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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루나 칼럼 >
저 쌀 한 줌
글 | 이원익 leewonik@hotmail.com
한국 불교의 전파와 대중화에 힘을 보태려는 발원으로
태고사를 도와 왔으며 우담바라회 회원이다. 포항에서
태어나 경남고와 서울 문리대를 졸업했다. 오래 전에
회사 주재원으로 와서 LA 지역에 살며 국제운송업을
하고 있다.
어쩌다 동네 식료품점에 따라갔는데 계산대 앞쪽에 갖가지 쌀부대가 쌓여 있다. 이천쌀, 천하일미, 시라기꾸, 그린쌀, 가바쌀, 장수미, 청정쌀, 니시끼, 국보쌀, 타마끼 골드쌀, 대풍쌀…. 한글로 적혀 있는 저것들은 다 여기 사는 한국 사람들이 농사지은 것들인가 아니면 거둬들여 포장하여 유통만 시킨 것들인가? 아니면 한국사람 구매력을 노려서 무늬만 한국으로 한 것들인가? 가나나 한자로 적혀 있는 것은 아마도 일본이나 중국 사람들 손을 거친 것이겠지. 글자만 봐도 완전히 동남아 표식인 쌀자루도 있다. 옛날옛적쌀, 유기농쌀, 반반미, 건강미, 한가위쌀, 자연미인 현미쌀, 미소진쌀, 수라가자, 닥터 라이스, 섬진강쌀…. 이런 건 정말 한국에서 수입된 것들일까?
뭐뭐쌀, 무슨무슨 쌀 하며 덜 쓿은 현미를 비롯하여 이런 저런 것들이 섞인 쌀 등 그밖에도 여기 오래 살면서 지나간 내 젊은 날의 아련한 어느 하루처럼 지금은 금방 떠오르지 않은 잊힌 쌀부대와 거기에 찍혔던 이름들이 많다. 그렇지, 안 먹는다 덜 먹는다 하면서도 이 미국 땅에서 어느덧 수십 년 쌀을 먹으며 살아 왔다. 몇 안 되는 식구지만 나나 아내가 카트에 트렁크에 실어 나른 쌀부대만 해도 어마어마하리라. 거실이 가득 찰까 온 방까지 가득 차서 집채 만해질까? 잠깐 돌이켜 봐도 갖다바친 돈이 얼마며 그 부피가 어떨지 어림짐작도 잘 안 된다.
그야말로 경상도 말로 ‘마이 무따 아이가!’
아무튼 갖가지 이름과 크기와 포장으로 쌓여 있는 이들 쌀부대들은 매상에도 큰 비중을 차지할 텐데 그래선지 눈에 안보이는 경쟁도 치열해 보인다. 그저 쌀이면 그 뿐이지 했었는데 아마도 한국 사람들이나 동양 사람들이 있는 한 이 시장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요즘은 한국 사람들일지라도 집에서는 밥을 잘 안 먹거나 옛날 같았으면 잣다랍다고 어른들한테 뒤통수 맞을만치 괭이밥을 깨작거리고 있지만은 절의 부처님은 쌀밥을 좋아하시는지 요즘도 불전에 쌀부대를 정성스레 올리는 보살님들이 드물지 않다. 쌀이 육법공양의 한 축에 들어 있는 절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고 한국 사람들, 특히 나이드신 분들에게 쌀은 그냥 쌀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일종의 영물인 것이다. 그래서이겠지만 특히 초파일이나 설날 등 명절에는 여러 포대기가 대웅전에 쌓이니 절에서 마지를 아무리 짓는다 해도 소비가 안 된다. 이렇게 안 먹고 한 해가 쌓이고 두 해가 쌓이다 보면 쌀은 속으로 삭아서 영 찰기가 없어진다.
그렇더라도 옛날과 달리 바구미는 잘 안 생기는 것 같은데 이게 약품이나 비료 때문인지 무슨 조작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신도들로 하여금 얼마간 돈으로 보시를 하게 하고 대신 쌀을 몇 부대씩 도로 가져가게 하거나 모았다가 한꺼번에 떡방앗간에 실어 가서 떡을 만들기도 했는데 방앗간에서 반기는 것도 아니라서 마냥 손쉽지만은 않았다. 어쨌거나 그런 일도 있고 해서 오히려 미국 와서 떡은 자주 실컷 먹었다.
