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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역사[고대] 스크랩 세계최초의 문명 아시아에서 시작 3
솟대지기 추천 1 조회 120 14.10.24 01: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세계최초의 문명 아시아에서 시작 3

[출처] 律坤學會 [사랑방] 수원객의 상고사 2008.05.16. [글쓴이] 수원객


지구과학적 입장에서 한반도와 동아시아대륙을 생각해 보기로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땅덩어리가 생겨난 이후 한번도 바다밑으로 가라앉은 적이 없는 과학적용어로 '순상지대' 라고한다.


순상지(shield . 楯狀地)를 백과사전에 찾아보면 "지각 중에서 지질학적으로 가장 오래되며 안정된 부분을 말한다. 영어명칭인 쉴드는 캐나다 순상지처럼 선캄브리아기의 지층이나 암석이 노출된 지역이 마치 방패모양을 이루고 표면이 평탄하고 단단한 데서 유래된다. 각 대륙에 1~2개씩 분포한다."

우리나라의 지표는 가장 오래된 땅덩어리이다. (약 35억 년)

지표가 생겨난 이래로 한번도 바다밑에 가라않지 않았으며 지속적으로 상승하였고 약500만년전까지만 하여도 한반도는 적도부근에 있었다고한다.

지금 발견되는 경상도, 전라도지역의 공룡발자욱은 우리나라가 과거 공룡들의 천국이었으며 경상도, 전라도지역은 바닷물이 밀려드는 해변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있다.

그 후 1억년이 흐른사이 지금도 우리나라는 지표가 솟아오르고 있으며 땅덩어리전체는 남쪽 적도에 있었던 것이 서서히 북상하여 지금은 북위도에 자리하게 되었다.


따라서 당연히 기후도 열대성에서 아열대로 변해왔다는 것으로 추정한다.

그래서 약1만 2천 년 전, 동북아시아에서 지구문명의 최전성기가 열리기 시작했다고 본다.

날씨와 벼농사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보았을 때 앞서 말한 발해지역을 중심으로 벼농사는 물론이고 엄청나게 기름진 땅과 바다에서 수확된 풍부한 해산물, 그리고 초원에서 자라는 야생동물들을 기반으로 세계최고의 문명이 발달하였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육지는 땅밑 맨틀이라는 것에 떠있어서 움직이며 서서히 이동을 한다.

이번 사천성대지진도 대륙의 판끼리 부딧쳐서 일어난 일이다. 그런 사이에 한쪽 대륙판은 내려앉고 다른 한쪽 대륙판은 솟아오르게 된다. 중국대륙의 북쪽과 인도의 북쪽 희말라야, 그리고 우리나라의 지형과 광물들은 지구의 역사를 간직하고있다고 할수 있다. 그것은 순상지역이기 때문이다.

또한 땅덩어리는 쉬지 않고 이동을 한다.


심령학자 루쓰몽고메리에 의하면 약 5만년전에 레무리아대륙이 오늘날 호주대륙옆 남태평양에 가라앉았다고한다. 레무리아가 바다밑으로 가라앉았을 때 극이동 으로 인해 남극의 모든 짐승들이 거의 순간적으로 멸망 하였다고 했다. 지금도 남극의두꺼운<1.2km>얼음 밑에는 수 많은 짐승들의 시체가 뭍혀 있을거라고 하였다.


실제로 남극대륙은 수 백 만 년전에 따뜻한 온대지역 이었었고 또 한 때 호주대륙과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브리테니카 백과사전에 과거의 남극대륙과 호주를 연결 했던 땅이 페름-석탄기 때 존재했었다고 지질학자 들의 말을 빌어 적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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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서 해저침몰 도시 유적 발견 (1만년전)

2002.04.12. 대구 달서뉴스


인도 남동부 마하발리푸람 연안에서 빙하기 말기에 바다 밑에 가라 앉은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도시의 유적이 발견됐다.


11일 BBC에 따르면 인도.영국 합동 잠수부팀은 현지 어부들의 진술과 `7개 사원"의 전설을 토대로 해저를 탐사, 지난 4월1일 이 도시 해저에서 한때 큰 도시가 있었음을 증명해주는 대규모의 유적을 발견했다.


