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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몽간의 관계 단절 수년 사이, 몽골의 세력을 크게 확장시켰던 칭기스칸(징기스칸, 成吉思汗, Chingiz Khan)이 사망(1227년)했고 후계자로 지명된 오고타이(太宗)가 2년 후인 1229년(고종16) 황위를 계승함으로써 몽골의 정복전쟁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몽골군의 최초 침입 기사는 고려사(高麗史) <세가> 1231년(고종18)의 8월 29일자(壬午)에 “몽골원수 사르타크(살례탑, 撒禮塔, Sartag)가 함신진(咸新鎭, 義州)을 포위하고 철주(鐵州)를 도륙(屠戮)했다”는 것인데 실제 이들의 내침 시기는 8월 중순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사르타크(살례탑)의 지휘로 고려에 침략한 몽골군은 수년 전 몽사 제구우(저고여, 著古與, Jegu'u)의 피살을 입경(入境)의 명분으로 삼고 있었지만 그것은 단순한 명분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들은 고려의 서북면 지역, 압록강 하구의 관문인 함신진을 통해 들어왔는데, 이후 몽골의 침략군들은 거의 압록강을 건너 서북 지방에 이르는 동일 경로로 고려에 침입하게 된다.
당시 몽골군은 선봉의 1개 부대가 최단 노선을 택해 급거(急遽) 남하하는 한편 사르타크(살례탑)의 주력
1개 부대는 서해안 연접의 노선을 따라, 다른 또 하나의 부대는 귀주와 자주를 거치는 내륙의 노선을 택해 서서히 남하하면서 군사지역인 북계(北界)의 여러 지역을 철저히 공략(攻略)하는 전략이었다. 이때 몽골군은 일부 부대를 북계(北界)에 계속적으로 잔류시켜 변경의 제성(諸城) 공략(攻略)에 투입하는 한편으로 다른 병력을 빠른 속도로 남진시켜 서울로 직충(直衝)케 하는 작전을 전개했다.
몽골군의 전면적 침략에 고려 정부가 3군의 진발(進發)을 결정한 것은 1231년 9월 2일, 이들 3군이 개경을 출발한 것은 9월 9일의 일이었다. 중앙에서 파견된 방어군이 몽골군과 처음으로 접전한 것은 9월 하순 황주(黃州)의 동선역(洞仙驛)에서였다. 이 첫 싸움에서 3군은 몽골군 8천 병력의 기습을 받아 고전을 겪었다.
고려의 3군은 안북성에서 사르타크(살례탑)의 몽골군을 맞아 작전실패로 궤멸되었는데, 이것이 고려 중앙군의 마지막 전투가 되고 말았다.
사르타크(살례탑)는 안북도호부(安北都護府) 점령 후, 이를 거점으로 군사작전을 계속하게 된다. 이들은 구략(驅掠)을 서슴지 않았다. 더불어 그 피해와 참상은 매우 비극적인 것이었다. 곧이어 몽병은 개경성 밖에 나뉘어 주둔하는 한편 교외의 흥왕사(興王寺)를 침공하는 등 노략을 계속했다. 1231년(고종18) 12월의 군신맹고문(君臣盟告文)에는 당시 경기지역 일대에서의 몽골군의 유린(蹂躪)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저 달단(達旦)의 완악(頑惡)한 무리들이 이유 없이 국경을 침범, 변경지역을 잔패(殘敗)케 하고
백성들을 살육하더니 점점 경기지역까지 침범해 들어와 사방을 유린(蹂躪)하되 마치 범이 고기를 고르듯 하여 겁박(劫迫)을 당해 죽은 자가 길에 낭자(狼藉)합니다.”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25>
개경에 내도했던 몽골군의 일부는 계속 남하해 충주에까지 내려갔는데 “지나는 곳마다 잔멸(殘滅)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한 것처럼 혹심한 구략(驅掠)을 일삼았다.