우리가 알기로는 동남아가 원산지인 쌀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는데 모양이 좀 동글동글한 타원형이고 찰기가 있는 쌀과 좀 길쭉하게 생기고 찰기가 적은 쌀이 있는데 쌀을 먹는 세계 사람들은 우리와는 달리 중국집 볶음밥에서 나오는 길쭉한 쌀, 곧 인디카 종을 주로 먹는다. 찰기가 있는 짧은 쌀은 놀랍게도 우리나라와 일본사람들만 맛있어 하는데 일본이 더 알려져선지 영어 이름도 자포니카다. 물론 그 중에도 더 찰기가 있어 찰떡을 만드는 찹쌀은 자포니카의 아종이다. 따라서 한국 식료품점에 쌓여 있는 쌀 포대의 9할은 이 자포니카 종이리라. 벼농사의 역사가 긴 한국에서 생겨났던 여러 아종들은 일제의 식량증산 독려와 6.25, 그리고 해방 후 산업화 과정에서 거의가 도둑맞거나 잃어버린 아까운 품종들이 되었다.
그 밖에도 오대호 근방의 인디안 원주민들이 채집해 먹었다는 야생 쌀이 있는데 가늘게 길쭉하고 갈색인 이 쌀은 인디언들이 호숫가로 마상이를 타고 나가 작대기로 털어서 수확하였다고 한다. 가게에 나와서 나도 사 본 적이 있는데 생산이나 소비나 다 미미하리라 본다. 다른 쌀과 섞어 잡곡밥같이 먹은 것 같다. 이 밖에도 아프리카나 중동 원산인 다른 쌀들도 있나보더라.
요즘은 한국에서까지 신세대들은 빵이나 유제품 따위를 더 좋아하고 중년이나 노년은 그마저도 살찐다고, 성인병 걸린다고 피하며 온갖 건강식품에 귀품과 발품을 팔고 있다지만 쌀이란 아직도 세계적으로 보면 밀이나 어느 곡식보다 더 많이 사람을 먹여 살리는 중요한 곡물임에 틀림없다. 그래선지 이 캘리포니아는 미국 최대의, 아니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쌀 생산지이므로 LA 에 사는 나 같은 사람은 사실 쌀독에 들어앉아 쫄깃쫄깃 질 좋은 쌀을, 그것도 이 마켓 저 마켓 돌아다니며 좋은 값에 내놓은 것들만 골라다 날라 야금야금 씹어 먹으며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말이다. 캘리포니아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 캘리포니아에서도 저 북가주 새 크라멘토 평원에 쌀에 얽힌 참말로 아쉽고 안타까운 이야기가 있고 그래서 말을 꺼낸 건데 서론이 너무 길었다. 아는 분들은
이미 아는 이야기지만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 북가주 남가주를 누빈 풍운아 백미왕 김종림에 대해 들어 보셨는가.
우리가 미국이 넓다고 하면 우선 중서부 대평원을 떠올리는데 과연 무지하게 넓은 들판이다. 거기 뿐인가? 텍사스는 어떻고? 마치 능숙한 미장이가 흙손으로 고루 발라 놓은 커다란 황토방처럼 가도 가도 야트막한 언덕 하나 없이 들판이나 황무지가 이어진다. 내가 만주 벌판에는 아직 안 가 봤지만 아마 이와 비슷하겠지?
그런데 로키산맥 서쪽인 캘리포니아에도 시에라네바다와 연안산맥 사이에 분지를 이루며 드넓은 벌판이 펼쳐져 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내륙 쪽으로 들어가 주도인 새크라멘토에 이르면 그 북쪽으로부터 새크라멘토 강이 여러 지류들과 합쳐지며 쭉 흘러오고 있는데 강의 길이가 시원인 산악지대에서부터 치면 약 400 마일에 이른다. 이 강과 지류들이 적시는 평야지대가 머리를 약간 서쪽으로 기울이며 비스듬히 남북으로 길게 뻗쳐 있는데 북쪽의 레딩에서부터 남쪽의 새크라멘토까지 펼쳐진 이곳이 새크라멘토 밸리다. 새크라멘토에서부터 남쪽으로는 베이커스필드까지 다리를 약간 동쪽으로 뻗치며 비스듬히 광활한 평야가 펼쳐지는데 이곳이 샌 호아킨 밸리다.
