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태복음 23장 주석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정죄하심 (마태복음 23:1-12)
그리스도는 이들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것만큼 더 혹독하게 설교하신 일이 없다. 왜냐하면 실제로 교만과 세속과 폭력을 종교라는 허울로 가장했던 그 시대 사람들의 기질과 행동보다도 더 복음의 정신에 직접적으로 어긋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백성들의 우상적인 존재였고 또한 신임을 받았으며, 백성들은 두 사람이 천국에 간다면 그들 중 한 사람은 반드시 바리새인일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많은 무리들과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이는 이러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본색을 드러냄으로써 그들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는 점들을 시정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무리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에 대해 가지는 편견 된 생각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은 백성의 지도자로 자청하는 교회원들에 의해 반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들은 위대하거나 권세 있는 이름들, 명칭들 또는 허울 좋은 세력들에 의해 속임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사람들의 참 성격을 아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어떻게 방어할 것인가를 알기 위하여 "이리"(행 20:29, 30). "개들"(빌 3:2), "가장하는 자"(고후 11:13)에 대하여 들어야만 한다. 잡다한 군중들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는 이러한 경고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선한 사람들도 세상의 허세에 자신들의 눈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대화에서,
Ⅰ.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직무가 율법을 해석하는 것임을 인정하고 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즉, 모든 산헤드린 회원. 그들은 교회 행정의 요직에 앉아 있었고 모두 "서기관"이라고 불리웠는데, 그들 중 어떤 사람은 바리새인이었다)은 율법의 공적인 교사와 해석자로서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2절). 또한 모세의 율법은 그 나라의 법이었으므로 그들은 곧 심판자요 공의의 재판관들이었다. 역대하 17장 7, 9절과 역대하 19장 5, 6, 8절을 비교해 볼 때, 가르치는 일과 재판하는 일은 동등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말을 타고 다니는 순회 판사는 아니었으나 재판석에 앉아서 율법에 다라 여러 가지 청원을 받고 특별한 답변도 하며 오류를 지적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간의 중보자로서가 아니라 최고 재판관(출 18:26)으로서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 율법을 해석하고 특별한 사건의 경우에 율법을 적용하는 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쳤던 것은 산헤드린이 아니다 다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율법을 기록하기 위해"(느 8:4) 에스라를 위하여 만들어졌던 것과 같은 "나무 강단"이 여기에서 모세의 자리라고 불리웠는데, 그 이유는 모세가 이것들을 각 성에 두어(이와 같은 표현이 행 15:21 에 있다)그 강단에서 가르쳤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그들의 임무였으며, 의롭고 영광스러운 것이었다. 백성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해야만"할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였다(말 2:7).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많은 훌륭한 자리에는 악인으로 채워져 있다. 가장 사악한 사람들이 모세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다는 것이 새로운 일은 아니다. 그렇게 될 때 사람들이 그 자리에 의해 명예롭게 되기보다는 오히려 그 자리가 사람들에 의해 불명예스럽게 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모세의 자리에 앉은 자들은 매우 지독하게 타락했기 때문에 다른 자리를 세우기 위하여 모세와 같이 위대한 선지자가 일어나야만 했다.
2. 훌륭한 여러 직분들과 권력들이 악인의 손에 넘어가 남용된다고 해서 그 직분과 권력들이 정죄되거나 폐지되어서는 안 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끌어내려서는 안 된다. 그것보다는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자"(마 13:30).
그러므로 그는 다음과 같이 추론하고 계시다(3절).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라.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는 한, 즉 모세에 의해 주어진 율법을 읽고 전파하는 한 그렇게 하라(그러나 이것은 온갖 힘과 정열을 기울여 계속되어야만 한다)." "그 율법대로 판단하라. 너희는 그들에게 경청하는 것만큼 기록된 말씀에 대해 기억해야만 한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연구하는 것을 그들의 임무로 하였으며 또한 성경의 언어와 역사와 습관 그리고 그 문체와 어법 등에 대하여 잘 알았다. 그리스도께서는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이 가르친 것들 중에서 도움이 되는 것들을 이용하고 이를 행할 것을 원하셨다. 그들이 성경을 해석하고 그것을 왜곡하지 않는 한, 즉 "하나님의 계명"을 분명히 하고 "무효화시키지" 않는 한 이를 행할 것을 원하셨다. 그 계명들은 잘 준수되고 이행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주위를 기울이고 신중하게 판단하여 준수되고 이행되어야만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는 위대한 진리가 나쁜 사역자들에 의하여 가르쳐진다고 해서 그 진리가 나쁘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좋은 법칙들이 나쁜 통치자들에 의해 집행된다고 해서 그 법이 나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천사들이 우리들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시켜 깨끗하고 좋은 음식을 가져다주었다면 우리는 그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먹어야만 한다. 우리 주님께서는 다음에 계속되는 말씀을 책잡으려고 하는 간계를 방지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미리 하기고 계시다. 마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정죄 하심으로써 그는 모세의 율법을 경시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거기에서 떠나게 하려는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주님께서 오신 것은 그것을 "폐하시려고 하심이 아니라 완성시키려 하심"인 것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특히 사역자가 비난을 받을 때 "그 직분이 비난받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직분을 수행하는 사람과 그 직분 사이를 구분해야 할 경우가 있을 때에는 올바른 비난에 대해 취해질 수 있는 이의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현명하다.
Ⅱ. 그는 사람들을 책망하고 계시다. 그는 그들이 가르친 대로 행할 것을 무리들에게 명하셨으나, 여기에서는 그들이 행한바 대로는 행하지 말 것을, 즉 그들의 누룩을 조심할 것을 첨가하여 말씀하고 계시다. "저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라." 그들의 전통은 그들의 일이었으며, 그들의 우상 즉 그들의 상상적인 일이었다. 또한 "저들의 본을 따르지 말라." 교훈과 실제는 시험되어져야만 하며 또한 어떤 경우가 있을 때에는 주의 깊게 구별되고 구분되어야만 한다. 가르치는 자들에게 칭찬할 만한 실제 생활이 있다고 해서 부패한 교리를 쉽게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이와 마찬가지로 나쁜 모본을 보이는 자들에게 그럴듯한 교리가 있다고 해서 그 나쁜 모본들을 모방해서는 안 된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교훈이 정통적임을 자랑하는 만큼 그들의 행위가 선하다는 사실을 자랑하였으며 또한 그들에 의해 의롭게 되기를 희망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했던 기원이었다(눅 18:11, 12). 그리고 그들 자신이 그렇게도 높이 평가했던 이러한 일들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가증스러운 것이었다. 우리 주님께서는 여기에서와 다음 구절에서 우리가 모방하지 말아야 할 여러 가지 특별한 일들을 분류하고 계시다. 대개 그들은 종교적인 위선과 기만, 이중성 때문에 책망을 받고 있다. 이러한 죄는 사람의 법정에서 심문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오직 외모를 따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위선을 정죄 하실 수 있으시다. 위선보다 더 그를 불쾌하게 하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진리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1. 그들의 말과 행동은 별개의 것이었다. 그들의 실제 생활은 그들의 가르침이나 말에 결코 부합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율법으로부터 선한 것을 가르치지만 그들의 대화는 거짓 투성인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여 준 것과는 다른, 하늘에 이르는 길을 찾은 것같이 보인다. 그들을 실례로 들어 고소하는 것에 대해 살펴 보라(롬 2:17-24). 다른 사람을 들어 정죄 하는 죄 가운데 스스로 빠져 그러한 죄를 짓는 자 들이야말로 가장 용서할 수 없는 죄인들이다. 이 말씀은 특히 사악한 교역자들에게 직접 해당되는 말씀인데, 이들은 위선자들이 받는 형벌을 확실히 받게 될 것이다(마 24:51). 자신들은 믿지 않고 불순종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믿고 행하라고 압력을 가하는 것보다 더 큰 위선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들은 가르치면서 쌓아 올린 것을 실제로 생활하면서 무너뜨린다. 강단에서는 설교를 잘하지만 실상 밖에서는 형편이 없으며, 또한 강단 밖에서는 사악하게 살지만 안에서는 그럴듯하게 사는 자들이야말로 한심한 자들이다. 이는 마치 다른 사람을 부르지만 그 자체가 매달려 있는 종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수은 기둥은 다른 사람들에게 길을 제시해 주지만, 여전히 그것 자체는 서 있지 않은가? 이러한 자들은 "그들 자신의 입으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 심판은 말하고 행치 않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그럴듯한 신앙고백을 하지만 그 신앙고백대로 살지 않는 사람이나 좋은 약속을 했지만 이를 실행하지 않는 자는 좋은 말을 하고 법에 대하여 모든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선한 행위는 전혀 없는 사람이다.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지만, 손은 에서의 손이다." Vox et pra terea nihil─즉 단순한 소리이다. 그들은 분명히 "아버지여 가겠나이다"라고 말하지만, 그들을 믿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속에는 일곱 가지 가증한 것들이 있다."
2. 그들은 그들 스스로 가지기를 싫어하는 그러한 것들(4절)을 다른 사람들에게 혹독하게 지웠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다른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스스로 지기는 싫어한다." 그들은 "멍에"(행 15:10)라고 불리우는 율법의 사소한 부분까지 주장하였고 또한 백성들에게 하나님 자신이 행했던 것보다 더 엄격하고 혹독하게 그것들을 준수할 것을 강요했을 뿐만 아니라(한편 율법사들의 격언은 Apices uris non sunt jura ─즉 율법의 사소한 요점들은 율법이 아니다), 그의 말들을 첨가하고 그들 자신의 의도와 전통을 부과함으로써 그들을 최고의 형벌 아래에 두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나타내며 또한 자신들의 지배력을 과시하기를 좋아하였으며, 하나님의 선민을 지배하고 다른 사람의 영혼더러 "우리가 지나갈 수 있도록 머리를 숙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제 4계명에 여러 가지를 첨가하여 증거 하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안식일을 사람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것은 자기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의도된 것이다. 저 목자들은 옛날과 같이 난폭하고 잔인하게 "양 무리를 다스렸다"(겔 34:4)
그러나 저들의 위선을 보라.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였다."
(1)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부과한 것들을 자신들은 행하려고 하지 않았다. 저희 자신들은 종교상 제한을 받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압력을 가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공공연하게 강요한 자신들의 전통을 은밀하게 범하였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법을 제시함으로써 자만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들 자신들의 행위에 있어서는 안락을 추구하였다. 그러므로 천주교의 사제들을 비난하는 말 가운데, 일반 사람들에게는 빵과 물로 금식하라고 강요하면서 자신들은 포도주와 고기로 금식한다는 말이 있다. 또한 그들은 백성에게 회개를 명하면서 자신들은 거절해 버린다.