고려는, 몽골군에게 개경이 함락될 위험에 처하자 몽골에 화친(和親)을 제의했다. 여몽간의 화의 성립으로, 1232년(고종19) 1월 11일 개경의 몽골군은 일단 회군했다. 같은 달 22일 개경은 계엄이 해제되었고, 2월 1일에는 사르타크(살례탑)에게 항복했던 고려 3군이 개경에 귀환했다. 그러나 몽골군의 1차 침략으로 인해 북계의 여러 성이 공파(攻破)됐다. 그리고 몽골의 다루가치(達魯花赤)가 주둔함으로써 고려의 군사적 울타리는 파괴되어 버린 결과가 되었다.
여몽간의 화의 타결로 국면은 수습 단계를 맞이했다. 그러나 곧 고려정부 내에서는 천도(遷都) 문제가 공식적으로 거론되었다. 1232년(고종19) 2월 20일 전목사(典牧司)의 재추회의에서 이 문제가 처음으로 논의된 이래 회의를 거쳐 같은 해 6월 16일 전격적으로 강화 천도(遷都)가 결정되었으며 17일부터 천도(遷都)작업이 추진되었다.
사르타크(살례탑, 撒禮塔, Sartag)가 고려 재침의 명을 받은 것은 그해 8월의 일이다. 몽골군은 1332년 12월까지 대략 4개월 동안 고려에 체재(滯在)해 정복전쟁에 종사하게 되는데 이 기간동안에 있었던 몽골군의 구체적인 동태와 그 군사행동에 대해서는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몽골군의 일부는 고려의 내륙 깊숙이 내려와 구략(寇掠)을 서슴지 않았다. 이 사실은 “현종(顯宗) 때의 판본(板本)이 임진 몽병(壬辰蒙兵)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高麗史 24,<고종세가> <고종세가> 38년 9월 壬午).”고 한 기록에 의해 확인된다. 현종조(顯宗朝) 거란과의 전쟁기에 제작된 소위 부인사(符仁寺) 소장 대장경판이 고종19년(壬辰)에 몽골군에 의해 소실되었다는 것이다.
경상도 일대에서 횡행(橫行)하던 선발대에 뒤이어 적장 사르타크(살례탑)가 주력부대를 이끌고 남하한 시기는 1232년(고종19) 10월경의 일이었던 것 같다. 남진 도상(途上)의 사르타크(살례탑)군이 11월 광주(廣州)에서 고려군과 접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개경을 거쳐 한양산성(漢陽山城)을 공취(攻取)한 후 광주성(廣州城)을 포위, 공격했다가 부사(副使) 이세화(李世華)가 지휘하는 광주민(廣州民)의 저항에 부딪혀 실패한다. 그리고 이어 처인성(處仁城, 용인시 남사면)에 이르러 김윤후(金允侯)와 처인 부곡민들에 의해
사르타크(살례탑)가 사살되고 만다. 이것이 같은 해 12월 16일의 일이다.
처인성에서의 참담한 패배로 결정적 타격을 받은 몽골군은 부장(副將) 테게(철가, 鐵哥, Tege)의 지휘로 같은 해 말에 철군하게 된다.
1234년(고종21) 금을 완전히 공략(攻略)한 몽골은 같은 해 가을, 향후의 정벌계획을 새로 수립하고 이듬해 사전 계획에 의한 정복 작전을 다시 시작한다. 1235년(고종22) 탕고(당고, 唐古, Tanggu)에 의한 제3차 침입이 그것이다. 몽골 사령관 탕고는 1차 침략 당시 사르타크(살례탑, 撒禮塔, Sartag)의 휘하로 고려 침략전쟁에 참여해 개경을 포위했었던 3원수 중 한 사람이다.
몽골 3차 침략의 제1년은 안북부(安北府)를 비롯한 북계(北界)의 여러 성에 대한 공격으로부터 시작됐다. 8월에 용강(龍岡), 함종(咸從), 삼등(三登) 등의 여러 성이 함락되었다. 고려사의 기록을 참조할 때 대동강 이남 서해도에 대한 공략(攻略)은 대체로 9~10월에 걸쳐 진행된 것이었다. 그런데 서해도에서 몽병의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몽골군의 1대는 경상도에까지 출현하고 있다.