남북의 두 벌판은 하나로 이어져 있는데 이를 캘리포니아의 중앙 골짜기(Central Valley of California)라고 한다.
대략 남북이 450 마일(720 킬로), 너비는 40에서 60 마일(64~97 킬로)이다. 분지라고는 하지만 한 마디로 동서남북 양쪽 끝이 안 보이는 허허벌판이다. 미국은 이곳 농사만 해도 수억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운 좋고 복 받은 나라다. 그런데 이중에서 특히 북쪽인 새크라멘토 밸리가 바로 우리가 위에서 이야기했던 세계적인 쌀 생산지, 비행기로 볍씨를 뿌린다는 바로 그곳이다. 시대를 거슬러 백 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엊그저께 3.1절 100주년을 기념했으니까 백 년 전이라면 1919년, 한국은 일제치하에서 전국적인 독립만세 시위가 일어났는데 미국은 어땠나? 3.1운동의 여파로 세계 각지의 한인들은 크게 각성하고 고무되어 나름대로 독립운동의 활로를 찾기 위하여 곳곳에 임시정부를 세우고 학교를 설립하고 군사단체를 조직하는 등 동분서주하였음은 청년혈성단을 결성한 미국의 한인사회도 마찬가지였다.
본래 미국에서의 독립운동은 LA 근교 리버사이드의 오렌지 농장에서부터 교육과 계몽운동에 치중한 안창호와 본토에서 시작하여 나중 하와이를 중심으로 무장투쟁에 초점을 맞춘 박용만, 그리고 동부의 워싱턴 정가를 기웃거린 이승만이 핵심을 이루었다. 캘리포니아인 경우 초창기에는 주로 안창호의 국민회와 흥사단을 중심으로 동포들이 모금을 하고 운동가들을 지원하였다. 1919년 3월부터 1920년 12월까지만 보더라도 7천 명의 한인들이 품팔이를 하고 구멍가게를 하면서도 기꺼이 독립 기금 모금에 참여하였다. 그런데 실은 모금된 금액의 반 이상이 북가주 새크라멘토 밸리에서 쌀농사를 짓던 농부들에게서 나왔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김종림이 가장 큰 돈을 내었다.
김종림(金宗林)이 누구인가?
1886년 함경남도 완평군 출생인 김종림은 학교 선생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자신은 고등교육을 제대로 받은 것 같지는 않고 고향에서 벼농사를 짓다가 일제의 마수가 삼천리 반도에 뻗쳐 오던 1906년 고국을 떠나 하와이로 갔다. 거기서도 벼농사와 사탕수수 농사를 짓다가 이듬해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는데 곧 솔트레이크 시티로 가서 철도 노동자가 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밑바탕 생활을 한 미주 생활의 초기에서부터 거부가 된 이후의 시절에 이르기까지 신한민보 등 기록에 남아 있는 것만 봐도 거의 40년 동안 여러 군데에 남다른 금액의 기부를 한 것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조국을 사랑하고 독립을 염원한 것과 관련된다.
김종림은 1908년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사업가가 되면서 독립운동가로서도 면모를 드러냈는데 돈을 내고 시간을 내어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신한민보같은 동포 언론을 물심양면 지원하였다. 1913년에는 안창호, 조병옥과 함께 흥사단을 창립하였다. 신한민보는 본래 안창호가 리버사이드에서 창립해 국민회로 통합된 공립협회의 기관지인 공립신보가 개명된 것으로 초창기 미주 한인사회를 더듬어 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다.
그런데 이 무렵 한 가지 특기할 것이 있는데 1912년 캘리포니아에서 상업적인 벼농사가 시작된 것이다. 전공이 벼농사였던 김종림도 때맞추어 뛰어들었는데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2년 뒤인 1914년, 세계 1차 대전이 터지자 대박이 나고 말았다. 유럽이 쑥대밭이 되니 곡물시장도 급등하여 쌀은 황금알을 낳았다. 김종림은 이 황금알을 바로 독립운동에 쏟아부었다. 이 당시 상해 임시정부의 수입 중에 45퍼센트를 재미동포가 지원하였고 그 가운데 거의 반이 북가주 새크라멘토밸리의 벼농사 농민들에게서 나왔는데 물론 김종림이 가장 큰손이었다.