(2) 저들은 이런 일이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 줄 알면서도 이들의 고통을 덜어 주려고 하지 않으며, 또한 이들의 짐을 가볍게 하기 위하여 손가락 하나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에 나타나 있는 허술한 의미들을 찾아내어 그것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덧붙인 사랑에 대해서는 조금도 완화하려고 하지 않고 가장 미세한 점에 있어서도 철저히 이를 시행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반적인 법의 극단적인 점을 완화시킬 수 있다. 어떤 형평법(chancer)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실제 생활과 얼마나 대조가 되는가! 그 사도들은 누리려고 하지 않았던 자유를 교화의 평화와 교회를 위하여 모든 기독자들에게 이를 허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들은 요긴한 것들 이외에는 다른 아무 짐도 지우려고 하지 않았으며, 또한 그것들은 쉬운 것이었다(행 15:28).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을 받는 모든 사람들을 얼마나 아꼈는가!(고전 7:28; 9:12)
3. 그들은 종교상 보이기 위한 것일 뿐, 실질적인 것은 없었다.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우리는 이러한 선한 행위를 함으로써 그것들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스스로 영광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의 선행을 알려서는 안 된다. 우리 주님께서는 전에 기도하고 구제하는 일을 특별히 예로 들어 책망하신 것처럼 여기에서 일반적으로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책망하고 계시다. 그들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는 것이었으므로 "육신적으로 자랑하기 위하여" 그들의 행동은 사람들에게 보여져야만 했다. 사람의 목적에서 종교적인 의무를 다함에 있어서 저들만큼 꾸준하고 충실한 자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과 자신들의 영혼이 놓여있는 곳에서, 자신들의 골방과 마음의 깊은 곳에서 그들은 용서받기를 원하였다. 경건의 "모양"이 그들로 하여금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지게 했을 것이며, 이것이 그들이 노리고 있는 점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실제적으로 생명에 있어서나, 필수적인 경건의 "힘"에 대하여는 고심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든지 보이기 위해 하는 사람은 아무런 목적이 없는 헛일을 하는 사람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행했던 일을 두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1) "그들은 차는 경문을 넓게 하였다." 경문은 종이나 양피지의 작은 두루마리로, 그 안에 율법 중에서 네 구절(출 13:2-11; 13:11-16; 신 6:4-9; 11:13-21)이 매우 정교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이 경문은 가족으로 꿰매어졌고, 앞 이마나 왼팔에 붙였다. 이것은 장로들의 유전으로써, 출애굽기 13장 9절과 잠언 7장 3절에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표현은 상징적인 것으로 보이며, 단지 눈동자를 지키는 것처럼 매우 주의하여 하나님의 일들을 마음에 깊이 두어야 한다는 의미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들은 경문을 넓게하여 다른 누구보다 더욱 율법에 거룩하고 엄격하고 열심히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하였다. 실제로 다른 사람보다 더욱 거룩하게 되길 갈망하는 것은 아름다운 포부이지만 단순히 그렇게 겉으로 나타나기만을 바라는 것은 교만한 생각이다. 참된 경건에 있어서 탁월하게 뛰어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겉으로만 뛰어나는 것은 좋은 일이 못될 것이다. 왜냐하면 도를 지나치는 것은 당연히 그 의도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잠 27:14). 외적인 봉사에 있어서 필요 이상으로 수선을 떠는 것은 바로 위선의 태도이며 또한 영혼에 대한 사랑과 성향을 입증하고 개선하는 일에 있어서 필요 이상으로 수선스러운 것도 위선적인 태도인 것이다.
(2) "그들은 옷 술을 크게 하였다." 하나님께서 옷에 단이나 술을 만들라고 유대인들에게 명령하신 것은 그들을 이방 민족들과 구별시키고 또한 그들에게 자신들은 특수한 민족임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만들라고 명령한 대로 만든 백성들의 옷 술에 대해 만족하게 여기지 않고 보통 사람들 것보다 훨씬 크게 만듦으로써 자신들을 돋보이게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경건하게 보이도록 하였다. 그들은 경문을 달고 옷 술을 크게 하였지만 그들의 마음은 옹색하였고 또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빈곤하였다. 그들은 이웃을 속일 수 있었지만 결국은 자신들을 속이게 될 것이다.
(3) 그들은 남보다 으뜸이 되거나 뛰어나기를 매우 좋아하였으며 또한 그 점을 매우 뽐내었다. 교만은 바리새인들을 미혹케 하였던 주요한 죄였으며, 또한 "그들을 가장 쉽게 공격할 수 있었던 죄"였다. 우리 주님께서는 기회 있을 때마다 이 죄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4) 그는 그들의 교만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신다(6, 7절).
[1] 그들은 영예와 존귀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애썼다. "잔치나 회당"과 같은 공공적인 장소에서 그들은 "상석과 상좌에 앉기를" 기대하였고 또한 기꺼이 거기에 앉았다. 그들은 다른 모든 사람을 대신하였으며, 또한 저명한 인사나 공로자처럼 상석이 그들에게 주어졌다. 그들이 얼마나 의기양양하게 상석을 차지했는가를 상상해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으뜸 되기를 좋아하였다"(요삼 9). 저들이 책망을 받는 것은 상석을 차지했거나 상좌에 앉았기 때문이 아니라(누군가가 상좌에 앉아야만 한다), 그것을 "좋아하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상석에 앉거나 앞서 가거나 길을 양보하지 않거나 좋은 대접을 받는 것과 같은 하찮은 의식에 가치를 두는 것이나 또는 그러한 것에 가치를 두고 그것을 찾으며 그것을 받지 못했다고 화를 내는 것은 모두가 자신을 우상으로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렇게 될 때 자신은 넘어져 그것을 숭배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사악한 우상 숭배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어디에서나 사악한 일이요. 특히 회당에서는 더욱 사악한 일이 되는 것이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겸손해야 할 "곳"에서 자신에게 영광을 돌린다면 이는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에 그를 조롱하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다윗은 기꺼이 하나님의 집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하였다. 그는 거기에서 "상좌"를 차지하려고 하지 않았다(시 84:10). 사람들이 교회에서 훌륭하게 보이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지 못한다면 교회를 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다분히 교만과 위선의 냄새를 풍겨 주는 일이다.
[2] 그들은 영예와 존경의 칭호를 얻으려고 애썼다. 그들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들이 모자를 벗고 자기들에게 인사하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또한 거리에서 사람을 만날 때 그들로부터 존경받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것은 그들을 즐겁게 했으며, 또한 헛된 소문, 즉 이분이 바로 그 사람이라는 지목을 받고 이야기되는 것을(digo monstrari et dicier Hice st) 간절히 소원하였다. 즉 "다 물러서라. 바리새인이 이곳으로 오신다"라고 말하면서 시장 사람들이 길을 비켜 주며 "랍비, 랍비 !"라고 고귀하고 영예스러운 칭호로 불리워지기를 소원하였다. 이런 것이 그들에게는 고기요, 음료수요 진수성찬이었다. 느부갓네살이 그의 궁전에서 "이것이 내가 세운 큰 성 바벨론이 아닌가?"라고 말한 것과 같이 이것에서 그들은 큰 만족을 느꼈다. 이러한 "인사들"도 만일 시장에서가 아니라면 절반 정도밖에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장과 같은 곳이라야 자신들이 백성들에게 얼마나 존경을 받으며 높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가를 뽐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 시대 바로 직전부터 이스라엘의 선생인 유대 교사들은 "랍비, 랍" 또는 "라반"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는데, 그 뜻은 "위대한 또는 많은"이다. 또한 이 칭호는 "선생님" 또는 "내 주"라고 해석되었다. 그들은 이 칭호에 대해 매우 강조를 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격언으로 만들어 "자기 선생에게 인사하면서 그를 랍비라고 부르지 않는 자는 신적인 위엄을 이스라엘로부터 떠나게 하는 자이다"라고 하였다. 그들은 훌륭한 태도에 지나지 않는 것을 종교적인 것으로 대치해 버렸다. 가르침을 받는 자가 가르치는 자에게 존경심을 나타내기 위하여 랍비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칭호를 좋아하고 요구하며 즐겨 사용하며 그런 칭호에 자부심을 느끼며 그런 칭호를 생략하면 불쾌하게 여기도록 가르치는 자는 범죄자요 가증한 자이다. 그러한 사람은 가르치는 것보다는 그리스도의학교의 첫 과목인 겸손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2) 주님께서는 여기에서 제자들에게 저희들과 같이 되지 말 것을 가르치고 계신다. 그들은 저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불리워지지 말라. 왜냐하면 너희는 이런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8절 이하). 여기에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1] 교만의 금지. 그들은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일을 하지 말도록 금지되고 있다.
첫째, 영광과 지배의 칭호를 얻으려고 하지 말 것(8-10절). 이것은 두 번이나 거듭 되풀이되고 있다.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는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주 안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자들에게" 세상적인 존경심을 나타내는 것이 부당한 것은 아니다. 아니, 그것은 존경심을 나타내는 한 실례로써 그것들을 나타내 보여 주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다. 그러나,
1.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다른 사람과 구별하는 방법으로써 "랍비"나 "선생"이라는 명칭에 매혹되어서는 안 된다. 왕궁에 있는 자들이나 받아야 할 그러한 영광을 탐내거나 받아들이는 것은 복음의 단순성에 어울리지 않는다.
2. 그들은 그러한 이름에 내포된 권위나 지배력을 취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마치 그들이 기독자의 신앙을 지배하는 것처럼 그들의 형제들이나 하나님의 선민에 대해 지배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역자들이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모든 사람들은 그들로부터 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그 외의 일들에 있어서 사역자들은 그들의 견해나 의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대한 규칙이나 표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즉 반드시 순종해야 할 것으로 인정된 것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이렇게 금지된 이유는
(1) "너희 선생님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이시기"(8절) 때문이다. 또 한 번 이 말씀이 언급되고 있다.(10절).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인이시오, 선생이시오, 지도자이시다. 죠지 허버트(George Herbert)씨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를 때 "언제나 나의 선생"이라는 말을 더 첨가하였다.
[2]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선생이시며, 사역자들은 학교의 안내원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스도만이 선생이시오, 위대한 선지자이시며, 우리는 그에게서 들어야만 하며 지배를 받아야만 한다. 그의 말씀은 우리에게 계시가 되고 법이 되어야만 한다.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란 구절이 우리에게 충족한 것이 되어야만 한다. 만일 오직 그만이 우리의 선생이 된다면 그의 사역자들이 명령하는 자로 자처하거나 지고자나 무오자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누구에게도 허락지 않을 그의 영광을 감히 빼앗아 버리는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2) "너희는 다 형제니라." 사역자들은 서로에 대해 형제가 될 뿐만 아니라 백성에 게대해서도 형제가 된다. 따라서 그들의 형제 이외에 지배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선생이 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가 동생들이다. 그렇지 않으면 큰 형님이 "위엄과 능력의 탁월함"(창 49:3)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일을 재배하기 위해 그리스도는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롬 8:29)이 되시는 것이다. 여러분은 동일한 선생의 제자들이므로 형제들이다. 학교 동창들은 형제이며, 따라서 그들은 학과를 배우는데 있어서 도와야만 한다. 그러나 학자들 중의 한 사람이 선생의 자리를 차지하여 학교를 다스리는 일은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모두 형제라면, 우리는 "많은 선생들"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약 3:1).
둘째,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이러한 칭호를 사용하는 것도 금지되고 있다(9절). "땅에 있는 자들을 아비라 하지 말라. 사람을 너희 종교의 교주로 삼지 말라. 즉 종교의 기초자요 창시자요 명령자요 지배자라고 하지 말라."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는 "아버지로 불리워져야만 하며," 또한 "그들에게 존경을 드려야만" 한다. 그러나 하나님만은 "우리 영혼의 아버지"로 인정이 되어야만 한다(히 12:9). 우리의 종교는 어떤 사람에게서 유래되거나 또는 의지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영적이고 신적인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것은 "썩어질 씨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이며,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사람의 뜻이 우리의 종교의 근원이 되지 못하므로 종교의 규칙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jurace in verba magistri ─즉 어떤 피조물의 명령을 지킬 것을 맹세해서는 안 되며, 즉 가장 현명하거나 훌륭한 사람의 명령을 지킬 것을 맹세해서는 안 된다. 또는 우리의 신앙을 어떤 사람의 옷자락에 매달아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가 어디로 그것을 가져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으로 말미암아 회심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고전 4:15; 몬 10). 그러나 그가 이 명칭을 사용한 것은 그들을 지배하려거나 어떤 권위를 나타내려고 하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을 은혜를 입은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고전 4:14). 그 이유는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니은 우리의 아버지시며 우리 기독교에 있어서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다. 그는 기독교의 근원이시며, 설립자이시며, 그 생명이시며, 그 주인이시다. 근원자이신 그에게서 우리의 영적인 생명이 유래되며 또한 의지된다. 하나님은 "모든 빛들의 아버지"(약 1:17)이시며, "그 한 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만물은 유래되었으며 우리는 그 안에 있는 것이다"(엡 4:6). 그리스도는 우리들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말할 것을 가르치셨으므로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고 부르지" 말도록 하자. 사람을 아비라고 부르지 말자. 왜냐하면 "사람은 벌레이며 사람의 아들"도 동일한 바위에서 우리들과 함께 쪼개어진 "벌레"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땅에 있는" 자라고 한 것은 땅에 있는 사람이 범죄한 벌레이기 때문이다. 땅에는 선만을 행하고 죄를 짓지 않는 의인이 한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아버지"라고 불리우기에는 합당치 않다.
