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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24
근대조선의 실체?
신숙주(申叔舟)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 언급되는 일본의 위치와 정체는?
[ 임진왜란과의 관련성 ]
대체 근세 조선이 어디에 있었길래
조선시대의 학자들이 지은 역사서에
조선의 북쪽 사막 변방 지대를
개척했다는 기록이 남을수 있을까???
또한 왜(倭)가 서역 및 중원 서북방에 있었던
선비족과 가까이 있다는 것이나
여진의 땅과 접해있다는 기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이러한 기록들이
근세조선의 유학자들이 지은
사서에 있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경악할 만한 일입니다..
더군다나, 조선시대의 모든 사서가
일제에 의해 교열,수정이라는 이름으로
왜곡됐음을 감안하면...
결코 우연이거나
그냥 넘길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 조선(통칭)의 강역은
어디를 말하고 있는 것인가 !
< 아래의 글은 개인, 또는 특정 단체등에 대해 비방,
비난의 목적으로 쓰여진 글이 아니며,
본문 중간 중간에 경어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양해바랍니다 >
고려시대 및 근대조선 시대에
쓰여진 기록을 보면서,
그 곳에 적혀있는 중요 내용이
한반도를 칭하지 않고 있는 부분이
의외로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있다면, 우리의 기록 내용과
대륙의 기록 내용을 하나 하나
비교해 보고 싶지만, 워낙 방대한 작업이라서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을 뿐입니다.
아래의 글은 고려 때, 또는 근대조선 시대에
쓰여진 기록 중에 기(旣:이미) 메모해 두었던 곳,
그리고, 그에 해당하는 대륙의 기록을
예로 들어 조선의 강역을 찿고자 했습니다.
(일부 예에 불과한 것입니다)
133-2) 북사(北史 卷 93. 列傳 81)(僭僞附庸)
①慕 容 永 據 長 子 , 拜 衛 辰 使 持 節 、
都 督 河 西 諸 軍 事 、 大 將 軍 、
朔 州 牧 、 朔 方 王 。
②姚 萇 亦 遣 使 結 好 ,
拜 衛 辰 使 持 節 、
都 督 北 朔 雜 夷 諸 軍 事 、大 將 軍 、
大 單 于 、河 西 王 、 幽 州 牧 。
▶ ① 모용영이 장자(산서성)에 거하였는데,
“위진사지절 도독하서제군사 대장군
삭주목 삭방왕”으로 벼슬을 내렸으며,
② 姚萇(요장) 역시 파견사를 보내 우호를 다짐하니,
“위진사지절 도독북삭잡이제군사
대장군 대선우 하서왕 유주목”으로 벼슬을 내렸다.
河西.....중원북방및
서북방의 황하 서쪽지대를 가리키며,
유주는 중원 서북부 일대임을 알 수 있다.
▶ 여기서 우리가 유의 할 사항은
그동안 우리가 가르치고, 배워온
역사를 부정하지 않으면,
진실을 찿기 어렵다는
딜레마에 빠지는 것이다.
위의 북사 열전을 보면,
이러한 것을 증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통상적으로 유주지방을
우리는 하북성 일부를 포함한
요녕성 및 한반도 북부지방을
말한다고 배워왔고, 가르쳐 왔다.
또한, 우리의 선대국인 고구려왕들이
유주자사를 역임했다고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하다면, 하서왕王이 유주목幽州牧이라면
하서지역 즉 하우지역이 유주였다는 말이다.
(여기서 한반도의 유주자사가 존재하고,
중원의 유주자사가 존재한다는 식의
이분법적인 설명은 이제 그만 두자)
하서 즉 하우지방은
섬서성, 감숙성 및 내몽고 악이다사,
이곳의 서남지역인 아랍선기,
악이다사 서쪽의 액제납기 지역을
말한다고 대륙측의 기록은 말하고 있다.
바로 이곳이 <요장>이 유주목사 겸
하서왕으로 봉해진 곳이다.
식민사관으로 볼 때는,
황당한 설명이겠지만
원전의 기록은 이렇게
황당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황당한 것이 아니라,
기록대로 설명하는 것뿐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엉터리 역사에
세뇌당하다 보니, 우리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역사 내용이 황당한 내용으로
꽉 차있다는 것일 뿐입니다.
이 황당한 엉터리 역사를
버리지 않는 한
진실을 찿겠다는 희망은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③ 推 永 為 大 都 督 、
大 將 軍、 大 單 于 、
雍 秦 梁 涼 四 州 牧 、
河 東 王 , 稱 蕃 於 垂 。
후연後燕의 모용영의 직책이
옹주(雍州), 진주(秦州),
양주(梁州), 량주(凉州)의
사주四州 목牧이며,
하동왕河東王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의 역사 해설은
모용수의 후연은
하북성 중산지역에 있었다고 하였으나,
실제 원전의 내용은 딴판이라는 것이다.
모용수의 후연은
현 하북성 지역에 있을 수 없는
중원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던 국가였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모용수의 후연을 왜?
하북성으로 끌고가는 것인가 ?
바로 조선사를
한반도에 넣기 위한
한 방법이었다는 것입니다.
