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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수봉 정용진시인과 만나는 문학세계 원문보기 글쓴이: 수봉
3) 꽃은 희망이다.
무궁화(無窮花)
연보라 빛
애틋한 품속에
백의민족(白衣民族)의
맑은 혼을
가득히 숨겨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살아 숨쉬는
경천애인(敬天愛人)
홍익인간(弘益人間)
높고 깊은 조국애.
하늘 향한
곧은 줄기
푸르른 잎
한얼의 기상일레.
영원무궁한 선열들의
고결한 숨결 속에
아름다운 후예들의
뜨거운 사랑아!
연보라 빛
그윽한 가슴 가득
타오르는
민족의 혼 불
우리나라꽃
무궁화. –정용진, <무궁화> 전문
무궁화
-續章-
올애비 보완듯이
이 낢을 훔쳐다가
제 뜰에 심어 놓고 몰래 반겨 하던 것을
고모부 야단 바람에 되 옮겨다 심었더니.....
한해를 건너서도 팔월 보름게야
활활 타는 볕을 몰라라 피는 양은
스러진 조카놈 모습을 다시 보는듯 하구나.
무엇을 못잊어서 아물지 못하느냐
이제 남은 것은 오막살이 뿐이로다
달빛에 임종을 보는듯 혼자 밤을 지킨다. -박병순, <무궁화> 전문
무궁화 꽃
미주로 이민 온지
어언 서른 다섯 해
떠나온 조국이 하도 그리워
문 앞 뜰에
조국의 얼
민족 혼(魂)의 상징인
나라꽃 무궁화 한그루를 심고
새 싹이 돋고
꽃이 필 때 마다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슴을 기울였다.
한해가 기우는 세밑
첫 서리가 내리던 날
무궁화나무 앞에 서서
경례를 붙이고
전정가위를 들고
곁가지를 치기시작 했다.
더 나은
민족의 꽃을 피우기 위하여
더 강한
민족의 힘을 키우기 위하여
더 광활한
한얼의 꿈을
이 젊은 대륙에 펼치기 위하여
나는
조국의 혼
민족의 꽃 앞에
온갖 정성을 기우려
물과 거름을 주었다.
우리나라의 국화
우리 조상의 얼
우리 민족의 영원한 혼
무궁화 꽃 만세! -정용진, <무궁화 꽃> 전문.
무궁화
1
태초 신의 뜻은 천지 곁의 한 알 씨앗
삼천리 고을마다 철철이 피고 지리니
내일은 신의 약속만큼 밝아오는 저 언덕
2
푸름 향해 뻗은 줄기 꺽여저도 다시 뻗고
어딜디 어디신 할버지 살아생전 말씀처럼
순박한 겨레의 뜻을 꽃잎마다 새겼다.
3
날 저문 뜨락에도 저리 밝은 모습이듯
슬픈 단 하나 원도 꽃이 피듯 잎이 피듯
무궁화 꽃 앞에 서서 두 손 가만 모은다. -김호길, <무궁화> 전문.
무궁화 꽃 세 송이
섬진강
花開를 적시며
절망의 끝으로 흐를 때
뙤약볕과 먼지에 덮인 이모님 댁의
마당 귀에는
무궁화 세 송이 피어 있었네,
한 송이는 여윈 강을 내려다보고
또 한 잎은 버려진 곽과 같은
집안을 쳐다보고
마지막 한 송이
하늘을 바라보며
높고 뜨거운 것을 향하여 있었네.
질긴 슬픔을 치우듯 이모님은
마른 잡초를 쳐가고
등에 업힌 아이는
한 뼘 논처럼 타 들어가도
누이는 흙에 엎드려
일어설 줄 몰랐네.
눈썰미 같은 콩밭에서
지친 콩대로 주저앉은 내 조카의
눈동자는 맑았지만
섬진강 물이 마르는
유월과 칠월의 불볕이여
한 줄기 생수를 얻기 위해
심 줄을 끊어
강심에 박고
무너져 기절하는 이숙을 위해
지닌 건 아픔뿐인 나는
큰소리로 울지 못하고,
또 한 그루
우리나라 꽃으로 서서
슬퍼하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한 조각 구름 밑을
오래도록 치어다보았네. –나해철, <무궁화 꽃 세 송이> 전문.
하나됨 굿
백두산에 무궁화꽃
한라산에 진달래꽃
나란히 나란히 웃으며
피어 춤출 때
말없이 우리 잡은 손에
눈으로 통하는 더운 가슴에
넘실대는 바다.
헤어졌던 아픈 사연
묻지 말고 묻지 말고
출렁이는 저 바다 처럼
백두산에 무궁화꽃
한라산에 진달래꽃
나란히 나란히 피워
노래처럼 화알짝. -장소현, <하나됨 굿> 전문.
벗 꽃
봄이 산들 바람을 안고 오아진 것이라면
벚꽃은 바람결 위에 피는 황홀한 무데기 구름이뇨.
구름을 따라 청춘이 아롱져
구름을 따라 벌 나비 달가워
꽃구름 타고 조는 사월의 태양.....
심장을 태우며 태우며....
꽃이 바람결 위에 피는 구름이라면
구름은 젊은 숨결을 수놓은 한 폭의 그림이러뇨. -박병순, < 벗 꽃> 전문.
수은등 아래 벗 꽃
사직공원 비탈길,
벗 꽃이 필 때면
나는 아팠다
견디기 위해
도취했다
피안에서 이쪽으로 터져 나온 꽃들이
수은등을 받고 있을 때 그 아래선
어떤 죄악도 아름다워
아무나 붙잡고 입맞추고 싶고
깬 소주 병으로 긋고 싶은 봄밤이었다
사춘기 때 수음 직후의 그
죽어버리고 싶은 죄의식처럼,
그 똥 덩어리에 뚝뚝 떨어지던 죄처럼,
벗 꽃이 추악하게, 다 졌을 때
나는 나의 생이 이렇게 될 줄
그때 이미 다 알았다
이제는 그 살의의 빛,
그 죄마저 부럽고 그립다
이젠 나를 떠나라고 말한,
오직 축하해주고 싶은,
늦은 사랑을
바래다 주고 오는 길에서
나는 비로서
이번 생을 눈부시게 했던
벗 꽃들 사이 수은등을 올려다본다. –황지우, <수은등 아래 벗 꽃> 전문.
버들 꽃
버들 꽃 바람을 싫어하는데
바람은 한사 버들을 졸라댄다.
꾀꼬리 울음을 잊은 가지에
속 깃 가벼운 한숨을 하늘 몰래 띄우면
한 점 사푼 떠 사라질 듯 살아나
한나절 햇볕 포근히 젖어 꿈도 애리다. -이설주, <버들 꽃> 전문.
싸리 꽃
붉은 꽃이 핀다
어떠냐
이만해도 제법 산향(山香)이 풍기지 않느냐. -김동명, <싸리 꽃> 전문.
싸리 꽃
그 꽃은
작은 싸리 꽃
아 산들 한 가을이었다.
봄 여름
가리지않고
언제나 가을이었다.
말라서
바스라져도
향기 남은 가을이었다. –초정. 김승옥, <싸리꽃> 전문.
싸리 꽃
1테 머리 지끈 질끈
물 밀 듯 노호하며
번개같이
너희들 뛰어넘던
이 울타리
어느덧 홍 싸리 꽃이
울미하게 피었군.
2
울분이
서린 누리
스쳐오는 가을 바람
귓전을 치는 듯
이글대는 혼의 부르짓음
가슴이 찔리는구나
뼈마디가
쩔한다.
3
백로가 어젯밤.
어젯밤에도 피는 싸리 꽃.
앞으로 며칠이면
철이 바뀌어
추분인데
피빛 채
펄럭이던 기폭
눈시울이 선하다.
4
아직도 희부덕덕
이 못난
하늘 아래
풀벌레 소리에
싸리 꽃은 피는군
이 땅이 하 그리워
정성스리
피는 영들. –철운, 조종현 <싸리 꽃> 전문.
선인장
어느 알길 없는
험상한 뜻으로
어찌 이렇게도 상형(象形)하였느뇨.
그 무슨 원한에 골이 패어
스스로 형속(荊 東東)의 관을 쓰고도
견디어 견디어
창상(滄桑)스처간 십년
하루 같이 지켜 온
이제 섬돌위에
붉은 놀빛도 걷히고
한밤 이슬지는 이 정밀(靜謐)을 밀고
전설처럼 피어나는 황홀이여!
또 무슨 계시(啓示)를 위하여
경건한 입술 가으로
은은한 훈향(薰香)을 사리느뇨. -서정봉, <선인장> 전문.
선인장
바람이 좋아서
알몸으로
전신에 멍이 들도록
바람을 맞으며
선인장이 서있다.
오뉴월 땡볕에도
지칠 줄 모르고
달아오르는 모래밭에
발을 묻고 선 너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
몰려오는 바람 소리에
신명이 나서
가시 돋친 손을 휘저으며
광야를 사랑하는
방랑의 혼.
바람이 좋아서
알몸으로
전신에 멍이 들도록
바람을 맞으며
선인장이 서 있다. -정용진, <선인장> 전문.
선인장
도사려
온 몸을
가시로 동인
천년의
발돋움
고달픈
사막의 여정
혼자 앓던 가슴
꽃봉오리를
물었다
아!
이 어인 만남인가
상흔(傷痕)을 딛고 선
내 육순의
뜨락에
우뚝 솟은
초록 가시 기둥. –김모수 <선인장> 전문.
오동 꽃
조찰히 맑은 아침
먼 천상에 선 듯
소리 없이 땅에 지누나.
오직 높으고 으젓하기
당신 같은 꽃!
하늘만한 애모(哀慕)의 애달픔에도
끝내 도리(桃李)처럼
스스로 낮추지는 않았거니.
목숨이란 본시
한갓 죄욕일진대
입어야 하던 청춘도
이제사 남길 회한 하나도 없이
회한과 함께 하나 둘
부끄러운 의상(衣裳)인양
밤 아래 던저 벗는 당신이야!
끝내 닿을 수 없던 사랑이매
오동꽃 소리 없이 지는 아침은
신신산골 알리는
간장 속 저물은 뻐꾸기 울음소리- -유치환, <오동 꽃> 전문.
가을 오동
외진 골목
돌우물 가득
차가운 달이 고인다.
풍우잔설(風雨殘雪)에
온 몸이 주름진
오동 한그루.
전신에
바람을
두루마리로 감고
끝 끝이 매어 달린 하늘
마지막 잎새마저 떨구며
마음을 비우고
가슴을 비운다.
한이 쌓이면
소리가 되는가
소리가 잦으면
가락이 되는가
오동의
텅 빈 가슴 속에는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의 혼이 살아
춤을 춘다.
그 슬픈 가락이
달빛 같이 푸르다. -정용진, <가을 오동> 전문.
생명의 특징은 희망을 품고 산다는 것이다. 꽃은 열매를 바라며 스스로 발하는 향기로 벌과 나비를 부르고, 새들은 간절한 노래를 통하여 짝을 만나고, 인간들은 그리워하는 마음과 깊은 사랑으로 가정을 이루고, 자손들을 낳아 인격체로 성장 시킨다. 이 모두가 희망의 아름다운 결실이다. 모든 생명들이 저마다 저다운 노래와 몸짓으로 반려를 부르는 것은 음양의 조화를 이뤄 자신의 희망을 고귀한 열매로 완성 시키려는 욕망 때문이다. 이것이 없다면 세상은 얼마나 무미건조 하겠는가?
무궁화는 우리나라 국화다. 꽃말 “일편단심”이 의미하듯 태국기와 함께 한(韓) 민족의 절대적인 존재 의미 이기도하다.
김호길 시인은 미주에 시조를 보급하며 농장을 경영하는 시조 시인이다.
애국가와 태국기 이를 위하여 우리의 조상들은 목숨을 걸었다. 이는 우리의 조국과 민족의 고귀한 상징이요 민족혼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싸리 꽃을 쓴 조종현 시조 시인은 미당 서정주 시인과 함께 중앙불교 전문학교(현 동국대) 출신으로 소설가 조정래씨의 엄친이다. 나와는 우석상고에 몸담고 있을 때 교장선생님으로 모신 인연이 있는 분이다.
벚꽃은 일본의 국화다. 그들은 사구라고 하면서 일시에 몰려 핀다고 자기들의 국민성답다고 자랑한다. 이들은 자기들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요. 민족의 뿌리가 되는 우리나라를 병탄(倂呑)하고서 우리 민족의 정궁(正宮)인 광화문과 경복궁의 일부를 헐고 북악산 밑에는 경무대를 큰 대자 모양으로, 경복궁 정면에는 중앙청(조선총독부)은 날일자로, 시청은 밑본 자형상으로 지어 상공에서 내려다보면 대일본(大日本)을 나타내었다니 치밀하고 집요하고 악랄한 민족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창덕궁을 비원(秘苑)으로 강등하여 관람객들의 놀이터로,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개조하여 자기나라의 국화인 벚꽃을 가득 심고 민족의 심지를 잃은 채 동물들의 재주부림에 한눈을 팔고 벚꽃 놀이에 혼을 빼앗기었으니 너무 한심한 생각이 든다. 근래에 각성 된 지성들이 해군의 중심지인 진해 벚꽃놀이를 규탄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하기야 민족의 성(姓)씨를 없애고 언어를 말살하여 내선일체를 주장한 저들이 이제는 독도가 자기 땅이라고 돌발적 행위를 일삼고 있으니 저들은 국제적 몰염치 범이다. 우리 국민들은 각성해야 할 일이다. 벚꽃의 꽃말은 “뛰어난 미인(絶世美人)”이다.
원산지는 한국, 중국, 일본이다. 우리나라의 진품종인 제주 왕 벚나무로 하루 속히 바꿔 심어야 할 일이다.
오동나무는 육질이 연하고 결이 고와 악기의 재료로 쓰이는 나무로 관(棺)으로도 귀하게 쓰인다. 선인들은 “오동 한 잎이 땅에 떨어지니 천하에 가을이 온 을 알겠구나(梧桐一葉落 天下盡知秋)라 하였고 ”매화는 일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고 오동은 천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닌다.“(梅一生寒不賣香 桐千年恒藏曲)이라고 시를 읊고 매화의 지조와 오동의 숨은 가락을 칭송하였다. 꽃말은”상서(祥瑞)“ 다.
민들레
까닭 없이 마음이 외로울 때는
노오란 민들레꽃 한 송이도
애처럽게 그리워지는데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소리쳐 부를 수도 없는 이 아득한 거리에
그대 조용히 나를 찾아오느니
사랑한다는 말 이 한마디는
내 이 세상 온전히 떠난 뒤에 남을 것
잃어버린다 못잊어 차라리 병이 되어도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그대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느니 -조지훈, <민들레> 전문.
민들레
민들레 풀 씨처럼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게
그렇게 세상의 강을 건너는 수는 없을까
민들레가 나에게 가르쳐 주었네
슬프면 때로 슬피 울라고
그러면 민들레 풀 씨처럼 가벼워진다고
슬픔은 왜
저만치 떨어져서 바라보면
슬프지 않은 것일까
민들레 풀 씨처럼
얼마만큼의 거리를 갖고
그렇게 세상 위를 떠다닐 수는 없을까
민들레가 나에게 가르쳐 주었네
슬프면 때로 슬피 울라고
그러면 민들에 풀 씨처럼 가벼워진다고 -류시화, <민들레> 전문.
민들레
나를 어찌 알고
내 집 추녀 끝에
자리를 잡고
노랗게 피었느냐?
민들레야
민들레야.
해마다 봄이 오면
개나리, 산수유, 꽃다지
노오란 산천
머 언 고향하늘
내가 황인종인줄 알고
고향 내음 서린
황사 바람에
홀씨를 싣고 온 게로구나.
검은 땅을 덮은
흰 눈
엄동설한은
어머님의 가슴
깊숙이 살다가
이른 봄
잡초 속에 석여
해 같은 얼굴로
웃고 섰는 네 모습.
너는
가난하고
짓밟히고
추위에 떨고 있는
서러운 넋.
이제, 너와 나는
이민자로
내 뜨락에 함께
뿌리를 내리자
누가 뭐라거나 말거나
개의치 말자
여기는 너와 나만의
거룩한
공화국이 아니더냐. -정용진, <민들레> 전문.
민들레
민들레는 누가 심었나
아무도 모르네
민들레는 누가 반겨주나
아무도 없네
나비가 날아간 자리
벌도 스쳐만 가고
노오란 꽃잎은 하늘만 보니
길섶엔 쇠똥구리 한 마리가 저 혼자 바쁘다
작은 주막처럼
나그네가 앉았다 간 자리
언젠가 바람에 날려
홀로 떠나갈 채비를 한다
머나먼 하늘에
그리움 두고 꿈꾸는 형상
별 밤에 뜨는 하얀 영혼으로
바람은 탄다
조용히 낙하
설레임 속에 숨어버리는 씨앗
깃털이 날린다 -박리도, <민들레> 전문.
민들레
가장자리 틈새에도
생명을 업디고
허구한 날 밟혀도
울 줄도 몰라
빛으로만 다져져서
하늘길만 보는
하늘의 깃털
세상은 몰라
아침은 눈부셔라
꽃 속에 햇살
사랑만 쏟아주니
온통 하늘의 생명 -황갑주, <민들레> 전문.
민들레
솜털 같은 민들레의
꽃술이 하늘을 난다.
신석기시대의 돌 바람을 타고
세기말의 햇빛 속을 하얗게 반짝이며,
민들레꽃술은 민들레꽃술
그 꽃술 하나하나에
고유명은 붙여지지 않는다.
자연의 나날들이
일요일과 평일로 구별될 수 없는 것처럼.
지금 민들레 꽃을 하나 따 들고
그 꽃술을 향해 물어본다
“너의 이름은?”
나에게 이름이 있는 것처럼
이 민들레에게도
그런 고유명이 필요할 것일까
나는 길고 긴 둑길 위에 서 있다.
둑길 위에 서 있는 나는
풍경화 속의 인물,
수로에 떨어지는
붉은 노을 빛이
영원한 저녁을 알리고 있다. –김윤성, <민들레> 전문.
민들레
눈부신 면류관
미련 없이 부수고
누리는 자유
산산이
홀로 되어
다시 만날 기약 없어도
쓸쓸 ㅎ 지 않아
속적삼
겉적삼
모두 다 벗어 들고
거침없는 알몸
정갈한 사랑
은빛 반득이는
머리칼 날리며
맨손 가득
눈부신 사랑. -이경희, <민들레> 전문.
민들레
지상으로 추락한 별들인가
척박한 대지에
실낱같은 소망 뿌리내리고
기지개 켜고 노랗게 웃고 잇다
숱한 날을 배회하며
단단한 아스팔트 틈새
비명 같은 삶
질긴 목숨을 걸쳐놓고
아직 시리기만 한 봄
낮선 풍경 속에서
꽃샘추위, 온갖 시련도
저토록 환한 미소를 가졌으니
오직 너를 닮고 싶은
섣부른 꿈 한 자락,
숱한 좌절의 언덕 넘으면
나도 맑고 고운 빛의
향기로운 꽃 한 송이 피울 수 있을까 -이현숙, <민들레> 전문.