[2] 여기에는 겸손한 상호 복종에 대한 교훈이 있다(11절). "너희 중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그 자신을 그렇게 부를 뿐만 아니라(우리는 그 자신을 Ser편 servorum Dei─즉 하나님의 종들 중의 종이라고 하면서 랍비나 아버지, Dominus Deus noster─즉 우리의 주 하나님으로 행동하는 사람에 대해 알고 있다) 그는 그렇게 될 것이다. 그것을 약속으로 여기라. 즉 "복종을 가장 잘하고 봉사적인 사람이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간주될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최고의 지위에 앉게 될 것이다." 또는 교훈으로 여기라. 즉 "교회에서 위엄과 신망과 영광의 자리로 나아가는 자로 하여금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게 하라." (어떤 사본은 evstai 대신에 e;stw로 읽고 있다). "그러한 자로 하여금 영예의 특권이 안락한 생활의 보장이라고 생각하지 말도록 하라. 아니, 가장 위대한 자는 지배자가 아니라 봉사자이다." 자신의 의무와 특권을 알고 있었던 사도바울은 비록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고전 9:19)고 하였다. 우리 주님께서는 종종 그의 제자들에게 겸손하고 자신을 부인하며 온유하고 겸비하며 또한 비록 비천한 가운데 처할지라도 기독자의 사랑의 직무들을 풍성하게 다할 것을 강조하셨다. 또한 이것에 대하여 그는 우리에게 모본을 보여 주셨다.
[3] 여기에는 이렇게 해야 할 이유가 제시되어 있다(12절). 몇 가지로 생각해 보자.
첫째, 교만한 자에게 해당되는 형벌.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게 될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을 회개시키신다면, 그들은 그들 자신의 목적에서 낮아질 것이요, 스스로 그런 일을 싫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머지 않아 세상 앞에서 낮아지게 될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극도로 교만하게 되었을 때 짐승들과 함께 거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고, 헤롯은 버러지의 좋은 먹이가 되고 말았으며, 여왕과 같이 군림하던 바벨론은 만국 중에서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하고, 우쭐대는 제사장들을 보잘 것 없고 비천한 자로 낮추셨고(말 2:9) 거짓말하는 선지자를 "꼬리"가 되게 하셨다(사 9:15). 그러나 만일 교만한 자들이 이 세상에서 낮추어짐을 당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언젠가 마지막 날에는 "영원한 수치와 멸시를 받게 될 것이다"(단 12:2). "여호와께서는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실 것이다"(시 31:23).
둘째, 겸손한 자를 위하여 예비된 높임(preferent).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겸손은 "하나님 보시기에 값비싼 장식품"이다. 이 세상에서 겸손한 자는 거룩한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는 영예를 가지고 있다. 또한 현명하고 선한 모든 사람에 의해 존경함을 받는 영예를 가지고 있다. 또한 자격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종종 가장 영예스러운 봉사를 하도록 불리움을 받는다 .왜냐하면 명예는 그림자와 같아서 쫓아가 잡으려고 하는 자에게서는 피해 도망가 버리며, 그것을 피해 달아나는 자에게는 그를 뒤따른다. 어쨌든 저 세상에서 완전히 회개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형제들에게 겸손하여 스스로 낮추는 사람들이 높임을 받아 영광의 보좌를 유업으로 받게 될 것이며, 또한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서 면류관을 쓰게 될 것이다.
바리새인의 죄 (마태복음 23:13-33)
이 구절들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마치 시내산에서의 천둥소리와 번개불과도 같은 여덟 가지 화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 기록되어 있다. "세 가지" 화는 매우 무섭게 보여진다(계 8:13; 9:12). 그러나 여기에 있는 "여덟 가지" 화는 여덟 가지 복에 대치되고 있다(마 5:3). 복음은 율법과 함께 화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복음의 저주는 모든 저주 중에서 가장 무거운 저주이다. 이 화들이 더욱 두드러진 것은 그 권위 때문만이 아니라 그를 공격한 자들에 대한 온유함과 고상함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축복하려고 오셨으며, 또한 축복하기를 좋아하셨다. 그러나 분노가 타오르게 되면 분명히 이에 대한 동기가 있는 것이다. 이 위대한 중보자가 반박한 자를 누가 감히 탄원할 수 있겠는가? 주님께로 말미암는 저주는 다시 구제될 수 없는 저주이다.
여기에서 반복되는 실로 무거운 짐이 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외식하는 자들이었다. 이 말 속에는 저들의 모든 악한 성격이 요약되어 있다. 그것은 저들이 말하고 행한 모든 사실에 맛을 준 누룩이었다. 외식가는 종교적인 연극 배우이다(이것이 이 낱말의 원래 의미이다). 외식하는 자는 현재 자기가 그렇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 장차 그렇게 될 수도 없고 또한 그러한 사람이 되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의 역할을 한다.
2. 그러한 위선자들은 비판한 상태와 조건 아래에 놓여 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들이여." 주님께서 그들의 처지가 비참하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그렇게 될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종교는 헛되다. 그들이 죽을 때 파멸은 크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대한 화마다 각각 그 이유가 첨가되어 있는데, 그들에게 해당되는 구별된 죄를 내포하고 있으며, 그들의 위선을 입증하고 있고 그들에게 대한 그리스도의 심판을 정당화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화, 즉 그의 저주는 결코 이유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Ⅰ.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원수들이며 따라서 영혼의 구원에 대한 원수들로 선언되었다(13절).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 앞에서 닫았다." 즉 그들은 할 수 있는 대로 백성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천국을 열기 위함이었다." 즉 우리를 위해 그리로 들어가는 "새롭고 산 길"을 터놓으시며 사람들을 그 나라의 백성으로 데려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모세의 자리에 앉아 지식의 열쇠나 되는 것처럼 가장하였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메시야와 그의 나라를 가리킨 구약 성경을 열어 참되고 적절한 의미로써 백성들을 돕는 일에 기여했어야만 하였다. 모세와 선지자의 글을 해석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던 그들은 마땅히 백성들에게 성경이 그리스도에 대해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가를 보여 주어야만 했었다. 다니엘의 주간들이 다 가고 있었고 "홀은 유다에게서 떠나고 말았다." 그러므로 지금은 메시야가 나타날 시간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이 위대한 일을 도와 많은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는 고사하고 그들은 천국문을 닫아 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폐하여지고 의식적인 법을 아조하는 일을 주임무로 삼았으며, 또한 지금 성취되어 버린 예언들을 가르치거나 또는 백성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을 거스리도록 편견된 생각을 집어넣기에 급급하였다.
1. 그들은 그 자신들이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요 7:48) 결코 없었다. 그들은 너무도 교만하였기 때문에 주님의 비천함에 고개를 숙이려고 하지 않았으며, 너무나 형식적이어서 주님의 솔직함에 부합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겸손과 자기 부정, 세상에 대한 멸시, 영적인 예배 등을 강조하는 종교를 좋아하지 않았다. 회개는 이 나라로 들어가도록 허용된 문이었다. 자신을 의롭다고 경탄하는 바라새인들에게 있어서 회개하는 것, 즉 자신을 낮추고 미워하라는 것보다 더 어울리지 않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 자신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2. 그들은 "그리로 들어가려고 하는 자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지는 것도 나쁘지만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게서 떨어지도록 하는 것은 더욱 나쁘다. 그러나 그것이 위선자들에게는 흔히 있는 방법이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 종교적으로 그들보다 앞질러 가거나 자신들보다 더 훌륭하게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이 들어가지 않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방해가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백성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 지도자가 거절하기 때문에 많은 무리들이 복음을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밖에도 죄인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환영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며(눅 7:39) 또한 죄인들이 그리스도를 환영하는 것도 반대하였다. 그들은 그의 교훈을 왜곡하였으며, 그의 이적들을 반대하였으며, 그의 제자들과 더불어 다투었으며, 또한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과 그의 재정은 가장 부정직하고 손해되는 것이라고 백성들에게 단언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신앙을 고백하는 자를 여지없이 출교시켰으며, 그를 대항하기 위하여 악을 행사하는 일에는 온갖 술수와 권력을 다 동원하였다. 이와 같이 그들은 "천국 문을 닫았으므로" 그리고 들어가려는 자는 "침노를 당해야만"(마 1:12)하며 또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무리와 길에 놓여있는 온갖 장애물들과 난관들을 뚫고 "그리로 들어가야만 한다"(눅 16:16).
우리의 구원이 이 세상의 어떤 사람이나 어떤 무리들의 손에 맡겨지지 않는 것이 우리를 위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만일 그러하였다면 우리는 결코 구원받지 못하였을 것이다. 교회문을 닫는 자들은 할 수만 있으면 천국문도 닫으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의 악의가 하나님의 택한 자에게 대한 "그의 약속을 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폐할 수 없음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Ⅱ. 그들은 종교와 경건의 모양을 자신들의 탐욕스러운 행위와 욕망에 대한 구실로 삼았다(14절).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그들의 사악한 행위는 어떤 것이었는가? 그들은 "과부의 집을 늑탈하였는데" 그 방법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최고로 할 수 있는 환영을 그들 자신이나 그들 하수인들에게 하도록 강요하면서 그 집에 숙식하거나 또는 교묘하게 그들의 환심을 삼으로써 그들이 손쉽게 미끼로 삼을 수 있는 재산 관리인의 자격을 얻는 것 등이었다. 그들이 이러한 사람이라고 누가 감히 나서서 말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이 목표했던 것은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 또한 이것이 저들의 주된 최고의 목적이었으므로 의와 공평에 대한 모든 생각은 다 제쳐 두었으며, 과부의 집들은 그들에게 희생 제물이 되고 말았다. 과부들이란 연약한 처지에 있는 연약한 몸이었으며 쉽사리 사기를 당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미끼를 삼기 위하여 과부들에게 눈독을 들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특별히 보호하고 후원하며 구원해야 할 과부들을 늑탈하였다. 구약에서 "과부를 미끼로 삼는"(사 10:1, 2) 자들에게는 화가 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화를 내림으로써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하나님은 과부의 심판자이시다. 그는 그들을 특별히 돌보시며, "과부의 지계를 세우셨고"(잠 15:25), "그 까닭을 밝히셨다"(출 22:22, 23).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과부들의 집을 통채로 삼켜버렸던 것이다. 그들은 "사악한 재물로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들의 늑탈은 탐심만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들이 잔인하게 억압하는 것을 나타내는데 미가 3장 3절에 잘 묘사되어 있다. 즉 "저들은 산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긴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은 이 모든 것을 율법을 구실 삼아 자행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을 교묘하게 행하였으므로 아무 비난도 받지 않았으며 또한 그들에 대한 백성들의 존경심도 전혀 줄지 않았기 때문이다.
