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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명(明)나라의 저명한 의약가인 이시진(1518-1593)은 어려서부터 의사로 활동하던 아버지를 도우며 전통 의약에 강한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그는 관리가 되는 길을 포기하고 가업을 이어 의약에 관한 여러 저서를 남겼는데, 특히 그의 대표작『본초강목』은 전통적인 중국의학을 집대성한 걸작이요 약학에 대한 백과전서로 잘 알려져 있다.
중국사에서 16-17세기에는 상품생산의 전개와 지식의 보급으로 말미암아 여러 면에서 사회 변화가 현저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단순히 명에서 청(淸)으로의 왕조 교체라는 정치적 변화만이 아니고, 이갑제(里甲制)의 붕괴 및 향촌사회의 변화, 생산력의 증가와 상품경제의 발달, 은의 보급과 화폐경제의 발전, 시민계층의 출현, 서양문물의 전래, 경세실용 사상의 발달 등 사회․ 경제․ 문화 전반에 걸친 구조적 변혁이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명말에 일어난 실용주의 학문은 과학 기술 방면에서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이시진의『본초강목』, 모원의(矛元儀)의『무비지(武備志)』, 서광계(徐光啓)의 『농정전서(農政全書)』, 송응성(宋應星)의 『천공개물(天工開物)』, 조사정(趙士禎)의『신기보(神器譜)』등은 명대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출현한 대표적인 과학 기술 저작물이다. 그 중 이시진은 중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의사이자 과학자로 존경받고 있고, 그의 명저『본초강목』은 약학에 있어서 세계적인 유산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시진의 성장 과정
이시진은 명나라 11대 황제 무종 정덕(正德) 13년(1518년) 5월 18일에 후베이(湖北)성 치저우(蘄州, 오늘날의 蘄春치춘) 뚱창지에(東長街) 와샤오바(瓦硝坝)에서 아버지 이언문(李言聞, 字는 子郁, 호는 月池)과 어머니 장씨(張氏) 사이의 4남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사대(四代)로 의업을 이어오던 집안으로, 아버지 이언문은『기애전(蘄艾傳)』, 『인삼전(人蔘傳)』 등의 의약서를 집필할 정도로 유명한 의사였다.
이시진은 어려서부터 몸이 약한 편이었으나 성격은 강직하고 매사에 신실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일을 도우면서 성장하였다. 아버지와 형을 따라 산에서 약초를 캐어 오기도 하고, 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의약에 관한 지식을 익혔다. 그의 고향 치저우 지방은 약초의 생산지로 유명한 곳이었기에, 그는 어려서부터 여러 약초 및 자연계에 대한 호기심이 남달랐다.
본래 이시진의 아버지는 당시 의사라는 직업이 사회적으로 낮게 평가되었기에 자식이 의업을 이어가는 것보다는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관료로서 출세하기를 바랬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이시진에게 어렸을 때부터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읽히고 글 공부에 전념하게 하였다.
이시진은 14세에 동시(童試)에 합격하여 공부하면서 17살 때부터 과거시험(鄕試)을 치르기 시작했다. 우창(无昌)으로 가서 세 차례나 향시에 응시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그는 과거시험을 위한 팔고문(八股文) 작성에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도리어 의약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의 나이 20세 때에 그의 스승의 딸인 오사어(吳斯語)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다.
과거시험에 실패한 이시진은 관리가 되는 일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의학공부를 하게 해 달라고 아버지께 간청했다. 자식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던 아버지는 아들의 요구를 수락하여 의술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23세 때에 이시진은 관리가 되는 길을 포기하고, 가업을 이어 병든 환자들을 치료해주는 일에 헌신하였다.
궁정 의원직을 사임하고 『본초강목』 집필에 전념하는 이시진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의사로서 활동하던 이시진은 고향에서 헌신적으로 환자를 치료하여 주고, 더불어 본초 연구에 몰두하였다.‘본초(本草)’라는 것은‘약이 되는 모든 자연물’을 이르는 말로,‘초(草)’자가 들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약초’와 동의어로 생각하기 쉬우나, 식물만이 아니라 동물, 광물 등을 포함한 모든 자연물을 이르는 말이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약물 연구를‘본초학(本草學)’이라 하였으며, 당시 여러 본초서가 편찬되어 존재하였다.
