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위원장님!
충주시 서남쪽, 제천시 남쪽, 단양군의 남동쪽과 인접한 곳입니다.
하설산이 충북 제천시 덕산면에 있으며,
좌측 한수면 옆으론 충북 충주시 살미면 , 북쪽 위로는 제천시 수산면이 있고요. 우측으론 단양군 단성면과 적성면이 있네요.
아래로는 백두대간이 충북과 경북 문경의 도계로 흐르고요. 백두대간 대미산에서 북쪽 문수봉으로 분기하는 등곡지맥에서 가까이 스치고 지나가는 산이로군요.^^
하설산(夏雪山, 1,028m)
제천하면 우선 제천 10경이 떠오르는데 의림지, 박달재, 청풍문화재단지, 금수산, 용하구곡, 송계계곡, 옥순봉, 탁사정, 베론성지가 그것이다. 고유 문화가 살아 숨쉬는 곳으로는 덕주사마애불, 청풍한벽루, 신륵사삼층석탑, 사지빈신사지석탑, 금남루, 금병헌, 청풍향교, 황석리고가, 용청각, 신륵사극락전, 무암사목조아미타여래좌상, 덕주산성, 망월산성 등이 있다. 그리고 청풍호벚꽃축제, 국제음악영화제, 제천의병제, 박달가요제 등 축제가 매년 행해지고 명산으로는 월악산, 금수산, 대미산, 메밀봉, 만수봉, 하설산, 용마산, 삼봉산, 용두산, 사랑산, 감악산, 구학산, 무등산, 봉황산, 백운산, 천등산, 송학산, 벼락바위봉, 옥순봉, 칠성봉, 비봉산, 작성산, 신선봉, 국사봉 등이 있어서 사시사철 등산인의 발길이 멈추지 않는다. 기타 유명 농산물로는 제천약초, 제천사과, 제천복숭아, 제천고추가 있다.
매두막봉(1,100m)은 매두막봉은 충북 제천시 덕산면 남쪽 끝머리인 문수봉(1,162m)과 이웃하고 있는 산이다. 이 봉 서쪽에는 계곡미 빼어난 용하구곡이, 동쪽에는 성천이 흘러 사방으로 깨끗한 계류가 흐른다. 정상에서 북서쪽 용하구곡 건너로는 월악산 정상이 자태를 뽐내고, 오른쪽으로는 하설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북동으로는 멀리 금수산을 비롯하여 제비봉, 사봉, 용두산 줄기가 펼쳐진다. 남으로는 문수봉 정상이 하늘을 찌를 듯한 자태로 마주 보인다.
하설산(1,028m)은 백두대간이 소백산 죽림을 거쳐며 맥을 이어오다 월악산 문수봉에 이르러 제천의 모산인 대미산으로 이어지기 전에 용하구곡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앉은 산으로 여름에도 눈을 볼 수 있다하여 하설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주위에 대미산, 문수산, 매두막봉 등 모두 1,000m 넘는 산들에 가려져서 등산객들의 발길이 뜸하였고 옹하구곡에 치여서 홀대받았으나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준오지로 즐거운 등산을 즐길 수 있는 곳 중에 하나이다. 하설산에서는 ‘하실골'을 빼놓을 수 없다. 골짜기가 실처럼 길다해서 ‘하실골'이라 하였다는데 그보다는 ‘하설골' 이라는 지명이 더 유력한 것 같다. 옛날에는 ‘설림' 또는 ‘설골'이라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실골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부락 촌로들은 ‘설골' ‘설미골'이라 부르고 있다.
어래산은 제천군 덕산면에 위치한 산으로 월악산국립공원에서 제외된 산으로 하설산에서 서북쪽에 있는 산이다. 보통은 담농실에서 오르거나 하설산에서 서북 방향으로 뻗어있는 능선을 따라서 완만한 경사길을 가다가 747m봉을 지나고 안부를 거쳐 그리 심하지 아니한 능선길을 타고 오르면 쉽게 어래산 정상에 닿는다. 하산은 보통 어래산에서 서북 방향으로 나아 있는 담농실 방향으로 내려가면 된다. 전망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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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래산(御來山, 392.7m) 유래
- 괴산군 불정면
‘삼고초려(三顧草廬)’는 「삼국지」에서 후한 말 유비가 제갈공명이 사는 초가를 세 번 찾아갔던 일화에서 유래한다. 괴산군 불정면에는 조선왕조 창업에 얽힌 조선판 삼고초려의 일화와 아울러 삼방리, 어래산, 국사봉 등 그 일화와 관련된 지명이 남아 있다.