④ 文 成 時 ,拜 難 當 營 州 刺 史 ,
還 為 外 都 大 官 。 卒 ,諡 曰 忠 。
子 和 , 隨 父 歸 魏 , 別 賜 爵 仇 池 公 。
子 德 子 襲 難 當 爵 , 早 卒 。
子 小 眼 襲 , 例 降 為 公 , 拜 天 水 太 守 ,
卒 。子 大 眼 , 別 有 傳 。 〔 一 八 〕
문성(文成)시에 저족인 “난당(難當)”을
영주자사(營州刺史)로 벼슬을 내렸다.
(우리의 선대국인 고구려왕들 역시
“영주총독”을 역임했었습니다).
현재의 하북성에 있다는 영주,
그리고 이곳의 책임자 “자사”.
그러나, 하나하나 파헤쳐 보자.
저족은 현 하북성 근처에는
말 그대로 그림자도 한번
비치지 않은 종족들이다.
또한 그의 아버지는
위(魏)에 귀부하여
구지공(감숙성)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인 <난당>이
그 관작을 세습 받았다는 것이다.
또 그가 일찍 죽자
그의 아들이 또 세습을 받았고,
♦ 천수(감숙성 천수)태수로
벼슬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하북성에 <영주>를 놓고는
100년이 흐른다 해도
해결할 수 없는
요원한 문제라는 점이다.
다른 것은 그만두고
장안을 중심으로
서쪽 지역 및 서남지역에 살고 있던
저족의 지도자에게 내린
벼슬이름이 “영주자사”라면
이 영주는 어느 곳을 말하는 것인지는
더 이상 왈가불가 할 필요는 없다.
(여기서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에서
고려의 왕이 그의 신하에게
<천수군공(天水郡公)>이라는 벼슬을 내린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말은
대륙의 <천수군공>이 있고,
또 한반도에서는, 한반도의 <천수군공>이
따로 따로 있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다고 보는가 하는 것입니다.
천수군은 감숙성 천수뿐입니다)▶
여기서 동사강목 중에서 20-1)
갑술년 의종 8년의 기록을 보면 ;
<춘 정월 아우 민(旼)을
평량후(平涼侯)에 봉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평량平凉>이라는 지명이
한반도 어디에 있을까?
<평량>은 대륙의 감숙성에 있는
원주(原州)를 말한다.
즉 평량은 원주(原州)라는 얘기다.
즉 감숙 고원현(固原縣:녕하성 고원현)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곳에 있던, <평량>지방의 후侯
즉 제후가 고려왕의
동생이라는 얘기다.
즉, 고려왕이 이곳의 제후에
자신의 동생을 임명했다는 것이다.
이곳이 고려의 강역이었을 때는
가능한 얘기다.
만약에 이곳이
다른 나라의 강역이라면,
가능한 일이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곳이 고려 땅이었으니,
이러한 일이 가능한 것입니다
⑤ 아래는 동사강목의 내용 중
몇 가지를 선택한 것입니다.
26-1) 병자년 충렬왕 2년
<본문> 원에서 탐라를
방성(房星)의 분야(分野)라 하여
말 1백 60필과 소ㆍ낙타ㆍ나귀ㆍ양을 갖다가
수산평(水山坪) 에 방목하였다.
탐라는 왜국과 해상의 통로가 되므로,
원나라에서 합포(合浦)에서와 같이
경비를 엄중히 하였다.
(수산(水山)은 지금 정의현(旌義縣) 동쪽
24 리에 있다고 합니다)
▶ 제주도에 낙타를
방목케 했다는 것이 사실인가 ?
한반도 제주가 스텝기후대로
말이나 락타를 방목하기에
좋은 곳이라면,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본인의 견해는 “결코 탐라는
현 한반도의 제주도가 아니다”입니다.
결코 한반도의 제주도가 아닌
복건성(福建省)의 복주(福州)일 것이다.
이 건에 대해서는
더 할 말이 없습니다.
또한 탐라 즉 제주도가
왜국과의 해상통로였다는
말이 맞는 말인가?
탐라는 가능한 일이겠으나
지리적인 여건으로 보아
현 제주도는
해상의 통로가 될 수 없습니다.
☞ 아래의 동사강목 기록을 보면,
우리나라 사학계의 한계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탄스럽고, 개탄스러운 일입니다.
(원문은 복사가 되지 않아 올리지 못했습니다.
또 번역본은 민족문화추진의 것을 인용하였습니다.
비록 우리의 마음에 흡족한 내용이 아닐지라도
어려운 작업을 하시는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26-5) 신사년 충렬왕 7년
<본문> 신숙주(申叔舟)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일본 땅은 여진(女眞)
흑룡강(黑龍江) 북쪽에서 시작하여
우리나라 제주의 남쪽까지에 걸쳐서
유구(琉球)와 인접되어
그 지역이 매우 길다.”
신숙주의 글을 있는 그대로 본다면,
그 나라의 육오주(陸奧州)와
하이(蝦蛦) 지방은
영고탑(寧古塔)의 동쪽 바다의 지점과
멀지 않을 것이다.