몽골 3차 침략 제2년인 1236년(고종23) 6월에 이르러 몽병은 다시 고려에 대거 내침했다. 이들의 작전상황을 볼 때 몽골은 전년의 경우보다 훨씬 증원된 대규모였음이 확실하다. 몽골군은 6월 한 달 사이 북계(北界) 여러 지역을 점거하면서 서해도 지역까지 내침해 왔다. 7~8월 몽골군은 저항하는 북계(北界)의 여러 성을 공략(攻略)하는 한편 동계 지역에 동진군을 동원해 공격하고 있으며 8월 말에는 경기, 충남지방까지 진출하고 있다. 9월에는 충남, 경기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다음 10월 몽병은 전라도에까지 이른다.
“몽고병(蒙古兵)이 동경(東京)에 이르러 황룡사탑을 불태웠다.” 고려사 1238년(고종25) 윤4월의 기록이다. 이는 당시 몽골군이 경상도의 내륙 깊숙한 경주지방에까지 이르렀던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황룡사탑의 소실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몽고(蒙古)의 병화(兵火)로 탑과 장육존상(丈六尊像)과 전우(殿宇)가 모두 불탔다”고 한 것처럼 거찰(巨刹) 황룡사 전체의 소실을 의미하는 것이며 동시에 경주지역에 대한 혹심한 유린(蹂躪)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계속된 몽골의 침략전쟁으로 고려의 전토는 황폐되고, 민생은 극심하게 곤란해졌다. 속수무책이던 강도(江都)정부는 마침내 1238년(고종25) 12월, 사신을 몽골에 파견해 침략군의 철수를 요청한다. 당시 몽골에 보낸 표장(表狀) 가운데서는 몽골의 장기 침략으로 인한 고려의 사정을 “백성은 땅에 정착함이 없고 농사는 때에 거두지 못하니 이 풀만 무성한 땅, 돌아본들 무슨 소출(所出)이 있겠습니까”라고 묘사하고 있다.
1239년(고종26) 4월, 몽골 사신단의 고려 내도와 때를 같이하여 3차 침략의 몽골군은 고려로부터 철수하기에 이른다.
1235년(고종22)부터 1239년(고종26)까지 5년에 걸친 몽골의 제3차 침략은 수년 전 고려로부터 당한 패전을 보복하며 아울러 고려를 완전 제압할 목적으로 대대적인 군사적 공세를 가한 것이었다. 이 기간 동안 몽골의 구략(寇掠)은 경상도 뿐 아니라 전라도에까지 미치는 가혹한 것이었지만 몽골은 원래 의도했던 결과를 전혀 얻지 못한 채 고려의 요청을 계기로 철수한 것이다.
1247년(고종34), 몽골의 4차 침략이 전개되었다.
고려사(高麗史) <세가>에 “7월에 몽골원수 아모간(阿母侃, Amugan)이 군대를 이끌고 염주(鹽州)에 내둔(來屯)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고, <원고려기사>는 “아모간과 홍복원(洪福源)으로
하여금 고려를 정토(征討)케 하여 위주(威州)와 평로성(平虜城)을 공발(攻拔)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모간의 몽골군은 종래와 같이 부몽분자(附蒙分子) 홍복원을 대동, 먼저 청천강 상류의 위주(威州), 평로성(平虜城) 등 북계(北界) 여러 성을 공략(攻略)하고 남진하여 7월에는 개경 및 강화 연안인 염주(鹽州)에 까지 육박(肉薄·肉迫), 주둔함으로써 강도(江都)정부를 위협한 것이다. 동시에 위주, 평로성을 거쳐 남진한 것은 서경을 피하려고 내륙의 길을 선택해 수안현(遂安縣)을 거쳐 내려온 것이다. 몽골 4차 침략군의 진로는 종래
서경을 경유하는 서북대로(西北大路)에 주력을 투입, 남하케 하였던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그 주요한 이유는 대몽 전쟁의 소강(小康)기를 이용, 고려가 이들 지역에 대한 방어를 강화했기 때문인 듯하다.
