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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 전에 지어진 ㅇㅇ아파트는 철거를 앞두고 있었다. 세월 앞에는 장사가 없다더니 하늘을 치솟은 풍채는 조그만 진동에도 막 식탁에 놓은 푸딩처럼 흔들거리고 피부병이 난 듯 콘크리트 껍질이 벗겨진 자리는 흉한 상처가 남았다. 철거예정을 받은 후부터 페인트칠하지 않아 항상 은밀한 속살을 드러내고 있지만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것은 하늘을 바라보며 곰곰이 추억을 떠올렸다. 45년 동안, 사람들을 포용하는 인생은 재미가 있었다. 올해 32가구를 품었던 몸속에 32가지 이야기가 살아있다. 45년의 세월 동안 모은 백 개는 넘는 이야기가 먼지 냄새와 함께 쌓여 나의 키를 훌쩍 넘었다. 인간군상 속에 피어오르는 기쁨, 분노, 사랑, 즐거움의 드라마의 미학에 심취해 지체 없이 흐르는 시간에 무감각해 있었더니 죽음이 인사하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하지만 두려움은 없었다. 나에겐 백 개가 넘는 이야기가 있으니까.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떠나갈 사람들을 생각하며 눈물짓고 있었는데 다른 날과는 달리 떠나가는 사람 대신 들어오는 사람이 더 많았다. 그것도 모두 처음 보는 사람이다. 이상하다. 곧 철거될 내 몸에 입주하는 건가? 아니면 폭약을 설치하려고? 폭약은 너무 아픈데……. 그것도 아닌가 보다. 나와 함께 사람들을 지켜온 경비 할아버지의 입에서 내 수명이 연장됐다는 소리가 나왔다. 내가 잠을 잔 사이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 같다.
ㅇㅇ아파트는 8층 4호까지 있는 복도식이다. 정문에 들어오기 전에 먼저 아파트 건물 옆에 붙은 경비실 경비원의 눈도장을 찍고 정문 CCTV의 눈도장을 찍어야 한다. 건물 안에 진입하면 정문의 왼쪽에 CCTV가 든 엘리베이터가 오른쪽에는 1호부터 4호까지 집들이 나열되어있고 긴 복도를 걸어 집들을 지나가면 끝에 8층까지 오르는 계단이 있다. 계단으로 가기 전에는 방화문을 넘어야 한다. 물론 계단에서 복도로 다시 돌아가려면 또 방화문을 넘어야 한다. 하지만 방화문은 8층까지 모두 항상 열려있는 편이니 이번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는 누구도 크게 신경 써본 적이 없었다. 지하실은 경비원이 잠가놔서 들어올 수 없고 옥상도 또한 잠가놔서 들어올 수가 없다. 각 집에는 창문이 3개가 있다. 집 앞면에는 우유투입구가 없는 현관문 바로 옆에 하나 (방범을 위해 모든 집에 쇠창살이 달아져 있다.), 집 뒷면에는 부엌에 크게 하나 그리고 창고에 하나가 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모두 잠겨있고 살고 있는 집은 바깥 날씨가 추우므로 거의 닫아놓는다. 5층부터 8층까지는 의무적으로 창고 쪽 창문에 완강기가 설치되어있다. 건물 내의 모든 문, 창문은 방음이 완벽하다. 건물 주변 바닥은 보도블록이나 건물 뒤에는 예전에 정원이었을 흙더미가 자리를 차지한다. 지금은 꽃 대신에 떠나간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로 뒤덮여있다. 나이는 많이 먹었어도 방범과 안전만큼은 젊은 건물 못지않은 아파트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그것도 미스터리한 일이 벌어진 살인사건이…….
건물 1채밖에 없는 아파트 부지 내에 경찰차와 사람들로 들끓었다. 부지 밖에는 구경꾼들이 둘러싸고 있다. 이 추운 날씨에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켜 내다니 인간의 호기심이란 무서운 것이다.
“저 사람들은 허수아비냐? 얼어 죽고 싶어서 난리가 났군.”
단정하게 경찰복 혹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 사이에 알로하 셔츠 한 장, 무릎까지 드러난 반바지를 입은 남자가 구경꾼을 바라보며 한소리를 했다.
“의형사님이야말로 죽고 싶어서 그런 복장을 하신 겁니까?”
후배 형사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의형사를 바라봤다.
“난 추위를 타지 않으니까. 신경 꺼.”
“추위가 문제가 아니라 복장을 좀 제대로 입으세요. 상관에게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요?”
“자르라고 해. 나 같은 유능한 형사를 잃고 경찰이 제대로 돌아가긴 하겠어?”
후배형사는 “잘 아시네요.” 라고 말하려다 그만뒀다. 저런 인간이란 말 섞으면 힘만 빠질 뿐이다. 최대한 저 인간의 눈에 띄지 않게 신경 써야겠다고 다짐하며 자리를 벗어났다.
“그럼 이제 용의자들을 만나러 가볼까?”
용의자들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기 위해 의형사는 부지를 돌아다니며 용의자 담당형사를 찾던 중에 그의 눈에 한 소녀가 보였다. 정문에 서서 고개를 든 소녀의 햇살같이 반짝이는 머릿결을 통과한 공기에서 달콤한 냄새가 풍겨왔다. 귀여운 콧날아래 입술은 주변의 모든 색깔을 흡수하는 매력적인 분홍색을 띠었다. 한 손으로 충분히 가릴 수 있는 작은 어깨 아래, 아직 성장이 덜한 가슴이 솟았고 푸른색 원피스는 아저씨들의 먼지와 얼룩이 덕지덕지 붙은 작업복 사이에서 자신의 색을 더욱 드러냈다. 원피스 치마 아래 살짝 드러난 발목은 장인이 세공한 유리물병을 닮았다. 사건 현장을 수월하게 걷기 위해 그녀는 아름다움과는 눈에 먼 운동화를 신고 있었으나 아름답지 않기에 오히려 투박한 빛을 발한다.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소녀는 고개를 돌려 바다를 안은 눈망울로 의형사를 바라보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의형사는 미소에 답하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리 꺼져. 꼬마야.”
