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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31일 사순 제4주일
제1독서 : 여호 5,9ㄱㄴ.10-12
제2독서 : 2코린 5,17-21
복 음 : 루카 15,1-3.11ㄴ-32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
-예수님처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은 사순 제4주일, 라틴어로 Laetare(래타레), ‘기뻐하라’ 주일입니다.
제의 색깔도 기쁨을 상징하는 분홍색 장미꽃 색깔입니다. 그러니 기뻐하십시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 보이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필립4,4-5), 말씀도 생각납니다.
이제 사순시기도 막바지입니다.
사실 사순시기는 어둡고 무겁게, 침통하고 심각하게 지내는 시기가 아니라
부활의 기쁨을 앞당겨 밝고 기쁘게 지내는 시기입니다.
자제, 절제, 극기의 수행 중에도 우리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분도 규칙서 긴 책에도 기쁨이란 말마디가 단 두 번 나오는데 사순절을 지킴에 대한 장에서입니다.
“각자는 성령의 기쁨을 가지고 자기에게 정해진 분량 이상의 어떤 것을 하느님께 바칠 것이다.
즉, 자기 육체에 음식과 음료와 잠과 말과 농담을 줄이고
영적 갈망의 기쁨으로 거룩한 부활 축일을 기다릴 것이다.”(성규49,6-7).
방금 흥겹게 부른 화답송 후렴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보고 맛 들여라.”
시편 역시 오늘의 기쁨을 북돋우는 내용이었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무슨 맛으로 살아갑니까? 저는 주님 사랑 맛으로 살아갑니다.
저뿐 아니라 여기 하느님만을 찾는 수사님들 주님 사랑 맛으로 살아갑니다.
주님을 맛 들여야 세상맛에서 초연하여 참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어제 아침 날씨는 어둡고 흐렸습니다.
아침 산책 중 샛노란 수선화 꽃 몇 송이를 보는 순간 마음이 환해지는 듯 써놓은 글을 나눕니다.
-세상 어둡다 탓하지 않는다
나부터/빛 되어/꽃 되어 산다
흐린 날씨/봄 되자/피어난 샛노란 수선화 몇 송이
아침이 환하다/세상이 환하다-
이렇게 세상 어둡다 탓하지 않고 나부터 빛 되어, 꽃 되어 사는 내적혁명의 사람들이 진짜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이런 빛 되어 꽃 되어 사는 이들이 하나 둘---늘어남에 따라 세상도 밝아지기 마련입니다.
제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하는 영어 말마디
“As you are, so is the world”(당신 정도만큼의 세상이다)입니다.
새벽 휴게실에 들렸다가 작은 메모지의 짧은 글 내용도 참신했습니다.
“수사님! 제게 방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맘 편히 행복하게 머물다 갑니다.
이곳에 있다 보니 그간 제가 온전한 맘으로 주님을 따르지 못하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순리대로 산다는 것이 쉽진 않지만 그리 해보려 합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돌아갑니다.”
우리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행복합니다.
돌아갈 하느님 아버지의 집이, 부를 수 있는 하느님 아버지란 이름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집나간 아들이 곤궁 중에 떠올랐던 곳은 따뜻한 보금자리 바로 아버지의 품 같은 집이었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집에 살면서도 얼마나 행복한지, 또 참으로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몰랐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상징하는 수도원이요 성당입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하느님 아버지는 우리를 위해 참 좋은 미사잔치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참 좋은 주님은 험한 세상에서 힘겹고 고단하고 고달프게 살아 온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시고자 미사잔치에 우리를 초대해 주셨습니다. 마침 얼마 전 써놓은 글 서두 내용입니다.
-어둡고 흐리고 춥다
미세먼지로 공기도 상당히 나쁘단다
요즘 세상 같다
사람도 날도 사악해져가는 것 같다
많이 거칠고 사납다
어려서부터 보고 배울 인성이지 가르쳐서 되는 인성이 아니다
모두가 가엾고 불쌍타
너나할 것 없이 참 힘겹고 고단하고 고달프게 살아간다
참 중요한 일이 자기를 지키는 일이다
존엄한 품위의 사람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거다-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입니다.
