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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또 하나의 지구가 필요할 때☆]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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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하나의 지구가 필요할 때 ]
박주택 시집 / 문학과지성 시인선 436 / 문학과지성사(2013.10.07) / 값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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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플갱어
박주택
— 내가 나일 수 있는 것은 길들여지지 않은 곳으로 가서 나로부터 울려퍼져 너로부터 돌아오는 종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너에게서 나지만 너의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 털은 솟아나고 그것은 표지판처럼,
비존재적 어둠 속에서 빛나던 변명은 사거리의 모퉁이를 빠져나간다 홈은 계속해서 파인다 혼이 의자에 앉아 머리카락에 머물 때
나무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무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혼자 태어나 근심은 완성된다 그리하여 반짝이는 지금,
여기
‘시선’에 의해 추방된 자들 부활을 고안하며 후회를 은폐하는 밤이 오면 자신을 데리고 영원을 바라본다, 그때
먼 곳이 어두워졌다가 밝아지고
발자국을 변호해 온 잠은 생과 저항하며 지구의 한쪽에 가엽고 부드러운 긴 꿈을 이끌고 온다
잠은, 머릿속 깊은 곳으로부터 와서
또 다른 세상의 문을 연다 잠은, 젖을 빨아대며 양육된다
별은 씨앗을 받고
과거는 미래에게 눈썹을 달아준다
이것이야말로 대지에서 나온 것
대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을 열어 허공을 듣는다 현재에 도달하는 순간 현재는 사라지고,
문 안을 들여다보는 순간
시간은 누구를 속이고 있는가?
네가 일부라는 것, 구름이란 애도라는 것
누가 안개를 걷어주겠는가?
그러자 낯선 남자와 몸을 섞던 여인은 그 자신으로 녹아들고 죽는 것도 사는 것도 없이 하나로 흘러간다
낮으로부터의 이유들
우리는 우리들 곁을 지나온 것뿐 새들처럼 충혈되고 새들처럼 던져졌네 우리는 배운 것만으로도 운명을 점칠 수 있고 학교처럼 울부짖었지 부인을 살해한 의사가 무죄 판결을 받았다면 그것은 선택
어둡고 낮은 구름 사이 막 소녀티를 벗은 아이들이 담배를 피워 문 채 치마 속으로 유일한 약속을 끌어들이지 않듯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순간을 무성하게 헐떡거린다
똑같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우리는 우리를 부르는 것들에게 무릎을 꿇는다 낮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우연을 주었으므로, 서로의 잘못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언제나 내게는 안녕!
개의치 말고 물집을 터뜨려줘!
미래 속으로 움직일 때 계단 아래에 있는 우울, 우울의 어원은 휘어진 뼈에서 새어나오는 기침
수천 년 전부터 살고 있는 예감이 선택을 빼앗긴 채 모든 변명을 읽고 서로로부터 멀어진, 문 앞에 서 있다
혹성들
어둠 속으로 누군가 걸어갔다 느슨하고도 슬픈 울음이 구슬프게 울려 퍼졌다 잠이 들지 못한 채 베개를 적시는 방 안에는 가늘게 빛이 새어 나왔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방, 아들은 문을 걸어 잠근 채 죽음에 관한 기록들을 살피고 딸은 주저앉는 코 때문에 거울 앞을 떠나지 않는다 애인을 떠올리는 아내는 가파른 체위에 부드럽게 가라앉고 남편은 저주 를 데려와 ‘반드시’를 새벽에 새긴다
제자리를 찾느라 거친 숨을 몰아
쉬는
집은 찢어진 것만이, 길들여지는 것만이, 초록인 곳
활짝 꿈이 모여 다른 꿈이 되는 곳
지구 위로 지구 위로 별자리 옮기네 계절은 바뀌고 바뀌어 태양과 도네 우리는 우리는 울 줄을 모르고 답할 줄도 모르네 비가 내릴 때까지 꽃이 필 때까지 날짜는 우리를 찍어내고 지구의 이쪽이 아프고 지구의 저쪽이 아퍼 또 하나의 지구가 필요할 때 우리는 날마다 전시되고 날마다 비육되네
언제나 기억의 한 가운데
박주택
나는 온다. 안개의 계단을 내려와 홀로 남은 빵처럼, 팔리지 않는 침울처럼
나는 내 발자국을 따라와 가느다란 빛이 이어주고 있는 기억 사이에 서 있다
나는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것을 그리우ㅏ하며 살았다
그러나 어느 곳에 서 있었는지 작은 것조차 어두웠다
나는 온다, 밤이 다할 때까지
기억에서는 또 잡귀가 태어나리라
해머 선수
박주택
이제 길고 가는 열매들의 시월
차디찬 바람과 섞이며 햇볕은 구부러지고 큰 물혹들이 잡히는 어깨뼈 아래 두려움은 서툰 변명을 시작한다
그것은 마치 우울한 근대사 같기도 하고 망령들의 목청 같기도 하다 해머는 빙빙 돌며 하늘에 요동친다 해머는 뼈를 뚫고 나온 길들로 산 적이 없는 공간을 향해, 더는 듣기 싫은 욱하는 마음으로 공중을 반복하여 흔든다
공중은 윙윙 돌아가는 해머에 부서지며 입을 닫기 위해 악다구니로 소리친다 그러나 지금은 보여주는 입을 대신하기 위해 해머는 줄 끝을 팽팽히 당겨, 더욱 공중을 넘어서려 한다
시월이고 알이고 중심인 줄 끝에 매달려 육중하게 돌아가는 떨림이 가득한 순간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의 연장 같은 것
죽은 도시를 일깨우는 새로운 말 같은 것, 시체 같기도, 악령 같기도 한 인간의 깊은 양심을 향해 날아가고자 하는 총알과 같은 것
해머 선수, 다리 근육을 당겨 창세기를 펼치는 혼돈으로부터 끊임없이 태어나고 있는 눈을 부라리며 얼굴 전체를 일그러뜨리며 해머를 던진다
허공의 두개골을 깨려는 듯
무의 중심으로 알을 가라앉히려는 듯
저수지
박주택
당신은 꽃이 핀 마을에 도착했다 저수지에는 벚꽃이 둘러 피어 있었는데 바람이 불자 하얀 꽃잎들이 햇빛을 받으며 흩날리곤 했다
당신은 천천히 홀로 걸음으로써 저수지에 비친 산그늘을 주저 없이 움직이게 하고 이제 막 어떤 기억에서 흘러나온 물들은 떨어지는 꽃잎의 낙인을 받아들인다
멀리서 당신은 세상에서 떠난 사람처럼 보인다 그것은 단지 코트에 솟은 아름다운 가시 때문뿐이 아니다
지나간 자리마다에서 생기는 정적이 꼼짝도 하지 않고 주위에 번지고 있었고 당신은 어둠으로부터 나온 사람처럼 고개를 들고 하늘을 되받아넘기고 있었다―그때마다 산그늘이 비틀거리며 내려앉았다
당신은 육체이기 전에 먹먹한 귀를 가진 푸른 공기로부터 나오는 구름의 물방울로 태어난 사람처럼 짓눌려 있다 모두가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빛이 반질거리는 것을 이빨 아래 드러내고 있는 사이 당신은 태어나는 기억의 눈동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신은 저수지 수문 앞에 이르러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힐끗 이쪽을 바라보는 것같이 강력한 빛을 뿜어댔다, 불타오르는 것같이 울부짖는 것같이 서로에게 운이 다한 공모를 간직하고 있는 것같이
조용히 저수지의 물살이 주름을 지우듯 울려 퍼지는 그 산벚꽃나무 그림자 땅에 자신을 새기는 동안 당신은 떨어지는 꽃잎 속으로 흰 구름 아래 저수지 속으로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하얗게 사라져가네
국경
박주택
이웃집은 그래서 가까운데
벽을 맞대고 체온으로 덥혀온 것인데
어릴 적 보고 그제 보니 여고생이란다
눈 둘 곳 없는 엘리베이터만큼 인사 없는 곳
701호, 702호, 703호 사이 국경
벽은 자라 공중에 이르고 가끔 들리는 소리만이
이웃이라는 것을 알리는데
벽은 무엇으로 굳었는가?
왜 모든 것은 문 하나에 갇히는가?