1247년(고종34) 고려에 내침한 아모간의 몽골군은 7월 이후 당분간 염주(鹽州)에 주둔하여 근경(近境)일대를 구략하면서 강도(江都)정부를 위협했다.
1247년(고종34) 7월, 경기지역 일대를 구략하던 몽골군이 그 하반기에 어떤 방향으로 군사행동을 전개했는지에 대해서는 무신정권 시대의 천태승(天台僧) 정명국사(靜明國師) 천인(天因)의 행적 등에서 약간의 암시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에 의하면 당시 4차 침략의 몽골군은 경기지역에 한정하지 않고 전라도 방면으로 남하했던 것 같다. 요컨대 1247년 경기 일대를 구략하던
아모간의 몽골군은 대략 8월 이후 충청도를 거쳐 전라도와 경상도 방면으로 남하, 여러 성을 공격하면서 남부지역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이듬해인 1248년(고종35) 초에 고려의 사신 파견 및 황제 정종의 죽음을 계기로 비로소 고려에서 철수하였다.
1251년(고종38) 7월에 개최된 코릴타(Khurilta)에서는 바토(바투,Batu)의 지지를 받은 톨로이(톨루이, Tolui)의 아들 멍케(몽가, 蒙哥, Mongke)가 황제에 선임된다. 몽골의 헌종 멍케는 즉위 즉시 고려에 사신을 파견, 고종의 친조(親朝)와 개경에의 환도(還都)를 촉구했다.
예구(야굴, 也窟, Yegu)에 의한 몽골의 제5차 고려 침입이 개시된 것은 1253년(고종40) 7월의 일이다. 예구가 4차 침략을 지휘했던 아모간(阿母侃, Amugan)과 홍복원을 5차 침략에 대동한 걸 보면, 5차 침략군의 주력은 4차 침략을 담당했던 아모간과
홍복원 휘하 병력이었던 것 같다. 이들 몽골군의 1대는 7월 15일 대동강 하마탄(下馬灘)을 건너 동북변경(東北邊境)의 고화주(古和州, 영흥)지역으로 향했다. 강도(江都)정부는 몽골군의 내침에 대비해 갑곶강(甲串江)에서 수전(水戰)을 연습함으로써 강도 방어를 강화했다.
5차 침략의 몽골군은 1253년 7월부터 고려 침공을 시작해 이듬해 1월 일단 철수했다. 당시 몽골군의 내침 경로는 압록강을 건너 서해도로 남하한 종래의 경우와 함께, 동계(東界)로부터 진입하는 양면 침략이었다.
몽골군은 남하하는 과정에서 먼저 선발 척후(斥候)부대를 빠른 속도로 내려 보냈다. 8월 7일자 금교(金郊), 흥안(興安) 지경에서 우봉별초(牛峯別抄)에게 요격(邀擊)당한 몽골군과 8월 14일자 광주(廣州)에 출현한 척후(斥候)기 3백, 8월 말 전주(全州) 반석역(班石驛)에서 고려의 별초군에게 격살당한 척후(斥候)기 3백, 그리고 9월 9일 충주(忠州) 금당협(金堂峽)에서 격파당한 몽골군 등은 모두 이 선발 부대의 동태를 말해주는 것이다.
예구의 몽골군은 서경 및 토산(土山, 평남상원)을 거쳐 남하하던 중, 8월 12일 방호별감 권세후(權世侯)가 입보(入保)민을 지휘하던 서해도 양산성(椋山城)을 함락해 철저하게 유린(蹂躪)했다. 이들은 개경 방면으로 남하하는 길을 취하지 않고 서해도에서 내륙의 길로 들어서, 중부 내륙의 요충, 동주(東州, 철원) 지역에 이르렀다. 9월 몽골군은 다시 춘주(春州, 춘천)에 이르러 고려의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9월 20일 성을 함락했다. 당시 춘주성은 안찰사 박천기(朴天器)의 지휘로 1차 침략 때의 철주성 전투를 방불케 하는 비장한 싸움을 전개했다.
