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시각
식물은 우리를 바라보고 있을까? 만약 바라본다면 무슨 방법으로 바라보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먼저 '본다'는 개념을 정의해야 한다. 식물이 눈을 갖고 있지 않은 건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식물이 보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가까운 도서관의 자료열람실 책꽂이에서 사전 몇 권을 뽑아 '시각'이라는 명사를 찾아보라. 그리고 '눈'이라는 단어를 언급한 정의들을 모두 걸러낸 다음 뭐가 남는지를 살펴보라. 아마도 다음과 같은 정의가 남아 있을 것이다. "전문화된 기관을 이용하여 빛, 반짝이는 물체, 시자극을 감지하는 능력 또는 감각."
식물은 눈이 없으므로 고전적 의미의 시각을 보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빛 또는 시자극을 감지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시각을 이런 식으로 정의한다면 식물은 분명히 시각을 보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름의 방법으로 훌륭하게 발달시켜왔다고 할 수 있다. 식물은 빛을 받아들여 사용하고 그 양과 질을 인식한다. 식물이 이와 같은 능력을 발달시킨 이유는 단 하나, 광합성을 통해 에너지를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서다.
식물의 생활과 행동은 빛을 추구하는 지난한 노력으로 점철되어 있다.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은 식물은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이와 반대로 그늘에 쭈그리고 있는 식물은 가난한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우리가 늘 돈벌이에 골몰하는 것처럼 식물들도 늘 햇빛 확보에 골몰한다.
우리는 나중에 식물세계 나름의 부귀함 또는 가난함이 식물의 발육, 행동, 능력, 학습능력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어떤가, 우리네 인간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실내에서든 실외에서든 한 번이라도 식물을 관찰해본 사람들은 식물이 햇빛을 조금이라도 더 쪼일 요량으로 그쪽으로 가지를 뻗거나 줄기를 비트는 현상을 목격했을 것이다. 이것을 생물학 용어로 굴광성이라고 한다(Phototropism은 그리스어에서 유래하며, '빛'이라는 뜻을 지닌 photo와 '움직인다'는 뜻을 지닌 trepein의 합성어다). 식물이 굴광성을 보이는 이유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식물에게 있어서 빛을 확보하는 일만큼 시급한 과제는 없으므로 가급적 효과적인 방법으로 빛에 접근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숲 속이나 화분 안에서 두 식물이 가까이 서식하는 경우, 둘 사이에 치열한 햇빛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키 작은 나무는 키 큰 나무의 그늘에 묻힐 수 있으므로 식물들은 라이벌보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자라려고 몸부림을 친다. 이런 현장을 그늘탈출이라고 부르는데, 독자들은 '탈출'이라는 말이 왠지 식물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식물들 간의 햇빛 쟁탈전이 얼마나 치열하고 역동적인지 알게 된다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그늘탈출 현상은 육안으로도 충분히 관찰할 수 있어서,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식물의 전형적 행동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수천 년 동안 알려져 온 익숙한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적 중요성은 늘 무시되거나 과소평가되기 일쑤였다. 그렇다면 그늘탈출 현상의 본질은 무엇 일까? '지능'을 '위험'을 계산하고 이익을 평가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할 경우, 그늘탈출은 식물의 지능이 행위로 표출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식물이 지능을 가졌을 리 없다는 편견에 사로잡힌 나머지 지난 수 세기 동안 진실을 외면해왔다.
생각해보라. 그늘탈출이 일어나는 동안 식물은 라이벌보다 더 크게 자라 햇빛을 더 많이 받으려고 애쓸 것이다. 그러나 신속한 성장을 위해서는 많은 에너지를 소 모해야 하므로 경쟁에 지는 경우 맥이 빠져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이처럼 비용이 많이 들고 불확실한 목표를 위해 에너지와 물질을 투자하는 식물의 모습은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기업가를 연상시킨다.
말이 잠깐 곁가지로 흐른 것 같다. 다시 식물의 시각 문제로 돌아와 생각해보자. 식물은 빛을 어떻게 감지할까? 식물의 몸속에는 광수용체라고 불리는 일련의 화학분자들이 있어서, 광원의 방향과 빛의 품질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고 전달한다. 식물은 빛과 그늘을 구별할 뿐 아니라 파장을 측정하여 빛의 질을 평가한다. 이국적인 이름을 가진 광수용체들(피토크롬, 크립토크롬, 포토트로핀)이 특정 파장의 빛(적색광, 근적외선, 청색광, 자외선 등)을 흡수하는데, 이 파장들은 식물의 발아 •생장•개화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식물의 광수용체는 어디에 있을까? 인간의 광수용체인 눈은 단 두 개뿐이며, 이마 아래의 움푹 패인 공간(안와) 속에 들어 있다. 이곳은 진화적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위치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뇌에 근접하여 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고, 단단한 뼈에 둘러싸여 있어 외부의 공격에서 보호받을 수 있으며, 높은 곳에 위치해 양호한 전망과 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물의 경우에는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 2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식물은 고착생활을 하는 관계로 초식동물에게 일격을 당할 경우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 따라서 식물은 신체기능을 한 곳에 집중시키지 않고 여러 군데에 분산시키는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식물의 가장 큰 특징은 모든 기능들이 전신에 분포되어 있어서 어느 한 부분을 잃더라도 생명에 전혀 지장이 없다는 것이다. 광수용체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광수용체는 주로 (광합성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잎에 분포하지만 다른 곳에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심지어 어린 줄기, 덩굴손, 새싹, 목질부에도 광수용체가 무수히 존재한다. 그러므로 식물 전체가 온통 작은 눈으로 뒤덮여 있는 셈이다. 놀라운 것은 뿌리에도 광수용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단, 뿌리에 존재하는 광수용체는 잎에 존재하는 광수용체와는 달리 빛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 식물의 잎은 빛을 향해 자라고 앞면이 광원 쪽을 바라보는데, 이것을 양성굴광성이라고 한다. 반면에 뿌리는 잎과 정반대로 행동하며 이것을 음성굴광성이라고 한다.