▶ 이 내용은 현재의 열도와
한반도를 설명하는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 기록을 보면 ;
(본문) 강항(姜沆)의
《간양록(看羊錄)》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일본 동산도(東山道)의
출우(出羽)ㆍ육오(陸奧) 2주(州)는
그 나라의 동쪽 구석에 있다.
육오는 땅이 하이와 인접되어 있으며,
끝없이 넓고, 산에 거주하는 오랑캐 족속들이
제대로 부락을 형성하고 있으며,
문어(文魚)ㆍ돈피[貂皮] 같은
물품이 많이 생산된다.
후한(後漢) 때 선비(鮮卑)의 단석괴(檀石槐)가
오후(烏侯)의 진수(秦水)에서
물고기가 있는 것을 보고,
잡지 못했는데 왜인(倭人)들이
그물로 잘 잡는다는 말을 듣고
왜국을 공격하여,
천여 세대를 진수 옆으로 옮겨서
고기를 잡아서 군량에 보충하였다.
진(晉)나라 때까지도
수백 호가 남아 있었다.”
▶ 위의 내용은 너무 황당해서
어안이 벙벙할 뿐입니다.
봅시다. 임진왜란시 왜적들에게
포로로 잡혀 열도에 끌려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귀국하여
보고 들은 내용을 적은 것이
<간양록>이라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후한 때 선비의 추장 단석괴가
오후의 진수(감숙성에 있는 하천)에서
물고기 잡는 법을 몰라
왜인들이 그물을 사용하여
물고기를 잘 잡는다는 말을 듣고는
왜국을 공격하여 천여세대를 잡아와
진수(감숙성에 있는 하천)에서 살면서
물고기를 잡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정말, 환타지아 환상소설을 써도
이렇게 앞뒤가 맞지않는 허구를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선비족 추장이었던 단석괴는
하북성 및 동북삼성 또는
지금의한반도와는
눈꼽 만큼의 관련도 없는
중원 서북방에서
신강성 동북지역까지를
누볐던 인물이며,
이러한 인물이
지금의 일본열도에 있다던
왜국을 침략하여
천여세대를 전리품으로 데려와
감숙성 진수라는
하천주위에 살게하며
군량을 보충해 줄
물고기를 잡게 했다는 말이
과연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물론 그가 인간이 아닌
창조주였다거나
신이었다면 가능했겠지요?......
(이 내용이 근대조선의 유학자가 기록한
내용 속에도 있다는 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 아래는 후한서 오환. 선비열전입니다.
① 冬,鮮卑寇遼西。光和元年冬,
又寇酒泉,緣邊莫不被毒。
種□日多,田畜射獵不足給食,
□石槐乃自徇行,見烏侯秦水廣從數百里,
水停不流,[二]其中有魚,不能得之。
聞倭人善網捕,於是東擊倭人國,得千餘家,
徙置秦水上,令捕魚以助糧食。◀◀◀
겨울에 선비가 요서지역에 쳐들어왔다.
광화원년 겨울에도
선비가 주천(감숙성)에 들어왔다.
종족의 입이 많아
가축을 잡고 수렵을 해와도
식량이 부족했다.
(중략) 진수 수 백리 넓은 곳에 물은
머무르지 않고 흐르기만 하는데,
그 물속에는 물고기가 있었으나 잡지 못했다.
왜인들이 그물을 가지고
물고기를 포획한다는 말을 듣고,
단석괴는 동쪽의 왜인국을
격파해 천 여가를 얻었다.
이들을 진수(秦水)에 이주시켰다.
포획한 물고기로 양식을 대신하도록
영을 내렸다는 것이다.
여기서 진수(秦水)가
어느 곳에 있는지를 알아보자.
진수는 감숙성 청수현 북쪽에 있으며,
후천하라고도 한다.
수경주에 의하면 진수는
동북의 대농산 진곡에서 발원하며,
서남쪽으로 흘러 청수에 들어간다.
이러한 곳에 선비족이 있었으며,
이와 동시에 왜인국(倭人國)은
진수(秦水)의 동쪽에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현재의 일본은 분명 한반도 동쪽
바다 가운데 열도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왜의 나라라고 합니다.
그러나 대륙측의 역사 기록물인
25사 및 자치통감,
통전등에 기록되어 있는
<왜>는 현 열도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대륙의 중원지역의
조선 강역 내에서
여러 소국으로
나누어져 살아가다가
점차 대륙의 동남부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명나라 때까지도
동남부 지역인
복건성, 강서성 일부,
호남성 남부 일부,
광동성, 광서성을 비롯,
대만, 주산군도등에 살면서
무역을 통해 강력한 군벌로 성장해
명나라의 동남부지방을 괴롭히는 바람에
명 조정에서는 엄청난 국력 소비를
낭비케 하여 결과적으로
명이 멸망하게 되는
한 요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② 因南抄緣邊,北拒丁零,東卻夫余,
西擊烏孫,盡據匈奴故地,東西萬四千餘里,
南北七千餘里,網羅山川水澤鹽池。
(抄 : 노략질할 초).(歠 : 마실 철)
1) 후 선비는 요동遼東 속국에 쳐들어왔다.
이에 오환교위 경엽은
요동遼東의 무려성으로 이동, 항거했다.
2) 북쪽으로는 정령을 방어(수비)하고,
동쪽으로는 부여를 물리치고,
서쪽으로는 오손을 격퇴시켰다.