문을 닮은 얼굴들 엘리베이터에 서 있다
열리지 않으려고 안쪽 손잡이를 꽉 붙잡고는 굳게 서 있다
서로를 기억하는 것이 큰일이나 되는 듯
더디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쏘아본다
엘리베이터 배가 열리자마자
국경에 사는 사람들
확 거리로 퍼진다
가죽이 벗겨진 소
박주택
발버둥을 치다 이제 목숨이 다한 것이 틀림없는 소는
거푸 숨을 몰아쉬다 잠잠하다
입에 고여 있다 흘러나오는 침은 바닥으로 흐른다
낮게 열린 눈을 에워싸고 있는 발자국
툭툭 막아서고 있는 칼날
공기는 끈적거리고 입구는 빛이 어둡다
칼이 가죽과 살점 사이로 들어간다
가죽이 벗겨진 소
하얗게 누워 있다
굿모닝 뉴스
박주택
수술 해봐야 압니다,
방음 처리된 사람처럼 돌아앉아 마시는 의자, 산 날의 배경이 된 가는 다리, 오전 9시
아침은 자신이 되기도 전에 문을 연다,
정류장도 나이를 아는지 땅을 한 번 씩 깨운다,
물집의 거처에 꽂혀있는 빛, 7층에 있을 때처럼― 찾지 못한 마음 위로 뺨은 밀려가다 가지를 뻗어 백일몽에 가 닿는다,
가쁜 듯 빛에 비치는 작은 것들― 누군가 다리 위를 지난다
마음 아래……비린내 나는 9시
(그러나, 온갖 주석이 붙어 있는 허공의 긴뿔)
최면에 걸린 채―노 래가 되다 만 빛들이
잠기 가야 할 곳을 찾지 못한 눈빛과 섞여
천천히 태양에 덮이고, 방향에 힘입어 길게 뻗은 이마는「개인」을 남긴다, 부스스 무엇이 되고 싶은 차례들, 가야 할 곳을 되짚어주는, 주저하는 시작들, 굿모닝― 월드컵에 오른 한국 축구, 증권 시황, 세계의 날씨, 무엇이 되고 싶었던 예고 위에 풀어놓는 뉴스, 저 입술도 아니다
고작 기억에서 생이 비롯된다는 것
배후를 엿듣는 빛은 기록하고,
기미를 예인하는 날짜는 다른 곳을 연다
장례 집행자
박주택
장례 집행자는 시신에 화장을 하고 있었다
침묵이 무겁게 가라앉고 언제든지 흐느낌은 냉동 시신을 녹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짐승 가죽처럼 노란 얼굴, 서늘하게 풍겨 나오는 잎사귀, 희미한 촉감, 이제 떠난다면 무서운 귀신으로 남을 것인 영혼 루주로 입술을 덧칠하고 검은 눈썹을 그리는 장례 집행자는 채광창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에 반이 환해졌다 바닥을 핥으며 비로소 자신이 되는 것, 죽기 전에 기다리고 있는 자신과 만나게 되는 것, 구부정하게 숙여 거즈로 얼굴을 닦아내는 장례 집행자의 눈빛에서 등을 돌리는 창문들 파르르 떨다 깃털로 가라앉는, 수북한 찰기 잃은 기억의 곤죽들 어느덧 시신은 자신으로 바뀌어 시트 위에 창백하게 누워 있다. 시신을 바라보는 자들 장례 집행자의 손에 두 다리는 묶이고 손도 가지런히 묶인 채 입을 틀어막은 거즈에 숨이 막히는 듯 이제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노란 짐승가죽 속을 서둘러 빠져나온다
마음의 거처
박주택
때때로 마음이 전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꽃이 지느라 밤이 잠든 밤
마음은 마음속에서 기지개를 켠다
*
여름을 다오, 가을을 모르는 여름으로 하여 태양 아래서 빛나는 달빛 아래서 초록으로 터오는 강물의 머리카락에 캄캄한 내가 나일 때까지 핏방울을 던지리라, 새가 청혼을 세우고 그것을 여름이라고 부른다
강은 머무름이 극진한 물고기들을 위하여 고개를 수그리고 동트는 새벽을 에워싸고 있는 빛은 죽은 자들이 자신을 과신하여 함부로 지껄이고 나다니는 건방진 자들을 느긋하게 바라보고 있다
*
마음이 마음으로 늙어가는 것을 본다
주름이 빛바랜 추억을 앞장세워 혈통을 감추려 하지만
마음은 낮게 물들고 마음이 마음과 섞이며
걷고 있다
마음은 불타오르다 그 불로 먼 곳을 비출 것이다
그 불로 기억의 동굴 속을 비출 것이다
마음이 그 자신으로
소리를 이루는 곳, 언제나 그곳에서
마음에서 멀어진 것ㅈ들만이 우두커니 흰말을 기다린다
지상의 것은 지상에서 죽는다
박주택
하늘에 문을 내지 마라
문을 열고 하나씩 들어가는 것들은 모래의 벌레이거나
구름의 것들로서 아주 오래된 것들이다
죽은 것들을 데리고 긴 혀를 늘어뜨리고 가는
돛도 보인다 돛의 불타는 장미도 보인다
2시는 신음처럼 주저앉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문 앞에 당도했다
울음의 핏방울이 구름 아래로 울려 퍼진다
열고 닫히는 저 많은 문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이들은 언제 오지?)
핏자국으로 떨리는 입맛
불어 터지고 퍼런 멍이 든 말소리
세상의 것들은 지상에서 죽는다
지상에서 죽게 여름에게 마저 기울게 해라
우리는 여기서 만나고 여기서 헤어진다
하늘에 문을 내지 마라
숲속―도시
박주택
벌레 퇴치 향을 켜놓은 작은 방
저녁이 되어 창가에는 노을이 내려앉고 나뭇가지들도
어둠을 받아들이려는지 잎이 가파르다
숲이 분주한 것은 목숨 탓이다
숲에서 사는 것은 모두 소리를 가지고 있다
작은 방에 어둠이 가라앉고
창가에서 벌레들 울음소리가 틈을 허락하지 않을 때
까마귀들은 꺼억꺼억 지붕 위에서 운다
여기서 날짜를 새는 것은 하루 단위다 그것이 숲의 관행
나방이 날개를 펄럭이며 전등불 앞으로 날아다닌다
날개에서 이는 먼지를 흩날리며 불 속으로 파고든다
향은 자욱이 자신의 역할을 기다렸다는 듯
기어 다니거나 날아다니는 것을 가만두지 않는다
퍼덕이다 탁자 위에 쓰러져 있는 나방
죽음만이 확실히 죽은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꼼짝도 하지 않는다
밤이 되면 별만이 조용할 뿐
(거대한 행성이 한 점 빛으로만 반짝인다)
거대한 도시인 이 숲이 다시 하루 종일 온갖
벌레와 새들과 짐승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왁자하다
세어보니 숲을 떠나기로 한 것이 열흘이나 남았다
까마귀
박주택
*
사루비아꽃이 피어 있는 집 앞
붉은 긴 옷을 입은 피부의 여인이
마당을 쓰네, 머리에 터번을 쓴 사내 밭에서 검게 타네
돌의자에 앉았다 가는 까마귀는 며칠 전부터 유리창을
밤낮으로 쪼던 것일 것이네
여기 머무는 것도 이제 며칠뿐
얻을 것이 있다고 믿었던 것은 잊는 것을 얻었을 뿐
밖의 식탁에는 벌써 식기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네
맨발로 걷는 여인 건너편 길로 가네
사라지는 만큼 파리들 윙윙거리네, 새들 솟고,
식탁의 떠드는 소리가 방 안을 파고들고
생을 묘사할수록 곳곳마다를 다치게 한다네
*
햇빛 쓰러지네
가늘고 긴 햇빛
태양에서 달려오느라 쓰러져 빛으로만 남네
이렇게도 한 생이며
터번을 쓴 사네가 모욕을 받아내고 있는 것도 한 생이네
귓속을 파고드는 소리들 모여
피고 지는 것 사이로 퍼지네
옷 짜는 대합실
박주택
봐, 계단의 빛이 더 없이 투명해
마음에 선로가 놓여 있는 거 보여?
