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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하라, 온유하라, 두려워 말라
간디 34 주기 추모 강연 - 信天함석헌
간디 추모는 우리 ‘정신’ 살리려고
간디 추모는 어떤 의미에서 하자는 건가 하면, 우리의 ‘정신’을 살려가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는 지금 길이 막혔습니다. 정치, 경제적인 면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길이 막혔습니다. 완전히 폐쇄되어서 거의 질식이라 그래도 좋을 만큼입니다. 이 강당이 오늘 이렇게 텅 비인 것은 참 뜻밖입니다. 물론 심한 통제 밑에 있으니까 모임이 어려울 줄은 알았습니다. 그래도, 당국에다 통지를 정식 서면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집을 드나드는 기관 사람들을 통해 내가 집회하니까, 그런 줄 알라고 그러고 한 모임입니다. 그리고 서울 안에 있는 신문사에는 다 통지를 보냈습니다. 통지를 보내면 그래도 집회 난에라도 소개를 해줬으면 그러는 생각에 그랬는데, 하나도 소개 안 해줬습니다.
또 전국에 우편으로 팔백장, 시내만도 오백장이 넘도록 안내서를 띄웠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좀 염려스러워서 더러 알아봤더니, 못 받았다고 그러다가, 겨우 그제, 어제, 심지어는 오늘 와서 받았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될수록 남을 의심하지 않을려는 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도 당국의 처사가 비겁합니다. 지금은 속도시대라고 하는데, 배달이 한 주일이나 걸린다는 것은 참 안 된 일입니다. 막힌 사회입니다. 어쩌면 이럴까?
생명이란 ‘운동’입니다. 지금 우리 몸속에서 피가 자꾸 돌아가는 모양으로, 사회에서도 자꾸 돌아가야 하는 건데, 호흡이 끊기지 않고 들어가고 나오고 그래야 살 수 있는 건데 한 사람만도 아니고 나라 전체 일이 어딘가 막혀서 잘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건 큰일입니다. 내가 지금 여러분하고 생각해보자는 건 이렇게 막힌 이걸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겁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압박 밑에 있다가 해방을 당했는데, 해방 이후에 새로 사는 역사의 움직임이 활발하게 있을 줄 우리가 스스로 기대를 했었는데, 그렇게 못됐습니다.
그럼 이런 막힘의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첫째가 우리에게 큰 정신적인 위대한 지도자가 없었던 것이 우리에게 크게 불행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신적인 큰 지도자가 없었던 것은 우연하게 된 일은 아닙니다. 과거 역사의 결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위대한 정신의 지도자는 결코 누가 일시적으로 열심을 낸다고 해서 되는 일은 아닙니다. 그것은 긴 세월을 두고 길러야만 되는 것입니다. 다른 건 다 그만두고, 조선조 오백년 동안 사람을, 사람 가운데서도 비교적 천품을 타고 나기도 타고 났고, 또 자기가 노력을 해서도 보통사람들보다는 무슨 학문으로나, 생각하는 것으로나, 행동하는 걸로나 좀 뛰어났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 뛰어났다는 까닭으로 해서 죽지 않았어요? 이름이야 뭘로 그랬던간에 많이 죽였습니다. 마치 숲이 있는데, 그중에서 좀 굵 어질만한 은 모조리 찍어낸다면, 거기 어디 숲이 되겠습니까? 큰 재목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런 일을 수백 년 동안 계속했으니, 당연한 결과로 큰 재목은 없을 꺼.
내 중간에 딴 말 하나 하렵니다만, 나의 가장 노력하는 일은 개인 누구도 모욕하거나 깔보지 않습니다. 미워하지도 않으렵니다. 될수록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어느 때 혹 미처 생각을 못하고 불의에 나갔을런지는 몰라도, 적어도 의식적으로는 안 하렵니다.
생명은 절대 존중되어야
내 맘에 맞지 않는다고 누구를 욕한다거나, 죽여 버려선 안 된다고 예수님께선 가르치셨습니다. 나는 생명은 절대 존중되어야 한다는 그 가르침을 지켜보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생명은 절대로 존중되어야만 합니다. 이건 우리 민족의 사는 근본에 관계된 문제입니다.
사회문제에 대해서 싸우는데 있어서도 나는 ‘우리 편이 옳은 편이다’ 하는 확신은 있지만, 반대편의 저들을 사람까지 밉게 보든지, 죽일 놈이라 한다든지, 모욕을 하던지 하지는 않으려는 사람입니다. 그 개인에 대해서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개인들로 해서 생겨나는 조직과 그들이 하는 일, 그 정책에 관해서는 그것이 잘못됐으면 그건 미워해야 하는 겁니다. 그것과는 한사코 싸워야 하는 겁니다. 그것과 될수록은 힘있게 싸우기 위해서, 그걸 대표하는 그 사람을 나와 똑같은 사람으로 대접을 하면서, 적어도 정말 진심으로 미워는 아니 하면서,잘못은 내가 될수록은 기탄없이 지적을 해줘야 그것도 사람이 될테니까, 그러자고 하면서, 악에 대해서는 싸워보자고 그러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정치하는 사람, 그 개인은 내가 미워하지도, 욕하지도, 깔보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 하는 일은, 죄악은 없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잘못된 이 일은 물론 전체의 일이라면 전체의 일이지요. 그렇지만 우리가 역사를 애기할 때는 그 책임이 어디에 있느냐는 밝히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럴 때 큰 위대한 혼이 있으면, 우리를 잘 인도해서 바른 길을 가르켜줄 테니까 일이 쉽겠지만, 일이 지금 그렇게는 못됐습니다. 전에 살았던 우리 할아버지들이 잘못했었던 결과로.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됐으면, 그럼 비록 못난 우리끼리의 재질이라도 다 모아서, 완전치는 못해도, 큰 혼을 대신해서 ‘어디, 있는 지혜를 우리 다 해보자’ 하는 이런 화합된 운동이 있어야겠는데, 또 그것이 있을려면 있을 수도 있었는데, 그런데 그것을 못했습니다.
왜 못했나? 그건 그 화합을 해치는 도둑놈들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해친다는 거는 뭔고 하니 이 역사적인 전체가 살아나가려고 몸부림치는 운명은 생각은 않고 자기의 사사로운 권력을 쥐고 싶다든지, 부를 독점하고 싶다든지, 남을 지배하고 싶다든지, 내가 잘났노라 하고 싶다든지 하는 생각만 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나라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해방 이후 수십 년 동안에 그런 더러운 것 없이,아주 깨끗한 양심적인 정치인이라곤 내가 보기엔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게 아주 슬픈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폐단이 왜 일어나느냐하면 정치만능주의 때문입니다. 옛날에도, 또 다른나라에도 그런 경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것이 특별히 심합니다. 정권만 쥐면 못할 것이 없는 듯이 압니다. 이것이 큰 잘못입니다.