이곳은 흉노의 옛 땅이며,
동서로는 만 사천여리
남북으로 칠천여리이다.
선비 단석괴가 이루어낸 작품이다.
그렇다면, 이 단석괴가 있던 곳은 어디일까?
그게 제일 궁금한 사항일 것이다.
: 북으로는 정령을 수비하고 -
정령은 신강성 토노번 경(境)이다.
: 동으로는 부여를 물리치고 -
후한서에는 부여의 북쪽에 약수가 흐르고
동쪽에는 거연택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음으로
영하성 서북쪽지대
액제납기 지역의 남쪽 즉 장액,
주천의 직북방 지대에 있었다.
: 서쪽으로는 오손을 격퇴시키고 -
오손은 신강성 온숙현 북쪽에 있었다.
즉 신강성 이녕현의 남쪽이며,
전한시대에 서역의 대국이었고,
이들과는 화친으로 유지하였다.
단석괴는 결과적으로,
감숙성 돈황의 서쪽지대 즉
신강성 토노번 남쪽에서
돈황주위에 있었다.
史記의 기록을 보면,
서방왕(우방왕)의 거점지는 돈황이며,
좌방왕은 운중에 있었다고 했다.
이후, 그들은 동쪽으로
계속 이동했던 것이다.
따라서, 선비족은 계속 동쪽으로 이주하여
후한 말경부터는 섬서성 서북, 감숙 북방,
영하성 북부지역 및
내몽고 중부지대의 황하 북쪽에 있으면서
황하를 건너 중원 왕조를 괴롭혔던 것이다.
이러한 선비족이 하북성이나
동북삼성 지역에 있었다고 한다면,
그 후의 역사적인 사실들은
모두 왜곡되어 버리고 맙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기록한 분들은 제대로 기록을 했으나,
후대의 인물들이 권력과 밀착하고,
개인 또는 가문의 영광(?)과
부귀와 명예를 위해 원문(原文)에
손장난질(?)을 해대고,
그 해설을 한반도와 열도에
꿰어 맞추게끔 조작했다는 것입니다.
만에 하나일지라도,
한반도 및 열도의 관계에서는
이러한 일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러한 환타지아적 설정자체가
소설로 엮는다해도 도대체가
앞뒤가 맞게끔 연결을 해야 납득이라도
할 수 있겠건만,
도무지 무슨 귀신 씨나락까처먹는 소리만
휘적거려놓았는지?...!!!
지금의 한반도나
지금의 일본열도에서
감숙성 진수까지의 길이
얼마나 험난하고,
먼 길인지?
가보지 못한 본인으로써는
짐작도 못하겠습니다......
(본문) 우리나라 이수광(李晬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도,
“근년에 중국 관리가 종성(鍾城)에 가서
홀온(忽溫)을 설유했는데,
이때에도 그 곳에 있는 왜인들에게
그 사실을 들어 알았다.” 하였고,
조선왕조 인조(仁祖) 갑신년(1644)에
표류한 왜인 15명이
성경(盛京)에서 들어왔으니,
이것은, 여진(女眞) 야춘(也春) 지방에서
옮겨온 것일 것이다.
이상 여러 설에 의거하여 본다면,
왜가 여진과 연접되어 있는 것은
의심할 것이 없다.
왜인들이 과거에 말하기를,
“육오에서 조선의 동북쪽 바다로 건너오면
매우 가까운데, 파도가 높기 때문에
의심이 나서 못 건너온다.” 하였다.
김세렴(金世濂)의 《해사록(海槎錄)》에서
또,“수길(秀吉)이
우리나라에 침입할 때에,
육오에서 배를 타고
우리의 북쪽 바다로
건너오려고 하다가,
바닷가에 진펄이 있어서
개흙이 무릎까지 빠지는 곳이
3백 리나 되기 때문에,
대나무로 울타리를 엮어서
펴고 오려다가 결국은
진창길에 지치다 지쳐서
못 오고 말았다는 말을 들었다.” 하였다.▶
위의 기록 역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풍신수길이 조선에 침입하기 전에
육오라는 곳에서 배를 타고,
우리의 북쪽바다 (즉 지금의 한반도 함경도 지방의 동해를 말하는 것 같음)로
침입 하였으나,
바닷가 즉, 그들이 상륙하려는 지역에
개흙이 무릎까지 빠지는 곳이
3 백리나 되어
되돌아갔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본인이 현재의 북한
함경도 해안가를 가보지 못해
단정 지울 수는 없지만,
동해안의 해안선에는
개흙이 별로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천이나 늪 또는
호수의 삼각주 지역에는
많은 뻘이 쌓여
이러한 말이 가능하겠지만,
해안선에 이러한 현상이
3 백리에 걸쳐 있었다는 것은
도무지 한반도의 함경도로서는
믿어지기 어려운 기록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본인의 생각은, 바다가 아니라
큰 강변(江邊)에서 상륙하려 하니,
진흙 뻘이 수 백리에 걸쳐 있기 때문에,
전함에서 내려 뭍으로 올라오려는
왜군들이 허벅지까지 빠지는 바람에
어찌할 수가 없어서, 중지했다는 말이
신빙성이 있지 않을까?!..라고 유추해 봅니다.
