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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부연
마정열
사라지는 것들은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남아 있는 자들은 그 흔적 때문에 아픈 시간을 보낸다.
*이곳에서 도를 닦던 네 마리의 이무기가 있었다. 때가 되어 세 마리가 폭포의 기암을 하나씩 뚫고 용으로 승천하였다. 그때 생긴 세 개의 구멍에 물이 고인 것이 삼부연이며, 마을 이름도 이무기가 용으로 변했다고 용화동이 불리게게 되었다 한다.
행렬이 삼부연 폭포 옆을 지날 때 김중사가 해준 이야기다.
상우는 그 이야기를 듣고 한 마리 이무기는 무슨 까닭으로 남았을까 궁금했다. 혹시 이 땅을 떠나지 못한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뿌연 새벽안개 사이로 위병소의 불빛이 희미하게 보였다. 완전군장 차림의 군인들은 24시간 행군 끝에 출발한 곳으로 되돌아왔다.
*
시외버스에서 내렸다. 피부를 자극하는 매서운 한기가 상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새삼 철원의 추위가 느껴졌다. 시외버스는 마지막 정류장인 와수리를 향해 남은 여정을 마치기 위해 서둘러 떠났다.
신철원시외버스터미널의 모습은 십 년 전이나 별반 다름이 없었다. 터미널 정면으로 외출 때 허겁지겁 배를 채우던 음식점은 간판만 바꾼 채 여전히 허기진 군인들을 기다리고 있고, 그 옆에 군인용품을 파는 가게도 그대로였다. 상우는 그 가게의 한쪽 다리가 불편한 주인도 그대로인지 궁금했다. 터미널 옆으로 24시간 편의점이 들어선 정도가 상우의 눈에 비친 변화의 전부였다.
물론 그러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지역의 10년 동안의 변화에 비해 이곳이 더디게 바뀐 탓이리라. 상우는 버스를 타고 오면서 철원의 변화된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래서 버스에서 내리면 낯선 곳에 떨어진 느낌을 받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낯설음이 아니라 기억 속에 잠재된 익숙함의 감정이 먼저였다.
날씨 탓인지 아니면 지역의 특성인지,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거리는 한산했다.
십 년만에 느닷없이 철원에 왔다. 어제 종로의 지하도에서 신동호를 만나지 않았다면 상우는 지금 이 거리를 서성이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금요일의 밤, 종로는 인파로 넘실거렸다. 상우는 술자리에 동참을 요구하는 동료들을 뿌리치고 지하도로 내려갔다. 연말이라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상우의 책상 위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이 주째 계속되는 야근이었다. 지난주는 토요 근무까지 하였다.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낮잠 한번 늘어지게 자리라고 다짐을 하며 종로타워 쪽 출구로 걸어 나갔다.
노숙인 몇은 벌써 널빤지 상자 몇 개로 밤새 추위와 맞설 준비를 끝내고 누워 있었고, 몇은 주억거리며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지하도의 불빛 아래에서 그들은 움직임을 상실한 물체 같았다. 행인들도 그들의 정지된 자세를 방해하면 안 된다는 듯 멀찍이 떨어져 그들의 곁을 지나쳤다. 상우도 곁눈으로 그들을 살피며 빠른 걸음으로 그들의 곁을 지나쳤다. 상우가 출구 쪽 계단을 올랐다. 계단에 한 노숙자가 벽에 고개를 기댄 채 앉아 있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상우는 그 노숙인과 눈이 마주쳤다. 상우는 고개를 돌렸다. 그들과는 눈길도 마주쳐서는 안 되는 듯한, 왠지 모를 거부감이 있었다.
상우는 몇 걸음을 가다가 멈췄다. 낯익음,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에 뒤를 돌아보았다. 상우는 노숙인에게 다가갔다.
그는 분명 신동호였다. 수염으로 뒤덮인 얼굴이었지만 그 속에서 상우는 10년 전 신동호의 모습을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신병장, 신동호!”
노숙인은 상우를 알아보지 못했는지, 아니면 모른 체하는지 한번 흘낏 보더니 그냥 외면해 버렸다.
“자네 나 모르나?”
“......”
“나 조하사야, 조상우.”
“알아.”
목소리는 나지막했다. 노숙인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이런 몰골로 있는데 아는 척해서 뭐 할라고....”
노숙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하사, 나 술 한잔 사줘.”
그가 배낭을 메고 앞장서서 지하도의 계단을 올랐다. 상우는 그의 터덜거리는 신발 소리를 들으며 뒤를 따랐다.
신동호는 밥에는 거의 손대지 않고 술잔만 거푸 비웠다. 상우는 신동호의 앞에 놓인 빈 술잔에 술을 채웠다. 그리고 자신의 잔에도 술을 채웠다.