북가주의 글렌 카운티와 콜루사 카운티에 주로 터를 잡고 있던 한인 벼농사꾼 가운데서도 김종림은 가장 성공하여 농장은 해를 거듭하여 확장되었다.
그 당시만 해도 미국은 동양인에게 법적으로 땅을 팔지 않았으므로 미국인과 손잡고 합작으로 농장을 가꾸었는데 1915년에 100 에이커이던 것이 해를 거듭하여 1919년에는 3,300 에이커로 늘어나 있었다(1에이커는 약 1224평). 몇 해만에 거부가 된 김종림은 백미대왕(Rice King)으로 불리며 당연히 기부에서도 남들이 혀를 내두르는 큰손이 되었다. 1919년 재미 한인들이 낸 독립의연금은 3만 388 불이었는데 김종림은 혼자서 3,400 불을 내었다.
그리고 그 당시 이미 교포사회는 안창호 지지파와 이승만 지지파로 얼마만큼 편이 드러나 있었는데 김종림은 이들을 골고루 지지하고 지원하였다. 그런데 훗날 김종림이 망하고 나니 이승만은 안면을 싹 바꾸고 그를 면전에서 무시하여 사람들이 이를 가지고 이승만을 몹시 비난함에도 불구하고 김종림은 개의치 않고 한결같은 태도를 끝끝내 유지하였다. 그는 실로 돈을 벌 줄 알고 쓸 줄 아는 대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처지가 바뀌어도 비굴해지거나 동요치 않는 군자요 선비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보다 우리를 설레게 하고 안타깝게 하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비행기 이야기다. 김종림이 돈을 벌어 항공업에 진출하였다는 얘기는 아니고 김종림 덕분에 한국의 독립군은 공군력을 가지고 일본 비행대와 공중전을 벌이거나 일본 본토를 공격하여 조국 해방에 크나큰 기여를 할 뻔했다는 이야기다. 할 뻔 했다니 결국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되어 김이 빠지기는 하지만 그냥 덮어 두고 말 헛된 꿈이 결코 아닌 살아 있는 우리의 추억이다. 우리가 지금이라도 거기에서 진실된 교훈을 얻고 실천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라이트 형제가 자체 동력을 갖춘 최초의 비행기를 발명한 것이 1903년인데 1차 대전이 일어난 해가 1914년이다. 그 사이 각 나라에서는 비행기를 발전시켜 생산을 늘리고 했지만 각국 정부와 군대는 항공기의 군사적인 효용에 대해 매우 미심쩍어 해서 제대로 채택이 되지 않았었다. 1차 대전이 터지
자 비로소 제한적으로 비행기가 군사목적에 투입되었는데 주로 정찰이나 통신에 이용되었고 본격적인 전투 행위는 처음에는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그러다가 중반 이후 그 효용성이 알려지자 드디어 그 중요성이 각성되어 본격적인 투입이 시작되었다. 미주의 한인들도 세계 어느 곳에 못지않게, 어쩌면 이들보다 한 발 앞서 항공과 공군의 중요성을 깨닫고 자진하여 비행술을 배우고 현역에 투입되었다.
일제하 한국에서는 1921년에 비행사가 된 안창남이 최초의 비행사로 알려져 그를 칭송하는 대중가요도 나오는 등 영웅시 되었지만 실은 이보다 앞서 미주의 한인들이 민간의 비행학교나 군대에서 비행술을 배워 하늘을 날았다. 우리 겨레 첫 비행사는 1896년생인 제물포 출신 재미동포 이응호(조지리)로서 미군 항공대에 들어가 정식 비행사가 된 때가 1918년 5월이다. 그를 이어 많은 한인 청년들이 민간이나 군대에서 비행사 자격증을 땄는데 이는 모두 비행사가 되어 공군력으로 조국 해방에 몸바치겠다는 신념 때문이었음이 중요하다. 신한민보를 비롯한 교포 언론들은 청년혈성단을 비롯한 동포 젊은이들에게 장래 조국을 해방시킬 일제와의 전쟁을 위해 모두 한시 바삐 조종사가 될 것을 호소하여 많은 이들이 이에 호응하였다. 미군 당국은 처음에는 동양인을 어쩌면 흑인들보다 더 폄하하여 유약하고 교활하여 기사도와는 영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인종들이 신성한(?) 미군에 함부로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였지만 전쟁이 터지고 급해지자 한인들에게도 입대를 허락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어느 정도 이전의 태도로 되돌아갔다.