이시진은 많은 본초서를 섭렵하였다. 산야를 실제 답사하면서 자생하는 식물 등을 관찰, 채집 하였다. 그 결과 전통적인 본초서가 수백 년 동안 아무런 고증이나 수정도 없이 전해 내려온 관계로, 기록에 많은 오류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본초”의 분류가 명확하지 않고 일부는 약효가 틀리게 기록되어 있으며, 처방이 미신적이고 이치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심각한 오류도 발견하게 되었다. 의약은 인간의 생명에 직접 관계되는 일인 만큼, 결코 방관할 수 없다고 생각한 이시진은 새로운 약전을 집필해야 할 필요성을 넘어 강한 의무감까지 갖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보다 완비된 의학서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책의 오류를 바로 잡기 위해 양자강(揚子江), 황하강 유역의 많은 지방을 찾아가 약물의 표본과 민간의 처방을 수집하였다. 자신의 집에는 약초원을 두고 직접 약초를 재배하면서 약효를 시험하고, 옛 의약서에 있는 약품들을 하나하나 검토해 나갔다.
그의 의술에 대한 재능은 곧 개화하여 수년 후에 명의로서 후베이 일대에 소문이 났다. 특히 1545년, 치저우 지방에 연이어 대 홍수가 일어나 역병이 자주 돌았지만, 관가에서는 돌볼 여력이 미치지 못할 때, 28세의 이시진은 아버지와 함께 많은 환자들을 고쳐주며 좋은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이로 인하여 이시진의 명성은 주변으로 널리 퍼져나가, 어느덧 유명의사가 되어 있었다.
지방 명의로 알려진 이시진은 38세(1551년) 때에 초왕(楚王)의 부름을 받아 우창(武昌)의 왕부에서 의료 활동을 하게 된다. 초왕의 아들이 급병에 걸려 누워있을 때, 이시진이 그 병을 치료해 준 일로 인하여 초왕은 이시진을 왕부에 불러들였다. 초왕은 이시진에게 왕부의 제사를 담당하는 봉사정(奉祠正, 7품관)에 임명하고 더불어 의료 활동도 겸하도록 하였다. 이후 이시진은 왕부의 의사가 되었고, 틈만 나면 왕부 밖으로 나가 환자들의 병을 고쳐 주었다.
우창에서 3년을 지낸 후 이시진은 베이징(北京)으로 올라가 황실 의원이 되었다. 황실에서 전국의 명의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은 초왕은 이시진을 황실에 추천하였고, 당시 명의 12대 황제인 가정제(世宗, 嘉靖帝, 1521-1566) 주후총(朱厚熜)은 이시진의 의술에 관한 소문을 듣고 그를 태의원(太醫院)에 불러 들여 태의원 원판(院判, 정6품)으로 임명하였다. 그의 명성은 지역성을 떠나 전국성을 지니게 된 셈이다.
이시진은 태의원에 재직하면서 어약고(御藥庫), 수약방(壽藥房) 등을 드나들면서 보지 못한 진귀한 약물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는 황실의 힘을 빌려 천하의 명의들을 모아서 본초의 수정작업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는 계획안을 작성하여 상주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견책만 당하고 말았다. 이시진이 궁중에서 이런 원대한 뜻을 이루기에는 당시의 환경이 원만하지를 못했다. 당시 가정제는 도교에 심취하여 커다란 제단을 만들어 놓고 도교 의식을 거행하는 일이 많았다. 황제는 도사의 말을 신임하여 불로장생약을 구하는데 힘썼고, 태의원의 의관들도 황제의 미신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황제는 정사를 돌보지 않고 2년간 도교에 푹 빠져 있었는데, 이를 반대하고 간언하는 신하들은 옥에 갇히거나 유배당하는 일까지 있었다. 호부주사인 해서(海瑞, 1514-1587)가 죽음을 불사한다는 뜻으로 관까지 들고 간연했다가 도리어 옥에 갇히게 되었으며 황제가 죽은 뒤에야 비로소 풀려날 수 있었다.
도교를 숭배하며 불로장생을 원하던 가정제는 금단 중독으로 사망하였다고 전해진다. 공명(功名)에 관심이 없던 이시진은 태의원에서의 생활이 일반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 주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자유롭게 의술 활동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몸에 지병이 생겼다는 이유로 부임 1년 6개월 만에 관직을 사임하고 궁정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시진은 각지로 돌아다니며 약물채집과 민간처방법 등을 조사하면서 본격적으로 의료와 저술 활동에 전념하였다.
어느덧 40대에 접어 든 이시진은 1552년부터『본초강목』을 집필하는데 모든 정력을 쏟아 붓기 시작하였다. 그는 새로운 약전(藥典)을 편찬하기 위하여 수많은 의학서를 탐독하였다. 뿐만 아니라 역사, 지리, 문학에 관한 전적도 두루 섭렵하였는데,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를 ‘독서광’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또한 의학에 관한 시구도 다수 암송할 정도로 문학적 재능도 있었다.