아무래도 좋아, 전광판도 이미 그것을 알고 있지
기차가 사람들을 고아로 만든다는 것
무엇을 향해 가는 것은 마음뿐
새들도 피난간다, 슬로건처럼
바리케이드는 두려움으로 늙어가
의지에 잠든 생살들, 감정을 간섭하는 눈빛들
후회가 전부인 입은 끝이 보이지 않는 빛처럼 기척을 나무라고
훌쩍 지나버렸지, 달과 노란 골목에서
찍혀 나오는 위폐들 보여? 작은 공장에서 새어 나오는 빛 덜미 말야
사방이 입구인 감정 사이
그 속에서 돋아나는 눈빛들 사이
감기는 고적 사이, 낮은 길보다 오래 산단 말야
시간을 팔아 얻은 것은 의지에서 꿈틀거리는
수술 자국뿐, 생은 육체로 요약되지
다만 일생을 갉아먹을 후회가
다시 빛을 가리며 온갖 것에 감길 때
봐, 의자마다마다의 잠 속에서 피어오르는
짜는 소리들,
육체를 쥐어짜며,
옷감 짜는 소리들
마음은 이렇게도 가르친다
박주택
마음은 이렇게도 가르친다
오래 겨울이 머물다 가는 사람처럼 두려워하고
잔고를 더듬는 사람처럼 쓸쓸해라
침대에 앉아 옆 침대 신음을 듣는다
햇살은 여리도록 창에 스미고 건성으로 연속극은 돌아간다
다친 각막으로 건너편 병동을 본다
육체를 떠나는 마음이 목례를 하고
마음이 없는 육체는 적요하리라
블랙아웃
박주택
어디서왔는지모르네스스로밖에없는듯
작은눈으로남아있는무언가를찾네
감기는입술로무언가를열며어디서왔는지
안에서사라지지도않고
오직하나의것에서울려나오는핏줄을듣네
머문것을듣네보는것은보이지 않고
보이지않는것이보일때사라진것들은나타나
다시팔에닿네돌의노래를보았지
숨마다닿는혀아득한눈길로스르르풀려나가한바퀴를돌지
아무것도아무것도피지않아도
물에누워있다네
수목장
박주택
게으른 새들,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바퀴
심장에서 터진 실핏줄이 감겨드는 여름, 비 오듯 땀은
옷을 적시고 작은 상자에 담긴 뼛가루, 고이고이
또 하루가 지나가는구나, 햇살이 파먹어 들어가는 얼굴에 걸친 안경이
수건에 닦이고 열매를 매단 나무들 또한 시간이 남아도는 노인처럼 늘어져 있을 때
거대한 묘지라고 부른, 방을 감옥이라고 부른 시절은 여기
숲 속 오솔길을 걷고 있구나, 산등성을 오르고 있구나
그때 꽃잎은 혀에 돋고 살에 파고들어 피를 빠는 벌레가
스르르 지친 발걸음에 산 자의 눈금을 잴 무렵
마음이 깃처럼 가벼워져야 죽음의 숨을 들을 수 있다는데
빛의 핏방울과 만나 바람에 박힌 글자들을 읽을 수 있다는데
상자 속을 나와 나무 아래 뿌려지는 하얀 뻣가루
낮은 노랫소리에 섞여 숨죽여 흐느끼는 울음에 섞여
시간이 없는 곳으로 들어가는 하얀 뼛가루
죽음의 눈과 만나 침이 고인 숨결을 받을 수 있어
가져벼워져야 하얀 머리카락의 피가 될 수 있는 날
또 누군가는 우리 무덤 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누대로부터 오는 무덤을 파헤치겠지
명치 끝
박주택
지평선을 만든다 그것은 지금 눈 아래, 발밑에 깔려있다
당신은 지평선을 향해 걷는다 터질 듯한 바람을,
초록빛을, 자멸을 아주 가볍게 부딪치며 당신은 자신의 모든 것과 보이는 모든 것을 지평선으로 만든다 다리를 건너 앙상한 나무 사이를 지나
당신은 당신 속에서 춥다 다시, 당신은 당신 속에서 춥다
낡은 저녁 속으로, 서쪽으로
그리고 육채의 뒤를 따르는 머리카락은 기억을 기억한다
당신은 지평선을 만든다 바람으로 작은 집으로 비명으로
당신은 지평선을 걷는 다 아득히 빛으로 남는다
뮤지컬 타임 캡슐
박주택
오프닝 코러스― 너는 너를 지나고
언제나 오늘 뿐인 내일 모든 문은 열려 있고
격정은 욕망으로부터 상속받은 것
여인이 날개로 가득 찬 도시에 앉아 있네 붉은 자국이 남아 있는 이마
이미 다른 생애를 살았던 듯
주위를 옮겨놓고 혼자 자신을 지키고 있다네
숙인 고개에 퍼져 있는 날들의 저주는 제단에 있고 세상은 저 아래 있고
하늘은 내부를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가득 차 있고
여기
햇빛 아래에서 불타는 중
더할 나위 없이 바람 앞에
문이 열려있지 열리지 않게
모든 실패는 우리의 것 그러기에 장의사는 더욱 엄숙해지지
죽 음 만 이 최 대 의 것
지금가지 살아진 것들은 모두 물든 숲
자꾸만 죽은 뒤에 행복하다고 말하지 마― 눈물은 안쪽에서 터질 테니
문은 열려 있지만 열리지 않고
잠은 속눈썹에 물들고 고통들은 유전되어
운명을 만들고 있다네
깃털은 날아오른다― 앙살블
사람들이 스칠 때마다 사라져
오, 유리창에 빛나는 햇빛
욕망이 채워질 때 욕망이 태어나는 것처럼 사라짐 끝에 오는
무수한 사람들의 유희야말로 모두 실제의 것
그러니 용서해!
덮어버리는 거야 애써 페이지를 뒤로 넘기는 거야 불숙
내일의 어딘가에 사는 사람들로부터 (순산순간 사라지며)
지금은 아니야…… 라고 말할 때 두려움이 사라질 테지
상상해 봐
용서가 올 때까지 모험과 선택 사이 괴로운 의자에 앉은 여인처럼 살아남기 위해서
아무것도 없이, 아무것도 없이, 아무런 핏기도 없이
자신의 몸으로 다가오는 현재 속에서― 욕망이 그에게 다가오기 전
두려움이 벅차오르기 전
순간, 바람은 파닥거리고 모래는 날아오르고
입을 벌려 숨을 내뿜는 여인에게서 사라지는 것
어제와 내일이 손잡고 오늘을 밀고하다
헏뜯는
유
희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란
오오, 핏기도 없이 사라지는 감정의 문병들
거리에서― 여인의 아리아
저무는 거리에서 오래도록 떠가는 것을 보았어요
슬픈 것들이 내는 소리로 계절의 이 끝은 아무래도
다음의 계절에 숨어들겠지요
나는 없는데 더 많은 나는 이렇게 서서
지는 빛에 물들어 파동 치는 허기와 함께 가라앉고 있답니다
여전히 싸우고, 빛도 없이 두드리고만 있는지요?
다시 태어나지 못한 채
자궁 밖 하늘로부터 배어나오는 피처럼 유리창들을 물들이고 있네요
발걸음을 뗄 때부터
죽음으로 다가가는 것이라던 길 사이로도
죽음만이, 새로 내태어날 수 있다는 표지판이 보이고
어디서 나타났는지 나비 한 마리 날아가고 있어요
아이 속으로, 깊은 잠 속으로, 천천히 사라지는 속으로
나비 금빛 날개를 허우적거리며 빛살을 튕기면서 날아가네 소리없이 깊은 곳으로 세상으로 이어지는 다리 건너 오로지 자신이 되어 투명한 날갯짓으로 가네 노래도 없이 존재하는 것도 없이 형상도 만들지 않고 아득히 빛나는 열리는 침대 위로 부르고 싶은 이름 위로
모르는 얼굴 위로 서로와 서로를 넘어 머뭇거리고 있는 창문 넘어 사라지고, 사라지고, 사라지네 달아오른 약병과 떨리는 시트 사이로 날개를 접었다 폈다, 날아가고, 날아가고, 울려 퍼지네
공모자들
박주택
하지만 그것은 골격
시작은 웃음을 입증하고 지혜는 기차를 타지 않는다
잘못 인쇄되는 새들 하지만,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야말로
호의를 인정하는 것, 모든 일은 언제나 정치적이니까
사로는 서로의 눈빛으로 들어가
흥분에 주춤하지, 누구에게라도 간절함이 있듯이
눈을 부비는 태양, 폭염이 풍겨 나오는 가ㅓ슴
그것은 고르지 못한 검은색
여기, 두 손을 팔아 얻은 것이 전부여서 후광으로 빛나고
온갖 것에 감기는 몸뚱이들은 눈동자들이 반짝반짝 빛난다
우리들은 사기의 명수, 우리들은 공모의 명수
우리는 애칭으로 서로를
돌고래라고 부른다
겨울의 장례
박주택
이 훌륭한 밤을 보내니 어떠냐
묘지들은 보다 더 가까이 있고 죽어본 자만이 혼을 믿는다
막 앰뷸런스 한 대 자신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봐!