2. 그들이 이 악한 행위를 가린 옷(구실)은 어떤 것이었는가? "그들은 거짓으로 오래 기도하였다." 실제로 그들은 오래 기도하였다. 어떤 유대인 저술가가 우리들에게 전해 준 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명상과 기도 예식에 있어서 한 번에 세 시간씩을 소비하였으며 그것도 매일 한 번씩이나 하였는데, 이것은 의무적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교통한다는 사실을 남에게 의식케 하거나 또는 늘 그렇게 한다는 사실을 나타내려는 교만한 마음에 불과하였다. 이런 일은 어떠한 의무적인 일도 가지지 않고 언제나 외적인 상업 일에만 몰두했던 바리새인들에게는 매우 쉬운 것이었다. 이렇게 간교한 재주로 그들은 재물을 얻었고 그들의 위엄을 유지하였다. 아마도 이러한 긴 기도는 즉흥적인 것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 때에(박스터씨의 말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가졌던 것 보다 더 많은 기도의 은사를 가졌지만, 그들은 천주교 신자들이 염주알을 굴리며 하듯이 늘 상투적인 형식의 말로써 이야기하는 것처럼 기도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책망하신 것은 그들의 긴 기도가 아니라 의식적인 기도였다. 만일 그들이 선한 것을 나타내려고 하지 않았다면 위선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사악한 행동들을 가리는데 사용된 겉옷은 매우 두꺼운 것이어야만 했다. 그리스도 자신은 "온 밤을 새우시면서 기도하셨으며," 곧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고백해야 할 죄가 많이 있고 공급받기 위해 기도해야 할 부족한 점이 많이 있으며, 감사드려야 할 많은 자비가 있으므로 오래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만 한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기도는 공연히 오래 반복하는 기도였으며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외식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긴 기도로 말미암아 그들은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경건하고 독실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게 되었으며 또한 천국의 은총을 받은 자라는 칭송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이 차마 자신들을 속일 사람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과부들은 바리새인들에게 기꺼이 자기들의 재산을 맡겼고 자녀들의 보호를 의뢰하였다 !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기도의 날개를 휘저으면서 하늘로 날아 올라가는 듯 보였으나 그들의 눈은 솔개와 같이 땅에 있는 미끼, 즉 과부의 집이나 그들에게 유용한 어떤 것들을 향해 번득이고 있었다. 이와 같이 세겜 족속은 탐욕을 위해 외식적인 할례를 받았으며(창 34:22, 23), 압살롬은 자신의 반역을 숨기기 위해 헤브론에서 서원을 드렸으며(삼하 15:7) 또한 이스르엘에서의 금식은 나봇의 살인죄를 감추기 위한 것이었고, 바알 신을 박멸한 것은 예후가 그의 야심을 펴기 위한 하나의 기초 작업이었다. 천주교 사제들이 죽은 자 앞에 오랜 기도를 하는 것은 그것을 구실로 삼아 과부와 고아의 집을 늑탈하려고 하는 수작인지 알 수 없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경건의 모양을 구실로 삼아 가장 증오스러운 일들을 은폐시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은밀할 것을 심판하는 그날에는" 외식적인 경건이 지금은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말지 모르지만 이중적인 불법으로 간주될 것이다
3. 이 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선고된 운명. "그러므로 너희는 보다 큰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정죄에는 정도(degrees)가 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가진 사람은 그로 말미암아 "그 파멸이 더욱 견딜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2) 외식하는 자들이 지금 자신들의 죄를 위장하고 변명하는 그 종교적인 위선은 머니 않아 자신들의 정죄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이러한 죄의 속임수 때문에 죄인들이 자신들의 죄를 속죄하기를 희망하는 바로 그 일이 그들을 오히려 거스리게 되며 또한 그들의 죄를 더욱 극심한 죄가 되게 할 것이다. 오히려 죄인들의 변명이 불법이 되며 또한 그들의 탄원(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였으며, "주의 이름으로"오래 기도하였다)이 그들에 대한 형벌을 더욱 가중시킨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Ⅲ. 그들은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일에는 그렇게 원수 노릇을 하였지만 자신들의 파벌을 위하여 사람들을 악용하는 일에는 그렇게도 열심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서려는 자들에게 천국문을 닫아 버렸지만, 자신들의 "교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녔다"(15절). 여기에서 살 펴 볼 수 있는 것은,
1. 유대교 교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그들의 칭찬할 만한 열심. 즉 노아의 아들의 일곱 까지 규례만을 지키면 되는 "문"(gate), 교인(역주:완전한 교인이 아닌 초신자) 뿐만 아니라 유대교의 모든 의식에 전념하는 "의"(righteousness), 교인(역주:완전한 교인)을 만들기 위해 그들은 매우 분주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열망하는 바였다. 그 때문에 그들은 비록 한 사람일지라도 그를 위해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녔으며, 교활하게 온갖 수단을 다하여 접근하며 여러 계획을 세웠으며, 타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쓰기도 하였으며 지칠 줄 모르게 일을 하였다. 그들이 노리는 점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나 영혼들이 잘 되기를 위한 것이 아니었고 다만 그들을 교인으로 삼음으로써 신용을 얻고 또한 그들을 미끼로 삼아 이익을 얻기 위함이었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교인을 만드는 일이 진리와 참된 경건을 위한 것이며 또한 선한 의도에서 행해진다면 아름다운 일이며 열려와 수고를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영혼은 매우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영혼을 죽음에서 구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을 하든지 지나치다고 할 수는 없다. 여기에 나타난 바리새인들의 근면은 보다 나은 원칙 하에서 행동하려고 하지만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는 아무런 수고나 비용도 쓰지 않으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의 나태함을 보여 준다.
(2) 교인을 얻기 위해서는 바다나 육지도 건너가야만 한다. 모든 방법들과 수단들이 강구되어야만 한다. 이런 방법도 써보고 저런 방법도 써보아야만 한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모든 힘을 다 바쳐야만 한다.
(3) 육적인 마음은 그들의 육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수고를 거의 아끼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를 섬기는 교인을 만들기 위해 실망하지 않고 바다나 육지를 두루 다니려고 하였다.
2. 교인을 만든 후에 그들에게 저지른 바리새인들의 가증스러운 불경건한 행위. 너희는 즉시 그를 바리새인의 제자로 삼아버리며, 그는 한가지로 바리새인의 사상에 빠지고 만다. 그렇게 함으로써 "너희는 그들을 너희보다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외식하는 자들은 스스로 천국의 상속자가 될 것처럼 상상하지만 그리스도의 심판 때에는 지옥의 자식이 되지 말 것이다. 그들의 위선은 지옥에서부터 유래된다. 왜냐하면 마귀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위선은 지옥을 향하여 있다. 지옥은 그들의 본향이며, 그들이 물려받을 기업이다. 그들이 "지옥 자식"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천국에 대한 그들의 뿌리 깊은 적개심 때문이며 이것은 바리새주의의 원리요 정신이다.
(2) 복음을 악랄하게 반대하는 자들은 모두 지옥 자식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배나 더 사납고 편협 되며 악의적인 경우가 있다.
(3) 개종한 교인들은 대개 가장 편협 된 자들이었다. 제자가 선생보다 나은 격이다.
[1] 의식을 좋아하는 점에서 나았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부과시킨 것들이 다 어리석은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으므로 마음속으로 자신들을 따르는 자들의 아첨을 비웃었다. 그러나 개종자들은 바리새인의 가르침을 열심히 추종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어리석은 자들은 흔히 현명한 자들(이들은 보통 공적인 목적을 위하여 어리석은 자들을 추켜세운다)이 천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그러한 행사나 의식 등을 예찬한다는 사실이다.
[2] 기독교에 대해 분노하는 점에 있어서 나았다. 개종자들은 그들의 교활한 지도자들도 소유하기를 원하지 않는 규칙들을 쉽게 받아들이며 또한 진리에 대하여 극렬히 반대한다. 사도들이 각처에서 만날 극렬 분자들은 주로 유대교로 개종한 헬라 유대인들이었다(행 13:45; 14:2-19; 17:5; 18:6). 바리새인의 문하생이었던 바울은 "기독자를 박해하는데 매우 열심이었다"(행 26:11). 그러나 그의 스승인 가말리엘은 보다 온건했던 것으로 보인다.
Ⅳ.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그들 자신의 세상적인 유익과 명예를 추구함으로써 거짓을 만들어내고 부당한 사항들을 정하였으며, 이것으로써 그들은 백성들을 특히 맹세하는 일에서 위험한 오류를 범하도록 인도하였다. 이것은 종교의 보편성의 증거로써 모든 나라들에 의하여 신성시되었다(16절). "소경된 인도자여."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소경된 자의 인도하에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소경된 인도자는 그들도 모르는 길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여 주는 것이다. "그의 파숫군은 소경이다"(사 56:10), 종종 백성들은 그러한 파숫군을 가지기를 좋아하였으며, 보는 자들에게 "보지 말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백성의 지도자들이 잘못되게 하는 것"(사 9:16)은 나쁜 일이다.
2. 소경된 인도자를 둔 사람들의 상태도 서글픈 것이지만, 소경된 인도자의 상태는 더욱 저주스러운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영혼들의 피에 대해 답변해야 할 소경된 인도자들에게 저주(화)를 선고하고 계신다.
이제 주님께서는 그들의 소경됨을 증명하기 위하여 특별히 맹세의 문제를 들어 그들이 얼마나 말만 앞세우는 타락한 자들인가를 나타내 보여 주고 계시다.
(1) 주님께서는 그들이 가르친 교훈을 제시하고 계신다.
[1] 바리새인들은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봉사를 위해 드려지고 그와 더불어 특별한 관계에 있게 된다면 피조물로 맹세해도 좋다고 이를 허락하였다. 그들은 성전과 제단으로 맹세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에 불과하며 하나님의 영예의 동참자가 아닌, 단지 그 영예의 종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맹세는 하나님, 즉 그의 전지성과 공의에 대한 하나의 호소이다. 어떤 피조물에게 이러한 호소를 한다는 것은 그 피고물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는 것이다(신 6:3 참조).
[2] 그들은 "성전"으로 한 맹세와 "성전의 금"으로 한 맹세를 구분하였다. 즉 다시 말하면 "제단"으로 한 맹세와 "제단에 드린 예물"로 한 맹세를 구별하였다. 후자는 구속력이 있는 맹세로 하였고 전자는 구속력이 없는 맹세로 하였다. 여기에 이중적인 사악함이 있다.
첫째, 그들이 필요로 하지 않거나 또는 경시하며, 진리를 주장하거나 약속을 이행하는데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는 맹세가 있었다. 그들은 마땅히 성전이나 제단으로 맹세를 하지 말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맹세했을 때 그것들은 그들의 입의 말로만 여겨졌다. 어떠한 경우에서든지 신앙의 불이행을 묵인해 주는 그러한 교리는 하나님의 진리가 될 수 없다. 맹세는 날(dege)을 가진 예리한 도구이며 조롱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둘째, 그들은 성전의 금이나 제단의 예물을 더 좋아하셨다. 이는 백성들로 하여금 제단에 예물을 가져오거나 성전 금고에 금을 가져오도록 장려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이런 방법으로 그것들을 탈취하려고 애썼다. 금을 자신들의 소망으로 삼고 은밀한 예물들에 의해 소경이 된 자들은 고르반에 대한 위대한 친구였다. 수많은 계략을 사용하여 소득을 경건으로, 또한 그들은 종교로 하여금 세상적인 이익에 무릎을 끓게 하였다. 타락한 교회 지도자들은 물질이 그 사용하는 목적에 따라 죄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고 하였으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이나 영혼들의 잘 됨 보다는 자신들의 이익과 관련된 것에 더 큰 강조를 두었던 것이다.
(2) 주님께서는 이 구별이 어리석고 불합리한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17-19절). "우맹이여, 소경들이여."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우맹"이라고 부른 것은 분노에 찬 책망이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꾸짖음이었다. 그것은 죄스러운 견해와 행위의 어리석음을 보여 주는 지혜의 말씀인 것이다. 특별한 사람에 대해 그 성격을 비난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맡기자 그는 사람 안에 있는 것을 아시며, 우리들에게 "어리석은 자"라고 말하지 말 것을 단호히 역설하였다. 그들로 하여금 어리석음을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직접 호소하고 있다. "어느 것이 크뇨. 금(금 그릇이나 장식물 또는 금고에 있는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누구든지 Propter quod aliquid est tale, id est magis tale ─즉 어떤 것이 특별한 방법으로 한정되기 때문에 그 자체는 동일한 방법으로 더욱 한정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이다. 성전의 금으로 맹세한 자들은 그것을 거룩하게 보는 안목을 지니고 있다. 성전의 거룩성 이외에 그것이 예물로 쓰여지는 것을 거룩하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러므로 성전은 금보다 덜 거룩하게 될 수는 없으며, 그보다 더 거룩한 것이 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고 거룩케 함을 받기 때문이다(히 7:7). 성전과 제단은 고정적으로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요, 금이나 예물은 이차적으로 드려진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제단이요(히 13:10) 성전이시다(요 2:21).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예물을 성별케 하시며 그것들을 받으실 만한 것으로 만드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벧전 2:5). 자신들의 행위를 칭의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의로움에 대신하려는 자들은 제단의 예물을 더 좋아하는 바리새인의 어리석은 죄를 짓는 자들이다. 모든 참된 기독자는 살아있는 성전이다. 그 때문에 모든 것은 그에게 성별 되어진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며"(딛 1:15) "믿지 아니하는 남편은 믿는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해진다"(고전 7:14).
(3) 주님께서는 그들이 만들어낸 모든 맹세들을 맹세의 참된 의미, 즉 주님의 이름으로 한 것으로 환원시킴으로써 그들의 잘못된 점을 교정하고 계시다. 그러므로 성전이나 제단이나 하늘로 맹세한 것은 형식적으로 나쁜 것이지만 그 맹세는 구속력을 가지고 있다. Quod fieri non debuit, factum valet ─ 즉 해서는 안 될 약속들이라도 일단 하고 나면 구속력이 있다. 사람은 자신의 허물을 결코 속일 수가 없을 것이다.
