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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송진우
김구는 임시정부 만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한반도를 통치할 합법적인 정부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38선 이남의 사실상의 통치자였던 미군정은 김구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게 아무런 권한을 주지 않았다.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다. 한편 김구는 군정을 “남의 나라 땅에 와서 왈가왈부하는 불청객” 으로 인식 했다. 당연히 자신이 차지해야 할 땅을 미군정이 부당하게 점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일제 강점기에 김성수와 같이 동아일보를 이끌었던 우파 정객 송진우는 임정봉대론을 주장했을 정도로 김구와 임정의 법통을 존중했다. 해방직전 그는 임정이 10만대군을 이끌고 미국이 원조해 준 거금을 가지고 귀국하여 새나라를 건설할 것이라고 했을 정도로 임정을 과대 평가했다. 조선총독부가 그에게 통치권을 줄 터이니 일본인들이 안전하게 귀국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하자 우리민족을 탄압한 너희들을 도울 수 없고 통치권을 이어받을 권리는 임정에 있다고 하며 거절했다. 총독부의 제안을 받아들인 여운형이 같이 일하자고 부탁했을 때도 임정봉대론을 주장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해방 후 서울에 돌아온 김구는 송진우의 선의와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당시의 부자들이 만든 한민당은 대중의 인기에 취약했다. 소작인들의 나라 한국은 토지개혁을 원했고 일본에 억눌렸던 국민 대다수는 친일파 청산이 급선무였다. 토지개혁과 친일파 청산은 부자들에게 불리한 정책이었다. 그래서 한민당은 대중적 인기가 높은 김구와 이승만을 자기편에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 한민당 당수였던 송진우는 모금한 거금을 김구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임정은 그 돈 중에 친일파의 돈이 섞여 있다고 돌려주었다.
송진우는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미군정의 정책을 한국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는 역할을 했다. 김구가 싫어하는 미군정에 협조적이었다. 그러던 중 신탁통치 문제가 전국을 휩쓸었다.
김구는 무조건 신탁통치를 반대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결정된 한국 신탁통치 안은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제안했다. 소련은 한반도 신탁통치를 원하지 않았다. 한반도의 여론이 공산주의에 유리하게 돌아가서 한국 사람들 자율에 맡기면 자연이 친소 나라가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삼상회의에서 소련의 제안으로 “한국인이 참여하는 한국임시정부” 를 구성하고 이들의 의견을 신탁통치 결정과 구성을 토의하는 미소공동위원회에 반영하기로 결정했다. 송진우는 김구에게 “한국인이 참여하는 임시정부” 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김구는 송진우를 찬탁주의자로 몰았다. 당시에 찬탁 하는 사람들은 매국노 취급을 받았다. 송진우의 주장은 미군정이 원하는 바였다.
김구는 반탁운동을 계기로 미군정 한국인 직원과 경찰들에게 경교장 임시정부를 위해서 일하라고 명령하여 표면상 파업이지만 사실상의 미군정에 대한 쿠데타를 시도했다. 김구는 하지 중장에게 불려가 혼이 났다. 군정에 반항하면 추방하겠다는 위협을 받았다. 김구는 그 자리에서 자살하겠다고 울부짖었지만 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김구는 경교장에 돌아와 파업에 동참했던 공무원과 경찰에게 모두 본직에 복귀하라고 알려 파업이 중단되었다. 그리고 송진우는 극우파 청년에 의해서 암살되었다. 미군정은 그 배후로 김구를 의심했다.
2. 여운형
여운형은 중국 유학 중 상하이 교민사회를 이끌고 목회 활동을 했다. 그러던 중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에 힘입어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3.1운동을 주도했다. 3.1운동 후 상하이로 독립운동가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신한청년당을 기반으로 하여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만들었다. 그런데 신한청년당을 창당했던 당사자인 여운형은 임시정부 조직을 반대했다. 심지어 국호 대한민국도 망국이 된 대한제국의 법통을 이어갈 이유가 없다고 하여 반대했다. 그리고 신한청년당의 재산과 조직을 임시정부에 반납했다.