짖어도 겨울은 오거든
구월의 뼈로 빚은 팔차선 도로, 죽기만을 기다리는 가족들
죽어본 사자만이, 죽어본 자만이 겨울이 온다는 것을 믿지
밤의 세간들이 외로운 추위에 떨 때
자신 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을 때
묘지에서 자라는 것들,
아이들은 믿을 수 없고 너무 부드러워
적들의 무기고인 웃음들 그리고 마지못해 열리는 거리
거리는 장례가 시작되는 곳에서, 너무 많은 것을 기억해
낮이 남몰래 돌아다니는 그사이 익어가는 불운
아름다운 태양 아래로 가라, 기교를 부리지 말고 죽어라*
그것이 기교의 방식, 식초 냄새에 침이 고이는 것처럼
죽음의 냄새에 고이는 육체들, 아닌 것처럼 해도
지하상가의 생선 가게처럼 썩어가는 것들이 있다
그건 시끄러운 소리에 다름 아니다
어제가 오늘과 만나고 내일이 모레와 만나 조롱하는 것을
어째서 듣지 못하는가?
이제 아무도 믿지 마,
강물이 흩어지지 않으려 바닥으로 가라앉는 다는 것을 기억해
훌륭한 밤 보내, 바닥처럼, 혼자
* 사라 키르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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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단절을 일종의 진화로 받아들이는 견해는 생성이 대항으로만 형성된다는 단순한 논리의 모방에 지나지 않으며, 역사화의 범주와 과정 속에서 주체가 무엇으로 돌아가기 위한 선언에 불과하다.
관계는 태도와 경행보다 훨씬 경험적이다.
육체가 정신에게 부과한 것은 육체의 상상과 이를테면 빌려온 물건들, 날아가 버린 빛, 중심 속의 무한과 큼 사이에 솟은 과즙, 기억이 쓰고 있는 비통들, 죽은 자들조차 더 이상 자신이 아닌 것으로 익어가는 숨에 관한 상기이다.
돌이 게워내는 청혼하는 밤에 조난당하는 덜미들.
마침내 자신을 보도록, 사라져가는 기둥과 소홀한 틈을 타 공간 사이를 넘어서려는 빈손과 경고하는 기적 사이를 지나 바깥이 새겨져 있는 갓난아이의 손…… 차라리 입이 없었으면…… 3시는 너무 크구나.
2013년 10월
박 주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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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택 詩集 [※또 하나의 지구가 필요할 때※]
[ 해설 ] -
기억의 빛
강동호
박주택의 시 세계에서 기억이 핵심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 새삼스러운 지적은 아닐 것이다. 그의 시가 “기억과 망각이 충돌하며 휘감기는 복잡한 몸의 회로”(오형엽)로 구성되어 있다는 진단이나 “손에 잡힐 듯 한 시간의 현재성이 아니라 시간의 헤아릴 수 없는 잔주름들”(이광호)을 응시하고 있다는 분석은 그의 시가 기본적으로 기억이라는 어두운 공동을 둘러싼 언어적 움직임의 파장에서 산출되는 이미지들에 의해 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공통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이번 새 시집『또 하나의 지구가 필요할 때』역시 언뜻 읽기에는 이러한 기억의 문제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데, 그런 의미에서 일단 그의 시집을 읽는 시간은 도처에 놓인 기억의 문을 여는 과정에 대응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첫 시를 보라.
나는 온다. 안개의 계단을 내려와 홀로 남은 빵처럼, 팔리지 않는 침울처럼
나는 내 발자국을 따라와 가느다란 빛이 이어주고 있는 기억 사이에 서 있다
나는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것을 그리워하며 살았다
그러나 어느 곳에 서 있었는지 작은 것조차 어두웠다
나는 온다, 밤이 다할 때까지
기억에서는 또 잡귀가 태어나리라
-「언제나 기억의 한가운데」전문
제목이 암시하고 있듯 이번에도 그의 시는 어김없이 “기억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시인은 언제나 추억의 풍경에 매여 있는 삶, 일종의 과거지향적인 일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일까? 그런데, 그렇게 단정 짓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그의 시집 전체를 찬찬히 읽어본 독자라면 금방 의문을 품어볼 수 있겠지만, 시인이 기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고 여기기에는 무엇보다 이 시집 전체를 통틀어 구체적인 기억을 주조하는 사건을 발견하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기억이 일종이 숨겨진 비밀로 기능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어쩌면 박주택에게 기억은 사전적인 정의대로 과거에 실재했던 분명한 사건에 대한 반추 과정이라고 보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어떻게 된 일인가?
우리의 가설을 미리 누설하자면, 박주택에게 있어 기억이라는 낱말은 통상적으로 시에서 기억이 차지하고 있던 역할과 정반대의 일, 다시 말해 그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미지의 기억과 만나는 일에 가깝다. 미지의 기억을 기억한다고? 이것은 불가능한 형용모순이 아닌가? 그러나 단순히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자궁은 말한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기억하라”(「강변산부인과-부재만이 아름답고 모든 사라짐만이 충만한 환영」). 이것은 박주택 시집의 전언을 요약한 말이기도 하거니와, 시인의 기억술은 기억할 수 없는 것을 기어이 기억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어떤 불가능한 욕망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일단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다시 첫 시를 읽어보자. 첫 행에서 시인은 “나는 온다”고 다소 선언하듯 말하고 있으나, 이 진술은 이상한 시제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의 현존(‘나는 온다’)은 이미 달성된 사건이라기보다는 현재형으로 계속되는 일종의 상황이자 동시에 “밤이 다할 때까지” 끝날 수 없는 사태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원히 닫힐 수 없는 현재, 즉 영원한 현재의 지속이지만 이 말은 역설적이게도 시인에게 최소한 나의 현존이라는 차원에서는 현재형의 시제가 허용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과연 “안개의 계단을 내려와 홀로 남은 빵처럼, 팔리지 않는 침울처럼/나는 내 발자국을 따라와 가느다란 빛이 이어주고 있는 기억 사이에 서 있다”라는 미묘한 문장은 현존의 차원에서 그것의 현재적 완성을 이루어낼 수 없는 시인의 처지를 말해준다. 여기서부터 시인의 현존은 일반적인 기억의 매커니즘과 이상하게 불화하기 시작한다. 왜? 본래 기억이란 현재화된 과거이니까. 그러나, 그의 기억은 팔릴 수 없는 침울처럼 영원히 어떤 감정으로 현재화되는 것을 끝내 저항하고야 만다.
그이 이번 시집에서 기억은 시를 통해 편안하고 안정적인 정념을 실어 나르기 위한 구체적인 재료로 동원되는 법이 없는데, 이러한 사실은 그의 회고담이 일종의 낭만적 치장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러므로 첫 시에서 시인이 “언제나”라고 썼을 때, 그것은 자신이 그저 추억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는 처지를 알리기 위한 것이라는 편견과 우리는 단호히 결별할 필요가 있다. 때문에 시인은 자신이 기억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은 비록 확신할지언정 한편으로 “어느 곳에 서 있었는지 작은 것조차 어두웠다”고 실토하는 것이다. 이러한 어둠이야말로 박주택 시의 태생적 색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그 어두운 기억에서는 매번 잡귀가 태어나는 중이다. 분명히 말하자. 이 때의 잡귀는 기억 속에 머물고 있던 어떤 것.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억압된 것의 불길한 회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잡귀는 그의 기억이 포박하고 있던 과거의 사건과 연관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현재의 시간으로 개입해 들어오는 어떤 외부의 흔적을 가리키는 것에 가깝다. 가령, 다음 시는 그러한 면모를 조금은 더 분명한 상황을 통해 적시하는 것 같다.