이런 것이 뭣 때문에 이렇게 됐느냐 그러면 타락한 정치 밑에 너무 오래 시달려 왔기 때문입니다. ‘정치한다는 사람 별 것 아니라, 나와 똑같은 욕심장이다. 나도 잘 살려면 한 번 정권을 잡아야 한다’ 그러고 보니, 대통령감이 없어서 걱정이 아니라, 너무 많아서 걱정입니다. 이러해서 화합이 못됩니다.
저마다 제가 재목이라고 나서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것이 새로운 역사의 나가려고 하는 것에 방해를 놔서 씨알이 아무 사심 없는 민중들의 의사를 다 이렇게 화합해 모아서 새역사를 마련해 보려는 그런 운동을 하는데 그들이 다 방해꾼 노릇을 했습니다. 그게 크게 불행한 일이라 그 말입니다.
이젠 간디의 혼을 함께 씹어볼 때
그래, 내가 이번에 간디를 추모해보자 그랬던 건 이런 폐단을 고쳐나가는데 도움이 될까 해서 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간디를 많이 존경하는 거고, 내가 오늘날까지 오는데 간디가 없었다면 오늘날 이만큼도 못됐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너 간디를 좋아한다면서 어째 그 모양이냐 하고 말할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건 또 그렇게만 말할 것이 아닙니다. 이미 타고나는 것이 다른 겁니다. 물론 내가 내 노력을 해야 하는데 내가 내 노력 다 못한 책임이 내게 있기도 하지만, 그런데 사람이 반드시 누구나 간디만 해지느냐 하면, 그렇진 않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잘 하기만 하면 자기가 제일가는 위대한 인물이 될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큰 착오입니다. 도대체 ‘위대한 인물’ 이라 그러면서 숭배하는 것부터가 잘못이지만, 노력만 하면 자기도 곧장 그렇게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다 착각입니다. 그런 법 없습니다. 요런 작은 떨기나무에 비료를 많이 주고 그런다고 해서 이것이 소나무나 전나무처럼 자라나는 법이 없습니다. 타고 날 때 벌써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높고 낮고는 없습니다. 귀천이 없습니다,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은 다 정치하는 사람이 만들어낸 말입니다. 태고적부터 애기를 한다고 그래도 그건 정치한다는 사람들이, 남을 지배하려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관념이지, 본래 그 자체는 ‘높고’ ‘낮고’ ‘크고’ ‘작고’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의 높고 낮고, 크고 작고를 구별하는 바이러스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유독 우리나라가 그것이 더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동안 지배자 밑에서 너무나 시달림을 받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나도 벼슬하는 자리에 올라서 남을 한 번 휘두르면서 살아볼까 하는, 관존민비의 그 생각이 아주 속속들이 들어갔어요. 대학입시가 그렇게 치열하고, 문제가 많은 것은 다 그런 때문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입시문제를 어느 문교장관이 힘을 내서, 이거 아주 완전히 고친다 하고 기세를 올려도 그건 그렇게는 안 되는 겁니다. 어떤 집권자가 들어서서, 어떤 문제를 아주 단시간에 고친다고 장담을 해도 그게 될 수 없습니다. 안 됩니다. 세월이 드는 겁니다. 또 그들은 그랬다고 하더라도, 사회악을 보고 의분심을 품고 일어나서 ‘이거 어디 이럴 수야 있나? 우리가 어떡하든지 고쳐보자’하고 혁명을 하겠다는 사람은 더구나 그런 점에 생각을 많이 하셔야 됩니다. 절대로 단시일 내에 안 됩니다. 사람이 사람이 된 거는 수백만 년이 들어서 여기까지 왔지, 첨부터 이랬던 건 아닙니다. 죄악도 자라서 자라서 된 죄악이고, 선도 싸워서 싸워서 된 선이에요.
그럼 이 병을 어떻게 고치나? 우리 속에 속속들이 들어찬 이 바이러스를 뭘로 고치나? 그거는 위대한 혼을 생각해 보는 겁니다. 그걸 내 말로 한다면 ‘씹어본다’ 고 했어요. 왜 그렇게 썼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정말 잘 들어두시오. 만일 당신들이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또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당신들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고 나는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입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입니다.” (요 6:53-55) 하고 했 기 때문에 한 거야요. 예수님이야말로 자기 몸이 씹히고 자기 피가 남의 음료가 되길 바랬습니다. 그건 물론 육신을 두고 한 말이 아니라 이 속의 정신, 인격을 두고 한 말이지요.
그래, 오늘 저녁에 간디를 씹어보자, 물론 오늘 저녁에 다 씹기야 하겠소만, 그래도 씹기 시작을 좀 여러 사람이 해줬으면 하고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는걸 알면서도 모이기를 한 번 시도해봤는데, 사람들이 이렇게 적게 오리라곤 생각을 못 했습니다. 모임 안내장을 신문사에 보냈는데도 신문사가 그걸 보도도 안 해주고, 또 미리 보낸 개인 엽서들도 늦장을 부리고 하는 이런 건 왜 그럴까? 남을 의심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우리 상황이 된 걸로 보면 이거 어디서 무슨 압력이 들어가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내 생각이 잘못이면 잘못이라 하시고 옳다면 옳다고 인정을 하시고 하는 일은 여러분들이 판단하시길 바랍니다.
재목 없으면 우리라도 힘을 모아야
그런데 만약 뭣이 작용을 해서 이렇게 됐다면 그건 분명 옳지 못한 일입니다. 그게 어느 의미에서 옳지 않느냐 하면, 우리에게 큰 재목은 없고, 또 빠른 시일 안에는 나타나지도 않는다면, 나기를 작게 난 우리들이지만 이럴 때는 그럼 우리들끼리 모여서라도 국가의 큰일을 감당해야만 합니다. 옛말대로 한다면 ‘대하여경 요량동(大廈如傾 要樑棟)’ 이라, 큰 집이 넘어지려고 한다면 아름드리 큰 재목으로 받쳐야 하겠는데, 그런 큰 재목이 어디 있어야지? 있으면 좋겠는데, 없을 때는 그럼 어떻게 하지? 그때 작은 것들이라도 이어서 대신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걸 못하도록 자꾸 도둑이 들어. 좀이 들어. 좀이라기보다는 바이러스라고 그러는 것이 차라리 좋을는지 몰라요. 보이지도 않게 속속들이 들었어요. 그걸 이 시간에도 느껴요.
우리집에는 담당 수사관이 세 곳에서 다 나와도 나는 그 사람들이 올 때면 있는 대로 다 말을 해요. 오늘 같은 이런 때도 “우리 모임을 이번에 합니다. 내 나쁜 소리 절대 하지 않을 터이니까 수사기관에서도 여러분들이 많이 오시고 그러시오, 다른 수사관들에게도 그렇게 꼭 좀 전해주시오” 하고 말합니다.