“어떻게 지냈나?”
“이 꼴을 보고도 모르겠나?”
상우는 더 이상 물을 수 없었다. 상우는 새삼 신동호의 외양을 다시 한번 살폈다. 수염이 입 주위와 턱을 촘촘히 메우고 있었고, 여러 겹으로 걸쳐 입은 옷은 땟국물이 줄줄 흘렀다.
“조하사는 어떻게 나를 한눈에 알아본 거야?”
입가에 묻은 술을 손으로 닦으며 신동호가 물었다.
“동긴데 어찌 모르겠나, 삼 년이나 같이 뒹군 사인데.”
“그랬군, 삼 년이나 같이 뒹군 사이군.”
신동호가 허공을 응시했다. 그리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 시절로 돌아가면 행복할 수 있을까?”
상우는 신동호의 말을 듣고 그 시절을 떠올려 보았다. 단편 단편의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그 시절로 돌아간대도 그리 행복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곳에 가 볼까?”
말을 꺼내 놓고는 왜 이런 제의를 했는지 상우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상우가 잠시 후회하고 있을 때 신동호가 선선히 말을 받았다.
“그래, 한번 가 보자.”
토요일 아침, 단잠을 깼을 때, 상우는 또 한 번 자신의 제안을 후회했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걸음으로 동서울버스터미널로 나왔다.
외투깃을 세우고 칼바람 속에서 한 시간 남짓 기다렸지만 만나기로 한 장소에 신동호는 나오지 않았다. 상우는 집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기왕 나온 걸음이니 혼자라도 가 보자 하고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서울을 떠난 버스는 의정부를 지나 포천으로 들어섰다. 차창에 그려진 풍경은 도시와는 사뭇 다른 살풍경한 모습으로 변했다. 그 풍경에 익숙해질 즈음에 차는 철원에 도착했다.
상우는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조금 떨어진 버스 정류장에서 다시 버스를 기다렸다. 지경리까지 가야 한다.
“지경리 가는 버스는 언제 옵니까?”
정류장 앞 가게 할머니가 돋보기안경을 올리며 버스 시간표를 살폈다.
“열두 시 이십 분이니까, 좀 있으면 오겠네.”
상우는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따뜻한 캔 커피 하나를 사서 가게를 나왔다.
군용트럭 하나가 찬바람을 일으키고 도로를 질주했다. 트럭 뒷좌석에 한 무리의 군인들이 방한모를 깊게 눌러쓰고 앉아 있었다.
십 년 전, 사단 훈련소에서 자대로 오던 날이 생각났다.
군용트럭을 타고 있는 병사들은 군용더플백을 두 다리 사이에 끼운 채 말이 없다.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가득 찬 눈빛들이다. 상우는 곁에 앉은 신동호를 본다. 무표정이다. 대대를 거쳐 중대로, 소대에 이르기까지 상우와 신동호는 같이 있다.
소대에서 첫 밤을 보낼 때 신동호가 상우에게 말한다.
“열심히 버텨보자.”
지경리행 버스가 상우 앞에 멈춰 섰다. 상우가 버스에 올랐다. 할머니 두 분이 앞쪽 좌석에 앉아 있었고, 맨 뒷좌석에 젊은 여인이 앉아 있었다. 자줏빛 외투의 여인은 시선을 창밖에 두고 있었다.
상우는 버스 중간의 좌석에 앉았다. 버스는 다시 움직였다.
차창으로 흰 들판이 스크린처럼 지나갔다. 며칠 전에 내린 눈은 여전히 들판을 흰 색깔로 덮고 있었다. 눈이 덮여 있어도 메마른 느낌을 지울 수 없는 풍경이었다.
부대 앞에서 버스가 멈췄다. 상우가 버스에서 내렸다. 뒤를 이어 자줏빛 외투의 여인도 내렸다.
위병소의 초병에게 면회를 왔다고 하니 초병이 소속과 이름을 물었다. 상우는 잠깐 생각을 하다가 김중사의 이름을 댔다.
“일 중대 김주은 중사.”
위병소의 초병은 면회 장부에 이름을 적고, 위병소 뒤의 면회소에서 기다리라 상우에게 말했다.
상우가 돌아설 때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자줏빛 외투의 여인과 눈이 잠깐 마주쳤다. 여인에게서 분 냄새가 났다. 여인은 고개를 숙여 눈길을 피했다. 상우는 여인을 스치고 지나쳐 면회소로 발길을 옮겼다.
면회소 안에는 4인용 탁자가 좌우로 열을 지어 놓여 있었다. 탁자 세 개는 이미 면회객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상우는 구석의 빈 탁자에 앉았다. 잠시 후 자줏빛 외투의 여인이 들어왔다. 그 여인은 상우의 앞쪽에 앉았다. 상우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금 전의 화장품 냄새를 떠올리며 김중사를 기다렸다.