임시정부 초창기에 상하이에 나타난 김구는 임시정부 문지기 직을 원했지만 안창호는 그를 경무국장에 임명했다. 김구는 상하이 교민 사회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경찰, 검찰, 재판관일을 모두 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에 반역한다고 생각되는 인물은 모두 척결했다.
임시정부 초창기에는 임시정부가 주로 소련 레닌의 원조자금에 의해서 운영되었다. 자연히 공산주의자들이 임시정부의 주도권을 잡아가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던 중 김립이 레닌에게서 받은 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지 않고 자신이 소속된 공산주의 계열 정당에 전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분개한 김구가 김립을 암살했다. 그 후 레닌은 상하이 임시정부 원조를 중단했다.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은 줄줄이 임시정부를 떠났다. 자금줄이 떨어진 임시정부는 존폐위기에 봉착했다. 직원 월급은 물론 청사 월세와 유지비도 내기가 힘들게 되었다. 사실 상 김구 혼자 임시정부를 유지해야 했다. 이때 김구는 고육지책으로 애국청년당을 조직하여 레지스땅스 운동을 하여 한국의 존재를 알리는 방법을 선택했다. 젊은 청년 애국지사를 모집하여 요인암살 또는 군사시설, 주요건물에대한 폭탄투척 등을 시도할 계획을 세웠다.
여러가지 사건을 벌렸으나 큰 성과 없이 지나던 중 이봉창과 윤봉길이 나타나 중국인들에게 한국이 중국 편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되었다. 만보산 사건 이후로 중국인과 한국인의 사이가 무척 좋지 않았다. 일본은 만주에서 중국인과 한국인이 힘을 합쳐서 일본에 저항하는 것을 막기위해서 길림성에서 멀지 않은 만보산 근처 농토개발을 위한 수로 공사 중 중국인과 한국인 사이에 충돌을 일으키게 하여 한국인들이 중국인에게 악 감정을 가지게 했다. 그 결과 국내에서 화교들에 대한 테러가 발생했다. 중국에서는 한국교민에대한 헤이트 크라임이 증폭했다. 상하이에 있는 임시정부 또한 운영하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윤봉길의 헝커우 공원 폭탄 투척사건은 일본 상하이 침략군 사령관등 고위 층 장군들과 주요 인사들이 죽거나 부상당하는 쾌거를 거두었다. 중국인의 한국인에 대한 악 감정은 완전히 해소되었다. 당시에 중국을 통치하고 있던 국민당 정부의 수반 장가이샠은 이봉창 의거를 “중국군 백만대군이 해내지 못한 일을 한국인 청년 혼자서 해냈다”고 하며 극찬했다. 이후 임시정부와 김구는 완전히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으로 유지되었다. 장가이샠은 김구 뿐만 아니라 김원봉까지 그들이 차와 운전수를 가지고 승용차를 굴릴 정도로 원조했다. 이것은 국민당 정부가 윤봉길에 대한 은혜를 갚으려는 것이 아니고 중일전쟁이 끝나면 한반도에 친 중국 정권을 세우려는 계획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미국의 원조를 받고 있던 국민당 정부는 미군이 주도하는 한반도 진공작전에 김구의 광복군을 참여시키려고 했지만 일본이 이작전이 실행되기 전에 항복하여 무산되었다. 하지만 김구는 중국의 국민당 정부가 자신과 임정이 한반도의 새나라의 주인이 되는데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장가이샠은 일본이 중국에게 항복한 이후 중국을 장악하는데 실패했다. 일본이 항복한 이후 중국은 마오쩌둥과 장가이샠이 싸우는 중국내전에 돌입하여 6.25 사변 일년전에 마오의 승리로 끝났다. 따라서 국내에 들어온 김구와 임정은 중국에서 크게 의지했던 국민당 정부의 지지 없이 홀로 서야 했다. 만약 국민당정부가 일본 항복 직후에 내전 없이 중국을 장악했으면 김구의 입지는 크게 달랐을 것이다.
