豊臣秀吉을 암살한 東萊 청년 양부하(梁敷河) (Chosun Korean youngman has asassined Toyotomi Hideyoshi )|역사자유게시출처 :잃어버린 역사,보이는 흔적 원문보기▶ 글쓴이 : 心濟
이 삼절사가 있는 부산 해운대구 반송동은 남원양씨南原梁氏 집성촌인데 조선시대 동래향임과 좌수들 중에 남원양씨가 많았으니, 옛날 남원양씨는 부산의 대표적 양반씨족이었다.부산의 남원양씨가 배출한 대표적 인물이 이 삼절사에 모셔져 있으니 양지 梁誌, 양조한梁朝漢, 양통한梁通漢 세 분이다.
그런데, 이 부산의 남원양씨중 숨은 큰 인물이 있으니 양부하梁敷河(1580~1675)이다. 양부하는 삼절사에 모셔진 양조한의 손자이다.양부하梁敷河는 임진왜란때 동래부사 송상현과 함께 동래성에서 순절한 양조한(梁朝漢 1530∼1592 동래향교 훈도로서 동래향교에 모셔진 성현들의위패를 동래성내 정원루에 옮긴 후 순절. 호조정랑에 증직)의 손자이다.
당시 양조한은 아들 양홍(梁鴻 1555~1592)과 함께 위패를 옮겼고, 이 위패를지키다가 왜병이 성내에 들자 자결 순절했다. 양부하梁敷河는 당시 12살이었는데, 숨진 할아버지의 도포 속에 숨어 있다가왜병에게 발각되어 포로가 되었다.
당시 양부하의 집은 가마실=釜谷(지금의 부곡동)에 있었는데 양조한의 처는 부자가 숨지자 손자 양태수(양부하의 동생)만을 데리고 동래향교 교수 노개방의 고향인 밀양 무안면으로 피난을 갔다. 난리중에 양부하梁敷河의 어머니는 실종되었는데 그 행방이나 성씨까지 실전된 상태이다(증언자 양갑석=양부하梁敷河의 11대손) 양부하梁敷河는 일본에 끌려갔다가 27년만인 1619년(기미년 )에 39세의 장년으로 돌아온다.
그가 돌아왔을 때 양조한의 부인이자 양부하梁敷河의 조모는 그의 손자임을 알아보지 못 했다. 조모는 처음에 "내 손자가 아니다."라며 부인했다는 얘기가 전한다 (증언한 분은 양구석 전 남원양씨 부산종친회장) 그는 이후 96세에 이르도록 장수하는데, 그는 평생 비밀을 지키다가 죽기 직전인
95세에 이를 밝혔는데, 풍신수길의 독살에 관계한 것이었다.
그의 증언은 조선중기의 학자 임상원(任相元 1638~1697 형조판서 역임)의 문집 염헌집恬軒集에 전해온다. 이후 연려실기술과 성호사설, 그리고 일본인 아오나기(靑柳綱太郞)가 쓴 풍태합조선역豊太閤朝鮮役에도 기록되어 있다.
양부하梁敷河는 일본에 강화사신으로 온 명나라 사람 심유경과 모의해 왜적의 수괴 풍신수길을 독살하는데 그 내용은 이하와 같다. 일찍이 동래 사람 양조한梁朝漢과 통한通漢이 동래부사 송상현과 함께 싸우다가 죽었는데 양조한의 손자 부하敷河는 그때 나이12세였다.
12살의 양부하梁敷河는 사로잡혀 대마도로 실려 가자 배에 목창木槍을 세우고 그 끝에 쓰기를,“나는 조선 양반의 자제지만 관백에게 헌신하겠다.” 였다.비록 어렸지만 그는 이미 조부 양조한과 아버지 양홍, 동래부민의 전몰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고 있었다.
대마도주 종의지는 처음에는 의심하다가,여러 섬을 거쳐 풍신수길이 있는 쿄토 후시미성伏見城에 양부하梁敷河를 보냈다.풍신수길이 양부하梁敷河를 보고는, “조선 아이도 일본 아이와 같구나.” 하니 양부하는 눈물을 비 오듯 흘리었다.
(원문에 鮮兒與日本兒同也 敷河垂頭流涕)수길은 통역하는 왜인에게 명령하기를 “네가 이 아이의 스승이 되어 일본 말을 가르쳐라. 통달하지 못하면 너를 목벨 것이다.” 하니, 통역관이 두려워하여 촛불을 밝히고 밤 새워 양부하를 가르치면서, “네가 만약 힘쓰지 않으면 나와 네가 함께 죽는다.” 하였다. 이튿날 수길이 양부하梁敷河를 불렀더니 양부하가 잘 대답하므로 수길은 크게 기뻐하였다.
