 하내를 닮으셨다. 키나 얼굴뿐만 아니라 말투나 행동, 성격까지도 그러셨다. 반백인 머리칼에 가마잡잡하신 얼굴, 작으나 탄탄하고 꿋꿋하신 체구ㅡ 완전 무결한 시골 할머니였다. 삼년전 내가 고모님을 찾아가 뵐 때 보다 퍼그나 더 로문하셔 보였다. 마침 일요일인지라 우리 형제 자매들은 어머님을 모시고 있는 막내 동생집에 모였다. 차례로 큰 절을 올린 후 환영 오찬이 시작되였다.
“왔다와메이ㅡ 뭣을 이 많이 챙겼을꼬 잉?” 고모님은 끊임 없는 찬탄뿐 포도술 한잔도 받을 념을 하지 않으셨고 반찬도 몇 저가락 집질 않으셨다. 우리 어머님은 감탄사를 “웠다워메이ㅡ”하시는데 고모님은 “왔다와메이ㅡ”하셨다.
“고모님, 비행기에서 맛나는 점심식사 솔찬히 하셨나 봅니다?”
너무 잡숫지를 않으시기에 비행기에서 공짜로 공급하는 음식이니 시골로인-의 본색을 피력 하셨으리라고 나는 속으로 긍정 하였다.
“아니여, 한낫도 안 묵었땅껭…” 고모님의 말에 나는 리해가 가지 않았다. “곽밥 주고, 빵 주고, 커피에다 쥬스, 머시기 머더라… 많고 많은디, 볼랑껭 오천원 육천원 받아 묵겠더랑께, 너무 비싼거 아니겠어야?”
“거그서 드리는건 뭐나 다 서비스로 비행기 표값에 속한거라는데요.”
내가 한마디 했다. 고모님은 숨 넘어갈정도로 오래 웃고나서 말을 이었다.
“금메이, 어디 나 말 잔 듣거라 잉, 날 덱고 온 아줌마가 비행기서 내림수로 점심 다 묵어뿌렸냐기에 ‘배때기 한낫도 안 고픈디 왜랏다고 헛돈 팔어야?’ 했드니 그거 다 공짜라드랑께, 글씨 글씨, 느그들 나 말 잔 들어보거라 잉, 우리 사는디서 서울까지 올라믄 고속뻐스 타고 다섯시간 와야, 옴수로(오면서) 서너 반디다(곳에다) 차 세우고 한 십분씩 쉬게츠롬 했는디 슈퍼도 있고 구멍가게도 있고 한디 오사게도(대단히도) 비싸야, 우리네가 사는 시골서는 원 당초에 생각도 못해, 생각도… 그랑께, 길바닥서 그초롬 비싼디 정신 빠진 놈들 하늘 공중서야 오죽 할거냐? 하늘에 별 따기랑게 이렁게 아닝고 싶었어야, 길 떠나믄 길빠닥에 돈 폄수로 댕겨야(돈을 펴면서 다녀야) 한단디 하늘에까지 뿌림수로 댕겨얀단 소리는 이때끔 못 들어 봤땅께, 그래 묵고 잡하도(먹고 싶어도) 안 묵었드니 왔따원 당초에 공짠걸갖고 참말로 지랄 옌벵 하겠어야, 옌벵 하겠어.”
“후제는 사양 마요, 하하하… 근데 이 챙긴 음식은 어쩔랍니까? 고모님 위해 챙긴거구 남기면 랑빈데요, 입맛 틀려도 천천히 좀 잡수세요.”
“오냐, 알았으니께 걱정 말어, 근디(그런데) 보기만해도 배 불러, 배가.”
고모님의 구미에는 원래 기름에 볶은 반찬이 습관 되지 않으시고 중국식 료리의 오향면(五香面) 냄새가 맞질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되였다. 그후로 깨와 깨기름 그리고 각종 남새들을 사다가 한국식 무침 반찬과 소고기 미역국을 주로 해드렸다. 고모님은 조카들 집을 모두 돌면서 식사도 하고 밤도 보내셨다.