우리나라 민들레꽃
우리나라 중부지방 봄 들판에서
민들레로 피어나는 그대
그대가
하얀 그대가
뭇사람 앞에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대가
고운 깃털로 내 가슴에도 날라와
싹을 띄웠어요
굵은 뿌리 마음밭에 박히어
봄, 여름, 가을 없이
겨울도 없이
자꾸 자꾸 피어나요
우리나라 하얀 민들레꽃 -유병국, <우리나라 민들레꽃> 전문.
민들에 領土
기도는 나의 음악
가슴 한복판에 꽃아 놓은
사랑은 단 하나의
聖스러운 깃발
太初부터 나의 領土는
좁은 길이었다 해도
고독의 眞珠를 캐며
내가
꽃으로 피어나야 할 땅
애처로이 쳐다보는
人情의 고움도
나는 싫어
바람이 스쳐가며
노래를 하면
푸른 하늘에서
피리를 불었지
태양에 쫓기어
활활 타다 남은 저녁 노을에
저렇게 긴 江이 흐른다
노오란 내 가슴이
하얗게 여위기 전
그이는 오실까
당신의 맑은 눈물
내 땅에 떨어지면
바람에 날려 보낼
기쁨의 꽃씨
흐려오는
세월의 눈시울에
原色의 아픔을 씹는
내 조용한 숨소리
보고 싶은 얼굴이여 -이해인, <민들레의 영토> 전문.
민들레 사랑
민들레
꽃씨 바람에 날아
산에도 들
들어 낸 가슴 안기워
겨울 맞아
다시 피는 꽃 뿌리를 내립니다.
꽃은 파고
지는 세월 끝에도 피어
언제 까지나
빈들을 수 놓고
기대고 바람 막아
멀리 높이 떠 올라 빈들을 채웁니다. –석정희, <민들레 사랑> 전문.
민들레
언덕배기에 피어
가장 봄을 먼저 전해주는
민들레 꽃을 나는 우연히 수풀 속에서 보았다.
노란 꽃잎은 방금 입에 물었던
아침이슬을 턴 애잔한 몸짓.
조금은 떨리고 불안해 하는
꽃의 몸가짐을 나는 주시했다.
해 나온 오월의 온화한 바람 속에
꽃은 어디 숨어있었나?
저 꽃은 어디서 왔다 하나?
언젠가 이 땅을 떠난 이들이
저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이려고 왔다 하네.
이 불만의 세월 속에
영원한 꿈의 세계를 전하려고 왔다 하네. –조윤호, <민들레> 전문.
민들레
마른 잔디 위에
목을 쑤욱 뽑아 올리고
일찌거니 피어난 꽃
별들이 조는 사이사이
깃털을 맵시 나게 두르고
지나가는 바람을 기다리고 선 그대
그래, 이번엔 어느 곳으로 날아가
눈뜨는 사랑을 적실까 -문금숙, <민들레> 전문.
민들레.4
돌아가지 않겠다
돌아갈 수 없으니까
바람 부는 대로 실려 가겠다
거스를 수 없으니까
발길 닿는 곳에
뿌리를 내리고
스스로 꽃을 피우겠다
시베리아 툰드라 단단한 얼음 위나
하와이 사탕수수밭 뙤약볕 아래
혹은,
로스엔젤레스 공동묘지
로즈힐(Rose Hill)이라도 찾아가
그곳의 흙이 되겠다
우리 형처럼,
우리 엄마처럼 -김동찬 <민들레.4> 전문.
민들레
솜털 같은 민들레의
꽃술이 하늘을 난다.
신석기시대의 돌 바람을 타고
세기말의 햇빛 속을 하야게 반짝이며.
민들레 꽃술은 민들레꽃술
그 꽃술 하나하나에
고유명은 붙여지지 않는다.
자연의 나날들이
일요일과 평일로 구별될 수 없는 것처럼.
지금 민들레 꽃을 하나 따 들고
그 꽃술을 물어본다.
“너의 이름은?”
나에게 이름이 있는 것처럼
이 민들레에게도
그런 고유명이 필요할 것일까
나는 길고 긴 둑 길 위에 서있다.
둑길 위에 서 있는 나는
풍경화 속의 인물,
수로에 떨어지는
붉은 노을 빛이
영원한 저녁을 알리고 있다. –김윤성, <민들레> 전문.
황토 민들레
총탄인들
천 번을 명중한들
도르르
튈뿐.....
깃털 햇무리로
강강수월래
우주의 생명은
건드리지 못한다.
노스다코타주의
황무지...
불 같은 가뭄
붉은 속살까지
쩍쩍 벌어져도
떠날 채비를 한
민들레
잠만 잔
깃털...
내 집 뜰에 핀
민들레도
문안 길 나서고자
바람난
천사님의
속살
하늘의 황토(荒土) 민들레. -황갑주, <황토 민들레> 전문.
시인들이 민들레 꽃을 화두로 떠올린 일이 많은 것은 그이 삶의 모습이 자신의 삶의 형상을 너무나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민들레는 분명 서민적 꽃이다. 찾는 이도 별로 없는 외로운 길녘에서 찬 서리를 맞고 서로의 처지를 동정이라도 하듯 이마를 맞대고 피어있는 군거의식(群居意識)이 민들레의 아름다운 특성이다.
패랭이꽃
외진 길녘에
밟히며 살아온
패랭이꽃.
기다리는 세월이
서러워
흐르는 한 순간이
마음 아파라
아침노을에
두 뺨이 붉었구나
그대가
서럽게 울던 자리에
밤마다 별빛이 가득.
엉겅퀴 손톱에
할퀴운 두 볼을
흐르는 바람이 씻어 준다.
외진 길녘에
천민의 혼으로 서 있는
애닯은 너의 모습
패랭이꽃
잘 자거라
이 밤을
기다리던 임이
네 품에 돌아와
고운 꿈길을
엮어 주리라. -정용진, <패랭이꽃> 전문.
패랭이꽃
살아갈 날들보다
살아온 날이 더 힘들어
어떤 때는 자꾸만
패랭이꽃을 쳐다본다
한때는 많은 결심을 했었다
타인에 대해
또 나 자신에 대해
나를 힘들게 한 것은
바로 그런 결심들이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삶이란 것은
자꾸만 눈에 밟히는
패랭이꽃
누군가에게 무엇으로 남길 바라지만
한편으로는 잊혀지지 않는 게 두려워
자꾸만 쳐다보게 되는
패랭이꽃 -류시하, <패랭이꽃> 전문.
패랭이꽃
높새바람 부는 들머리
하도한 잡초들 사이
겨자씨만한 하늘을
담아올린 패랭이꽃
진실로 눈물겨웁기
저미도록 아프다
바늘 구멍으로도
한 우주를 보는 이치
목숨의 위대한 뜻을
깃발처럼 펄럭인다
시인아 추운 영혼아
너도 울면 안 된다 -김호길, <패랭이꽃> 전문.
패랭이꽃
사랑인 듯 들길을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는가
영리한 너의 향기가
악을 분별하여 꿀을 보전했구나
소박한 몸에 숨겨진
조촐한 진실을 찾아
정직함으로 네 가슴을 여는
생명이 없었구나
작고 겸손한 이름의 꽃
명성이 없어도
당당한 맑음을 보라
태양이 없는 날에도
늘 상 햇살 같은 누이야 -정정인, <패랭이꽃> 전문.
채송화
내일을 위해
향연을 장식하는
음악입니다.
슬픈 사람을 위해
마음을 푸는
낯도 이름도 없는
동정입니다.
여운에 젖어
흐르는
보드라운 무지개
안타까움에
쏟아진 물감, 촉촉함에
얼룩진 무늬
하늘에 박힌 별처럼
답답함입니다.
긴 고백이
뺨을 스쳐 아물어 간 속에는
계절이 푸근히
쉴
마음이 있습니다. -추소련, <채송화> 전문.
채송화
지은 죄 한 벌 없이
멍석말이 물타작질로
에미는 동헌(東軒) 논죄(論罪) 마당을 가다, 빡빡 기어
대다
연분홍 양수(羊水) 터지다
세월은 노랗고
퍼내지를 새끼는 희고
혓바닥 깨물고 끊는 탯줄은 붉어라
부리센 삽작으로 기어들다
하늘 땅 덮고 깔고
원 없던 씹자리 그 숨량 닳던 굽도리까지
푸서리도 한 뼘 재며 재며
자리개 모진 손갈퀴날로 빡빡 기어들다
*푸서리… 거칠고 잡초가 무성한 땅
*자리개… 짚으로 만든 굵은 줄 -. 천승세, <채송화> 전문.
복엽 채송화
-오월 광주의거를 기념하는 시-
해마다 이맘때면 꽃이여 오는구나.
와서는 겹겹 묻어나는 얼굴로 웃는구나.
내 시름시름 아파하기 무척 오래 전부터
꽃이여, 너희 그렇게 오고 있었구나.
여린 잎들이었지만 흙에 흐느끼던 뿌리로
하늘의 푸른 내력 우러르다 자지러지듯
붉은 꽃이 되곤 하던 너희.
온 강산에 낭자하던 피, 서러움, 진분홍 꽃,
이제 내 누추한 뜨락에도 서러움은 되살아,
하지만 지난날의 통곡도
내 강산 구릉 구릉에 쓰러진 수많은 상여도
이젠 꽃술에 묻은 분가루인 양
차마 울음 대신 웃음으로 피어나는 너희.
해마다 이맘때면 꽃이여 오는구나.
와서는 겹겹 묻어나는 얼굴로 웃는구나.
내 시름시름 아파하기 무척 오래 전부터
꽃이여, 너희 그렇게 오고 있었구나.
와서는 다시 해를 보는구나.
그래, 보아라. 겹겹 묻어나는 얼굴로 보아라 해를.
해 속엔 늦은 봄 서러움도
정말로 눈물겨운 너희 꽃 상여도
너희 어머니 진분홍 가슴도
내 쓸모없는 시 혼도 모두모두 함께 있었구나. -이세방, <복엽 채송화> 전문.
오랑캐꽃
어스름 달 밤, 네 앞에 서면
어디 선가 애끓는 호궁(胡弓)소리
그윽히 들리는 듯.....
상념(想念)은 어느 새 역사를 거슬러
[로맨쓰]의 화석(化石) 찾아 두만강 기슭을 더듬나니..... -김동명, <오랑캐꽃> 전문.
오랑캐꽃.1
나를 짓밟아 다오
수세식 변소에 팔려 온 이 비천한 몸
억울하게 모가지 부러진 채
유리컵에나 꽂혀 썩어가는 외로움을
이 눈물겨운 목숨을, 누가 알랴.
말라비틀어진 고향의 얼굴을 만나면
죽고 싶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슬픈 전라도 계집애의 죄,
풀꽃들만 흐느끼는 낯익은 핏줄의 벌판은
이미 닳아진 자를 받아주지 않는다.
쑥을 뜯고 있는 주름살의 어머니에게
마지막으로 갈 수 있을까.
이 곪아 터지지도 못하는 아픔
맥주잔에 넘치는 비애의 거품을 마시고
더럽게 더럽게 웃는 밤이여
나를 짓밟아다오 제발 -이가림, <오랑케꽃.1> 전문.
오랑캐꽃
안악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도래샘도 띳집도 버리고 강 건너로 쫒겨 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무지 처 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 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 골짝을 구름이 흘러
백년이 몇 백년이 뒤를 니어 흘러갔나
나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텔메투리도 몰으는 오랑캐꽃
두 팔로 해 ㅅ 빛을 막아줄게
울어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 이용악, <오랑캐꽃> 전문.
앉은뱅이
노비산(鷺飛山) 모통이는 어린 내 자라던 곳
이 봄도 그 언덕엔 앉은뱅이 피련마는
따갑던 그 날의 가방은 버린 대로 모르겠네 -노산 이은상, <앉은뱅이> 전문.
앉은뱅이꽃 배웅
잠깐
거기 쪼크리고 앉으라 했다
눈 지그시 감고
귓속말도 좀 들어보라 했다
노리다께나 본차이나 따위
날렵한 찻잔은 없노라 했다
다만
살 두터운 할머니 손바닥으로
쓰으윽 문지르는
한 사발 보리숭늉이라도
마시고 가라 했다
엄마의 땅 가까이에서
작은 손 흔들며 기다리노니
제발
허리 쭈욱 펴고
잘 다녀 오라 했다
사랑머리 하얗도록
기다리마 했다. –추영수, <앉은뱅이꽃> 전문.
들꽃
축포가 터지고
관중들이 발을 구르고
건각들은 일제히 뛰었다.
땀에 흥건히 적시며 온 몸으로 밀고 나가는
저 필사의 역주(力走),
승패의 호각(互角),
그리고 스탠드에서 터지는 함성,
여기서 지면 안 된다.
하나의 큰 운동장, 이 세상을 보며
신도 고함을 지르고 계실까,
그라운드 가득히 흙먼지가 일고
승자의 머리엔 월계 꽃 꽂혀지지만
운동장은 안다.
꺾인 꽃은 언제인가 버려진다는 것을,
해가 저물고
관중들이 뿔뿔이 흩어진 뒤
보라, 그라운드에 버려져 시든 꽃잎들을,
그러나 비어 있는 운동장은
외롭지 않다.
조용히 누워 우주를 향해 눈을 뜨는
저 충만의 시간,
승자의 발에 짓밟힌 땅에도 그는
한 그루의 들꽃을 키우는 까닭에. -오세영, <들꽃> 전문.
들꽃
천년의 정적이
낡은 시간들처럼
소리없이 쌓이는
후미진 산록에
홀로 서서
임을 기다리는
들꽃 한 송이.
지나는 바람결에
가슴 떨며 손을 흔들고
애타는 마음을
향으로 피워내는
외로운 들꽃.
아침 햇살에
노을 빛 색동옷은
가려 입고
볼 붉히는 너는
순결의 화신(化身).
애틋한 사연을
유채화로 담아
청산에 둘러두고
오늘도
그리운 임을 기다리는
슬픈 들꽃아. –정용진, <들꽃> 전문.
들꽃
초록색 융단 위에
별이 쏟아졌다
저기 보아라
바람에 흔들리는
너와 내가 있다
속살거리는 연인들의 웃음
가장 고운 옷 입고 부르는
어린 노래
가난한 이들의 몸짓
한번은 맛보고 싶었던 평화
이젠 배부르다
가고싶은 하늘나라
황금길이 아니어도 좋아라
초록 들판 위에
들꽃 가득하다면
바람에 흔들리는
너와 내가 있다면 -이경자, <들꽃> 전문.
별풀꽃
가을이 치마자락을 끌며 서리 묻은 버선발을 내밀 때쯤이면 안다
비개인 뒷날 밤 강둑이나 들에 나가보면 안다
별들은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란 것쯤
하늘의 별들이 속 깊은 강물에 총총이 박힐 때쯤이면
지상에는 물에 씻긴 깨끗한 별들이 별꽃 풀로 피어
하늘 거울 속에서 눈꽃이 되어 반짝이고 있음을
그 작고 어여쁜 생명들이
사랑의 보조개를 만들어
축복 받을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 축복을 보내고 있음을
흉흉한 소문들만 무성한 날들에
사람아, 가을엔
비인 강둑이나 들에 나서서
별꽃 풀과 만나 아낌없는 축복을 받으시라 -김여정, <별꽃풀> 전문.
꽃잎.1
누구한테 머리를 숙일까
사람이 아닌 평범한 것에
많이는 아니고 조금
벼를 터는 마당에서 바람도 안 부는데
옥수수 잎이 흔들리듯 그렇게 조금
바람의 고개는 자기가 일어서는 줄
모르고 거룩한 산에 가 닿기
전에는 즐거움을 모르고 조금
안 즐거움이 꽃으로 되어도
그저 조금 꺼졌다 깨어나고
언뜻 보기엔 임종의 생명 같고
바위를 뭉개고 떨어져 내릴
한 잎의 꽃잎 같고
혁명 같고
먼저 떨어져 내린 큰 바위 같고
나중에 떨어진 꽃잎 같고
나중에 떨어진 작은 꽃잎 같고 -김수영, <꽃잎.1> 전문.
꽃. 바람
오늘도 너는
깊은 산중의
풀섶 꽃으로
바람을 만난다
거친 들을 지나
먼, 먼 여행을 떠나온
바람은 너의 냄새에 젖고
꽃가루에 떨어
그만 미풍이 된다
그리곤 곧
시들고 말
고운 살결을 위해
밤새껏 향수를 나른다. -이성열, <꽃. 바람> 전문.
이름 없는 꽃
길가에서
가만히 고개든 이름 없는 꽃
뽀얗게 먼지 쓴 솜털
햇살에 털며
하늘대는 바람결에 그리움 보내며
살며시 미소 띠는 몸짓
있는 그대로
주는 대로 받고
받는 대로 살아가는
태어난 대로
자연대로
외로움도 기대도 말없이
뒤로 살포시 물러나 앉은
여린 풀잎의 흰 꽃이여
씨앗으로 남아서
아스팔트 굳은 땅 뚫고 나온
연약한 네 몸 어디에
기와 지혜 품었는가
하잘것없이
작고 어린 꽃 얼굴
우주 속에 내밀고
수줍은 듯 홀로 서서
가만가만 살아가는
너의 모습
아무도 보아주지 않은들
무엇이 대수로운가
네가 그곳에 피었는데..... -김인자, <이름 없는 꽃> 전문.
풀꽃
흘러가는 저 강물에
시간이 감기듯
그렇게 그렇게 또다시 돌아 갈
영원한 내 집.....
흙으로 빚을까
타는 술로 빚을까, 눈물로나
한 떨기
풀내음- 물내음- 살내음
하나로 터
머언 먼 셋째 하늘 자락.....
거기 미움도 사랑도
두루 하나로 섞어
풀빛으로 마구 흔들리는
아, 당신
그 크나큰 울타리
멀리 굽이돌아
꽃 피는 소리, 꽃 지는 소리, 꽃 타는 소리
이슬 떨어지는 소리.....
새벽을 푸는 소리
두레박으로 목숨 푸는 소리 소리 소리.....
아, 가슴께로 파도쳐
사랑으로 마구 일렁이는 한 송이
풀꽃이여..... -염천석, <풀꽃> 전문.
앉은뱅이 꽃은 오랑캐꽃과 종류가 같은 꽃이다. 노산은 어릴 적자라던 노비산의 노산을 따서 아호를 정하고 사향가(思鄕歌)를 부른 것 같다. 가곡으로 널리 부르는 노산의“가고파”와“성불사의 밤”도 하나같이 고향을 그리워한 작품들이다.
한적한 길녘 들풀 속에 진하지도 않고 엷지도 않은 노을 빛의 가련한 모습으로 피어있는 꽃이 패랭이 꽃이다.
장미나 백합이 귀족적이라면 패랭이꽃은 단연 민초를 상징하는 가엾고, 가냘프고, 쓸쓸해 보이는 서민적 꽃이다.
오늘의 아픈 현실을 딛고 맑고 밝은 내일을 기다리는 인고의 시간들은 지루하고 고달 퍼도 미래의 꿈과 희망이 있기 때문에 보람이 있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늘 꽃이 자리하고 시가 함께한다면 능히 슬픔을 딛고 일어설 용기를 지닐 수가 있을 것이다. 꽃과 시는 모두의 힘이요, 향기며, 숨결이고 혼이기 때문이다.