*
김주은 중사, 그는 일 중대 삼 소대의 선임하사다.
고향이 문경이라 했다. 공고를 졸업하고 주물공장에서 일을 하다 입대한 그는 재워주고 먹여주고 게다가 월급까지 주는 군대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는 좀처럼 가족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명절이 되어도 고향에 갈 생각도 않고 부대에 남아 소일을 했다.
상우의 눈에 비친 김중사는 좀처럼 가만히 있는 법이 없었다. 며칠 동안 땡볕에서 웃통을 벗고 대패질과 망치질을 하던 그는 소대의 총기 거치대를 만들어냈다. 고물상에서 주워온 몇 개의 파이프는 그의 손을 거치자 텔레비전대로 변신했다.
상우와 동호가 소대로 전입하던 날, 김중사는 둘을 앉혀놓고 이야기를 했다.
“조금 고생은 될 거다. 부모님 생각하며 견뎌라. 그렇게 조금만 세월을 보내면 이곳 생활이 몸에 익을 거다. 그러면 곧 제대할 날이 온다.”
검은 피부에 흰 이를 드러내고 김중사가 말했다. 잔잔히 웃음을 지을 때 눈가에 잔주름이 잡혔다.
삼 소대 소대장은 제대가 얼마 남지 않은 ROTC출신의 중위였다. 그는 소대 일의 대부분을 김중사에게 맡겼다.
김중사는 소대장의 지시를 무리 없이 수행했다. 오히려 소대장보다 더 효과적으로 소대를 이끌었다. 소대원들은 소대장보다는 김중사와 더 친밀감이 높았다. 그는 병사들에게 엄한 아버지이자 다정한 친구였다.
상우가 일병 진급을 앞둔 어느 날, 김중사가 소대의 선임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들었다.
“선임하사라는 직책은 참 애매한 직책이야. 처음 군에 들어온 졸병들에게 다가서기 어려운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그 병사가 군 생활에 적응이 되어 제대할 무렵이면 친한 친구가 되거든. 그러면 그 친구는 떠나고 또 다른 누군가를 맞아 다시 이 과정을 반복하지.”
상우도 이 과정을 그대로 거쳤다. 상우는 상병 때 분대장 교육을 들어갔다. 4주간의 교육을 받고 하사 계급장을 달고 돌아온 상우는 초록색의 견장을 하고 분대장 역할을 수행했다.
김중사와 상우의 관계는 상우가 일반병이었을 때보다 더욱 가까워졌다. 휴일이면 김중사는 상우와 함께 종종 외출을 하곤 했다.
그때 상우는 알았다. 김중사에게 애인이 있다는 것을.
그녀는 다방 종업원이었다. 김중사가 그녀에 대해 자세한 것은 이야기해 주지 않아 알 수는 없었으나, 전방 부대 인근에 있는 다방 종업원의 신산한 인생 역정은 대충 짐작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겉모습에서 그러한 고생의 흔적은 쉽게 발견하기가 어려웠다. 그녀는 쾌활한 여자였다. 가슴 속의 상처를 숨기려는 과장된 행동인지는 알 수 없어도 그녀는 작은 일에도 소리를 내어 깔깔거리며 웃었다.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웃음이었다. 여자가 웃으면 김중사는 그녀를 보고 연신 싱글거렸다. 그럴 때의 김중사의 표정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그 무렵, 일 소대의 선임하사인 안중사가 결혼을 했다. 안중사의 결혼식에 다녀온 김중사는 상우에게 그녀와의 결혼 계획을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군인은 결혼하는데 비용이 그리 많이 들지 않는다. 결혼식이야 군인회관에서 하면 되고 예복이야 군정복을 입으면 된다. 초대해야 할 가족도 그리 많지 않아 걱정이 없다고 김중사는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결혼 후 생활할 군인아파트 입주신청서를 보여 주었다.
상우는 행복해하는 김중사를 보며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런 김중사의 모습은 며칠을 가지 못했다. 무슨 고민이 있는지 전과 달리 축 처진 모습을 보였고, 술에 취해 돌아오는 날이 많아졌다.
소대원들은 그런 김중사를 보며 불안해했고, 상우 역시 김중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아침, 부대가 소란스러웠다. 헌병차가 부대로 들이닥쳤고, 헌병들이 중대 본부를 차지했다.
사태의 전말은 곧 밝혀졌다. 김중사가 민가에서 소를 훔치다 잡혔다는 것이었다. 술에 취한 김중사가 소를 훔치려다 발각이 되었고, 도망가다가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붙잡히었고, 경찰을 거쳐 헌병대에 인계되었다.