“와메 와메이ㅡ 느그들 어떠크롬 벌었으믄 이초롬 크고 좋은 집들 샀는가 모르겠네잉, 느그들 다 잘 꾸려놓고 잘 사는 꼴 봤응께 시름 싹 놨다… 우리애들 보다는 싹 다 더 잘 산다, 더 잘 살어.”
어느 집엘 가나 고모님께선 방안을 둘러 보며 경탄을 금치 못하셨다. 아마 중국에서 조카들이 거지 생활을 하고 있는 줄로 여기셨던 모양이다. 한국 실정에서 개인 소유의 아빠트 한채를 산다는 것이 보통 서민으로서는 하늘의 별 따기와 다를바 없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해방 후, 특히는 개혁 개방 이후 중국의 발전이 일사천리라는 것을 그가… 물론 시골 팔순 안로인님이 이국 개혁 개방 정치를 알리 없고 광복전의 “쓰렁바우” 초막집만 머리속에 그려보며 오셨을터이니 어찌 경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60년도 더 흐른 오늘 정말 시름을 싹 놓을만도 하시리라.
그 며칠 사이라도 텔레비나 제대로 보시도록 한국 위성 텔레비 접수기 낡은 것을 버리고 새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600원을 쓰니 하루 24시간 보고싶은 것이면 다 볼 수 있게 되였다.
“우리게서는 텔레비가 오후 두시믄 갔다가 네시믄 다시 오고 밤에믄 자고 아침에 깨고 그래, 우리게서도 30만원만 내믄 이런 기계 놔 준단디, 비싸고 또 티브이 앉어 볼 짬도 없고 하닝께 안놔.”
한화 30만원이면 인민페 2500원 정도라 그곳 평균 수입으로 치면 이곳보담 훨씬 싼 것이지만 고모님의 수입 사황으로 치면 이곳보담 몇곱절 더 비싼 것으로 되니깐 왔다 갔다하는 무선 TV나 볼 수 밖에, 30만원 벌려면 얼마나 많은 남새를 팔아야 하는데…
90년도, 나의 큰 누님과 어머님께서 고향 다녀 오실 때 고모님께서는 이곳 조카들에게 고운 밥상보 하나씩 보내주었다. 비록 아주 자그마한 선물이였지만 바구니 들고 남새 되거리 장사를 하여 한잎 두잎 피땀으로 모은 돈으로 비행기 표를 사 보냈다는 사연을 들었을 때 우리들은 감격의 눈물을 금할 수가 없었고 그것은 한개 하찮은 밥상보가 아니라 고모님의 조카들에 대한 비할바 없이 두터운 사랑임을 가슴 뜨겁게 느꼈던 것이다.
우리는 해드린 것도 없는데 고모님께선 하냥 만족해 하셨다. 신발과 옷 한벌을 사드리면서 입고 비행기에 오르시라 하였드니 신만 신고 새옷은 차곡 차곡 개여서 가방에 담았다. 입으면 어지러워 진다는것, 새것으로 마을 회관에 입고 나가 로인들 앞에 자랑하며 뽐 낼 것이란다. 얼마나 이쁜 것이냐고, 마다고 마다고해도 조카들이 꺽꺽 사준 것이라고…
참으로 좋은 옷 한견지라도 더 골라 드리고 즐겨 잡수시는 보신탕 한끼니라도 더 대접하고 조그마한 기쁨이라도 한번 더 안겨드리고 싶었었는데 고모님께선 고집스레 가버리셨다. 또 새벽에 일어나 호미쥐고 나가고 저녁 늦게 광주리 이고 돌아오며 한푼 두푼 돈을 모아 자식들한테 바치고… 그러실라고 가신 것이다.