아무튼 상해임시정부에서는 일찌감치 독립전쟁에서의 공군력의 중요성을 자각하여 놀라우리만치 선제적인 조치와 원대한 계획을 세웠는데 3.1운동 1주년을 맞은 1920년 3월에 북가주에 있는 작은 마을 윌로우스(지금도 인구가 1만명 미만이다) 지역에 비행학교를 설치함으로서 뜻 깊은 첫발을 내디뎠다. 조종사를 길러내고 비행대를 거느린 어엿한 공군력의 국가가 되기 위함인데 이는 그 당시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같은 이른바 열강들만 지니는 특권 같은 것이었다.
임시정부의 이러한 정책은 먼저 미주 동포사회에서 싹이터서 채택된 점에서 미주 동포들은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임정 국무총리 이동휘나 노동국 총판 안창호, 미주의 국민회 중앙총회의 안창호 후임이던 윤병구 등 당시의 지도자들은 이미 미래의 독립전쟁에 있어서의 공군력의 중요성에 대한 자각을 하고 조치를 취하여 미주에서 조종사를 양성하고 항공대를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임시정부 초대 군무총장인 노백린 장군이 미국본토 순방에 나서 1920년 1월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하였다. 1875년생인 노백린(盧白麟)은 황해도 풍천읍 출신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구한말 조선군 참위(지금으로 치면 소위)에 임관되었었다. 1907년 일제에 의해 조선군이 강제 해산될 때는 군부 교육부장을 맡고 있었는데 그 후 잠시 무관학교 교장으로 있다가 나라가 점점 망해가자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노백린은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하자 동포 지도자들 및 이미 비행학교 등에 들어가 훈련을 받고 있던 한인 청년들과 만나 이들을 격려하고 독립군 공군의 가능성과 실현성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중대한 조우가 이루어졌으니 바로 북가주의 거부 김종림과의 만남이다.
임시정부의 비행학교와 비행대 창설의 꿈을 실현시킬 밑천은 사실상 김종림 한 사람의 쌀 농장, 그 망망대해처럼 펼쳐진 농장의 벼이삭에 영그는 쌀 알갱이에 달려 있었다. 김종림은 노백린의 계획을 듣자 즉석에서 흔쾌히 찬동하고 즉각적으로 행동에 임했다. 고국의 부자들이나 기관의 앞잡이들이 일제를 위해 낯간지러운 기원문과 함께 비행기까지 헌납하는 친일의 길로 몰려갈 때 김종림은 자신의 재산을 뭉텅 잘라내어 이 말도 안되는 역사의 물결을 되돌리기에 일조하고자 먼 이국 땅 외진 곳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한 비행단 건설에 바쳤다.
비행학교를 세우기 위해 일시불로 2만 불을 내고는 매달 3천불 씩 지원하기로 약속하였는데 한 해 지원금이 대략 5만 불, 요즘 가치로 1천만 불 정도일 것 같다. 노백린은 한인 청년들이 많이 배우고 있던 북가주의 글렌 카운티에 있는 레드우드 비행학교를 답사하고서는 북가주 윌로우스시에 정식으로 비행학교를 창설하기로 했다. 비행대를 앞세운 독립전쟁이라는 원대한 꿈의 첫 삽을 뜬 것이다. 본래 비행기 10대를 보유하고 100명 정도의 입학생을 받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주류 미국인들이 경원하거나 인종차별적인 시각으로 대할 것에 대비하여 미국 시민으로서의 애국심을 강조하는 교육과정이 포함되었음을 당국자들에게 설명하는 등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비행학교는 1920년 3월, 최고 명성의 미국인 비행 교관 및 현지 교직원과 24명의 생도와 비행기 세 대로 출발하였다.