철원, 춘천, 양근성(楊根城), 천용성(天龍城)을 함락시키고 남하한 예구의 몽골군이 충주에 당도한 것은 10월 10일 경의 일이었다. 몽골군은 이후 영남지역에로의 남하를 위한 전초 단계로 충주산성을 포위, 집중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방호별감 김윤후에 의해 지휘된 충주민이 70여 일간 성을 사수함으로써 몽골군의 남진을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차라다이(차라대, 車羅大, Charadai)로 지휘권을 바꾼 몽골군은 재침을 단행해, 1254년(고종41)부터 6년간 전쟁이 지속된다. 몽골의 차라다이는 휘하의 예수투(여속독, 余速禿, Yesutu), 보라다이(보파대, 甫波大, Buradai) 등의 여러 장군과 함께 영녕공(永寧公) 준(綧), 홍복원 등을 대동하고 1254년 7월 고려에 침입했다.
이들 몽골군은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압록강을 건넜다. 몽골은 예의 방식대로 본군에 앞서 척후(斥候)를 멀리 내려 보냈으며 이들 척후(斥候)기는 7월 24일에 서해도, 8월 6일에 광주(廣州) 그리고 8월 20일에는 충북괴산에 이르고 있다. 차라다이의 본군은 대체로 이들 척후(斥候)기가 앞서간 노선을 따라 남하해 8월 22일경에 개경 부근 장단(長湍) 남쪽의 보현원(普賢院)에 당도했다. 이들 몽골군 주력이 충주에 이른
것은 9월 중순이었다. 개경에서 양평군, 여주군, 이천군, 안성군의 경기지역을 돌아 음성군을 거쳐 충주에 이른 것이다.
차라다이는 9월 중순 본군을 이끌고 요충 충주산성을 공격했지만 고려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공략(攻略)을 포기한 채 경상도 지경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10월 19일 상주산성(尙州山城)에서 황령사(黃嶺寺) 승(僧) 홍지(洪之)의 공격에 대패(大敗)하고 만다. 그러나 몽골군은 다시 대구지방을 거쳐 남진을 계속, 12월 초 단계현(丹溪懸. 경남 산청군)과 진주(晋州)에까지 내려갔다. 몽골군이 경상도 내륙의 길을 따라 남진, 경상도 남단 지역까지 이른 것은 이것이 최초의 일이었을 것이다.
고려는 차라다이의 침략에 대항해 충주, 상주 등 각처에서 용전(勇戰)했지만 전쟁의 피해는 대단히 심각했다. 몽골군이 경상도에 진입한 1254년(고종41) 10월, 재신(宰臣)들이 대묘(大廟)에 기고한 글에 의하면 “백성은 세(勢)가 궁하여 사자(死者)는 해골을 묻지 못하며 생자(生者)는 노예가 되어 부자(父子)가 서로 의지하지 못하고 처자(妻子)가 서로 보존하지 못한다”고 하고 있고, 같은 해 말 <세가>의 기록은 “고종41년 한 해 동안 몽병에게 포로된 자가 20만6,800여에 살육된 자는 셀 수가 없고 몽병이 지나는 곳마다
잿더미가 되는 최대의 전화(戰禍)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특히 경상도 남단에 깊숙이 침입한 몽골군은 고려의 피해를 가중시켰고 격화되는 전쟁의 참화는 이후 강도(江都)정부 내부로부터 대몽 화의론(和議論)을 불러일으키는 강한 압력으로 작용하게도 되었던 것 같다.