의형사의 태도는 냉랭했다. 그는 강력계에서 입에 철조망을 치고 가슴에 빙산을 띄운 냉혈한으로 유명하다. 온갖 흉악한 인간을 다루는 형사라는 직업에 우수했지만, 사회생활에 많은 문제를 일으켜 급기야 일주일 전에 집 나간 아내로부터 빠른 배송으로 이혼서류를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지경에 이르러서도 얼어붙은 성격은 녹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우 참, 형사님. 저 꼬마가 아니에요. 고등학교 다니고 있어요.”
설화라는 이름의 소녀는 그에게서 영어 선생님의 기운을 느꼈다. 저런 유형의 인간 대처법은 무조건 스마일이다. 영어 선생님의 심기를 건들었다가 작살난 경험이 있는 설화는 폭풍미소로 냉혈한을 상대했다. 하지만 효과는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이 애가 들어올 때 모두 뭐한 거야? 어서 끌어내.”
불쾌한 표정을 지은 의형사의 지시에 따라 장사 같은 체구의 두 남자가 서서히 설화의 곁에 다가왔다. 등장하자마자 퇴장당할 위기다. 설화는 두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 억울함이 묻어난 목소리로 흐느꼈다.
“사건이 일어났는데 탐정한테 그냥 나가라니. 새로 생긴 옷가게를 지나가는 것보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너무 하세요.”
“뭐? 탐정?”
그 말을 들은 두 남자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시선을 교환했다. 탐정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듯하다. 설화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지으며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맞아요. 제가 해결하지 못한 사건은 없습니다. 이번 사건을 저에게 맡겨주세요. 네?”
마지막 “네?”에서 애교를 섞었지만 의형사는 호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못 들었다. 어차피 들었어도 의형사에게 헛소리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는 수 없지. 정의를 수호해야 할 탐정으로서 치졸한 수법만은 쓰지 않으려 했거늘.
“빨리 내 눈앞에서 치우지 못해?”
설화를 쓰레기취급을 하며 의형사의 목소리가 우레처럼 울렸다. 두 남자에게 팔을 붙들려 끌려가면서 설화는 나직하게 한마디를 날렸다.
“알았어요. 돌아가는 김에 경찰청에 들러서 노반장님한테 불성실한 형사 한 명을 고발해야겠어요.”
“잠깐 멈춰.”
세 사람이 멈췄다. 이번에는 효과가 제대로 먹혀들었다.
“내가 뭐가 불성실하다는 거냐? 앙?”
의형사가 화를 내며 이빨을 드러냈다. 그의 반응에 설화는 씩 웃었다.
“ㅇㅇ식육식당에서 술 먹고 음주상태에서 수사하셨잖아요.”
의형사는 두 귀를 의심했다. 이 꼬마애가 어떻게 그걸 알아냈지? 얼굴에 당황한 기색에 역력했다. 북쪽에서 불어온 바람에 뼈가 시렸다.
“너 뭐야? 날 미행했냐?”
“미행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걸요? 형사님 오른쪽 손목에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수직으로 부풀어 오른 상처는 불판에 대서 생긴 거고 손에 묻은 얼룩을 상의에 문대는 습관 때문에 쌈장이나 된장 같은 장 종류를 셔츠 오른쪽 허리 부분에 묻히셨어요. 그러므로 형사님은 아침을 고깃집에서 드셨습니다. 그리고 형사님은 왼손잡이에요. 왼손으로 젓가락을 잡고 오른손으로 쌈을 잡았으니까요. 쓰지 않은 손이 장을 묻히고 불판에 댈 확률이 더 높죠. 더 나가볼까요? 형사님 입에서 아카시아향기가 나고 셔츠에 알로에 냄새가 납니다. 아카시아향기는 아카시아향 껌을 씹었기 때문이고 알로에 향기는 알로에향 섬유탈취제를 뿌렸기 때문이죠. 이것을 냄새를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형사님은 어떤 냄새를 없애려고 그런 걸까요? 고기 냄새? 제가 보기엔 형사님은 그렇게 깔끔한 성격은 아닙니다. 형사님은 입을 드러내 보였을 때 치주염이 보였어요. 이도 제대로 닦지 않은 사람이 입 냄새도 신경 쓰지 않는데 고기 냄새를 신경 쓸까요? 그렇다면 담배냄새? 형사님은 담배를 피우지 않아요. 이를 잘 닦지 않지만, 담배 피우는 사람만큼 이가 누렇진 않습니다. 또한, 호주머니를 뒤적거렸을 때 빈 라이터나 담뱃갑 쓰레기가 없었습니다. 담배 피우는 사람이라면 아카시아향 껌이 아닌 니코틴 껌을 씹었겠죠. 두 가지를 제외하면 한 가지가 남죠. 술 냄새. 형사가 음주상태로 수사하는 것은 엄연히 금지입니다. 그것을 숨기고 싶었겠죠. 형사님 왼손 손톱에 낀 땅콩껍질과 커피 땅콩 부스러기를 보아하니 땅콩과 커피 땅콩을 안주로 드셨군요? 방금 형사님이 고깃집을 가셨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범위를 더 좁혀 보겠습니다. 형사님 호주머니에 지갑, 열쇠 말고도 물에 젖은 손수건을 담은 비닐용지가 있었습니다. 손수건의 디자인을 보면 분홍색 배경에 귀여운 하트가 그려져 있습니다. 여성용 손수건이라는 거죠. 즉, 형사님 자신이 쓰시려고 산 게 아닙니다. 그리고 남에게 주려고 산 것도 아닙니다. 선물용을 물에 적셨으니까요.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받았다는 건데 형사님의 성격을 잘 아시는 분이라면 저런 디자인의 손수건을 주지 않았을 겁니다. 혹시 사랑하는 가족이 준다면 받지 않을까? 형사님 후배에게 물어보니 아침 일찍 현장에 오셨다고 하더군요. 아침부터 밖에서 수사하는데 밖에서 가족을 만날 가능성은 적죠. 집 안에서 받았다면 포장용기를 집에 버리고 왔을 겁니다. 손수건을 손에 넣은 지 얼마 안 됐으므로 포장용기를 가지고 있고 고깃집을 방금 갔다 왔으니 이런 추론이 가능하죠. 형사님이 다녀온 고깃집은 신장개업한 곳이다. 손수건은 신장개업 선물로 준 건데 제고가 없어서 여성용만 있었다. 형사님은 손목을 다치신 상태였으므로 찬물로 적신 손수건을 상처 부위에 감싸자는 생각으로 여성용을 집으신 겁니다. 현장까지 포장용기를 가져오신 이유는 물에 젖은 손수건을 그냥 호주머니에 넣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수사 중에 들렀으니 이 근방에 있는 신장개업한 고깃집이고 그곳은 ㅇㅇ고깃집 하나뿐입니다. 이상.”