40 에이커의 비행장 부지도 사들였다. 바야흐로 한민족이 창공에 나래를 펴는 순간이었다.
이대로만 간다면 조만간 닥칠 독립 전쟁에 당당히 출전하여 역사적 사명을 다할 수 있으리라. 비행학교는 훈련기도 더 사들이고 시스템도 정비하는 등 몇 달 만에 재빨리 자리를 잡아나갔다. 일본은 이를 눈치채었고 그 끄나풀들이 하나하나 정보를 수집하여 본국에 보고케 하였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이른 것인가 아니면 너무 늦기 전에 마지막 배려를 한 것인가, 바로 그해 10월 크나큰 위기가 닥쳐왔다.
이해 10월, 수십 년만의 큰 폭풍우가 북가주를 덮쳤다. 김종림의 농장인 김 앤 포터(Kim and Porter)는 큰 피해를 입었다. (포터는 당시 미국법 때문에 이름을 빌려 땅을 사려고 끌어들인 동업자다.) 지평선 끝까지 뻗어 이제 다 익어 소개를 숙인 벼이삭으로 가득 찼던 1,700 에이커의 농장이 하룻밤 새 다리미로 다린 것처럼 거짓말같이 납작 쓰러졌다. 인력으로 일일이 일으켜 세우기에는 너무 돈이 많이 들었다. 이 해는 예년보다 기온이 너무 이르게 떨어져 벼가 빨리 여물지를 않아 추수를 늦추었었다. 며칠만 미리 기계로 수확을 했으면 됐을 것을, 그 며칠을 미루고 났는데 폭풍우가 덮친 것이다.
직격탄이었다. 비행학교의 후원에 적극적이었던 다른 농장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그야말로 하늘이 도우신 캘리포니아의 카미카제(神風)라고 고소해 했을 것이다. 김종림은 굳세게 버티었다. 그러나 무심한 하늘도 세상도 갑자기 그를 더 큰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이번엔 폭풍우가 아니라 곡물시장 자체가 급전직하로 바뀌었다. 1918년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도 몇 해를 이어 오던 쌀 특수가 급작스레 곤두박질을 친 것이다. 의지의 사나이 김종림의 버티기에도 한계가 왔다.
김종림이 어려워지자 비행학교와 비행대도 급격히 재정이 말라갔다. 이곳에서 배우던 청년들도 선택의 기로에 섰다.
학교를 떠나 민간 비행학교에서 배우거나 꿈을 일단 접는 길이었다. 학교는 폐교되었다. 하지만 학교를 떠난 이들은 대부분 꿈을 접지 않고 비행기 날개 근처를 맴돌았다. 비행학교 비행대 관계자들은 훗날 독자적으로 미군이나 중국군으로 대일전쟁에 참전하거나 민간인으로 또는 임정 요원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그 가운데 이용근과 박희성은 결국 민간 비행 학교에서 훈련을 계속한 끝에 남먼저 조종사 자격증을 땄으며 임정은 즉시 이 두 조종사를 육군 비행병 참위로 임명하였다.
이리하여 임시정부의 원대한 꿈을 펴려던 북가주의 비행 학교와 비행대는 최대 후원자인 김종림의 재정 파탄과 함께 1921년 날개를 접었다. 날지 못한 꿈의 새였다. 하지만 임정은 치밀하고 끈질겼다. (누가 이 분들을 패싸움이나 하고 자리다툼이나 하던 루저들로만 도맷금으로 함부로 폄훼하였던가, 구업 많을진저!) 임정은 비행학교 파탄 이후에도 독자적 비행대를 편성하려 했으나 실패하였고 1943년에는 조례를 공포해 공군을 창설하려 하였다. 1945년 3월에는 미국과 공조하여 다시금 공군을 창설할 계획을 세웠으나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강대국들의 제 잇속 차리기의 틈바구니에서 무시당하고 이용당하면서도 끈질기게 돌파구를 찾으며 애를 썼으나 때가 받쳐주지 않고 훼방꾼들의 다리걸기에 황금 같은 분초가 지체되더니 결국 대일전쟁에의 참전은 무산되고 임정은 미군정에 의해 개인자격으로 뒤늦게 겨우 고국에의 입국이 허락되었다. 하지만 이미 국내는 혼란 속에서 야바위꾼들의 놀이터가 되어 있었다. 그 결과는 우리가 보는 바이다. 분단에다 동족 상잔에다 아직도 씻어내지 못한 몰이해, 편견, 무지와 응석, 색깔론, 양비론, 편의주의와 기회주의, 찢겨 나가는 사회계층들…. 이제 격동의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쳐 남북화해의 계기를 맞아 한 땀 한 땀, 그 세월 따라 바래며 일부 아물고 있는 생채기의 실밥을 뽑아 가고 있는 중이다.