(본문) 원 세조가 일본을 토벌할 때에
범문호의 10만 군대만이
남해를 경유하여 들어왔을 뿐,
단석괴가 갔던 옛길로 들어가서
측면으로 공격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혹은 옛날과 지금이 바닷길이
달라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고,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미처 몰라서 그랬을 것이다.
내가 그 나라의 지도를 고찰해보니,
동서가 4천여 리, 남북이 8백 리 내지
4백~5백 리에 달하니
대체로 바다 가운데의 큰 나라다.
동쪽은 여진과 인접되었고,
동남쪽은 큰 바다요,
서쪽은 우리나라이며,
서남쪽은 중국 및
여러 오랑캐 나라들과 통한다.
그 지형이 비파(琵琶)와 같이 생겼고
옛적부터 외국의 침해를 받은 적이 없으니
그것은 바닷길이 워낙 험한 때문이요,
중국이나 여러 오랑캐들의 다니는 길이
모두 그의 서해도(西海道)를 경유하고
이곳이 아니고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 위의 기록은 현 열도를
정 반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을 보고도
이것이 한반도와 열도간의 사건이라는 얘기를 한다면
.......... 할 말이 없습니다.
<왜국>에 대한 설명을 봅시다.
현 열도를 “ 동서가 4 천 여리요,
남북이 8 백 내지 4, 5백리”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현재의 일본열도(日本列島)를
정 반대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열도는 남북이 4천 여리요,
동서가 8백 내지 4백 여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을 현재의 우리는
어떻게 이해 할 수 있을까? 걱정입니다.
동쪽은 여진과 가까이 붙어 있고(인접),
동남쪽은 큰 바다이고,
서쪽은 우리나라(즉 조선)이며,
서남쪽은 중국 및
여러 오랑캐나라들과 통한다.
이렇게, 황당함이 그 짝을 찾아볼 수 없을만큼
환타지아적인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열도는 동쪽으로는
이 지구에서 가장 큰
태평양 바다일 뿐이다.
위 설명대로라면,
여진족은 태평양 바다 속에서 살아가는
아가미 달린 인간이어야 한다.
현 일본열도는 동서남북 모두가
바다에 둘러 쌓인 섬이라는 것이다.
동남쪽이 바다라는 말은
그 나머지는 육지라는 말이다.
서쪽은 현 반도와 육지로
국경를 맞대고 있다는 말이며,
서남쪽은 대륙의 중국 및
여러 오랑캐나라와
육지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지형지세가 바다 가운데 있는
섬들의 나라 日本列島에서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위의 기록대로 알기 쉽게 말하면,
⑴ 동남쪽이 바다라는 것은
대만에서 해남도 사이의 바다를 말하며,
⑵ 서쪽은 대륙의 조선을 말하는 것이요.
⑶ 서남쪽은 명나라 및 여타 종족들을 칭하고
⑷ 동쪽은 여진의 동쪽변경인
산동성 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위의 기록을 보고,
그 지형 지리에 맞게 대입해 본 것입니다.
또한 이곳을 보면 ; 동서 4-5천리요,
남북은 천리 미만일 것입니다.
위의 설명과도 부합하는
지형 지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륙의 복건성으로부터 광서성 지역까지)
(본문) 그러므로, 그 나라에서는
서해도(西海道)의 비전주(肥前州)에다
태재부(太宰府)를 설치하고,
또 구주 절도사(九州節度使)라 하여
방어하게 하였고,
또 동산도(東山道)의
하이(蝦蛦) 지방의 바닷가에다
송전수(松前守)를 설치하여
이 지역을 지키며,
육오(陸奧)의 바닷가에다
진수부(鎭守府)를 설치하고,
또 안찰사(按察使)를 두어서
언제나 육오와 출우(出羽)의
2주(州)를 관할하며,
관백(關白)은 관동(關東)에
주둔하여, 정이 대장군(征夷大將軍)이라 한다.
그들이 국가 방위에 대하여
이렇게 엄밀히 하는 것은
하이족의 침략을 받을까
두려워해서만 아니라,
그 동쪽 구석이 여진과
인접되어 있으므로,
이것을 염려하여
대비하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 서해도 라면 위의 기록으로 보아
구주(큐우슈우)를 말하고 있고,
동산도를 하이지방 이라고
(북해도 : 동산도가 아니라 북산도 라야 맞다) 했다면,
현 열도의 동쪽은
태평양에 가로 막혀
그 어떤 침략군도 섣불리
들어올 수 없는 모양새이다.
그런데 이곳에
여진족이 인접해 있어
쳐들어 올까하여
관동지역에 관백이
“정이 대장군”이라 하여
주둔하고 있었다.
( 저자가 임의로 생각한 것을 기록한 것임).
문제는 열도와
기록문속의 지형지리가
전혀 딴 나라를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이족은 현 북해도에 살고 있던
옛 종족으로 아이누족으로 해설하고 있습니다)
27-7) 임진년 충렬왕 18년
(본문) 저 왜라는 나라는
지형이 비파(琵琶)처럼
머리가 서쪽으로 뾰족하게 내밀고 있어서
왜가 다른 나라를 침략하기에는 유리하나,
남의 나라가 공격해
들어갈 수가 없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중국의 강ㆍ절(江浙) 지방이
가장 많은 피해를 받으면서도
어찌할 수가 없었는데,
더구나 조그마한 나라로서야 문제가 되겠는가?