새로 문을 연 카페에서 교토를 떠올린 것은 어제였다
나는 교토에 가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내가 사라져버리면 묻힐 곳이 있듯이
아이가 첫걸음을 뗄 때만큼
기쁨이 순간적으로 몰려왔던 때는 드물 것이다
창밖을 보며
물끄러미 흘러나오는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사람들
마치 밀양에 가보지도 않고 밀양에 간 것처럼 말이다
벚꽃이 피어 있는 교토, 깊은 봄을 재촉하는 고양이가
골목을 휘젓고 다니면 막 나인 것처럼 나를 부르겠지
그때 유끼오 씨는 두꺼운 창문을 열고
4월의 그날 밤에 충고를 거절하겠지
아무래도 나는 너무 많은 상상을 보아온 것 같다
기둥들 사이 이제껏……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까지
나무는 산 아래 언덕 위에 있었다
그곳에는 꽃이 피어 있었다
아무 의미도 없이
삼류 여관과도 같이 주위를 지배하고 있었다
나는 교토를 가본 적이 없다
첫걸음을 땐 아이는
이제 제 방에 남자를 끌어들일 정도로 눈도 녹고 마른 날
저녁에는 태어나지 않은 것들이 흔드는
커피에서 풀리는 노란 코트
모든 길들이 모여들고, 모든 감정이 퍼져 있는
빛 속으로 흰빛을 움켜쥔다
날씨는 모든 것을 향해 있다 이렇게 말이다
창으로 떨어지는 빛……아무것도 알 수 없는
모든 것이 가르쳐주지 않는 장소에서
스스로를 들여다보기 위해
흔적이 다시 돋아날 때까지 물들이는 빛
빛에 지워지고 빛 속을 걸어오는 사람들
그때까지 숨을 들이키며 커피에 물드는 예감은
두 눈에 어떤 느낌을 고정한 채
이윽고 자신이 되기를 기다린다
나는 교토에 가본 적이 없다
오후 4시, 카페 밖에는
작은 새처럼 커다란 가로수가 서 있다
-「교토에 가본 적이 없다」전문
새로 개장한 카페에서 화자는 창밖을 바라보다 문득 교토를 떠올리는 중이다. 묘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창밖 풍경과 교토라는 도시의 공간적 유사성이 벚꽃이 피어 있다는 사실 외에는 현저히 부족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교토에 가본 적이 없다”는 화자의 고백대로 그는 자신이 전혀 경험해본 적 없는 어떤 장소의 풍경을 기억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억은 일종의 간접적인 유사 경험에서 촉발된 우발적인 상념에 불과할까? 그러나 그렇다고 단정 짓기 전에 이러한 상기의 메커니즘이 지니고 있는 복잡성을 조금 더 음미할 필요가 있다. 시인의 기억이 어딘지 근본적인 데가 있는 것처럼 읽히기 때문이다.
이 근본적인 기억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소 뜬금없이 보이는 전혀 다른 두 사태가 벌이는 특유의 상응 관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위 시에는 두가지 서로 다른 시간축 사이의 대립적인 긴장이 있는데, 이것은 내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시간과 전혀 무관해 보이는 어떤 다른 시간이 지금 내 삶 속으로 침범해 들어오고 있다는 예감 속에서 발생하고 있다. 이를테면 교토에 가본적이 없는 나와 교토를 떠올리고 있는 나, 첫걸음을 뗀 아이와 제 방에 남자를 끌어들일 만큼 성장한 아이, 그리고 마지막 행에 진술되고 있는 것처럼 “작은 새처럼” 서 있는 “커다란 가로수” 사이의 비약적인 비유의 대응에 의해 조성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연결을 가능케 하는 “예감”이 이번 시집에서의 기억의 근본적인 존재론적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즉, 박주택의 기억은 주체가 경험했던 사건의 전모를 복원하는 행위가 아니라, 서로 만날 수 없는 평행 우주의 세계가 서로 일순간에 교통할 수 있으리라는 어떤 시적 상상력에 더욱 가깝다. 그러므로 그가 기억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때 그가 겨냥하고 있는 것은 기억의 구체적인 전모라기보다는 기억이라는 인간적 행위의 형식 그 자체이다. 그러니 박주택의 시가 감행하고 있듯, 그야말로 기억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억을 잘게 부수어 흩어놓는 선행 작업이 필요하다. 이를 감안해야만 우리는 박주택이 말하는 기억의 실상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지평선을 만든다 그것은 지금 눈 아래, 발밑에 깔려 있다
당신은 지평선을 향해 걷는다 터질듯한 바람을, 초록빛을, 자멸을 아주 가볍게 부딪치며 당신은 자신의 모든 것과 보이는 모든 것을 지평선으로 만든다 다리를 건너 앙상한 나무 사이를 지나
당신은 당신 속에서 춥다 다시, 당신은 당신 속에서 춥다
낡은 저녁 속으로, 서쪽으로
그리고 육체의 뒤를 따르는 머리카락은 기억을 기억한다
당신은 지평선을 만든다 바람으로 작은 집으로 비명으로
당신은 지평선을 걷는다 아득히 빛으로 남는다
-「명치 끝」전문(강조는 인용자)
“당신은 자신의 모든 것과 보이는 모든 것을 지평선으로 만든다”라고 했거니와, 이때 지평선이 지닌 존재론적 위상에 주목하는 것은 박주택 시에서 기억이 차지하는 위치를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준다. 알다시피 지평선은 실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감각으로 실체화할 수 없는 저너머의 세계가 주관의 감각적 한계를 통해 표상되는 것에 가깝다. 그러나, 한편 지평선은 한계의 결과이기도 하면서 결국 주관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한계 자체를 표상하게 만드는 현상학적 경계 체험의 한 형식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지평선으로 만든다는 것은 모든 세계를 지평선이라는 경험 구조로 파악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으며, 나아가 객관적 사태 속에서 주관의 한계를 발견한다는 뜻과 같다. 그리고 그것은 시인이 고집스럽게 시인의 한계 안에서 시적인 것을 발견한다는 말로도 읽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시인이 “육체의 뒤를 따르는 머리카락은 기억을 기억한다”고 고백한 것은 각별히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기억 역시 위에서 제시되어 있는 지평선의 경험 구조와 정확히 일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이렇게 물어보자. 기억을 기억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기억을 기억하는 일이란 끝도 없이 펼쳐진 지평선 저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초월적인 이상향으로 남겨두는 대신 내재적인 주관성의 지평으로 받아들인다는 주체의 의지를 함축한다. 그리하여 기억을 기억한다는 것은 기억할 수 없는 것을 기억하는 것, 아니 기억할 수 없는 것을 일종의 기억의 한계이자 동시에 기억을 낳게 하는 어떤 존재론적 배후로 드리운다는 뜻이다. 지평선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듯, 기억을 태동하게 만드는 그 조건 역시 눈에 보이지 않은 상태에서 철저히 우리 삶의 배후로 남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어둠이 지니는 의미와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왜 어둠인가? 어둠이 단순히 빛의 부재가 아니라 빛을 태동하게 만드는 잠재적인 근원일 수 있듯, 시적 상상력의 가장 잠재적인 근원이자 배경으로서의 어둠을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박주택이 말하는 기억을 응시하는 일과 대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둠을 뚫어지게 바라보니 어둠도 뚫어지게 바라본다
별이 별빛으로 반짝이기까지 낮은 무엇의 배경이 되었을까
어둠이, 어둠이 되었을 때
그 배경으로 잠이 들고 말도 잠을 잔다
말이 잠들지 않았다면 붉은 말들은 무엇을 만들어낼 것인가
어둠 속으로 한 발자국 걸어가는 동안
어둠이 한 발자국 걸어온다
어둠은 낮에게 어둠에 가깝게 보일 때까지
자신을 말하지 않고도 낮의 것을 받아들인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검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래서 어둠이 키우는 것은 대개 마른 것들
벌어진 살에 쏠리는 것들
어둠 속에서 어둠의 숨을 듣는다
어둠에게 서서 어깨에 얹은 손을 본다
어둠이 깊은 것으로 자신을 만들어
모든 것의 배경이 되는 것을 본다
수많은 별이 빛날 때까지
수많은 말이 잠들 때까지
수많은 마음이 잠들 때까지
-「어둠의 산문」전문
위 시에서 우리는 더욱 깊은 어둠으로 변모하면서 모든 것의 배경이 되는 어떤 장엄하고도 광활한 어둠의 장막을 목도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잠들면서 어둠의 배후로 물러날 때, 비로소 대낮의 광휘에 의해 가려져 있던 별의 자취가 드러나기에 이른다. 이때 어둠은 그저 빛이 부재하는 순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어떤 충만한 채워짐일 수 있다. 어둠을 그 자체로 하나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시인의 상상력은 바로 이 배후의 전경화가 새로운 현실의 각성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될 수 있다는 믿음 위에서 발동될 수 있는 것이다. 세속의 말이 잠들고, 현실의 마음이 의식 아래의 수면으로 잠길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어둠의 숨을” 숨죽여 듣는다.