오랑캐꽃은 이름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 민족에겐 거부감을 느끼게 하는 불편한 꽃이다. 그러나 시인은 누구보다도 꽃을 대변하고, 사랑하고, 그의 편에 서서 옹호해 주어야 한다. 초라한 모습으로 들녘에 피어 외로운 오랑캐꽃, 그 마음의 쓸쓸함을 알듯하다. 고려시대 수시로 처 들어온 오랑캐들의 침공을 이용악은 뼈아프게 되새겨 주고 있다. 이 시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우리의 고향 야산에 봄이면 지천으로 피어있는 들꽃들 이는 우리들의 삶에 아름다운 향기요, 삶 속에 체취로 배어 흐르는 고유의 냄새 이기도하다.
복엽 채송화의 이세방 시인은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심혈을 기울인 분이요 사진의 조예가 깊은 예술가다.
해바라기
방카로풍의 발코니-
거기 장미꽃 피부를 가진 소녀는
암, 체아에 누운 채
잠이 들었다.
창 너머로
노오란 해바라기란 놈이
고개를 끼웃거려
들여다보고..... . -장만영, <해바라기> 전문.
해바라기
자꾸만 설움은 안으로 파고드는데
머리가 무거워 고개를 못 든다
푸른 요정(妖精)이 사푼 옷자락을 필 무렵
생각은 달빛을 먹고 꽃가루처럼 흩어진다
하나하나 야무저 가는 씨알을 이고
이 밤도 다른 하늘의 태양을 돌고 있다. -박로춘, <해바라기> 전문.
해바라기
바람결보다 더 부드러운 은빛 날리는
가을 하는 현란한 광채가 흘러
양양한 대기의 바다의 무늬가 인다
한 마음에 담을 수 없는 천지의 감동 속에
찬연히 피어난 백일의 환상을 따라
달음치는 하루의 분방한 정념에 헌신된 모습
생의 근원을 향한 아폴로의 호탕한 눈동자와 같이
황색 꽃잎 금빛 가루로 겹겹이 단장한
아 의욕의 씨 圓光에 묻히듯 향기에 익어가니
한 줄기로 지향한 높다란 꼭대기의 환희에서
순간마다 이룩하는 태양의 축복을 받는 자
늠늠한 잎사귀들 경이를 담아들고 찬양한다 -김광섭, <해바라기> 전문.
해바라기
꽃이라 부르기엔
너무 자라버린 키
담장 너머로
발돋움하며
향일(向日)하는 마음
검은 눈으로 살아
거울 같은 얼굴에
그리움만 담았다
긴 밤이 지루해
달빛을 밟으며
밤새워 익혀가는
숙연한 아픔
여명 기슭에
성큼 한발 내디디며
야무진 씨알 하나 던지고
바스러지는 옷깃에 고개를 묻는다, -김후란, <해바라기> 전문.
해바라기 연가
내 생애가 한번 뿐이듯
나의 사랑도
하나입니다
나의 임금이어
폭포처럼 쏟아져 오는 그리움에
목메어
죽을 것만 같은 열병을 앓았습니다
당신이 아닌 누구도
치유할 수 없는
내 불치의 병은
사랑
이 가슴 안에서
올올이 뽑은 고운 실로
당신의 비단옷을 짜겠습니다
빛나는 얼굴 눈부시어
고개 숙이면
속으로 타서 익는 까만 꽃씨
당신께 바치는 나의 언어들
이미 하나인 우리가
더욱 하나가 된 날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나의 임금이어
드릴 것은 상처뿐이어도
어둠에 숨지지 않고
섬겨 살기 원이옵니다 -이해인, <해바라기 연가> 전문.
해바라기
언제부터인가
서울에서 자취 없이 사라진 해바라기들
모두다 어디로 갔는가 궁금했더니
연변 조선족 자치주 가는 길
비암산 일송정 바라보니
쇠락한 한 비암촌 비포장도로에
떼를 지어 몰려 살고 있었다. -문정희, <해바라기> 일부.
해바라기 꽃이 피었습니다
우리집 애완용 쥐, 햄스터는 죽어서 해바라기 꽃으로 피었습
나다. 꼬리를 잘라내어 비로서 인간과 공생할 수 있었던 햄스터
는 꼬리를 인간에게 바친 대신 한평생 사람이 갖다 바치는 먹이
를 먹으며 살았습니다. 오물오물 해바라기 씨앗을 까먹으며 가
끔 입맛 따라 붉은 당근까지 챙겨먹던 햄스터가 불의의 설사로
죽었을 때, 조금은 허전한 마음으로 그가 먹다 남긴 해바라기
씨앗, 혹시나 해서 뜰 앞에 심었습니다. 땅 속에는 그가 뚫어
놓은 동굴 아직 메꿔지지 않고 있었는지… 어느새 검푸른 대
궁들 불끈 솟아 제 키를 재고 있습니다.
죽어서도 그냥 죽지 않고 꽃으로 남아 영혼을 불태우는 작은
짐승의 꼬리가 보일 듯 보일 듯 보이지 않게 허공 속에 물결칩
니다.
아침을 안 먹는 식구들이 늘어가는 요즘…
나도 내가 먹다 남긴 밥그릇 털어 뜰 앞에 심으면 한떨기 필 수 있을지…
슬그머니 들었다 놓는 숟가락, 밥그릇에
구덩이를 파다가 맙니다. –장용철, <해바라기 꽃이 피었습니다> 전문
은방울꽃
나는
그때 외롭게
산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
나뭇가지를 옮아 앉으며
‘동박새’가 울고 있었다.
어쩜
혼자 우는‘동박새’는
나도 곤 더 외로웠는지 모른다.
숲길에선
은방울꽃 내음이 솔 곳이
바람결에 풍겨오고 있었다.
너희들의
그 맑은 눈망울을
은방울꽃 속에서 난 역력히 보았다.
그것은
나의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너희 가슴속에 핀 꽃이었는지도 모른다. -신석정, <은방울꽃> 전문.
초롱꽃
끝까지 무섭게도 흩으러 져 피었구나!
숲이 마치 흰 바다이다.
따뜻한 바람
온화 히 흔들어
젊디 젊은 미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그 미도
이동해 가고
눈처럼 희던 화관(花冠)도 꺼매졌다.
모든 이 세상 일이 시들어지듯.....
관 머리에 내 쓸쓸히 홀로 서다.
“그대 생각는 흰 꽃은 우리
남모르는 가슴 길섶에 피는도다.
어둠침침한 길을 그대 묵묵히 헤매다닐 때
우리고요 속에 까달 않고 빛난다.
우리를 지킨 것은 변하기 쉬운 바람이 아니로다.
우리는 그대를 눈바람으로부터 지켜 왔다.
비 사나운 서쪽을 건너 어서 오라.....
우리야말로 그대를 위해서는 맑게 퍼진 남쪽이로다.
설사 안개가 눈을 가리고
불길한 천둥 번개질 치더라도-
우리 가슴은 꽃이 피고 탄식한다..... -쏘로보오프, <초롱꽃> 전문.
그라디오라스의 유혹
밑에서부터 오르며
차례로 피어 무는데
한 꽃은 시를 읊고
한 꽃은 노래를 부르고
한 꽃은 그림을 그리자고
사뭇 눈짓을 해대는데
이제 저 꼭대기 끄트머리까지
얼마를 더 피어 물며
사연, 사연들을 엮어 갈는지
사람들은 항아리에 담자하고 나서지만
벌써 내 가슴 깊으막에
확 피어버린
저녀러 꽃들. -문인귀, <그라디오라스의 유혹> 전문.
다리아
봄바람에 꽃송이 저버리어도
나무 잎새 가지마다 푸르르 듯이
삼십 나이 순아의 정은 짙을 대로 짙어
여름철 뜨거운 햇볕 아래 다리아로 피었어라. -장만영, <다리아> 전문.
따알리아
가을볕 째앵하게
내려 쪼이는 잔디밭.
함빡 피어난 따알리아
한낮에 함빡 핀 따알리아
시앗시야, 네 살빛도
익을 대로 익었구나.
젖가슴과 부끄럼성이
익을 대로 익었구나.
시악시야, 순하디순하여다오.
암사슴처럼 뛰여다녀 보아라.
물오리 떠 돌아다니는
흰 못물 같은 하늘 밑에,
함빡 피어 나온 따알리아,
피다 못해 터져 나오는 따알리아. –정지용, <따알리아> 전문.
해바라기는 해 같은 황금 얼굴로 해를 향해 또 해를 따라 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훌쩍 큰 키에 강인하고 서구적인 풍모가 인상적이다. 이해인 시인은 수녀로서 주님을 향하여 늘 아름다운 시를 쓰고 있다. 해바라기의 꽃말은 “숭배“다. 반 고호의 해바라기 그림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명화인가? 해바라기는 그의 희망인 태양을 따라 스스로 돌기 때문이다.
은방울꽃은 한랭 지방의 꽃으로 남국적인 낭만과 열기는 없어 보이지만 북극인의 귀족적인 기품이 풍겨 나는 꽃이다. 그 꽃말 “행복이 온다. 사랑의 꽃”이 의미하듯 고국에도 중부 이북 고산지대에 자생하며 꽃 모양이 은방울 같고 한랭한 기후를 좋아한다.
글라디올러스는 창포 잎을 연상하는 날렵한 몸매에 줄 이은 꽃들이 아래로부터 위로 향하며 피어 오르는 기품이 우아하고 요염한 아가씨의 눈웃음 같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꽃이다. 문인귀 시인은 시. 그림, 음악에 다재 다능하여 꽃을 보는 모습이 남다르게, 시 속에 자신의 모습이 잘 투영 되었다. 꽃말은 “주의. 견고”다
달리아는 꽃 모양이 요염하고 꽃의 빛깔과 형태가 다양하며 여름부터 가을 까지 계속하여 핀다. 향기가 없는 것이 큰 흠이고 꽃말은 “감사“다.
자카렌다 (Jacaranda)
자카렌다
신비의 여인이
오월의 문을 연다.
누님의
소매 자락 같이
치렁치렁 늘어진
보랏빛 옷자락
가슴 속엔
청자 항아리의
천년 얼이
출렁이고
사랑을 갈구하던
연인들이
자카렌다 그늘
그윽한
호심(湖心)에 안겨
석류꽃 같은
입을 맞춘다. -정용진, <자카렌다> 전문.
자카란다, 꽃잎 떨구며
자카란다 꽃잎
허공을 흔든다
비둘기 한 마리 날라와
보랏빛 조명등이 달린 전봇대에
날개를 접을 듯 하다가
날아가 버린다
사위어 가는 그 빛 아래
상자 안에 진열된 장난감 차들이
줄지어 있다
하루를 접는 시각
이국의 그늘에서 벗어나
질주해 나가려는 욕망들
그 어깨위로
바람에 손 놓아버린
자카란다 꽃잎
뚝 떨어지고 -오연희, <자카란다 꽃잎> 전문.
부겐빌리아
한창일 때 그 정열
요염하기 불꽃 같던
부겐빌리아 꽃들이
꼭지에 힘을 잃고
다투어 나도 질세라
하나 둘씩 떨어진다
부겐빌리아는 애당초
꽃이 아닌 사람이름
그런 건 아무려나
관심도 없다는 듯
절정에 다투어 필땐
세상 모두 덮을 듯
색종이 처럼 떨어진
붉은 꽃잎들이
마당에서
이 구석 저 구석
몰려 다닌다 -이성열, <부겐빌리아> 전문.
5.6월 미 서부대륙을 수놓는 능소화과 보라색 꽃 자카렌다는 한국에서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낭만적이고 귀족적인 꽃이다. 내가 좋아하는 붓꽃의 그윽한 빛깔, 조국의 야산에 새벽이슬을 함초롬히 머금고 야산 계곡에 애잔하게 돋아나는 도라지 꽃, 라반다 장미꽃의 빨아들일 듯 유혹적인 빛깔과 진한 향기에 비하면 초여름 열기가 달아오르는 거리에 줄지어 서서 졸업시즌을 축하라도 하듯 장식하는 자카렌다는 거리의 왕자답다. 그래서 동부에서 온 여행객들도 찬사를 보내며 그 정취에 흠뻑 취하고 만다.
가난한 거리를 티 없이 수놓으면서도 당당한 모습, 처다 볼 수 없을 정도로 떠도는 구름과 벗하는 의연한 풍모, 고풍스러운 위엄에 압도 당할 수 밖에 없다. 우리 모두의 가슴을 담는 청자 항아리의 아늑함에 빠지게 된다.
연(蓮)
수천만 마리
떼를 지어 날으는 잠자리들은
한 뼘 가웃 남짓한 날빛을 앞에 두고 마지막 타는 안스러이 부서
지는 저녁 햇살을…..
얊은 나래야 바스러지건 말건
불타는 눈동자를 어지러이 구을리며
바람에 흐르다가 한동안은 제대로 발을 떨고 곤두서서
어제 밤 자고 온 풀시 밭을 다시는 내려가지 않으리라고
갓난애기의 새끼손가락보다도 짧은 키를 가지고
허공을 주름잡아 가로세로 자질하며 가물가물 높이 떠 돌아다
니고 있었다.
연못가에서는
인제 마악 자라 오르는 어리디 어린 아그배 나무같이
물 오른 아희들이 윗도리를 벗고 서서
물 가운데 어떤 놈은 물속의 하늘만을 들여다보고 제가끔 골똘한
생각에 잠겼다.
허전히 무너져 내린 내 마음 한구석 그 어느 그늘진 개흙 밭에선
감돌아 흐르는 향기들을 마련하며
연꽃이 그 큰 봉오리를 열었다. –김관식, <연(蓮)> 전문.
연
꽃아
정화수(井華水)에 씻은 몸
새벽마다
참선(參禪)하는
미끈대는 검은 욕정(欲情)
그 어두움을 찢는
처절한
미소로다
꽃아
연꽃아 -허영자, <연> 전문.
연꽃
하광(霞光0 어리어
드맑은 눈썹
곧게 정좌하여
구천세계 지탱하고
세정(世情)을 누르는
정길 한 묵도
닫힌 듯 열려있는
침묵의 말씀 들린다. –김후란, <연꽃> 전문.
연꽃
하나의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집단(集團)에서처럼
그것은 어쩌면
뜨거운 신음 같은 것
차라리 입상(立像)같이
차며
향기 없는 미련한 몸짓.
잔잔한 물결로 하여금
이끼가 뜨는
거기 보람은 두고
속으로 거두우기에 충실하여
무거히 가라 않은
꽃이여. -박창균, <연꽃> 전문.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지는 말고
좀 섭섭한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엇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 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미당. 서정주,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전문.
양수리(兩水里) 연(蓮) 밭
加平 淸平 푸른 산 빛이
떠내려와 연 잎 되고
驪州 陽平 맑은 물빛이
실려와서 연꽃 됐네
남한강 북한강 둥둥
팔월 한철 뜨는 연 밭
이 저승 보는 법을
연 밭 보듯 바라보자.
슬픈 일 기쁜 일들
짝을 지오 고운 세상
천지도 등불 나들이
연꽃 들고 왔잖은가.
우리도 강물처럼을
흐르다가 서로 만나
산과 물 서로 비추면
연분하여 꽃밭 될까.
한 만평 세월을 펼치면
흔들리는 연밭될까. –백수. 정완영 <양수리 연 밭> 전문.
수련화(水蓮花)
수록색(水綠色) 깊은 고궁(古宮)
묵은 연못에
수련화 피었네 활짝 솟았네.
백(白).
황(黃).
홍(紅).
이렇게 잎사귀들이 첩첩히 엉킨 검은 물위에
목욕 단장을 한 시인의 애인들이
여름의 수레를 몰고
일년 한번 외떠러진 고궁을 찾아 왔네.
변함이 없이 변하는 나의 가슴
물기는 가시고 남은 한자리
여름이 쏟아지는 대낮
그늘이 없는 수심(水深)에
물자마리처럼 나는 떠 있네.
백.
황.
홍. -조병화, <수련화> 전문.
수련(垂蓮)
수려(秀麗)하구나
추(醜)는
옥빛 물결에 감추고
미(美)만 드러낸 채
영롱여옥(玲瓏如玉)
이슬 머금은 입술.
감히
하늘을 향해
추파를 던지며
웃고 있다니
오만(傲慢)하구나. –정용진, <수련> 전문.
수련
꿈을 긷는 당신의 못(池) 속에
수줍은 듯 떠다니는
한 송이 수련으로 살게 하소서
아침 이슬 속에 피어나서
오후 햇볕 속에 잠드는 당신
다소곳한 한 송이 수련이 되어
당신의 꽃으로 살게 하소서
겹겹이 쌓인 평생의 그리움
푸른 물 위에 풀어놓고
밤마다 별을 안고 합창하는
어두움의 심연에서 건져내게 하소서 -임충빈, <수련> 전문.
백합이 기독교의 상징적 꽃이라면, 연꽃은 불교의 상징적 꽃이다. 불교에서 극락세계(極樂世界) 연화대(蓮花臺)란 의미도 큰 뜻을 내포하고 있는듯하다. 잎과 고귀하고 자애로운 꽃은 진흙을 뚫고 물을 솟구치고 올라와 고결한 모습으로 피어난다. 그래서 그런지 꽃말도 “순결”이다.
고려 충선왕이 원나라에 가 있을 때 객고에 시달리던 중 한 미인을 만나 사랑하게 되었는데 충선왕이 연경을 떠나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어 연인에게 사랑의 표시로 붉은 연꽃을 선물하였는데 그 미희(美姬)는 연꽃을 남기고 간 충선왕을 오매불망(寤寐不忘) 생각하며 정절을 지키고 먼 후일 이익제(李益齊)가 돌아오는 편에 시한 수를 적어 보내니 “ 떠나실 때 주신 연꽃이 처음에는 붉더니 얼마 안가 떨어지고, 이제는 시드는 빛이 사람과도 같도다. ( 贈送蓮花片 初來灼灼紅 辭枝今幾日憔倅與人同) 이라 읊었다는데 이는 마치 함경도사로 있을 때 사랑에 빠진 연인 홍랑을 두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최경창에게 홍랑(洪浪)이 건네준 시 한편 ” 묏버들 가려 꺾어 님에게 드리노라 자시는 창밖에 심궈 두고 비온 후 잎 피거든 날인 듯 보옵소서“ 요지 음은 이런 기생들의 낭만과 시정이 없이 악어 핸드백에 몸을 마구 벗어 던지다니, 고결한 선비와 시심을 곁들인 옛 기생들의 모습이 애틋하다.
수련은 연꽃의 동생같이 보이는 애교스러운 꽃이다. 그의 꽃말 “신비”가 의미하듯 빨강, 노랑, 분홍, 흰 꽃이 연못 위에 떠서 연 초록 잎들과 함께 실바람에 춤을 출 때는 넋 나간 사람처럼 멀거니 바라볼 뿐 할 말이 없다.
달밤에 물위에 떠있는 애잔한 모습, 과연 신비에 가깝다. 수련이 달빛을 받으며 아련히 떠오르면 감상하는 이로 하여금 동화 속에 젖게 되는데, 물방울을 구슬처럼 굴리며 물위에 떠있는 연꽃은 싱그러운 처녀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선인들이 그 이름을 부용(芙蓉)이라 부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듯 하다.
홍 춘(紅椿)
춘(椿) 나무 꽃 피 뱉은 듯 붉게 타고
더딘 봄날 반은 기울어
물방아 시름없이 돌아간다.