자비로운 아버지를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신 평생과제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이 거룩한 평생과제에서 면제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바로 자비하신 아버지의 진면목이 오늘 복음의 회개하여 돌아 온
작은 아들을 위한 큰 잔치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흡사 작은 아들처럼 세상에서 고단하고 고달프게 살다가 회개하여
미사잔치에 참여한 우리와 아버지의 대화처럼 들립니다.
자비하신 아버지의 환대에 감격한 작은 아들의 진솔한 고백은 그대로 우리 모두의 고백입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이어지는 자비하신 아버지의 말씀은 복음의 작은 아들은 물론 미사잔치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합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작은 아들처럼 자비하신 아버지가 베풀어 주신 이 거룩한 미사잔치의 은혜로
아버지의 자녀로서의 존엄한 품위를 회복한 우리들입니다.
회개한 영혼의 과거를 불문에 붙이시는 주님이십니다.
과거는 지났고 이제부터 자녀답게 사는 길뿐입니다.
문제는 아버지의 집에 살던 큰 아들입니다. 큰 아들의 불만도, 섭섭함도 이해가 됩니다.
정말 자기를 아는 자는 작은 아들도, 큰 아들도 탓하지 않습니다.
바로 작은 아들, 큰 아들 역시 내 부정적 어둔 내면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큰 아들에 대한 자비하신 아버지의 모습 또한 감동입니다.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라는 말도 있듯이 당신의 자녀들 이기는 하느님도 없습니다.
큰 아들에게 호소하시는 아버지의 겸손한 사랑이요 무능할 정도로 전능한 사랑의 아버지입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역시 큰 아들을 회개에로 초대하는 아버지의 자상한 호소이자 권고입니다.
바로 우리 수도자들이 저녁 성무일도 마리아의 노래 후렴으로 바쳤던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에 큰 아들의 반응은 없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의도 하는바 우리 모두의 회개입니다.
작은 아들은 물론 큰 아들처럼 본의 아니게 위선적 삶을 살았던 모든 이들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제가 보기에 큰 아들은 아버지의 설득에 회개하여 작은 아들과 함께 즐거운 잔치에 참석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제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삶입니다. 회개하여 날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배우는 것입니다.
평생 배워야 할 공부가 하느님 자비의 공부입니다.
오늘 복음도 회개를 통한 새로운 시작을,
제1독서의 여호수아서도, 제2독서의 코린토 2서 말씀도 새로운 시작을 말합니다.
고단하고 고달팠던 광야여정을 끝내고 하느님의 백성은 약속된 땅에 들어가서
파스카 축제를 지내는 여호수아서의 모습이 바로 새 출발을 앞둔
파스카 미사잔치에 참여한 우리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 역시 우리 모두 새롭게 시작할 것은 간곡히 당부합니다.
“형제 여러분,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과거는 지나갔고 오직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아버지의 자녀답게 살면 됩니다.
하느님 아버지가 보시는 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오늘 지금 여기서 아버지의 자녀답게 사는 모습입니다.
이어지는 바오로 사도의 간곡한 권고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권고하십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하느님과 화해하여 아버지의 자녀로 거듭 새롭게 태어나는 이 거룩한 미사잔치시간입니다.
잃었던 자녀로서의 품위를 회복시켜 주는 미사은총입니다.
하여 그리스도의 사절로, 화해의 일꾼으로 세상에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얼마 전 내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형제에게 드린 격려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기고 오늘 하루 충실히!
하루하루 오늘 여기서 최선을 다해 믿고 살면, 주님은 분명 참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제가 자주 고백성사 보속 시 처방전으로 써드리는,
“지나간 일을 생각하지 마라. 흘러간 일에 마음을 묶어두지 마라.
보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시작하였다”라는 이사야서 말씀도 생각납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회개한 우리들이 새롭게 시작할 일은
작은 아들이, 큰 아들이 아닌 아버지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자비하신 아버지처럼 작은 아들 같은, 또는 큰 아들 같은 이들을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꼭 회개하여 용서가 아니라 용서의 사랑에 항구할 때, 때가 되면 회개하겠기 때문입니다.
작은 아들을 회개에로 이끈 것도, 큰 아들을 회개에로 이끈 것도
자비로운 아버지의 사랑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을 제가 다시 쓴다면 큰 아들과 작은 아들 사이에 둘째 아들을 넣고 싶습니다.
묵묵히 아버지를 닮아 큰 형과 작은 동생을 품에 안았던 자비로웠던 둘째 아들 예수님입니다.