이는 원나라 황제의 잘못 생각이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잘한 계책이 아니었었다.
▶ 현 열도에 왜가 있었다면,
가장 많은 피해를 볼 지역이 어디인가.
유치원생들에게 물어봐도
“우리나라요!!..” 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위의 본문을 보면 ;
중국의 강. 절지방 (절강성)지방이
가장 많은 피해를 받으면서도
속수무책이었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왜들은 치고, 빠지는
게릴라식 전투에 능했던 모양입니다).
▶ 결국 당시의 왜국은 현 열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 큰 나라에서 명령이 있으면
어기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갑자기 원나라의 사랑받는 사위가 되어
무슨 말이든 모두 들어주는 판이었으니,
군대를 철수한 뒤에
그 방어시설을 제거하고
사절을 보내어 예물을 후하게 주고
무역을 개시하며 친선을 도모하여
그들로 하여금 지난번의 사건이
우리의 본의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했다면, 저들도 물자의 공세에 끌려서
원한을 버리고 친선을 회복했을 것이다.
아무런 힘도 없으면서
큰 나라를 등에 업고
큰소리로 공갈을 일삼으며,
사절이 왔는데도 대우를 하지 아니하고,
신우(辛禑) 초기에는
등경광(藤經光)을 유인하여
죽이려 하다가 도망쳐 달아나게 하였다.
이때부터 그들에게 참혹한 화를
당하게 만들었으니, 이렇게
자기의 역량을 생각지 않고서야
화를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다.”
▶ 위의 글은 절대로 동사강목의
실제 저자가 기록한
원문속의 내용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은연중에 자신의 국가를 낮추고 ,
자신의 국가는
의리와 돌아가는 국제정세도 모르는
비천한 국가의 모습으로,
왜를 의리 있는, 강력한 국가로 묘사하는
이런 내용은 후대에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삽입했거나,
왜곡시켰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18-5) 기축년 예종 4년 (본문)
최씨(崔氏)는 이렇게 적었다.
“변방을 개척한 실수는
숙종(肅宗)에게서 시작되어
예종(睿宗) 때에 이루어졌는데,
재물을 한없이 낭비하고,
죄 없는 백성을 사역(使役)하여
북쪽 사막(沙漠)을 정복한 것은
다만 우리나라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오랑캐의 분심만
돋우어 놓은 것뿐이니,
얻은 것이 어찌 잃은 것을
보상(報償)하겠는가?”
▶ 이해키 어려운 기록이다.
또한 이 동사강목을 지은 자도
웃기는 사람이고,
최씨는 조선 사람이 맞긴 맞나 ?
변방을 개척하여
국가의 영토를 보전하고
국가를 방위하려는 행위가
“실수”쯤으로 여겨진다면,
그 국가는 무엇에 쓸모가 있었을까?
개탄스러운 일이며,
위선적인 위정자(僞政者?)들과,
일맥상통하는 그런 기록 내용이다.
(저자의 원문에 과연 이런 기록이 있었을까?
아마도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또한 이 기록을 한반도에 넣고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북쪽 사막을 정복” 한 것이라는
내용 때문이다.
한반도 북부의 요녕성 및 길림성
그 어디에도 주변조차도 사막은 없다.
이 말은 다른 말로 바꾼다면 ;
산서성 서북부 및 섬서성 북부의
내몽고 대막지대 즉
사막지대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려는 결코
한반도에 있을 수 없는
대륙 중원의 국가였다는 것이다.
한반도 북부지방 어느 곳에
그 큰 사막지대가 숨겨져 있는 것일까?
동 삼성지역 어디가 사막시대인가 ?
결국 위의 기록대로라면
고려 예종 후에
동삼성 및 한반도 지역에
어마어마한 천지개벽이 있어
지형지리 및 기후등이
훌러덩 모조리 바뀌었다는 말로
대신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과학자들은
그런 일은 없었다고 한다.
도대체 어찌된 일인 것인가?
이는 <고려>라는
우리의 선조국가의 위치를
중원에 놓고 바라보면
간단하게 이해 할 수 있는
아주 상식적인 사항인 것이다.
즉 “북쪽 사막을 정복”한 곳은
산서성 북부로부터 섬서성 북부의
내몽고 대막지대(大漠地帶)를 말한다는 것이다.
뭐가 그리도 복잡하게 설명하고,
떠들고, 건건이 꼬뚜리를 잡고,
국수주의자니!~ 민족주의자니!~
왈가왈부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 참고도서목록 ]
이렇게 자주 반복하여 관련도서목록을 기재해 올리는 것은
대륙조선사에 대해 테마별, 또는 근세조선이면 근세조선
임진왜란이면, 임진왜란에 대해서 나름대로 공부를 해 보았거나,
연구를 해 보았거나, 아니면, 여기저기 관련 싸이트에서 얻은 지식으로
그들이 주장하는 대륙조선사의 맹점은 무엇인가? 라는 의문부호를 달고
최소한의 공부한 흔적(痕跡)을 들이대밀고, 토론을 하며,
서로 관련사료을 토대로 신랄하게 격론을 통해 반박을 하는 것이
사람의 기본 됨됨이가 아니겠는가?