[1]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로 하여금 "제단은 나무와 돌, 그리고 놋쇠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그 맹세에 대한 의무를 떨쳐버리게 하지 말자. 왜냐하면 맹세는 그 자신에 대하여 가장 강력하게 해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는 비난을 받아야 하며 맹세의 의무가 보존되도록 하기 위해 it res potius valeat quam pereat ─ 즉 맹세로 말미암은 의무는 없어지지 않고 더욱 강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단으로 한 맹세는 그 제단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들로 해석되어야만 한다. 종속되는 것은 주되는 것과 함께 통과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제단에 있는 것들은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기 때문에 그 제단과 거기에 있는 것들로 맹세하는 것은 실제로 하나님 자신을 증인으로 삼은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제단이기 때문이다. 그리로 가는 자는 하나님에게로 가는 것이다(시 43:4; 26:6).
[2]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그가 자신이 하는 것을 이해한다면, 성전에 대한 이러한 존경의 근거가 이 집이 훌륭하기 때문이 아니라 예배를 위해 드려진 하나님의 집, 즉 그의 이름을 거기에 두기 위해 선택한 장소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방법으로 거기에 자신을 나타내시며 또한 그의 임재의 표식을 제시하기를 기뻐하셨다. 그러므로 그것으로 맹세하는 자는 누구든지 "이 곳은 내 휴식처이니 내가 이곳에 거하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으로 맹세하는 것이 된다. 훌륭한 기독자는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그 속에 거하신다(고전 3:16; 6:19). 또한 하나님께서는 성전에 대해 행할 것을 그 자신에 대해 행한 것으로 여기신다. 은혜로운 영을 근심케 하는 자는 그 영과 또한 그 속에 거하는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것이다(엡 4:30).
[3] 만일 사람이 하늘로 맹세하면 이는 죄를 짓는 것이다(마 5:34). 따라서 그는 맹세한 의무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이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그가 맹세한 하늘이 그의 보좌임을 그로 하여금 알게 할 것이다(사 66:1). 보좌로 맹세하는 자는 거기에 앉아 있는 자에게 호소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맹세의 형식으로 그에게 행해진 신성 모독에 대해 분개하시며 따라서 그는 분명히 그것을 위반함으로써 그에게 행해진 보다 큰 모독에 대해 보복하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맹세가 그럴 듯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엄숙한 맹세에 대해 회피하는 것을 결코 묵인하지 않으실 것이다.
Ⅴ. 그들은 사소한 율법에 대해서는 엄격하고 세밀하였으나 보다 더 중한 것에 있어서는 무관심하고 허술하였다(23, 24절). 그들은 "율법에 편벽되었고"(말 2:9), 그들이 이해 관계나 감정에 따라 자신들의 의무를 취사 선택하려고 하였다. 신실한 순종은 보편적인 것이며, 올바른 원칙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어떤 규칙을 순종하는 자는 그것들에 대하여 온전히 존경할 것이다(시 119:6). 그러나 자신들을 위해 종교적으로 행동하는 외식자들은 그들 자신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편견성은 여기에서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1. 그들은 사소한 의무는 지켰으나 보다 큰 의무들은 지키지 않았다. 그들은 십일조가 "박하, 회향, 근채"가 될 때까지 그것을 정확히 바쳤으며, 그것을 십일조로 정확하게 바치는 데 있어서 그것들 많이 드리려고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큰 소리를 내면서 바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명성을 값싸게 사려고 하였던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나는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자랑하였다(눅 18:12). 그러나 그들은 결국 그들이 바친 것을 자신이 가졌으며, 또한 거기에서 자신의 것을 찾아내려고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십일조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게 바쳐졌고 또한 그들과 관련이 되어 있었으며, 그들은 그들의 친절함에 대해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의무였으며 또한 율법이 요구하는 바였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십일조를 바치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말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있는 곳에서 일정한 목회를 후원하고 유지하는데 기여해야만 된다는 사실이다. 십일조를 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는것"이라고 불리우고 있다(말 3:8-10).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으면서도 그들을 가르치는 자와 교제를 가지지" 않는 자, 즉 값싼 복음을 좋아하는 자는 바리새인에게도 미치지 못하는 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그들을 정죄하는 죄목은 그들이 "율법이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을 버린 것이었다." 그들은 십일조를 드리는 데 있어서 만일 그것이 하나님 앞에 속죄하는 것이 아니라면 최소한 그것을 내지 못한 것에 대해 사람들에게 변명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였다. 하나님의 율법의 모든 일들은 중한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에 있는 내적인 거룩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들은 가장 중한 것들이다. 즉 그것은 자기 부정이나 세상에 대한
멸시,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같은 것들인데, 여기에 종교의 생명이 들어 있다. 사람에 대한 심판이나 자비 또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율법의 중한 것들이며, "우리 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선한 일들"(미 6:8)이다. 의롭게 행동하거나 자비를 사랑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자신을 겸손하게 하는 것, 이런 것들이야말로 제사나 십일조보다 더 나은 순종인 것이다. 심판은 제사보다 더 앞서 있다(사 1:11).
십일조를 제사장들에게 공평하게 드리면서도 그 밖의 다른 사람을 속이고 사취하는 것은 하나님을 조롱하고 우리 자신을 속이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자비가 제사보다 더 앞서 있다(호 6:6). "주님의 헌금으로 살찌우는 자"들에게 좋은 음식을 먹이면서도 벌거벗었거나 매일의 양식이 모자란 형제 자매에게 대하여 긍휼의 그릇을 닫아버리는 것이나 또는 박하의 십일조를 제사장에게 드리면서도 거지 나사로에게 빵부스러기를 주기를 거절하는 것은 긍휼 없는 심판에 처하게 될 처사들이다. 긍휼 없는 심판을 한다고 하면서 긍휼을 나타내 보이지 않은 자들에게 행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율법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진리 안에서 영광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들은 사소한 죄들은 피하면서 보다 더 큰 죄를 범하였다(24절). "소경된 인도자여." 그는 전에 그들의 타락한 교훈 때문에 그들을 이와 같이 불렀다(16절). 여기에서 그가 그들을 이와 같이 부르는 것은 그들의 타락한 생활 때문인데, 그들의 실제 생활은 그들의 교훈만큼이나 주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생활에 있어서도 소경이요 편벽되었다. 그들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켰다." 그들은 자신들의 교훈에서 하루살이는 걸러내었다. 즉 백성들에게 장로들의 유전 중에서 그 어느 것도 범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실제 행위에서 하루살이를 걸러내었다. 즉 그들은 죄를 몹시 미워하며 사소한 것에 대해서도 두려워하는 것처럼 떨면서 그것들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들과 비교하면 하루살이에 비해 낙타와 같은 죄들을 서슴치 않고 자행하였다. 과부의 집을 늑탈할 때 그들은 실로 "낙타를 삼켜버렸다." 그들이 유다에게 무죄한 피의 대가를 주었을 때 그 돌아온 돈을 성전고에 두기를 꺼려하였다(마 27:6). 그들은 더럽힘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재판석으로 나아가지 않고 문에 서서 거룩하신 예수를 거스려 소리를 질렀다(요 18:28). 그들은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을 인하여 제자들과 다투었지만 고르반을 채우는 것을 인하여 백성들에게 제 5계명을 깨뜨릴 것을 가르침으로 그들은 하루살이, 즉 사소한 일은 걸러내고 낙타와 같은 것을 삼켜 버렸다.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책망한 것은 적은 죄에 대해 망설이는 것이 아니다. 비록 하루살이와 같이 적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만일 죄라면 마땅히 걸러져야만 한다. 그러나 그러한 죄를 짓는 것은 낙을 삼키는 일인 것이다. 율법의 작은 일들에서는 미신적이고 큰 일들에서는 모독적인 것이 여기에 정죄된 위선이다.
Ⅵ. 그들은 모두 종교의 외적인 면을 치중했고 내적인 면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께 인정받기보다는 오히려 사람에게 경건하게 나타내 보이기를 더욱 소원하고 갈망하였다. 이것은 두 가지 비유에 의해 설명되고 있다.
1. 그들은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더러운 그릇으로 비교되고 있다(25, 26). 바리새인들은 종교를 고작해야 "잔을 씻는 것"(마 7:4) 즉 고상함과 같은 것에 두었다. 그들은 깨끗한 잔이나 주발에 음식을 담아 먹는 것에 관심을 두었지만 그들의 음식이 착취에 의해 얻은 것이며 또한 그것을 지나치게 포식한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하등의 깨달음이 없었다. 사람이 겉에서 보이는 잔의 외부만을 씻고 실제로 사용되어지는 내부는 더러운 채로 내버려둔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이와 같이 그들은 자신들의 명성이 사람들에게 손상되게 할지 모르는 수치스러운 죄만을 피하였으며 정결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에게 가증스럽게 될 마음의 사악함은 묵인하려고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몇 가지로 살펴보기로 하자.
(1) 바리새인들의 실제 행동. 그들은 겉을 깨끗이 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이웃들이 주시하는 일들에서는 매우 정확한 것처럼 보여졌으며, 또한 사악한 음모를 너무도 교묘하게 실천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사악함을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였으며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을 매우 선한 사람들로 여겼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 깊은 곳과 그들의 생활의 외진 곳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즉 "폭력과 음란"으로 가득 차 있었다(하몬드 박사는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불의와 폭음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경건하게 보이려 했지만, 온전하거나 의로운 곳이 전혀 없었다. 그들의 "심중은 심히 악하였다"(시 5:9). 우리는 내적으로 참되어야만 한다.
(2) 이러한 행위에 반대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신 규칙(26절). 이 규칙은 소경된 바리새인들에게 전달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보는 자"(요 9:39)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소경"이라고 부르고 있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즉 그리스도께서 판단하실 때는 자신의 사악함에 대해 나그네처럼 전혀 모르거나 또는 그것을 원수와 같이 미워하지 않는 자가 소경이다(그들은 다른 일들은 얼마나 빨리 보았던가). 다시 말하면 마음속에 거하는 은밀한 죄를 보지 못하거나 미워하지 않는 자가 소경인 것이다. 자기를 모르는 것은 가장 수치스럽고 해로운 무지이다(계 3:17). 그 규칙은 곧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들 작가가 특히 유의해야 할 것은 우리의 마음을 사악한 것에서부터 씻는 일이다(렘 4:14). 기독자의 주요한 임무는 "영혼의 더러움"에서부터 안을 깨끗이 씻는 일이다. 타락한 감정과 경향들, 영혼에 자리잡고 있는 은밀한 정욕들은 남의 눈에 띄어지지 않거나 또는 주시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선적으로 억제되고 굴복되어야만 한다. 그러한 죄는 의식적으로 삼가야 한다.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의 눈이 이에 대한 유일한 증인이다.
기술된 방법에 대해 살펴보자.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오직"이 아니라 "먼저"이다. 그 이유는 만일 이것에 대해 적절한 조치가 취해진다면 자연히 겉도 깨끗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외적인 동기가 유인(誘引)은 안이 더럽게 되어 있을지라도 겉은 깨끗이 보존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새롭게 하고 정결케 하는 은혜가 안을 깨끗이 한다면 그것은 겉에도 영향을 미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주도적인 원리가 안에 있기 때문이다. 만일 마음이 잘 지켜지면 모든 것은 좋아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에서 생명이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그 폭발은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만일 마음과 영이 새롭게 된다면 생명의 새로움이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더불어 시작해야만 한다. 이것이 우리의 첫째 과업이 될 때 우리는 확실한 일을 착수할 수 있을 것이다.
2. 그들은 "회칠한 무덤"과 비교되고 있다(27, 28절).
