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버님 기제사일입니다 저희 아버지는 국군 통합병원 창설요원이십니다 6, 25 전쟁시 백마고지 전투등 수많은 전투에 참가하셨습니다 아버님께서 수많은 전투에서 살아남으실수 있었던것은 의무대에서 근무하셨기 때문입니다 치열한 전투가 끝난후 부상자 수습을할때는 두군데서 위생병을 부르면 한쪽으로 가지 못합니다 어느 한쪽으로 가면 다른쪽에서 총을 쏜다고 합니다 생사의 귀로에선 순간 인간의 마음은 이성을 잃어 버리고 다급해지기때문이지요 기다렸다가 양쪽으로 나누어서 동시에 부상자 수습을 하는게 필수 조건입니다 저희 아버지는 20사단 60 ~62연대에서 18년 9개월을 장기 복무 하시고 전역하셨습니다 당시 20년 만기 전역시 퇴직금과 연금 두가지중 하나를 선택입니다 당시에는 연금액수가 너무 적어서 퇴직금을 타려고 만기를 채우지 않고 전역을 하시게 된것입니다 당시엔 현명했지만 세월이 흐른후 결국 잘못된 선택이 훗날 쓸쓸한 노후를 맞이 할줄은 상상도 못하였지요
60년대 어린시절 군인가족은 부유층은 아니더라도 중산층 아니 그래도 상위층에 해당 되었습니다 봄이면 보리고개로 쓰러지는 사람들이 해마다 신문에 등장하던 시절이 었으니까요 (흰쌀밥에 소고기국 한번 먹으면 소원이 없다)고 하던 시절이였습니다 당시 월급날이면 소고기국을 먹었으니 부유층이라할수도 있었던 시절입니다
저는 어린시절 아버님의 부대를 따라서 대구에서 태어나 경기도 양주 일동 연천에서 각 3년을 살았습니다. 어린시절 군부대에 자주 놀러 갔습니다 군인 아저씨들이 건빵을 철사에 꿰어 10~20봉지씩 주셨어요 동네 아이들이 모두 모여 저에게 건빵을얻어 먹으려고 제가 시키는건 다했습니다
시련의 시작
사회경험이 전무한 아버님은 전역후 교육문제로 대구로 이사한후 불과 4년만에 퇴직금이 바닥납니다. 당시엔 사실 할만한것들이 별로 없었던 시절이었지요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가장의 책임감 힘겨운 현실앞에 서서히 무너져가는 아버님의 모습을 보면서 제자신의 꿈도 희망도 함께 무너지는 . 긴 터널이 시작되었지요 ㅎㅎ
울아버지는 평생 남을위해 살다 가셨습니다 벌써29년 되셨네요 좋은거라면 먼저 남한테 베푸시는 모습만 보면서 원망도 했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것이 자식을 위해 그러셨던 것을 어른이 되고서야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제대로 불러보고 싶은 "아버지 " ~~ 많이 그립습니다
첫댓글 그리운 아버님 만나뵙고 의미있는시간 되세요 ♥♥
울아버지는 평생 남을위해 살다 가셨습니다 벌써29년 되셨네요 좋은거라면 먼저 남한테 베푸시는 모습만 보면서 원망도 했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것이 자식을 위해 그러셨던 것을 어른이 되고서야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제대로 불러보고 싶은 "아버지 " ~~ 많이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