본인은 이런사람들을 일컬어 나무늘보(?)가 현존하는 동물 중에
가장 빠른 동물이다라는 궤변을 주장하는 자로 규정하고 싶다.
[ 정용석 선생님의 저서 ]
1. 중원(中原) 참과 거짓의 역사 : 청노루 1995
2. 의병인가 반란인가? : 청노루 1996
3. 참과 거짓의 역사 : 청노루 1996
4.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반도에 없었다.: 동신출판사 1997
5. 일본은 열도(列島)에 없었다.: 청노루1997
6. 선화봉사 고려도경 : 움직이는 책 1999
7. 실크로드는 신라인의 길 : 움직이는 책 1999
8. 또 다른 조선의 역사 : 동신출판사 2003
9. 고구려. 백제. 신라가 중국대륙을 지배했다. : 책이 있는 마을 2004
[ 정용석 선생님의 또 다른 조선의 역사 참조 :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지금의 한반도 함경북도 함경남도가 한반도에서 제일 많은 곡식이 생산되는
상식적으로 이해조차 되지않는 곡창지대로 기술되어 있음]
22-4) 병인년 희종 2년○
이해에 몽고의 철목진(鐵木眞)이
황제(皇帝)를 참칭하고
국호를 몽고(蒙古)라 하였다.
몽고부(蒙古部)는
오환(烏桓)의 북쪽에 위치하여
대대로 요(遼)와 금(金)에 공물을 바쳤다.
달단(韃靼)에게 통괄되었다가
철목진에 이르러 차츰 부강하여,
모든 부(部)를 병탄하더니,
이때에 이르러 제(帝)를 칭하고,
스스로 성길사황제(成吉思皇帝)라 하였다.
이가 태조이다▶ 몽고부는
오환의 북쪽에 있었다.
맞는 말입니다.
오환은 바로 산서서북지대 및
섬서성 북부 및 서북지대에 있었으니,
그 북쪽 즉 외몽고 중부지방에 있었습니다.
오환이 동 삼성 지역에 있었다는
넉두리해설은 이제 그만 하십시다.
후한서 오환전 ;
그들의 땅은 사막의 한 가운데 있으며,
그 땅에는 蝮(살모사 복) 및
蛇(뱀 사)들이 많다.(중략).
순제양가四年 겨울에
오환이 운중에 쳐들어왔다는 기록이다.
하북성 북쪽 또 동북삼성 지역에 있던
오환이 하북성 및 산서성을 통과해
섬서성 서북방 “운중”에
노략질 하러 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운중”의 북쪽에 “오환”이 있고
“운중”의 서북쪽에 “선비”가 있었던 것이다.
분명하게도 “오환”이 운중을 침략했으며,
도요장군 耿曄(경엽) 및
그 군병軍兵에 의해 추격당했으며,
접전을 벌렸으나 불리했고,
이곳은 사남현(沙南縣)지역이라는 것이다.
“사남현”은 운중군 속현(屬縣)이며,
이곳에 란지성이 있다.
여기서 중요한 문구는♦
“度遼營千人(도요영천인)”이라는 문구다.
요하=요수를 건너
천명의 병사들이 영營을 설치했고,
병력을 배치 상군(上郡)에
주둔했다는 것이다.
이는 오환을 토벌키위해서이며,
오환은 퇴각했다.
이러함에도 오환과 선비가
하북성 또는 동북삼성 지역에
있었다고 할 것인가!
이들이 바로 동호東胡이며,
동이東夷이며, 대조선(大朝鮮)의
영토 내에 있었던 사건인 것이다.
연희延熹 9년九年 여름에는
오환 및 선비, 남흉노들이
아홉 개 군의 변경에 쳐들어 왔다.
(중략) 장군將軍 장환이
이들을 쳐 물리치고,
새(塞)지역외로 몰아냈다는 것이다.
즉 새외塞外지역으로 퇴각했다는 말이다.
會曹操平河北,閻柔率鮮卑、
烏桓歸附,操即以柔為校尉。
♦建安十二年,曹操自征烏桓,
大破蹋頓於柳城,斬之,首虜二十餘萬人。
袁尚與樓班、烏延等皆走遼東,
遼東太守公孫康並斬送之。
其餘□萬餘落,悉徙居中國雲。
조조가 하북을 평정했다.
(하북 : 하투(하남)지역의 황하 북안北岸).
오환은 귀부하였다.
건안 十二년에 조조가 오환을 정벌,
蹋頓(답돈)을 유성에서 대파하고
斬首(참수)했다.
이십여 만인을 포로로 잡았다.
원상 및 루반, 오연등은
모두 요동으로 도주했다.
요동태수 공손강이
이들의 목을 베어 보냈다.
