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석제의 소설 '유랑'
群像들의 삶터에 어찌 이야기가 없으랴
칼갈이가 있었다. 서울 금천구 독산동. 조선시대부터 뚫려 있었던 큰 길인 시흥대로 좌우로 밀집한 주택가다.
기웃 넘어가는 짧은 겨울해가 마지막 잔광을 퍼뜨리고 있는 골목길에 쭈그리고 앉아 칼을 가는 칼갈이의 주위로 동네 아낙과 하교길의 학생들이 가끔 신기한듯 들여다보고 간다. 주변 벌집들의 담벼락에는 '월셋방'이라 쓰인 벽보가 군데군데 나붙어 있다.
"사람들이 다시 벌집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기존 주택들도 거꾸로 벌집으로 구조를 바꾸고들 있다"고 소설가 성석제(40)씨는 말했다. 다시 나타난 칼갈이의 모습과 새로이 분주해지는 벌집들은 곤두박질하는 경제현실의 반영으로 보였다.
성씨의 소설 '유랑'(1996)의 무대는 이곳이다. '그 술집이 문을 연 뒤 십여 년 동안 주변은 하루가 다르게 달라졌고 그 술집에 출입하는 사람들의 얼굴도 대부분 바뀌었는데 그 집은 처마끝부터 문턱까지 무엇 하나 바뀐 게 없는 듯했다.
그날그날의 날짜를 표시하는 커다란 숫자에 절기며 음력 표시가 세세히 들어가는 구식 달력이 해를 가리키는 숫자만 바뀐 채 매년 똑 같은 자리에 걸리곤 했다.' 그러나 20여 년이 지난 지금 그 술집은 다른 가게로 바뀌어 있었다. 성씨가 소설에서 말했듯 '새로운 시속만 찾는 세태'에서 그만한 세월을 견딜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유랑'의 주인공인 취생옹(醉生翁)은 성씨의 아버지 세대의 모습이다. "그들은 뭔가에 중독되지 않으면 살 수 없었던 사람들"이라고 성씨는 말했다. 그가 막걸리집을 발견한 것은 군대를 제대한 직후였다.
군에서 "막걸리만이 가진 술맛"을 안 그는 동네 포장마차와 허름한 술집들을 뒤져 막걸리를 찾았다. 주머니에 있는 돈푼이 다 떨어질 때까지 마셔댔다.
그 막걸리집에서 성씨는 취생옹을 본다. '늘 누런 양은 주전자에 담아 마시는 탁주, 안주는 늘 앞에 놓고 조금씩 집어먹는 콩자반에 포무침, 나물 한 접시, 김치 한 보시기, 날고구마 썬 것인데 날고구마는 계절에 따라 있기도 했고 없기도 했다.
' 성씨는 '수십 년을 장복해 온 탁주 덕분인지 살결은 보기 좋게 부푼 흰 빵처럼 부드럽고 온화해 보였던' 그 노인에게서 '어차피 뜨내기인 변두리 동네의 속인들이 쉽게 보지 못하게 하는 굳세고도 독특한 힘의 영역'을 발견한다.
그 알지 못할 힘의 영역은 "늙은이가 제대(帝大) 출신"이라는 동네 사람들의 수군거림에서 확인됐다. 어쩐지 낙백(落魄)한 듯한 모습, 술꾼임에도 풍겨나오는 기품에서 성씨는 이 노인에 대한 호기심을 느꼈다.
"박정희 시대, 70년대 중반 이후 이른바 수출 드라이브 정책이 거세게 몰아쳤던 당시에는 장년만 되도 이미 퇴물 취급을 받았지요.
그때 역시 이 동네에 있던 한 포장마차의 여주인은 해방 전에 이북에서 고녀(高女)를 나온 인텔리였습니다."
성씨는 막걸리집 노인과 포장마차 여주인을 '유랑'에서 한군데 결합시켜 '상공'과 '하세가와 도미코(長谷川惠子)'라는 주인공으로 만들어냈다.
화자인 나가 '서(序)'를 쓰고,벙어리인 줄 알았던 여주인공 하세가와 도미코가 '저자의 뒷골목 구정물 흐르는 술집 뒷방에서 스무 해를' 자신에게 얹혀 살았던 상공에게 한많은 편지를 나에게 구술해서 '서(書)'로 쓴다. 그리고 '후(後)'에서 나는 두 남녀의 사연을 되새기며 '제기랄, 모든 게 너무 빠르다'고 느낀다.
'유랑'이 보여주는 것은 인생유전이다. 해방 전 한 가문의 종손이요 인근 최대의 부자, 최고의 인텔리였던 인물이 나이 삼십에 이미 벼슬이며 영달에 뜻을 잃고, 마흔 넘어서는 '취생옹'을 자처하며 술에 절어 20여 년을 더 산 인생. 성씨에게 그것은 아버지 세대의 인생으로 보였던 것이다.
'유랑'에는 '취생옹의 첩 하세가와 도미코의 봉별서'라는 고색창연한 부제가 붙어있다.
성씨는 취생옹의 인생유전을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방법으로, 리얼리즘에 기초한 장편으로 쓰지 않고 전통 구전 이야기 방식과 의고체 문장을 차용해 짧은 단편으로 씀으로써 훨씬 더 여운있는 일화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발표 당시인 90년대 중반, 우리 소설이 역사와 이념의 무게에서는 벗어났지만 이른바 내면고백체 소설이나 소설가 소설에서 맴돌고 있었던 상황에서 성석제의 등장은 이야기의 부활을 의미했다. 어깨에 힘을 빼고 목을 세우지도 않고 그는 스스로 '통속'적 이야기로 서사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나갔다.