석달 동안 배워서 일본 말을 다 알자, 수길은 그를 사랑하여항상 좌우에 가까이 있게 하였다.
(원문은 秀吉知敷河非賤人。而容貌鮮令。狎而愛之。常置左右。恩意甚厚)
수길은 3층 병풍을 뒤에 치고 높이가 한 자를 넘는 방석에 머리를 틀어 뭉치고, 다리도 뻗고 앉았는데, 왼편에는 포砲와 검劍을 두고 오른편에는 활과 화살을 두었으며, 머리 위에 창 따위를 걸어 두었다. 그때 임진왜란이 한창인데도 수길은 할 일이 없었다.
곁에 근신近臣 다섯이 있어서 한가할 때면 옛 일을 이야기하고 손뼉을 치면서 즐거워하였다.
수길에게 다섯 명의 계집이 있었으나 자식이 없다가 군사를 일으키던 해에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이름이 수뢰秀賴였다.
강항이 지은 간양록看羊錄에는 “수길의 근신이 수길의 계집과 간통하여 낳았다”고 하였다. 병신년(1596년) 가을에 양부하梁敷河는 조선사신과 중국 사신이 왔다는 말을듣고 수길에게 청하여 만나 보았는데, 중국 사신이 심유경沈維敬이었다.
양부하는 이후 심유경과 친해져서 내왕하면서 수길을 죽이는 모의에 가담하였다. 당시 왜인들이 심유경을 객관에 가두고 군사를 시켜 매우 엄중히 지키고 있었는데 어느 날 심유경이 크게 곡을 했다.(이는 양부하가 그렇게 시킨 것이다)
양부하梁敷河가 풍신수길에게 가서 '나으리. 중국사람이 곡을 합니다.'하고알렸다. 의아히 여긴 수길이 심유경을 만나보기를 원하니 양부하가 음실(蔭室=비밀통로)을 만들어 객관에서 궁궐로 몰래 오게 하여, 유경과 수길을 만나게 했다. 유경은 좌석에 앉자마자 환약丸藥 한 개를 먹었다. 수길과 두 번째 만났을 때에도 역시 약을 먹으므로 수길이 이상히 여겨 물으니 심유경은 “만리 바다를
건너오느라고 습기에 상해서 병이 났으므로 항상 이 약을 먹으니 기운이넘치고 몸이 가뿐합니다" 하였다.
수길이 “거짓이 아니오?” 물으니 심유경이 “감히 거짓말을 어찌 하겠소?” 하였다. 수길이 “나도 섬에서 돌아와 기운이 줄어든 듯 하니 하나 주시오.”하자, 유경이 “좋지요” 하고 곧 주머니 속에서 찾아 주었다. 수길이 양부하를 시켜 가져다가 손바닥에 놓고 자세히 보니 환약에 署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원문은 秀吉令敷河取來。置諸掌中。熟玩之。丸有署字)
수길은, “글자가 어찌 이렇게 작은가. 일본에서 큰 글자를 잘 쓰는데 그 만도 못하다.” 했다. 의심이 많은 풍신수길은 품속에서 이쑤시개(楊子)를 꺼내어 그 약을 반으로 갈라 유경에게 주면서, “함께 맛보고 싶소.” 하였다. 유경이 받아서 꿀꺽 삼키고, 한참 뒤에 목을 움츠리고 팔을 펴서 몸이 편안해지는 듯한 형상을 보이니 수길이 그제서야 입에 넣고 물을 찾아 마셨다.
이튿날 아침에도 심유경을 만나서 환약 한 개를 얻어 처음처럼 나누어 먹었는데, 그 약은 매우 독해 사람의 몸을 몰래 약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유경은 객관에 돌아가서 다른 해독약을 먹어서 그 독기를 아래로 내리게 하였다.(원문은 華使歸館。必飮他藥下之。再服又下之)
당시 양부하梁敷河는 수길의 독살에 깊이 가담해 있었고, 이 독살과정을 아는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명나라 사신 심유경은 곧 조선으로 돌아갔고 풍신수길이 죽는 과정을 후시미성伏見城에서 목격한 인물은 양부하梁敷河뿐이었다.풍신수길은 이로부터 사지에 윤기가 없어지고, 시간이 갈수록 점점 몸이 말라서 의원에게 보였으나 효험이 없고, 침을 놓아도 피가 나오지 않았다.