『본초강목』을 편찬하는데 가장 머리 아프게 한 것은 약명이었다. 약의 이름이 실제와 다르고, 효능이나 처방에도 오류가 많았던 것이다. 당시의 본초학은 후한시대에 편찬되었다고 하는『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을 원전으로 하여 그 후 많은 증보(增補)가 이루어져 있었다. 남북조 시대에 의약자 도홍경(陶弘景), 당대의 소공(蘇恭), 송대의 유한(劉翰), 장우석(掌禹錫)․ 당신미(唐愼美微) 등이 계속 보충 개발하여 당시로서는 거의 완벽에 가깝다고 일컬었지만, 이시진이 볼 때에 의약의 명칭이나 약효에 오류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고증하고 바로 잡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는 아들 이건원(李建元)을 대동하고 멀리 심산 광야를 찾아가고, 명의를 통해 민간요법을 배우고, 현지에 가서 약물을 관찰하고 표본을 수집하여 오기도 하면서, 많은 자료를 모으고, 그것들은 검증하여 유효성을 확인하였다.
『본초강목』을 집필하기로 한 후, 27년간에 걸쳐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약초를 채집하여 여러 가지를 조사 연구하고 집필하여 오던 이시진은 만 61세 되는 1578년에 원고를 완성하여 “본초강목”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본초강목』은 총 52권에 190여만 자(字)에 달하는 방대한 저서이다. 총 16부 60 종류로 분류하였는데, 평소 모아 놓은 자료와 임상에 근거하여 기존 본초학을 재정리하고, 자신이 새로 개발한 374종을 포함하여 총 1892종을 망라하였다. 11,916점의 처방과 1천여 폭의 삽화를 통해 각종 약물의 복잡한 형태를 형상적으로 표현하여 사람들이 쉽게 이해 할 수 있게 하였다. 특히 종래의 문헌의 오류를 바로 잡아 과학적이고 신빙성 있는 명저가 되었으며,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편찬 중에 3차례나 수정 작업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 저작물을 출판하여 국내 여러 의사들이 참고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던 이시진은 출판자를 찾았으나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당시 책은 지식인이 필요로 하는 책, 곧 과거시험을 위한 책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본초학에 관심을 갖는 출판사는 거의 없었다는 것도 한 이유이겠지만,『본초강목』의 편집 자체를 반대하는 사람이 많아 바로 출판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중국 본초학에서 성전으로 여기고 있던 “신농본초학”의 설이나 배열 구성에 대하여 수정을 가한 이시진에 대하여 비판하고 규탄하는 일까지 생겼기 때문에 출판의 길이 막혔던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만력(萬曆) 21년(1593)에 한 독지가가 나타났다. 난징(南京)의 출판업자인 호승룡(胡昇竜)이 『본초강목』의 가치를 인정하고 출판해주겠다고 선뜻 나섰다. 그는 이 책을 황제에게 헌상하고 각인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해 가을에 이시진은 마음고생과 병으로 인해 75세의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자신의 저서가 세상에 출판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황제에게 헌상된 『본초강목』은 만력제(萬曆帝)로부터 크게 인정을 받아, 1596년에 출판되어 드디어 세상의 빛을 보았다. 이시진이 죽은 지 3년 후의 일이었다.
약 10년 후에 이 책은 조선과 일본에도 전해져 널리 애용되었다. 나아가 서양에서도 전해져 라틴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독일어 등 여러 나라 말로 번역 출판되었는데, 영문판만도 10여 종에 이른다고 한다.
이시진은 이외에도 경락과 진맥의 해설서인『빈호맥학(瀕湖脉学)』,『기경팔맥고(奇経八脉考)』등 의약에 관한 여러 책을 남겼다.
『본초강목』의 성과와 의의
이시진의 『본초강목』의 성과와 특색은 무엇이고 어떤 의의를 가지는 것일까?
첫째, 이 책은 대량의 자료를 종합 연구하여 편찬된 것으로, 과거의 본초학 중에서 발견된 오류와 명확하지 못한 부분을 바로 잡았을 뿐만 아니라, 새로 발견한 약물을 포함하여 식물, 동물, 광물 등 자연계의 물질을 총 망라하여 알기 쉽게 정리하여 놓았으니, 가히 하나의 박물학적 저서라 할 수 있다.
둘째, 기존 본초학과는 달리 실용적인 관점에서 약물학을 새롭게 분류하였다는 점도 큰 특색이다. 종래의 분류에서는 불로장생에 유용한 약물을‘상품(上品)’, 건강을 잘 유지하게 하는 건강약품을‘중품(中品)’, 직접 병의 치료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하품(下品)’으로 놓음으로써 이른바 신선적인 관점에 따른 비과학적인 분류법을 택하고 있었다. 그러나『본초강목』은 이와 같은 분류를 전적으로 배제하고 새로운 자연과학적 분류법을 도입하였다.