삼방리 관전마을에 있는 ‘갓돈(冠錢)마을의 유래’ 안내판에는 “전설에 의하면 조선의 첫 번째 정승인 배극렴이 관전마을에 은거했다고 하며. 마을 뒷산에 있는 마애불좌상도 배극렴을 세 번 찾아왔다는 태조 이성계의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성한 것이라고 하며, 실제로 마을의 산은 임금이 왔다고 하여 어래산(御來山)이며, 마을 이름은 세 번 방문했다고 하여 삼방리(三訪里)이다.”라고 적혀 있다.
안내판 앞 2차로 건너 바라다보이는 길이 어래산 오르는 길이다. 그 길을 따라 200m 남짓 올라가면 삼방리 마애불(충북 유형문화재 제128호)이 있고, 마애불이 바라보고 있는 산이 어래산(392.7m)이다.
고려가 이미 국운을 다해가던 1370년대 중반, 중앙권력을 장악한 좌우군도총사 이성계 장군은 대내적으로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고, 대외적으로 대의명분을 세우기 위하여 고려의 충신인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등과 함께 배극렴(裵克廉. 1325~1392) 선생을 조정에 출사시키고자 공을 들이고 있었다.
이때 배극렴 선생은 자신을 총애하던 고려 공민왕이 1374년(공민왕 23년) 9월에 최만생, 홍윤 등의 손에 무참하게 시해되자, 벼슬을 버리고 부인과 함께 잠적하여 행방이 묘연했다.
선생을 찾기 위해 지방관아까지 동원하여 수소문한 끝에 지금의 어래산 기슭에 은거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왔으나 첫 번째, 두 번째는 만나지도 못했고, 세 번째 찾아와서야 만날 수 있었고 비로소 자기 뜻을 전했다고 한다.
세 번씩이나 자신을 찾아온 이성계 장군에게 감복한 선생은 이후 위화도회군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최영 등 구세력을 축출하였으며, 1392년 7월에는 마침내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공양왕을 양위형식을 빌어 폐위시킴으로써 조선왕조를 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개국 일등공신으로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졌고,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에 올라 고려와 조선 두 왕조에서 정승이 되는 보기드문 경력을 가지게 되었다.
선생이 이곳에 은거한 시기가 1390년이라는 설도 있는데, 이때는 공민왕 사후 16년이 지났고, 고려왕조가 막을 내리는 1392년 7월을 불과 2년 남짓 남겨두고 있던 시점이라 그때는 이미 새왕조창업 세력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신빙성이 낮고, 문과급제 후 진주목사, 회령부윤 등을 거쳐 합포진첨사로 봉직할 즈음에 공민왕 시해 사건이 일어났으므로, 공민왕 사후부터 1376년(우왕 2년) 진주도원수에 제수되기 이전의 어느 시기에 이곳에 은거했을 것으로 추측해 본다.
출처 : 괴산타임즈(http://www.goesa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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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래산(御來山, 816.5m)
- 제천시 덕산면
이 마을에 어래산이라는 경승 좋은 산이 있는데 이태조에 얽힌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공민왕으로부터 남달리 총애를 받고 있던 배극렴은 왕의 시역(弑逆)사건이 일어나자 정사에 뜻을 잃고 그 부인과 함께 충주 고을로 낙향하였는데 그가 어느곳에 은거하는 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배극렴은 어래산 동굴을 찾아 세상에 다시 나오지 않기로 작정하고 야인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 좌우군 도총사였던 이성계(李成桂)가 왕실을 장악하게 되자, 그의 정권과 대외적인 명분상으로 고려 중신인 우현보, 이색, 정몽주, 배극렴 등을 그의 자문직으로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결같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뜻을 고집한 우현보, 이색 등은 하옥하고 정몽주는 격살하였다.
