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장. 신천지 新天地
1. 선봉장 토해
한편,
대릉하에서,
1년 이상을 그렇게 가슴앓이를 하던 색토해.
하늘을 쳐다보면 허황옥의 맑고 푸른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보는 것만 같고, 나무를 바라봐도 나뭇잎들은 허황옥의 갈색 머리카락으로 변해 보인다. 옷깃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는 황옥의 맑고 고운 옥음 玉音으로 들려오고,
눈을 감아도 황옥의 뽀얀피부와 늘씬한 자태밖에 보이질 않는다.
아무리 지우려 해도 지워지기는 켜녕, 머릿 속은 허황옥의 모습들이 더 또렷이 입체적으로 조각되어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온다. 황옥의 허상들이 토해의 주위들 온통 둘려 싸고 있다.
숨이 막히고 미칠 지경이다.
꿈속에서 조차도 황옥과 청예가 서로 손을 잡고 꽃길을 거닐고 있다.
이제 허황옥보다 연적인 김청예가 더 얄밉게 느껴진다.
아니, 미운 정도가 아니라 적개심마저 생긴다.
그즈음 토해에겐 또 다른 비보 悲報가 들려온다.
한반도의 남해 바닷가에 자리 잡은 청예의 대장간이 제철 다루는 야금술이 워낙 뛰어나고, 뛰어난 기술력 만큼이나 인품도 훌륭하다고 소문이 자자하더니 드디어, 장인 匠人의 가장 높은 우두머리 즉, 모두가 우러러보는 ‘수로’ 首露라는 최고위 직책 職責에 올랐으며, 백성들로부터 존경 받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리고 얼마 후,
김청예는 반도의 김해 金海란 곳에서 금관가야 金官伽倻라는 나라를 건국하고 왕 王으로 추대되었다는 소식이다.
그리고 이 소식을 접한 허황옥은 이제 가야의 대왕이 된 김청예의 초대만 기다리고 있단다.
낙심 落心한 토해.
이제 더는 참고 기다리고 할 때가 아니다.
대릉하 포구에서 가까운 청예의 대장간으로 말을 타고 달려간다.
포구에 가까이 다가가니 마침 큰 범선 3척이 항구 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입항하는 범선들이 눈에 익은 배다.
1년 전,
김청예가 대릉하를 떠나갈 때 타고 간 범선 중 일부다.
토해는 ‘아차’하고 긴장이 된다.
범선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찬찬히 훑여보고 있자니 아는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십칠선생 동방호와 이진이다.
이진은 중부의 부친이다.
이진은 중부의 소꼽 동무들 담비. 돌식이. 가마우지. 민들레 등 4명을 대동하고 다시 대릉하로 입항하였다.
이진은 사로국의 동이족들을 신천지에 안착시키고자 동분서주 東奔西走하느라, 자신의 혈육인 중부를 여태 찾지 못하고 있었다.
드넓은 대륙에서 그것도 피난 중에 이 무리 저 무리가 뒤섞어 버린 상황에서 사람을 찾아낸다는 것은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형산강 하류의 근오지 근처를 물색하여 중부와 친하게 지냈던 동무들을 찾아 동행하게 된 것이다.
사람을 찾으려면 모르는 사람에게 인상착의 人相着衣를 설명하기보다는 한 번이라도 보았던 사람이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중부의 실종 사실을 중부의 동무들에게 설명하니, 그들 중에서 바닷가 생활에 식상 食傷해진 담비와 돌식이가 함께 가기로 흔쾌히 승낙하였다.
담비와 돌식이는 어릴 때는 알지 못하였지만 이제 청년으로 성장하여, 귀동냥으로 세상 물정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근래에 새로이 알게 된 소문이 하나 있었다.
어릴 적, 같은 동네에서 친하게 지냈던 중부의 부친이 사로국에서 알려진 무술 고수라는 사실이었다.
무술 고수인 중부의 부친이 큰 배를 타고, 바다 건너 먼 곳으로 왕래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사로국에서 무술 고수로 알려진 중부의 부친 이진이 그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니 동경의 대상이 제안하는 친구 찾기에 곧바로 동의하였다.
그런데 출항하는 날, 아침에 갑자기 가마우지와 민들레가 황급히 탑선 搭船 한다. 그들도 ‘친구 찾기’에 기꺼이 동참하겠다는 것이다.
중부의 어린 동무들도 이제는 모두 10대 중반의 헌헌장부로 변모하여, 보기만 해도 믿음직스러웠다.
토해는 얼른 십칠선생에서 달려가 두 손으로 포권의 예를 갖추고 인사를 한다.
“어르신 안녕하세요?”
십칠선생도 토해를 알아보고 반갑게 두손을 잡는다.
“허~ 토해 도련님, 오랜만일세, 반갑구먼 그런데, 도련님이 많이 여위어 보이는데, 무슨 일이 있는가?”
“아.. 아닙니다, 건강합니다”
“춘부장과 부주께서는 별일 없으시고?”