나는 이제 나이도 이렇게 많고, 그러니 욕심이 없어요. 뭐 완전히 없다고 그러면 거짓말이라고 그러겠지만, 아, 이제 다 늙어 빠졌는데 욕심은 무슨 욕심이 있겠어요? 돈을 벌자는 욕심도 없고, 정치의 한자리를 해보자는 생각은, 천만에, 그건 더구나 아무것도 없어요. 주겠다고 그래도 그런 생각 없어도 나는 그거는 내가 배운 선생님들한테서 다 배웠어. 나는 내가 배운 우리 스승들 다 좋은 분으로 압니다. 이렇게 역사의 마지막 끄트머리에, 더러운, 더러운 역사에 나서 그런 선생님들 만났던 건 참 더없이 감사한 거야요. 내가 보기에도 나라가 망하는 꼴을 봤지, 해방되는 꼴을 봤지. 또 요센 뭐 ‘제5공화국’이라 그러고 합디다만, 무슨 놈의 나라가 그렇게 여러 개가 있어요? 그게 다 그건데. 그런 그 꼴다 봤는데, 다 보면서도, 내가 보기엔 나는 참 좋은 스승들을 가졌었다. 좋은 스승이라면 뭣이 좋은 스승이야요? 내가 아는 스승들, 물론 다는 아니지만, 그중에도 적지 않은 여러분들이 사사(私私) 마음은 참 없다. 비교적 없다. 그것이 어찌 감사한지 모르겠어. 어쩌면, 어쩌면 나라가 이렇게 망하는 때에 그런 분들을 스승으로 만났겠냐! 그런 생각을 하면 지금 있는 젊은이들 불쌍해서 못 보겠어.
그래도 하나님이 역사해서 자기 만날 선생들 다 만나기야 하겠지요. 그런 것을 내가 믿기는 믿지만, 나 인간의 생각으로 한다면 이렇게 더러운 세상에 나가지고 어디 가서 바른 말 해주는 이를 만날 수가 있겠냐? 바른 말 하는 걸 고의적으로 막는 힘이 있는 걸 내가 24시간 몸으로 느끼고 있는데.
그래, 간디를 말하자면 그건 위대한 혼이니까 그런 인물은 좀에 나는 거 아닙니다. 우리나라나 남의 나라나 할 것 없이 그런 이는 좀에 나는 거 아닙니다. 인물이 될려면 하늘에서 주는 것도 특별히 받아가지고 나야 하고, 또 그걸 그 사람 자신이 알아서 자기가 노력을 하고, 또 그때 주위에서 돕는 사람도 있고 그렇게 여러 가지가 합해서만 하나의 훌륭한 인물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 역사같이 이렇게 고난 많은 역사에서 요 수십 년, 일이백 년 안팎으로 났던, 내가 스승으로 삼았던 국내 국외의 선생님이라고 하는 분들, 어쩌면 그 속에서도 그렇게 그만큼이라도 나셨을까? 그 썪어진 흙물 속에서도 그 연꽃 같은 마음들이 있었을까? 그런 걸 생각을 하면 참 고마워요. 고마워서 눈물이 나요. 그렇지만, 그런 것이 있는데 어쩌면 그걸 무슨 악한 일이나 되는 것처럼, 악한 사람이나 되는 것처럼 그걸 몰아서 몰아서 기어히 기어히 말을 자유로이 할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이 할까!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도, 내가 부족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만, 적어도 정치적인 의미에서는 그렇게 악독한 사람 아닙니다. 종교적으로 한다면 형편이 없지만, 사회에서 먹고 일하고 입고 사람 접해가는 일에선 그렇게 지독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 엊그제도 어느 부인이 내게 와서 울면서 하소연해요. 그 부인 말로는 자기가 보기에 자기 남편이 뭐 그리 대단한 일 한 것 같지도 않은데 십년이나 구형을 받았대요.
비록 형편없는 이라도 민족의 표현
그 남편 되는 사람 나도 잘 알아요. 공소장에 보면 ‘함 아무개 알지, 안 아무개 알지, 또 장준하 그전에 알았지, 또 누가 알지’ 하면서, 이렇게 ‘사상이 이런 놈들과 같이 몰려다니니까 나쁜 놈’ 이라는 거야요. 그 얘기 듣고 놀랐어요.
그 사람 십년이 무거운 것도 그렇지만, 내가 그렇게 나쁜 놈이었던가? 나라를 위해서도 이럴 수가 있나! 어쩌면 사람에 대한 판단이 이럴 수가 있나! 예수님은 아주 형편없는 사람을 보고도 ‘바보’ 라 그러지 말라고 했어. (마태 5:22) 그 사람도 아깝지만, 그게 왜 그런고 하니, 그것도 그 민족의 한 표현이란 말이야. 그런데 민족이 어디 있어요?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이 개개를 내놓고 민족이 따로 어디 있어요? 그것이 나타난 그것이 하나님이란 말이야. 무슨 까닭으로 해서 그렇게 형편없이 나타났는지는 모르지만, 그게 바로 하나님이 하나씩 나타난 것이란 말이야. 길가에 있는 벌레 한 마리, 아무것도 아닌 풀 잔디같은 것도 다 하나님이 나타난 것인데, 어쩌면 그걸 그렇게 모욕을 할 수가 있을까! 그런데 우리를 막고 있는 지금 이 공기, 이럴 때는 아웅다웅 싸울 거 없어. 그저 심이 든 아재비는 지는 법이니까. 그럼 질 셈 치고라도 우리가 모여서 옛날 좋은 분을 생각을 하면 되잖아? 그러면 우리 속에 정신이 자라는 겁니다. 생각을 하면 그 생각하는 것이 곧 씹는 겁니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씹고 또 씹고 하는 동안에 간디면 간디, 예수면 예수의 정신을 받게 됩니다.
기적을 보고 좋아하는 무리들이 답답해서 예수님께서 내 피와 살을 먹으라고 했을 때, 그의 말대로 그를 생각하고 씹고 씹었던 사람들은 예수와 같이는 못됐지만, 그래도 그가 전한 진리를 세상에 전하리만큼 힘을 발휘한 걸 우리가 봐요 이런 걸 볼 때 위대한 혼이란 얼마나 귀한 것이고, 영향력이 큰 것이냐를 알 수 있잖아요 ?
그것과 폭력으로 했던 걸 비교해보면 비교가 안 돼. 진시황이 위대했다고 그러지만 지금 누가 그의 애기를 해요? 모택동이란 사람이 진시황을 숭배하고 공자를 깐다고 그러더니만, 지금 중공 민족이 모택동이 돌아보지 않게 되었잖아요? 어쩔 수가 없어. 정신만이지. 심지어는 폭력을 쓴다는 그것도 정신이 살아있는 게 있어야 돼. 그게 없으니까 지금은 폭력 그것조차도 제대로 못쓰고 엉뚱한 짓들이나 하잖아요? 옛날엔 안 그랬어. 폭력을 쓴다고 해도 그걸 억울하고, 억눌린 사람의 한을 풀어주자고 해서 썼지, 지금처럼 제 욕심을 채우자고 쓰진 않았어요. 그래, 하루 저녁이라도 간디를 생각하고 그 이름이라도 불러서 여러분들이 생각을 하기 시작을 하면 그 정신이 살아날 터입니다. 그전에 책을 안 봤어도 괜찮아요. 간디란 말을 듣고 생각을 하게 되면 어느 책을 봐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자연히 알게 됩니다. 다만 내 속에 열심이 있나 없나 그게 문제일 뿐입니다.