그리고 김중사의 고민도 알려졌다. 김중사의 애인에게 빚이 있었다. 결혼을 결심하고 그녀에게 결혼 이야기를 꺼내자 그녀가 울며 김중사에게 다방 주인에게 진 빚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김중사의 월급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액수였다.
돈이 필요한 것도 안다. 간절했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소를 훔치다니. 그것도 술을 마시고서.
상우는 안타까웠다. 김중사가 비록 술을 마셨지만 그렇게 사리판단도 못할 사람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김중사를 만나 도대체 왜 그랬냐고 멱살잡이라도 하고 싶었다.
헌병 지프차를 타고 김중사는 부대를 떠났다. 그날 이후 상우는 김중사를 본 적이 없었다.
김중사의 소식을 다시 들은 것은 상우가 제대를 한 이후였다. 휴가 나온 군 후배들에게 김중사의 소식을 들었다. 김중사는 군사재판에 넘겨졌고, 1년의 징역형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김중사가 없다고 부대가 돌아가지 않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단지 김중사의 생각에 며칠 우울한 나날을 보냈을 뿐이었다. 새로운 선임하사가 부임했다. 처음에 그와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곧 그의 스타일에 젖어 시간은 흘러갔다. 그리고 제대를 2개월 앞두고 또 한 사건이 상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우의 분대가 후방 매복을 나갔다. 매복지는 민통선 후방, 산에서 민가로 이어지는 길목이었다. 매복은 분대원들이 매복지에서 은신한 채, 밤새 거동 수상자가 있나 감시하다가 날이 밝기 전에 매복지에서 빠져나와 부대로 복귀하면 되는 것이었다.
매복지에 도착한 분대원들은 두 명씩 짝을 이루어 각자 정해진 곳으로 들어갔다. 밤이 깊어 갔다. 한참 졸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상우의 매복지로 신동호 병장이 찾아왔다. 신병장은 상우의 분대원이었다. 며칠 전에 아내가 아프다고 연락이 왔는데, 아내의 근황이 염려된다고, 근처 가게에 가서 전화 좀 하고 오겠다는 것이었다.
매복에 있어 매복지 이탈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동기인 신병장의 청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찜찜한 기분은 어쩔 수 없었지만 별일이야 있겠냐 싶어 상우는 마지못해 허락을 했다.
신병장은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매복지를 벗어났다.
얼마나 지났을까? 시간의 흐름도 잊어버리고 밤하늘 별의 운행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을 때, 신병장이 사색이 되어 상우의 매복지로 찾아왔다.
“어떡하지, 분대장?”
신병장은 숨을 헐떡이며 밑도 끝도 없는 말을 했다.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었어?”
상우도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예감했다. 그리고 그 일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신병장의 표정으로 익히 알 수 있었다.
“가게 앞에서 이 소대장을 만났어. 그가 우리 분대가 매복 서는것을 알고 있더라구. 내일 아침에 보자구 하고 갔는데 아무래도 무슨 사단이 날 것 같아.”
신병장은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상우도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매복지 이탈은 최소가 영창이다.
“어쩔 수 없잖아, 될 대로 되겠지.”
상우는 신병장을 돌려보내고 밤새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그려 보았다. 한결같이 좋지 않은 그림만 그려졌다. 육사 출신의 이 소대장이 이 사건을 그대로 넘어갈 리가 없었다. 그에게 규율이란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지켜야 될 절대 원칙이었다. 밤은 지루하게 길었다.
날이 밝아 부대로 복귀한 분대원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상우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중대 본부 앞에 집합한 상우의 분대원들은 노기에 찬 중대장의 목소리를 들었다. 중대장은 그들에게 완전군장 구보를 명령했다. 상우의 분대원들은 완전군장으로 하루 종일 연병장을 돌았다.
이튿날 상우와 신병장은 대대 군기교육대로 보내졌다. 영창을 가지 않아 다행이라고 자위하면서 그들은 군기교육대로 갔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이 소대장이 영창에 보내는 것을 반대했다 한다. 의외였다. 제대가 얼마 남지 않은 병사들을 영창에 보내 그들의 군기록에 오점을 남기게 하지 말자고 중대장에게 호소했다고 한다. 중대장도 상우와 신병장이 군생활에 충실히 해 온 점을 고려해서 이 소대장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군기교육대의 하루는 길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체벌을 다 경험한 것 같았다. 군 생활 중 가장 가혹한 일주일이었다.
군기교육대에서나 그 이후 소대에서나 신병장은 상우에게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했다. 상우와 눈이 마주치는 것조차 피할 정도였다. 상우는 그런 신병장이 도리어 안쓰러웠다.
