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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간의 우리 교회 전교우 수련회는 은혜 중에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우리교회 귀염둥이 예준이와 수호를 비롯하여 총 33명의 교우들이 참여하였고, 특별한 사정이 있으신 몇 분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교우들이 폐회예배까지 참여하여, 2박 3일간 일정 속에 큰 쉼을 얻고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저를 포함하여 몇 분의 교우가 이번 주간에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래서 의사 선생님의 자문을 받고 임원 몇분의 의견을 들어서 오늘은 이렇게 갑자기 온라인 비대면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물으시다”라는 주제로 진행된 이번 수련회에서는 먼저,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하는 하나님의 질문을 상고하면서, 우리들 각자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지금 어디 쯤에 있는지, 나무 그늘에 숨어있지는 않은지, 하나님 앞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나와 있지는 않은지, 우리 자신이 서있는 영적인 위치를 점검해 보았습니다. 둘째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하는 예수님의 질문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 물으신 질문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이 고백 위에 예수님께서는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 공동체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에 합당한 공동체인지,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선교와 교제 등 모든 사역들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그 고백에 합당하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상고해 보았습니다. 첫째 날 아침경건회에서는 “여자여 그들은 어디에 있느냐?”라는 질문을 상고하였습니다. 간음 현장에서 끌려온 여인이지만 예수님은 그녀를 정죄하는 무리들에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고, 무리가 떠나가자 예수님이 여인에게 물으신 질문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으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에 대하여 용서와 관용을 베풀려 하지 않습니다. 또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불쌍한 우리들, 죄 많고 실수 많고 무능한 우리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두 번째 경건회에선 “네가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소경 바대매오에게 물으신 질문입니다. 바디매오는 가장 소중한 것을 구했습니다. 그것은 ‘보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서 믿음은 때때로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볼 줄 알고, 이웃들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볼 줄 아는 것, 나의 삶과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볼 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진정 구해야 할 것은 보는 것입니다. 둘째날 저녁 시간은 ‘늘푸른교회의 새로운 소명’이라는 주제로 두 분의 집사님들의 발제와 교우들의 자유로운 토론으로 진행되었습니다. 40주년을 맞았고, 예정되어 있는 교회의 변화를 기대하면서 우리의 믿음과 소명을 새롭게 확인하는 자리였습니다. 마지막으로 폐회예배에서는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라고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마른 뼈만 가득한 골짜기에서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물으신 질문입니다. 에스겔은 대답했습니다. “주님이 아십니다”. 그것은 주님이 아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님의 뜻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절망의 골짜기지만, 그 뼈들이 살아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다만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믿고, 주님의 말씀과 성령을 사모하며 다시 소명을 붙들고 일어서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또 하나의 하나님의 질문에 대하여 상고하며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에 있느냐?”라고 하는, 엘리야에게 물으셨던 질문입니다.
엘리야란 이름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예언자로 꼽히는 사람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왕 아합은 시돈의 공주 이세벨을 왕비로 맞아들였습니다. 흔히 고대 국가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정략적인 국제결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세벨은 궁중에서 자기 나라 종교인 바알을 숭배하며 제단을 쌓았습니다. 왕궁에서부터 이렇게 바알을 숭배하니, 바알 숭배는 이스라엘 왕국 전역에서 더욱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아합왕을 찾아가, 앞으로 팔레스틴에 수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그 예언대로 이스라엘에는 3년이 지나도록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농사와 목축으로 살아가던 시절인데 3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다는 것은 국가적으로 너무나 큰 재난이었습니다.
엘리야의 일생에 가장 극적인 사건은 갈멜산 꼭대기에서 엘리야 혼자서, 바알의 선지자 4백50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4백명을 모아놓고 과연 참된 신이 누구인지, 대결을 벌인 사건입니다. 바알의 사제들과 엘리야가 각각 송아지 한 마리를 각을 떠서 제단에 올려놓고 각자 자신이 믿는 신에게 부르짖어 어느 신이 불로 응답하는가 보자는 것입니다. 불로 응답하는 그 신이 진정한 신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바알의 사제들이 제단에 제물을 잡아 올려놓고는 자신들의 제사 방식대로 하루 종일 춤을 추며 자기 몸을 자해하며 부르짖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엘리야가 제단에 물을 붓고 제물을 올려놓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 제물을 살라버렸습니다. 하나님이 그 제물을 열납해 주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진정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깨달은 백성들은, 엘리야의 명령에 따라서 바알의 선지자들을 기손강에서 모조리 처단하였습니다. 그 날 이스라엘 땅에는 삼 년 만에 큰비가 쏟아졌습니다.
