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37]
정대화 (鄭大和) - 내조자로서의 한평생
2. 이화여대 퇴학 사건 - 2
10 그러나 곧 자유당 이기붕의 압력에 의해, 또한 부총장으로 있던 박마리아의 입김에 의해 우리를 비난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이 사건으로 통일교회가 지상에 크게 보도되어 세인들이 널리 알게 된 계기가 되었다.
11 그 당시 퇴학을 당한다는 것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집안의 큰 수치였다. 집의 부모님은 “1년만 더 다니면 졸업인데 교회는 졸업한 뒤에도 얼마든지 다닐 수 있지 않느냐?”라며 퇴학 당하는 일만큼은 없도록 하려고 나를 설득하였다.
12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역사하심으로 통일교회 원리 말씀이 만고의 진리임을 목숨을 걸고 증거하기 위해 이화대학교를 버리고 신앙의 길을 선택하였다.
13 그 뒤 우리는 복교 운동을 하면서 삼각산으로 금식 기도를 간 적이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알고 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뒤따라 식구들을 대동하고 올라오셔서 저희들에게 “금식을 하지 말고 먹고 힘을 내라”라며 먹을 것을 주셔서 함께 은혜스럽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 적도 있었다.
14 우리 14명은 계속적으로 단체 행동을 하기는 어려웠다. 집이 서울인 사람도 있었지만 지방인 사람도 많았고 또 집에서는 교회에 나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에 각자 흩어져 생활을 하였다.
15 그러던 중에 흥인동에 있던 교회가 장충동으로 이사를 하였다. 장충동으로 옮긴 뒤 7·4 사건이 일어났다.
16 교회 간부들 네 사람과 참아버님께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셨던 것이다. 교회 주변에는 사복형사들이 서성이며 우리 교회의 동향을 살폈고 또 예배 때는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창문에 돌을 던지기도 하였다.
17 나는 이봉운 장로님의 딸 이주경 언니와 참아버님 면회를 가기도 하였다. 면회소에서 아버님께서는 걱정하지 말고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하셨으나 그때는 우리들의 어린 신앙을 유지하기도 힘들었던 것이다.
18 참아버님께서 10월 4일 출감하시자 곧바로 식구들이 힘을 합해 청파동에 교회를 구입하여 이사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