“야, 신병장. 그러지 마라. 내가 더 미안해진다. 영창도 안 갔고, 모든 게 잘 끝났잖아.”
상우에게 신병장은 소중한 동기였다.
입대 전, 봉제공장에서 일하던 신동호은 친구의 소개로 한 여자를 만났다. 염색공장에서 사무를 보던 여자였다. 객지에서 살던 그들은 동거를 시작했고, 신동호가 입영통지서를 받고 그들은 혼인신고를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상우는 그녀의 용기에 탄복했다. 그러나 상우는 신동호가 부럽지는 않았다. 사랑하는 여인도 없거니와 결혼은 상우에게 아직 현실감 있게 단어가 아니었다.
입대 후, 딸아이가 태어났다. 신일병은 관물대에 딸애의 사진을 붙였다. 신상병, 신병장으로 신동호의 계급이 바뀌고 딸애의 사진도 배냇저고리를 입고 자고 있던 모습에서 유아복을 입고 배시시 웃고 있는 아이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슬픔은 파도처럼 겹쳐서 밀려오는 모양이다. 신병장 아내의 상태는 좋아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신병장에게 아내의 죽음 소식이 전해진 것은 군기교육대를 갔다 온 지 이 주일 후였다.
시뻘건 눈으로 총총히 부대 문을 나서던 신병장은 일주일 후에 말을 잊은 채 돌아왔다.
며칠 후 신병장은 의가사제대를 했다. 상우는 신병장의 손을 잡았다. 어떤 말을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머뭇거린 후에 고작 한다는 말이 힘내, 또 만나자, 였다.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라고 신병장이 말을 받았다.
그렇게 신병장은 떠났다. 한 달이 조금 지난 후 상우는 제대를 했다. 전역 신고를 마치고 그는 홀로 버스를 타고 시외버스터미널로 왔다.
시외버스터미널에는 제대 군인들이 몇 명씩 무리를 지어 웅성거리고 있었다. 상우는 이곳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이 년여의 시간 동안 상우가 이 터미널을 혼자의 몸으로 온 적은 거의 없었다. 입대 동기인 까닭에 정기 휴가는 늘 동호와 함께였다. 가족을 보러 간다는 기대감에 한껏 부푼 동호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 상우는 기분이 좋았다.
의가사제대를 했을 때, 혼자 이 터미널을 서성이며 신병장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상우는 혼자 터미널 의자에 앉아 버스를 기다렸다. 갑자기 김중사가 보고 싶었다. 그동안 너무 오래 잊고 있었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버스가 왔다. 이제 사람은 없고, 신병장 그리고 김중사에 대한 기억만 간직한 채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대 후, 신병장에게 연락이 닿지 않았다. 간혹 만나는 군동기나 후배들은 신병장이 아이는 형님에게 맡기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공사장에서 일을 한다는 소식을 상우에게 전해주었다. 김중사의 징역 소식도 그때 알았다.
군대에서 맺어졌던 인연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모두 끊어졌다. 더 이상 신병장과 김중사의 소식도 알 수가 없었다.
상우는 대학에 복학을 했고, 군생활은 술자리의 이야깃거리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그것마저 시들해질 즈음 상우는 대학을 졸업했다.
몇 년 후, 직장생활에 웬만큼 적응할 무렵에 상우는 신문에 실린 조그만한 기사를 보았다.
‘철원 한탄강에서 자살로 추정되는 남녀의 변사체가 발견’
신문에서는 신원불명이라 하였다. 그러나 상우는 그 기사를 보는 순간 그들이 김중사와 그의 애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원의 군대가 생각이 났다. 그리고 땡볕 아래에서 웃통을 벗고 바벨을 들고 있던 김중사가 떠올랐다. 그는 구릿빛 땀을 흘리고 흰 이빨을 드러내고 웃고 있었다.
*
김중사는 오지 않았다. 올 리가 만무했다. 자줏빛 외투의 여인이 기다리던 병사도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여자가 일어나 면회소를 나섰다. 상우도 일어났다. 상우가 면회소를 나섰을 때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부대의 긴 담을 끼고 걸었을 때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둘은 같은 버스를 타고 시외버스터미널로 돌아왔다.
여자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상우의 앞을 지나쳐 철원군청 쪽으로 걸어갔다. 상우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찬바람이 불어왔다. 모퉁이를 돌아섰는지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상우는 대합실 의자에 잠시 망연하게 앉아 있었다. 십 년만에 철원을 찾았다. 허나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다시 철원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상우는 허망함을 느꼈다.
상우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별로 멀지 않은 삼부연 폭포나 한번 보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철원군청 앞길은 신철원에서 가장 사람의 왕래가 많은 도로이지만, 지금은 얼굴까지 꽁꽁 동여맨 한두 사람만이 종종걸음으로 상우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적막감이 흐르는 겨울길을 상우는 걸었다. 바람이 귓불을 얼렸다. 괜한 걸음을 했구나 하는 후회가 들 즈음에 눈앞에 폭포가 나타났다.