말을 마치고 설화는 다시 뒤를 돌아보는데 의형사가 한걸음에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꼬마야, 우리 대화를 나눠보자.”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사이 현장조사가 끝나고 정문으로 감식반이 우르르 빠져나왔다. 그중 한 명이 의형사에게 검은색 하드커버의 조사보고서를 제출하고 같이 나온 일행을 따라나갔다. 그는 보고서를 슬쩍 넘겨보다가 현장사진에 얼굴을 찡그렸다. 그 사진은 고어영화에 나올 법한 참혹한 시신이 찍혀있었다. 이번 사건이 단순하지 않을 거란 조짐을 느끼며 저 여고생이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몰려왔다. 그녀는 고등학생이니 사건 현장이 잔인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겠지만 잔인함의 수위가 이 정도는 될지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을 보면 탐정놀이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일단은 현장에 데려가야 하니 설화에게 주의점을 일러주었다.
“꼬마야, 분명히 말했다. 현장을 훼손하지 말 것, 문제를 발생시키지 말 것, 경찰에게 폐를 끼치지 말 것.”
동물원에 처음 간 어린이 취급에 설화는 기분이 나쁜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고등학생이 그 정도도 못 지키겠어요? 저를 애 취급하지 마세요.”
사건에 끼워주라고 애걸복걸할 때는 언제고 입 딱 씻고 맞서는 설화를 보며 의형사는 속은 기분이 들었다. 여고생답게 연기력은 배우급이다. 기가 눌린 의형사는 반박을 하지 못하고 설화의 눈을 피했다. 현장에서는 자신이 지배자였는데 설화에게 자리를 빼앗긴 한심한 패자로 전락한 남자의 한숨 소리가 차가운 공기를 파고든다.
“이제 현장에 가볼까요? 고고!”
의형사와 대조적으로 설화는 놀이동산에 입장하는 기분이다. 이 사건에 잠들고 있을 미스터리를 예상하며 기대감에 펌프질을 한다. 그녀는 같은 나이의 여고생과는 동떨어진 독특한 취미를 가지고 있다. 아이돌 콘서트를 보러 가거나 친구들과 잡담을 하는 것보다 이런 놀이가 더 흥미가 있다. 얽히고설킨 주홍색 실을 풀어헤쳐 감춰진 진실을 뽑아낼 때 그녀는 쾌감을 느낀다. 이윽고 의형사와 설화는 정문 앞에 섰다. 바로 옆에는 경비실과 주민회의실이 세워져 있다.
“그날도 경비원이 저기서 감시하고 있었겠군요.”
설화가 경비실을 보며 말했다.
“맞아. 그리고 정문 위에는 이렇게 CCTV가 달려있으니 두 개의 감시를 넘어야 비로소 건물 안에 들어올 수 있지.”
두 사람은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설화는 정문을 넘은 순간, 세월과 함께 지층처럼 쌓인 먼지 때문에 기침했다. 아파트 앞면 복도 창문은 열 수 없어서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은 탓이다. 그나마 103호 앞에 인위적으로 깬 듯한 작디작은 창문 구멍이 있지만, 그 구멍만으로 1층 전부를 환기하기엔 도저히 무리였다. 아마도 다른 층도 일부러 깨트린 창문이 있을 것이라고 설화는 추측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엘리베이터는 정문 가까이에 있었다. 집의 것보다 구식이지만 겉으로 보기에 작동에 큰 무리는 없는 것 같다. 그들은 엘리베이터를 뒤로하고 계단을 향해 복도를 걸었다. 복도에는 걷는 중에 설화는 101호와 102호 앞에 멈춰 현관문을 열려고 했지만 모두 잠겨있었다. 의형사의 말로는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모두 잠가놨었다고 한다. 방화문을 넘어 계단에 도착했다. 두 사람의 머리 위에는 마주보는 거울에 나타나는 반복 상이 나타났다. 다만 거울과는 달리 그들의 상은 반복되지 않았다. 계단을 올라 404호에 이르렀다. 문 옆에는 자장면 그릇이 놓여있고 현관문에는 눈에 띄는 숫자가 쓰여 있었다.
‘804’
빨간색 스프레이로 뿌려서 숫자는 넓게 퍼져있고 범인의 대담함이 들어있다.
“804는 804호를 뜻하겠죠?”
“그래. 이 집은 피해자의 집으로 시체는 804호에서 발견되었어. 범인은 목격자가 시체를 빨리 찾기를 바랐다고 볼 수 있지. 이 숫자는 스프레이로 썼기 때문에 필적확인은 힘들다고 본다. 그리고 사용된 스프레이는 시중에 쉽게 구할 수 있었어.”