탐험을 주도한 인도 국립 해양학 과학탐사연구소는 이번 발견으로 고대 도시가 해저에 침몰했다는 확신을 갖고 오는 2003년 초부터 이 해역 일대를 추가 탐사할 계획이다.


탐험대장 몬티 할스는 "잠수부들이 인공의 흔적이 뚜렷한 일련의 구조물들을 확인했다"고 말하고 "해저 유적지 규모는 상당히 커서 50명의 잠수부들이 3일간의 조사 끝에 일부분만을 찾아낼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는 국제적으로 중요한 발견으로 추가 탐사와 집중적인 조사가 필요하다"고 그는 덧붙였다.


구조물중에는 사원으로 추정되는 것이 있었으며, 해저 유적은 전체적으로 대도시의 흔적을 시사해주고 있다는 것이 탐험대의 결론이다.


마하발리푸람의 전설을 처음 기록으로 소개한 인물은 영국 여행가 J. 골딩험. 1798년 이 인도 남부마을을 여행한 그는 당시 어부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던 7개 사원의 전설을 듣고 글로 남겼다.


전설에 따르면 신이 이 곳에 세워졌던 대도시의 아름다움을 질투한 나머지 홍수를 내려 하루만에 휩쓸어 버렸는데 6개의 사원은 바다 밑에 가라앉고 나머지 한개가 바닷가에 남아 있었다.


탐험대의 일원인 그래함 한콕은 "여러 해 동안 홍수 신화를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해왔지만 서방학자들이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말하고 "이번 마하발리푸람의 발견으로 신화가 맞다는 것이 증명됐다"고 주장했다.


과학자들은 이 도시가 빙하기 말기에 해저에 침몰했을 가능성에 대해 연구할 계획인데 이것이 증명되면 이 고대도시의 역사는 5천년 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구 달서뉴스 2002년 4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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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2002년 1월 17 일자 보도


"인도 서부 수라트 해안 가까운 얕은 바다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9천5백년 전 고대도시의 흔적이 발견됐다고 16일 인도 정부가 발표했다. 이제까지는 5천5백년 전의 수메르 문명 유적(이라크 소재) 이 인류 최고(最古) 의 유적으로 알려져 왔다.


교도 통신에 따르면 발굴현장에서는 건축자재로 쓰인 것으로 보이는 나무와 뼈의 조각들이 발견됐으며, 이들은 기원전 7천5백년 전 유물로 추정된다고 조시 인도 과학기술부 장관이 기자회견에서 말했다. 인도 고고학자 라지글 박사는 "최소한 9천5백년 전에 이 지역에서 인간이 활동했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인도에는 세계 4대 문명의 하나인 인더스 문명(기원전 2천5백년) 이 있지만,이번 발견이 학계의 인정을 받을 경우 연대가 인더스 문명보다 5천년, 수메르 문명보다 4천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교도 통신은 "이번 발견은 고대문명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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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베이 유적은 세계 最古 도시”

[출처] 2002.03.21. 주간동아

기원전 7500년경 조성 인도 학계 흥분 … 탄소 연대 측정 맞다면 인류문명사 다시 써야 할 판


인류의 문명사는 다시 쓰여야 하는가? 최근 인도 캠베이만(灣)에서 발견된 해저 도시 유적과 유물을 조사하고 있는 인도 고고학계에 따르면 대답은 ‘그렇다’이다. 이번에 인양된 유물 중 일부를 연구기관에 의뢰해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을 한 결과 나뭇조각 화석의 연대가 기원전 7500년경으로 측정되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도시문명은 기원전 4000~3500년경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이었다. 기원전 7000년경 것으로 추정되는 문명의 흔적으로 현재 팔레스타인 지역에 있는 예리코(구약성서의 ‘여리고’)에 요새화된 주거지가 있지만 이것은 진정한 도시문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현재의 파키스탄에 있는 메르가르에서도 기원전 7500년경의 대형 집단 주거지가 발견되었으나, 이는 농경민들의 주거지로 역시 도시문명은 아니다. 만약 기원전 7500년이라는 연대 측정이 맞다면 캠베이만 유적은 세계 최초의 도시문명이 될 것이며, 인류의 도시문명사는 3500년 이상 앞당겨질 것이다.