수부(水部)·화부(火部)·토부(土部)·금석부(金石部)·초부(草部)·곡부(穀部)·채부(菜部)·과부(果部)·목부(木部)·복기부(服器部)·충부(蟲部)·인부(鱗部)·개부(介部)·수부(獸部)·인부(人部) 등 각종 의약물에 대해 과학적 분류 방법을 채택하였다. 여기에 산지와 형상을 밝히고, 풍부한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주치와 처방을 제시함으로써 사용자들이 실용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명말에 새롭게 나타난 합리주의적이고 경세실용적인 기풍이 잘 반영된 것이다. 유럽 식물분류학자들은 약 2백년 후인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이시진과 유사한 식물 분류법을 채택하였다고 하니,『본초강목』의 우수성을 엿볼 수 있다.
셋째, 이시진은 의서 중의 미신적 요소와 황당무계한 설법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가 활동하던 시대는 도가사상이 유행하고 연단술(煉丹術) 및 단약(丹藥)이 크게 성행하여 의학 분야에까지 그 영향이 미쳤다. 이러한 때에 이시진은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종래의 미신적 설명을 배제하였다.
넷째, 필생의 정력으로 집필된『본초강목』은 수천 년 동안의 중국 민중의 약사용 경험을 총 동원하여 만든 의약학의 쾌거이다. 더욱이 대부분의 본초서가 국가에 의해서 편집되던 당시의 사정을 고려한다면, 저자 한 사람의 힘으로 과학적이고 박물학적인인 책을 완성시킨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실로 이시진은 중국 고대 의약학을 최고봉으로 끌어 올려놓았을 뿐 아니라 세계 박물학, 본초학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7세기부터는『본초강목』이 세계 각지로 전파되어 근대 약물 연구학자들이 반드시 거쳐야 할 중요 참고 서적이 되었다.
이시진의 능원(陵園)
약 80무(畝)에 이르는 이시진 능원은 크게 본초비랑(本草碑廊), 기념관, 약물관(药物馆),백초약원(百草药园),묘원(墓园) 등 5대 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명대의 건축양식으로 배치하였다.
능원의 대문에는 덩샤오핑(鄧少平)의 친필이 있고, 비랑에는 약 3미터 크기의 이시진의 조각상이 있고, 기념관에는 이시진과 관련된 많은 역사 문물, 서화,『본초강목』의 각종 판본 등 여러 역사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약물관에는 동물, 식물, 광물 표본 300여종이 전시되어 있고, 백초약원에는 100여종의 식물 생태 표본이 전시되어 있다.
능원에는 이시진 부부 합장묘, 부모 합장묘가 있으며 그 2기 앞에는 약 400여년 전에 세워진 비석이 서 있다. 이시진의 능원은 후베이성 애국교육 기지가 되어 있을 뿐 아니라, 국가로부터‘100대 전국 애국주의 교육 시범 기지’로 지정되어 있어, 양자강 중하류의 교육, 연구, 문화, 관광 등이 잘 배합된 이상적인 문화 유적지로,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2008년은 명대 의성 이시진의 탄신 49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미 1965년에“이시진”이라는 영화가 제작되어 당시 유명 스타인 짜오단(赵丹)이 이시진 역을 받아 상영한 적이 있었는데, 금년에도 그를 기리기 위해 “명대 의성 이시진”이라는 드라마 방영을 준비하고 있다. 금년 3월부터 7월까지 촬영을 계획하고 제작 중에 있는데, 젊고 유명한 연출가로 이름나 있는 정커홍(郑克洪)이 연출을 맡고, 유명 배우 황하이빙(黃海氷)이 이시진 역을 맡았 다. 46집으로 된 이 드라마는 8월부터 방영할 계획이다.
이 드라마는 이시진의 생애와 그가『본초강목』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험난한 과정을 소개함으로써 의사요 과학자인 그의 업적을 기림은 물론, 중국의학의 정신과 매력을 드높이려는 데 목적이 있겠지만, 또한 중국에서 나타난 한류(韓流)와 한국의‘대장금’에 대항하기 위한 야심작이라는 평도 있다.
어쨌든 이시진 탄신 490주년을 맞아 이시진의 생애와 업적이 기려지고,『본초강목』의 가치와 의의가 재조명되기를 바라며, 이시진에 관한 드라마의 방영을 크게 기대해 본다.
전순동∣본지 집필위원 ․ 충북대학교 역사교육학과 교수
출처 | 중국어문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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