그리고 낯익은 모습. 자줏빛 외투의 여인이 폭포 앞, 도로변에 세워 놓은 폭포 안내문을 읽고 있었다.
상우도 여자의 옆에 서서 안내문을 읽었다.
명성산 심산유곡에서 발원한 맑고 깨끗한 계곡수가 20M 높이의 기암절벽 사이로 세 번 꺾어지며 떨어져 장관을 이루는 삼부연 폭포는 신비한 전설과 함께 주변 경관이 수려하여 예로부터 시인, 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승지로 철원 팔경의 하나이다.
궁예가 철원의 풍천원에 도읍을 정할 당시 이곳에서 도를 닦던 4마리(두쌍)의 이무기 가운데 3마리만 폭포의 기암을 각각 뚫고 용으로 승천하였으며 그때 생긴 혈현(血淵)이 가마솥 모양 같다 하여 삼부연(三釜淵)이라 명명되었고 그 후 마을 이름도 용화동(龍華洞)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때 시기를 놓쳐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심술을 부려 비를 못 오게 한다 하여 가뭄이 심할 때는 이 삼부연 폭포 밑에서 제물을 차려놓고 기우제를 지내고 대풍을 기원하였던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참 친절하지 못한 전설이네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우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자신과 여자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상우가 말을 받았다.
“그러게요, 나도 예전에 그런 생각을 했는데...”
“왜 한 마리는 승천하지 않고 남았을까요?”
여자는 안내문을 응시한 채 혼잣말처럼 나직이 말했다.
“이 땅에 무슨 미련이 있었을까요?”
상우가 되물었다.
“미련이라...”
여자가 말끝을 흐렸다.
여자가 안내문 앞을 떠나 난간에 몸을 기대고 폭포를 바라보았다.
폭포는 바위틈을 가르고 그 사이로 거대한 물길을 내었다. 폭포의 낙하는 얼음의 표피를 두르고 그 속으로 물을 흘러 내리고 있었다. 낙하물을 받아들이는 소는 새파란 물색이 드러나 있었다.
“한 마리 남은 이무기는 아직도 여기에 있을까요?”
여자의 목소리였다. 물색으로 보아서는 충분히 이무기가 살 만한 곳이라 느껴졌다.
“아마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을 거예요. 차마 버리고 떠날 수 없는...”
상우는 상대가 없는 대화를 혼자서 이어갔다.
“지금도 그 연인의 곁을 지키고 있을 거예요.”
명성산의 그림자가 슬금슬금 여자에게 다가가 기어이 그녀를 산그늘 속으로 가두었다.
*
여자는 작년에 무엇에 이끌리듯 이곳을 찾아왔는데 올해도 오늘, 면회를 오고 말았다. 면회소에 앉아 여자는 출입구로 들어오는 병사들을 하나씩 눈여겨보았다. 기다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제 면회소 안은 거의 빈자리를 찾을 수가 없다. 탁자 위에 푸짐한 음식이 차려진 곳은 대개가 가족이 면회를 온 경우이고, 음료수를 사이에 두고 바짝 붙어 앉은 경우는 연인들이었다. 병사들은 그들에게서 세상의 냄새를 맡고 싶어 했다.
여자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세시가 조금 넘었다. 이곳에 들어온 지 두 시간이 넘었다. 여자는 일어설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그러나 여자는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하였다.
여자가 남자에게 이별을 알렸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고2 때 만났으니, 너무 오래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훈련소 앞에서 남자가 여자의 손을 잡고 웃었다.
“야, 이 년은 금방 간다. 재미있게 놀고 있어라.”
남자의 말대로 여자는 재미있게 놀았다. 남자가 없어도 불편하거나 쓸쓸하지 않았다. 여자는 남자가 가슴에 사무친 사람이 아님을 느꼈다.
남자가 입대한 지 일 년이 되어갔다. 다른 남자를 만났다. 여자는 다른 남자를 만날 때마다 드는 죄책감 같은 찝찝한 감정이 싫었다.
편지를 썼다. 한 면도 채우지 못한 짧은 편지였다. 다른 남자가 생겼다는 내용이었다. 이 편지가 너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 같다는 글귀로 편지를 마쳤다. 남자에게서는 아무런 답장이 오지 않았다. 여자는 끝이라고 생각했다.
며칠이 지난 밤, 오빠가 현관문을 들어서며 거실에 있는 여자에게 말했다.
“골목 앞에 웬 군인이 서성거리던데 혹시 군대 갔다던 니 친구 아냐?”