(1) 그들은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는" 무덤과 같이, 겉은 깨끗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유대인의 관습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눈에 띄도록 하기 위하여 무덤을 흰색으로 칠하였으며, 만일 그것들이 특별한 장소에 있다면 그것들을 사람들이 만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였다. 왜냐하면 그 무덤을 만짐으로 말미암아 의식적으로 더러워지기 때문이었다(민 19:16). 또한 그것이 퇴색되었을 때 흰색으로 칠하는 것은 큰길가에 있는 감시자들이 하는 일이었다. 무덤은 이와 같이 남의 눈에 띄게 만들어졌다(왕하 23:16, 17). 자신들을 은근히 세상에 나타내려고 했던 외식자들의 형식은 현명하고 선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에 의해 더러워질까 두려워하여 그들을 더욱 피하려고 하는 결과만을 초래했을 따름이었다. "서기관들을 조심하라"(눅 20:46). 이것은 저명한 사람들의 무덤을 더욱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희게 칠하는 습관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서는 그들이 "의인들의 비석을 꾸몄다"(29절)라고 언급되고 있다. 위대한 사람들의 무덤에 비석을 세우고 사랑하는 친구들의 무덤에 꽃을 심는 것은 우리들에게 흔히 있는 일들이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움은 단지 보이기 위한 무덤의 장식품이나 죽은 자에게 입히는 옷(수의)에 불과하였다. 그들의 궁극적인 야망은 "사람에게 옳게 보이며," 그들에 의해 칭찬을 받고 칭송을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2) 그들은 무덤과 같이 안은 "더러웠으며,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였다." 영혼이 몸에서 떠날 때, 우리의 몸은 그렇게도 더러운 것이다! 이와 같이 그들은 위선과 불법에 가득 차 있었다. 위선은 모든 불법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마음에 죄가 가득한 사람이 자신들의 생활에서 비난을 받지 않고 매우 선한 것처럼 나타내는 것은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만일 우리의 주인께서 "잘 하였도다"고 말씀하지 않으신다면 우리의 동료 하인들에게 좋은 말을 한 것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다른 모든 무덤이 열리게 될 때 이 흰 무덤도 들여다보게 될 것이며 또한 죽은 사람들의 뼈들과 모든 더러운 것이 "끌어내어져 하늘의 뭇 별 아래 쬐이게 될" 것이다(렘 8:1, 2).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겉모양이 아닌, 은밀한 것들을 심판하시게 될 날이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이웃들에게 칭찬을 받았던 그들이 어떻게 영낙없이 지옥으로 떨어져 버렸는가를 기억하는 것은 외식하는 자들과 함께 분깃을 나눌 자들에게는 부끄러운 위안이 될 것이다.
Ⅶ. 그들은 현재 자신들과 더불어 함께 있는 선지자들을 미워하고 박해하면서도 이미 죽어 고인이 된 선지자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대단한 호의를 가지고 있는 척 위장하였다. 이것이 맨 나중에 언급된 것은 이것이 그들의 특징 중에서 가장 최악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의 명예를 위해 율법들과 규례들에 대해 열심을 가지고 계시며 만일 그것들이 모독되고 비방을 받게 된다면 분노하신다. 그러나 그는 종종 자신의 명예를 위해 그의 선지자들과 사역자들에 대하여 동일한 열심을 가지고 계시며 만일 그들이 손상을 당하고 핍박을 받게 된다면 더욱 분노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이 대목에 이르러서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 보다 더욱 철저하게 말씀하고 계시다(29-37절). 왜냐하면 그의 사역자를 건드리는 자는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와 "그의 눈동자"를 건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이미 죽은 선지자들에 대해 가진 척 위장하는 존경심(29, 30). 이것은 겉치레였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겉으로 옳게 보였다.
(1) 그들은 선지자의 유물을 존중시하였으며 그들의 무덤을 쌓고, 그들의 무덤을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아마도 그들의 매장지가 알려졌던 것 같다. 다윗의 묘실은 그들과 함께 있었다(행 2:29). "하나님의 사람"의 무덤에 대한 칭호가 있었으며(왕하 23:17), 또한 요시야는 "그의 뼈를 옮기지" 않는 것이 그것을 존경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18절). 그러나 그들은 한술 더 떠서 그것들을 다시 쌓고 아름답게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1] 이것은 죽은 선지자에게 대한 존경의 한 본보기로 생각될 수 있다. 선지자들은 그들이 살아 있을 때 만물의 찌꺼기 같이 여김을 당하였으며 또한 그들을 거스려하는 모든 사악한 말을 들었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나쁜 사람들에게까지도 경건과 거룩함의 영예에 대해 강제적으로 인식케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며, 또한 종종 그러한 자들에게서 멸시를 받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삼하 6:22). 선지자들은 박해하고 미워한 자들의 이름이 수치로 가리워질 때 "의인의 비석은 복될 것이다." 의무를 다하는 가운데 꾸준하고 확고하게 영광을 돌리는 것은 영원한 영광이 될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 나타내 보여지는 자들은 그들 주위에 있는 자들의 의식 가운데 나타나게 될 것이다.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의 한 본보기로 생각될 수 있는데, 그들은 선지자들에게 존경을 드렸다. 육적인 사람들이 이미 죽어 고인이 된 신실한 사역자들의 비석에 대해 쉽사리 존경을 드리는 것은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 그들을 비난하거나 저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은 선지자들은 "보지 못하면서도 본 자들"이며 또한 그들은 그 선지자들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질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증거를 viva voce ─ 즉 생생한 음성(계 11:10)으로 한 살아 잇는 증인들에게 했던 것과 같이 그들을 괴롭히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들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말한 죽은 선지자들의 기록에 대해 존경심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현재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말하고 있는 살아있는 선지자들에게 대한 비난을 멈추지 아니하였다. Sit divus, modo non sit vivus ─ 즉 성도들이 있게 하여라. 그러나 여기에 살도록 하지는 말라.
로마 교회가 이미 죽은 성도들의 유물에 대해 바치는 과도 존경심, 특히 순교자들의 이름에 날들과 장소들을 바치며 그들의 유물을 안치하고 그들에게 기도를 드리며 또한 그들의 형상에 예물을 드리는 것(그들은 그들 당시의 성도들의 피에 취해 있었지만)은 선지자의 무덤을 쌓으면서도 그 교훈을 미워한 허울 좋은 외식 종교에 있어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계승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능가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인 것이다.
(2)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선지자들을 죽인 것에 대하여 항의하고 있다(30절).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그들은 결코 아모스를 잠잠케 하거나 미가야를 감옥에 집어넣거나 하나니를 광속에 감금하거나 예레미야를 웅덩이에 빠뜨리거나 스가랴를 돌로 치거나 주님의 종들을 조롱하거나 그의 선지자들을 능욕하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다. 그들의 오른 팔이 잃어버리지 않는 한 이 일을 즉시 행하려고 달려들 것이다. "무엇이라고, 네 종이 개이냐?" 그들은 바로 이때에 "모든 선지자들이 증거한"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만일 그들이 선지자 당시에 있었다면 그들의 말이 기꺼이 듣고 순종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가져온 빛에 대하여 반항을 하였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헤롯과 헤로디아가 세례 요한에 대해 행하였던 처사는 아합과 이세벨이 엘리야에게 행하였던 처사와 똑같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죄인들의 마음이 속임수는 여기에 많이 나타나고 있다. 즉 그들이 그 당시의 죄의 시냇물을 따라 내려가면서 이전의 죄의 시냇가로 거슬러 헤엄쳐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만일 그들이 다른 백성들이 가졌던 기회를 가졌었다면 그들보다 더욱 충실하게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며 만일 그들이 다른 사람이 받았던 시험을 받았었다면 그들은 단호히 이를 물리쳤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거들은 지금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회를 이용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받고 있는 시험도 물리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종종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셨을 때 살았더라면 그를 얼마나 꾸준히 따랐을 것인가를 생각할 때가 있다. 즉 우리는 그 당시에 그들이 했던 것 같이 그를 업신여기고 거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러나 지금 성경과 말씀, 그리고 사역자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더 나은 대접을 받지 못하고 계시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대한 그들의 적개심과 반대,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그들 자신과 그 세대에 임하게 된 파멸(31-33절). 여기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1) 입증된 고발. "너희가 스스로 증거하였도다." 죄인들은 그들에 대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심판을 피하려고 할 수는 없다. 그 때에는 그들 스스로가 쉽게 증거를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의 청원은 취소되고 유죄로 판결될 것이다. 그리고 "저희의 혀가 저희를 해할 것이다"(시 64:8).
[1] 그들은 선지자들을 죽인 것이 그들의 조상들이 저지른 큰 죄악이었음을 고백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이 죄악임을 알면서도 여전히 동일한 죄를 짓고 있었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다른 사람의 죄를 정죄 하면서도 스스로 동일한 죄나 더 사악한 죄를 짓는 자들은 다른 모든 자들보다도 더 용서받지 못할 자(롬 1:32-2:1)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박해자들과 더불어 행동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그것들을 추구하는 자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자기 모순의 진술은 심판날에 양심의 가책을 받는 계기가 되고 말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의도한 것보다 또 다른 건축물을 그들이 쌓은 선지자들의 무덤 위에 올려놓고 계신다. 그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아름답게 꾸밈으로써 그들의 살인을 정당화한 것처럼 보인다(눅 11:48). 왜냐하면 그들은 계속적으로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2] 그들은 이 소문난 박해자들의 조상들임을 스스로 고백하였다. "너희는 그들의 자손이다." 이것은 단지 그들이 혈통으로 그들의 자손이 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영과 성격에 의해 그들이 그 조상들의 자손이 됨을 말씀하고 계시다. "너희는 그들 조상에게서 났으며 또한 그들의 소욕을 행하려 하고 있다." 너희가 말하듯이 그들은 "너희"의 조상들이며, 너희는 "너희 조상들을 따르고 있다." 너희들이 그 혈통을 물려받은 것이 죄이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행 7:51). 그들은 박해하는 족속이 되었으며, "그들의 열조를 계승하여 일어난"(민 32:14). "행악의 종자"(사 1:4)가 되고 말았다.
악의와 시기, 잔인함이 그들과 더불어 뼈 속에 배어 있었으며 또한 그들은 이전에 "그들 조상들이 행한 대로하는 것"을 하나의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렘 44:17). 여기에서 그들이 얼마나 세심하게 그 관계를 언급하고 있는가(30절)를 유의해 볼 만하다. "선지자들을 죽인 자들은 우리의 조상들이며, 그들은 영예롭고 힘있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그들의 자손이며 계승자들이다." 만일 그들이 자신들이 마땅히 했어야 할 것으로써 그들의 조상들의 사악함을 미워하였다면, 그들을 "자기들의 조상"이라고 부르기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그들 조상들이 과거에 많은 위엄과 지배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박해자와 동류가 되는 것은 영예스러운 일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2) 그들에게 내려진 선고.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계속적으로 그들로 하여금 고칠 수 없는 죄를 짓도록 내버려두셨다(32절).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만일 에브라임이 우상과 결탁하고 회개하기를 싫어한다면 "그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어라." "더러운 자는 여전히 더럽게 되도록 내버려두어라."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지금을 죽이려고 하고 있고 또 수일 내로 그것을 성취할 것임을 잘 알고 계셨다. "좋다, 너희는 음모를 계속하라. 너희가 하려고 하는 일을 하라. 너희 마음의 길과 너희 눈이 보기에 좋은 대로 행동하라. 너희가 행하려고 하는 바를 속히 행하라. 너희는 범죄의 양을 채우게 될 것이며, 그 후에 이것은 분노의 홍수가 되어 넘치게 될 것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첫째, 완전한 멸망이 개인이나 가족들, 교회나 국가에 이르기 전에 채워질 수 있는 죄의 양(量)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지만, 그가 "더 이상 참지 못할"(렘 44:22) 때가 올 것이다. 우리는 더 채워질 수 있었던 아모리인의 분량(창 15:16)에 대해 찾아 볼 수 있으며, "낫으로 거두어들일 수 있는"땅의 "추수"(계 14:15-19)와 또한 끝까지 속임으로써 "마침내 속이고만"(사 33:1) 죄인들에 대해 읽어볼 수 있다.
둘째, 어린 자녀들이 계속적으로 아버지의 죄와 동일하거나 비슷한 죄를 행한다면 그 아버지의 죄의 양을 채우게 된다. 국가적인 파멸을 가져오는 국가적인 범죄는 많은 사람들이 몇 년 동안이나 또는 사회가 지닌 죄목들을 계속적으로 이어오면서 형성된 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조상들의 발자취를 밟아 가는 아이들에게 그들 조상들의 범죄를 정확하게 뒤집어씌우시기 때문이다.
셋째,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들과 사역자들을 박해하는 것은 그 어떤 죄보다 더 빨리 국가의 범죄의 양을 채운다. 이것이 바로 돌이킬 수 없는 진노를 그 조상들에게 가져다 준(대하 36:16)죄이며 또한 그 후손에게 끝까지 진노를 가져다 준(살전 2:16) 죄인 것이다. 이것은 네 번째 범죄로써, 이 죄가 다른 세 개의 죄에 첨가되었을 때 주님께서는 "그 벌을 돌이키지 않으시려고 하셨다"(암 1:3, 6, 9, 11, 13).