이번 발견은 지극히 우연한 계기로 시작됐다. 지난해 상반기에 인도 국립 해양기술원은 근해의 해양오염도를 연구하기 위해 캠베이만 연안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조사팀은 해양오염 조사에서 늘 하게 마련인 수중 음파탐지기로 해저 촬영을 실시했는데, 사진 분석 결과 인공물인 것으로 보이는 직사각형 구조물들이 발견된 것이다. 이 놀라운 분석 결과에 해양기술원은 해양 고고학자인 라오 박사에게 의뢰해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다.


9km 걸쳐 수심 30~40m 지역 분포

해저 유적지가 발견된 곳은 인도 구자라트주(州) 캠베이만 해안에서 30km 가량 떨어진 수심 30~40m 지역이다. 고대 도시의 유적은 약 9km에 걸쳐 강가에 펼쳐져 있으며, 강으로 추정되는 곳에는 돌로 된 댐의 흔적까지 보이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또한 이 도시는 국제규격의 수영장 크기 목욕장(으로 추정되는 건조물)과 길이 200m, 넓이 45m 규모의 좌대(座臺)도 갖추고 있어 본격적인 거대도시로서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이 대형 건조물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주거지로 추정되는 직사각형의 지하실들이 밀집된 지역이 있으며, 하수도 시설과 도로 시설의 흔적도 남아 있다. 이 고대 도시가 언제 바다 밑에 잠겼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대규모 지각변동이 그 원인일 것이라는 게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이와 함께 해양기술원 연구팀은 인근 해저를 뒤져 2000점이 넘는 유물을 인양했다. 인양물에는 연마된 석기, 부서진 도기 조각, 장신구와 작은 조각품들, 상아와 보석, 인간의 척추와 턱뼈 화석, 치아 등과 함께 문제의 나무 화석이 포함되어 있다. 캠베이 고대 도시인들이 신석기와 도자기를 사용했다는 것이 이로써 확실해진 셈이다. 전체 문명사의 흐름으로 보아도 기원전 7500년부터 5000년경까지는 신석기가 발달하고 쟁기를 사용해 농경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던 시기다. 이러한 농업혁명은 농업 생산의 잉여를 낳아 대규모의 도시생활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인도의 고고학자들, 특히 민족주의 계열의 학자들이 주목하는 부분은 캠베이 유적이 기존의 인더스강 문명의 고대 도시인 하라파, 모헨조다로 유적지와 많은 유사점을 갖는다는 점이다. 캠베이 유적지에 나타나는 대규모 목욕장과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를 연상시키는 대형 좌대, 하수도와 도로가 잘 정비된 주거지역은 인더스 문명의 특징이기도 하다.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2500년경에 전성기를 맞았기 때문에 캠베이 유적과는 수천년의 연대차가 있지만, 이번 발견을 인더스 문명과 연관시키려는 시도도 있다. 인도 고고학 연구원 전임 원장인 자라트 조시 박사는 “농경 집단이었던 고대 인도인들이 어떻게 하라파나 모헨조다로 같은 고도의 도시문화를 발달시킬 수 있었는지 그 중간 단계를 보여주며, 인도 문명의 연결고리를 제공한다”고 이번 발견의 의의를 설명하기도 했다. 이는 캠베이와 인더스 문명을 동일선상에 놓고 보는 시각이지만 두 지역이 동일 문명권에 속한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대형 농경 주거지를 이루었던 메르가르와 캠베이를 연결시켜 신석기 시대의 거대 문명권으로 보려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기원전 7500년이라는 연대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재고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의 나무 화석을 두 군데 연구기관에서 연대를 측정했는데, 비르발 샤니 고식물 연구소의 측정 결과는 기원전 6148~5678년이었고, 인도 국립 지구물리학 연구소의 결과는 기원전 7908~7328년이었다. 두 연구소의 결과에서도 2000년 가까운 시간차가 난다.