아마 예수님은 오늘 복음을 쓰면서 자신을 큰 형과 작은 아우를 보완할 둘째 아들로 여겼음이 분명합니다.
참으로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은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답은 분명해졌습니다.
자비하신 아버지는, 아버지의 자녀다운 삶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이 그 빛나는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참 아드님 예수님을 닮아갈 때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아 비로소 아버지의 자녀다운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예수님을 닮아 품위 있는 아버지의 자녀답게 살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닮게 하는 행복기도문 중 한 연을 나눔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생명/저의 사랑/저의 기쁨/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선물의 하루이옵니다.- 아멘.
아버지의 비유
류해욱 요셉 신부
사순 제 4 주일을 맞으며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아는 소위 ‘탕자의 비유’로 불렸던 복음을 듣습니다.
이 복음에서 보다 중심적인 주제는 탕자의 회심보다는 아버지의 사랑이기 때문에 보다
올바른 제목은 사랑이신 ‘아버지의 비유’입니다.
‘사랑이신 아버지’의 비유를 통해 참으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하느님 안에 깊이 머물면서 침묵을 지키면서 기도하는 피정의 체험이 있으신 분들은
아마도 이 비유를 묵상하신 경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복음서의 내용 모두가 그렇지만 특히 이 비유 이야기는 단순히 그냥 읽어내려 갈 것이 아니라
천천히 읽고 깊이 음미해야 예수님이 비유로 들려주시는 그분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마치 고요한 숲 속 길을 산책하면서 숲 속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들에 귀를 기울이고
들꽃의 향기에 취하면서 천천히 걷듯이 그렇게 읽어야 합니다.
천천히 한 낱말씩 읽어나가면서 어떤 낱말이나 구절에 마음이 이끌리면 멈추어 서서
숲의 향기를 음미하듯이 멈추고 음미해야 합니다.
독일 예수회원으로 한국에 와서 강연회를 했던 빌리 람베르트라는 신부가 쓴
‘오라 그리고 가라’라는 책이 있는데 그 신부님이 그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신부님이 이렇게 질문을 한답니다.
이 비유 이야기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이라는 문장이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아십니까?
여러분들 조금 전에 들었는데 기억하시고 계십니까? 말씀해 보세요?
“... 그리고 그에게 달려가...” “...그리고 그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등등의
대답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대답이랍니다.
그런데 정확한 답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를 보신 아버지는 먼저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우리말로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는 대목을 보다 원문에 가깝게 옮기면,
“깊은 연민을 느끼셨다.”로 옮길 수 있습니다.
‘측은한 마음’이나 ‘깊은 연민’이나 모두 ‘측은지심’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측은지심은 곧 자비심, 사랑의 마음입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은 인간을 측은히 여기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둘째 아들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사랑이신 아버지 하느님을 등지고 떠났던 삶, 죄의 삶, 타락과 죄의 결과는 소외와 고통이었지요.
소외와 고통을 체험했을 때야 비로소 인간은 사랑이신 아버지 하느님께로 향하게 됩니다.
그 때 아버지께서는 아무런 질책을 하지 않으시고 받아주십니다.
아니, 오히려 멀리서부터 기다리고 계시다가 버선발로 뛰어나가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시는 분이십니다.
다른 한편의 우리들의 모습은 바로 큰아들입니다.
돌아온 동생은 반기기는 고사하고 아버지가 잔치를 벌였다는 소식을 듣고
화가 나서 집에 들어오려고 하지 않지요.
아버지가 나가서 달래자, 큰아들인 자기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 도 잡아주지 않았다고 불평하면서 투덜거립니다.
겉으로 볼 때 그는 착실한 아들이지요.
일 년 내내 아버지를 도와 뼈 빠지게 일하고 아버지에게 순종하면서 살았지요.
그러나 그는 그것을 기쁘게 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냥 의무로서 했던 것이고 내면에는 부정적인 감정이 가득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나의 동생’이라고 하지 않고 ‘여기 있는 당신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우리말 번역에는 그냥 ‘저 아들’이라고 옮겨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지만, 정확히 옮기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가장 원문에 가깝게 옮겼다는 NRSV 영어 번역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not my brother, but this son of yours”
동생을 동생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그는 동생이 아버지의 돈을 창녀들에게 빠져 다 탕진해 버렸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알았을까요? 소문으로이거나 추측이겠지요.