넷째, 자신들의 만족을 채우기를 완고히 고집하는 자들을 그들 자신의 마음의 정욕대로 내버려 두시는 것은 하나님께 당연한 일이다. 앞뒤를 가리지 않고 파멸에로 달려 가려고 하는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목에 고삐를 매도록 하라. 사람들이 이러한 지옥과 같은 상태에 놓이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실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2] 그는 계속적으로 그들을 돌이킬 수 없는 파멸, 즉 저 세상에서의 개인적인 파멸에로 내버려두셨다(33절).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이것은 그 입술에 은혜가 넘치는 그리스도의 입에서부터 나온 이상한 말들이다. 그러나 그는 가공할 만한 일을 말하실 수 있으며 또 말하실 것이다. 또한 이러한 말들에서 그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선고하신 "여덟 가지" 화를 설명하시고 종합하고 계신다. 여기에 보면,
첫째, 그들에 대한 묘사가 있다. "뱀들아" 그리스도께서 이름들을 부르시는가? 그렇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할 것을 장려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정확하게 아셨으며 또한 그들을 땅에 기어다니면서 흙을 먹고사는 뱀과 같이 간교한 자들로 아셨다. 그들은 훌륭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속에는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그 혀 밑에는 독을 가진 옛 뱀의 자손들이었다. 그들은 "독사의 새끼들"이었다 그들과 그들 앞서 갔던 자들, 그들과 연합하였던 자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대적하는, 독을 가지고 노를 품고 있으며 교활한 대적자들의 새끼였다. 그들은 사람들에게서 "랍비, 랍비"라 칭함을 받기를 좋아하였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뱀"과 "독사"라고 부르고 계신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본래 성격을 제시하시며 교만한 자를 멸시하시기를 즐겨하시기 때문이다.
둘째, 그들의 운명(선고). 그는 그들의 상태가 매우 슬프고 절망적임을 나타내고 있다.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리스도 자신이 지옥과 판결에 대해 설교하신 것은 그의 사역자들이 이에 대해 들으려고 하지 않은 자들에 의해 종종 비난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지옥의 판결은 패역한 모든 죄인들의 두려운 최후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온 이 선고는 이전에 있었던 선지자들이나 사역자들에게서 나온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심판자이시며, 그의 손에 지옥과 사망의 열쇠가 주어져 있으며 또한 그가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정죄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이 판결을 피하는 방법이 있는데, 여기에 암시되어 있다. 즉 어떤 사람은 "장차 오는 진노에서 구원함을 받게 된다."
3. 모든 죄인들 중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정신을 가진 자들은 이 판결에서 피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회개와 신앙이 이를 피하는데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에 대하여 자만하고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대하여 그렇게 편견을 가진 그 자들이 어떻게 회개하고 믿을 수 있겠는가? 자신들의 상처를 찾아내거나 거기에 길르앗의 유향을 바르려고 하지 않는 그들이 어떻게 치유함을 받아 구원될 수가 있겠는가? 자신들의 병을 깨닫고 그것을 의사에게 내보인 세리들과 창녀들은, 큰 길(역주:가기 쉬운 죄인들의 길)가에 있으면서도 천국가는 길에 있다고 생각한 자들보다 더 쉽게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가 있었다.
예루살렘에 대한 선고 (마태복음 23:34-39)
우리는 그리스도의 선고로 말미암아 소경된 인도자들을 웅덩이, 즉 지옥의 판결에로 떨어지도록 내버려두고, 소경된 추종자들, 즉 유대 교회의 지체와 특별히 예루살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인가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Ⅰ. 예수 그리스도는 여전히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여 그들을 시험하려고 의도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었노라." 이 연결이 이상스럽다. "너희는 독사의 자식들이며 능히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이 구절 다음에는 "그러므로 너희에게는 더 이상 선지자들이 파송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구절이 나와야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결국에는 감화를 받게 될 것인지 아닌지를 알기 위하여 그렇게 되지 않으면 너희를 영영 내버리기 위하여 또는 너희를 멸망시키는 데 있어서 하나님을 의롭게 하시기 위하여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를 보낼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찬탄의 표식인 볼지어다! (역주: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음)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다. 다음의 사실들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1. 선지자들을 보낸 것은 그리스도이다. "내가 보내매." 이로써 그는 자신이 선지자를 파송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이심을 공언하고 있다. 그것은 왕적인 직무의 한 행동이다. 그는 그들을 우리 영혼의 관심사에 관해 우리와 교섭하기 위한 전권대사로 보내고 계신다. 부활하신 후에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실증하고 있는데 그때에 그는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고 말씀하셨다. 비록 지금은 그가 비천하게 나타나셨지만 이 위대한 권세를 위임받으셨다.
2. 그는 선지자들을 먼저 유대인에게 보내고 계신다. "내가 너희에게 보내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였다. 그들은 어디로 가든지, 복음의 은혜를 먼저 "유대인들"(행 13:46)에게 전하기 위하여 이 규칙을 준수하였다.
3. 그가 보낸 자들은 "선지자, 지혜 있는 자들, 서기관들"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이것은 신약의 직무자들에 대한 구약의 이름들이다. 이는 그들에게 지금 파송된 사역자들이 구약의 선지자나 지혜 있는 솔로몬이나 서기관 에스라보다 뒤지지 않은 사람임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맨 처음 시기에 신적으로 영감을 받은 특별한 사역자들은 하늘로부터 직접적으로 위임을 받은 선지자들과 같았다. 그때도 있었고 지금도 교회에 있으며 세상 끝날까지 있게 될 일반적인 고정된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일들에 관하여 백성들에게 지도하고 가르치기 위한 지혜 있는 자나 서기관과 같았다. 혹은 우리는 "천국에 대해 가르치는"(마 13:52) 사도들과 복음 전도자나 지혜 있는 사람으로, 목사들이나 교사들을 서기관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서기관의 직분은 사람들이 그 직분을 불명예스럽게 여겼을 때까지 영광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Ⅱ. 주님께서는 그의 종들이 그들 가운데서 직면하게 될 학대에 대하여 예견하시고 예언하고 계시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박을 것이지만, 그러나 나는 그들을 보내려고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종들이 어떻게 학대를 받게 될 것인가를 미리 알고 계시지만, 여전히 그들을 보내시며 또한 그들에게 저들의 박해의 양을 채우도록 명령하고 계신다. 주님은 이와 같이 그들을 보내는 것에 못지 않게 그들을 사랑하신다. 왜냐하면 그들의 박해를 통하여 자신을 영화롭게 하시려고 의도하시며 그들을 계속하여 보내시는 것이다. 주님은 비록 그들을 지키지는 않으신다고 할지라도 균형을 유지하려고 하신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도록 하자.
1. 이 박해자들의 잔인성. "너희는 그들을 죽이고 십자가에 못박게 될 것이다." 그들이 목말라 한 것은 피, 곧 생명이 피였다. 그들의 정욕은 자신들이 멸망시킨 것으로 만족되지 않고 있다(출 15:9). 그들은 두 야고보를 죽였으며, 글로바의 아들 시몬을 십자가에 못박았으며, 베드로와 요한을 채찍질하였다. 주님께서는 죽임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이와 같이 지체들도 머리(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였다. 기독자는 피흘린 것을 각오해야만 한다.
2. 그들의 지칠 줄 모르는 부지런함. "너희는 그들을 이 동리에서 저 동리로 구박하리라."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이 동리에서 저 동리로 돌아다닐 때에 유대인들은 그들을 교묘하게 피하였으며 또한 그들을 늘 붙어 따라다니며 괴롭혔으며, 그들을 박해하였던 것이다(행 14:19; 17:13). "유대에서 믿지 않았던" 자들은 다른 어떤 불신자들보다 복음에 대해 더욱 혹독하게 괴롭힌 원수들이었다(롬 15:31).
3. 이 일에 있어서 그들의 종교적인 구실. 그들은 회당. 즉 그들이 교회 재판을 행하였던 예배의 장소에서 종들을 채찍질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이 일을 교회에 대한 하나의 봉사로써 행하였다. 저들은 종들을 던지면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영광을 받으실지어다"라고 하였다(사 66:5; 요 16:2).
Ⅲ. 주님께서는 그들 조상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조상들의 죄를 모방하였기 때문이다.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35, 36절). 하나님께서는 핍박하는 세대에 대해 오래 참으시지만, 그는 항상 참으시지는 않을 것이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 그것은 진노로 화하게 될 것이다. 죄인들 사악함의 재물을 더욱 쌓아 올리면 올릴수록 진노의 재물은 더욱 깊고 가득하게 될 것이다. 그것들을 깨뜨리는 것은 크고 깊은 샘을 깨뜨리는 것과 같을 것이다. 몇 가지로 살펴보면,
1. 이 전자의 범위. 그것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 즉 의를 위하여 흘린 피로 되어 있는데, 이 피는 하나님의 보고에 저축되어 있으며 그 중의 한 방울도 상실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귀중한 것이기" 때문이다(시 72:14). 그는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라고 그 날짜를 정하고 있는데, 아벨의 피로부터 이 "순교의 시대"(aera martyrum)가 시작하고 있다. 그가 "의인" 아벨이라고 불리운 것은 그가 "의롭다"하는 증거를 하늘로부터 얻었으며 "하나님께서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 하셨다." 얼마나 이르게 순교가 세상에 임하였는가 ! 죽임을 당하였던 첫 사람은 그의 종교 때문에 죽었으며, "죽었으나 여전히 말하고 있다." 그의 피는 가인에게 부르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인의 길을 걸으며 자신의 형제를 미워하고 핍박하는 자들에게 계속적으로 부르짖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행위는 의롭기 때문이다." 그는 이것을 "바라갸의 아들 사가나"(36절)에게까지 확대하고 있는데, 이 사람은 선지자 스가랴(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해석한다)가 아니며(그는 "바라갸의 아들"이기는 하였다, 슥 1:1). 또한 어떤 사람들은 주장하는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의 아버지인 사가랴도 아니다. 아마도 그는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죽임을 당한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대하 24:20, 21)인 것 같다. 그의 아버지는 여호야다와 매우 흡사한 뜻을 나타내는 "바라갸"라고 불리우고 있다. 한 사람이 두 가지 이름을 가지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었다. "너희가 죽인"에서 너희는 이 세대의 너희가 아니라 이 나라의 너희이다. 이것이 구체화된 것은 그것에 대한 요구가 아벨의 경우처럼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대하 24:22). 유대인들은 그 죄수는 자신의 죄 때문에 마땅히 돌에 맞아 죽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그것이 완전히 설명이 되지 않고 여전히 보류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이것은 예언적인 암시로써 언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룩의 아들, 스가랴가 있었기 때문인데 요세푸스는 그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De Bell Judaico, lib. 5, cap.1).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는 의롭고 선한 사람이었으며 성전이 로마인들에 의해 파괴되기 조금 전에 성전에서 죽임을 당하였다고 한다. 대주교(틸롯손:Tillotson)는 생각하기를 그리스도께서는 "역대기"에 있는 스가랴의 역사에 대해 말씀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요세푸스의 책에 있는 후자의 스가랴에 대해서도 예언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후자의 스가랴는 아직 죽임을 당하지 않았지만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이 있기 전에 그들이 그를 죽일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병행하게 될 것이다.
2. 그 결과. "이것이 다 돌아가리라." 즉 이 피에 대한 범죄가 그 모든 형벌이 다 "이 세대에게 돌라가리라." 그들에게 이르고 있는 비참과 파멸은 매우 클 것이며, 그들 자신들의 죄악성을 고려한다면 그 비참과 파멸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보다 오히려 부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다른 심판과 비교해 볼 때 이 심판은 그들 조상들의 모든 사악함, 특히 그들의 핍박을 하나님께서 특별히 언급하여 이 파멸을 선고하신 모든 자들에게 돌리고 있는 것같이 보여진다. 이 파멸은 매우 두려운 것이 될 것이며, 마치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흘린 모든 의로운 피를 인하여 그들을 단번에 고발하는 것과 같이 무서운 파멸이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은 "이 세대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 심판이 빨리 이르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에 있는 어떤 사람은 살아서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죄에 대한 형벌이 더욱 심하게 가까이 이르면 이를수록 회개와 개혁에 대한 부르심은 더욱 커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Ⅳ.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의 사악함을 슬퍼하고 계시며 또한 자신이 그들에게 베푼 많은 친절한 호의들을 제시하시면서 그들을 준엄하게 책망하고 계시다(37절).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두 번씩 반복하여 부르신 것은 강조하기 위함이며 그들을 크게 동정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하루나 이틀 전에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우셨고 여기에서는 예루살렘에 대해 한탄하시며 슬퍼하셨다. "평화의 환상"(예루살렘의 의미)인 예루살렘은 이제 전쟁과 혼돈의 자리가 되어야만 한다. "모든 땅의 기쁨"이었던 예루살렘은 이제 "비소와 놀람과 조롱거리"가 되어야만 한다. "인구가 조밀한 성"이었던 예루살렘은 이제 국내의 소동으로 말미암아 산산이 깨어지고 파괴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선택한 장소인" 예루살렘은 이제 약탈자와 강도에게 버림을 받게 될 것이다(애 1:1; 4:1). 그러면 왜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대해 이러한 일을 하시는가? 왜? 그 이유는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 하였기'(애 1:8) 때문이다.