수길이 괴이하게 여기면서, “살아 있는 사람이 어찌 진액이 없을 수 있는가. 내뜸을 뜨리라.” 하고 내실에 들어가서 첩들에게 쑥을 붙이게 하였다. 어느 날 수길은 갑자기 모로 누워 웃으면서, “내가 일어나지 못할 것 같다." 말하였다.
얼마뒤 풍신수길은 죽었다. 그가 명나라 사신 심유경을 만나 독약을 먹은 것이 1598년 5월이었고, 죽은것이 7월이다. 두달 만에 급사한 것이니 이는 독살된 것임이 명약관화하다.비상같은 비소 종류를 독으로 썼던 것이다.수길이 내실에서 거처 하게 된 뒤부터 양부하가 직접 모시지 못하였으므로, 수길의 내실체재 이후 과정은 양부하가 문지기에서 듣고 기록하였다.(원문은 自秀吉處內。敷河不得侍。此則聞諸其人者也)
수길이 죽은 뒤에 양부하梁敷河는 일본 서부의 대명 모리휘원毛利輝元의 사람이 된다. 1600년의 유명한 세키가하라關ヶ原 전투에서 모리씨가 덕천씨에게 패한 뒤 그 관할지가 축소되면서 번세蕃勢가 어려워졌다.마침내 양부하梁敷河는 모리씨에게 귀국을 간청하고 모리휘원은 거느리던 조선인들을 고국으로 돌아가게 허락했다.
(원문은 敷河間說輝元。請得西歸。輝元曰。吾壤削食少。不得以多養士也。許之)
모리씨의 귀국문서 노첩路帖을 받은 는 양부하는 주변의 귀국코저 하는 조선인 82명을 모아 대마도를 거쳐 부산 감만포로 돌아왔다. (이 귀국에 대해 노포동 묘비는 100명이라고 했는데 숫자가 틀리고, 귀국 포구가 감만포로 기록한 것은 일치한다)
염헌집恬軒集의 양부하전梁敷河傳에는 “양부하梁敷河의 나이 39세 되던 기미년에 돌아왔고, 신사년에는 이미 돌아온지 57년이 흘러 96세이다" 했다.(원문은 時敷河三十九歲。萬曆己未也 。食吾粟者 五十有七年)또 "그의 말중 지명은 왜어로 구술해, 해독할수 없어 강항의 간양록을 참조했다"고 했다. (원문은 名地名人。竝用倭語。不得譯而文。以看羊錄)
부산 동래출신의 소년 양부하梁敷河는 명나라인 심유경과 함께 풍신수길을 암살하므로 조부 양조한과 아비 양홍의 전몰, 실종된 모친에 대한 복수를 한것이다. 수길이 죽으므로 임진왜란도 끝난 것이다.이런 쾌거가 당시에 밝혀지지 못한 것은 심유경이 풍신수길보다 먼저 죽은 때문이다. (그는 강화 실패와 독살살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귀국 즉시 처형됐다.
그가 죽을 때 독살공작에 대해 진술했지만 풍신수길이 아직 죽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명사明史에서 간신이 아닌 충신으로 기록되고 있다) 고국으로 돌아온 양부하梁敷河는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 다시 열린 평화의 시대에 왜인들이 천하남아로 모시는 풍신수길의 암살을 밝히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보았다. 57년이 흐른 뒤에 죽을 즈음에 밝힌 것이다.
지금도 많은 한국관광객들이 일본 대판성(풍신수길의 업적 전시)을 찾아 관광하는데, 전시장 끝 부분에 필히 있어야 할, 풍신수길의 조선청년 양부하梁敷河과 명사 심유경에 의한 암살은 누락되어 있다.과거 일본사학자들은 풍신수길의 암살부분을 필사적으로 숨겼는데, 이제는 밝혀야 한다.
부산시는 이 위대한 조선청년 양부하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워야 한다. 그의 묘가 있는 부산시 금정구 노포동 도로변에 동상이라도 세웠으면 한다. 사실 남원양씨 문중도 양부하의 일본내애서의 행적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음이 안타깝다. 양부하梁敷河!
그는 이등박문을 암살한 쾌거를 이룬 안중근과 다를 바 무엇인가?(이런 풍신수길의 암살관련 전말은 일본 경도의 명가 아도가阿刀家에 비전 秘傳하는 문서 '비장인非藏人'에도 일부 기록되어
있음)
新동국여지승람 편 (부산 K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