어린 아이들 제 춤에 뜻 없는 노래 부르고
솜병아리 양지쪽에 모이를 가리고 있다.
아지랑이 조름조는 마을 길에 고달 퍼
아름아름 알어질 일도 몰라서
여윈 볼만 만지고 돌아오노니 -정지용, <홍춘> 전문.
돔 백 (椿 )
시들 줄 몰라
열정만 같이, 정이
애정만 같이, 정이
도타운 이파리.
해에 쪼여.
진 푸른 사랑 결로 애타는 광채
흰 눈에 덮인 채
등(燈)에 쪼여도 타는 돔백.
애정에 쪼여도
숨결에 쬐도
잎과 같이 타는 꽃송이.
짓밟힐 줄 모르는 타는 고백.
떨어져도 뚝 떨어 저서
사랑 깊던 발길에사 뚝, 떨어 저도
시들 줄 모르던
짓밟힐 줄 모르던
사모만은
끝 다할 줄 몰라라 몰라. -김영삼, <돔 백> 전문.
동백(冬柏)
1) 흰 동백
너의 순수는
순결의 상징.
푸른 물결이
몰려 와 둘러섰다
버리고 떠나면
홀로 남는
섬의 외로움.
너는
태초 이브의 고독
숫처녀의 아픔이다.
2) 분홍 동백
너는
수줍은 영혼.
내 누님의 실눈 뜨는 첫사랑
동백기름의 윤기다.
가슴 뛰던
첫정이 부끄러워
서산마루에 걸린
저녁노을
연지 빛 사연
내 누님의
속 가슴은.
3) 붉은 동백
타는 정열은
사랑의 혼 불.
눈꽃이
하늘 가득 덮이는 날
비로서 신비의 문을 여는
황홀한
그 아픔.
이제 너는
여인으로
성숙하는 구나
붉은
동백아! -정용진, <동백> 전문.
동백꽃
뒤 울안에
동백꽃이 피어
푸른 나무 잎새 사이사이로
피같이 새빨간 것이
햇볕에 고웁다.
이 꽃은 지난날
이제는 없는
누나가 심은 것.
나는 눈물 속에 그려본다.
꽃 잎새 뚝뚝 떨어지는 소리
머리맡까지 들리던
봄날의 그 밤을.....
아 아 누나는 그 이튿날
아주 이세상을 떠나갔었지
......................................
땅에 떨어져 있는
동백꽃 속에
그리운 누나 넋이
아직도 숨 쉬고 있는 것 같어..... . -장만영, <동백꽃> 전문
동백
만약
내가 네게로 가서
문 두드리면.
내 몸에 숨은
봉오리 전부로
흐느끼면.
또는 어느 날
꿈 끝에
네가 내게로 와서
마른 이 살을
비추고
활활 우리 피어나면.
끝나기 전에
아, 모두
잠이기 전에. –강은교, <동백> 전문.
동백꽃
섬에는 어딜 가나 동백이 있다
동백이 없는 섬은
동백을 심어야지
동백은 섬을 지키기에
땀을 흘렸다
동백은 바위에 뿌리 박기에
못이 박혔다
동백은 고독이 몰려와도
울지 않았다 -이생진, <동백꽃> 전문.
동백꽃
-오동도에서
한 덩이 각혈을 쏟아놓고
둘러보는 뒷자리야
신성 불가침의 비밀.
지난 밤에도 바람이 와서
파도를 깨우더니만 끝내,
그 사내는 떠나가고 말았구나.
속 가슴 헤쳐 내놓고
뱉어내는 가슴앓이
깜박이는 별빛 절망이나 될까.
부질없는 약속이 와서
칭얼대다 떠난 자리에 입술로 흩어져
목마름의 먼 파도소리. –윤동주, < 동백꽃> 전문. * 서시를 쓴 윤동주와 동명이인.
동백꽃
수정같이 맑은
아침 이슬을 먹고
겹겹이 포개 앉아 피는 꽃봉오리
봄 향기 맡고 싶거들랑
창문 활짝 열어다오
어디 선가 불어오는
훈풍의 감미로움.
붉고 향긋한
순결의 꽃 동백은
수줍은 소녀처럼 조심스레 다가서며
봄을 부르고 나를 부르고…. –백지영, <동백꽃> 전문.
붉은 동백
신라의 여승 설요는 꽃 피어 봄 마음 이리 설레 환속 했
다는데
나도 봄날에는 작은 절 풍경에 갇혀 우는 눈먼 물고기
이고 싶더라
쩌렁쩌렁 해빙하는 저수지처럼 그렇게 큰 소리는 아니
어도
봄밤에는 숨죽이듯 갇혀 울고 싶더라
먼발치서 한 사람을 공양하는 무정한 불목하나로 살
아도
봄날에는 사람이 살짝 들키기도 해서
절 마당에 핀 동백처럼 붉은 뺨이고 싶더라 -문태준, <붉은 동백> 전문.
지는 동백꽃을 보며
내가 다만 인정하기 주저하고 있을 뿐
내 인생도 꽃잎은 지고 열매 역시
시원치 않음을 나는 안다
담 밑에 개나리 환장하게 피는데
내 인생의 봄날은 이미 가고 있음을 안다
몸은 바쁘지만 걸쳐놓은 가지 많았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거두어들인 것 없고
마음 먹은 만큼 이땅을
아름답게 하지도 못하였다
겨울바람 속에서 먼저 피었다는 걸
기억해 주는 것 만으로도 고맙고
나를 앞질러 가는 시간과 강물
뒤쫓아 오는 온갖 꽃의 새순들과
나뭇가지마다 용솟음치는 많은 꽃의 봉우리들로
오래오래 이 세상이 환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선연하게도 붉던 꽃잎 툭툭 지는 봄날에 -도종환, <지는 동백꽃을 바라보며> 전문.
동백의 꽃말은 “자랑”이다. 미인은 자신의 미를 자랑하고 싶어 한다. 이는 본능적 생득지심(生得之心)이다.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태어난다는 말이다.
강단에 서보면 너는 인물이 그리 빼어난데 왜 공부를 못하니? 하면 공부를 못한다는 책망은 아득히 잊어버리고 인물이 빼어나다는 말에만 온 신경을 쏟는다. 우리들의 어머니들은 동백기름을 머리에 바르고 참빗으로 빗으며 사셨다. 하얀 이가 머리에 기어 다니는 일이 더러 있기는 하였어도 그들은 그 나름대로 행복하게 사셨다. 목포 사람들은 유달산을 내세우고 여수 사람들은 오동도를 자랑한다. 오동도의 동백은 일품이기 때문이다.
파초
조국을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을 향한 불타는 향수
너의 넋은 수녀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이제 밤이 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 하마.
나는 너를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너의 그 드리운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 -김동명, <파초> 전문.
파초우(芭蕉雨)
외로이 흘러간 한송이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라던고.
성긴 비 ㅅ 방울
파초 ㅅ 잎에 후두기는 저녁 어스름
창 열고 푸른 산과
마조 앉어라.
들어도 싫지 않은 물소리기에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아.
온 아츰 나의 꿈을 스처간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 조지훈, <파초우> 전문.
“조국을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사고와 감정을 인간적 대상에 전이(轉移) 시키는 의인법의 양식으로 화자는 파초를 인격화 시키고 있다.
작자 김동명은 가곡으로 작곡되어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내 마음”의 시인이다.
우리는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 조국을 떠나온 이민자들에게는 추억과 깊은 감회를 일깨워주는 정감의 시다. 나도 이민자의 삶을 감지라도 한 듯 이 시를 퍽 좋아 하였다. 꽃말은 “미인”이다.
조지훈은 파초에 내리는 빗소리를 통하여 인간 존재의 실존을 잔잔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묻고 있다. 옷깃을 여미게 하는 진솔한 시심으로 내면의 세계를 조명하는 명 편 이다.
붓꽃
이른 아침
창을 여니
뒤뜰에 붓꽃이
푸른 잉크 듬뿍 찍어
하늘 자락에 시를 쓰고 있다.
참으로 생명은
오묘하고 심오하다
오늘 너는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지
기쁘게 맞이하고
그를 사랑하라
그는 너의 삶을
윤택한 길로 인도해주는
귀한 스승이 될 것이다.
비록 네 생이
오늘 끝날지라도
주님께 감사하고 송축하라
이아침
너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고 진실하다고
후원의 붓꽃이
시를 쓰고 있다. -정용진, <붓꽃> 전문.
붓꽃
하늘을 펼쳐놓고
햇살 머금어
겹겹이 꿈을 찍어내네
머리로는 태양 속을 달빛 속을
달려 가는데
언제나
보랏빛 넥타이 차림으로
꼿꼿이 제 뿌리 지키는
그대
붓처럼 다소곳한 그대여
내가 바람이 되어 줄까
그대 열정 훅훅 뿌려
펄럭이는 깃발이 되게 -김호순, <붓꽃> 전문.
칸나(紅蕉)
가을 햇살이
유난히 따가운 오후
고목 가지 끝을
솔개가 찾아와
한가히 돌고 있는데
연못가에서
한여름 물만 퍼 마시던
싱그러운 칸나가
푸른 하늘에
붉은 잉크 듬뿍 찍어
추상열일(秋霜烈日)이라 써놓고
빙그레 웃는다.
밤에는 넓은 자락으로
한기(寒氣)를 가리우고
낯에는 가슴깊이
하늘과 땅
과원(果園)의 향을 담다가
저문 하늘에
추야장장(秋夜長長)이라 써놓고
호젓이 웃는다. -정용진, <칸나> 전문.
해당화(海棠花)
바닷가에 해당 꽃
홀로 피어서
하소연한 심사에
고개 숙였소.
소군 소군 바람이
수작을 하면
수집은 어린 맘에
얼굴 붉히오. -김억 <해당꽃> 전문.
해당화
당신은 해당화가 피기 전에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봄
은 벌서 늦었습니다.
봄이 오기 전에는 어서 오기를 바랐더니, 봄이 오고
보니 너무 일찍 왔나 두려합니다.
철모르는 아이들은 뒷동산에 해당화가 피었다고, 다
투어 말하기로 듣고도 못 들은 척 하였더니,
야속한 봄바람은 나는 꽃을 불어서 경대 위에 놓입
니다그려.
시름없이 꽃을 주워서 입술에 대이고, “너는 언제
피었니“ 하고 물었습니다.
꽃은 말도 없이 나의 눈물에 비쳐서, 둘도 되고 셋
도 됩니다. -만해. 한용운, <해당화> 전문.
해당화
저 바다
거센 파도 내 남편 잃고
덕장에서 손 찔리며 고기를 말린다
내 남편 고향은
명사 십릿 벌
해당화도 피어나는 영흥 땅이라네
62.5 적 월남해와
눌러앉은 이곳
배고파 막막해 다시 탔던 배
명태잡이 영랑호는 해일을 만나
깊고 깊은 바다 속에 휩쓸려갔네
해당화야, 해당화야
질긴 뿌리야
남편 없는 살림살이 자식은 다섯
바닷바람 견딘
네 뿌리는
내 허리 신경통에 약이 될 건가
배를 타면 고향도 바라보인다고
웃으면서 떠나던
남편의 모습
저 바다
거센 파도 내 남편 잃고
부두에 나가서 그물 깁는데
파도야 파도야
높은 파도야
봄이 되면 속초바다 모랫벌에도
폭풍에 안 꺾이는 해당화 피랴 -김명수, <해당화> 전문.
감 꽃
쑤꾸기 소리 따라 감 꽃은 하나 둘 피어났는가?
다시는 오지 못할 푸르름 밑에
하마트면 뜨지 못할 나의 눈빛이
진정 새로운 뜻으로만 피어났는가?
의좋은 어느 집 어린 형제와 같이
돌담 위에 서로의 손짓이 보일 듯
어제 밤 너와 나와의 아쉽던 가슴 위엔
저기 저 감꽃이 쑤꾸기 소리 따라 피어났는가? -이철균, <감 꽃> 전문.
감 꽃
어릴 적엔 떨어지는 감 꽃을 썻지
전쟁 통엔 죽은 사병들의 머리를 세고
지금은 엄지에 침 발라 돈을 세지
그런데 먼 훗날엔 무었을 셀까 몰라. ㅡ김준태, <감 꽃> 전문.
밤꽃
생 내 난 바람이 나뭇가지에 몸 비비며 지나가고
양수 하얗게 피어올린 밤꽃도
햇살이 뜨겁다며 잎사귀 밑으로 길을 내 준다
날아다니는 멧새도 길 옆 개망초도 땅속에 사시는
우리 어머니도
초여름에는 밤꽃 내음 만으로도 허기 한 끼 때운다. -이한종, <밤꽃> 전문
배롱나무 꽃그늘 아래
생이 아름다운 때가 있다면
필시 이런 모습일께다
귄있는 여자의 눈썰미 같은 꽃
잘디잔 꽃술로 낭랑하게
예 예 대답하는
그러다 속상하는 일이라도 생기면
혼자서 짜글짜글 애를 태우다
말간 눈물 뚝뚝 떨구는
화엄이나 천국도 그러고 보면
멀리 있는 게 아니다
환한 손뼉 소리 끝에
온몸으로 내 사랑 밀물져 오는 여름 한낮
장엄이라든가 경건이라든가
그런 사뭇 딱딱해지는 것이 아니라도
흩지 마라 내 슬픔 흩지 마라 얼굴 검게 탄 바람이
여린 가지의 맨살 나붓이 쓰다듬고 가는
그 잠시에 있는 것
그러면 거기 수만 송이의 꽃들이
죄다 부르르 떨면서 수만 갈래의 길을
우듬지로 위로 바쳐 올리고
나무들은 혼신으로 몸 바깥에 길을 내면서
여름 한낮 짱짱해져서는
이윽고 보여지는 한 틈으로
시원하게 소나기 한 줄금 뿌리기도
하는 것이니
완전한 사랑이란 이를 테면 그
소나기 같은 것일 게야
목마름의 절벽에서 飛流直下하며
산산이 깨어지는 물방울
몸과 마음의 경계를 깨끗이 지우는 일
몸도 잊어버리고 몸이 돌아갈 집도 다 잊어버리고
그게 우수수 목숨 지는 것인 줄 다 알면서도
여름 내내 명옥헌 꽃 지는 배롱나무 아래
여자의 환한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이지엽, <배롱나무 꽃그늘 아래> 전문.
탱자나무 꽃
하아얀 꽃 위로
비 솔솔 날리네요.
꽃잎에 향내 젖은
물 뚜욱 뚝 지네요.
누나가 퍽은
보고 싶네요. -최승열, <탱자나무 꽃> 전문 .
모과꽃
사이사이로 모과꽃 피어납니다
연 초록 잎새 곁
연분홍 꽃잎들이 눈을 뜹니다
내려다보면 물감을 점점이 찍은 듯
올려다보면 촛불을 달아놓은 듯
그늘 속에서도 모과꽃 피어납니다
알르레기로 발그레해진 딸아이의 볼처럼
물 따라 흐르다 하나 둘 꺼지는 불배들 처럼
모과꽃 피었다 집니다
뒷산 앞산 보이지 않는 황사 자욱한 봄날
연지 같기도 하고 곤지 같기도 한 꽃잎들이
관음처럼 살풋 웃음 지으며 -서정학, <모과꽃> 전문.
저, 열 세상 적 앵두꽃 향기는
(애터져 멍든)
꽃 진 자리
첫날밤 각시의 촉촉한
처녀막이 찢어지는,
불꽃 자죽
확 뚫리는 짙푸른 보랏빛
입구먹, 너 청춘!
그 이름도 어질머리나는
……..황홀하여라
횅하니
푸르디푸른 바람기차를 타고
채비도 없이 떠나간
삶…… 그 길목의 첫 이정표
덧없어라 해 어스름
속 문드러진
노을 빛 부적을
머흘머흘 흩뿌리고는
아스라히…..이내처럼 -노혜봉, <저, 열 세상 적 앵두꽃 향기는> 전문.
붓꽃은 마치 붓 모양으로 솟아올라 자색 잉크를 찍어 시를 쓰고 싶은 욕망을 느끼게 한다. 칸나도 붓 모양으로 솟아나지만 붓꽃이 여성적인데 비하여 칸나는 남성적이고 붉은 잉크를 듬뿍 찍은 형상을 하고 있다. 붓꽃은 선비들의 사랑을 받기에 그 자태가 단아하고 빛깔이 우아하다. 꽃말은 꽃의 모양에 어울리지 않게 “분노”다. 달빛에 비친 모습이나 이른 아침 이슬을 머금은 모습이 청순하다. 붓꽃은 빈센트 반 고호가 그린 그림으로도 유명하다.
칸나는 초여름에 피어나서 늦가을 까지 계속되는 시원하고 활달해 보이는 꽃 중에 하나다. 연못가에 자색으로 피어 오른 붓꽃이 소녀 적이라면, 울 가에 남성적으로 핀 꽃이 칸나다. 인도가 원산으로 꽃창포 모양의 칸나의 꽃말은 “존경”이다. 대만에서는 약혼할 때 남자 집에서 여자 집에 사주를 보내면 그 답례로 여자 집에서는 남자 집에 토란과 칸나를 보내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해당화는 원산 명사십리가 유명하여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2005년 5월 원산을 간다 기에 방북 여행에 신경을 곤두 세웠으나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온 몸에 무슨 죄라도 진 듯 가시를 두루마리로 감고 흰색과 분홍색을 겹 하여 피어 오르는 해당화 가새당꽃, 때찔레꽃 이라고도 부른다. 곧은 몸매에 청초한 모습이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꽃이다.
해당화는 무슨 애틋한 연심(戀心)이 있어 전신에 가시를 두르고 해풍에 손짓을 보내는 것일까?
감 꽃은 어릴 적에 이웃 소년 소녀들이 소꿉장난을 하면서 그릇으로 쓰던 꽃이다. 푸른 감 잎에 쌓여 푸르게 피는 감 꽃, 향기는 없어도 시골 풍경을 잘 대변해 주는 꽃이다.
밤꽃은 구린내 비슷한 냄새를 향기처럼 피워 올리며 그 꽃 모양은 국수 같다. 가을에는 밤송이가 입을 열고 윤기 흐르는 밤알들을 쏟아낸다. 겨울 밤 눈길에 군밤사려군밤사려 군밤장수의 메아리가 숙제를 하던 밤 아름다운 추억으로 다가온다.
탱자나무의 원산지는 중국이지만 우리나라에도 남쪽 지방에 많이 자란다.
봄이면 흰 꽃이 피고 노란 열매를 맺으며 전신에 가시가 돋아 울타리로 많이 쓰인다.
목화
누님
눈물겨웁습니다.
이, 우물물같이 고이는 푸름 속에
다수굿이 젖어있는 붉고 흰 목화 꽃은
누님
누님이 피우셨지요?
퉁기면 울릴듯한 가을의 푸루름엔
바윗돌도 모다 바스러져 네리는데.....
저, 마약(痲藥)과 같은 봄을 지내여서
저, 무지한 여름을 지내여서
질갱이풀 지름길을 오르내리며
허리 굽흐리고 피우셨지요? -미당 서정주, <목화> 전문.
호박꽃
나무 울타리를 무성히 뒤덮는 파-란 잎 사이로
노랗게 들어 난 네 얼굴에는 드메서 왔다는
순이의 순직한 얼굴이 또한 그 속에 있어 좋구나.