‘도리’는 영원히 안 죽어
그런데, 나는 오늘 저녁 이 모임을 시작하는 첫머리에서 우리 사회는 지금 질식하리만큼 꽉 막혔다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 실례를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일을 실례로 들어서 말씀 드렸고, 또 그 근본 원인을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조선조 얘기도 잠깐 했습니다. 그리고 해방 이후, 큰 재목은 없는, 위대한 정신의 지도자가 없는 우리의 형편에서 우리가 했어야 했던 일에 대해서 말씀 드리다가 애기가 조금 빗나갔습니다. 이제 다시 첫머리로 돌아가서 말해본다면, 지나간 역사를 사건의 이름만 들어서 말해볼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해방 당시 정치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사사에 기울어서 씨들이 바랬던 새로운 삶의 역사는 방해를 받았습니다. 그럼 그 방해의 결과가 뭔고 하니, 그게 바로 6.25입니다. 6.25 당하고 나서 참혹해진 건 여러분이 다 잘 아십니다.
그런데 6.25같은 그런 비참한 교훈을 받고도 깨어난 뭣이 없습니다. 가령 뒷사람들이 보기만 해도 마음이 감동을 받을 만한 무슨 시라든지, 음악이라든지 그런 거 나온 게 없습니다.
그런데 요새 일본사람의 글을 하나 보고 아주 감동을 많이 받았어요. 히로시마에 대한 얘기, 말하자면 원폭 피폭에 대한 글인데, 어느 일본사람이 별 소개도 없이, 읽어 보라면서 내게 줬어요. 책을 준 그 사람도 평화주의자니까 그걸 내게 줬겠지만, 멋모르고 그걸 보기 시작했는데, 그날 저녁에 그걸 단숨에 다 읽었어요. 읽다가 도저히 책을 놓을 수가 없었어요. 책 그 자체가 나를 막 끌어들여요 눈물을 몇 번이나 닦았는지 모릅니다. 정직하게 평한다면 그 작자가 뭐 그리 대단한 문학자도 아니고 또 그게 미문(美文)으로 쓴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 마음을 어쩌면 그렇게까지 묘사했을까! 비유를 한다면 내가 히로시마, 나가사끼 그 폐허가 된 망망한 곳에 서서, 거기 그 폐허 속을 비집고 요렇게 돋아나오는 파란 싹을 보는 것 같았어요 이제 그걸 책으로, 옮길 예정입니다. 조금 있으면 나가게 될 겁니다.
남의 일을 보면 이런데, 우리도 6.25를 자료로 삼아 그렇게 해줬으면 우리 마음이 많이 살아났을 터인데, 우린 그러질 못했습니다.
6.25에 대해서 역사철학적인 생각을 해본다면 그건 과거의 잘못에 대한 심판이란 점도 있지만, 또 앞을 위해서 우리 마음을 깨우쳐 주기 위해 그렇게 됐다 그럴 수도 있어요. 그런데도 그러한 생각은 없이 그냥 보냈으니 바로 5.16이 났어요.‘
최근에 ‘제3공화국’ 이란 글이 중앙일보에도, 동아일보에도 나오기는 합디다만, 그게 무슨 의미로, 어떻게 돼서 나오게 된 것인진 몰라도, 또 거기 쓰인 것이 사실인지 아닌진 몰라도, 난 그걸 보다가 책상을 몇 번이나 두드렸는지 모릅니다.
이러고도, 그래, 이러고도 나라가 안 망하고 어찌 견딜 수가 있나! 사람이 욕심이 들어가면 그런 것인가? 박정희씨,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친구도 아닌 자기 아래 사람들에게,삼선개헌 반대한다고 하니까, 술을 먹으면서까지 애원을 하다시피 “나, 제발 한 번만 더 하게 해줘!” 그랬다는 거. 그걸 보고 ‘야, 참 욕심이란 더럽구나!’하고 통탄을 했습니다. 그걸 보고 난 죽은 사람을 나무라기보다는, ‘도대체 우리 역사가 어쩌면 이렇게까지 됐을까!’ 하고 안타까웠습니다.
사실 5.16에 대해서도 그게 어쩌다가 그렇게 됐겠거니 했었지, 구데타하기 얼마 전부터 그렇게 준비를 했는 줄은, 신문에 난 걸 보기 전에는 몰랐어요. 이게 뭐야요? 군인보고 나라의 대적 막으라니까 그 생각은 안하고 모여서 그따위 장난질이나 하다니! 기가 막혀서, 그런데 참모총장이란 것도 알기를 벌써 오래 전부터 알고 있으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않고 그놈 이쪽인지 저쪽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잖아요? 국방장관한테 보고를 한다고는 해놓고 또 국방장관도 알긴 알면서, 총리한테 말만해. 총리는 또 듣긴 듣고도 그냥 그대로야. 물론 답답해서 몇 번 질문했다고 그러지만, 그걸 그냥 당장에 무슨 벼락을 내리든지 그러지는 않고 그냥 그러고 있는 동안에 그만 그 꼴 났다니. 신문에 난 걸 보면 아주 우스운 일입니다. 그래 그런 걸 보면 ‘국민의 정신이 어쩌면 이럴 수가 있느냐?’ 하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5.16 후에 가서는 6.25 정도만이 아닙니다. 이제 도리가 아주 죽습니다. 완전히 죽는 거는 아니지만, 도리라는 거는 아주 죽어버리는 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죽은 모양으로 땅으로 들어갑니다. 5.16 후에는 이치가 없습니다.
난, 5.16 처음 때부터 그러는 겁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역사란 가차(假借) 없이 하는 건데, 다만 우리 보기에 어떤 때는 좀 늦어지는 것 같고,이른 것 같아 보일 뿐이지, 판단이 없는 법은 없습니다. 왜? 사람이란 역시 하나님의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기 우리 마음속에 도리가 있기 때문에.
도리는 영원히 죽는 것이 아닌데도 그걸 억누르니까, 도리가 없는 것처럼 그렇게 하려고 하니까 거기 얼마나 잘못이 많을 겁니까? 싹이 나오려고 하는데 큰 돌로 누지르니까 싹이 나오기는 나와야겠는데, 위에서 덮어누르니까 그만 그 속에서 꼬부라지고 부러지고 병신이 돼서, 이것도 저것도 아니게 됩니다. 말하자면 지금 우리 인심이 그렇게 됐다는 말입니다.
이제 그러다가 10.26사태가 왔고, 그 10.26사태 이후에 12.12 사태가 있었으며, 12.12사태 이후에 아주 큰 걸로는 광주사태가 왔습니다.