1.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종들을 핍박하였다.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이 죄는 특별히 예루살렘에 해당되었다. 그 이유는 거기에 교회 일을 관장하는 산헤드린, 또는 큰 공의회가 있었으며 따라서 선지자는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눅 13:33). 실제로 그들은 지금 사람을 죽일 권세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군중을 충동질하여 소동을 일으킴으로써 스데반과 같은 사람들을 죽게 하였으며 또한 로마권력에 그들을 죽이도록 위탁하였던 것이다. 복음이 맨 처음 전파된 예루살렘에서 복음이 맨 처음 박해를 받았으며(행 8:1), 또한 그곳은 박해자들의 사령부였다. 거기로부터 공문이 다른 성읍으로 전달되었으며, 거기 많은 성도들이 묶여 데려와졌다(행 9:2). "너희는 그들을 돌로 쳤다." 이것은 유대인들 가운데서만 사용된 주요한 형벌이었다. 율법에 의해 거짓 선지자들과 무당들이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였다(신 13:10). 그런데 그 율법의 미명 아래 참된 선지자들이 죽임을 당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마귀는 종종 그것에 대항하기 위해 심기워진 교회를 향하여 교묘하게 대표를 돌려대 왔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참된 선지자를 무당으로, 참된 신앙 고백자들을 이단자나 분파자로 낙인찍은 후 그들을 쉽게 핍박하려고 하였다. 예루살렘에서는 이밖에도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이것이 바로 열왕기하 24장 4절과 역대하 36장 16절에 있는 것과 같이 이러한 파멸이 그들에게 이르도록 큰 소리로 부른 죄이며, 하나님께서는 이 죄에 대하여 다른 어떤 죄보다 더 눈여겨 주목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을 현재 시상으로 하고 계심에 유의하라.
즉 "너는 그들을 죽이며, 돌로 치고 있다"라고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과거에 행하였던 모든 것이나 그들이 앞으로 하려고 하는 모든 것들을 현재로 여기셨기 때문이다.
2.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와 복음의 제공물들을 거부하고 거절하였다. 앞의 죄는 고칠 수 없는 죄였으며, 이것은 고치기를 거부한 죄였다. 여기에 보면,
(1) 그들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와 호의.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비록 악하기는 하였지만 예루살렘의 자녀들, 주민들, 물론 어린아이들에게 대한 복음의 은혜는 이와 같이 친절을 겸비하고 제공되었다.
[1] 주어진 호의는 그들을 모으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목적은 불쌍한 영혼들을 모으는 것이다. 즉 그들이 방황하는 것으로부터, 연합의 중심점이신 그에게로 모으는 것이다. 왜냐하면 "백성들은 그에게 모으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유대나라의 모든 백성들을 교회로 데려 옴으로써 그들을 모두 "신적 위험의 날래 아래로" 함께 모으려고 하셨다(유대인들은 이 표현을 교인에 대해서 말할 때 사용하였다). 이것은 여기에서 수수한 비유, 즉 "암탉이 그 새끼를 모음 같이"로 설명되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본능적으로 제 새끼를 특별히 보호하는 암탉과 같이 온유한 감정으로 그들을 모으려고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영혼들을 모으시는 것은 그의 사랑에서부터 온다(렘 31:3).
둘째, 그리스도께서는 동일한 목적(병아리와 같은 목적)을 위하여 모으려고 하셨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는 것"은 보호와 안전, 따뜻함과 위로를 위함이다. 보잘 것 없는 영혼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피난처와 휴식처를 가지고 있다. 병아리들은 육식을 하는 새들에게 위협을 받게 될 때에 피신하기 위하여 자연히 암탉에게로 달려가는 것이다. 아마도 그리스도께서는 시편 91편 4절에 있는 약속, 즉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라"는 말씀에 대해 언급하고 계시는 듯하다. "그리스도의 날개 아래에는 치료함이 있다"(말 4:2). 그것은 암탉이 그의 새끼에 대해 가진 것보다 그 이상이다.
[2] 이 호의를 주려고 하시는 그리스도의 의욕.
첫째, 그가 주시려고 하는 것은 매우 자유스러운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에게 나오는 보잘 것 없는 영혼들을 참으로 기꺼이 받아들이고 구원하려고 하신다. 그는 그들이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아니하시며, 그들이 회개하는 것을 즐거워하신다.
둘째, 매우 빈번히 하셨다. "몇 번이냐 !" 그리스도께서는 종종 예루살렘에 올라 오셔서 거기에서 전파하시고 이적을 행하셨다. 이러한 모든 것은 그가 그들을 모으기 위하여 행한 것이었다. 그는 그 일을 얼마나 자주 반복하였는가를 계산하고 계시다. 우리가 종종 복음의 소리를 들을 때마다 우리가 종종 성령의 노력을 느낄 때마다, 그 만큼 자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모으려고 하시는 것이다.
[3] 이 은혜와 호의에 대한 그들의 사악한 거부.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그리스도의 자비에 대하여 그들은 얼마나 완고하게 반대하였던가 ! 주님께서는 기꺼이 구원하려고 하셨지만, 그들은 그에 의해 구원받기를 원치 아니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죄인들이 주 예수님의 날개 아래 모여지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사악한 의지에 기인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모으도록 제시한 말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악들을 사랑하였고, 여전히 자신들의 의로움을 신뢰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나 그의 통치에 순응하기를 원치 않았으며 따라서 그 계약은 폐기되고 말았던 것이다.
Ⅴ. 그는 예루살렘에 대한 선고를 낭독하고 계시다(38, 39).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그 성과 성전, 하나님의 집과 그들 자신의 집은 모두 황폐하여 버린 바 될 것이다. 특히 이것은 그들이 자만하고 신뢰하였던 성전을 의미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성산에 대해 매우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아 모여지려고 하지 않는 자들은 그의 진노로 말미암아 소멸되고 흩어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하려고 했으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이스라엘이 나를 원치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내버려두었다"(시 81:11, 12).
1. 그들의 집이 "버린 바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성전에서 떠나셨으며 결코 다시 그리로 오시지 않으셨다. 이 말씀으로써 성전을 파멸에로 내버려두셨다. 그들은 성전에 미쳐 있으며, 그것을 자기들 것으로 가지려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거기에 발을 붙이거나 관심을 가질 수가 없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좋다. 그러면 그것을 너희에게 버려두라. 그것을 취하고 마음대로 이용하여라. 나는 더 이상 그 성전과 관계를 가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성전을 "시장터와 강도의 굴혈"로 삼아 버렸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들에게 버려졌다(남겨졌다). 이 일이 있은 후 얼마 안 되어, 성전에서는 "이 자리에서 떠나자"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스도께서 가버리셨을 때 "영광은 떠나버렸다"(Ichabod), 그들의 성은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가 없는 채로 그들에게 넘겨졌다. 그는 더 이상 "그들 주위에 있는 불담"이나 "그들 가운데 있는 영광"이 되지 않으셨다.
2. 그것은 "황폐해질 것이다."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그것은 e;rhmoj ─즉 황야에 버려졌다.
(1) 그 성전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깨달아 안 모든 사람들 앞에서 내버리셨을 때 즉시 음침하고 우울한 장소가 되고 말았다. 그리스도께서 떠나시면 잘 꾸며지거나 풍성한 장소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비록 가장 주요한 집회 장소인 성전이라고 할지라도 황야가 되고마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은 곳에 무슨 위로가 있을 수 있겠는가? 많은 만족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특별한 영적 임재가 물러가 버린다면 그 영혼이나 그 장소는 "어두움 그 자체처럼 황야, 즉 어두움의 땅이 되고 말"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거절하거나 그를 내쫓는 데서 비롯된다.
(2) 성전은 머지 않아 파괴되고 파멸되어 "돌 하나도 돌 위에 놓이지 않게 되었다." 예루살렘은 이제 그 원수들의 몫이 되어 "무더기를 이루며, 견고한 성읍이 황무케 되며"(사 25:2), "솟은 성을 헐어 땅에 엎으게 될"(사 26:5) 것이다. 거룩하고 아름다운 집인 성전은 황폐하게 되었다. 하나님께 나가실 때 모든 원수들은 깨어지고 만다.
마지막으로,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그들의 성전에 대해 하신 마지막 작별 인사가 있다.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1. 이것은 그가 그들에게서 떠날 것을 의미한다. "그가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시기 위하여 세상을 떠나시고" 세상에 더 이상 있지 않으실 시간이 가까이 임박하였다. "부활하신 후 그는 몇 사람의 선택된 증인들에게만 나타내셨으며" 또한 그들은 그를 더 이상 오래 보지 못하였으며 곧 그는 보이지 못하는 세상에로 옮겨가셨으며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 거기에 계실 것이다. 그때에는 그가 처음 오실 때 환영하던 외침, 곧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는 칭송이 또다시 반복되어 외쳐질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구름들 속에 오셔서 모든 눈이 그를 보게 될"(계 1:7)때까지 또다시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때가 올 때 그를 부인하고 창으로 찌른 자들까지도 그를 사모하는 자들 가운데서 그가 오심을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 모든 무릎이 그 앞에 꿇게 될 것이며, 바알에게 무릎을 꿇었던 자들까지도 그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또한 그 때에는 악행하는 자들까지도 "주여, 주여"라고 부르짖을 것이며, 그의 진노가 불붙여질 때 그들은 "그에게 신뢰를 두는 자는 다 복 되도다"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 날에 "찬송하리로다, 오시는 이여"라고 말하는 자들의 몫에 참예할 수 있을 것인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예배하며 참으로 환영하는 자들과 더불어 함께 있도록 하자.
2. 이것은 그들의 지속적인 소경됨과 완고함을 나타낸다.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즉 나를 메시야로 보지 못하리라(왜냐하면 그들은 십자가에 매달린 그를 달리 보았기 때문이다). 너희는 나에 관한 진리의 빛을 보지 못하리라, 또는 너희가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말할 때까지 너희의 평화에 속한 일들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그들을 깨닫게 하기 전까지는 결코 깨닫지 못하게 될 것이며, 그때가 되어 비로소 그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너무도 늦은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오직 두려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릴 것뿐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고의적인 소경됨은 종종 사법적인 소경됨으로 심판을 받게 된다. 만일 그들이 보지 "않으려" 한다면,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 말씀으로 그는 그의 공적인 설교를 결론짓고 있다. "선지자 요나의 표적"이었던 "그의 부활 후에" 그들은 "인자의 표적을 보게"(마 24:30) 되기까지는 그들에게 주어진 그 밖의 표적을 볼 수 없었다.
(2) "주께서 수많은 성도와 함께 오실 때"에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이 메시야임을 깨닫게 하실 것이며, 거만한 원수들에게 이 사실을 인정하도록 강요하실 것이며, 또한 "그들은 그에게 거짓말쟁이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지금 그의 부르심을 듣고 오려고 하지 않은 자들은 그때에 저주를 받는 곳으로 떠나가도록 강요함을 받게 될 것이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어린아이들이 그리스도에게 "호산나"라고 부르는 데 대해 불쾌하게 여겼다. 그러나 거만한 박해자들은 그들이 지금 짓밟은 가장 비천하고 초라한 자의 상태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지금 성도들의 호산나를 비방하고 조롱하는 자들은 머지 않아 다른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조롱하는 자들은 머지 않아 다른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지금의 마음보다는 더 나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이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신앙에로 회심되는 것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때에 그들은 그를 보고 인정하게 될 것이며, 그리고 "찬송하리로다. 오시는 이여"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현현과 죄인들의 각성에 대해 더 자세히 볼 수 있는 것은 마지막 날의 영광으로 보류되어 있는 것처럼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