1256년(고종43) 10월에 북으로 철수했던 차라다이의 몽골군이 고려에 재침을 단행한 것은 이듬해인 1257년(고종44) 5월의 일이다. 북계(北界)지역에서 몽골군이 움직인 것은 1257년(고종44) 5월의 일인데 11일자에 “몽병 30여 기가 청천강을 건너 용강(龍岡), 함종(咸從)으로 향했다”는 보고가 그 첫 기록이다. 이에 뒤이어 동진병 3천여 기의 동북변경 내침이 개시되고, 20일 고려정부는 대몽전쟁에 대비, 전국의 여러 성에 방호별감을 파견했으며 몽병의 남진에 따라 29일 강도(江都)에 계엄을 선포했다.
당시 몽골군은 몇
대로 나누어 남진했는데 선발부대는 보라다이의 지휘로 6월 초 개경을 거쳐 10일에는 남경(南京), 12일에는 직산(稷山)에 이르는 빠른 속도로 남진했다.
이들의 경로는 전년의 경우처럼 전라도 지역을 향한 것이었다고 생각되지만 구체적인 침략 경로는 불분명하다. 다만 남하한 보라다이의 군을 북상토록 소환한 것이 7월 말의 일이었고 9월 초에 다시 이를 독촉한 것으로 보아 보라다이의 선발군은 대략 3개월 동안 남도 지역에서 군사행동을 자행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은 호서지역을 거쳐 전라도 지역에 이르렀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1257년(고종44) 몽골 침략은 비교적 제한된 병력만이 남부지역에 투입되었고 몽골군의 군사행동은 강도(江都)를 중심으로 한 경기,
서해도 지역에 집중되었는데 이는 강도 정부의 굴복을 촉구하는 새로운 무력적 위협이었다고 할 수 있다.
1258년(고종45) 3월, 몽골 침략의 막간에 고려정부 내부에는 권력이 변동되는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최씨 정권의 오랜 후광을 입고 집권했던 최의가 3월 26일 대사성 유경(柳璥), 별장(別將) 김인준(金仁俊) 등에 의해 제거되는 소위 무오정변(戊午政變)이 일어난 것이다. 이 정변은 왕정복고의 대의명분이 표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인준이 점차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새로운 무인정권이 출현한 셈이 되었지만, 정변 초기의 상황은 무인집정자의 권력이 이전에 비해 상당히 퇴조될 수밖에 없었다.
몽골군의 침략은 1258년(고종45) 6월에 재개된다. 6월 22일자 몽병의 척후(斥候)기가 서경을 통과한다는 서북면병마사의 보고에 따라 강도에는 계엄이 내려졌다. 후방에 있던 차라다이(차라대, 車羅大, Charadai)도 8월 13일 개경에 당도해
가세했다. 차라다이는 개경에 주둔하면서 군사를 강화연안의 여러 지역에 보내 약탈로써 강도를 위협하는 한편, 태자의 출륙을 철군 조건으로 다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는 태자의 신병을 핑계로 이를 거부했다.
11월부터는 산지대왕(산길대왕, 散吉大王, Sanji)
등이 거느리는 몽골군이 동진군을 동원, 동북변경을 위협해 명주(溟州, 강릉) 지경까지 남침해 왔고 많은 사람들이 몽골군에게 사로잡히게까지 되었다.
1259년(고종46) 초부터 태자 입조(入朝)를 조건으로 하는 몽골군의 철군이 다시 논의되기 시작한다.
고려정부는 1258년(고종45) 12월 29일, 장군 박희실(朴希實), 조문주(趙文柱), 산원(散員) 박천식(朴天植) 등을 몽골에 파견했는데 이들은 도중에 차라다이의 둔소(屯所)에도 들려 고려 태자의 입조(入朝)를 약속했던 것 같다. 이러한 화의의 진전에 따라 몽골의 군사행동은 진정되어 3월 중에는 주현의 수령들로 하여금 피난민을 데리고 출륙해 농사를 짓도록 했다.
1259년(고종46) 4월 21일, 고려의 태자 전(倎)은 드디어
몽골을 향해 출발한다.