왜곡된 ‘광주사태’ 반드시 시정돼야만
나는 도저히 광주사태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걸 잊을 수 없을 겁니다. 난 지금 이 자리에서 미리 잘라 말씀드립니다. ‘내란 음모’ 라고 왜곡된 ‘광주사태’ 는 반드시 바로잡혀져야 합니다. 역사에 있어서 이걸 바르게 해결하지 못하면 이 민족은 낙제하는 민족입니다. 도대체 광주에서 무슨 내란사건이 있었단 말입니까? 광주사람들이 어째 내란을 꾸였겠어요? 꾸밀 힘도 없고, 공산주의자들도 아닌데 어째서 공산주의자들이라고 그럽니까? 저번에 광주에 내려가서 얘기할 때, 나는 “이건 도저히 사람의 마음이 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귀신이 들렸다. 사탄이 들린 행동이다” 그랬어요. 물론 누가 사탄이 들린 건지는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사탄이 들려도 누구 하나만이 아니라 적어도 적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사탄에 걸렸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광주에서 내란이 났었다 하는 애기는 어느 때고 반드시 바로잡혀야 합니다. 그것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늦어지면 늦어지는 만큼 해가 많을 뿐입니다. ‘광주에서 내란사건이 있었다고 한 것은,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군. 뭔가 잘못이 있어서 그렇게 됐군’ 하고, 광주사태 수사한 수사관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 수사관 불러서 그 문제 해결하는 날이, 반드시 있어야 할거요. 공산주의자도 아닌 사람들이 어째서, 무슨 의미로 공산주의자로 몰렸었나 하는 게 분명히 밝혀져야 할 겁니다. 책임이 누구에게 있든지, 그리고 또 책임 있는 사람이 그걸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만약 그것이 밝혀지지 않고 광주사태가 ‘내란’ 이란 이름으로 역사에 적힌다면 이놈의 민족은 망하는 겁니다.
거듭 말하지만 이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책임 있는 사람이 반드시 이 문제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역사가 오늘처럼 이렇게 되면 이게 바로 이 민족의 맡은 바 과제입니다. 지난 것은 다는 못한다고 하드라도, 적어도 지금의 이것은 될수록 빠른 시일 안에 시정되도록 국민들 앞에 밝혀야 합니다.
‘아, 그랬다. 사람 많이 죽기는 죽었는데, 알고 보니 내란이 아니었군. 잘못돼서 그렇게 보도가 됐군’ 하고 국민에게 납득이 가도록 밝혀야 합니다.
무식한 국민이라고 해서 신문에 안나면 모르겠지 그러지만, 그건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사실을 전하는 건 신문만이 전하는 게 아닙니다. 옛날에야 신문이 어디 있었습니까? 그렇지만 말이란 나게 마련이야. 그래 조상들은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그랬어요. ‘새’라 그러고,‘쥐’라고 할 수밖에 없는, 뭔지는 모르지만, 이 마음에 전해지는 게 있습니다. 마음은 말로 해서만 되는 게 아닙니다. 자연히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에 ‘정의’ 란 것이 살고 언제든지 압박을 받지만 옳은 정의는 살아나는 법이요 또 그게 살아나기 때문에 우리가 사람 노릇하고 역사가 유지돼 가는 것이지, 만약 찍어버리기만 하면 아주 정말 죽어버린다면 역사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겠어요? 억누르고, 감추면 다인 것같이 생각할지 몰라도, 그렇게는 절대 안 됩니다.
그래, 오늘 우리의 정신 상태를 한마디로 말하면, 앞으로 이보다 더 내려갈는지 어떨는지는 모르지만, 이제까지로 보면 ‘이게 참, 최하선이 아니냐’ 그럴 정도로 정신이 죽었습니다. 나는 정신을 생명으로 아는 사람이니까, 내가 보기엔 지금의 우리 이 정신 상태를 최하선으로 봐요.
그러니까 내가 하는 일은, 최소한도 이것쯤은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것은, 죽어진 우리의 정신을 살려내자는 것이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위대한 혼을 생각해보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 하는 말은 자꾸만 씹어봐야 하는 겁니다.
두려워 말라
얼마 전에 일본에 갔을 때 거기서 나라이얀 데자이를 만났지요. 그는 간디의 아주 좋은 비서라고 하던 마하데부 데자이의 아들입니다. 첨에는 서로들 모른 채로, 같은 차를 타고 가다가, 늦게서야 서로 알게 됐지요 그때 그가 간디의 필적으로 된 쪽지를 하나 기념으로 내게 줬어요. 거기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Truthful, Gentle and Fearless라고 적혔어요. 즉 진실해라, 온유해라, 그리고 겁이 없어야 된다 그랬어요. 그래 간디 추모 모임을 하면서 우리가 그의 말을 놓고서 생각을 해보자, 그의 정신을 씹어보자 해서 이걸 제목으로 삼은 겁니다.
간디로 보면 이 세 마디 중에서도 첫째 좋아하는 건 ‘Fearless’ 두려워하지 말라 입니다. 사람으로서 제일 죄악은 두려움이 많다는 겁니다. 우리 민족으로도 첫째 할 거는,내가 보기로는, 겁이 없어야 됩니다. 관리를 봐도 무서운 생각이 없는 국민이 돼야 합니다. 다른 나라의 관리들은 어떻게 하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사람들이 관리만 보면 벌써 시르죽는 겁니다. 그것은 옛날부터 버릇이 됐습니다. 그러나 관리가 아니라 세상없는 사람을 만나도 꼿꼿이 서서 ‘나도 사람이요’ 하고 똑바로 쳐다보고 말을 할 수가 있도록 되어야 합니다.
맹자같은 이는 훌륭한 이인데도 뭐란 줄 아십니까? “거, 임금같은 이를 만나려면 그 으리으리한 것은 쳐다보지도 말아라, 아예 그런 것은 보지도 말고, 네 얘기만 해라” 그랬습니다. 물론 이 말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느라 그랬겠지요 자기로서야 뭐 ‘어째서 임금이 나를 부른단 말이냐? 나는 나이도 저보다는 많지, 덕도 많지, 저는 뭐 지위나 좀 높다고 그러지만, 셋 중에서 나는 둘이고 저는 하나인데, 어째서 제가 날 부른단 말이냐’ 그러면서, 맘에 들면 가고, 안 들면 안 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라보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요 옳게 말한다면 정면을 바라보고 말을 하고 그래야겠는데, 언제가면 우리 사람들을, 우리 씨을 그렇게 기를 수가 있겠느냐? 그건 다른 약이 없어요. 정신은 정신으로만 자라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옛날의 위대했다는 사람을 자꾸 자꾸 생각을 해봐야 됩니다. 그런 분들 가운데서도 간디같은 분은 보통사람이 아닙니다. 이제 시간이 없어 다른 말은 못하게 됐으니 이거나 하나 읽고 갑시다. 간디가 돌아갔을 때 네루가 빙송을 한 말입니다.