404호의 풍경은 거주자가 독신남자라는 정보를 알려주었다. 개인방 벽에 고객이름이 적힌 포스트잇이 깃털처럼 나무판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 보험과 경제에 관련된 책이 책장이 아닌 바닥에 마이산의 돌탑처럼 쌓여있지만, 돌탑보다 더 위태로워 보인다. 책상 위는 컵라면 및 인스턴트 쓰레기가 가득 올려있다. 그 위에 먹을 것에 신이 난 파리가 앉아 손을 비빈다. 거실에서 모든 물건이 서랍 밖에 있다. 뭔가를 쏟아서 생긴 얼룩이 바닥을 지배한다. 고물 TV 곁에는 작은 화분과 맥주 캔이 나란히 서서 이 무참한 광경을 말없이 지켜본다. 바닥에 누워 TV 보기 좋은 자리에 어제 나온 신문이 접혀 놓여있다. 부엌 식탁 위에는 먹지 않은 라면 봉지가 회사별로 쌓여있다. 피해자의 주식이 분명하다. 탐정은 국과수 요원으로 믿어질 만큼 꼼꼼하게 탐색을 했다. 그렇다고 홈즈처럼 돋보기를 들고 다니진 않는다. 대신 한 손엔 두유 팩이 들려있다. 탐정은 그것이 두뇌의 윤활유라고 주장한다. 그 사이 의형사는 보고서를 읽었다. 조사결과 피해자는 현관문 곁에서 공격을 당했고 화장실로 옮겨져 거기서 몸이 절단되었다고 한다. 분명 범인은 두 부류의 인간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아주 똑똑하거나 아주 미친 인간. 범인이 둘 중에 어느 부류에 속한 게 더 나으냐고 물어본다면 똑똑한 편을 고르겠다. 지능범은 자기 머리를 믿다가 결국 빈틈을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그들이 논리적인 생각에 따라 행동을 하는 한, 그들의 행동은 거의 예상이 가능하다. 반면에 정신병자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행동을 개시할지는 자신을 제외한 누구도 알 수 없다. 같은 동족의 정신병자끼리는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옛날에 본 스릴러 영화 중에 정신병자로 정신병자를 잡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제목이 기억이 안 난다. 다만 머릿속에 포스터가 흐릿하게 남아있다. 그들의 진정한 무서움은 인간이 저지를 수 없는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온다. 인간을 뛰어넘은 인간이 될 가능성의 공포.
“여기서 심한 일이 일어난 게 분명해요.”
어느새 설화가 의형사 곁에 다가와 향긋한 머리향을 풍겼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추리를 읊었다.
“현관문 곁에 조사팀이 거둬가지 않은 소주병 조각이 떨어져 있었어요. 범인은 문 옆에서 소주병으로 피해자의 머리를 내리쳐서 기절시켰을 겁니다. 그리고 현관에서 화장실까지 바닥에 바퀴 자국은 피해자를 손수레에 실어 화장실까지 날랐다는 걸 알려줍니다. 화장실 안은 물기가 많았어요. 게다가 락스칠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욕조 수도꼭지가 찬물 쪽으로 틀어져 있어요. 이게 이상합니다. 물론 겨울철에도 찬물에 목욕하는 사람이 있지만, 피해자는 감기환자입니다. 아까 피해자의 방에서 약봉지를 봤어요. 찬물을 틀은 사람은 피해자가 아니라 범인이라는 거죠. 어째서 범인은 찬물을 틀었을까요? 피해자의 몸을 씻기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이전에 피해자는 따뜻한 물에 목욕했을 테니 수도꼭지는 따뜻한 물 쪽으로 틀어져 있었을 겁니다. 굳이 피해자의 몸을 씻기기 위해 수도꼭지를 돌릴 필요는 없었어요. 아마도 피를 씻겨내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피를 씻겨낼 때는 찬물을 틀어야 합니다. 따듯한 물을 썼다간 피가 응고되어 버리니까 일부러 수도꼭지를 돌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락스칠은 락스 냄새로 피 냄새를 지우기 위함이고요. 락스칠을 할 정도면 피의 양이 많았으니까 화장실에서 피해자의 몸을 도려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범인은 두 가지를 간과했군요. 락스칠은 현장에 맞지 않아요. 어차피 이 아파트 철거예정인데 피해자가 화장실 청소를 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피를 잘 닦아봤자 2만 배 희석한 혈액도 검출할 만큼 예민한 루미놀 반응에 걸립니다.”
설화의 말이 빨라서 의형사는 거의 듣지를 못 했다. 대충 설화가 보고서 내용을 거의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신통방통한 능력에 감탄하기에 앞서 어떻게 하면 이 꼬마애를 기죽일까 하는 간악한 생각이 마음속에 피어오른다.
“그것 좀 맞췄다고 들떠있지 마. 그 정도는 나도 다 알고 있었으니까.”
의형사의 핀잔에 질세라 설화는 말을 받아친다.
“제가 언제 들떠있었다고 그래요? 성격이 참 유치하시네요. 혹시 절 시샘하세요?”
“내가 꼬마애를 시샘한다고? 네가 날 얕잡아보고 있는데 강력계 내에서 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최고의 초일류 형사가 바로 나란 말씀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부끄러운 기색이 없이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설화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자신을 초일류라고 말하는 초일류는 세상에 없는데요.”
“아무튼, 404호에서 얻어야 할 정보는 두 가지 더 있어. 현장에 경찰이 도착했을 때 현관문이 안에서 잠겨있었고 모든 창문이 잠겨있었지만, 창고 쪽 창문은 잠겨있지 않았어.”
“흥미롭군요. 그렇다면 범인은 창고 쪽 창문으로 시체를 옮겼을까?”
서 있는 상태로 미동도 없이 추리하는 설화의 눈망울이 빛이 난다. 빛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끼워지고 분리되는 퍼즐 조각들의 충돌로 만들어졌다. 그녀의 가슴은 유능한 소방관도 진압할 수 없는 뜨거운 불길로 가득하다.
“이제 문제의 804호로 가보지. 가기 전에 비닐봉지 하나 들고 가는 게 좋을 거야.”