고모님은 자식들과 친척 친구들한테 선물 하시려고 깨, 고사리, 검정귀버섯 등 백두산 토산물과 우황 청심환, 웅담분, 인삼 등 약품들을 조금씩 샀다. 인천 공항에서 인삼 백뿌리를 몰수당한 누님의 전례가 있기에 고모님은 한웅쿰밖에 안 되는 웅담분 캡술은 속바지 주머니에 넣었으나 백 여뿌리 되는 인삼은 감출 곳이 없어 머리를 죄짜며 한참을 들볶았다. 결국 헤뜨려 검문 받기가 제일 쉬운 핸드빽에 담아 들었다. 순전히 순진한 시골 할머니의 친정 나들이일 뿐 밀수도 마약 반입도 아닌데 뭐가 근심이고 뉘가 무서우냐 그것이다. 허지만 객관 현실은 순진한 사람에게 근심을 주고 무서움을 덮씌우곤 한다.
고모님께서 인천 공항에서 나가자 재원이는 어머님께선 아무것도 몰수 당한 것이 없고 무사히 도착 했노라고, 감사하다고 전화 쳐 왔다. 전화를 바꾸어 고모님께서도 감사의 뜻을 표하셨다.
“감사 하시다니요, 웬 말씀이세요, 잘 대접해 드리지 못해 죄송하기 그지 없습니다. 부디 옥체 건강하시구요, 오래오래 앉으세요!”
“오냐 오냐, 느그도 그냥 어머이 잘 모시고 잘들 살그라 잉…”
그 정겨운 목소리, 언제면 다시 들어 볼 수나 있을런지? 한주일 아니, 사흘밤 만이라도 더 쉬고 일요일 비행기로 가시라고 그토록 만류 하였건만 그이는 고집스레 목요일날 떠나셨다. 일년에 한번이나 올라 오실까 마실까 하는 서울이고 인천인데 주말이라야 자식들이 집에 있으므로 자리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였다. 항상, 언제 어데서나 자식들만을 위하여 삶을 이어가는 팔순의 왜소한 어머니ㅡ 그이가 바로 나의 가장 존경스런 작은 고모님이시다. “여자는 약한 것이지만 어머니는 강한 것이다!”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3월 9일 낮 열두시 십분, 아시아나 항공기가 고모님을 싣고 연길 공항 활주로를 씽ㅡ 하니 벗어났다. 영원히 건강하시고 다시만나 효도 할 날 돌아오기를 한점으로 멀어져가는 비행기를 바라보며 두손 모아 기도 하였다.
사람이란 무얼 하든 끈질긴 정신이 있어야 한다. 60여년을 그렇게 하여오셨고 80세를 넘기신 오늘에도 여전히 그렇게 하고계시는 나의 고모님처럼 말이다.
내고향 “남도마을”서산비탈엔 “쑈미츄린”이라 부르는 자그마한 과수원이 있다. 그 과수원 입구에는 집채만큼 큰 청바위를 쩍 가르고 하늘 높이에 우뚝 치솟은 느릅나무 한그루가 거연히 서있다. 대지를 짓뭉갤듯한 먹장구름은 그의 머리 위에서 감돌고 만물을 쓸어버릴듯한 광풍은 그의 허리를 분지를듯 치고 박으며 용을 쓴다. 모든 고난을 한몸으로 안고 하늘과 땅 사이에 꿎꿎히 뻗히고 서있다. 옛적 어느날 아주 가냘픈 씨앗 하나가 바람 타고 날아와 그 바위틈에 떨어졌을 것이다. 나무의 년령을 갸늠해보면 혹시 고모님께서 고향에 시집 가시던 그날이 아닐까 느껴본다. 그것이 싹 트고 뿌리를 내리고 바위를 가르고 무성하게 자라나 하늘을 이고 섰다.
이미 작고하신 과원 주인 김일선로인은 푸른 바위에 흰색으로 “自然(자연)은 이와 같은 持久力(지구력)으로!!”라고 힘 있는 필치를 커다랗게 남겨놓았다. 나의 고모님을 뵈오니 바로 그 힘있는 느릅나무, 수십성상 온갖 풍상 고초 다 겪으며 굴할 줄 모르는 그 고향 나무가 머리속에 떠오르며 자리를 잡는다.
아아ㅡ 우리도 그처럼 살 수는 없을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