사실 더욱 서글픈 것은 그가 내내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아무 것도 베풀지 않았다고 느끼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낳아주고 길러주고 보살펴 준 부모의 은혜를 전혀 헤아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우리네 모습 아닙니까?
천만에 말씀이라고요?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요? 제발,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큰 아들에게 그 아버지는 왜 하실 말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다만, “애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라고 하시며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 온 셈이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것이니
어찌 기쁘지 않느냐고 하시며 함께 기쁨을 나누고 즐기자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참으로 기뻐하시는 분,
그리고 우리도 당신의 그 기쁨을 함께 나누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다시 한 번 하느님은 사랑이심을 깊이 마음에 새깁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자제력이 강한 사람도 있지만, 사실은 자제력이 부족한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선보다는 악을 선택하고,
미래의 안녕을 우선시하기보다는 현재의 쾌락을 추구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렇게 자제력이 부족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쉬운 선택만 하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올바른 행동이 따르는 선택을 하는 데는 많은 걸림돌이 따르기 때문에
순간의 만족을 가져다주는 쉬운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둘째,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대신 순간의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만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하는 것은 많지만, 내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셋째,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 몸이지만 자기 자신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어떤 고통과 시련이 따르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 쉽게 포기하고 좌절에 빠집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을 하느님께서는 나약하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면, 마라톤 선수들이 41Km에 이르면 속도가 더 빨라진다고 합니다.
너무 피곤하고 힘든 상황이어도 목표에 근접했다는 생각에 힘을 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내 자신을 제대로 알면 어떤 상황에서도 다시 힘을 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제력이 부족한 우리입니다.
그렇다면 자제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쉬운 선택이 아니라 어렵더라도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순간의 만족을 원하는 삶이 아닌, 내게 꼭 필요한 것을 찾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탕자의 비유 이야기입니다.
이 작은 아들은 자제력이 부족한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는 쉬운 선택을 위해서 아버지에게 미리 유산을 달라고 청하지요.
그리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방종한 생활을 하면서 재산을 낭비합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랑하는 아버지였습니다.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아버지를 찾아가서 용서를 청합니다.
사실 살아계신 아버지에게 유산을 청하는 행동은 용서받지 못할 죄입니다.
왜냐하면 유산은 돌아가신 부모에게 받는 것이기 때문에,
살아계신 부모에게 유산을 청하는 것은 빨리 죽기를 바라는 것과 똑같은 마음인 것입니다.
이런 상태였기에 그는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달라고 마음먹은 것입니다.
결과는 어떠했나요? 큰 죄를 아들이었지만 아버지는 기쁘게 맞이하며 잔치까지 벌입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 아버지께 희망을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고개 숙여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용서를 청하는 우리를 무조건 받아주십니다.
사랑받는 죄인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은 늘 행복의 원천이 됩니다.”
우리는 허물과 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기억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중성’을 지닐 때가 많습니다.
겉으로는 아닌 것처럼 지내다가도, 이해득실이 주어지면 속을 환히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집 나간 아들과 아버지 곁에 있던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집 나간 아들을 ‘못된 놈’으로 볼 수 있고,
아버지 곁에 있는 아들을 ‘효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그들의 속이 드러납니다.
작은아들은 자기의 몫으로 돌아올 유산을 미리 챙겨 방탕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챙길 수 있다는 것은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유산으로 받은 재산 모두를 잃기까지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몰랐습니다.
큰아들은 늘 아버지 곁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효자 중의 효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효자의 속을 들여 다 볼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왔습니다.
집을 나갔던 동생이 빈털터리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그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그야말로 집을 나간 놈인데 신경 쓸 것이 뭐 있겠습니까?
자기가 선택한 운명을 자기가 책임을 져야 마땅하지요!
그렇지만 아버지 품은 한없이 넓고 깊었습니다.
집을 나간 아들이 하루빨리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한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큰아들은 아버지가 베푸는 잔치를 거부하였습니다.
“저는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루카15,29-30)하며 속마음을 드러냈습니다.
아니, 언제 아버지가 아들을 종으로 여겼습니까?
자기 스스로 종이 되었지요. 부자관계를 종과 주인의 관계로 만든 것은 큰 아들자신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설득합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31-32)
큰 아들은 몸만 아버지와 함께 있고 마음은 콩밭에 가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언제나 나를 품고계십니다.