하며 의형사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804호에 들어가면 설화는 분명 바로 화장실로 직행할 게 분명하다. 그때는 현장훼손을 구실로 내 그동안 쌓아온 분노를 남김없이 터트리겠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는 악랄한 냉혈한이다.
“너 참 비위가 좋구나.”
비참하게도 폭탄이 불발했다. 의견을 나누는 경찰들 사이에 설화가 바라보고 있는 건 804호 거실에 누워있는 피해자의 시신, 7개로 나뉜 토막이다. 끈적끈적한 피웅덩이 위의 토막 난 시신이 설화의 눈에는 스파게티 위에 얹은 미트볼로 보이는가보다.
“비닐봉지 필요하지 않니? 화장실 갈 필요 없어?”
목소리는 실망감으로 가득하다.
“저 괜찮아요. 사건을 많이 접해봐서 시체는 익숙하거든요.”
소녀답지 않은 말을 하며 소녀다운 웃음을 짓는 탐정에게 한방을 먹었다. 이 꼬마는 도저히 상대가 안 된다. 의형사는 설화 때문에 딸을 낳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아니, 그보다 아내와의 관계회복이 우선이다. 의형사의 좌절에 상관없이 설화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804호는 빈집답게 시체와 사람들을 제외하면 말 그대로 텅 비었다. 사람이 사는 시궁창 404호와는 대조적이다. 구조는 404호와 비슷하다. 다만 한 가지 차이점은 창고 쪽 창문은 완강기가 설치되어있다. 예전에 학교안전교육을 할 때 교육 영상으로 본 적이 있다. 아마도 사용법은 저 창문 밖의 삼각형 모양인 설치금구의 구멍에 후크를 걸고 벨트를 허리에 건다. 릴을 바닥에 떨어트리고 창밖으로 천천히 내려온다. 라고 기억하고 있다. 범인이 이를 사용할 수 있었지만, 완강기의 모든 물품이 집 안에 다 있는 것을 보아 쓰진 않은 듯하다. 설화는 바깥을 살펴보기 위해 창문에 머리를 내밀었다. 804호의 주변의 집, 즉 803호와 704호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아파트 외벽에 발을 디딜 것이 하나도 없다. 아래 바닥은 진흙색의 정원이다. 의형사의 말에 따르면 창고 쪽 창문은 404호와 마찬가지로 잠겨있지 않았다. 설화는 다시 시체를 돌아보았다. 핏기가 빠진 얼굴을 보니 30대 중반의 남성으로 보인다. 짧은 머리 아래 이마 오른쪽에는 상처가 있는데 404호에서 소주병에 맞아 생긴 그 상처이다. 그녀는 피웅덩이 가장자리에서 피가 원피스에 묻지 않게 무릎까지 걷어 올려 앉았다. 목과 몸통 사이 공간에 얼굴을 갖다 대고 절단면을 보았다. 깨끗한 단면을 보아 범인은 예리한 날붙이를 이용했다. 시체는 7개의 토막. 머리, 팔, 팔, 흉부, 복부, 다리, 다리로 나뉘어 다빈치의 ‘비트루비우스의 인체비례’처럼 팔다리를 펼친 채로 바닥에 누워있다. 신체 부위는 제자리에 있지만 절단면 사이는 조금 벌어져 있다.
“어디 보자. 피해자의 이름은 김인호, 35세 남성, 체중 약 100kg, 키는 약 170cm. 직업은 보험설계사로 집에서 차로 15분 떨어져 있는 ㅇㅇ보험회사 ㅇㅇ지점에서 7년째 근무했다. 이 집에 산지는 7년이 되었다. 다른 지역에 살다가 ㅇㅇ지점으로 전근 왔을 때부터 살았다고 추측한다. 사인은 과다출혈에 의한 쇼크사로 절단부위에서 백혈구의 집적이 발견되었다. 즉, 몸이 잘리기 전에는 살아있었다. 위에서 발견된 자장면의 소화 정도를 분석한 결과, 사망추정시간은 오전 2시에서 3시 사이로 사건 현장의 낮은 온도를 고려하여 더 앞당겼다. 외상은 거의 없지만, 이마에 둔기 외상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사용된 흉기는 시신 바로 옆에 있었다. 아마 범인은 신체절단을 여기서 행했다고 속이고 싶었나 본데 404호에서 증거를 숨긴 흔적이 있기 때문에 신체절단은 404호에서 벌어졌다고 본다. 흉기인 식칼과 톱은 구입처는 알 수 없고 지문이 발견되지 않았다.”
감식반의 보고서 내용은 여기까지다. 의형사는 보고서를 덮고 말을 덧붙였다.
“CCTV 기록은 한 달 치였고 그동안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8층에 올라간 사람은 사건 당일 찍힌 사람만 빼면 전혀 없었다. 그리고 경비원이 20일 전에 8층 방화문이 잠겨있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그 후에 확인한 사람은 없었다. 첫 목격자의 진술을 따르면 804호의 현관문은 잠겨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8층과 계단 사이에 있는 방화문의 양쪽 모두가 잠겨있었고 범인은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804호는 정문에서 한 번, 방화문에서 한 번, 아파트 정문에서 한 번. 총 3번 잠겨있었다. 과연 범인은 어떻게 시체를 운반했을까?”
경비실 옆 주민회의실에서 임시 수사본부를 만들었다. 탐정과 형사가 들어오기 전부터 회의실 안은 시끌시끌했다. 가장 목소리가 컸던 안경 낀 키 큰 남자가 의형사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모두 조용하시고 진술준비를 해주세요. 조속한 해결을 위해 여러분이 알고 있는 진실을 남김없이 말해주셨으면 좋겠군요.”
모두 의형사의 말을 듣고 숙연해졌다. 중앙 긴 테이블 주위에 9명의 인물이 앉아있다. 저마다 개성이 다른 얼굴이었지만 짓는 표정은 모두 똑같았다. 표정이 똑같다는 건 같은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각자 간략한 소개 부탁합니다.”