따라서 조조가 격파한
오환 및 평정한 하북은
현재의 하북성이 아니라,
섬서성 북방 및 영하성 북방,
감숙성 북방지역의
하투지방의 북방
즉 황하 북쪽지대
(이곳이 옛 기록에 “하북”으로 되어 있다)
를 말하는 것이며, “요동”이라는 지명 역시도
이 주위에 있을 수밖에 없다.
공손강이 태수를 지낸
“요동군”은 현재의 동북삼성 지역
“요동”이 아니라 하투지역의
황하 남안지대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며,
이곳 주위의 한수(漢水) 즉
황하를 “공손”씨들이 차지했었다는
사서의 기록을 현재의 우리는 유념해야 한다.
▶ 추가 ; 선비족
선비족은 선비산으로부터
유래 한다고 합니다.
그 선비산 및
선비족들의 활동 강역을
간단하게 보면서, 그들의 시원지를
찿아 보십시다.
( 선비족들이 동 삼성 지역에서 시원한다는 주장은
근거가 미약한 소수의 학자가 주장하는 내용이며,
선비족들이 동 삼성 지역에 있어야만
조선의 강역이 한반도에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⑤152) 魏 書 卷一. 序 紀 第一
昔 黃 帝 有 子 二 十 五 人 ,或 內 列 諸 華 ,
或 外 分 荒 服 ,昌 意 少 子 ,
▶受 封 北 土 ,國 有 大 鮮 卑 山 ,
因 以 為 號 。其 後,世 為 君 長,
▶統 幽 都 之 北 ,廣 漠 之 野 ,
畜 牧 遷 徙 ,射 獵 為 業 ,淳 樸 為 俗 ,
簡 易 為 化 ,不 為 文 字 ,刻 木 紀 契 而 已,
世 事 遠 近 ,人 相 傳 授 ,如 史 官 之 紀 錄 焉 。
黃 帝 以 土 德 王 ,北 俗 謂 土 為 托 ,
謂 后 為 跋 , 故 以 為 氏 。
其 裔 始 均 ,入 仕 堯 世 ,☞逐 女 魃 於 弱 水 之 北 ,
民 賴 其 勤 , 帝 舜 嘉 之 ,命 為 田 祖 。
爰 歷 三 代 , 以 及 秦 漢 , 獯 鬻 、 獫 狁 、
山 戎 、匈 奴 之 屬 , 累 代 殘 暴 ,
作 害 中 州 , 而 始 均 之 裔 ,
不 交 南 夏 , 是 以 載 籍 無 聞 焉 。
[魃 (魃 : 가물 귀신발, 한발(가뭄)의 신)]
☞ 상 기록은 말 그대로
<탁발>씨들의 북위北魏의 역사서이다.
헌원 황제의 스물다섯 아들 중의
<창의>의 소자少子가 북쪽의 땅을 하사받아,
그곳의 왕으로 봉 받았다는 것이다.
그 봉 받은 나라 즉
북쪽의 땅 안에 큰 산이 있는데
<선비산>이다.
그 이름을 취하여
<호(號)>가 되었다.
그 후에 군장으로써 계속 이어 왔다.
유도(幽都)의 북쪽으로
광막( 광활한 사막지대 )한 들판에서
가축을 기르며 옮겨 다니며
사냥을 하며 살아가고
(중략) 문자가 없었다.
(중략) 북쪽의 풍습이
땅(土)은 <托>이요,
후<后:임금>는 <拔>이었으므로
이를 씨(氏) 즉 성姓으로 하였다.
가뭄의 신을 따라
※<약수>의 북쪽으로 이동했다.
즉 현재의 장액, 주천
북방지대의 약수의 서북쪽에서
이곳 지역으로 이주했다는 말이다.
이러한 선비족들을
동 삼성 지역에서 시원 한다는 말이
나올 수가 있을까 하는 점이다.
<통유도지북 統 幽 都 之 北 ,광막지야 廣 漠 之 野>.
유도의 북쪽이라는 곳은 바로
대막지대 즉 광막 지대이다.
즉 유도의 북쪽 광할한
사막지대의 들판에서 가축을 기르며,
철 따라 이동하는 유목민족이었다는 얘기다.
이러한 유도(幽都) 즉 유주(幽州)가
하북성이나 동 삼성지역에
있을 수가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사학자님들은
본인보다도 휠씬 더 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이니
이러한 대륙의 사서를 많이 접하고,
공부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한반도만을
고집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진정 모를 일이다.
(중략). 진한秦漢시대에,
훈죽, 험윤, 산융, 흉노에 속해 있었으며,
누대에 걸쳐 잔폭(殘暴)=잔학하여
중주中州=중원에 해가 되었다.
(중략).※ 약수弱水는 ;
장액하를 말하며,
옛 유사이며, 黑水이다.
북으로 흘러 거연택으로 들어간다.
이 거연택의 남쪽지대에 <부여>가 있었으며,
동북에는 읍루挹婁가,
서쪽에는 선비鮮卑가 있었다.
그 남쪽에는 고구려高句麗가 있었다고
<후한서>는 기록하고 있다. 끝.
▶ 이렇게 우리의 역사는
길을 잃은 미아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희망을 버리지 않고,
다시 찿을 수 있는 기회,
즉 시간을 기다려야 되겠습니다.
우리역사의 비밀 coo2.net의 박달 님의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