우리는 그 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큰아들이 잔치에 참여하였을까요?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큰아들 입장이라면 그 잔치에 기꺼이 참여하였을까요?
결국 구원의 문은 모두에게 여려 있으나 아무나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는 바로 우리 하느님이십니다. 크고, 넓고, 깊으신 우리의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잃어버렸던 아들이 바로 나의 모습이라면 얼마나 그분의 자비가 그리웠을까요?
불만이 많은 큰아들을 보고 “동생 하나 못 받아 주느냐? 속이 좁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나의 속은 얼마나 넓은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나를 챙기는 속을 보아야겠습니다.
작은아들이 밑바닥으로 한없이 떨어졌을 때 그 안에서 사랑의 아버지를 새롭게 발견하였고,
결국 아버지의 품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므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 반드시 실패 일 수는 없습니다.
또한 큰아들이 아버지 곁에서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살았다고 해서 꼭 성공한 삶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에 있든 저기에 있든 ‘아버지의 마음을 얼마나 헤아리고 그분과 하나 되느냐’가 문제입니다.
작은 아들이 거지꼴로 집에 왔을 때 아버지는 먼저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다른 질책이 없습니다. 아들의 회개는 바로 여기서 이루어집니다. 그분의 사랑 앞에서!
우리 중에는 고해성사를 통해 작은아들의 기쁨을 만끽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큰아들처럼 늘 아버지 곁에 있으니 나는 효자라고 생각하며 교만의 죄를 범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를 인정할 때 주님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의 허물과 현주소를 알고 아버지의 품으로 간다면,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이것을 더없이 큰 기쁨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이 계시다는 것이 늘 행복의 원천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시고 자비와 용서를 베푸십니다.
다만 우리가 용서를 더디 청하고 있을 뿐입니다.
교황님은 말씀하십니다.
“영적게으름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남용하지 맙시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루카 15, 22)
한상우 바오로 신부
봄꽃의 방향은 햇빛이듯
우리 마음의 방향은
언제나
우리 아버지 하느님이십니다.
돌아갈 길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돌아갈 길을
다시 걸어가는 것입니다.
핵심에서 벗어난
우리의 삶이
핵심으로 돌아갈
은총의 때
회개의 때입니다
바닥을 치면
올라올 길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자유와
참된 행복을
주시는 분은
언제나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십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가장 귀하고
소중한 사랑을
자녀들에게
늘 베푸십니다.
아낌없이
자비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누리게 되는
참된 자유입니다.
작은 아들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됩니다.
추위에 떨어본 사람은
감사를 배우게 됩니다.
행복을 주시는 분은
아버지 하느님이십니다.
아버지를 통해
작은 아들 큰아들
모두
다른 삶을
맛보게 됩니다.
어디로 향해야 할지를
다시 깨닫고 실천하는
거룩한 사순 주일 되십시오.
아버지의
자비가 있는 곳에
작은 아들 큰아들의
화해와 용서도 있습니다.
회개는 자신의 감정을 잘 살필 때 일어난다.
전삼용 요셉 신부
남아프리카 지역에 사는 코사족과 졸루족 등 수백 개의 부족들은
자연과 내가 하나라는 근본존재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연은 공동 소유이며 함께 나누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그래서 아프리카 부족들은 만나면 언제든지 “우분투!”라고 합니다.
‘우분투’란 아프리카 코사어로 ‘네가 있어 내가 있다’ 또는 ‘함께 있어 내가 있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서양의 한 인류학자가 부족의 아이들을 모아놓고 저 나무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과자를 매달아 놓고는
누구든지 먼저 뛰어간 사람이 모두 가져도 좋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서로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가
함께 과자를 따서 나누어 먹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학자는 물었습니다.
“혼자 빨리 뛰어가면 다 차지할 수 있는데 왜들 뛰어가지 않았니?”
그러자 아이 하나가 말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슬퍼하는데 어찌 나만 행복할 수 있나요?”
이것은 남아공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자주 사용한 예화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래서 발전을 못하지!’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행복하면서도 선진국인 북유럽 국가들의 교육이 다 이 ‘우분투’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남과 나의 행복은 둘이 아닙니다.