간디, 산 진리를 보여준 영원의 혼
“빛이 우리 살림 속에서 사라져버렸고 암흑이 사방에 찼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무엇을 말해야 하며,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존경하던 지도자, 우리가 불러서 ‘바푸우’ ‘바푸우’ 부르던 민족의 아버지는 이제 가버렸습니다. 나는 빛이 사라졌다고 이제 말했습니다만, 그건 잘못된 말입니다. 이 나라를 비추던 그 빛은 보통 빛이 아닙니다. 이때까지 긴 세월동안 이 나라를 비춰주던 그 빛은 이 앞으로도 이 나라를 비춰줄 것이요 천년이 지나도 이 나라를 비춰줄 것이며, 온 세계가 그것을 볼 것이고, 그로 인하여 허다한 심령들이 위로를 받을 것 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살아있는 진리를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영원의 사람, 그 영원한 진리로 우리와 같이 살고 우리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해 줄 것이고 우리를 잘못에서 건져주어서 우리의 긴 역사를 이끌어 자유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오늘 제목으로 ‘진실하라, 온유하라,두려워 말라’ 그랬는데, 그걸 조목 조목 설명을 해봤으면 좋겠지만, 그건 약할렵니다. 다만 ‘두려움이 없어라’ 한 것에 관한 것은 읽고 마칩시다.
간디가 남아프리카에서 두 번째 사티아그라하(Satyagraha)를 하던 때 애깁니다.
그때 남아프리카에 있는 정부 물론 서양 사람들이 통치하던 정부였지요 그 정부가 법을 하나 만들었어요. 인도사람이 들어오는 걸 막으려는 속셈에섭니다. 처음, 노동력이 부족할 때는 모집을 해서 데려갔다가, 그 인도사람들이 부지런히 일을 해서 차차 자기네들과 경쟁자가 되려고 하니까, 이젠 막아서 못 들어오게 하려고 한 거지요 그래, 인두세,poll tax를 만들었습니다. ‘첫째 8살 이상 먹은 사람 하나에 세금을 3파운드씩 내라’ 그랬어요 그래 간디가 이건 싸워야 된다. 그랬고, 그담 둘째 것에 대해서 간디는 더구나 노했습니다. 뭔고 하면 참 고약한 사람들이야요 문명이란 그런 거야요 그 둘째에, 말하기를,‘기독교 교회에서 하지 않은 결혼을 우리는 결혼으로 인정할 수가 없다’ 그랬어요 그래 간디는 그걸 놓고 펄쩍 뜁니다.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 우리는 여기서 다 힌두교 또는 모슬렘 혹은 퍼시교의 의식에 의해서, 우리의 옛날 전통에 의해서 한 결혼인데, 그래 기독교 교회당에서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렇게 말한다면, 그럼 우리가 여기서 데리고 사는 사람들은 다 첩이란 말이냐? 아니면 갈보란 말이냐? 이건 우리 인도의 면모에도 다 관계가 되는 일이다. 그러면서, 분노하여 투쟁을 하고, 결국은 이기게 됩니다.
그날, 그 투쟁을 위해서 모인 날 저녁 간디는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 결정을 내렸습니다. 우리의 결혼의 합법성의 문제와 3파운드의 인두세 문제는 내게는 신앙의 문제입니다.”
간디는 사는 목적이 종교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중년에 와서 그가 한 말에 의하면, 사람들은 나를 정치 어쩌고 그러지만 나는 이 삼십년 동안 한 모든 것은 기독교적으로 말한다면 ‘구원’ 얻는 것에 있지, 다른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인도말로 한다면 모크샤(Moksha)에 도달하는 거, 불교식으로 한다면 열반(Nirvana)에 들어가는 것, 해탈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 라고 했던 사람입니다.
“내게 대해서 그것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내 가슴 속에는 불길이 치솟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법령은 절대로 폐지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다 우리의 위대한 나라의 명예에 관계되는 문제들입니다. 이번에는 나는 대중집회도 안 열겠습니다. 결의안의 채택같은 것도 없을 것입니다. 또 어디로 대표를 보낼 것도 없습니다. 누구에게서 돈을 모집하자는 생각도 없습니다. 신문에 선전을 부탁할 생각도 없습니다. 거류민단의 정신이 극도로 떨어져 있는 것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걱정할 것 없습니다.”
‘사티아그라하’ 투쟁엔 패전이 없다
“우리는 세계를 향해서, 사티아그라하 투쟁자의 규정에는 패전이라고 하는 명사는 없다고 선포해왔습니다. 어찌 진리에게 실패란 것이 있을 수 있습니까?
나는 참으로 여러분들이 모두 다 이 투쟁에 참가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내 조건에는 매우 엄격합니다. 여러분들이 나와 행동을 같이 하실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여러분의 아내와 자녀들과 그밖의 모든 식구들을 잊어버리셔야 합니다.” 나는 물론 먼저 들은 거지만, 오늘 첨 들은 분도 이제 들은 담에는 모른다 그럴 수 없을 겁니다. 무서운 말입니다.
‘인도의 명예와도 관계된다. 우리 개인으로도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다. 그러니 이제 내가 하자 말자 그러진 않겠다. 그러나 나와 같이할려면 모든걸 버려야 한다.’하고 그러면서, 사람들이 따라오거나 말거나 자기는 나서는 겁니다.
그래 이런 생각을 하다가, 일생동안 이런 일을 하려면 도저히 가족을 가지고 해서는 안되겠다 하는 생각에서 브라마 차리아(Brahma charya), 일생을 독신으로 살기로 해버리잖아요. 물론 부인이 있으니까 부인에게 먼저 말을 하고 한 것이지만. 독신만이 아니라 살림이 이제 아주 달라집니다. 간소하게 살고 ‘무소유’ 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만이 아닙니다.
“먼저 여러분의 아내와 자녀들과 그밖의 모든 식구들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인도조차도 여러분들은 잊어버려야 합니다.”
아마 여길 반대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시오 간디란 사람이 나라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은, 물론 폭력으로는 아니 하지만,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을 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나와 한가지로 참여하신다면 더 없이 좋습니다. 그러나 참여하지 않으신다 해도 조금도 나는 걱정이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께 여러번 말했습니다. 사티아그라하 투쟁자는 혼자서도 싸울 수 있다고. 왜냐하면 그것은 혼의 힘으로 싸우는 것이기 때문이란 것을 말했습니다.”
혼이라 그러면 네 혼, 내 혼 따로 없어요. 여러분의 혼이 내 혼이고, 내 혼이 여러분의 혼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분이 다 참여 안 해도 내가 하면 그것이 전체가 하는 거니 그런 생각에서 그러는 말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참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단신으로라도 최고의 용기, 있는 용기를 다해서 싸울 것을 결심했습니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온 아프리카를 쏘다닐 것입니다. 나는 이집에서 저집으로 돌아다니면서 우리 씨들을 불러 일으켜서 이 거룩한 싸움을 하게 할 것입니다. 나는 내 목숨이 끝날 때까지 싸워 그 3 파운드의 인두세와 혼인에 관한 법령을 철폐시키고야 말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또 우리 여성들도 이 투쟁에 참여할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도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명예가 서느냐 떨어지느냐 위기의 순간입니다.”