임정과 미주동포들, 김종림이 꾸었던 그 꿈은 허물어졌지만 소리 없이 퍼져 날아가 여기저기 소생하였으니 임정의 줄기찬 공군 창설 노력과 정신은 해방 후 한국 공군 창설에도 큰 영감을 주었다. 비록 살기에 바쁘고 놀기에 시간이 모자라는 미주 동포들이지만 한낱 물질주의에 젖은 소수민족이요 때깔나는 주류사회에 못 끼어 안달하는 바나나거나 오렌지 빛의 이등시민일 뿐은 아니다. 우리도 이런 선지자요 행동가를 가졌노라, 나와 가족, 우리 동아리만이 아닌 겨레와 인류를 위한 더 큰 뜻을 펴기 위한 돈벌이도 있었노라고, 우리에게도 이런 꿈이 있었노라고 자녀들 앞에서 무게 있게 밥상머리에 앉게 하는 그 받침돌이 무엇이랴! 뜻이 있는 이는 돈이 없고 돈이 있는 이는 뜻이 허황한 것이 황폐한 우리 본모습은 아니리라.
돈을 벌 줄 알고 쓸 줄 아는 부자, 비록 돈이 말랐더라도 뜻을 버리지 않고 이웃과 아랫대에 전해 주는 장삼이사가 코리아타운을 이루고 곳곳의 한인들을 잇는 그물망을 짤 때 외롭게 죽어가 묻힌 김종림을 비롯한 밤하늘의 별같이 많은 이 땅의 우리 선조들에게는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형형색색 아름다운 꽃들의 벌판이 되리라.
백미대왕 김종림
이렇듯 겨레 최초의 비행학교와 비행대를 받쳐주던 김종림이란 버팀돌은 쓰러졌지만 김종림 자신은 결코 스스로 쓰러질 수 없었다. 비록 벼농사를 포기하고 서비스업과 유통업체 등을 운영하며 끊임없이 재기를 시도했지만 행운의 여신은 야속하게도 끝내 그에게 옛 영화를 허락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김종림이 벼농사의 꿈을 접고 LA 로 이주한 후 그의 가족은 아주 어렵게 살았다. 아내는 봉제공장에서, 여러 아이들도 나이에 상관 않고 각자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부모를 도와 연명하였다. 김종림 자신은 한 때는 프레스노에서, 나중에는 임페리얼 밸리에서 작은 땅을 빌려 홀로 채소 소작농을 했다. 고생하던 아내는 63 세에 일찍 죽고 자신은 89 세까지 일을 하다 양로원에서 91 세로 죽어 1973 년 잉글우드의 공원묘지에 묻혔다. 김종림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자녀들에게도 잘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남아 흩어진 자녀들도 아버지가 고국을 위해 무슨 일을 했는지, 그렇게 많은 후원을 한 것을 자녀 자신들의 노년에 이르기까지 잘 알지를 못했다. 아버지 당신의 근엄한 가부장적 인품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죽을 때까지도 버리지 않고 소중히 믿은 당신의 꿈 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다. 이런 까닭에서만은 아니었겠지만 고국은 2005년에야 겨우 격이 좀 낮은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몇 십년만의 기록적인 겨울비가 며칠째 쏟아지는 남가주의 아침이다. 오늘도 아내는 무슨 환약의 잔 알갱이들을 받아내듯 쌀통에서 한 컵 흰 쌀을 따라 씻어 버릇처럼 말없이 전기밥통의 안솥에 앉힌다. 김종림은 망했어도 망한 것이 아니다.
빗소리 속에 건네지며 담기며, 내게는 무슨 꿈을 받쳐 줄 것인가 저 쌀 한 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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