세상은 정확히 두 종류의 행복추구 패턴이 존재합니다. 이는 다른 생각의 차이가 만들어냅니다.
하나는 세상이 나의 행복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세상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입니다.
세상이 나를 행복하게 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되고
내가 남을 행복하게 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은 나중에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 본래 이기적입니다. 나중에 교육을 통해서 이타적이 될 수 있습니다.
위의 아프리카 부족들이 만날 때마다 ‘우분투’로 인사한다면
그 분위기가 아이들의 이기적인 행복패턴을 어렵지 않게 바꾸어주게 됩니다.
우리 식대로 말해 이 과정을 ‘회개’라고 정의합니다.
하지만 경쟁사회에서는 이 회개가 일어나기 매우 어렵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세상이 나를 행복하게 해 주어야 하는데 그 반대로 나가니 화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부모님은 내가 잘 된다고 배 아파하지는 않으십니다. 오히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니다.
회개란 행복 추구 패턴을 바꾸는 것인데 그 안에 사랑이 들어왔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남을 행복하게 해 주어야 나도 행복할 수 있음을 알게 합니다.
나와 남이 한 가족이라 믿으면 남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 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올 수 없는 이유는 하늘나라는 한 가족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형이 추구하는 행복이 바로 경쟁으로 남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서 얻는 행복이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아버지의 뜻을 따랐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죄를 짓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좋지만
그저 비교우위적인 행복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당에서 봉사하더라도 신부님에게 인정받으려 하거나
봉사를 하지 않는 사람을 판단하는 경우가 이런 형과 같은 사람일 것입니다.
남을 도와주더라도 그것이 자신을 특별하거나 우월하게 만드는 선행이라면
그 사람은 아직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 대부분은 남들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에 대해 슬퍼하거나 화를 냅니다.
오늘 복음에서 형이 아버지가 동생을 대하는 모습을 보고나서는 그렇게 한 것과 같습니다.
남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었다면 동생을 잘 대해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신도 기뻐하고 즐겨야 했을 것입니다.
회개를 하려면 자신의 감정을 잘 살펴야합니다.
경쟁에서 이기거나 성공에만 정신이 팔려있으면 자신의 감정을 잘 살피지 못합니다.
그래서 회개란 것이 일어날 수 없게 됩니다. 다행히 저는 회개란 것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가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습니다. 통학시간이 하루에 3시간이나 되었습니다.
그냥 차만 타는 것이 아니라 자전거를 30분 타고 나와서 1시간 승합차를 타고 등하교를 해야 했습니다.
만약 자전거를 타고 나오는 중에 체인이 빠진다면 봉고차를 놓치고 학교에 지각하여 혼나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새벽 5시 30분이면 집에서 나서야했고 집에 돌아오면 거의 밤 12시가 되었습니다.
다행히 성적은 그리 나쁘지 않은 편이었지만 3학년 2학기가 시작되면서부터 성적이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급기야 학력고사 두 달 남기고는 신경정신과를 다녀야했습니다.
그때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만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성적으로는 원하는 대학에 들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공부가 너무나도 지겨워 재수할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기뻤던 단 한 순간이 있었는데 그래도 합격되었다는 통지를 받은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이내 취업에 대한 압박감이 저를 조여 오고 있었습니다.
1년 정도는 어학연수를 다녀와야 할 것 같았지만 가난한 형편에 말도 꺼낼 수 없었습니다.
군대에서 나름 열심히 영어 단어도 외웠지만 군 생활도 그리 평탄치는 못했습니다.
운전병을 했는데 사고를 내서 부족한 형편에 어머니가 합의금을 싸들고 오셔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거의 ‘지옥’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그 지옥의 삶은 경쟁을 추구하는 학교라는 곳에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경쟁이 강한 사회일수록 행복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참으로 다행이었던 것은 저의 머릿속에는 오직 ‘행복’이라는 단어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성공’이라는 단어가 행복을 눌렀다면 저는 지금도 끊임없이 경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할머니의 죽음이 저의 첫 기억이기 때문에 인생을 살면서 행복해야겠다는 생각을 어렸을 때부터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내 감정은 행복한지?’에 민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이런 삶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또 다행이었던 것은 대학을 다니기 시작할 때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읽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10권에 달하는 책을 매일 아주 조금씩 5년 동안 읽게 되었고 저에게도 회개라는 것이 찾아왔습니다.