의형사의 부드러운 말투에 표현은 안 하지만 설화는 짜증이 치밀었다. 자기한테는 막 대하면서 저 사람들을 대할 때는 완전반대다. 좀 나한테 저런 말투 쓰면 어디 덧나냐?
“저는 황갑수. 45년 동안 이 아파트에서 일한 경비원이올시다.”
노인다운 느릿느릿한 말투로 말한 경비원은 머리가 희끄무레한 노인이다. 그는 아파트와 인생을 같이 한 둘도 없는 친구였다.
“저는 오중식이라고 근처 중국집 배달원입니다.”
통통한 몸매의 청년은 빨간색 바람막이를 입은 턱에 덩치가 더 커 보인다. 억양의 굴곡이 심한 편이다.
“저희는 인호친구입니다. 저희가 처음 인호를 발견했습니다.”
피해자와 동년배로 보이는 남자가 자신을 포함한 세 명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는 104호에서 사는 정연식이라고 합니다. 분식집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짧은 머리의 이목구비가 작은 30대 남성이 말했다. 엿가락처럼 메마른 몸이 동정심을 일깨운다.
“203호에서 사는 김하연입니다. 교육청 직원입니다.”
털모자를 쓴 투명한 피부의 20대 여성은 그렇게 말하고 연신 하품을 했다. 그날은 늦게 잔 모양인지 가느다란 눈에 피곤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런 얼굴도 아름다웠다. 굴곡이 살아있는 허리, 짧은 반바지를 입고 드러낸 늘씬한 다리가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604호의 거중기입니다. 화성의 그 거중기 아닙니다. 헬스트레이너로 일하지만, 현재는 쉬고 있습니다.”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은 쾌활한 말투의 20대 남자는 날씨에 어울리지 않은 러닝셔츠를 입고 있다. 옷 밖으로 매끈한 근육이 드러났다. 설화는 한번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분위기상 요청을 할 수 없어서 아쉬웠다.
“제가 마지막이네요. 701호에 사는 박범근입니다. 신문편집자입니다.
50대로 보이는 남자는 앞머리가 휑하니 비었고 멋있는 수염을 길렀다. 하지만 얼굴은 50보다 더 젊어 보인다.
“이것으로 소개를 마치도록 하고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황갑수씨가 먼저 시작하시죠.”
“저는 계속 경비실에 앉아있었습니다. 경비실에서 부지 입구와 아파트 정문 입구를 출입하는 사람을 전부 봤습니다. 제 눈을 벗어나 현장에 들어온 사람은 전혀 없었다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제가 목격한 바로는 밤 12시 전에 인호씨를 포함한 주민 모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12시 40분에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더니 오중식씨가 들어왔습니다.”
의형사가 시선을 오중식에게 돌렸다.
“오중식씨는 인호씨에게 배달하러 오셨군요.”
오중식이 입을 열었다.
“네, 인호씨는 항상 우리 식당에서 야식을 시킵니다. 12시 40분에 도착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404호에 도착해 자장면을 배달했습니다.”
“그때는 살아있었군요. 혹시 인호씨가 평상시와 달라 보이거나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까?”
“없었습니다. 평상시와 똑같았어요. 일하고 돌아온 직장인의 모습이지요. 인호씨에게 안부를 묻고 45분에 건물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 이후에 인호씨를 본 사람이 있습니까?”
의형사의 질문에 모두 입을 닫았다. 오중식의 말에 따르면 최종 생사확인시간은 12시 45분이다. 황갑수가 다시 말을 이었다.
“45분에 중식씨가 돌아가고 사람의 출입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5시에 한 시간 정도 잤습니다. 그다음에 아파트에 온 사람은 저 인호씨 친구입니다. 8시쯤에 와서 10분도 안 돼서 한 명이 다시 돌아와 저에게 인호씨가 죽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저는 황급히 신고를 마치고 주민을 깨워 함께 804호로 들어갔죠.”
“친구분이 인호씨를 어떻게 발견하셨죠?”
인호 친구 중 소개를 한 남자가 말했다.
“원래 그날은 함께 아침을 먹기로 예정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7시 30분에 전화를 걸었는데 연락을 안 받아서 함께 8시에 아파트에 왔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404호로 갔는데 현관문 옆에서 우리는 엄청 놀랐습니다. 문에 804라고 스프레이로 쓴 숫자를 보니까 이놈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보다 바로 옆 계단을 타고 올라가는 게 더 빠르다고 생각해서 함께 정신없이 8층까지 뛰어 올라갔는데 이상하게도 8층 방화문의 손잡이가 잠겨있었습니다. 계단 쪽 손잡이를 풀었는데 반대편도 잠겨있더군요. 하는 수 없이 7층 복도를 달려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 복도를 통해 804호에 도착했는데 현관문이 잠겨있었습니다. 현관문을 두드리며 사람을 불렀지만, 소식이 없어서 클립으로 문을 따서 들어와 인호를 발견한 겁니다.”
그는 말을 마치고 눈물을 글썽였다. 사랑하는 친구가 시체로 발견된 충격이 투명한 물방울에 섞여 배출되었지만 눈물이 흐를수록 오히려 참혹한 기억이 진해졌다. 나쁜 기억이 더 오래 남는 법이다. 설화는 부디 저 눈물이 거짓이 아니길 진심으로 바랐다.
“다른 분들도 증언하시죠.”
“저는 증언할 게 없습니다. 집에서 TV 보다가 12시에 잠들어서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범근이 말하고 의미 없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나머지 주민의 진술도 거의 비슷했다. 모두 할 일을 하다가 범행예상시간인 12시 45분~8시 이전 사이에 잠들어있었다. 의형사가 말이 없자 용의자들은 서로 슬쩍 곁눈짓을 하며 심리전을 시작했다. 그들도 이미 그들 중 한 명이 범인임을 알고 있다. 나름 범인으로 한 명씩은 마음속으로 지목하고 있다. 무의식적으로 지목한 사람을 오래 쳐다보고 그 사람은 눈치를 챈다. ‘저 사람이 날 범인으로 생각하고 있구나.’ 하는 의심이 꽃처럼 피어오르고 증오라는 열매를 맺는다. 몇 십 년을 같이 지낸 이웃이 몇 십 년 동안 싸운 적이 되는 건 한순간이다.