날개 달린 놈이면 잉잉거리며 진득한 향을 듣고 누구나 오라
내 입술 그리 고울 건 없어도 어서들 오라
이 가슴 속에다 묻어 문질러 주마
마음은 수줍어도 젊음은 푸르러
이들이들 타는 해는 오오 나의 숨결 숨죽어
아물기 전에 어서 들 빨리 오라
장미처럼 눈부시진 못하여도 사나움 없고
백합처럼 말쑥하진 못하여도 가냘픔 없고
부득진 삶은 하늘을 우르러 구김 없이 피었노라
순아 호박꽃 피는 마을로 돌아가자 울 밑에
호박씨 묻고 뒤곁에 채전을 가꾸어
오매는 없어도 아들을 낳아
먼 후일 마련하자 -박병순, <호박꽃> 전문.
호박꽃
호박꽃 속에 있는
조그만 마을.
마을 앞으로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흐르는 물에 물방아 시름없이 돌아가는데
아낙네들의 방추 소리 꼴작에 울린다.
뒷산 숲에서는 한 종일 뻐꾹새가 울고..... . -장만영, <호박꽃> 전문.
호박꽃들을 보며
지난 여름엔
산너머 산너머에서만
천둥이 울어쌓더니만
호박꽃들은 산꼭대기로만
누우렇게 누우렇게 줄지어 오르더니만
요즘은 비록 꿈속이긴 하지만
두 날개쭉지로는 힘겨워서인지 날짐승들은
둥둥 부르튼 입 주둥이와 두 발 목까지 휘저어
산너머 산너머로만 빨려드는가 하면
요즘은 비록 꿈속이긴 하지만
팔팔 살아서 푸른 하늘의 바람 속을
울부짖으며 뛰어다니는 것도 서러울진대
거의 반죽음으로 바람 속을
바람에 끌려다니는 이웃들을 본다.
그래서 그런줄은 모르지만
요즘은 새벽같이 깨어나서
맨손체조를 하고 찬물을 마셔도
왼통 숨통은 갑갑하고 뒤숭숭하고
색맹인가 근시안인가
산천초목도 철천지원수로만 보이고
모든 빛깔도 단일색으로만 보인다. –조태일, <호박꽃들을 보며> 전문.
수박꽃
세살박이
손녀의
노란 귀걸이
종종 걸음으로
풀섶을 기어다니다가
마침내
지구로 열렸구나.
웅장하다. -정용진, <수박꽃> 전문.
하얀 고추 꽃
사랑한다는 말보다
좋아한다는 말이 좋은
좋아한다는 말보다
맵싸한 말이 좋은
그마저
머금고 살아
제 속이 매워서 핀다 ㅡ김영수, <하얀 고추 꽃> 전문.
부추꽃
봄비 따라 이사 왔네
수지네 집에서
가뭄이 내리는 팔월의 아픔에도
내일의 소망으로 일어서는
억센 푸르름
그 안에서
하늘의 가르침 피어 오른다
누나가 시집가면
신부의 꽃다발로 피려는 듯
동그마니 꽃 꽂았네
하늘 안고서,
누가 이를 빚으리
하늘만이 꽂으시는
이 꽃다발
노을 낀 하늘가,
부추꽃 동그란 이야기 핀다 -이은일, <부추꽃> 전문.
파 꽃
머리에는
백설을 이고
창연(蒼然)히 서서
민중을 굽어보는
녹두장군(綠豆將軍)
전봉준(全琫準).
죽창을 들고
고부(古阜)고을
뒤흔드는 함성이
정말, 엄청 나구나
길이길이 푸르거라
헐벗은 농민들의
자존심답게
하늘 우러르며
우람히 솟은
초록기둥
민중의 혼(魂)
파 꽃아! -정용진, <파 꽃> 전문.
파꽃
햇살 끝 먼 눈으로 보아 서리꽃 같다
밀가루 부대 속살 위에서 정성으로 말려진 씨앗
차가운 땅 밑에서 머리를 올려
툭, 터져버리면 그 많은 기억들
사람 모이는 큰 시장 가장 작은 자리에
어머니는 늘 팟단 처럼 앉아 계셨다
어린 눈은 그 앞을 피해 먼 길로 다녔다
잘 묶여진 팟단을 풀면
하얘진 모모가 매콤히 눈을 찔러
손끝이 눈 주위를 떠나지 못한다
노모의 병든 뼈마디처럼
속이 텅 빈 채로 몸을 꼿꼿이 세워
유년시절 부끄러운 고집을 쏟아 놓는다
여리고 푸른 속살을 위해
지금은
파이면서도 파가 될 수 없는 너
매콤한 바람을 잃어 눈길을 잡는다 -박혜정, <파꽃> 전문
감자 꽃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파 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 보나 마나, 하얀 감자. -권태응, <감자 꽃> 전문.
메밀꽃
메밀꽃 한 다발
가슴에 안고
어둠이 내리는 거리를
걷노라.
사람들은
창문 고리를 깊게 걸어놓고
눈망울 껌뻑 거리며
바깥을 기웃거리고,
지금은
거리를 한차례
물청소 차라도 지나가야
할 때
아메리카.
무엇을 기다리는가.
아메리카
그대 성조기도.
아메리카의 영광을
기다리는가. -곽상희, <메밀꽃> 전문.
목화는 인도가 원산으로 중국을 거쳐 문익점에 붓 뚜껑 속에 숨겨져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고 한다. 꽃도 나팔꽃 모양으로 귀족적이고 목화는 솜으로 틀어 무명으로 직조 되어 옷감으로 쓰이는 유용한 꽃이다.
호박꽃은 박꽃과의 인도 산 덩굴성 식물로 시골 울타리를 타고 오르며 주렁주렁 가을을 장식하는 유용 식물로 꿀이 많아 벌들이 좋아한다.
나는 파 꽃을 보면 초록 기둥에 백설을 이고 섰는 모습이 마치 민중의 영웅 전봉준 같다는 생각이 든다.
4) 꽃은 아픔이다.
달맞이꽃
해가 지면
어둑 어둑
해 가지면
얼굴이 훤하다.
어두워 갈수록
노란 맘은 가고
하얗게 말갛게
편안하다.
달아나 별이
없어도 좋다.
세상과 달리
어두움을 밝게
빛나게 맞이하는
어둠맞이 꽃. -고원, <달맞이꽃> 전문.
달맞이꽃
그리움 가득 채우며
내가 네게로 저물어 가는 것처럼
너도
그리운 가슴 부여안고
내게로 저물어 옴을 알겠구나
빈 산 가득
풀벌레 소낙비 처럼
이리 울고
이산 저 산 소쩍새는
저리 울어
못 견디게 그리운 달 둥실 떠오르면
징 소리 같이 퍼지는 달빛 아래
검은 산을 헐고
그리움 넘쳐 내 앞에 피는 꽃
달맞이꽃. -김용택, <달맞이꽃> 전문.
달맞이꽃
첫여름 하얀
달밤이 되면
그만 고백해 버리고 싶다
그대 내 사랑이라고
키 큰 포풀러 바람에 흔들리고
수런수런 풀 냄새 온몸에 젖어 들면
입으로 부르면
큰일나는 그 사람
하르록? 향기로 터뜨리고 싶다
그만 확 확 달맞이꽃으로
피어나고 싶다 -문정희 <달맞이꽃> 전문.
달맞이꽃
풀벌레가 달빛을 통해
땅덩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총탄은 홀로
이 들판을 울면서 지나갔다.
죽어 넘어진 달빛이
풀벌레 등에 얹히고,
노오란 방죽길이
메아리처럼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양채영, <달맞이꽃> 전문.
달맞이꽃
누구를 기려 그토록 피는가
달이 진 컴컴한 밤
비가 오는 적막한 시간
전설로 피는 너의 혼
강변에
마지막 달이 돋던 저녁
흘러서 공허한 하늘 끝에
바람으로 지던 너
별빛으로
찬란한 별빛으로
잎을 키우며
오랜 세월을
침묵으로 기다리던
초심(初心)의 연가
달맞이꽃
바위가 된 내 가슴
모래알로 부서져
천년을 살고 싶은
기다림
또다시 달을 보며
연가를 부르는
수줍은 꽃이여,
첫사랑이여. -권순창, <달맞이꽃> 전문.
달맞이꽃
살아서 남긴 발자국은 달랐지만
저승으로 오는 길은
모두가 똑같아야 한다는 죽음의 명령
사람들은 비로서 말 잘 듣는다
할리우드 공원의 고만고만한 묘지들
서로 이름 불러주며
고만고만 살아가는 무덤과 무덤
살아서 이름마다 그 색깔 틀렸을 지라도
한 생각으로 묻히면 모두가 같은 씨앗,
여름 밤 너무 깊으니 문 열어 놓으라는
죽음의 명령
봉인된 무덤의 울타리마다
가만히 문 열고 나와
손을 흔드는 이들 -장용철, <달맞이꽃> 전문.
달맞이 꽃
가장 현란한 태양아래서
가장 쓸쓸해지는 꽃
흑암의 빗장을 열고
아득히 먼 길을 더듬다 보면
하늘 깊이의
심장 하나 만나질까
정제된 고요가 아니면
가슴을 열 수 없는
오만을 담은 죄
모든 아픔의 이름으로
모든 어둠의 운명으로
멀리는 고독의 이치를 건너
대지의 별이 된 이브. –정정인, <달맞이 꽃> 전문.
섬진강의 달맞이꽃
강 구비마다
달맞이꽃이 후줄근히
밤 오길 기다려
노오란 낮잠.
강 건너 꿈 깔린 백사장으로
강물 가르는 나룻배에는
꽃 꺾어든 사람
아무도 없네.
강물 따라 오 십리 육 십리
입 다 물은 달맞이꽃
이 밤도 이뤄지나
달과의 사랑.
달에 물든 노오란 마음
변치 않아
햇빛 강물에 어른거리면
이내 고개 떨구네.
섬진강 긴긴 강가 달맞이꽃
물에 달 그림자 뜨면
마음 스스로 풀려
다시 피는가. -박만영, <섬진강의 달맞이꽃> 전문.
장다리꽃
저 언덕 아래
가느다란 몸매 타고 피어 오른
장다리꽃
내 어린 날엔
장다리꽃 사이로
머리 수건 동여맨 그 아지매가
티없는 웃음꽃을 노랗게
꽃 사이로 함께 피웠지
오늘도 장다리는 분주히
나비들을 불러 피어도
마냥 먼 하늘가
그날
그때,
그 장다리꽃만 그리워짐은
어인 일일까 -이은일, <장다리꽃> 전문.
녹두 꽃
빈손 가득히 움켜쥔
햇살에 살아
벽에도 쇠창살에도
노을로 붉게 살아
타네
불타네
깊은 밤 넋 속의 깊고
깊은 상처에 살아
모질수록 매질 아래 날이 갈수록
흡뜨는 거역의 눈동자에 핏발로 살아
열쇠소리 살아져 버린 밤은 끝없고
끝없이 혀는 짤리어 굳고 굳고
굳은 벽 속의 마지막
통곡으로 살아
타네
붉타네
녹두꽃 타네
별 푸른 시구문 아래 목 베어 횃불 아래
횃불이여 그슬러라
하늘을 온 세상을
번뜩이는 총검 아래 비웃음 아래
너희, 나를 육시토록
끝끝내 살아. –김지하, <녹두 꽃> 전문.
개별 꽃
올해 대학간 딸애의
생활기록부 보호자 직업란에
나는 선뜻 ‘시인’이라 써준다
딸애는 시인이 무슨 직업이냐며
역정을 내듯 화이트로 지운다
다른 애들은 장관 사장 교수 군인
변호사 의사 또는 이사라고 썻던데…
아하, 그런데 나는
시인을 직업으로 알다니!
뭉개진 여백 다시 들여다본다
어느새 시인은 간 곳 없고
몸둘 바 몰라 허 허 허허 웃는 꽃
개별꽃만 하얗게 홀로 부시다
-생계를 위해 일상적으로 하는 일
아하, 그래서 나는
직업을 시인이라 쓰다니!
나는 그만 열쩍게 누워
이 나라 대가의 “자화상”을 읽는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임영조, <개별 꽃> 전문. *일명 미치광이풀.
봉선화(鳳仙花)
울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 필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어어간에 여름 가고
가을바람 솔솔 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들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김형준, <봉선화> 전문.
봉선화
-1950년대
나는 가난뱅이 올 아비의 작은 딸
나의 배고팠던 누님이 아이 보게 떠나면서 보고보고 울던 꽃
석양처럼 남아서 울던 꽃 울던 꽃 -서정춘, ,봉선화> 전문.
봉숭아(鳳仙花)
계절은 밀려가고 있었다.
한여름
봉숭아 꽃잎 따라
물들인
누이동생의 손톱엔
이젠
계절이 밀려가고 있었다.
봉숭아 꽃잎이 물든
누이의 손톱에는
반쯤 밀려난 흔적으로
계절이 그만큼 멀어져 간다는
아픔만큼
누이의 생명마저 밀려가고 있었다.
물든 봉숭아 꽃잎이
누이의
손톱에서 벗겨져나간 그 때쯤
누이의 생명은
손톱 밖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조병무, <봉숭아> 전문.
고추 밭에 봉숭아꽃
고추 밭에 봉숭아꽃
붉은 고추 시새워 저도 붉단다.
구추씨 받자하니
봉숭아가 저 먼저 씨주머니 터뜨린다. –엄한정, <고추밭에 봉숭아꽃> 전문.
백일홍.2
빛 좋은 가을 하늘
백일의 영광 위해
봄의 유혹 참아내고
폭염 태풍 견뎠도다
별들과 새들의
온갖 핀잔 듣고서도
모질게 참았더니
오늘의 영광이 찾아 왔다 -이종섭, <백일홍.2> 전문.
백일홍은 백일초라고도 한다. 여름부터 가을 까지 화단을 지키는 꽃으로 100일을 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전설에는 목 셋을 가진 이무기가 마을에 나타나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니 마을에서 는 이를 피하기 처녀에게 화관을 씌워 해마다 바쳤는데 김씨의 딸 차레가 되는 해 그 여인을 사랑하는 한 무사가 여인으로 변장하고 젯상에 앉아있다가 칼로 이무기의 목을 처서 서 떨어뜨리니 이무기는 목 하나를 잃고 연못으로 도망치고 김 씨의 딸은 무사와 결혼하여 잘 살았다는 전설이 있다. 백일홍의 꽃말은 떠나버린 벗을 그리다. 이다.
안개꽃
지하도 입구까지 온 봄은
쓸쓸하다.
플라스틱 통 속에는
온 종일 팔리지 않은
안개꽃 묶음들.
갑자기 어리둥절해서 핀
빈혈의 얼굴들이 창백하다.
따스한 햇살에
뺨을 대고 등을 기대며
제 가끔의 슬픔을 꺼내며 만지작거린다.
어떤 꽃은 먼 하늘만 바라다본다.
눈가의 눈물 자국을 말리고 나갈 때마다
고개를 묻는 안개꽃들.
쌀 톨 만한 연모(戀慕)의 마음이 일렁인다.
그 발치에 서서
무서움에 울고 있는
열 살바기 단발머리와
배를 깔고 누운
옛날의 갯벌이 보여
지하도 입구까지 온 봄은
쓸쓸하다. -노향림, <안개꽃> 전문.
안개꽃
가녀린 몸매
허공에 나붓대며
실성한 여인처럼
하얀 웃음 까르르
말라 바스러질 때까지
연신 희득거리며
모음(母音)으로 쏟아놓은
오 백치. -이희선, <안개꽃> 전문.
안개꽃
안개꽃 들판을 바라보면 막막해진다.
뜻을 읽을 수가 없다 부르는 듯 하기도 하고 고개를 돌리는 듯
하기도 하다 웃는 듯 하기도 하고 우는 듯 하기도하다 바라볼
수록 가물가물 안개만 피워 올린다.
평생 내색하지 않던 아버지도
찾아갈 때마다 산은 안개로 대답했다.
안개꽃 얼굴이 항상 흰 무명처럼 개어 있다고 믿은 것이 돌이
킬 수 없는 불효가 되었다 지칠 대로 지친 날 안개꽃에 불을 비
벼보면 안다 끝내 네게서도 더욱 더 난감한 안개가 피어오르기
마련이다.
안개꽃 들판을 바라보면 확확 달아오른다. –유장균, <안개꽃> 전문.
안개꽃
눈물이야
달무리 성긴 별 밭 보며
꿈을 헤던
말 못하던 누이 가슴에 고인,
가슴 알이야
차오르는 아픔
홀로 다스리며 세월 따라
흔들리며 커져버린,
그리움이야
퍼내어도 퍼내어도
밑이 안 보이는
펼쳐 보일 수 없어
날마다 살 깎아 몸 비비는
아니, 혼백이야
눈물과 가슴알이와
그리움으로만 살다 간
우리 누이의 희디 흰 넋,
소리 없는 함성이야 -김행자, <안개꽃> 전문.
접시꽃
봄부터 부지런히
심장 같은 넓은 잎 대궁이 세우며
쑥쑥 자라더니
한더위 봉긋봉긋 꽃망울 만드는 접시꽃
들일 하다 돌아와 점심을 먹고
느긋한 마음으로
하양 빨강 노랑,
화사한 꽃송이들 그려본다
담 너머 이웃들 인심마저 도
곱게 안아 피어날 꽃
오늘도 하늘하늘 몸놀림이 바쁘다 -박명춘, <접시꽃> 전문.
접시꽃 씨를 묻으며
모든 것이 떠나고 돌아오지 않는 들판에
사랑하는 사람이여, 나는 이 꽃씨를 묻습니다
이 들녘 곱디고운 흙을 손으로 파서
그 속 꽃씨 하나를 묻는 일이
허공에 구름을 심는 일처럼 덧없을 지라도
그것은 하나의 약속입니다
은가락지같이 이 꽃씨를 풀어 묻으며
내가 당신의 순하던 손에 끼워주었고
그것을 몰래 빼서 학비를 삼아주던
당신의 말없는 마음처럼
당신에게로 다시 돌려주는 내 마음의 전부입니다
늦은 우리의 사랑처럼 저문 들판에
접시꽃 씨를 묻으며
잊혀지는 세월 지워지는 추억 속에서도
꼭 하나 이 땅에 남아 있을 꽃 한 송이 생각합니다. -도종환, <접시꽃 꽃씨를 묻으며> 전문.
촉규꽃(蜀葵花)
장독대 또약 볕에 바가지 널어 두고
어디로 다 가고 아무도 없는가?.
븬 사립을 들어서자 자즈러지게 소리치는 건
혼자가 혼자가 겨운
울가 빨간 촉규의 화안한 얼굴! -유치환, <촉규꽃> 전문.
갈대밭에서
서포 갈대밭에서
그 갈대 바람 속에서
나는 갈대가 아니다
나는 갈대가 아니라고 소리쳐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갈대바람 속에서
오래된 해골 바가지를 밟았다
40년 전 그때 죽어
오늘 나의 유일한 동지인가
나는 갈대가 아니라고 소리치면
그것이 듣고 있다
나는 그것을 부여않았다가 던졌다 -고은, <갈대밭에서> 전문.