이러한 사정은 기억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최소한 시에서 말하는 의미 있는 기억은 아니다. 시가 감행하는 기억은 기억할 수 없는 것의 심연 속으로 들어가, 그 망각의 숨을 듣는 작업이다. 그런 의미에서 망각은 기억의 부재가 아니라, 기억을 의미 있는 시적 기억으로 만들기 위한 충만한 부재의 다른 이름이다. 현실의 언어에서 망각이라는 사태는 어떤 기억할 만한 사건이 마음에 각인된 이후 비로소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되기 쉽지만, 어떤 의미에서 망각은 사건이 발생하기 이전에 선재할 수 있는 사태의 총칭이기도 하다. 이 충만한 부재의 공조가 없다면, 망각은 깊이를 얻지 못하며 기억 역시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한 그저 억지로 복원된 죽은 사실의 모뉴망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망각과 한몸이라 할 수 있는 시의 기억은 경험의 대상이기 전에 경험을 이루는 조건이자 경험을 유의미한 시적 경험으로 만들어내는 형식이기도 한 셈이다. 박주택은 기억을 기억함으로써 기억을 과거에 속박된 어떤 것으로 재구성하지 않고, 대신 지금 여기의 현실을 알려지지 않은 어두운 빛의 기억을 통해 일상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즉 시인의 기억은 구체화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라, 그 경험을 비로소 경험으로 만들 수 있도록 도모하는 상상력의 존재론적 토대와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런 맥락에서 박주택이야말로 기억의 형식주의자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시인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때의 형식이 내용과 이분법적으로 분리된 어떤 외관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빛과 어둠이 서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가능케 하는 부재의 조건으로 정의될 수 있는 것처럼, 형식으로서의 기억은 내용으로서의 기억이 비로소 의미 있는 경험으로 조성되기 위한 어떤 조건으로서의 부재이니 말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 형상은 존재를 만들고 존재는 마음을 만든다 존재의 형식인 저 보관소는 원인을 낳는다 지구는 얼음의 행성과 부딪쳐 물이 생겨났다는 것도 바로 같은 식
이를테면
지구의 형식이 얼음인 셈 인형이 아름다운 것, 십자가가 능력을 유지하는 것, 조국이 불행을 요구하는 것, 이 모두는 형상의 유모들이다.
습기를 참으며 소란을 응시하는 저 수하물 보관소
입을 다물고 유령의 눈동자처럼 혹은 권리를 존중하는 의무처럼 자신을 중심으로 앉힌 뒤 살아 있는 수풀처럼 밀약으로 가는 계약서처럼
이것은
예전부터 흐르던 깊은 골짜기로 파닥거리는 검은 종족 오직 그 자신의 것으로 들어 올리려 불만을 허락하는 덫 속의 하늘 즉 또 다른 전체성의 형식
그리하여
저녁의 형상은 저녁의 허무를 낳고 정적의 형상은 지저귐을 낳는다
빛이 있을 때까지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발걸음 소리가 들릴 때까지 가르랑거리는 깊에 다시 나타나 새로운 형식으로 끝이 죽음인 사랑을 시작하기를
차례차례
부드러운 울음을 서둘러 되풀이하기를 전부가 아니더라도
중심으로 정원과 강과 하늘을 파종하기 위해서!
-「덫」전문
“지구의 형식이 얼음”이라는 말에 기묘한 형태의 역전이 개입하고 있음을 눈치채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얼음의 행성과 충돌하여 탄생한 지구의 입장에서 보자면 얼음은 지구를 존재하게 만드는 기원이거나 혹은 그 기원의 흔적을 보여주는 기미 같은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단언하듯 얼음이야말로 지구라는 존재의 형식이라고 말하는 중이다. 시인이 얼음을 일종의 형식으로 삼는 것은 기억할 수 없는 것을 기억하는 형식으로서의 시적 상상력이 “또 다른 전체성의 형식”으로 변모하는 일과 같다. 우리는 보통 존재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일종의 원인이라고 간주하는 선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경험이 기억에 의해 조형되는 바를 가만히 따져보면 원인 역시 존재의 형상이 만들어지고 나서 사후적으로 탄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마치 우리는 우리를 존재하도록 만든 그 최초의 사건에 대한 기억을 가질 수 없지만, 그 불가능한 기억을 현재의 형상을 통해 반추하는 것은 가능하듯이,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현재의 형상을 통해 그 기억의 불가능성을 내면화하고 오히려 자극적으로 그 기억을 상상하는 것은 분명 매력적인 일이다. 기억할 수 없는 태초의 순간을 부재와 어둠의 형식으로 기억한다는 것은 우리의 기억에 깊이를 부여하는 초석이 되기 때문이다. 사정은 시인의 마음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마음은 불타오르다 그 불로 먼 곳을 비출 것이다
그 불로 기억의 동굴 속을 비출 것이다
마음이 그 자신으로
소리를 이루는 곳, 언제나 그곳에서
마음에서 멀어진 것들만이 우두커니 흰말을 기다린다
-「마음의 거처」부분
마음이 숨어 있는 곳, 너무 먼 곳
알 수 없는 말들로 이루어져 겹겹의 통역이 필요한 곳
〔……〕
마음이 있는 곳
소리없는 곳에 소리가 있고 나무가 뽑힌 웅덩이는
나무를 기억하기 위해 비어 있네
일찍이 마음을 찾아 헤매다 지쳐 앉은 자리에는
수도승 몇이 순례에 지쳐 물을 나누어 마셨지만 돌아오고 돌아온 발자국에는
풀잎들 몇 돋아 있을 뿐
-「혹은 은둔의 제국」부분
이번 시집에서 우리가 시인의 마음이 직접적으로 누설되는 장면을 보기가 힘든 것도 그와 관련이 있다. 오히려 상황은 정반대인 것처럼 읽힌다. 상투적인 시는 시인의 마음을 왜곡 없이 언어로 복원하여 더욱 절실하게 전달하는 것이 목표일 수 있겠으나 박주택에게 마음은 오히려 불태워야 할 대상이다. 왜냐하면 마음을 소각한 이후에야 비로소 “마음에서 멀어진 것들”과 시가 만날 수 있는 계기를 얻을 수 있으며, 이 계기를 매개로 부재와 현존의 변증법적 언어의 운동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은둔해 있는 마음이 펼쳐내는 알 수 없는 말을 현실의 언어로 번안하는 대신, 마치 “나무가 뽑힌 웅덩이는/ 나무를 기억하기 위해 비어있”듯이 그 알수 없는 마음의 빈 곳을 응시함으로써 거꾸로 “기억의 동굴 속을” 환하게 비추는 어떤 상상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부재로서 현존을 밝히는 일과 같다. 그러나 그것 역시 마음의 온전한 재건축을 뜻하지는 않는다. 박주택의 시가 비극적인 분위기와 느낌으로 미만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정념이라고 할 만한 것을 표현해주는 객관적 상관물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것은 시인 스스로가 자신의 마음을 토해내는 데 인색하기 때문이 아니가, 늘 그렇게 마음을 불태움으로써 타자의 기미를 받아내고 마침내 그가 기억하지 못한 기억의 말들을 불러내려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박주택의 시는 기억 속에서 끊임없이 갱신되는 경험의 계기들을 포착해나가는 중이다. 그의 기억이 구체적인 사건을 지시하기에 앞서 많은 경우 어떤 선험적인 관념의 지위를 구가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까닭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오해를 피하자는 차원에서 덧붙이면, 이 짙은 선험성이 그저 기억이라는 관념어를 매개로 시인이 일종의 정신주의로의 비약을 감행함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생은 육체로 요약되지”(「옷 짜는 대합실」)라는 구절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나듯, 박주택이 관념과 정신, 그리고 기억을 노래하는 것은 현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 비참하고도 너절한 현실로서의 ‘육체’를 망각하지 않기 위해서다. 더 정확히 말하면, 현실로서의 육체로 흐르기 위해 시인은 무의식의 강물로 흐르는 잠을 향해 계속해서 기억을 가라앉히는 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강물이 흩어지지 않으려 바닥으로 가라앉는다는 것을 기억해