“여러분은 알리바이가 있으신가요?”
이번 질문은 의형사가 아닌 설화가 했다. 그러자 용의자들이 서로 수군거렸다. 그들이 의형사에게만 신경 쓰고 있어서 설화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알리바이가 있으시느냐고요.”
설화가 다시 말을 반복했다. 대답 대신 질문이 돌아왔다.
“너는 누구지? 젊은 걸 보니 경찰은 아닐 텐데.”
범근의 질문에 설화는 소녀다운 웃음으로 답했다.
“저는 설화라고 합니다. 사건을 해결할 탐정입니다.”
“형사님, 이 애도 수사관입니까?”
질문의 상대가 의형사에게 돌아갔지만,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꼬마 애에게 약점 잡혔다는 부끄러운 소리는 못한다.
“그러니까……. 수사관이라면 수사관인데 정식은 아니고 뭐라고 할까. 도우미라고 해두죠.”
“도우미가 아니라 탐정입니다. 제가 누구든지 범인을 찾으면 상관없잖아요. 제 질문에 대답해주세요.”
중식이 먼저 손을 들었다.
“제 알리바이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사망추정시간이 2시~3시 사이니까 12시 45분에 밖에 나간 저는 범행이 불가능하죠.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가 아파트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살해된 상태였으니 저희도 불가능합니다.”
인호 친구들이 말했다. 설화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저는 외부인은 범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정문 CCTV에서 밖으로 나간 범인이 찍히지 않았다는 건 나갈 필요가 없는 내부인이라는 증거지요. 물론 경비원 할아버지도 제외돼요.”
용의선상에 제외된 외부인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만큼 내부인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위기감을 느낀 그들 중 먼저 하연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알리바이가 있어요. 저는 11시부터 3시까지 남자친구랑 카톡 문자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제 폰에 문자가 그대로 남아있어요.”
의형사는 살면서 카톡으로 알리바이를 입증하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확실히 카톡 문자도 증거의 효력이 있다. 범인이 뛰어난 스마트폰 프로그래머가 아닌 이상 조작은 불가능하다.
“그건 알리바이가 못 됩니다.”
하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의형사가 말했다. 하연을 포함한 나머지 사람은 이 뜬금없는 발언에 이해를 하지 못했다. 하연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받아쳤다.
“어째서요? 저는 문자 보내기에 바빴습니다. 조사해보시면 아시겠지만, 문자 사이의 시간 간격이 거의 없었다고요.”
“한 손으로 카톡 하면서 밀실 속에 시체를 옮기는 것은 묘기에 가까운데요?”
설화가 하연의 편을 들어 말했다.
“당신이 문자를 보내지 않으면 됩니다. 그날 휴대폰을 다른 주민에게 빌려줘서 그 사람이 대신 문자를 보내면 가능합니다. 범행을 끝내고 돌려받았겠죠.”
“형사님,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다른 사람이랑 문자를 했으면 남자친구가 눈치를 챘겠죠. 게다가 하연씨를 제외한 주민은 다 남잔데요. 남자에게 그 짓을 시킵니까?”
“하연씨는 인호씨와 내연 관계였던 게 아닙니까? 인호씨와 헤어지고 새로운 남자친구를 사귀었고 이에 격분한 인호씨가 무리한 요구를 해왔다. 그래서 죽였다. 훌륭한 동기 아닙니까?”
하연은 자리를 박차고 나와 의형사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신을 불륜녀 취급을 한 인간에게 경멸스런 눈빛을 쏘았다. 분노가 가득 찬 목소리는 더 커졌다.
“이 사람이 시나리오를 쓰네. 저 그런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리고 전 인호씨와 별로 친하지 않아요. 제가 이 아파트에 살면서 한 번도 서로 예기를 나눠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동기가 없다는 말입니다. 저보단 범근씨를 더 의심해야 해요. 제가 알기엔 6개월 전에 인호씨에게 돈을 빌리셨다면서요. 범근씨는 동기가 있으시네요.”
증오는 연쇄적으로 터진다. 범근이 얼굴을 붉히며 하연의 말에 반박했다.
“아가씨가 말하는 꼬락서니 하고는……. 교육청 직원이라면서 교육은 제대로 안 받았나 보네. 아가씨 말대로 저는 친척에게 급히 돈을 부칠 일이 있어서 500만 원을 빌렸습니다. 그때 빌린 돈은 이미 일주일 전에 다 갚았습니다. 저는 동기가 전혀 없습니다. 중기는 없는가? 자네는 인호네 보험을 들었잖아.”
보험이라는 말에 의형사의 귀가 솔깃해졌다. 피해자는 보험 계통 종사자였고 중기는 보험가입자였다. 동기로 중기가 가장 으뜸이다.
“하지만 보험으로 문제가 전혀 없었습니다. 이주 전에 허리부상으로 보험금을 신청했는데 지급이 결정됐습니다. 매주 통장으로 돈이 지급되고 있고요. 아무 군소리 없이 보험금을 지급하는 좋은 보험회사를 소개해줘서 저는 오히려 인호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두 연식씨와 인호씨가 싸웠다는 소리를 안 했네요?”
“싸워요? 연식씨, 사실입니까?”
의형사의 눈빛이 부담스러운지 연식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였다.
“저희 주민은 차를 정해진 자리에 주차합니다. 그런데 1달 전에 제 차를 놀 자리에 인호씨 차가 주차되어있어서 그걸로 좀 말다툼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화해를 했습니다. 주차자리로 싸우는 건 어른답지 못한 행동이었습니다. 서로 그걸 깨닫고 용서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이후에 인호씨를 대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둘 다 바빠서 만날 시간도 없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서 관계가 소홀해졌죠. 그 모습을 보고 다른 주민은 주차문제로 계속 싸운다고 오해를 한 것입니다.”