“네 강녕 康寧하십니다”
“그럼 바로 금성부로 가세나”
“네”
토해는 허왕옥을 만나려 갔다가, 도중에 십칠선생을 만나 금성부로 다시 돌아왔다.
십칠선생과 이진은 금성부주 김성한에게 지난 1여 년간 있었던 사건들을 모두 아뢴다.
1년 전,
대릉하에서 출항한 20여 척의 범선은 김해에 도착하여, 선진 제철기술을 앞세운 김청예는 토착민들에게 친화력 親和力을 발휘하여, 기술력과 지도력을 인정받아 토착 호족 豪族인 부족장들로부터 장인의 수장인 ‘수로 首露’의 호칭을 받았으며,
6개월 후에는 토착민 부족장들의 추대로 가야의 왕으로 등극하였다.
그리고 김해 김씨 金海 金氏의 시조 始祖가 되었다.
흉노 휴도왕의 왕세자였던 김일제의 동생인 왕자 김윤의 후예, 그 증손자 曾孫子 김수로(김청예)가 김해 김씨의 시조 始祖가 된다.
한반도로 도래 渡來한 김씨 金氏(가야<김해>김씨)로부터 다른 성씨 姓氏들이 분파 分派된다.
가야의 김해 김씨 金氏에서
김해 허씨 許氏, 인천 이씨 李씨가 갈라져 나온다.
한편,
십칠선생은 나머지 10여 척의 범선을 이끌고 김해를 지나 이진의 고향인 근오지(현재의 포항)에 도착하여, 형산강을 거슬러 올라가 사로국의 남해 차차웅을 알현 謁見한다.
차차웅의 삼촌, 박달 거세의 근황과 산동의 동이족 즉, 흉노족과 부여의 예족 3만여 명이 사로국으로 이주할 뜻을 비치니 적극적으로 환영한다는 약속을 받고 다시 대릉하로 왔다는 것이다.
단, 조건은 이주 인원을 두곳으로 나누어 각 일만 오천 명씩 분산시켜 정착시킨다는 것이다.
첫 번째 지역은 근오지(포항) 형산강 중류의 뜰이 넓은 강동 江東과 비화현 比火縣(현재 안강평야)이며,
두 번째 지역은 토함산 아래의 방어리 方於里로 지정하였다.
방어리의 위치는 굴아화촌 屈阿火村 (울산) 태화강 중상류에서 하선 下船하여, 경주 방면 외동, 입실지역을 거쳐야 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추령재에서 바라보면 토함산과 동해 모두 볼 수 있다.
토함산 아래 불국사 남쪽, 형산강의 남쪽 발원지 상류 부근에 방어리가 있다.
이는 남해 차차웅의 용인술과도 연관된다.
위의 두 지역은 외부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 길목이며,
토호 세력인 육부 촌장들의 세력을 어느 정도 견제 牽制 가능한, 새로운 지원 세력이 될 수도 있는 즉, 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호재 好材다.
필요할 시 활용이 쉬운 지역이다.
유사시 말을 타면 각 한 두 시진이면 왕궁에 입궐 入闕할 수 있는 거리다.
전략적인 요충지다
두 곳 모두가 바다와 연계 되어있다.
바다를 끼고 강물이 흐르는 선박이 드나들기 쉬운, 가까운 거리에 자리한 이점이 있는 지역들이다.
이는 외부의 해적들로부터 국토를 방어하고, 왕궁을 수비할 수 있는 역할을 자연스레 할 수 있다.
지리적으로 바다와 월성 왕궁의 길목 요충지를 수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월성을 멀리 감싸고 있는 바다의 동. 남쪽 출입 방향을 모두 수비할 수 있는 위치다.
태화강과 형산강의 양대 통로를 방어할 수 있는 지형과 교통의 요충지다.
특히,
사로국의 동쪽 방면의 비화현은 형산강이 거쳐 가는 통로이기도 하고, 들이 아주 넓다.
곡창지대 穀倉地帶로 알려져 있으며, 사로국이 북쪽 방향으로 진출하는 교두보 橋頭堡 역할을 담당할 중요한 지역이다.
어찌 보면 용병 활용이라고 볼 수도 있다.
김성한과 십칠선생, 박달거세, 이진 등은 며칠 동안 이주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십칠선생은 자신은 사로국에서 왜인 倭人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으며, 늘 호로병을 옆구리에 차고 다녀 이름도 호공 瓠公으로 불린다고 하였다.
대륙에서 온 사실을 아무도 모르게 비밀로 하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김청예가 가야에 순조롭게 정착하고, 토착민들의 저항없이 오히려 왕으로 추대받아, 권력을 잡은 가장 큰 이유가 선진 제철 기술이었음을 보고한다.
그리고 사로국도 가야와 비슷한 수준의 청동기 말기와 초기 제철기술을 갖추고 있음을 아뢰었다.
그래서 금성부에서는 제철 기술이 뛰어난 장인 匠人을 물색하니, 색토해 索吐解가 부상 浮上한다.