제가 달리는 이 길이 시궁창이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이웃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더 큰 행복임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특별히 그 책 속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결국에는 목숨까지 바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너무 행복하게 보였습니다.
더 감사한 것은 어머니께서 제 7살생일 때 너의 인생은 너의 것이니 마음대로 살라고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대로 대학을 자퇴하고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아버지가 특히 많이 반대하셨지만 저는 저의 단 한 번뿐인 인생의 주인공으로서
부모님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가 사제가 되고는 아버지도 행복해하셨습니다.
행복 추구 패턴이 바뀌니 인생도 바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후로 조금씩 행복해졌고 지금 다시는 세상에서 추구하는 행복패턴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교육시스템 안에서는 경쟁이 아닌 그와 반대로 나아가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자신들의 감정을 살피지 못하고 경쟁에 휘둘리다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지금 교육이 많이 변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우리나라 행복지수가 최하위이며
아이들 자살률이 또한 세계에서 가장 높습니다.
선진국들은 앞 다투어 경쟁이 아닌 행복을 지향하는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성공해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 지금 행복하면 성공한다고 가르칩니다.
행복은 감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아버지는 첫째에게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도 먼저 행복해야 한다고, 아이들 때의 그 웃음을 되찾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행복만 지향하고 있다면 결국은 알게 됩니다.
경쟁이 지옥이고 남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참 행복임을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세상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만을 생각하며 살게 됩니다.
둘째 아들은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회개하였습니다.
반면 첫 째는 자신의 감정을 살피지 못했습니다.
회개는 지금 자신의 마음을 살필 때 일어납니다.
끓는 물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개구리 신세가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감정에 책임을 져야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서울 용산구 후암동에는 ‘은혜의 뜰’이라는 쉼터가 있습니다.
입구에는 ‘흔들의자처럼 오셔서 언제든지 편안히 쉬다 가셔요.’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매월 토요일에 피정이 있습니다. 강사는 재능기부로 피정에 함께 합니다.
피정에 참여하는 분 중에서 간식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제게도 기회가 주어져서 피정에 함께 했습니다.
참석한 분은 40명가량 되었습니다.
굳이 알리지 않았는데도 사순시기를 은혜로이 보내려는 분들이 찾아오셨습니다.
은혜의 뜰을 찾아오는 사람을 맞이하는 수녀님은 마치 천사 같았습니다.
많은 분이 은혜의 뜰에서 삶의 위로와 용기를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강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목마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에 목이 마르셨을까요?
의욕이 없는 사제들의 모습에 목이 마르실 것 같습니다.
교회를 멀리하고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이들을 모습에 목이 마르실 것 같습니다.
은혜의 뜰 벽에는 나무로 만든 작은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피정에 참여한 분들을 보시면서 기뻐하셨을 것 같습니다.
안식년 중이지만 기쁜 마음으로 피정에 함께한 저에게도 미소를 보내셨을 것 같습니다.
사제들은 인사이동을 통해서 새로운 곳으로 가게 됩니다.
동료 사제 중에는 늘 불평과 불만이 있는 사제도 있습니다.
“보좌 신부 때는 본당 주임신부를 잘 못 만나서 힘들었다고 합니다.
본당 주임신부가 되어서는 보좌 신부를 잘못 만나서 힘들었다고 합니다.
보좌 신부가 없는 곳에 가서는 모든 것을 혼자 하느라 힘들었다고 합니다.
신자가 적은 본당에 가서는 심심하다고 합니다.
신자가 많은 본당에 가서는 일이 많아서 죽겠다고 합니다.”
동료로서 참 안타깝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반대의 생각을 하는 동료도 있었습니다.
“신설 본당에 가면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 수 있어서 좋고,
시골 본당에 가면 모처럼 쉬면서 건강을 돌볼 수 있어서 좋고,
보좌 신부가 열성적이면 일을 맡길 수 있어서 좋고,
보좌 신부가 의욕이 적으면 내가 할 일이 많아서 좋고,
신자들이 많으면 함께 할 일이 많아서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친구는 언제나 활력이 넘치고, 즐겁게 생활하는 것을 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있는 시간과 장소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내 마음의 문제입니다.
삶을 살다 보면 언제나 빛과 그림자를 보게 됩니다.