4명의 용의자 모두가 일체 동기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말은 거짓말탐지기를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진심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들 중 한 명은 범인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 사람은 말하지 않은 진짜 동기가 있다. 한 인간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정도로 잔인하고 강력한 동기는 무엇인가 그 질문의 해답은 시체운반의 미스터리를 풀면 드러난다. 이것으로 모든 단서는 주어졌다. 이제 설화가 머리를 굴릴 차례다.
진술을 마치고 혐의가 없는 외부인은 경비원만 제외하고 모두 돌아갔다. 나머지 내부인은 긴장으로 지친 몸을 추스르기 위해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주민회의실 안에는 탐정과 형사 둘만이 남았다. 탐정은 말없이 테이블 위를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곁에 앉은 의형사는 보고서들을 다시 읽다가 설화의 얼굴을 보고 빠르게 눈을 치웠다. 평상시에 쾌활하게 웃고 떠들다가 표정을 확 바꿔 장기 두는 기사처럼 진지하게 생각하는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사건을 마치고 아까 전처럼 말싸움하고 싶어진다. 이게 정이 들었다는 걸까. 이런 느낌을 조폭 돼지에게 느껴본 적이 있다. 인상이 참 더럽고 입에는 욕을 달고 씨름선수의 몸집에 호랑이 문신으로 위협을 준 그놈은 강한 남자였다. 그래서 함부로 대하고 그랬는데 한 번 함께 술을 마시다가 그가 터놓고 말한 인생살이에 36년을 푹 우린 감동을 먹고 가슴을 물로 채웠다. 그 짧은 시간만큼은 조폭 돼지가 내 아들 같고 내 동생 같았다. 생각해보니 이래 보여도 나는 참 정이 깊은 남자인 것 같다. 의형사가 과거에 심취하고 있었는데 설화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의형사의 정신을 깨웠다. 그는 깜짝 놀라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졌다.
“아이고 내 허리”
“형사님, 정원에 가봐야겠어요.”
“정원은 왜? 범인 발자국이라도 찾게?”
의형사는 욱신거리는 허리를 잡으며 일어섰다. 뭔가 확신에 가득 찬 설화가 문가에서 손으로 불렀다. 그녀를 따라서 아파트 뒤편을 갔더니 악취가 그들을 반겼다. 그곳은 정원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황무지였는데 말 그대로 쓰레기장이었다. 속이 몸 밖으로 튀어나온 소파와 절반만 남은 세숫대야, 뚜껑이 없는 변기통이 꽃 대신 흙 위에 심어져 있다. 그나마 404호는 냄새는 나지 않아 여기보단 나은 편이었다. 의형사가 생각하기에 굳이 여기에 올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범인은 내부인이었다. 그렇다면 건물 밖으로 나올 필요가 없다. 흉기를 숨기지도 않았다. 왜 설화는 정원을 조사할까? 그런 의문을 안겨준 설화는 흙을 밟지 않게 조심히 쓰레기 위를 뛰어다녔다. 신발이 흙으로 더러워져도 신경 쓰지 않고 흙에 코를 박았다.
“우리가 이미 조사했는데 발자국은 없었어.”
아마도 설화는 범인이 1층집 창고 쪽 창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갔거나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창문 높이가 그리 높지 않아서 성인이면 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 흙을 밟아야 한다. 하지만 발자국은 없었다. 일부러 발자국을 지운 흔적도 없다. 쓰레기 위를 밟고 가도 창문까지 가지 못한다. 이 경우에도 범인이 내부인임은 다름없다. 경비원이 부지 입구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엔 설화가 손가락을 모아 두더지처럼 겉흙을 파냈다. 그러더니 뭔가를 발견했는지 멈추고 의형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형사님, 흙의 표면에 지렁이가 있었어요.”
“지렁이 처음 보냐? 지렁이가 뭐 어때서”
의형사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이다. 설화가 손에 든 지렁이를 내밀었다.
“지렁이는 흙 속에 살잖아요. 비가 오지도 않았는데 겉으로 나왔다는 건 누군가 인위적으로 흙을 섞었다는 겁니다. 이것이 중요한 단서입니다.”
“그게 시체운반의 단서라고?”
“그리고 흙 위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방법의 단서이기도 합니다.”
지렁이를 다시 흙으로 되돌려 보내고 탐정은 원피스 호주머니에서 두유 팩를 꺼내 밑바닥까지 마셨다. 그리고 퍼즐이 완벽하게 맞춰졌다.
과연 범인은 누구일까?
첫댓글 그냥 한번 써보는데 혹시 범인이 자장면 배달원인가요? ㅋㅋ 찬물로 범행시각 혼동시킨건가요?
경비원이 5시에 1시간 잠들엇으니까 그때 다시와서 시체운반한거 아닌가?죽인건 처음왓을때고...
왠지틀린거같지만 ㅋ 아 아니다 뭔가 단서들을 덜사용한 느낌이드네...ㅠ 잘모르겠어요 ㅋ
아파트 주민 4명이 용의자입니다. 범행시각 혼동없습니다. 저 시간계산 잘 못합니다. 경비원은 생각 안하셔도 돼요.
해결편도올려주세요ㅋㅋ
196시간만 기다려주세용
푸아로님 소설 지우면 어떡혀요. 읽을라고 했는뎅
그냥지웟어용ㅋㅋ
추리퀴즈인가요? 추리퀴즈라면 추리퀴즈 게시판으로 옮겨야 합니다... 소설이라면 말머리를 달아주시길. 작가의 말이나 요구사항은 답글(댓글)로 적어주시길...
아 빼먹었다.... 소설입니다.
해답편은 제작?중이신가요?
기다리고 있습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