여기서 식물에 대한 무지로 말미암아 왜곡된 실험결과를 도출하는 관행을 하나 지적하고자 한다. 우리 모두는 뿌리가 토양 속, 즉 칠흑처럼 어두운 곳에서 자라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식물학 연구실에서는 이러한 상식이 무시되고 있다. 특히 전통적인 식물학과 식물생리학을 점점 압도하고 있는 분자생물학에서는 애기 장대와 같은 실험실 식물을 토양이 아닌 젤 또는 기타 투명한 지지배지에서 배양한다. 젤과 배지에는 정상적인 생장에 필요한 영양소가 모두 함유되어 있다. 이것들은 투명한 데다 필요한 영양소를 임의로 선택할 수가 있어서 식물행동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러한 배양방식이 연구에 기여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방금 언급한 바와 같이 한 가지 사소한 문제가 있다. 실험실에서는 뿌리를 밝은 광선에 노출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식물에 스트레스를 주는 매우 부자연스러운 배양조건이다. 젤에서 배양되는 뿌리는 매우 금방 자라고 많이 움직이는데, 그 이유는 (자신을 괴롭히는) 광원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다. 그러나 연구진은 이것을 식물의 건강상태와 결부지어 식물이 활발하게 자라는 징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뿌리가 빨리 자라는 이유는 '식률이 건강해서'가 아니라 '빛을 피해 도망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일말의 상식이 있다면 식물의 뿌리는 어둠 속에서 자라도록 배려해야 하며, 잎처럼 밝은 빛에 노출시켜서는 안 된다.
한편, 어둠을 좋아하는 것은 뿌리뿐만이 아니다. 일 년 중에는 식물의 지상부도 어둠을 좋아하는 때가 있는데, 그때가 바로 가을이다. 가을에는 많은 나무들이 잎을 떨구는데, 이런 나무들을 낙엽수라고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광수용체가 잎에 집중되어 있다면 낙엽이 진 식물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건 간단하다. 동물이 눈을 감을 때와 똑같다고 보면 된다. 즉 식물도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낙엽수는 (겨울이 비교적 추운) 온대지역에 주로 서식하며, 열대나 아열대 지역에는 일 년 내내 기후가 온화하고 일조량이 풍부하므로 상록수가 많다. 온대기후나 대륙성기후 지역에서는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이 교대로 반복되는데, 겨울이 오면 일부 동물들이 추위와 식량부족이라는 이중고를 해결하기 위해 겨울잠을 잔다. 잠은 혹한기를 견뎌내는 데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므로 식물도 겨울잠을 월동전략으로 채택했다. 첫추위가 찾아오면 낙엽수는 잎을 떨어뜨리고 긴 겨울잠에 들어간다. 왜냐하면 잎은 매우 연약하여 겨울 내내 추위에 노출될 경우 동사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식물학에서는 이 같은 주기적 수면상태를 식물성 휴면이라고 부르는데, 동물학에서 말하는 동면과 100퍼센트 동일한 개념이다. 식물은 눈을 감고 대사활동을 늦춘 상태에서 겨울을 넘기고 봄이 되면 활동을 재개한다. 새싹이 트고 새로운 잎이 돋아나면서 식물은 감았던 눈을 다시 뜨게 된다.
마지막으로, 20세기 중반 새로운 이론을 내놓아 과학계를 당혹하게 했던 고틀리프 하벌란트(1854-1945)를 소개하면서 식물의 시각과 눈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려 한다. 오스트리아의 위대한 식물학자 고틀리프는 일찍이 다음과 같은 가설을 제시했다. "식물의 표피세포가 실제로 렌즈처럼 작동하여 식물에게 빛은 물론 사물의 형체까지 인식하게 해준다." 즉, 식물이 표피세포를 각막이나 수정체처럼 사용하여 외부환경의 이미지를 재구성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실험을 통해 이 가설을 입중하는데 실패했다.
매혹하는 식물의 뇌 중에서
스테파노 만쿠소•알레산드라 비올라 지음
양병찬 옮김
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
이렇게 꾸준한 정보제공하시는 카페지기는 어떤 사람일까? 외모, 이사, 활동 외 그녀의 마음 평수가 너른 바위같을 지라 그냥 존경합니다. 응원합니다.
맡은바 임무는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어른이 믿어주는 만큼 아이는 자란다라는 글이 생각납니다.
한국화훼장식기사협회 어른들이 저라는 아이를 키우신 겁니다
고맙습니다!
우리기사협회 복이지요 ~^^ 너무커서 분가할까 걱정입니다
두분이 든든이 집 지켜주시니 감동입니다 행복 합니다 간간이 댓글 달아주시는 이사님들 감사합니다 ~^^
기능사, 산업기사, 기사! 자격취득하신 모든 분들이 협회에 등록하는 그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