고려의 무인 집정자 최우(崔瑀)가 몽골에 대한 항전을 결의하고 강화로 도읍을 옮긴 것은 1232년(고종19) 7월의 일이다. 천도(遷都) 문제가 고려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몽골군 철수 직후인 1232년 2월의 일이었고, 천도(遷都) 방침이 확정된 것이 6월 16일, 국왕이 강화에 들어간 것이 7월 7일의 일이었다. 논의에서 확정 그리고 시행에 이르기까지는 불과 반년의 기간도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천도(遷都) 문제는 1232년(고종19) 2월 20일 재추회의에서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논의되었고 그것은 5월까지 계속된다.
처음 전목사(典牧司)에서 논의되었던 것이 5월에는 선경전(宣慶殿)에서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계속된 논의에도 불구하고 결론이 내려지지 못한 채 회의가 계속된 것 같다.
“최우가 재추(宰樞)들을 그 집에 모아 천도를 의논하였다. (중략) 야별초지유(夜別抄指諭) 김세충(金世沖)이 문을 밀치고 들어와 힐문하기를 ‘송경(松京)은 태조 이래로 역대를 지켜 내려와 무릇 2백년이 되었다. 성(城)이 견고하며 군사와 양식이 족하니 진실로 마땅히 힘을 합하여 지키어서 호위할 수 있는데 이를 버리고 가면 장차 도읍할 곳이 어디냐’ 하였다.” (<고려사절요>
16 고종19년 6월)
천도(遷都)반대론의 강력한 대두(擡頭)는 최씨정권을 난감케 했지만, 천도(遷都)론자들은 극적인 방법으로 반대론을 위압해 버렸다. 천도론자들이 야별초지유(夜別抄指諭) 김세충의 처단을 주장하고, 동석한 상장군 김현보(金鉉甫)가 이에 동조하자 최우는 김세충을 참형시킴으로써 중론을 압도해 천도(遷都)책을 결의시켰던 것이다.
몽골의 1차 침략을 계기로 무인정권이 천도(遷都)를 결단하게 되는 배경으로는 다음과 같은 점을 들 수 있다.
첫째, 1219년(고종6) 강동성(江東城) 전투로 인한 여몽관계 성립 이후 고려에 보여준 몽골의 고압적 태도와 무례한 행동이 고려의 반몽의식을 자극시킨 점을 들 수 있다. 몽골의 방자한 태도는 애초 고려가 몽골에 대해 가지고 있던 “오랑캐 중에서도 가장 흉악한 존재”라는 극악한 선입관을 확신시켰고, 그로 말미암은 자존심의 손상은 고려의 반몽의식을 강화시켰던 것이다.
둘째, 몽골의 경제적 요구가 지나치게
과중했다는 점이다. 1219년 여몽관계가 성립된 이후 제구우 살해사건이 있었던 1225년(고종12)까지 공물징구(徵求)를 위한 사신이 매년 수차씩 파견되었고 1차 침략 이후에도 막대한 경제적 징구(徵求)가 일방적으로 요구되었던 것이다.
셋째, 몽골의 고려에 대한 요구가 단순한 공물의 징구(徵求)에서 끝나지 않고 군사의 조달 등 인적 자원에까지 미침으로써 고려를 압박했다는 점이다. 1232년(고종19) 3월 몽골의 요청에 따라 배 30척과 목수(木手) 3천 명을 파견한 일이 있으며, 이와 함께 몽골은 포선만노(蒲鮮滿奴) 정벌을 위한 고려의 파병을
강요해 왔던 것이다.
집정자 최우가 천도(遷都)를 결단케 되는 배경의 네 번째 상황은 1차 전쟁 이후 몽골이 고려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시켰던 점 때문이라고 생각되는데 그 구체적인 것이 다루가치(達魯花赤)의 설치였다.
고려와의 강화가 성립된 직후 몽골은 고려의 군사적 요지인 북계(北界)의 여러 성에 72인의 다루가치를 설치해 그 지역을 장악했다. 이로 인해 고려는 변경의 방어 거점을 상실해 버렸을 뿐 아니라 다루가치는 개경에 까지 파견되어 고려 정부를 곤혹케 했던 것이다.