김구가 중국에 의지해서 독립운동을 하는 동안 여운형은 국내에서 일본이 패퇴하는 상황을 면밀히 살펴가며 한반도에 독립국가를 세우려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그에게는 김구의 임시정부는 안중에 없었다. 단파방송을 듣고 일본의 패망을 확신한 그는 1944년 전국 조직망인 건국동맹을 조직했다. 1945년 8월15일 조선총독부로부터 치안권을 인수받은 여운형은 건국동맹을 기반으로 전국적으로 건국준비워원회(건준)를 조직했다. 조선총독부의 조직을 우리민족이 만든 건준이 떠맡는 듯했다. 38선 이북에서는 소련이 건준을 인공으로 바꾸고 한국인들의 통치 조직을 인정해 주었다. 그러나 이남에서는 미군이 들어와 미군정을 실시하면서 건준을 인정하지 않았다. 더구나 박헌영의 주장으로 건준이 인민공화국(인공)을 선포하면서 인공과 미군정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사실상 새나라를 선포한 것이어서 당시에 38선 이남의 주인이었던 미군정이 납득할 수 없는 처사였다. 그러나 여운형은 소련이 이북에서 인공을 인정하여 한국인이 자체적으로 통치하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에 2차대전동안 같은 연합국이었던 미국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그런데 미군정은 여운형을 바로 내치지 않았다. 그들은 소위 중도 운동을 벌렸다. 좌우 합작을 통하여 한반도에 하나의 정부를 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이를 위해서 미군정은 김규식과 여운형을 이용했다. 사실은 우파인 김규식을 미군정의 후계자로 키우고 여운형은 좌파 박헌영을 물리치기 위해서 잠시 지지하는 척했던 것이었다. 박헌영과 여운형의 사이가 나빠져 여운형이 인공에서 탈퇴하자 중도운동은 유야무야 되었다.
김구는 임정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나라를 세우려 했고 여운형은 자신이 조직한 건준을 기반으로 새 정부를 조직하려 했다. 여운형이 송진우를 찾아가서 자신과 같이 새나라를 건설하자고 제안하자 송진우는 임정 봉대론을 내새워 거절했다. 여운형은 상해임시정부외에도 그 보다 더 크고 더 활발한 독립운동을 한 기관이 많은 데 왜 김구의 임정만이 새나라의 주인이 되어야 하냐고 하며 반박했다.
여운형은 김구가 중국에서 귀국하여 경교장에 여장을 풀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만나려고 경교장을 방문했다. 응접실에서 기다리며 임정 요원들과 담소하고 있는데 갑자기 경교장 보초가 나타나더니 몸수색을 하고 내쫓아 버렸다. 김구의 명령이었다.
여운형은 해방 후 7,8번의 테러와 암살 시도를 당한 후 결국 혜화동 로터리에서 백의사 단원들에 의해서 암살되었다. 미군정, 조병옥, 장택상 등은 그 배후로 김구를 지목하고 있다. 김구, 신익희, 유진산등 한독당 인사들은 백의사와 관련이 깊다.
3. 장덕수
김구가 미군정을 적개심을 가지고 대했던 반면에 장덕수, 김성수등 한민당 사람들은 그들에게 협조적이었다. 특히 장덕수는 미국과 영국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영어도 잘했고 그들의 문화에 대한 이해도 깊었다. 기득권 층이 만든 당 또는 부자들의 당이라고 할 수 있는 한민당은 우파 보수 정당이었다. 미군정 사령관 하지도 남한에 한민당과 같은 보수 정당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했다. 한민당은 사실상 미군정을 위한 우파 정당이었다. 김구와는 코드가 맞지 않았다. 그런데 한민당 당수였던 송진우의 암살 배후로 김구가 의심받게 되자 한민당과 김구의 당 한독당 및 임정의 관계도 좋지 않게 되었다.