훌륭한 밤 보내, 바닥처럼, 혼자
-「겨울의 장례」부분
이 매력적인 문장을 각별히 기억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의 끝없는 언어적 운동성의 비밀이 바닥으로의 침잠과 관련 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밝힘은 무론이거니와, 이 침잠이야말로 “아무것도 알 수 없는/모든 것이 가르쳐주지 않는 장소에서/스스로를 들여다보기 위해/흔적이 다시 돋아날 때까지 물들이는 빛”(「교토에 가봊본 적이 없다」)에 대한 예감이 태동하게 만드는 상상력의 원천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이 예감은 (이미 그 단어에서 환기하고 있듯) 그의 시가 과거지향적인 것에 붙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에 정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요컨대 그의 시에서 기억은 수동적으로 떠올려지는 것이 아니라, 매번 적극적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박주택의 시 도처에서 기억과 더불어 탄생이라는 단어가 동등한 수준에서 언급되는 까닭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다음의 사례들처럼,
당신은 육체이기 전에 먹먹한 귀를 가진 푸른 공기로부터 나오는 구름의 물방울로 태어난 사람처럼 짓눌려 있다 모두가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빛이 반질거리는 것을 이빨 아래 드러내고 있는 사이 당신은 태어나는 기억의 눈동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수지」부분
죽음만이, 새로 태어날 수 있다는 표지판이 보이고
어디서 나타났는지 나비 한 마리 날아가고 있어요
-「뮤지컬 타임캡슐」부분
그러니 당신이 있는 곳에 위안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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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일찍이 누구를 죽이려고 한 적도 없고 십자가 아래에 아이를 버린 적도 없으니 당신의 봉변은 유래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견딜 수 있는 것은 태어나기도 전의 기억이 없는 곳으로 데려가는 기억 때문만은 아니다
-「불타는 육체」부분
이상한 빛이 하늘로부터 내려오고 있었으니 오래된 세기의 빛이거나 알에서 태어날 징조였다
-「무연고 사망자 공고」부분
이토록 박주택의 시에는 기억이라는 형식 속에서 탄생의 조짐이 엿보이는 순간들을 포착해내는 장면들로 충만하다. “태어나는 기억의 눈동자”라고 했거니와, 다른 말로 바꾸자면 이는 모든 죽음과 소멸의 도정에서 번뜩이는 또 다른 현실의 태어남 자체에 대한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누차 강조하는 것이지만 태어남을 기억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니 시인의 태어남은 새로운 사건과의 대면을 통해 발견되거나 반대로 부재의 무덤에서 소환된 과거의 갱신을 통해 발굴되는 것이라기보다는 부재 그 자체와의 직면에서 비로소 환기되는 어떤 불가능성에 대한 욕망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욕망을 유지하고 영원히 다가갈 수 없는 존재의 심연으로 뛰어드는 것이야말로 시인의 기억이 담당하는 일이리라. 그러니 시인의 기억이 어둠, 밤, 그리고 잠에 특별한 애정을 피력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것을 경유해야만 평안하고도 안정되어 보이는 현실의 죽은 언어들이 살아 움직이면서 비로소 또 다른 현실을 일깨우는 언어들을 탄생하도록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자주 잠을 청하는 것은 이 너절한 현실을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현실을 새로운 가능성의 기운으로 충전시키기 위해서다. 그 충전의 기미는 박주택의 시 곳곳에서 화려한 이미지들을 거느리면서 어떤 긴장의 운동을 발생시키는 장면으로 극단화되기도 한다. 이러한 긴장의 운동이 빼어난 풍경으로 형상화된 대표적인 시 한 편을 인용해보자.
이제 길고 가는 열매들의 시월
차디찬 바람과 섞이며 햇볕은 구부러지고 큰 물혹들이 잡히는 어깨뼈 아래 두려움은 서툰 변명을 시작한다
그것은 마치 우울한 근대사 같기도 하고 망령들의 목청 같기도 하다 해머는 빙빙 돌며 하늘을 요동친다. 해머는 뼈를 뚫고 나온 길들로 산 적이 없는 공간을 향해, 더는 듣기 싫은 욱하는 마음으로 공중을 반복하여 흔든다
공중은 윙윙 돌아가는 해머에 부서지며 입을 닫기 위해 악다구니로 소리친다 그러나 지금은 보여주는 입을 대신하기 위해 해머는 줄 끝을 팽팽히 당겨, 더욱 공중을 넘어서려 한다
시월이고 알이고 중심인 줄 끝에 매달려 육중하게 돌아가는 떨림이 가득한 순간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의 연장 같은 것
죽은 도시를 일깨우는 새로운 말 같은 것, 시체 같기도, 악령 같기도 한 인간의 깊은 양심을 향해 날아가고자 하는 총알과 같은 것
해머 선수, 다리 근육을 당겨 창세기를 펼치는 혼돈으로부터 끊임없이 태어나고 있는 눈을 부라리며 얼굴 전체를 일그러뜨리며 해머를 던진다
허공의 두개골을 깨려는 듯
무의 중심으로 알을 가라앉히려는 듯
-「해머 선수」전문
바람에 흔들리는 시월의 열매는 지금 “공중을 반복하며 흔”드는 중이다. 인용된 시는 이 시집 전체를 통해 박주택의 시가 보여주고 있는 언어적 운동 양태를 요약해서 보여주는 일종의 조감도로 읽힐 수 있다. “빙빙 돌며 하늘을 요동”치는 시월의 열매는 완숙과 성숙의 경지를 거부하고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스스로를 “팽팽히 당겨, 더욱 공중을 넘어서려”하고 있다. 이 역동적이고 화려한 장면에는 우울과 분노가 서려 있으며 아울러 바람에 스스로를 맡긴 채 흔들리고자 하는 시적 주체의 희열이 가득하다. 이전 시집『시간의 동공』(문학과 지성사, 2009)의 해설에서 정과리는 박주택의 언어가 어떤 선험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말하며 “그것은 움직인다고 말하기 전에 이미 있으며 동시에 움직인다고 말한 이후에도 말의 제어권 바깥에 놓여 있다”(「눈동자로부터의 모험,」p, 131)라고 정확하게 지적한 바 있는데, “근육을 당겨 창세기를 펼치는 혼돈으로부터 끊임없이 태어나”는 듯한 그의 끝없는 언어의 운동성은 이번 시집에서도 변함이 없다. 다만 한 가지를 더 지적하자면, 이처럼 방향을 예측할 수 없는 언어들의 진폭이 “무의 중심으로 알을 가라앉히려는” 움직임 속에서 비로소 탄생한다는 것은 거듭 강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즉, 정체를 결코 드러내지 않는 기억의 중심에는 아무런 내용도 없는 무가 자리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이는 우리의 육체가 실은 그 어떤 의미로도 완벽하게 장악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박주택의 시가 끝없이 운동하는 것은 그 무엇으로도 그의 사유가 현재의 지평에서 안정화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의 기억은 과거와는 관련이 없으며, 급기야는 이 글의 서두에서 밝혔듯이 영원히 닫힐 수 없는 현재의 지속, 즉 현재의 무화를 기도하는 데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과거도 현재도 없다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박주택의 시가 분명하게 의도하고 있는 시간성과 만날 수 있으며, 완벽한 무이자 공백인 저 알의 중심에서 우리는 비로소 어떤 미래에 대한 예감이 탄생하는 장관을 목격할 수 있다. 그러니까, 박주택이 잠의 세계로 걸어가는 것은 초현실주의적인 시인들이 자주 그러하듯 그 무의식의 세계에서 미래라는 이름의 다른 시간이 탄생한 어떤 기미의 섭생을 돕는다는 말과도 같다.
