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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누가복음 18 : 10 - 14
제목: 바리새인과 세리의 평가
일시: 2014. 11. 16
장소: 라이프찌히 한인교회
1. 우리는 죄인이며 회개해야 할 사람이라는 것은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다. 하지만 내 자신을 죄인이라고 하기에는 괜찮은 사람이고 의인이라고 하기에는 죄인인 것 같아서 죄니 회개니 하는 것에 큰 감동이 생기지 않는다. 당신은 죄인이냐고 물으면 신앙학습이 되어서 “제가 아직 부족해서...”라고 하면서 죄인이라고 말을 한다. 그러나 내심 죄인은 죄인인데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지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오늘 우리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내용을 통해 죄에 대해 몇가지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II. 죄는 규정이 중요하다.
우리는 먼저 바리새인의 죄 규정을 본다. 바리새인은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것이 죄였고 “세리”는 따질 것도 없이 원래부터 죄인으로 여겼다. 오히려 의로운 일을 했다고 자랑한다.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바리새인은 자신은 죄가 없고 의롭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의는 율법의 규정에 따르는 의였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사람이다. 그들은 그 율법이 죄를 측량하는 도구인 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지켜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것은 위대한 착각이었다. 율법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율법은 그것을 잘 지켜서 의롭다고 말하게 하려는 아니라, 율법을 안 지켜서 “나는 죄인이다”라는 말이 나오게 하려는 것이다. 율법은 죄를 사해주는 것이 아니라, 율법은 죄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법을 잘 지켰다고 상을 주는 것은 아니다. 과속을 해서 벌금딱지가 나왔다고 가정해 보라. 그러면 일년간 교통법규를 잘 지키면 상이 나오는가? 아니다. 율법이 죄를 사해주는 것은 월권이다. 율법은 죄를 진단을 해주는 것이지 치료해 주는 것은 아니다.
바리새인은 오늘 영 거슬리는 단어를 쓰고 있다. “... 나는 다른 사람들...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바리새인의 규정은 옆에 사람을 보고 좀 더 낫다 좀 더 못하다는 상대적인 규정이었다. 그러나 죄의 규정은 우리를 판단하시고 평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의 규정이어야 한다. 사람들이 내리는 죄의 규정은 들쑥 날쑥한다. 어떨 때는 죄가 되고 어떨 때는 죄가 안된다. 아니 오히려 좋은 일이 될 수 있다. 사람을 죽였다고 하자. 그것은 나쁜 일이다. 그러나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면 영웅이 될 수 있다. 난 아직도 잘한 것인지 못한 것인지 결정을 못내리고 있는 것이 있다.
몇 년 전에 우크라이나를 방문하고 오면서 국경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맘 때 쯤이었는데 현지인 형제의 목사안수와 어느 선교사님 현지 교회 헌당예배를 위한 방문이었다. 목적지는 지금 러시아군이 주둔해 있는 크림반도 장꼬이라는 곳이었는데 왕복 72시간 꼭 3일이 걸리는 장거리였다. 프라하를 거쳐 폴란드를 거쳐 우크라이나 국경에 도착했을 때의 시간이 새벽 2시였다. 감사히 차량이 별로 없어서 1시간 안에 통과할 수 있었다. 1박2일의 일정을 마치고 다시 역으로 돌아올 때도 빠른 국경통과를 위해서 아주 이른 새벽에 국경도착을 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에 익숙치 않아서인지 그렇게 밤새 달렸는데도 아침 8시 정도가 되어서야 도착했다. 이미 차는 우리 앞에 셀 수 없이 많이 나래비로 서 있었다. 바로 그때 빵떡모자를 눌러 쓴 어떤 우크라이나 청년 두명이 온다. 그러더니 손가락을 움직이며 무슨 말을 한다. 눈치 빠른 한 목사님이 바로 알아듣고 “익스프레스”라고 말한다. 결국 급행료를 내면 빨리 통과시켜 준다는 것이다. 5분이면 휙하고 통과시켜 준다는 것이다. 이래선 안되지 싶었지만 일단 가격을 알아보았다(나중에 필요한 사람에게 시세를 알려주겠다). 앞에선 차는 족히 100대도 넘는다. 한차를 통과시키는 것이 10분이면 1000분 아마 하루는 그곳에서 기다려야 할 것 같다. 마음속에는 이놈들 브로커구나 그러면 불법이지 하면서 또 한마음에는 안그러면 어째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혼자 죄짓기 싫어서 차에 타고 있는 여러 목사님들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각각 회비를 조금씩 내어서 내는 식으로 하면 되니 돈을 내고 통과하자고 한다. 당시 우리의 동행차는 두 대였다. 차가 두 대라고 하니 더불로 내야 한다나? 깍아달라고 하니 절대 안깍아준다. 결국 그들의 제안대로 하기로 하고 급행을 택했다. 한 브로커가 우리 차에 타더니 역주행을 하란다. 그리고 차량이 별로 없는 반대차선으로 다시 역주행을 해서 여권검사대 바로 앞에 까지 간다. 옆의 사람들은 그렇게 달려가는 우리를 본다. 꽤 미안했다. 떳떳치 않다는 말이겠지. 5분은 아니었지만, 30분 정도 걸렸다. 오면서 우리 모두는 1시간 정도 열띤 토론회가 벌어졌다. 어쩔 수 없이 탁월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씁쓸한 탁월이었다. 그 마피아브로커는 분명 세관직원들과 군인들, 심지어 폴란드국경관리와도 다 내통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폴란드쪽에서도 특별 창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아예 우크라이나 정부에서 합법적으로 익스프레스를 만들지 왜 사람 찝찝하게 불법 브로커가 하게 하냐? 