그때까지는 간디는 부인들은 참여를 안 시켰어요. 그러나 지금은 여자로서의 부인의 명예가 서느냐 떨어지느냐 하는 위기의 순간이란 말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들의 참가를 권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점에 관해서도 여러분의 결의를 묻고 싶습니다. 그럼 이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실 것입니까?”
그런데 이제 이것만 봐도 자기가 참이라고 확신을 할 뿐만 아니라, 남에게 권해도 온순하게, 자신들에게 맡겨서 하지, 강요하지는 않아요. 정신으로 싸우는데 있어서까지 ‘당신 나오시오’ 하지 않습니다. 웬만한 사람이 나오겠다 그래도 ‘당신은 당신의 사정을 잘 참작을 해서, 집에 늙은 부모님들이 있으니까 이번엔 나오지 마시오’ 그러지, 강권을 해서 하진 않습니다. 그런 말 안 하기 때문에 나선 사람은 틀림이 없습니다.
간디는 어려서부터 ‘참’에 관한 것이라면 타고난 성격이라 그럽니다. 중학교 시절인데, 어느날 학교에 시학관이 시찰을 나왔어요. 그래서 선생님들도 학교성적을 올리기 위해 학생들을 도와주려고 그랬지요. 시험에 다섯 말의 단어를 내고, 그걸 불러주면서 받아쓰라고 그러는데, 그 가운데서 하나를 잘 모르겠어. 선생이 그걸 보고는 결에 와서 구두로 발을 툭툭 건드리며, 옆의 사람 것을 보고 베껴쓰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간디는 차마 그걸 베낄 수가 없드래요.
물론 간디도 잘못은 있었습니다. 간디의 말에 의하면 자기는 도둑질도 해봤다고 그랬어요. 어려서 친구들의 유혹에 빠져서 담배를 몰래 피워보기도 했지요. 그런데 얼마쯤 지나니까 곧 담배 밑천이 떨어졌지요. 그러나 어디 구할 데가 있어야지? 그래 자기 집에 있는 머슴의 동전을 훔쳐요. 또 자기 형님의 팔찌가 있는데, 거기 금이 달렸지요. 그걸 몰래 뜯어내기도 했지요.
그런데, 그렇게 했다가도 가책이 돼서 견딜 수가 없어. 그래 아버지에게 고백을 해야겠는데, 종아리를 치는 것은 무섭지가 않는데, 아버지께서 걱정을 할 것을 생각하니까 도저히 말을 할 용기가 나질 않아. 그래 얼마동안 주저주저하다가 마지막에 용기를 내서, 글로 써요. 그때 아버지는 마침 앓고 있었지요. 침상에 누워 있는데, 이제 그 쓴 글을 가져다, 말도 못하고, 이렇게 들이밀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버지도 참 훌륭한 분입니다. 아버지가 그걸 쓰윽 다 읽어보더니만 눈물을 스르륵 스르륵 흘리시드래요. 그리고는 그걸 그냥 찢어버리시고 아무 말씀도 없어.
“사랑의 힘, 그 화살을 맞아본 자만이 알아”
그래 그담에 간디가 뭐랬는고 하면, 아버지가 책망을 했더라면 차라리 모르겠는데 책망도 안하시고 눈물을 이렇게 주룩주룩 흘리시는데 그만 자기 마음이 다 녹아버렸다고 했어요.
그래 옛날 사람의 시를 인용해서 “사랑의 화살을 맞은 자만이 그만이 그 힘을 안다.” 그러면서 일생을 두고 잊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잘못을 안 할 수는 없지만, 잘못을 저지른 다음에는 반드시 그것을 고백하고, 다시는 안 하겠다는 다짐으로 살아가면 틀림없이 그 마음이 다시 살아난다고 말하는 사람이 바로 간디입니다
온유한 것에 대해서는 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큰 아들 하리란과 얽힌 얘깁니다. 간디가 그렇게 훌륭한 간디였지만, 아들이 제대로 아버지를 이해를 못했지요. 간디는 자기로서는 깊이 느낀 데가 있기 때문에 교육, 특히 현대 교육에 대해서 많은 문제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현대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는, 애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직접 가르치기로 했지요.
그런데 아이들이 어디 또 그렇게 생각합니까? 맏아들 하리란은 나이가 좀 들었으니까 아버지의 그런 생각에 불평을 갖지요. 물론 하리란도 아버지와 같이 아버지가 싸울 때 그 대열에 나와서 열심히 같이 싸우고 그러긴 했지요. 그러면서도 속에는 늘상 아버지가 날 공부 안 시켜주신다 하고 불평을 품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마침내 아는 사람한테 20 파운드인가 얼만가를 빌려서, 말도 없이 집을 나가버립니다. 간디가 수소문을 해서, 아들을 데리고 와서는, 그날 저녁에 다른 사람들은 다 잠을 재워놓고, 둘이서 밤새도록 뜰을 왔다 갔다 하면서 애기를 했지요. 그러고는 그 이튿날 아침 식탁에서 간디가 딱 선언을 하기를, 하리란은 내일 기차로 본국으로 돌아간다. 가서, 거기서 학교에 다니게 될 것이다 하고는 본국으로 돌려보내게 됩니다.
그래 몇 사람이 그를 전송하는데, 기차가 막 떠나게 되니까 아들에게 키스를 해주고, 가볍게 뺨을 때리면서 “아버지가 만일 잘못했다고 생각하거든 아버지를 용서해 다오” 그랬어요.
그걸 보고는, 지금 우리가 읽은 이 글을 쓴 사람이 ‘야, 참 지독한 아버지로구나! 지독한 아버지야. 그렇지만 또 그 사랑이 얼마만한 사랑이냐!’ 하면서, 자기로서는 간디의 그런 걸 잊을 수가 없다고 했어요.
간디 또 하나의 그리스도
초기에 간디를 바로 본 사람은 로망 롤랑입니다. 그의 간디 전기는 아주 유명합니다. 나도 로망 롤랑의 간디 전기를 보고 간디에 대한 관심이 깊어진 사람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런 얘길 하니까 연상되는 게 하나 있는데, 그걸 하나 하고 갑시다.