일부에선 “나무 화석 근거 부족”

 

좀더 중요한 문제는 이 나무 화석이 과연 도시 유적과 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논리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유적이 발견된 캠베이만 근처는 조수 간만의 차가 크고 물살이 센 곳이어서 이 나무 화석이 서아시아(중동) 지방으로부터 바다를 통해 밀려왔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그레고리 파실 교수(고고학)도 캠베이만의 급격한 조수 운동을 지적하며 문제의 나무 화석과 해저 도시 유적 간의 연관성에는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문제 제기에 대해 이번 발굴팀을 이끈 카티롤리씨는 좀더 많은 인양물을 연구기관으로 보내 연대 측정을 실시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해저 유적의 발견에 대해 하버드 대학의 리처드 메도 교수는 “그 자체로 국제적 조사단을 구성해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 조사가 맹목적인 ‘연대 올리기’와 ‘인도 문명, 역사의 미화’ 경향을 보이는 데 우려를 나타내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인도 델리 대학의 나야니트 라히리 교수(고고학)를 비롯한 좌파계열 학자들은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정확하고 신빙성 있는 유적의 연대 측정과 함께 고고학계의 눈앞에는 풀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는 것이다.


캠베이의 유적을 이룬 사람들은 과연 어디에서 왔을까? 그들은 인도의 원주민이었을까? 아니면 서아시아로부터 어떤 경로를 통해 인도로 들어온 외래인들이었을까? 또 그들이 수렵·채집 생활에서 농경생활로 전환한 것은 언제쯤이었을까? 농경생활을 시작한 후 언제쯤 충분한 잉여를 산출해 도시 정착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을까? 캠베이 유적의 철저한 조사를 통해 이러한 질문들에 대답할 수 있게 된다면 이번 발견은 21세기의 시작과 함께 인류사를 다시 쓰는 계기가 될 것이다.

< 이지은/ 델리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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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잃어버린 문명

 놀랍게도 대만 펑후(澎湖)에서 1만년 된 인조 해저성 발견

[출처] 광쪼우르빠오(廣州日報) 따양(大洋)네트워크 2001.08.28.

(편번역) 최 월화 (2001.08.30)


원제목 : 또 하나의 잃어버린 문명- 놀랍게도 대만 펑후(澎湖)에서 1만년 된 인조 해저성 발견

  

‘하느님의 지문’, ‘하늘의 거울’이라는 책을 저술한 영국의 고고학자 칼라한은 대만으로 가서 펑후 후징구(虎井口) 해저 유적을 탐사하고, 8.27일 발표하기를, 그가 과거에 연구했던 고대문명의 경험으로 볼 때, 펑후 해저유적지에는 인조의, 천연이 아닌 최소한 1만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건조물이 있으며, 향후 그는 계속 타이뚱(臺東), 화리엔(花蓮) 및 양밍산(陽明山, 타이베이 근교의 산, 역자주)을 취재하여 다음 번 책의 출판을 위한 준비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칼라한이 제시한 논증은 중국 역사는 5천 여년이고 이집트는 6천 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마야 고 문명 및 일본 큐우슈우 에나국의 해저 거대(巨臺)로 볼 때, 후징구에 가라앉은 성은 같은 시기의 유적임에 틀림없고, 인류 역사 이전의 것으로서 초보적으로 추정하면 상고 전의 문화거나 외계인의 문화일 수 있는데, 이 문화권은 중동, 동아시아, 일본을 가로질러 유럽으로 형성된 문명지대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전문 잠수부 씨에신만(謝新瞞)을 따라 이미 펑후 해저성에 대한 탐사활동을 마친 칼라한은 장기적으로 그는 증명되지 않은 역사 및 고 문명에 대하여 깊은 흥미를 느끼고 있었는데, 지구상에는 각기 다른 지역에 각기 다른 문명이 있고, 매우 많은 고 문명에 대하여 우리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가 특히 흥미를 느끼는 것은 1만 년 전의 역사로서 즉 빙하기에 빙하가 녹아 바다 수면이 높아졌을 때, 해안에 가까운 저지대를 조심해서 찾기만 한다면 재미있는 일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고 말하였다. 칼라한은 과거 몇 년간 이미 고고학자와 이 세상에 몰락된 문명이 있느냐 여부를 놓고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는데, 다만, 고고학자들이 관심를 보이지 않고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었다고 한다. 그것은 고고학자들이 확실한 증거만을 믿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펑후 해저성을 잠수해 본 경험에 대하여, 칼라한은 그는 펑후 해저성의 십자성과 동서와 남북으로 향한 성벽을 본 후 이것은 절대로 자연적으로 조성된 것이 아니라고 믿게 되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사람만이 동서남북 방향의 문화에 대하여 흥미를 갖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가 본 것은 또한 성벽이 한 조각 한 조각의 돌로 쌓은 것이었는데, 비록 초보적으로 인조적 문화유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지질학자와 고고학자들과 함께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것은 인위적인 것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출처) 광쪼우르빠오(廣州日報) 따양(大洋)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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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에 의하면 히말라야는 지금도 융기하고 있다고 한다.