그리고는 내 나름대로 해석을 했다. 그래 마치 DHL도 돈 더 많이 내면 다른 보통 우편보다 빨리 가고 정확하게 가지 않는가? 그때 일반 우편을 부치는 다른 사람들이 “왜 저 사람은 돈을 더 내고 DHL 익스프레스를 이용하냐?”고 항의하지는 않는다. 아직도 잘한 것인지 잘못한 것인지 판단이 안선다. 죄는 규정을 하는 것이기에 우크라이나 정부가 보기에 나는 불법을 했고 내가 보기에는 DHL도 빠른 우편을 쓰는데 하는 생각으로 정죄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죄의 규정은 하나님 앞에서이다. 주님의 의의 기준은 바리새인들이 생각한 것보다 더욱 높았다.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어도 간음한 것이다. 미움이 있으면 살인한 것이다. 탐심이 있으면 도적질한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의롭다고 해도 규정하시는 하나님이 죄인이라고 하면 죄인이다.
III. 죄는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죄는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죄가 있음을 깨닫고 깨닫지 못하고의 문제임을 알라. “죄가 없다”라고 생각할 때는 정말 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임을 알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설정해 놓은 개념에 따라 의롭다고 생각하기에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바리새인의 문제는 토색 불의 간음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잘했지! 이레에 금식을 두 번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한 것도 잘했지. 그러나 그들의 결정적인 문제는 자신들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큰 문제는 죄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역으로 세리를 보라. 그는 토색했다. 세금을 거두면서 이익을 챙겼다. 세리는 무조건 죄인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결정적으로 잘한 것은 자신이 적어도 죄인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한다. 로마서 1장21,22절을 보라.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라고 한다. 사람들은 얼마나 자신의 생각으로 판단력이 흐려지고 어두움과 미련 속에서 헤메고 있는가! 자기 자신의 생각 속에 취해 있어서는 죄를 인식하지 못한다.
여기서 죄를 인식하기 좋은 두가지 케이스가 있다.
첫째,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몸으로 느끼게 해주고 인식시켜줄 말한 심벌이 필요하다. 심벌이 있으면 보이지 않던 나의 죄가 보이게 된다. 죄인식의 감각이 떨어진다면 아주 뚜렷한 죄가 있으면 감각이 생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착하게 잘 살고 있다고 하는 사람보다 호히려 죄가 있는 사람이 회개하기 더욱 쉽다. 오히려 살인범이 회개하기 좋다. 왜냐하면 그가 죄인임을 알기 때문이다. 워낙 감각을 하기 좋은 죄이기 때문이다. 세리가 그러했다. 죄인이라고 인식하기에 말이 필요 없었다.
둘째, 죄를 지어 내가 죄인임을 아는 것보다 죄를 인식하기 위해 더 밝은 빛으로 나가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죄의 새로운 개념을 갖기 위해 더 밝은 빛으로 나가야 한다. 조명을 받아야 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로마서는 말하고 있다. 우리는 세상 속에 취해서 “이만하면 되었지”라는 생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의해 내 죄가 조명되어야 한다. 우리의 죄의 개념이 사회적 죄의 개념을 넘어서 하나님 앞에서 평가받는 성경적 개념의 죄를 가져야 한다.
히브리서 4장 12-13절을 보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주님은 우리의 멀리 있는 죄를 망원경으로 보실 수 있는 눈을 가지고 계시다. 주님은 우리의 생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을 보실 수 있는 현미경을 가지고 계시다. 그래서 주님이 한번 보신다고 하면 우리는 두려워 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그분의 시각에서 죄를 인식해야 한다.
우리의 신앙이 더욱 성숙해지고 하나님을 더 깊이 인격적으로 알아갈 때 의롭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라, 나는 참으로 부족한 사람이고 죄인임을 고백하게 된다. 아직 멀었다 싶은 사람은 아직 자기를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미성숙한 사람이다. 성숙한 눈으로 보면 죄인데 더러움인데 그냥 산다.
김을 먹을 때 저는 젓가락으로 찍어먹는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손으로 집어다 먹기도 한다. 혜주는 김을 먹을 때 손으로 막 만지고 그리고는 펼쳐 먹는다. 그리고 손을 어떻게 터는가? 공중에 대고 팍팍 털고는 옷에다 쓱 닦는다. 그리고는 깨끗해졌다고 한다. 그때 우리는 손을 깨끗이 닦고 오라고 한다. 그리고 물로 씻고 오는데 흐르는 물에 손을 그냥 두었을 뿐이다. 그러니 물은 기름에 미끄러져 그냥 내려오고 손에는 여전히 기름기가 묻어 있고... 주님은 우리를 씻으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늘 그런 식이다. 바리새인은 자기의 죄 규정에 따라 “감사하나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뼈저리게 죄인식을 하고 있다.