‘시선’에 의해 추방된 자들 부활을 고안하며 후회를 은폐하는 밤이 오면 자신을 데리고 영원을 바라본다, 그때
먼 곳이 어두워졌다가 밝아지고
발자국을 변호해온 잠은 생과 저항하며 지구의 한쪽에 가엽고 부드러운 긴 꿈을 이끌고 온다
잠은, 머릿속 깊은 곳으로부터 와서
또 다른 세상의 문을 연다 잠은, 젖을 빨아대며 양육된다
별은 씨앗을 받고
과거는 미래에게 눈썹을 달아준다
이것이야말로 대지에서 나온 것
대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을 열어 허공을 듣는다 현재에 도달하는 순간 현재는 사라지고
〔……〕
지구 위로 별자리 옮기네 계절은 바뀌고 바뀌어 태양과 우리는 올 줄을 모르고 답할 줄도 모르네 비가 내릴 때까지 꽃이 필때까지 날짜는 우리를 찍어내고 지구의 이쪽이 아프고 지구의 저쪽이 아퍼 또 하나의 지구가 필요할 때 우리는 날마다 전시되고 날마다 비육되네
-「도플갱어」부분
과연, 잠이 현재를 탐식하는 한에서, 비로소 기억은 “미래에게 눈썹을 달아” 줄 수 있는 법이다. 이것은 오욕과 비참함으로 가득한 현실의 과거를 넘어설 수 있는 시적 기억의 또 다른 가능성을 나타내주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이 감행하는 잠으로의 순례는 진정한 나를 찾아 나서는 과정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가장 낯선 나를 현실의 나로부터 해방시키는 작업에 가깝다. “발자국을 변호해온 잠은 생과 저항하며 지구의 한쪽에 가엽고 부드러운 긴 꿈을 이끌고 온다.” 이 아름다운 문장의 말대로, 박주택의 운동하는 언어는 과거의 현재화가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기억의 밑바닥에서 다시 기억을 구제하는 형식을 끊임없이 창조하는 중이다. 시인의 기억은 매번 저 기미를 태어나게 하는 순간 자체가 그의 시간성의 전부임을 선언한다. 그렇게 태어남으로서의 기억은 시인의 과저이자, 현재이며 또한 미래이기도 한 것이다.
비록 시인이 직접 고백하는 장면은 드물지만, 이 모든 기미들의 요동이 실은 미래와 더불어 어떤 희망의 징조를 잉태하려는 작업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두 현실, 사는 것과 싸우는 것 그래서 아이러니는 끝난 문제가 아닌 것, 말의 요지는 희망에 대한 기술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국가의 형식」)이 우리의 시인이 목도하고 있는 이 세계의 실상인 셈이다. 반복해서 말하거니와, 기억이 단순히 그저 과거에 있었던 사건의 추인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참혹한 비극적 일상을 계속해서 목도하는 것 외에는 희망과 관련하여 할 수 있는 말이 그닥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역사를 기억하는 일은 분명 정치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올바른 방향으로 상황을 이끌어가기 위한 전제 조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억과 애도의 작업에도 불구하고 여지없이 비극으로 수렴되어가는 인류의 역사로부터 눈을 돌리지 않는다면, 실제적인 기억을 기념하는 일이 임시방편으로 세계를 보수하는 길이 될 수는 있으나 근본적으로 역사에 대한 희망을 구원하는 데까지는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역설적이게도 기억과 더불어 희망이라는 것이 지니고 있는 존재론적 형식을 암시하기도 한다. 기억할 수 있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진정한 시의 기억이 아니듯, 희망할 수 있는 것을 희망하는 일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시의 희망과는 관련이 없다. 진정한 희망이란 기억과 마찬가지로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다른 생의 불가능성을 희망의 조건으로 내면화함으로써 그 자체를 희망의 형식으로 간직하는 것이다. 기억을 기억하는 것은 곧 희망의 형식으로 간직하는 것이다. 기억을 기억하는 것은 곧 희망을 희망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으며, 거기에서 창출되는 새로운 생의 시간을 향해 감각을 예민하게 곤두세우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고작 기억에서 생이 비롯된다는 것
배후를 엿듣는 빛은 기록하고
기미를 예인하는 날짜는 다른 곳을 연다
-「굿모닝 뉴스」부분
“고작”이라고 했으나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 단순한 일상에 지나지는 않을 것 같다. “기미를 예인하는 날짜는 다른 곳을” 열고 그렇게 개방된 공간에서 우리는 새로운 시간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시적 공간에서 우리는 “빛 한가운데 서 있다 막 그곳에는 무엇인가 남아 있다”(「어떤 것은 여름이었고 어떤 것은 마지막이었다」). 그 남겨진 무엇인가에 대해 희망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지 않겠는가. 관성화된 지구의 삶을 구원하는 길은 요컨대 희망이 각인되었던 어떤 흔적을 온몸으로 기억해내면서 또 하나의 지구를 욕망하고 요청하는 순간에만 가능하다. 온몸으로 기억하는 일이란 이처럼 말할 수 없고, 기억할 수 없는 그 희망의 빛에 대한 일종의 예감이다. 그 예감이 밤이 다할 때까지 소멸하지 않는 한, 미래의 희망을 품은 기억의 운동은 ‘언제나’ 그치지 않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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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나―너의 세계에서 흘러나오는 것들은 번식을 향해 오르고 퍼즐처럼 소리를 지른다. 그곳으로 끼어드는 것들은 스스로 자라난다. 우리의 것이면서 모든 것의 배경인 것은 입구부터 열려 있다. 사지들, 가능성들, 묶여 있는 눈빛들은 안쪽을 들여다보며 날개들을 마셔버린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고, 아무런 의미를 띠지 않은 채 씌어지고, 옮겨지는 것들은 저승의 혈관을 보여주려는 듯 작게, 아주 작게 한복판을 휘저어놓는다.
기원에 대한 계획―나에 의해 씌어지고, 나에 의해 해석된 방식―은 마침내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이 완강하게 서로가 하나의 형식으로 저항한다. 형식은 내용을 획득하는 과정으로 의미화된다. 때때로 형식이 혐오스러운 것은 아무런 매혹도 없이 자신을 중요하게 여겨달라는 태도로 시선을 압도할 때이다. 어떤 의미로든 형식과 내용은 서로 구성할 수 없는 허구나 가상의 것인 관계적 오류로서만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세속적인 호의와 고의적인 예감」(2027)의 시가 아나키즘적 공리를 수행하고는 있지만 미적 계기를 위해 반양식적 모델을 향한 가치와 연결되어야 한다는 견해는 자칫 무례한 현실의 형식 혹은 억압의 형식과 연결될 수 있다. 시집『메스꺼운 유리』(2033) 역시 자신이 아닌 것으로 익어가는 생성/폐기에 관한 지형을 경고하며 세대 간의 도전들이 보이고 있는 파산적 유형들 또는 계급들 내지는 조류들을 다양한 층위로 예인하고 있다.
그러나 나―너의 관계는 출생을 향해 가는 고도처럼 자연성을 향해 가야 한다. 자연성은 의식으로 다시 되돌아오는 것뿐만 아니라 시각이 헤집어놓은 소음, 혼란, 충돌, 충동과 같은 것을 극복하는 힘으로서, 나―너, 혹은 우리가 서로의 존재성을 인정하고 무지를 선별하고 각성하는 것으로 모범들과 위계들에 가까운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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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택 시인∥
∙ 시인 박주택은 1959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6년『경향신문』신춘문예에「꿈의 이동건축」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시집『꿈의 이동건축』『방랑은 얼마나 아픈 휴식인가』『사막의 별 아래에서』『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시간의 동공』, 시선집『감촉』, 시론집『낙원 회복의 꿈과 민족 정서의 복원』, 평론집『반성과 성찰』『붉은 시간의 영혼』『현대시의 사유 구조』등을 펴냈다. 편운문학상 평론부문(2000), 경희문학상(2004), 현대시 작품상(2004), 소월시문학상(2005), 이형기 문학상(2010) 등을 수상했으며, 현재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 박주택의 기억은 주체가 경험했던 사건의 전모를 복원하는 행위가 아니라, 서로 만날 수 없는 평행 우주의 세계가 서로 일순간에 교통할 수 있으리라는 어떤 시적 상상력에 가깝다. 시인은 지금 그렇게 다른 생의 불가능성을 희망의 조건으로 내면화하면서 기억과 애도의 현장에 서 있다. 관성화된 지구의 삶을 구원하는 길은 요컨대 희망이 각인되었던 어떤 흔적을 온몸으로 기억해내면서 또 하나의 지구를 욕망하고 요청하는 순간에만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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