1차 전쟁 이후 전개된 이상의 상황들은 몽골과의 화의론이 제기되기 어려운 객관적 여건이 되었고, 또한 몽골의 간섭으로 인한 정치력 약화의 위기감이 최우로 하여금 천도(遷都)를 통한 대몽항전을 결의케 하는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더해 한 가지
더 덧붙인다면, 몽골의 침략을 받아 수도함락의 위기 가운데서 천도(遷都)를 단행했던 금나라의 선례가 최우로 하여금 더욱 확신 있게 천도(遷都)를 추진케 했으리라는 점이다. 금나라의 경우 1214년 칭기스칸의 침공으로 수도가 포위되자 화의를 체결하고 곧 수도를 북경부근의 중도(中都)로부터 황하(黃河) 남안(南岸)의 변경(汴京, 개봉)으로 옮겨 항전을 계속했던 것이다.
천도(遷都)지라면 여러 조건 면에서 강화도만한 곳을 달리 찾을 수 없었을 것 같다. 강화도의 지리적 조건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여러 가지로 지적되어 왔지만 이를 종합하면, 첫째 수전(水戰)에 취약한 몽골군의 약점을 이용할 수 있는 섬지역이라는 점, 둘째 육지에 가까우면서도 조석간만 차와 조류 등으로 방어 효과가 크다는 점, 셋째 개경과의 근접성, 넷째 지방과의 연결 및 조운(漕運) 등의 편의성으로 요약된다.
그렇게 고려의 국도(國都)는 개경에서 강화로 옮겨졌고, 강화는 그 후 39년 동안 고려의 전시 수도로서 그
기능을 맡게 되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삼별초), 2005, 한국콘텐츠진흥원)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81780&cid=49333&categoryId=49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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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런데 사진이 안 보임 네이버 에서 발취한 모양 인데 네이버 신용 안 함 오늘날의 빨치산의 원조격인 삼별초 의 항쟁 그들은 강화도에서 진주로 그리고 제주도로 그리고 오키나와 까지 도망가면서 항쟁 함 삼별초의 항쟁이 끈질긴것은 당시에 몽고에 항복 하지 않는다는 백성들의 항쟁의식이 강 하다고 봄 노비 출신들이 주축이 되어서 항쟁 한것도 기록에 보임 난 그래서 이해 불가 노비들에게 몽고나 고려왕정이나 똑 같이 지배 당 하는 입장
몽골군도 어렵게 전쟁하네오
대가리만 쳐내면 간단한걸.....
솔길님 강화도 한번 가보세요 ..
39년동안 손바닥 만한 섬에서 항쟁이 가능한지 .직접 눈으로 확인 해보세요..부교만 설치하면 끝날덴데 뭐하러 전국방방곡곡 쑤시고 다니는지 ..
당시 강화도는 오늘 날 한반도라 사료됩니다.
솔길님.
말타보셨어요?
국내에 있는 말들을 조금 타보았는데 질주하여 1시간도 못되어 허파가 배밖으로 튀어나옵니다. 게거품은 기본이구요.
혹 속보나 경보는 연속하여 몇 시간 갈지 몰라도...
질주의 속도는 대략 6~70, 속보는 3~40 도 안 나옵니다. 물론 직접 스피드건으로 잰 건 아닙니다.
몽골기병대가 돌격앞으로 할때 최고속도는 아무리빨라도 150을 넘지 못한다고 합니다.
기병대가 하루에 200~300km를 가려면 하루 열시간 잡고 40km 이상으로 달려야 합니다.
그러면 말은 견디지 못합니다.
더구나 몽골에서 우리나라까지는 직선거리로 대략 2,000km
얼마나 걸릴까요?
39년을 초토화시켰는데 강화도의 조정은 왜 버텼나요?
@솔길 말이 이쁘지가 않군요. 간보기라니...
님이 전문가처럼 말하니까 물어보는 것 아닙니까?
오십넘어 갈 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 하나라도 더 배울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