캘리포니아 갈대
모여 살아도 따습지 않고
부비며 지내도 허허한 마음
하늘 휘저으며 몸부림쳐도
잊혀지지 않는 강산아
훌훌 갈꽃으로 날아가도
바람벽에 부딪치는 망향.
서러운 바람결에
퉁소소리 들린다
날 부르는 소리
어제는 강마을 갯벌에서
야윈 갈대와 서걱이다가
간 밤에는 진달래 만발한
언덕에서 딩굴었지.
태평양 기슭
청석돌산 벼랑에 발돋움하고
망부석인양
긴 목 드리우고
보라 빛 기별 기다린다.
모여 살아도 그리움은
나날이 짙어가고
기대고 마주해도
돌아 앉는 타인의 등
훌 훌 갈꽃으로 날아가도
바람벽에 부딪치는 망향. ㅡ이성호, <캘리포니아 갈대> 전문.
갈대
너였구나
철새의 깃털 주워 모아
계절의 수의를 만들 때
하얗게 부서져 내리던
휘파람 소리
너였구나
순금의 무게로 가라앉아
추억을 손질하던 강변,
흐드러진 햇살 헤치고
바람처럼 다가오던
그 수런거림
바로 너였구나 -황현미, <갈대> 전문.
억새꽃
싸늘한 바람결에
출렁이는
은빛 파도
쪽빛 하늘 및
산자락의
춤추는 한 마당
하늘 향한
하얀 흔들림
가을 정취에
온몸 던진다 -김진상, <억새꽃> 전문.
억새들의 춤
억새들은
산간에 몰려 서서
낮에는
산바람에 칼을 갈고
밤에는
제주 은 갈치 물결로
전신을 마구 흔들어댄다.
달빛이
눈송이처럼 부서져 내리는 밤
군무(群舞)를 추는
백조들의 푸른 자태여.
너와 나
나와 너
언제 이 푸른 광야에서
인생을 춤추었던가 싶구나.
자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어서 신발 끈을 조이고
광란하는 달빛 아래
몸을 맡기자.
저 푸른 달빛이
사라지기 전에
강강 수월래
강강 수월래. –정용진, <억새들의 춤> 전문.
원산지가 남아메리카인 달맞이꽃은 진홍 빛 저녁노을이 서산에 걸리면 마을 앞 시냇가와 철로 변에 연노랑 색으로 또는 흰색으로 피어올라 눈송이처럼 부서져 내리는 달빛에 취하여 손을 흔든다. 더구나 어스름 달밤에 길 떠난 임을 기다리는 것 같은 모습은 측은해 보이기까지 하다. 꽃말은“기다림”이다.
봉숭아는 한 때는 봉선화로 조국을 잃은 민족의 애환을 노래한 민족의 꽃이다. 김형준 시인은 구구절절이 우리의 아픔을 시로 엮고 그리고, 노래로 불렀다. 또한 이를 누이의 아픔으로 조병무 시인은 은유적으로 읊고 있다.
우리 선조들은 망국의 설움을 울밑에서 슬프고 구슬프게도 울음 울었다.
꽃말은 “나를 다치지 마세요.“이다. 희랍의 신화에 의하면 올림푸스 산에서 어떤 여인이 도둑의 누명을 쓰고 쫒겨나 누명을 벗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었는데 너무 억울하여 자기의 몸을 뒤져 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그 후 가련한 넋이 봉숭아로 태어나 누가 살짝 다치기만 하여도 씨 주머니를 터뜨려 자신의 결백을 보여 준다는 슬픈 전설이 서린 꽃이다.
안개꽃은 주종이 아닌 싸이드 꽃으로 큰 대접을 받지 못하는 가냘픈 꽃이다. 장미에 섞여, 카네션에 섞여, 해바라기에 섞여, 남의 모양새를 위하여 늘 희생을 감수하는 가여운 꽃, 여학생들이 국군묘지에 헌화할 때에는 빼놓을 수가 없는 단골 꽃이다. 싸락눈이 내리 듯 안개가 내리 듯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늘 뒷전에서 숨어 봉사하는 희생의 꽃이다. 그러나 표정은 늘 애잔하다. 이희선 시인은 실성한 여인 같다고 표현 하였다.
접시꽃은 촉규화(蜀葵花)라고도 한다. 무궁화과의 다년생 초로 접시모양의 붉은색, 흰색, 자주색이 있고 장미처럼 요염하지도, 난초처럼 청초하지도 않으나 서민처럼 겸허해 보이는 모습에 만인의 사랑을 받는 꽃이다. 꽃말은 “단순. 평안”이다.
박꽃
흰 옷자락 아슴 아슴
사라지는 저녁 답
썩은 초가지붕에
하야게 일어서
가난한 살림살이
자근자근 속삭이며
박꽃 아가씨야
박꽃 아가씨야
짧은 저녁답을
말없이 울자. -박목월, <박꽃> 전문.
박꽃
돌담을 끼고 황홀히 돌아 나간 외딴 오두막
호젓한 박꽃이 종이 등 같이 켜지는 저녁
세월은 물처럼 흘러간다 해서
물처럼은 되돌아 올 줄 모르고
백발이 들창 밖에서 애기처럼 보채니
수양버들 한사 싫어라 손을 젓는다.
구름이 양떼같이 내려오는 잔디밭에
내 토끼처럼 누어서 잠을 자고
꽃잎이 지는 호수에
어족처럼 쉬다가 가려오. -이설주, <박꽃> 전문.
한 송이 박꽃
깊은 한밤중
산맥이 울고
기이한 나그네 발길
솔밭에서 자취 없어라
자취 없어라
희미한 별빛에 돌들만이 빛나라
이리하리
저리하리 내 어찌하리
베개닛 몸부림 타는 혀끝에
산맥이 울고
내버린 낫들 일어서
쏘아보는 한 송이 박꽃 - 김지하, <한 송이 박꽃> 전문.
박꽃
솔숲을 가르는
천년의 바람 한 점
성하(盛夏)에도 설경(雪景)으로
가지마다
학(鶴)이 내려
선비의 지조로
그윽한
솔의 향기.
외진 산모롱이
돌담 길을
살포시 돌아서면
초가지붕마다
누님의 동정같이
하아얀 달빛으로
피어나는 박꽃. -정용진, <박꽃> 전문.
씀바귀
달큼하기가 싫어서
미지근하기가 싫어서
혀끝에 스미는 향기가 싫어서
온몸에 쓴 내를 지니고
저만치 돌아 앉아
앵도라 진 눈동자
결코 아양 떨며 웃기가 싫어서
진종일 바람은 설레 이는데
눈물 죽죽 흘리기가 싫어서
애원하며 매달려 하소연하기가 싫어서
온몸에 툭 쏘는 풋내를 지니고
그대 희멀쑥한 손길 뿌리쳐
눈웃음치며 그대 옷자락에 매달려
삽상 하게 스미는 봄바람이 싫어서
건달들 하룻밤 입가심.
기름 낀 그대 창자 속
포만한 하품 씻어내는 디저트가 되기 싫어서
뿌리에서 머리끝까지 온통 쓴 내음
어느 흉년 가난한 사람의 빈 창자 속에 들어가
맹물로 피를 만드는
모진 분노가 되었네
그대 코끝에 스미는
씁스름 한 향기가 되었네. –문병란, <씀바귀> 전문.
씀바귀
남은 날
모두 주고
얻고 싶던 단 한 사람
이를 수 없는
엉겅퀴 가로놓여
생으로 앓다가
쓰디쓴 그리움은
하얗게 익어간다
뿌리가
더 쓴
씀바귀라던가
사랑은. -박경석, <씀바귀> 전문.
망초꽃
어느 한 순간도
떳떳하지 못하였다고,
중얼거리며 들판에 나앉은 그는
생애를 힘들여 짐지지 않은
자신의 죄를 모두 풀었다
제대로 살아 보아야겠다고
내일부터는 누군가를 도와야겠다고,
중얼거림으로 만 끝난 그의 전생을
다 들키기로 하고 있다
털어놓은 마음의 수더분함이
몹시 귀하여 그리운 시대
그리운 꽃이 된 망초꽃,
꽃이 된 것이 민망스러워
해가 진 뒤에까지 얼굴이 하얗다. -한영옥, <망초꽃> 전문.
망초꽃
우리가 울지 않았다면
우리가 눈물 흘려 마른 땅 적시지 않았다면
저리도 이쁜 꽃
망초꽃
어찌 볼 수 있었겠니
우리들 흘린 눈물 자국마다에서
가늘디가는 못 치켜들고
옛날의 설어움 되살리려고
억지로 피어난
눈물의 꽃
가엾고 서러운 망초꽃
설어워 흘린 우리들 눈물로
망초꽃 피었구나
들에 나가 보면
천지에 깔려있는 망초꽃
모여 서서 함성도 지르지 못하고
바람에 바람에
미미하게 흔들리누나
흔들리며 흔들리며
서로의 몸 비비누나
큰소리 한번 못 치기는 죽어서도 여전하고
헛기침 한번 못 해보기도 그대로 여전한
망초꽃
지금도 괜히 당신들 눈치만 살피며
숨죽이고 피어 있는
불쌍하고 가엾은 망초꽃
이제 보니
망초꽃 천지에 가득 채우기 위하여
우리들 울 일이
아직도 아직도
이렇게 많았구나. –김혜숙, <망초꽃> 전문.
망초꽃
길 밖으로 밀려나 조용히 한 떼의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사
람들에 밀려 풀꽃들에 밀려 도달한 곳,
여기도 샘명붙이가 사는 땅?
일생을 숨어 살아온 자가
숨어 들어
깨끗이 꿈 속을 비우거나
꿈의 위치를 바꿔 놓습니다, 바다 쪽으로
오, 몸부림 쳐 시원하게 몸부림을 버리는 바다. –신대철, <망초꽃.2> 전문.
앉은뱅이꽃
전에는 목을 길게 뽑고
오래 오래 마주보더니
오늘은 가늘고 짧은 목으로
질책하듯
잠깐 쳐다보고 마는
하얀 너
사방으로 갈라진 땅에서
내가 입힌 병든 옷을 걸치고도
생명으로 피어야 하는 숙명의
저 오만한 눈빛을
나는 오래오래 무릎을 꿇고
마주 보고있다 -고영준, <앉은뱅이꽃> 전문.
할미꽃
보리밭 가에
찌그러진 무덤-
그는 저 찌그러진 집에
살던 이의 무덤인가.
할미꽃 한 송이
고개를 숙였고나.
아 아 그가 살던 밭에
아 아 그가 사랑턴 보리.
푸르고 누르고
끝없는 봄이 다녀 갔고나.
이 봄에도
보리는 푸르고 할미꽃이 피니
그의 손자 손녀 손에
나물 캐는 흙 묻은 시칼이 들렸고나.
변함없는 농촌의 봄이여
끝없는, 흐르는 인생이여. –춘원. 이광수, <할미꽃> 전문.
할미꽃
봄에 피는 진달래
진달래 동산
붉은 꽃잎 지는 때
뻐꾸기 울고
어린 동생 무덤가
할미꽃 필 때
세월에 바랜 설움
비가 내리네
오늘도 하늘은
높푸른데
이승에서 저승까지
멀기도 하지.
고향 길은 무겁고 답답하여라.
불러 봐도 불러 봐도
말이 없구나. -신협, <할미꽃> 전문.
할미꽃
나이를 묻지 마소
날 때부터 할미라오
꽃이라 불러주니
그나마도 황송하오
수줍어
부끄러운 양
고개 숙인 할미꽃 -오정방, <할미꽃> 전문.
할미꽃
하얀 서릿발에
은비녀 쪽진 머리
벌겋게 멍울진 가슴을
베 적삼에 감추시고
막걸리 한 사발에
가랑가랑 눈물 앞세우고
한풀이 하시던
허리 깽깽 할미 닮은
네 모습 애처롭다
골바람 낮게 드리운 산골짝
홀로 핀 외로움에
네 눈물 강이 되면
할미 그리움도 떠내려가니
소리 새야 장단 맞춰
노래 노래 불러 주렴 -강영미, <할미꽃> 전문.
백두옹(白頭翁)의 사랑
어느 해 봄
바람 많이 부는 산기슭에 피어 있던
수수한 꽃
흰 털로 덮여 있어도
꽃잎은 타는 듯 검붉고
샛노란 수술
내가 찾고있는 사랑이 이 꽃과 같을 거라고
숨어서 타고 있는 異端, 背敎의 아픔
그런 사랑을 만나면 순교해도 좋다고 생각했네
내 가슴에는 사랑의 꽃을 피울 수 있는
창문을 열면 햇빛과 바람으로 가득 차는
빈 방이 있는데
나의 지난 여정에서 샛노란 수술을 가진
그런 사랑을 만나지 못했어
못보고 그냥 지나쳐 왔나 봐
지난 가을 바람 많이 불고 비오던 밤
그 사랑을 찾았어
언제 들어왔는지
가슴 속 外出
햇빛도 바람도 없는 방에서 살고 있었어
나는 이제 굽은 머리 흰머리로
해 저무는 강가에 혼자 서있네
법의 심판을 받은 나의 사랑아
가슴의 배교의 낙인이 찍혀 있지만
나는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슬퍼 하지도 않는다
나는 이제 강을 따라
한참을 더 걸어야 하리
샛노란 수술을 가진 이단의 사랑을 위하여
해 저무는 강가를 혼자 걸어야 하네 -기영주, <백두옹의 사랑> 전문.
박꽃은 소복한 여인의 한(恨)처럼 슬프고 외롭다. 부서질 듯 하얀 달빛이 쏟아지는 한밤중에 홀로 피었다가 화사한 햇살이 돋아오면 입을 굳게 다물어 버린다. 여인이 한을 가슴속에 숨기고 홀로 삭이듯 한여름 폭염과 싸우면서도 넓은 치마폭 속엔 은빛 달덩이 같이 영근 박을 숨겨 놓는다.
옥양목을 가을 햇볕에 바래 놓은 것 같이 티 없이 맑은 박꽃은 한여름에 보는 설경 같다. 성하(盛夏)에 노송(老松) 위에 내린 학같이 고결하고 청순한 모습이다. 그러나 그 심중에는 기인 여름의 격정과 싸워온 고뇌와 번민이 응혈 져 하나의 박 덩이로 완성된 시심의 결정체 같기도 하다.
목월의 저녁답에 아가씨를 애절하게 부르는 서정의 아름다움, 담 시 “오적”으로 서슬이 시퍼런 박정권 시절 무수한 고난을 당하며 독재정권에 저항하였던 올곧은 김지하 시인의 순수한 시심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씀바귀는 쓴맛으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야생초에 속한다. 잎보다도 뿌리가 더 쓰다. 사랑을 달콤한 꿀에 비유하는 것이 반하여 박경석 시인은 쓴 뿌리에 사랑을 은유로 표현 하였다.
망초꽃도 들꽃으로 늘 사람들의 발길에 외면당한 채 외롭게 피었다 지는 꽃이다. 한영옥의 시는 주지적인 표현으로 쓰여 진 표현이 돋보인다.
할미꽃은 해마다 봄이면 무덤가에 고개를 숙이고 피어난다. 갓 태어날 때부터 꼬부라져 할미꽃이란 이름을 얻은듯하다. 할미꽃을 시조로 옮긴 오정방의 작품이 돋보인다.
온몸에 솜털을 뒤집어쓰고 얼굴을 붉히면서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는 슬픈 할미꽃, 중국에서는 노인의 백발 같다 하여 백두옹(白頭翁)이라 부른다 한다. 꽃말은 “충성”이다.
기영주 시인은 남가주에서 의사로 봉사하고 있으면서 시와 시조 그리고 논문을 쓰는 분이다. 일찍이 아버님을 여의고 강변 무덤가에 피어있는 할미꽃을 보고 사랑의 심정을 뼈아프게 가슴에 새기고 있다.
코스모스
청초한 코스모스는
오직 하나인 나의 아가씨,
달빛이 싸늘히 추운 밤이면
옛 소녀가 못 견디게 그리워
코스모스 핀 정원으로 찾아간다.
코스모스는
귀또리 울음에도 수집어 지고,
코스모스 앞에선 나는
어렸을 적처럼 부끄러워지나니,
내 마음은
코스모스의 마음이오
코스모스의 마음은 내 마음이다. -윤동주, <코스모스> 전문.
코스모스
이슬비 비오듯 내리는데
비오듯 내리는 이슬에 젖어
고은한 황혼이
황혼의 어둠 속에 피어있는 코스모스.
그 꽃을 꺽으며 꺽으며
벌레소리
요란스런 벌레소리 함부로 밟고 가면
외로움 가슴에 차고
먼 하늘엔 작은 별 하나. -장만영, <코스모스> 전문.
코스모스
- H의 무덤에서-
푸른 하늘이
산을 넘어 가고
해오리도 넘어 가고
바다가 보이는
고개를 넘어 가면
네 무덤엔
코스모스가 두 송이.
탄흔(彈痕)같은
빨간 코스모스에
나는
네 체온을 찾는다. - 신석정, <코스모스> 전문.
코스모스
빛난다
유리 같은 공기 속에서!
뽑은 듯 나릿한 몸매
살랑거리는 모양이 눈에 보인다.
가벼운 속삭임이 흘러
눈썹을 간지린다.
밖엔
고달픈 애수가 헤매고 있다.
벗은 나무들 피곤한 팔 드리우고
가을바람은 마른 잎을 뿌린다.
웃음과 눈물
좀더 가까이 서자.
빛난다
유리 같은 공기 속에서!
밝게! 차게! -백국희, <코스모스> 전문.
코스모스
1
투명한 작은 우주
텅 비인 가슴이라
가을을 앞세우고
숨차도록 달리는데
적막한 허허벌판에서
빨간 웃음 볼에 진다.
2
가을철 잡초 속에
조심스레 하늘이면
말갛게 씻긴 고독
그리움에 묻히는데
먼 고향 슬픈 사연이
노을 밭을 비껴간다.
3
불타는 정열이사
된서리가 내려와도
시달리던 어매처럼
가는 허리 정정한데
그늘진 꽃 마음 곁엔
누구 혼이 머무는가. -김해성, <코스모스> 전문.
코스모스
몸달아
기다리다
피어 오른 숨결
오시리라 믿었더니
오시리라 믿었더니
눈물로 무늬진
연분홍 옷고름
남겨 주신 노래는
아직도
맑은 이슬
뜨거운 그 말씀
재가 되겐 할 수 없어
곱게 머리 빗고
고개 숙이면
바람 부는
가을 길
노을이 탄다. –이해인, <코스모스> 전문.
코스모스
봄 꽃이 피는 L A에서
너를 만났다
눈물을 머금고 있는 너
영문을 모르는 파란 눈의 할머니는
담담히 물을 주고 계셨지만
네 목마름을 알 수 있었다
언어마저 공허하게 울리는
척박한 화단의 한 쪽에서
옛 그림자를 붙드는 너
옷깃을 스칠 만큼의 바람이라도 부는 날은
눈썹너머 아리아리 넘어가는
한국의 가을을 불러 오려무나
눈물 찡 솟는 가을 들판에 서면
후둑 후둑 떨어질 네 설움
어깨가 젖도록 실컷 울어보려무나 -김한주, <코스모스> 전문.