IV. 죄는 고백하는 것이 중요하다.
죄의 고백은 모든 관계를 회복시키는 파워가 있다. 사람들하고 갈등하게 되면 먼저 사과를 하게 되고 용서를 구할 때 관계가 회복된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그러느냐고 버팅기면 관계는 영영 회복되지 않는다. “자기 내가 잘못했어” “내가 생각이 못 미쳤어” “내가 부덕한 탓이지 뭐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관계를 확 풀어주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으로 인해 - 만일 그것이 마음 속에서 나온 진정한 고백이라면 - 관계를 세울 수가 있다. 국가간의 관계도 그러하다. 일본이 그렇게 맘에 안 드는 이유가 자기들의 잘못을 고백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사의 청산이 없이는 미래가 없는 것이다. 과거의 청산은 진정한 사과이다.
세리가 그러했다. 13절 말씀은 세리의 저 유명한 기도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그의 고백은 가장 아름다운 고백이요 가장 성숙한 자의 고백이며 모든 것을 종결짓는 결정적인 고백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고 그분과 교제하기 위해서는 먼저 죄인식이 있어야 하고 즉시 죄의 고백이 있어야 한다. 죄의 고백은 우리 신앙의 출발점이다. 우리는 여전히 이만하면 쓸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함량이 찼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내가 함량 미달되는 사람임을 알라. 내 스스로 미련하고 우준하고 어둠에 있어 그 죄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실수투성이이고 문제덩어리들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하나님과 관계를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관계회복의 시작이다. 그렇다. 바리새인에 비해 사람들이 볼 때 세리는 잘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볼 때 세리가 잘한 것은 죄의 고백이었던 것이다.
왜 세리가 잘한 것이 죄의 고백이라는 것인가? 마지막 절에 주님이 평가를 해 주시지 않는가!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맏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실속을 챙긴 것은 세리이다. 바리새인은 성적이 잘 나올 줄 알았는데 빵점이고 세리는 불합격할 줄 알았는데 평가자 주님은 합격을 시키신 것이다. 그러기에 죄고백은 최선의 삶이다. 죄는 발각되면 벌을 받지만 고백할 때는 용서가 있다.
언어를 배울 때 다른 것은 몰라도 가장 먼저 배워야 할 두 표현이 있다. 하나는 땡규이고 다른 하나는 쏘리이다. 추수감사주일 그렇게 강조했던 Thank you 는 다른 사람을 향한 나의 마음이다. 그들을 높이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고 늘 입에 달고 살아야 할 표현은 Sorry 이다. Sorry는 나를 향해 하는 소리이다. 겸손함이다. Thank you 와 Sorry 가 입에 붙은 사람과 함께 하고 싶다. 남을 높이고 나를 낮추는 사람 즉 쏘리와 땡큐를 하는 사람은 어디가든지 기쁨을 준다. 화평을 준다. 부부간에도 쏘리를 하고 땡큐를 하면 화목한 부부가 된다. 서로 내가 못났다고 하면 잘산다. 재미난 것은 잘 난사람이 많은 곳 옳은 사람이 많은 곳에는 더 많은 싸움이 있다. 뚜에이뿌치이 슐디귱 쏘리 미안... 감사는 당케 쉐쉐 땡큐 감사.. 죄인임을 알고 고백하는 것은 가장 약한 모습 같지만 가장 강한 자이다. Sorry를 말할 때 우리는 의롭게 평가받는 흑자의 삶이 된다. 그러기에 죄의 고백은 우리에게 미래와 소망과 결실을 준다.
V. 이번 주 수요일이 회개의 날이다. 우리는 워낙 인간적으로 선하게 살았기에 잊어먹을 수도 있는 죄를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한다. 죄의 규정을 내가 하고 있는가? 그건 내 생각이고 니 생각이다. 하나님 앞에서 죄가 규정되어야 한다. 죄인임을 인식하지 못하는가? 우리 속에서는 회개의 영이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죄를 고백하는 용기가 없는가? 내가 잘못했어라는 말을 못하는가? 고백하는 자에게는 과거를 묻지 않는다. 오히려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다.
이번 주 회개할 것이 무엇이 있는지 연구하라. 회개의 영이 임하면 모든 게 내 탓이요 내 잘못이요 내가 문제입니다고 말할 수 있다. 바리새인의 생각이 나면 큰 문제이다. 한 주간을 회개로부터 시작하라. 평강을 얻는다. 작은 자로 시작하라. 큰 자가 될 수 있다. 연약한 자로 시작하라. 강한자가 될 것이다. 가슴을 치며 불쌍한 자로 시작하라. 위로를 얻는 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바닥서부터 시작하라. 올라갈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