미국은 자기들이 제안했던 한반도 신탁통치를 반대한다고 천명했다. 반면에 한반도 신탁통치를 달갑지 않게 여겼던 소련은 신탁통치를 찬성한다고 했다. 그래서 대체로 한국의 우파는 반탁, 좌파는 찬탁이었다. 그러나 내용을 잘 들여다보면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미군정은 한국 지도자들에게 미소공동위원회 참여를 종용했다. 미소공동위원회는 한국 신탁통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 조직되었다. 여기서 한국인이 한국의 신탁통치에 대한 의견을 주장할 수 있는 한국 임시정부를 만드는 과정도 논의하기로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결정되었다. 장덕수는 한반도 신탁통치에 대한 한국인의 의견을 말하려면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미군정이 원하는 바였다. 김구는 이를 극렬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미국은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될 것을 알고 있었고 38선 이남에 유엔을 통한 친미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 낌새를 이승만이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는 일지 감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얼마 후 한민당 정치부장이었던 장덕수는 유엔을 통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 미국의 방침임을 알아차리고 선거 준비를 시작했다.
미군정이 신임했던 김규식은 김구와 합류하여 북한을 오가며 통일정부 수립을 고집했다. 미군정은 김규식을 포기하고 장덕수에게 큰 기대를 했다. 장덕수는 유엔을 통해서 남한 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해야 한다는 요지의 서한을 미국무성, 유엔, 상하원들에 보냈다. 미군정의 장덕수에 대한 신임은 더욱 두터워졌다.
유엔총회에서 한국 총선거안이 가결되자 장덕수와 한민당은 환영했지만 한독당과 김구는 크게 분노했다. 이승만과 한민당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찬성했다. 그러나 이승만이 유엔에 상관없이 남한만의 조기 선거를 실시하여 단독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했던 반면에 장덕수와 한민당은 미국의 정책에 따라 유엔을 통한 단독정부 수립에 찬성했다. 한민당과 미군정의 밀착으로 장덕수의 영향력은 급부상했다.
한민당 정치부장 장덕수는 앞으로 다가오는 선거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지방조직, 후보자 인선, 자금의 문제를 위해서 바쁘게 움직였다. 장덕수는 자택에서 당원들과 선거대책을 논의하던 중 경찰 박광옥과 대학생 배희범에 의해서 암살되었다. 얼마후 한독당 중앙상무위원 김석황이 체포되고. 신일준등 한독당 당원도 체포되었다. 한독당은 김구계열 정당이었다. 김구가 배후로 크게 의심받았다.
장덕수 암살사건의 재판은 미군정청 법정에서 진행되었다. 미군율재판위원회는 미국대통령 트루먼의 명의로 법정에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김구에게 발부했다. 법정에 출두한 김구는 미군 검사의 집요한 질문에 당당한 태도로 사건관련을 강하게 부인했다. 그러나 김구의 권위는 장덕수 암살 사건 관련 의혹으로 크게 손상을 입었다.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암살의 최고 수혜자는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의 마지막 경쟁자였던 김구는 남한 단독정부 구성을 끝까지 반대하고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통일정부 구성을 논의했다. 장덕수 암살로 실추한 그의 권위를 되살리기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미군정에 도전했던 김구는 미국 CIC 요원 안두희에 의해서 경교장에서 암살되었다. 당시의 국방장관 신성모는 서울대학병원 입원실에 본부를 둔 김구 암살단의 최고 우두머리였다. 안두희는 김구가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암살했다고 진술했다. 극우 민족주의자 김구는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서 북한을 오가다가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게 공산주의자로 몰려 제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송진우, 여운형과 장덕수가 김구의 지령에 의해서 암살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그들은 미군정에 대한 입장, 신탁통치, 남한 단독정부 수립, 임정의 정통성에 있어서 김구와 대립했다. 김구와 좋지 않은 관계에 있던 미군정은 이들의 암살 사건이 있을 때 마다 김구의 배후설을 주장했다. 실제로 김구가 관련이 되어 있지 않은데 미군정이 김구를 흠집내기 위해서 퍼트린 소문이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