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명호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주민욱·박준욱 본지 객원 작가
2023년 새해 벽두부터 ‘조선왕조실록·의궤의 평창 환지본처’라는 제하의 기사가 강원도 지방언론을 비롯한 중앙언론에 게재되며 화제를 모았다. 특히 강원도는 오는 6월 11일 강원특별자치도 출범을 앞두고 더욱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향후 한국 사회에서 지방문화재의 제자리 찾기가 쟁점화되리라는 암시를 해주었던 때문이다. 우선 지방문화재의 제자리가 어디인지 확정하기 곤란하기에 쟁점화될 수 있다. 그 곤란은 조선시대와 근현대사의 파란만장한 역사에서 파생한다.
예컨대 오대산사고는 임진왜란 후 설치되었다. 이유는 임진왜란 때 조선 전기의 4사고 중 3사고의 실록 자료는 모두 불타고 오직 전주사고의 실록 하나만 남았기 때문이다. 이에 임란 후 전주사고 실록을 원본으로 하여 3부를 복인(覆印)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수정본 실록은 오대산사고에 보관하고 나머지 복인본(覆印本) 3부는 춘추관사고, 태백산사고, 묘향산사고에 보관했다. 즉 오대산사고의 실록은 근본적으로 전주사고의 실록에서 연유되었다.
조선 후기 오대산사고는 춘추관에서 관리했고, 현지 관리는 월정사에서 담당했다. 그러나 1894년의 갑오개혁 이후 의정부 관리로 바뀌었다가 다시 1897년 대한제국 이후 궁내부 관리로 바뀌었다. 한편 1908년 9월에는 궁내부 산하에 규장각이 설치되었는데, 오대산사고 등 외사고(外史庫)는 규장각 기록과에서 관리했다. 1910년 일제 강점 이후에는 궁내부 업무를 계승한 이왕직 도서과에서 외사고를 관리했다.
이처럼 관리주체가 자주 바뀌면서 소장처 역시 자주 바뀌었다. 1908년에 규장각 기록과는 외사고의 자료를 경복궁으로 모두 옮기려 했지만, 경비 관계로 강화 정족산사고 자료만 경복궁으로 옮겼다. 그 외 사고 자료는 현지 군수가 관리하게 했다.
뒤이어 일제강점기인 1911년 2월에는 총독부가 이왕직 도서과에서 관리하던 외사고를 접수하면서 무주 적상산사고 자료는 이왕직 장서각(藏書閣)에 기증하고, 나머지를 관리했는데, 오대산 사고의 실록 787책을 1913년 11월 동경제국대학 도서관으로 반출했다. 또한 1914년 4월에는 총독부가 오대산사고에 남은 자료들을 서울로 옮겼고, 그 자료 중에서 오대산사고 의궤를 포함한 의궤 수백 책을 1922년 5월 궁내청으로 반출했다. 이렇게 총독부가 반출한 실록 중에서 관동대지진의 참화를 견뎌낸 실록 잔본이 1932년과 2006년 동경대에서 환수되었고, 2011년에는 80종 168책의 의궤가 궁내청에서 환수되어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일본에 반출된 실록과 의궤의 국내 환수는 비교적 명확한 논리와 근거로 추진되었다. 무엇보다도 총독부가 반출한 근거가 명확하기에, 동경대와 궁내청은 원소장처로 되돌려야 한다는 한국의 요구가 정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로 환수된 실록과 의궤를 어디에 보관할지는 복잡한 논쟁을 초래한다. 어디를 원래 소장처로 볼지 단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컨대 오대산사고에서 시작된 자료의 소장처는 의정부, 궁내부, 규장각, 장서각을 거쳐 총독부로 옮겨졌고 다시 동경대와 궁내청으로 반출되었다. 이에 따라 동경대와 궁내청에서 환수된 실록과 의궤의 원래 소장처를 오대산사고는 물론 의정부, 궁내부, 규장각, 장서각, 총독부에서 각각 주장할 수 있다. 그중 일제강점기의 조직인 총독부와 장서각을 제외한다고 해도 의정부, 궁내부, 규장각, 오대산사고에서 원소장처를 주장할 수 있다. 그 결과 현재 의정부를 계승하는 문화재청을 위시하여 궁내부를 계승하는 고궁박물관, 규장각을 계승하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오대산사고를 계승하는 월정사에서 각각 원소장처를 주장하고 있다.
이런 쟁점을 해결할 방안 중 하나는 조선시대 오대산사고를 설치한 취지를 살리면서 오늘날 지방자치제도의 취지를 강화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오대산사고를 설치한 취지는 안전한 보관이다. 평지 도시에 설치된 사고는 임진왜란 때 쉬이 약탈당하였다. 이 경험 끝에 더욱 안전한 보관을 위해 깊은 산속에 사고를 설치해 분산, 보관했다. 이는 남북분단 하에서 주요 도시가 위험에 노출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취지라 할 수 있다.
특히 지방자치라는 면에서 본다면 지방문화재의 제자리 찾기는 아주 중요하다. 지방자치는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제도 중 하나다. 헌법 제117조는 “지방자치단체는 주민의 복리에 관한 사무를 처리”라고 규정했는데, 주민의 복리는 정치적, 행정적, 경제적 자치만이 아니라 문화적, 정신적 자치도 포괄해야 마땅하다. 문화적, 정신적 자치가 배제된 지방자치는 정신적 행복을 무시하는 자치이기 때문이다. 문화적, 정신적 자치의 기본은 당연히 지방문화재 보유이다. 지방문화재를 활용한 각 지방자치단체의 문화 역량 강화는 또 국가경쟁력 강화이기도 하다.
문화적, 정신적 자치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갑오개혁에서 대한제국까지의 의정부, 궁내부, 규장각은 오늘날 지방 자치 시대에 계승할 대상이 아니라 극복할 대상이다. 이들 기관은 모두 지방 문화재를 중앙으로 집중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방자치단체에서 적절한 시설을 완비하고 요구할 경우, 지방 소장처에서 보관, 활용하는 것이 지방자치 시대의 지방문화재 제자리 찾기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