반면 배극렴의 행방이 묘연해지자 수소문끝에 충주 모 산중에 은거한다는 소문을 듣고 이성계가 직접 세 번에 걸쳐 찾아 가서야 배극렴을 만나게 되었으며, 솔직한 집권계획 등을 밝히고 앞 으로 개국공신이 되도록 간청하여 다시 정사에 나서게 되었다. 그 후 이 고을 사람들은 이태조가 세 번씩이나 이곳을 찾아 왔다고 해서 마을 이름을 삼방리(三訪里)라 하고 그 산의 이름 또한 어래산이라 칭하였으며, 배극렴이 땔나무를 하던 골짜기를 배나무골, 그 부인이 베틀을 놓고 베를 짜던 굴을 베틀굴이라고 부른다.
또 이태조가 배극렴과 첫 번째 만나서 국사를 의논했던 산정(山頂)을 국사봉(國事峰)이라 부르고 있다.
제공자 또는 참고문헌 : 충주의 향토사 (1998) 충주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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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극렴(裵克廉, 1325~1392)
고려말 왜구방어에 공을 세웠으며, 이성계 휘하에서 조선건국에 주동적인 역할을 했다. 본관은 경산(京山: 지금의 星州). 자는 양가(量可), 호는 필암(筆菴)·주금당(晝錦堂). 아버지는 위위시소윤(衛尉寺少尹) 배현보(裵玄甫)이다.
문음(門蔭)으로 벼슬길에 올라, 고려 말 진주·상주의 목사(牧使)와 계림윤(鷄林尹)·화령윤(和寧尹) 등 외직을 담당할 때 선정을 베풀었다.
1376년(우왕 2)에는 진주도원수(晉州都元帥)로 진주에 침략한 왜구를 반성현(班城縣)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이듬해에는 우인열(禹仁烈)을 대신해 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가 되어 왜구 방어에 공을 세웠다. 이 때 병영이 있는 창원 인근의 합포(合浦)에 왜구 방어를 위한 축성을 주관, 완성했는데 조선시대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영(慶尙右道兵馬節度使營)의 번성(藩城)이 그것이다. 한편 1378년 경상도원수로서 욕지도(欲知島)에서 또다시 왜구를 대파하고, 겨울에는 경상도도순문사로서 하동과 진주에 침략한 왜구를 추격, 사주(泗州)에서 크게 이겼다.
이듬해 진주반성현의 대혈전(大血戰), 왜적의 기병 700명과 보병 2,000여 명이 진주에 침략했는데, 양백연·우인렬·한방언 등과 더불어 싸워 크게 이겼다. 그뒤에도 울주·사주·청도 등에서 왜적을 막는 데 큰 공을 세웠고 그 뒤, 정치적 성장을 거듭, 1380년에는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올랐다.
1388년의 요동 출병 때 우군의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우군도통수(右軍都統師)인 이성계(李成桂)의 휘하에 참여,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도와주었다. 1389년(창왕 1) 7월에는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의 요직을 맡았다. 그 해 10월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승진하고,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0년(공양왕 2)에는 평리(評理)로서 회군공신(回軍功臣)에 추록되었으며, 같은 해에 양광도찰리사(楊廣道察理使)가 되어 한양 궁궐의 조성을 감수하였다. 1390년(공양왕 2)에는 평리가 되어 회군공신으로 추록되었고, 양광도찰리사가 되었다. 이듬해 정월 이성계가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설치하자 중군총제사(中軍摠制使)로 임명되어 도총제사(都摠制使) 이성계의 병권 장악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같은 해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어 개경의 내성(內城)을 축성하는 총책을 맡고, 1392년에는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랐다.
1392년 7월 문하우시중으로서 조준·정도전과 함께 공민왕 비인 정비에게 "왕은 정사에 어둡고 덕이 없어 임금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고, 그의 교를 받드는 형식으로 공양왕을 폐하고 이성계를 추대, 조선 건국에 중요한 소임을 담당하였다. 조선 건국 후 개국공신 일등으로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졌으며,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이 되었다. 1392년 11월 세상을 떠났으며 고려와 조선 두 왕조에 걸쳐 정승에 올랐다. 그러나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 소생인 이방석(李芳碩)이 세자에 책봉되는 데 관여했다는 이유로 뒤에 태종에 의해 폄하(貶下)되었다. 아들이 없어 누이의 외손인 안순(安純)이 주상(主喪)이 되었다. 시호는 정절(貞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