이렇게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들과 대결을 통하여 통쾌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참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백성들 앞에서 확증하였고, 바알의 사제들을 처단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대결솨 승리 이후로도 이스라엘 사회에 별다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합의 왕비 이세벨은 엘리야를 죽이려 하였습니다. 백성들도 전혀 그를 보호할 수 없었습니다. 절망과 두려움에 빠진 엘리야는 이세벨의 손길이 닫지 않는 곳을 찾아서 일어나 남쪽으로 달려갔습니다.
마침내 그는 브엘세바에 도착하였습니다. 브엘세바는 팔레스틴의 최남단 성읍입니다. 그 남쪽 지역은 네겝 사막으로서 강우량도 적고 기후와 환경과 모든 여건이 당시로서는 사람이 살아갈 수 없는 지역이었습니다. 브엘세바에 사환을 남겨두고 엘리야는 다시 광야로 하룻길을 더 걸어서 내려갔습니다. 그곳에 있는 로뎀나무 아래에서 엘리야는 완전히 탈진하여 쓰러진 채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우리 인간은 너무나 나약한 존재입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에너지를 소진하면 쓰러지게 됩니다. 낙심하거나 혹은 두려움에 휩싸이고, 분노와 좌절감에 빠지게 되면 역시 탈진하게 됩니다.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아합왕과 이세벨의 권력 앞에 홀로 일어나 여호와 유일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정면으로 대결을 벌였고, 수많은 기적을 베풀며 여호와만이 하나님이십을 선포했던 엘리야입니다. 그런 위대한 선지자였지만, 세상 사람들 모두가 바알을 섬기고 자기 홀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며 죽음의 공포 앞에 떨고 있는 자신의 현실이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것입니다.
로뎀이라고 하는 나무는 아라비아 사막이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관목으로 콩과에 속하는 식물입니다. 이 나무는 기후 풍토가 좋은 곳에서는 2~3m정도까지 제법 크게 자라지만, 잎은 퇴화해서 거의 없고 암록색의 줄기가 잎 역할을 하여 광합성을 한다고 합니다. 공동번역은 이 로뎀 나무를 ‘싸리나무 덤불’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로뎀 나무는 잎사귀 무성한 키 큰 나무가 아니라, 싸리나무 덤불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지만 광야에서 나그네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는 나무가 없었고, 그래서 싸리나무 덤불 로뎀 나무는 참으로 고마운 나무입니다. 하지만, 뜨거운 햇빛을 피하려고 이 싸리나무 덤불에 머리를 박고 누워있는 나그네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면, 더군다나 그가 40일을 걸어 광야를 건너가야 한다면, 그 모습이 처량하고 안타깝게만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광야의 로뎀 나무 아래에 찾아오셨습니다. 로뎀나무 아래 쓰러져 잠이 든 엘리야를, 하나님의 천사가 찾아와 어루만지며 ‘일어나서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가 일어나 보니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 병이 놓여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차려주신 은혜의 식탁이었습니다. 그것을 먹고 엘리야는 또다시 쓰러져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또 천사를 보내어 그를 어루만지시며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너에게는 가야 할 길이 있는데, 그렇게 지친 몸으로 어떻게 그 길을 갈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먹고 기운을 차리라는 것입니다. 엘리아가 일어나 먹고 마시고 기운을 차렸습니다. 엘리야는 다시 일어나 40일을 걸어 광야를 건너가, 마침내 하나님의 산 호렙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엘리야가 지쳐 쓰러져 누워있던 로뎀나무 그늘은, 비록 인간의 눈으로는 초라하고 서글프지만, 바로 그곳이 하나님이 찾아오시고 어루만지시고 위로와 회복의 은총을 주시는 은혜의 자리였습니다.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러 엘리야는 하나님을 새롭게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엘리야가 그곳 호렙산의 한 동굴에 들어가 누웠습니다. 그때 여호와 하나님이 찾아와 엘리야에게 말을 걸어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영어 번역은 What are you doing here입니다. 엘리야야, 네가 왜 여기 있느냐? 네가 있을 자리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너에게는 아직 해야할 사명이 있지 안않느냐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이제까지 열정을 가지고 만군의 하나님만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과 맺은 언약을 버리고, 주님의 제단을 헐어버리고, 예언자들을 칼로 쳐서 죽였고, 이제 나만 홀로 남아 있는데, 그들은 내 목숨마저도 없애려고 찾고 있습니다. 지금 나는 지쳤고, 더 이상 예언자로서 사명을 다할 수가 없어 광야를 건너 여기 호렙산까지 겨우 도망쳐 나왔다’는 것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엘리야는 자신의 외로움과 두려움, 그리고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는 인생에 대한 체념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그리고 여호와께서 엘리야 앞을 지나가시는데 먼저 크고 강한 바람이 주님 앞에서 산을 쪼개고, 바위를 부수었으나, 그 바람 속에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 바람이 지나가고 난 뒤에 땅이 흔들리며 지진이 일었지만, 그 지진 속에도 주님께서는 계시지 않았습니다. 지진이 지나가고 난 뒤에 불이 났지만, 그 불 속에도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 불이 난 뒤에, 세미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엘리야가 그 세미한 소리를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서 굴 어귀에 섰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다시 물으셨습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물으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때때로 우리가 인생길을 걸으며 홀로 사명을 다하기에 지쳐있을 때, 세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움츠러들고 사명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여 그 자리를 피하고 싶을 때, 하나님은 찾아와 물으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에 있느냐”