코스모스
떠돌이 바람 한 올
부끄러운 옷고름 헤치고
순수를 옭아
그리움 눈망울에 새기고파
하늘을 맴도는 고추잠자리
가을을 날아 흠모의 춤을 추면
설레임만 꽃잎에 남아
가슴속 신열 앓는 중모리 가락으로
삭아가는 햇살 끝에 영그는
황금미소 넉넉하게 피어나면
연분홍 낭자들
손 흔드는 모습이 곱다 -김용욱, <코스모스> 전문.
가을과 코스모스
초가지붕
돌 담장 사이로
호수처럼 파아란
하늘이 열리면
한여름 자란 꿈을
모으는 내 소녀.
순결한 마음은
미풍에도 떨고
산 머루가 영글면
오신다던 임을
기다리는
티 없이 고운 바램
찬란한 햇살에도
잔잔한 호심(湖心)에 내려
영혼을 씻는 이 가을에
소녀여
코스모스여
살뜰히 접어
가슴 깊이 간직한
우리
사랑의 노래 일랑
함께 부르자꾸나. -정용진, <가을과 코스모스> 전문.
국화(菊花)
지금 뜰에는 국화가 한창이다.
국화의 향기와 모양이 드러나도록
하늘의 섭리는 먼저 온갖 꽃들을 저렇게 시들이시고
얼마간의 냉도와 맑은 공기 속에 국화를 두시었다.
마지막 꽃에 얼맞도록, 국화는
가냘픈 꽃잎을 벌리고 몸을 떤다.
몸 향기를 바람에 태워
세상을 황홀하도록 향기 속에 적시고 있다.
지금 뜰에는 국화가 한창이다. ... -박남수, <국화> 일부.
수국(水菊)
연보라 피는 꽃이
탐스럽고 깨끝하이
한겨울 살아 넘겨
더부룩이 피어났네
우리도 이 고비 넘겨
풍성하게 지내 고저 -김용팔, <수국> 전문.
울안에 핀 수국 앞에서
7월 한 여름 아침
집 울 안에
푸른 수국이 피어 있을 때
그 앞에 서면
자꾸 하늘을 쳐다보게 된다
수국은 왜 하늘 빛깔을 닮았을까
그리움이 다 하면
저렇게 색깔도 옮아지는가
오늘도
수국의 갈한 목을 추겨주며
하늘 한 번, 수국 한 번
또 수국 한 번, 하늘 한 번
번갈아 쳐다본다
어느 새
나도 닮아 푸른 마음이 된다 -오정방, <울 안에 핀 수국 앞에서> 전문.
들국화
산등성 외따른 데
애기 들국화.
바람도 없는데
괜히 몸을 뒤뉘인다.
가을은
다시 올 테지.
다시 올까?
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 . -만해. 한용운, <들국화> 전문.
들국화
갈 곳이 있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 가
돌아올 곳이 있는 사람은
또 얼마나 행복한 가
고개 숙여 돌아오는 길
누가 우러러보지 않아도
하늘이야 얼마나 아스라이 드높으신지
내 조상대대의 산자락이거든
거기 불현듯 손짓 있어
어떤 이름도 붙일 수 없는 들국화
한 송이
한 송이와 더불어
얼마나 행복한 가 -고은, <들국화> 전문.
들국화
가을 햇살 따스한
돌담 울타리
들국화의 하얀 얼굴이
말 없이 고개를 흔들고 있다
황소 발자국 깊이 패인
진흙길 돌아온
서러운 긴긴 세월
가슴 깊은 곳
주름으로 피어 있어도
새벽 길가 풀 잎에
맑은 이슬로 남아
눈물 되어 흘러 내린다
기억의 열매들이
하나 둘씩
넓은 뒷뜰 마른 낙엽에
싸여 숨쉬고
하얀 들국화의 웃음은
석양을 바라보는 두 쪽이 된 가슴에
짙은 향기로 살아나
포근히 안아 준다 -박효근, <들국화> 전문.
들국화
모두들 떠났는데
우리
뒤돌아보지 말자
늦은 꽃으로
다 주워버린
하얀 가슴
서리가 성성한데
그만
손짓으로 떠나자
머뭇거리는
아쉬운 눈빛
늦가을 향기여 -최석봉, <들국화> 전문.
치자꽃(梔子)
저녁 으스름 속의 치자 꽃 모양
아득한 기억 속 안으로
또렷이 또렷이 살아 있는 네 모습
그리고 그 너머로
뒷산마루에 둘이 앉아 바라보던
저물어가는 고향의 슬프디 슬픈 海岸通의
曲馬團의 기빨이 보이고 천막이 보이고
그리고 너는 나의, 나는 너의 눈과 눈을
저녁 으스름 속의 치자 꽃 모양
언제까지나 이렇게 지켜만 있는가 -유치환, <치자 꽃> 전문.
인동화
아름다운 꽃이여
곱게도 피었구나
이 조용한
그리 눈에 띠지 않는 그늘에 숨어
사람 손에 닿지 않고 너 꿀 먹은 꽃은 피고
사람 눈에 띠지 않고 네, 가냘픈 가지는 흔들리고
소풍 하는 이의 발 밑에 밟히는 일 없이
귀찮은 손에 걸려 눈물짓는 일도 없다.
자연은 널 백사(白砂)의 입성으로 단장 시키고
속계(俗戒) 눈에 띠지 않도록 하여
여기 호위(護衛)의 그늘을 장만해 놓고
집에서 속삭이는 시내를 보냈다.
이리하여 조용히 네 여름은 지나가고
너의 그날그날
편안한 잠에 기울어 간다..... . -프레노오, < 인동화> 전문.
샐비어
춤을 추어라
떠날 사람 떠난 자리
아끼던 속 울음도
진홍 빛 각혈로 터지고
불현듯 내려앉는
가을 하늘이여
다시 노래 부르리
아득한 네 등 뒤에서
소스라치는 세월
일으켜 안으며
한 목숨 떠돌다 가는
신들린 넋으로 -박영희, <샐비어> 전문.
씨그라멘
넓다란 유리창 속으로
사랑과 같이 따스한 아침 볕이 쏟아져 들어온다.
씨그라멘의 화분 곁에 서면
역시 사랑과 같은 꽃 향기가 난다.
이아침
나는 시 같은 편지가 쓰고 싶다.
편지 같은 시가 쓰고 싶다. -장만영, <씨그라멘> 전문.
능소화
누굴 위해
그리 슬피 운 날이 없건만
너는 밤새
나를
울어 주었구나
발아래
뚝. 뚝.
꺾어놓은 네 울음
이 아침
나는
결코 처참치 않으리
누군가
나를
울어 붉은 날은 -강학희, <능소화> 전문.
코스모스의 원산지가 멕시코라면 의아해 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마치 한국이 원산지인 것처럼 우리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꽃이기 때문이다.
호수처럼 파란 하늘이 열리고 가을하늘이 높아 가면 우리의 고유명절 추석을 맞아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이 향수에 젖어 고향으로 되돌아오는 귀향의 계절, 둥근 달빛이 부서져 내리는 철도 연변에 줄지어 늘어선 코스모스의 환호를 받으면서 정든 가족과 친지들을 만난다. 가녀린 소녀의 몸매처럼 코스모스가 소슬한 가을바람에 손을 흔들어대는 모습, 이는 분명 그의 꽃말 “소녀의 순정”처럼 애잔하고 슬퍼 보인다. 코스모스는 가을이주는 우수와 상념의 심상을 우리 모두에게 진솔하게 전해주는 순정의 꽃이다. 국화는 사군자에서 이미 다루었다.
수국은 무더운 여름철 소나기가 지나간 후 소담한 꽃다발로 무지개 빛으로 피는 꽃이다. 잎은 윤기가 가득하고 이슬을 머금은 모습이 청순하다. 꽃말은”변하기 쉬운 마음. 처녀의 꿈”이다.
들국화는 늦가을 시골 길녘에 지천으로 피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서민적 꽃의 대명사다. 작은 키에 진한 향기를 지니고 야산과 들판 그리고 길가에 무리를 이루고 피어서 달밤 바람결이 살랑 이는 모습은 귀엽다 못하여 애처롭지만 시적인 감흥을 불러 다 주는 꽃이다.
만해 한용운 시인은 스님으로 3.1절 조선독립을 선언한 33인의 한 분이요,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혼신의 힘을 기울이신 분으로 그의 시 “님의 침묵‘은 많은 사람들이 암송하는 명시다.
고은 시인은 들국화와 더불어 행복을 느낀다고 진솔하게 고백하고 있다.
여러 번 노벨문학상 후보로 올라 각축을 벌리고 있는 분이다.
샐비어 또한 푸른 가을 하늘아래 울 가에서 진홍 각혈을 토해내는 열정의 꽃이다. 꽃말은 “건강. 정력절륜(精力絶倫)”이다.
시클라멘은 풍염하고 단정한 모습에 꽃 모양은 나비가 떼 지어 나는 군무(群舞)의 모습이다. 지중해 연안이 원산으로 꽃말은 “시기. 질투. 의혹”이다.
능소화는 중국과 미국에 두 종류가 있다. 땅을 기어가다 지쳐 슬픔에 빠져 있는데 소나무가 나에게 기대렴 하는 소리에 반가워 소나무를 타고 올라 나팔꽃 모양의 주황색 꽃을 피우는 전설이 있는데 절이나 담장에 기어 오르며 핀다. 꽃말은 여성이다.
낙화(落花)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하리
꽃이 지는데
꽃이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아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이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조지훈, <낙화> 전문.
낙화(落花)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 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이형기, <낙화> 전문.
낙화(落花)
돌 돌 돌 가랑잎을 밀치고
어느덧 실개울이 흐르기 시작한 뒷 골짝에
멧비둘기 종일을 구구구 울고
동백꽃 피 뱉고 떨어지는 뜨락.
창을 열면
우유빛 구름 하나 떠 있는 항구에선
언제라도 네가 올 수 있는 뱃고동이
오늘도 아니 오더라고
목이 찢어지게 알려오노니.
오라 어서 오라.
행길을 가도 훈훈한 바람결이 꼬옥
향긋한 네 살결 냄새가 나는 구나
네 머리칼이 얼굴을 간질이는구나.
오라 어서 오라.
나의 기다림도 정녕 한이 있겠거니
그때사 네가 온들
빈 창 밖엔
멧비둘기만 구구구 울고
뜰에는 나의 뱉고 간 피의 낙화! -유치환, <낙화> 전문.
낙화(落花)
나는 가네.
옷을 찢고 가슴을 때리며
타는 숲 죽은 나무
꽃 지는 비탈.
나는 가네. 가시덤불
헤치며 가네.
잠든 넋 부르고
회오리바람 속,
만수천산 다리 절며
머리 풀고 가네. -양성우, <낙화> 전문.
낙화(落花)
늦은 봄날
울밑에 잠든
삽살개 잔등위로
솔 솔 이는 실바람.
나무 그늘을 지나는
여인의 옷깃에
꽃 물결 무늬가
일고 있다.
지금은
어느 계집아이의
어머니가 되었을
세월인데
뒷집 아이가 날린
연(鳶)이
높이 떠올라
이별이 아픈
골목길.
시들은 꽃을 버리고
떠나가는
나비의 몸짓으로
낙화가 일고 있다.
멀리 서는
추억이 슬픈
강물소리
그대와 함께 거닐던
거리에
꽃 노을이 붉은
이 저녁
몸살을 알아
수척해진
너의 모습이
무척 그립다. -정용진, <낙화> 전문.
낙화
시린 바람이
뼛 속을 흔들 때도
견딜 수 있었던 건
손곱던 설레임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입맞추고 싶은 입술처럼
볼록 솟아오를 꽃망울엔
가슴이 뛰었고
활짝 핀 황홀 빛 꽃 향기엔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는데
무정타 이 바람 어이 하라고
비야 바람아
꽃잎을 흔들어 놓느냐
흩날리는 꽃잎 눈물 되지 않게
아주 조금만 시간을 주려무나 -강영미, <낙화> 전문.
낙화운(韻)
바람소리가
텅 빈
꽃 노친
바람소리가
빈 가지
가짓길로
놓친 꿈을
붙잡으러 다니면
나는
새로 오리
새 꽃을 가지고….
그리고
갈기는
당신의
서늘한 매를
맞으려네. –김선영, <낙화운> 전문.
편편화심(片片花心)
꽃이 지누나
기다려도 무심한 봄날
봄이 무거워 꽃이 지누나.
진관사 가는 언덕
훨훨 날리는 꽃.
꽃이 피어도 님 없는 봄날
꽃이 지누나
세상에 한 번 피어
가는 날까지 소리 없는 자리
님 그리다 마는 자리
하늘이 넓어 산이 깊어
가지에 피어도
피다 지는 마음은 나 여기 마음.
꽃이 지누나
진관사 깊은 골에
봄이 무거워 봄이 지누나. -조병화, <편편화심> 전문.
청록파 시인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은 우리 시단에 세 큰 수레바퀴와 같다.
조지훈은 “승무‘로 우리에게 너무 잘 아려진 올곧은 선비 시인이다. 그도 꽃이 소리 없이 지는 낙화 앞에서는 하나의 청순한 소년으로 되돌아와 울고 싶어 한다. 시의 생명이 진실과 순수임을 잘 증명해 주고 있다.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낙엽이 지고, 산천에 눈이 쌓이는 것은 신의 섭리요, 자연의 리듬이며, 맥박이요, 질서다.
낙화의 시를 통하여 이형기 시인은 떠나갈 때를 알아 스스로 떠나가는 자연의 질서를 여인의 뒷모습으로 표현하고 애태워 하면서도 떠나는 자를 위하여 진심으로 축가를 불러주고, 박수를 보내는 여유를 보여 주었다.
이는 결별의 아픔을 내심에 담고 영혼의 슬픈 눈으로 자신을 스스로 감싸 안는 명편이다. 울며불며 애태우고 칼부림하는 세속적 사랑의 결별을 일깨워주는 아름다운 충고다. 시 낙화를 통하여 사랑의 아름다운 추억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할 수 있는 힘, 사랑의 묘약을 발견하기를 당부한다.
청마 유치환은 ‘깃발“ ”바위“ ”생명의 서“의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편운 조병화 시인은 이승을 떠날 때 어머님의 심부름을 하러 왔다가 이제 어머님의 심부름을 마치고 어머님 곁으로 간다고 떠난 시인이다.
이슬 꽃
간밤
창가에 서린
봄 달
애잔한 그 모습이
마음에 걸려
잠 못 이루고
한겨울
동면의 시간들을
인내로 견디다가
아침 이슬비로
벗은 나무 가지마다
초롱초롱 열린
이슬 꽃.
여린 가슴마다 어린
칠색 무지개 빛
앳된 꿈이
영롱하구나
올해도 너와 나의 삶이
거짓 없이 투명한
한해가 되기를. -정용진, <이슬 꽃> 전문.
여름 꽃
그대와 마주 서기는
그대 눈동자 바로 보기는
두렵고 또 두려운 일이어서
자기 뜨락에 핀 꽃
여름 꽃을 보고있다.
어두움의 끝에서
몸을 활짝 열었던 아침 꽃들
정오가 오기 전에
꽃잎으로 제 얼굴을 가리고
안으로 돌아가 있다
해를 바로 보기가 어려울 것이다
어려서 여름 꽃은
꽃잎을 모아 합장한다
여름 꽃은 자기 안으로 들어가
해의 눈동자가 된다 -이문재, <여름 꽃> 전문.
서리꽃
서리꽃 하야게 들을 덮은 아침입니다
누군가의 무덤가에 나뭇짐 한 단 있습니다
삭정이 다발 묶어놓고 무덤가에 앉아
늦도록 무슨 생각을 하다 그냥 두고 갔는지
나뭇가지마다 생각처럼 하얗게 서리꽃이 앉았 습니
다
우리가 묻어둔 뼈가 하나씩 삭아가는 동안에도
우리들은 남아서 가시나무 가지를 치고
삭정이 다발 묶으며 삽니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우리는 가져갈 수 있는지 모
르지만
오늘도 가야 할 몇 십 리 길이 있습니다
오늘도 서리꽃 하얗게 길을 덮은 아침들에 나섭니다 -도종환, <서리꽃> 전문.
서리꽃
손발이 시린 날은
일기를 쓴다.
무릅까지 시려오면
편지를 쓴다
부치지 못할 기인 사연을
작은 이 가슴마저
시려드는 밤이면
임자 없는 한 줄위
시를 찾아 나서노니
사람아
사람아
등만 뵈는 사람아
유월에도 녹지 않는
이 마음을 어쩔래
육모 서리꽃
내 이름을 어쩔래. -유안진, <서리꽃> 전문.
서리꽃
남몰래 흘린 절망의 눈물
절절히 스미는 시린 가슴
사랑의 묘약을 아무리 발라도
나을 기미가 전혀 없고
지워지지않는
차디찬 서러움이
살을 도려내고
눈보라는 가시로 피어납니다
추운 이 겨우내
서리꽃으로 오실 그대위해
봄비 내리면 기억 저편에 묻는
시인의 노래로 가득 채우겠습니다 -신 소피아, <서리꽃> 전문.
가을꽃
바람쟁이의 아내가 말한다
‘친구여’ 나는 어쩌면 좋지?
바람쟁이의 아내가 울면서 말한다
‘친구여’ 난 이제 죽고 싶어,
바람쟁이의 아내가
들꽃이 되어
바람에 한줌 머리카락만 날리며
한 줄 머리카락
그 아픈 무릎 아래로 떨구며
‘친구여’ 나 여기 이렇게 서서 무엇을 하면 되지?
혀끝이 말라
이젠 말도 못하고
새파랗게 눈 뜨는
가을 여자
가엾은 나의 친구. –김혜숙, <가을꽃> 전문.
겨울꽃
한 가닥 희망 안고
척박한 땅에
뿌리 내리려는 의지인가
차가운 비 뿌려도
파란 새순은 돋아나고
어두운 저녁 뜰에
밝은 색 꽃망울 저
피어나는 우리 마음이여
땅줄기 굳게 묻은
우리의 가슴속 언약
곱게곱게 피어날 때
붙박혔던 고뇌도
다 털어 내 버리고
사랑위한 꽃나무도
소중히 간직하겠오
내 가슴에 피어난
새로운 소망이여! -전종진, <겨울꽃> 전문.
달 꽃
철들어 여태까지
땅에는 별빛만
깔린 줄 알고 살았더니
그게 아니네.
땅에도 달이 있구려.
어느새 내가
그 달 속에 들어가 있네.
대낮에도 달 속에 사네.
하늘과 땅을
달이 이어놓고는
달 속에서 꽃이 피네.
달 꽃이
달아오르네.
샛말간 분홍
달 꽃이 밝아
달뜨락
하늘만 하네. -고원, <달 꽃> 전문.
별 풀꽃
정월 밭둑에서 쥐불 놓는 아이들
그 떠들썩한 소리에
산마을 온통 흔들릴 때
살촉얼음 비집고 새봄 눈뜨는 풀 뿌리
맑은 피가 돌기 시작하는
너는 새였다.
시린 손끝 다죄면서
어두움의 굳은살 긁고 또 뜯어 내리는
아직도 서슬 푸른 동토(凍土)
그 굳어진 가슴 사이
뼈 속 마디마디 얼음 박히는
아픔 깊을수록 투명해지는
눈빛 감추는 새.