1976년 중학생 때부터 성씨는 이곳 독산동에서 18년을 살았다. 그는 독산동 생활을 "뭇 냄새들"로 기억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 삼립식품 제빵공장에서 뿜어나오는 빵 냄새에 그는 중독될 정도였다. 현재도 있는 코카콜라 공장 등 주변의 공장에서 시커먼 연기가 솟아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경북 상주에서 갓 상경한 그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전학수속을 밟으러 갔다.
"발 조심하라"는 아버지의 말대로 막걸리집이 있던 골목길에는 맨 땅이 그대로 드러난 채 수채가 흘러가고 있었고 사방에는 비닐 봉지들이 흩어져 진창에 빠져 있거나 불에 타고 있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었을 70년대 도시화의 뒷풍경이었다. 시골에 있던 모기가 없는 것만을 감사히 여기면서 그는 골목길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보며 "내가 과연 저 무리에 섞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소년이었다.
그리고 연탄가스 냄새였다. 지척에 있는 구로공단 배후지의 변두리 주택가인 이곳으로 상경한 성씨의 가족은 방 2개에 11명의 대가족이 살았다.
이른바 벌통으로도 불리는 벌집이었다. "시멘트 블록이 날 것으로 드러난 형태에서 붉은 벽돌집으로, 연립주택으로, 다시 아파트로 그 모양을 변화시켜 온 것이 벌집"이라고 성씨는 말한다.
이 벌집들에 겨울이 오면 거의 날이면 날마다 연탄가스 중독자가 생겼다. 벌집 주인들의 가장 큰 일과는 아침에 자고 일어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방문을 열어 가스중독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성씨 자신도 속옷 차림으로 쓰러져 있는 누나 뻘의 여공원 등을 몇 차례나 고압산소통이 있는 인근 병원으로 업고 뛰어간 기억이 생생하다. 그 여공원들은 한 끼에 세 개씩, 삶은 계란 아홉 개로 하루 노동의 에너지를 얻는 누님들이었다.
한 평 남짓한 벌방들이 십여 개 넘게 들어선 집들의 외벽에는 가스계량기가 그만한 수로 한줄로 늘어서 달려있다. 칼갈이도 다시 돌아온다. 역류다. 주변에는 20여층이나 되는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서고 있어 이 벌집들의 옥상에서 보는 동네는 기이한 모습이다.
김승옥은 '무진기행'에서 안개를 진주군(進駐軍)이라 표현했지만, 성씨는 이 아파트군이야말로 진주군이자, 인디언을 침공하는 양키 같은 형세라고 말했다.
성씨의 익살 넘치는 콩트집 '재미나는 인생'에 나오는, "착하게 살자"라는 문신을 어깻죽지에 새겨넣은 동네깡패가 드나들던 목욕탕이 바로 성씨의 집 옆에 있었다. 70년대 중반 성씨의 기억에 국내 최초로 아킬레스건을 절단한 사건이 일어난 곳은 시흥대로상이다.
"잡색의 인간들이 모여드는 곳이었습니다. 사람살이의 이야기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동네였지요. 흘러들어 오면서 사연들을 가지고 들어오고, 나가면서는 가지고 나갔습니다.
사람들이 착근할 수 없는 춥고, 가난하고, 구질구질한 변두리였지만 생기가 넘쳤습니다." 성씨는 이곳이야말로 "한없이 높은 에너지 준위를 가진 우리들의 삶터"라고 말했다.
줄거리
탁주에 절어사는 노인과 그의 일본인 아내
내가 사는 동네에 십여 년 전에 문을 연 술집이 있다. 술집 주인은 늘 양은 주전자에 든 탁주만 마시는 노인과 그의 늙은 벙어리 아내였다. 어느날 노인이 병원으로 실려가고 술집은 문을 닫는다. 서너 달 후 문을 연 그 집을 궁금증에 들른 나는 벙어리 여인이 말해준 사연을 편지로 옮겨 적는다.
여인은 벙어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구술을 통해 나는 여인이 일본 출신의 하세가와 도미코이며, 해방되던 해 일본으로 돌아가는 부모를 잃고 홀로 남게 된 것임을 알게 된다.
여인은 노인을 '상공'이라, 자신은 '첩'이라 부르며 해방 당시의 험악한 조선 땅에서 상공이 자신을 구해준 사연을 이야기한다. 인근 고을 가장 큰 가문의 종손이자 가장 많은 재산을 가진 장자, 가장 많이 배운 사람이었던 상공은 여인을 문중의 한 집안에 맡긴다.
상공은 해방 공간에서 술과 노름으로 재산을 거덜내고 가끔 여인을 찾는다. 여인은 상공에게서 십삼 남매를 둔 본실에 의해 아이를 유산 당하고, 이미 서른 나이부터 술에 젖어 사는 취생옹(醉生翁)이 된 상공을 데리고 저잣거리에서 주막을 차려 이십여 년을 호구해왔던 것이다.
상공은 "너 때문에 내 인생을 조졌다"고 패악하고 여인은 "사람의 일이 어찌 이리 사람답지 않은 것이오"라고 한탄한다.
나는 언젠가는 노인에게 여인의 편지를 전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모든 게 너무 빠르다'고 생각한다.
카페 게시글
━━━━━━━ 문학산책
성석제의 소설 '유랑'
해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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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22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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