토해의 조상들이 페르시아에서부터 제철 기술로 유명한 가문이며, 뛰어난 제철 기술로 천축국 남부에까지 진출하여 왕조를 세운 후손이고, 현재의 기술도 타의 추종 追從을 불허 不許할 만할 실력이라는 것이다.
대릉하의 흉노족.
금성부에서는 십칠선생으로부터,
“사로국 남해 차차웅의 배려로 이주민의 도래를 정식으로 허락받았다”라고 보고 받았지만, 며칠간 구수회의를 이어간다.
이주민이 신천지 사로국에서 신속히 안전하게 정착할 방안을 다각도 多角度로 심의 검토하였다.
며칠 동안 구수회의 鳩首會議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회의 결론은 제철 기술이 뛰어난 색토해를 사로국으로 먼저 파견 派遣하여 이주민들의 터를 잡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서쪽에선 조선하(현재의 조하)의 후한군과 동으로는 압록수(현재의 요하)의 고구려군에게 좌우 양 방면에서 압박 당하는 모양새이며, 북쪽은 큰 강과 험준한 산맥이 가로막고 있으며 남쪽은 망망대해 즉, 발해만의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고 있다.
그러니 사면초가의 四面楚歌의 다급한 형세다.
이러한 위급한 처지에서 하루빨리 탈출하여야 한다.
금성부에서는 다음날 토해를 호출 呼出하였다
금성부주 곁에는 흉노족의 대장간 수장 首長이 시립 侍立해 있다.
제철 製鐵과 담금질에 관하여 대장간 수장이 금성부주를 대신하여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색토해는 제철기술에 관하여 조목조목 거침없이 시원스럽게 답을 한다.
옆에서 듣고 있던 금성부주 김성한은 색토해의 제철기술이 흉노의 대장간 수장보다도 여러 방면에 있어 더 깊이 있고 박식함을 느끼고는 토해에게 말한다.
“너의 뛰어난 제철 기술을 앞세워 사로국으로 먼저 가서 이주민들의 선봉 先鋒 역할을 담당할 수 있겠느냐?”
라고 물으니, 토해는 그 즉시 시원스럽게
“네 갈 수 있습니다” 자신만만하게 답을 한다.
이어서,
“금성부에서는 지금까지 대 代를 이어가면서 우리 천축인들을 잘 돌보아 주셨는데, 무슨 일이든 못하겠습니까?”
“좋다, 그럼 나흘 뒤에 출항하도록 준비하라”
“네, 알겠습니다”
토해는 진심으로 결정하고 충심으로 답하였지만, 내심 또 다른 계획이 있었다.
그것은 십칠선생 즉, 호공으로부터 들은 귀중한 지리정보 地理情報였다.
즉, 사로국으로 가려면 가야를 거쳐 간다는 항로 航路를 파악하였다.
색토해에게는 아주 중요한 정보였다.
그러면 항해 도중에 가야에서 연적 戀敵인 김청예와 한바탕 대결을 벌일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는 계산을 한 것이다.
‘김청예가 제철 기술이 뛰어나 수로 首露가 되었으며, 이제는 대왕 노릇까지 한다는데, 제철 다루는 기술이라면 조상 대대로 우리 가문이 나름대로 최고라 자부하는 터에 나라고 못 할 것이 없지’
이대로 허황옥을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가슴이 쓰리고 아프다.
포기하기 전에 어떠한 변수라도 만들어 보는 것이 한 방법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물에 빠지면 초개(草芥: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라는 식의 발상이다.
주역 周易 괘사하전 卦辭下傳에서 본 내용을 토해는 기억해 낸다.
궁즉변 窮則變
변즉통 變則通
통즉구 通則久
처지가 궁하면 변화를 꾀하여야 하고,
변하면 통할 수 있고,
통하면 오래 갈 수 있다.
보통은 이를 줄여서 ‘변즉통’을 생략시키고, ‘궁즉통’ 窮則通(궁하면 통한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 무엇인가 변화를 꾀하여야만 한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모든 것이 허사 虛事가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의 가닥이 잡혀가자, 1년간이나 수하의 일꾼들에게 전적 全的으로 맡겨놓고, 방치하다시피 놔 두었던 대장간에서 먼지가 쌓인 자신의 손때묻은 연장들을 이리저리 만져 보기도하고 두드려보기도 한다.
나흘 후,
70여 척의 크고 작은 범선이 대릉하 포구에서 위세 등등하게 출항한다.
선승인원은 1만 여명이다.
금성부의 부주 김성한은 황제로부터 받은 귀한 금은보화 중, 태반 太半을 이주 비용 및 군자금 용도로 십칠선생과 토해에게 내주었다.
남쪽으로 운항하는 범선 앞 갑판에서 넓고 푸른 바다를 바라다보는 색토해 索吐解.
굳게 다문 두터운 입술과 갈색 눈동자에는 굳은 의지가 결연 決然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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