네 영혼이 끌어안고 뒹구는
갈대만의 땅 어두운 들녘
잡풀들 일어서는 날
키 낮은 풀잎 그 밑에 더 낮게
작은 꽃으로 피었다가
다소곳 곱포갠 깃 털며
또렸한 꽃불로 날아오르고 싶은
너는 새였다. - 한여선, <별 풀꽃> 전문.
눈꽃
슬픔 슬픔
너의 슬픔
차마 슬픔이라 말 않겠네.
예까지 밀려 떠돌며
가까스로 피어 오른 뜻.
밤새도록 울며 쌓여
기어이 황홀한 모습 들어냈고,
밤 풍경
밤 사연
한 올 한 올 짜내서
바람 불면 무너 진다
슬픔으로 쌓은 공
놓칠세라
꼬옥 꼬옥
끼리끼리 얼싸안네. -조태일, <눈꽃> 전문.
눈꽃
보아라
벌리는 손도 없이
낮은 것을 먼저 채우고
나중 것으로만 쌓아올린
저
무욕의. -정용주, <눈꽃> 전문. * 저자의 남동생.
눈꽃
낙엽 떨군 벚나무 가지 위로
나풀나풀 날아와
사뿐히 내려앉은
순결한 모습이여
여인의 젖 무덤처럼 부드럽게
윤중로 거리를 휘덮던 날
핑크 빛 꽃 물결 넘쳐 나는 사랑을
너는 받았었지
계절이 남기고 간
아름다운 날들 속에
새하얀 그리움으로 피어올라
달빛에 눈부시다 못해
차마 애처롭구나 -박순영, <눈꽃> 전문.
얼음 꽃
그대는 나의
꿈,
의지,
그대는 나의
희망,
절망,
그대는 나의
기도,
그리움,
아, 그대는 나의
얼음 꽃 -김행자, <얼음 꽃> 전문.
사막의 꽃
-아리조나 여행 중에서-
아무것도 다치지 않으려고
이 세상 내가 왔지만
나도 한때는 젊어 있어서
너의 꿈으로 피어나
너의 진실로 흔들리고 싶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피 할 수 없는
번뇌나 갈등이나
사랑이나 욕정이나
그 진한 빛깔로 피어나서
타오르는 대낮에
그 절정을 흔들어대고 싶은
그런 때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 아침 나는
이 광막한 사막 그 어느 곳에서
내리는 새벽 이슬을 모아
너의 진정한 슬픔
아파하는 그 영혼의 빛깔로 태어나
너를 괴롭히고 싶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다치지 않으려고
이 세상에 내가 왔지만 -이창윤, <사막의 꽃> 전문.
붉은 꽃
어디쯤일까 어디쯤일까
그리움 가는 길에 발돋움하고
누구를 향한 마음에
이렇게 몸부림쳐 붉은 꽃일까
먼발치로 사라지는 세월을 두고
한세상 마당귀에 불을 지르네 -정희성, <붉은 꽃> 전문.
비오는 날의 노오란꽃
비가 오는 날이면
너에게 갈 수도 있지.
그러나 비가 오는 날에는
홀로 화원에 가
노오란 꽃 한아름 사겠어.
그 꽃이
노오란 후리지아나
노오란 데프딜이면 더욱 좋겠지.
비가 내려 우울한 날
창가에 작은 등불처럼 비치는 노오란 꽃 보면
막 끓인 커피 한잔 마시고 싶겠지.
그리고 침몰하는 배의 절망처럼
서서히 밀려 올 고독
그까짓 거 트라킬 한 잔 마시듯
원 삿에 삼켜 버리고
나- 블르문 노래를 들으면서도
너에게 가지않지.
눈을 감고도 찾을 수 있는
너에게 가는 길.
비가 오는 날이면
너에게 갈 수도 있지
포도주 한잔쯤 마산 표정으로
그러나 비가 오는 날에는
노오란 꽃 한아름 사다
내 창가에 꽂겠어.
그 꽃이 무엇이든
노오란 꽃이면 족하지. –타냐고(현혜), <비오는 날의 노오란 꽃> 전문.
꽃 노을
연지 찍고
곤지 찍고
간밤
꿈길을 밟고
임 만나러 가는
구름 한 점.
서산마루를 오르다
발이 부르터
옷깃에 배인
붉은 꽃 노을.
연지 찍고
곤지 찍고
그리움 품고 자란
내 아씨는
애련의 설움
옷고름에 씻고
저녁마다
수줍어
가슴 달아오르는
붉은 꽃 노을. -정용진, <꽃 노을> 전문.
인간은 세익스피어의 말처럼 만물의 영장이기 때문에 상상력이 하늘을 날고 땅에 가득 넘친다. 여기 상상의 날개를 펴고 피어나는 갖가지 상상의 꽃을 보라 얼마나 화려하고 찬란한가?
꽃은 나무나 풀처럼 생명의 세계를 통하여 나타나기도 하지만 이슬이나 눈 같은 형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도 한다.
마른 나무 가지 위에 진주로 영롱하게 열리는 이슬 꽃, 그리고 벗은 나무 가지 위에 햇솜 처럼 곱고 풍성하게 내려 안는 눈꽃은 축제의 대상이 되기도 하다. 자연의 아름다운 변화를 통하여 천연의 미를 발견하고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기쁨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밤하늘에 총 총히 반짝이는 별들과 아침저녁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은 그 자체가 시요, 예술이며, 한 폭의 그림이다. 노을을 보면 연지 찍고 곤지 찍고 시집가던 누님이 생각난다. 아름답고 그리운 추억이다.
도종환 시인은 “접시꽃 당신“의 연가 시인으로 유명하다. 정의로운 투쟁으로 몸을 많이 상하고 요양 중이란다.
정희성 시인에게는 ”저문 강에 삽을 씻고“명 편이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5) 꽃은 완성이다.
석류(石榴)
남방토(南方土) 풀 안 돋은 양지귀가 본이다
햇비 멎은 저녁의 노을 먹고 산다
태고에 나서
선인도(仙人圖)가 꿈이다
고산정토(高山淨土)에 산약(山藥) 캐다 오다
달빛은 이향(異鄕)
눈은 정기 속에 어우러진 싸움 -백석, <석류> 전문.
석류
장미꽃 처럼 곱게피여 가는 화로에 숫불,
입춘 때 밤은 마른풀 사르는 냄새가 난다.
한 겨울 지난 석류열매를 쪼기여
홍보석 같은 한알 한알 두알 맛 보노니,
투명한 옛 생각, 새론 시름의 무지개여,
금붕어처럼 어린 녀릿 녀릿한 느낌이여.
이 열매는 지난해 시월 상 ㅅ 달, 우리 둘의
조그마한 이야기가 비롯될 때 익은것이어니,
자근 아씨야, 가녀린 동무야, 남몰래 것들인
네 가슴에 조름 조는 옥토끼가 한쌍.
옛 못 속에 헤엄치는 흰 고기의 손가락, 손가락,
외롭게 가볍게 스스로 떠는 은(銀)실, 은실,
아아 석류알을 알알이 비추어 보며
신라천년의 푸른 하늘을 꿈꾸노니. –정지용, <석류> 전문.
석류
여름이
두고 간 살을
누가 보았던가
와 있는
가을의 피를
누가 보았던가
다만
10월 한낮
하늘 꼭대기
햇덩이
살 한 점
피 한 방울
아무도 모르게
떨어지더니
저렇게
금빛 나는
석류 알마다
살로 피로
터지는
극채색이다 -전봉건, <석류> 전문.
석류
기억하는가, 어릴 적 석류 알을 씹던 맛을
사람들은 가을나무나 까마귀만 떠올리고
고향의 무덤을 오고 갈 때
나는
빛 고을 두암동에서
피래미 잡다 오는 길에
석류나무에 처음 손을 댄 날을 기억하지
메뚜기는
대두병에 가득 차있고
맹감, 정금, 머루로 혀는 검고 떠럽던
그곳에서
돌감나무 가지를 꺽고 있었지
밤실 길은 돌무더기 쌓여 가고
나는 부질없이 남이 쌓던 돌무더기 넘어지게 하고
코스모스 속에 피 묻혀 내려오다가
산수동 오거리에 이르면
석류나무 가득한 집이 보였네
먼데 개 짖는 소리
바람이 삼키기를 바라고
최후 심판 때 생명책에 내 이름 지워져도]
좋을 희열로 가득 차서
세상의 상급이
떨어진 석류를 따서 담던 날이여
아이와 함께 한 천사는
얼마나 탄식하며
보좌 앞 스랍들 속으로 달려갔을까
빈 가지들이 허공에 남아
내게 지르던 칭찬과 질책을 들으며
가슴에 쌓아두고 왔기에
목이 곧은, 아니 감미로운 맛을 감각하는가
흙에 묻혀도
되살아 날 영혼의 앙금으로…..
이제 시간은
줄넘기하던 소녀들의 고무줄
잡아 챈 손으로
공간의 이쪽과 저쪽을 넘나들며
도대체
어느 샘 곁에 남아
석류 알을 세며 쉬어갈 까.
* 스랍: 천국의 보좌에서 일하는 천사. –배명식, <석류> 전문.
석류
햇살
한 올 한 올 뽑아
야금야금 깨물더니
가을도 되기 전
포식을 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저 웃음을 보라
여름이 톡톡
가을 껍질에 가득하다. –변재무, <석류> 전문.
석류꽃
누나야
석류꽃이 피었습니다
푸른 듯 붉은 꽃이
가지마다 피었습니다
누나가 가신 날에
잎사귀마다 그늘지어
하늘가 높은 곳에
몸부림치며
그때 같이
석류꽃이 피었습니다. -김세익, <석류꽃> 전문.
석류꽃
피뱉은 꼭두서니
입술 하나 터트렸나
다홍구슬 알알이 쏟아지려나
눈이 신 감미로운 꽃이슬
흥근히 흥근히 고여 넘치리
벌 나비도 잠을 설친 후원에
초롱 밝힌 별당 아가씨
첩첩 규방 안에 고개 숙여도
뙤약볕을 노곤 노곤 속으로 들이켰다
가을 하늘 한 조각 깨물고
곤지 찍고 석류잠 꽂고
별당아가씨, 촛불 같은 별당 아가씨
환히 초례상 앞으로 나오라
까르르 온 천지에
가을이 쏟아 질레. -이숭자, <석류꽃> 전문.
석류꽃
내 짝궁이
석류꽃 같이 귀엽던
내 짝궁이
대학 입학하던 첫날
석류꽃 같은
연지를 입술에 바르고
교문을 들어서다
들키자
화들짝 놀라!
그는 마침내
붉은
석류꽃으로 피었다. -정용진, <석류꽃> 전문.
석류
그 한 톨 영그는 무게로
가을은 익어 가는가
거무스레-투박한 껍질에도
보람은 진다홍 속으로만 물들어
바람과 비 흐르는 구름
먼 천둥 꽃 비단 무지개
고뇌는 따가울수록 쓸수록
한 알 한 알 홍옥(紅玉)으로 여무는가
그 한 톨 영그는 무게로
계절은 익어만 가는가. -최화국, <석류> 전문.
석류
타는 바람
흙먼지
한 여름을
삭정이 울 가에 서서
목마른 세월들...
낙엽이 쌓이는
고궁 돌계단을
오르는 심정으로
가슴을 열어
임을 부르는
속마음은
루비 빛 열정인데
기인 언덕
실개천에 늘어선
포프라 머리위로
청량히 고이는
하늘은 자수정.
이제
먼 언 길을 떠난
그대가
상념(想念)의 낙엽을 밟고
되돌아와
입술을 포개어
사랑을 입 맞출 때
귓전에 흘러드는
그리움의
강물소리
지금은
우리 모두가
남기고 떠나온
고향 울 가에 서서
타는 가슴을 열어
붉게 익을 석류여. -정용진, <석류> 전문.
앵두 꽃
흐뭇하게 먹은 아기
배를 안고
일어선 듯
손과 발 아랫도리
온몸에다
밥풀 달고
앵두꽃 환희 웃는다
이 어여뿐
봄볕 앞에. -백수. 정완영, <앵두 꽃> 전문.
보리수꽃(菩提樹)
보리수꽃이 피고
원앙새 노래하고
햇님이 벙실벙실 웃을 때입니다.
그때 당신은 나의 목을 껴안고 입맞추셨습니다.
그때 당신은 나를 불룩한 가슴에 힘껏 껴안으셨습니다.
나뭇잎이 떨어지고
까마귀 까악 깍 울며
햇님이 언쟎은 눈초리로 바라볼 때입니다.
그때 우리들은 깨끗이 “작별의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 때 당신은 가장 정중히 고개를 숙이셨습니다. -하이네, <보리수꽃>
석류는 그 꽃이 사랑스러운 연인의 입술처럼 우아하고, 단아하고, 선정적이다. 늦가을 타는 가슴을 열어 입을 벌린 정경은 지나가던 행인이라도 달려들어 껴안고 입을 맞추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보리수는 석가여래가 49일 동안 고행 끝에 대오각성(大悟覺醒)하여 생사의 고를 초탈(超脫)하였다는 성수(聖樹)로 여겨지며 꽃말은“해탈(解脫)”이다. 불가에서는 보리수열매로 염주를 만들어 공덕무량배(功德無量倍)를 한다.
보리수가 종교적인데 반하여, 석류는 시화(詩畵의 표제다. 많은 시인들이 시의 주제로 삼고, 화가들이 그림의 소재로 삼는다.
더구나 알알이 영글어 보석처럼 빛나는 석류 알들은 진주보다도 아름답다. 동양화의 화두가 되는 연유를 알만하다. 꽃말은 “자손번영, 자손 수호”이니 우리의 조상들이 어
추사 김정희는 호를 여럿 가진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노년에 호를 노과(老果)라 짓고 스스로 만족하여 즐겨 쓴 것으로 더욱 유명하다.
성숙한 과일처럼 원숙한 인품으로 인생을 마감하고 싶은 욕망이었을 것이다.
그의 서체가 추사체(秋史體)로 후대에 표본이 된 것으로도 이를 증명하고 남으리라.
완성의 결정체인 모든 과일들은 꽃으로부터 시작된다. 한 겨울을 추위 속에 견디고 봄을 맞이하면 새싹이 돋고, 꽃이 피는 것은 자연의 고귀한 질서요 윤리다. 꽃이 향을 발하면 벌과 나비들이 몰려들고, 이들은 양식인 꿀의 원료를 얻는 대신 꽃에게는 결실의 기쁨을 선사한다.
꽃은 열매로 변신하고 열매는 무더운 여름철을 견디면서 과일로 자라 가을의 따가운 햇빛과, 서늘한 바람, 그리고 매서운 서릿발을 받고 향기로운 열매로 성숙한다.
문학 작품도 이와 다를 것이 없다. 독자를 일시적으로 유혹하는 얕은 향기만으로는 절대로 성공적인 명작이 될 수 없다. 성숙의 인고와, 힘겨운 상황과의 끈질긴 투쟁이 있어야 독자에게 사랑을 받고 남에게 인정을 받는 명작이 탄생되는 것이다. 이런 작품이 시간이 흐른 뒤에 역사적 고전으로 자리 매김을 하게 된다.
봄에 갈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고, 봄에 꽃이 없으면, 가을에 열매가 없다. 그래서 춘경추수 춘화추실(春耕秋收春花秋實)이 자연의 세계 속에서의 고귀한 질서인 것처럼 문학의 세계 속에도 같다. 부단한 독서와 계속적인 퇴고가 문학인의 생명이다. 시가 아무리 영감과 직관의 산물이라 하여도 현대 시인들은 하나같이 남의 작품 읽기를 게을리 한다. 아무리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하여도 시대의 유행을 따르다 보면 자기 고유의 명작을 남길 수 없다.
포스트 모더니즘 이후로는 특색 있는 시풍이 없는 것이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시인으로서 부끄럽고 슬픈 일이라고 생각한다.
“되 땅에 꽃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이라고 옛 시인은 노래하였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자연 자체만으로는 안 되고 하늘과 땅, 인간의 천지인(天地人)의 아름다운 조화 속에서만 가능하다. 꽃과 향기와 열매, 벌과 나비와의 귀한 만남 속에 진정한 미가 완성 되는 것이다.
젊음은 젊음 자체만으로도 고귀하고 아름답다. 이른 아침 영롱한 이슬방울이 맺힌 꽃 봉우리처럼 청순한 몸매, 싱그러운 향내가 옮아 나는 기품, 그리고 착하고 순수하게 자신의 염원을 갈구하는 이성에 대한 그리움, 진심으로 갖고 싶어 하는 소망 등이 삶을 신나는 축제의 광장으로 이끄는 요소들이다.
인간이 태어날 때도 중요하지만 세상을 마지막 떠날 때가 더욱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철학을 좋아하고 이를 “죽음을 연습하는 학문”이라고 정의를 내린다. 하물며 영원으로 안내하는 종교에 있어 서랴.
언 땅을 가르고 솟아오르는 생명의 열기, 촉촉한 봄비와 포근한 햇살을 받은 나무들이 한 여름 폭양 속에 싱그러운 잎들의 보호를 받으며 열매를 키우고, 가을 양광과 바람 속에서 향기가 진한 과일로 성숙한다.
그리고 그들은 늦가을 찬 서리를 맞으면서 누르고 붉게 단풍으로 물들고 겨울 눈발을 받으면서 모든 잎들을 말끔히 떨 구고 알몸으로 신 앞에 서서 또 하나의 생명을 부여 받는다.
꽃과 벌과 나비들이 벌리는 사랑의 행진 속에서 꽃의 미학이 탄생되고 축제가 열리듯 시인들은 문학의 꽃인 고귀한 시를 탄생시키려고 전력투구의 정열을 쏟아 붓는다.
나는 그간 써온 꽃의 시들과 많은 시인들의 꽃에 관한 시들을 조화시키면서 꽃의 시학을 꾸미고 싶었다. 분명 시는 문학의 꽃이요, 향기며, 정수(精髓)다. 이 글을 쓰기 위하여 참으로 많이 찾고 또 많이 읽었다. 나는 꽃을 사랑하면서 꽃의 시를 계속 쓰고 싶다. 꽃은 나의 삶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 부족한 글을 끝까지 열심히 읽어주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박수를 보낸다. 꽃과 같이 향기 나는 삶을 누리시기를 기원한다.
필자 (시인. 전 미주한국문인협회 회장)
l 참고 : 나는 20여년 전부터 “꽃의 시학”을 쓸 것을 염두에 두고 준비해 왔다.
여기에 인용된 시들은 나의 소장 시집 중에서 필자의 원문대로 옮겼음을 밝혀둔다.
나의 서재에는 국내외에서 구입하고 증정된 500여권의 시집이 진열되어 있다.
나는 이 시집들을 모조리 들춰가며 꽃의 시를 찾았다. 시단의 원로들을 제외하고 많은 분들의 작품은 발견되는 대로 올렸다. 나에게 작품집을 우송하지 않은 분들은 크게 손해를 본 셈 이다.
나와 에덴농장에서 결의형제를 맺으신 고은(高銀) 형님께서 “만인보”를 쓰셨듯이 이 논문은 계속 될 것이니 본인의 작품이 빠졌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다만 출간된 작품집에서 뽑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샌디에고 에덴농장에서 秀峯 鄭用眞씀.
첫댓글 저의 시도 여기에 실려 있기에 펌해 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