여자는 창문을 열고 골목 어귀를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그날 밤 여자는 꿈을 꾸었다. 두서없이 이어진 꿈속에서 그녀는 남자를 본 듯했다. 남자의 표정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가 힘겹게 입을 벌려 한 말을 그녀는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음날 여자는 오빠에게 물었다.
“오빠, 어젯밤에 진짜 군인 봤어?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 나는 니 친군가 했지.”
여자는 찜찜한 기분으로 며칠을 보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잊히는 듯했다.
여자가 남자의 죽음을 안 것은 몇 달이 지난 후였다.
“너 그거 아니? 예전에 너랑 사궜던 그 애. 걔 죽었대. 아마 자살이라지. 군대생활 부적응이라나.”
그녀의 친구는 남자를 알고 있는 자신의 친구에게서 들은 이야기라고 조잘거렸다.
오빠가 골목 어귀에서 군인을 본 날이 남자가 죽은 날일까?
그것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여자는 그 군인이 죽은 남자라고 믿었다. 여자는 두렵기보다는 죽어서라도 먼 길을 온 그에게 한 마디도 못 한 그것이 미안했다.
이듬해 겨울, 추위 속에서 떨고 있던 군인이 생각이 났다. 그리고 꿈에 나타난 그가 하고 싶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 여자는 면회를 갔다.
아직도 미안하다는 말을 못 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이 연례행사가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여자는 남자가 아직 이 땅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으리라고 여겼다. 단지 여자가 너무 미안해할까 봐 아직 여자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그렇게 굳게 믿고 있었다.
*
왜 그랬어요?
상우가 푸른 옷의 군인에게 묻는다.
글쎄, 왜 그랬지? 아마 같이 있고 싶었겠지.
푸른 옷의 군인이 대답한다.
그렇다고 그런 일을 하면 어떡해?
여자의 목소리가 떨린다.
미안해. 다른 방법이 생각이 안 났어.
푸른 옷의 군인이 진정 미안한 표정으로 대답을 한다.
묻고 싶은 말이 있었어요.
상우가 말한다.
한탄강의 그 기사, 김중사님이 아니죠? 김중사님 살아있죠?
푸른 옷의 군인은 답이 없다.
그때 골목에 있던 게 너야? 맞아? 아니지. 아니지?
여자의 목소리는 이제 애원조다.
푸른 옷의 군인은 답이 없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요.
상우가 말한다.
바보야, 나는 어떻게 살라구 그런 짓을 해.
여자가 울부짖듯 말한다.
여자의 울음은 여울이 되어 황혼의 그늘 속을 떠다닌다.
*
시외버스터미널로 돌아오는 동안 둘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여자가 앞장서 걸어갔고, 남자가 2~3미터 뒤에서 걸었다.
삼부연 폭포에서 시외버스터미널까지는 30분 정도의 거리이다.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상우는 대합실 좌석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저녁 식사라도 하고 가시죠?”
여자가 시계를 보더니 일어섰다.
“뭐 드시겠어요?”
“맛있는 거 사 주세요.”
건조한 목소리로 여자가 말했다.
상우가 앞장서 터미널 옆의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부대찌개가 맛있는 음식인지는 어쩐지는 모르겠으나,
“부대찌개 어떠세요?”
하고 물었을 때 여자는
“좋아요”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술을 시켰다.
술이 먼저 나왔다. 상우는 여자의 술잔에 술을 채웠다. 여자가 상우의 술잔에 술을 채웠다.
여자가 물었다.
“면회온 사람 못 만났나 봐요?”
“네, 훈련 나갔대요. 항시 바쁜 사람이라...”
“나도 그런대...”
여자가 소주를 입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만나러 온 사람이 애인이에요?”
상우가 물었다.
“애인이요? 네 맞아요. 나를 사랑한 애인.”
“그쪽은요? 그쪽은 사랑했어요?”
“나요? 그건 몰라요. 나는 아직 사랑이 어떤 감정인지 잘 모르겠어요.”
여자가 다시 술을 입으로 가져갔다.
음식이 나왔다. 대화는 잠시 중단되었다. 그러고 보니 점심을 굶었다. 상우는 허기진 배를 채웠다. 여자도 접시에 음식을 덜어서 조급하지 않게 천천히 수저질을 했다.
“그쪽은 누구 면회 왔어요?”
어느 정도 먹었는지 여자가 수저를 놓더니 상우에게 물었다.
“철원에 항상 남아 있는 사람이에요. 결코 떠날 수 없는.”
상우가 대답했다.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 같네요.”
여자가 말했다. 여자의 말을 들으니 김중사가 정말로 승천하지 못하고 남아 있는 한 마리 이무기처럼 느껴졌다.