영국의 해군 대좌, 제독 노릇했던 사람의 딸인데, 마들린 슬레드 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 자기 마음에 뭔가 열심히 찾았어요. 물론 첨에는 자기가 뭘 찾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고민을 하고 그랬어요. 음악을 좋아하니까, 음악하는 사람한테 가서 베토벤에 대한 소개를 듣고는, 그래 베토벤을 한 번 봤으면 그의 음악을 좀 들어봤으면 하고 원했지요. 그때 어떤 사람한테서 베토벤의 음악은 로망 롤랑이 잘 알고 평했더라 하는 말을 듣게 됐지요. 그래서 로망 롤랑을 한 번 봤으면 싶어서 열심으로 편지도 하고 그랬지요. 그래, 로망 롤랑이 그 사람의 청을 들어줘서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로망 롤랑이 이 사람을 보니까 그 여자는 아직 자기가 찾고 있는 게 뭔지를 모르고 있었어요. 그래서 두 번째 만나서 얘기할 때, 너 간디를 가서 한 번 만나봐라 그랬지요. 그래 간디가 누구냐 하고 물으니까, 로망 롤랑의 대답이 뭔고 하니 “He is another Christ.” 그랬어요. 말하자면 ‘예수와 같은 사람’ 혹은 ‘또 하나의 그리스도’ 란 말입니다. 이만큼 로망 롤랑은 간디를 훌륭하게 바로 보았던 사람입니다. 간디를 보고 예수님과 비슷한 데가 많다는 걸 증명한 또 다른 사람이 있어요. 미국사람인데, 우리나라에도 왔다 간 일이 있는 유명한 스텐리 존스 라는 목사입니다. 40년 동안 인도에 가 선교활동한 분이지요 처음에는 간디와 의견이 달라서 싸우기도 하고 그랬는데, 나중에는 간디를 차차 이해하게 됐고 간디가 돌아간 뒤에는 그에 대한 글도 써낸 분입니다. 그 사람은 간디를 평해서“He is a natural Christian” ‘자생적인 기독교인’ 즉 기독교에 들어가지 않고 크리스천 된 사람이라고 그랬지요.
우리나리에서도 유영모 선생님이 살아계실 때, 사람들이 간디가 어떤 사람일까요 하고 물으면, 선생님 말씀은 “뭘 그래, 예수님이 만일 요새 오신다면 간디 비슷한 그런 사람일 꺼요” 하고 말씀하셨지요.
지금 한 장의 벽돌을 쌓자
이런 위대한 간디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정신을 살려내야만 합니다. 진실하고 온유하고, 겁이 없는 정신을 길러야만 우리가 우리 노릇해가면서 살 수가 있고 우리 역사가 바로 살아나갈 수 있는 겁니다.
사람들은 날더러 지독한 소리 안 한다고 해서, 그럴러면 차라리 말이나 안했으면 좋겠다 한다는 소문이 있는 줄을 압니다. 내 귀에도 그런 소문이 들려옵니다. 또 그렇게 말하는 마음, 우리나라 꼴을 보면 그 마음 무리가 아니란 것도 내가 잘 압니다. 그렇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거는 나는 못생겨서 간디만큼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내가 못했다고 해서 우리가 간디를 본받아서 할려는 그 밑천은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내가 못해도 내가 노력한 만큼은 없어지지 않고 쌓여서 내려가는 겁니다.
아까도 그러지 않았습니까? 큰 혼은 우리나라에서 근래에는 안 납니다. 못 납니다. 십년, 이십년 내에 안 날 겁니다. 없습니다. 나라의 상황이 이렇게 된 다음에는 군인이 판을 칠 수밖에 없어졌습니다. 군인을 반드시 욕하지는 않습니다. 이 나라의 상황이 지금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은 반드시 고쳐져야만 하는데, 이걸 고치는 것은 무기를 가지고는 고칠 수 없습니다. 난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잘라 말하겠습니다. 힘이라고 그러면 정신의 힘이지, 정신말고 다른 무슨 힘이 있는가 하면, 그건 없습니다. 그래서 간디는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단 한 사람만이라도 철저한 사람이 있다면 백만 명의 불의라도 녹일 수가 있다고 그랬습니다.
시간이 없어 여기 있는 걸 다 읽지는 못 합니다만, 간디는 ‘참에는 실패가 없다’고 하는 걸 확신을 하니까, 그는 다른 사람 보기에 기적을 행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당장에 간디를 모방해서 ‘내가 간디 노릇하겠다’ 그러면 그건 또 어리석은 겁니다. 그건 못씁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벌써 욕심입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는 힘이 안 납니다.
아주 커다란 집을 세우는데, 내가 여기 벽돌 하나를 놓으면 이담에 또 놓을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지, 그리고 또 그다음에 놓을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지 하고 시작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이담에 또 벽돌을 놓을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내가 놓지 않으면 다음에 놓을 그 사람은 놓을 자리가 없잖아요? 그러니 이담에 내 뒤에는 벽돌을 놓을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하는 그것만 믿고 좀 어리숙한척하고 해보십시요. 모든 걸 정신이 되는 자리, 정신이 자라나는 자리에서 좀 보아 봐요. 그러면 이 나라의 장래에 소망이 있지만, ‘뭘 그래. 이겨도 아주 철저히 지금 당장에 다 이겨야지’ 하는 그런 어리석은 소리는 하지도 마세요. 나는 이 나라에 가득 차있는 공기가, 나라가 되어가는 게 도리로서가 아니고 힘만 있으면 다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게 답답해서 죽겠습니다. 사람 죽이는 걸 어째 그리도 좋아하는지 알 수가 없군요. 난 ……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 광주사건이, 있는 그대로 밝혀지지 않으면 이놈의 나라 큰 결단이 난 겁니다. 어느 때 가서라도 누가 책임져야 할 사람이 나서서 ‘그거 잘못돼서 이렇게 됐다. 처음엔 뭔가 잘못돼서 내란인 줄 알았더니만, 알고 보니 그게 아니다’하고 밝혀지게 말해야만 됩니다. 그거 말하면 그 사람 큰 사람 되잖습니까? 왜 그렇게 못합니까? 우리민족의 마음이 이렇게도 작습니까? 그러면 간디에게서 배우세요.
네루는, 간디는 “일천년 후에 가서도 잊혀지지 않을 거다” 그랬습니다. 네루만 그런 줄 아시오? 아인슈타인도 그랬어요. “이담에 후대에 가면 사람들이 일찍이 인간 속에서 간디같은 그런 사람이 육신을 가지고 피를 가지고 이 땅위에 걸어 다닌 사람이었다, 하는 걸 거의 믿지를 못할 거다.”
간디는 그렇게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사람입니다. 정신을 믿는 사람은 영원히 그 믿음으로 인해서 죽지 않습니다. 죽지 않으면 이긴 겁니다.
내가 하겠다는 생각하지 마세요. 당초 이 나라는 결단나는 게 뭔고 하니 ‘내가 하겠다’ 는 것이 결단을 내지 않았어요? 이 대통령 때부터 …… ‘내’ 라는 것이 뭔데 그리도 과대평가를 합니까?
벽돌을 오늘 저녁에 하나 놓으세요. 그럼 그 위에 다른 사람들이 또 놓고, 또 놓고 그러면, 내 위에 있는 모든 것은 다 내가 받치고 있는 게 되잖아요?
사실 ‘내’가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 빌어먹을 ‘내’ 란 거 좀 없애버리세요. 그걸 위해 예수가 죽었는데, 예수 믿는다면서 아직도 ‘내가 하겠다’ 그럽니까. 돌아가시면 간디를 잘 씹으세요. 간디의 정신이 살로 가고, 피로 가면 눈에는 안 보여도 서서히 기적이 생길 겁니다. 1982. 1. 30. (한해수 정리)
친우회보 1983. 봄, 여름호(12호)
저작집30; 12- 91
전집20; 12- 1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