하나님은 이 질문을 통하여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를 깨닫게 해 주시십니다. 로뎀 나무 아래 지쳐 쓰러져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와 위로하시고 회복과 치유의 은총을 주셔서, 우리는 호렙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광야길을 40일을 걸어온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찾아와 새로운 소명과 용기를 주십니다. 네가 있어야 할 그 자리로 가야 한다고, 가서 너의 소명을 다시 감당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세미하였습니다. ‘세미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데마마 다카’입니다. ‘고요하다’는 의미의 ‘다맘’과 ‘아주 섬세하다’는 의미의 ‘다크’가 합해진 말입니다. 고요하고 섬세한 음성, 집중해야만 들을 수 있는 소리입니다. 사람들은 크고 강한 바람 속에 주님이 계실 것이라 기대합니다. 산을 쪼개고, 바위를 부수는 그런 바람 가운데서 주님을 찾으려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바람 속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온통 땅이 흔들리고 모든 삶의 터전이 무너지는 지진과 같은 현상 속에서 또한 하나님을 찾습니다. 아니면, 무서운 산불 같은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무서운 자연의 힘에서 주님을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주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바람과 지진과 불이 지나가고 난 뒤, 세미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사람들은 강한 바람과 지진, 그리고 불 속에서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눈에 보이는 그 현상 뒤에서 들려오는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 소리는 너무나 세미해서 쉽게 들을 수 없는 소리입니다. 번잡한 세상 가운데, 저마다 볼륨을 높이고 소리치고 자기를 주장하는 세상에서 듣기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지나고 영혼의 고요한 상태에서 귀를 기울여야 들을 수 있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의 물으심에 대한 엘리야는 여전히 두려움과 외로움과 절망스런 심정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엘리야를 위로하시며 그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15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길을 돌이키라” 단순히, 왔던 경로를 따라서 다시 돌아가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 돌이킴은 사명을 향한 돌이킴입니다. 돌이키는 그 길이 쉽지는 않습니다. 다시 40일 길을 걸어 광야를 건너가야 합니다. 광야를 건너서 가야 할 땅은 새로운 사명의 자리입니다. 실망과 좌절, 상실감을 안고 이 광야를 건너왔지만. 이제 돌이키는 그 길은 새로운 용기와 새로운 소명의 길인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 세미한 음성을 듣고 그는 아직도 남아있는 자신의 소명을 붙들고 다시 역사의 현장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사엘이란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으로 삼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았습니다. 예후는 우상 숭배로 악명이 높은 아합과 이세벨을 처형하고 스스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데, 이 예후의 혁명 배후에는 바로 엘리야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엘리사를 택하여 자신의 사역을 물려주고, 하나님의 사역을 다 마친 후에 마침내 불 말이 끄는 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누구라도 사람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에너지를 소진하면 지치고 쓰러지게 됩니다. 상실감이나 위기감, 좌절과 분노, 두려움, 외로움 등, 우리를 낙심시키고 우울하게 하는 요인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광야의 로뎀 나무 그늘에 누워있는 엘리야와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이 자리에 찾아오십니다. 우리를 어루만져 주시고 붙들어 주시며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산 호렙까지 갈 수 있도록 새 힘을 주십니다.
호렙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에 있느냐?” 그리고 우리에게 새로운 소명의 자리로 돌이켜 광야를 건너가게 하십니다. 호렙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곳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새로운 소명을 받습니다. 내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전히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나에게 소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우리는 나 자신이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총 속에 살아가는 존재로서 내가 감당해야 할 소명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영적으로 기진하고 지쳐있습니까? 우리의 삶을 회복시켜줄 생수와 떡을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볼 수 없고 만날 수 없어 답답하십니까?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호렙산에서 엘리야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고, 그의 새로운 사명을 확인하였습니다. 소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살아갈 진정한 의미가 있고, 존재할 가치가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에 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