"히말라야산맥이 형성된 것은 지질적으로 보아 최근의 일인데, 제3기부터 조산운동이 계속되고 있다.

히말라야가 융기하게 된 원인의 하나는 산지에서의 빙하 ·하천의 격렬한 침식으로 하중(荷重:산지 내의 물질)이 제거됨에 따라 지각이 보상적(補償的) 회복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히말라야의 해발고도는 티베트의 해발고도보다 1,000m 이상 높다). 히말라야의 활발한 융기 현상은 특히 동부지역에서 지진이 잦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도 알 수있다."


아울러 우리나라와 중국대륙 중북부산악지역 대부분이 순상지역으로 그 나이가 무려 35억년이라고 한다.

이에 비해 일본은 약5억년전에 생긴 젊은 육지이다. 일본열도에 인구유입은 필히 한반도와 대륙에서 유입되었다는 반증이기도한다.


5천 년 전만 하여도 대륙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까지 걸어서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1만 2천 년 전, 그 때 桓因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하였다.


그 때 지구는 오랫동안 빙하로 덮여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동을하며 살기는 어려웠다. 특히, 유럽지역은 완전히 고립되었으며 아시아지역은 빙하의 영향이 적어 비교적 인류는 풍요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앞에서 언급하였다.


원시인류가 생겨난 이래 아시아의 인류는 몇 십 만년을 이렇게 살아왔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빙하기로 인하여 아시아의 문명이 유럽 보다 먼저 발생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른바 백인종이 시베리아 북쪽의 툰드라 지역에서 남하하기 전 까지는 원시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에 아시아의 인류는 초고대문명을 일으켰으며 태평양상에 그 흔적을 남겼고 지금은 사라지고없지만 현재의 아시아인류들은 과거에 초고대문명을 이룩했던 고아시아인종의 후예들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을 뿐이다.


이들 초고대문명을 말하자면 제임스처치워드가 언급했던 태평양의 '무우(MU)' 플라톤이 언급했던 대서양의 '아틀란티스' 인도양의 '레무리아' 등이 있다.


古亞世亞人의 초고대문명들은 하나 같이 1만2천년전 빙하기가 물러가면서 지구촌에 들이닥친 대재앙 때문에 바다속으로 사라지게되었다.


빙하기가 끝 날 무렵 부터 해수면이 상승 하기시작 하면서 그때 동아시아의 지도는 지금처럼 변해가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1만 2천 년 전, 서해바다는 육지였고 불과 5천 년 전까지만 하여도 부산에서 대마도 일본으로 이어지는 육로가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해수면의 상승을 유추해보면 1천 년전 고구려가 망할 때 발해만은 하나의 내륙호수 였을 것으로 추정 할 수 있다.


지구촌에 물이 불어나면서 급격하게 침수 된 지역이 늘어났으며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린 대륙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약 6천여년에 걸쳐 서서히 변화해가는 과정에 있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에 어느날 갑자기 닥친 재앙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1만 2천 년 전에 초고대문명이 멸망하면서 약6천년동안 지구는 새로운 문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끓임 없이 숨고르기를 해왔으며 桓因時代에는 干支曆法이 탄생하였고 道를 통한 많은 선지자들이 선천의 세상을 이끌어 왔다.


6천 여 년전 복희씨(伏羲氏)가 태어나고 지구의 역사는 또 다시 6천년 대주기의 서막을 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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