“남아 있는 이무기 이야기해 주세요.”
“네?”
“아까 그랬잖아요. 사랑하는 연인이 있어 떠나지 못했을 거라구요.”
“아, 네에.”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다시 그에게로 돌아왔다.
“대부분 전설 속의 이야기가 그렇잖아요. 결정적 성공의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주저하고 그러다가 죽고 그래서 안타깝고 애틋하고...”
“전설만 그러한가요. 현실도 그렇죠.”
여자의 술잔은 비어 있었다. 상우가 여자의 술잔에 술을 채웠다. 여자가 채워지는 술잔을 응시했다.
“잔에 흘러 들어가는 것이 꼭 눈물 같네요.”
여자의 말이 넋두리처럼 들렸다.
“남자가 있었어요. 그냥 이무기라고 할게요.”
술병을 탁자에 놓으며 상우는 말을 이었다.
“조금만 있으면 하늘의 문이 열려 승천을 할 수 있지요. 이무기에게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어요. 이무기는 그 여인과 함께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하늘나라도 함께 가고 싶어했죠. 그녀가 없는 하늘나라는 상상도 할 수가 없었어요. 이무기는 고민하다가 같이 공부하던 이무기의 승천 옷을 훔쳤어요. 하지만 그것은 곧 발각이 되었지요. 그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였어요. 감히 승천 옷을 훔치다니... 노한 이무기들은 지하의 사신에게 그 여인을 잡아 가두도록 부탁을 했지요. 여인은 구천의 땅 밑으로 끌려 들어갔지요. 자신을 사랑한 죄밖에 없는 그녀가 자기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음을 생각하면 이무기는 미칠 것만 같았어요. 승천의 날이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이무기는 그녀를 구하러 지하세계로 들어갔지요. 그것이 죽음의 길이라도 이무기는 가야만 했어요. 그러나 그곳은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곳. 아마 지금도 저 깊은 지하세계에서 그녀를 구하고자 노력하고 있지 않을까요?”
상우는 순간적으로 이야기를 지어냈다. 말을 하고 나니 그 이야기는 김중사와 신동호의 이야기가 기묘하게 합쳐진 이야기 같았다.
“무슨 신화 같네요.”
“그러게요. 아까 그랬잖아요, 우리 사는 현실이 전설이고, 신화 같다고.”
“이무기는 아직까지 못 만났겠죠? 그녀를.”
상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못 만나겠죠.”
여자의 목소리에서 축축한 술기운이 전해졌다.
상우는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자는 상우의 시선을 외면하고 초점 없는 눈길로 창문 너머를 응시하고 있었다.
상우는 여자의 사연이 궁금했다. 면회 온 남자 이야기를 더 해 달라고 부탁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녀의 사연이 나의 사연이나 무엇이 다르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이 창문을 울렸다. 멀리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인 듯했다.
식당의 한구석에 설치된 텔레비전에서는 인파로 넘실대는 도심의 연말 정경을 내보내고 있었다. 건너편 식탁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일어서 식당 문을 나섰다.
식당 안의 손님은 상우와 여자뿐이었다. 상우가 술잔을 들자 여자도 잔을 들었다. 잔을 놓고 그들은 메마른 안주를 뒤척였다.
구석에서 텔레비전을 보던 푸짐한 몸집의 식당 여주인이 곁눈으로 그들을 훔쳐보았다. 그 눈길에서 어서 나가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상우는 느낄 수 있었다.
철원의 하루는 일찍 끝난다. 인적이 끊긴 거리를 걸어 그들은 시외버스터미널로 돌아왔다.
터미널 매표소의 창구는 닫혀 있었다.
서울로 가는 버스는 9시가 막차였다. 막차가 떠난 지 한참 되었다.
“어떡하죠?”
불 꺼진 창구 앞에서 상우가 걱정스레 말했다.
“걱정말아요.”
여자가 돌아서서 터미널 밖으로 나갔다.
“저녁 고마웠어요.”
잠시 돌아서 인사를 하고 여자는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상우는 여자를 잡지 않았다. 잡지 말라고 여자의 뒷모습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상우는 어두운 터미널 매표소 안에 멍하니 서 있었다. 또 혼자였다. 제대를 하던 그날처럼 철원을 떠나던 때는 늘 혼자였다. 심한 외로움인지 추위인지 몸이 으스스 떨렸다.
잠시 눈길을 밖으로 돌렸다. 여자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순간 그녀도 철원을 떠나지 못하는 이무기가 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밀려왔다.
상우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리저리 훑어보아도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상우는 어둠을 헤치고 달리기 시작했다. 마치 지하세계에 갇힌 여자를 구하러 가는 한 마리의 이무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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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정열
2022년 강원문학 신인상 ‘보한재몽유록’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