우리는 빛을 추구하고 그림자를 멀리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사랑하고 계십니다.
빛과 그림자가 서로 어우러져서 조화를 이루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뜨거운 사막에서 시원한 나무 그늘은 여행자들에게 더없는 휴식처가 되고,
뜨거운 열기를 식혀주는 안식처가 될 것입니다.
봄날에 따뜻하게 비추는 태양의 입김은 얼어붙은 대지를 녹이고,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을 것입니다.
빛은 자기가 빛이라고 자랑하거나 뻐기지 않습니다.
그림자는 자기가 그림자라고 좌절하거나 낙담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또한 그렇게 살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오늘의 제 2 독서는 사도 바오로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의 내용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워 당신의 모든 백성이 하느님과 화해하여 구원을 받도록 하신다는 내용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인간과 화해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화해의 일치를 우리에게 맡겨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로서 그분을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이렇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이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시켜 호소하시는 말씀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구원받으려면 바로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고 형제들과 화해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화해를 이루려면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처럼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를 해야 하며, 자신의 지위와 능력, 재능과 명예를
오직 하느님께 돌리는 겸손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화해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내가 하느님과 화해하지 못하고 나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고 이웃과 화해하지 못하면
내가 있는 삶의 자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으로 신음했던
이집트의 노예 생활과 고난의 삶을 살았던 광야의 연속일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과 화해하고 나 자신과 화해하고 이웃과 화해한다면 어느 곳에 있던지,
바로 그곳이 약속의 땅이 될 것이고 용서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모습을 오늘 복음의 ‘큰아들’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의 집에 있었지만, 모든 것들이 갖추어져 있었지만,
자신의 동생과 화해하지 못하였고, 동생을 아버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큰아들에게는 아버지의 집마저도 약속의 땅이 될 수 없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비록 모든 것을 탕진하고 남의 집에 노예처럼 살며 굶주림에 지쳤지만,
하느님과 화해하고, 자신과 화해하고 이웃과 화해하면서 약속의 땅을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살 때 바로 그곳이 약속의 땅이 될 것입니다.
둘째 아들처럼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시면 이제라도 훌훌 털고 하느님께로 돌아가십시오.
큰아들처럼 자신의 지위와 명예가 자신의 능력과 실력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시면,
그러한 오만과 교만을 떨쳐버리고 겸손의 옷을 입도록 하십시오.
그럴 때 우리는 사순절을 더욱 뜻있게 보낼 수 있고
우리는 새로운 삶, 부활의 삶으로 초대될 수 있을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O.F.M :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사순절 미사 독서에서 "되찾은 아들" 비유를 종종 만나는 이유를 우리 각자는 잘 압니다.
저마다에게 뿐만 아니라 또 공동체적으로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 부르심이 되기에 그렇지요.
오늘은 이 비유 말씀에 담긴 방향성과 운동성이 각별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때에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고 있었다."(루카 15,1)
먼저 이처럼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을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합니다.
그동안 종교지도자들에게서 들어온 질책이나 비난, 무시의 말과는 달리, 자기들을 사람대접하고
진정 염려해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갈증과 허기를 채우고 싶어서 모여듭니다.
이를 못마땅해 하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비유 안에서도
매우 다양하고 역동적인 방향성과 운동성을 만날 수 있습니다.
먼저 작은 아들이 유산을 요구해 "먼 고장으로 떠났다."(루카 15,13)고 합니다.
그는 제 욕망과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아버지와 집과 가족의 품에서 멀리 떨어져 나갑니다.
물리적 거리는 물론 심적 · 정서적으로도 분리를 의미합니다.
그곳에서 그는 마음껏 방종하게 지내면서 아버지 품 안에서 익힌 삶과 정반대의 길을 걷습니다.
결과는 재산 허비 · 탕진, 굶주림, 구걸, 거부 체험입니다.
굶주림에 지친 그에게 품팔이꾼들도 배불리 먹던 아버지 집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지금 그에게 가장 절실한 것을 통해 돌아갈 의향이 싹트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루카 15,20)
복음사가는 집이라 하지 않고, "아버지에게로"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굳이 분리하지 않듯이
아버지와 아버지 집 역시 같은 의미, 곧 "제자리"를 의미합니다.
작은 아들은 욕망의 탐닉과 자기 파괴적 삶을 멈추고 "제자리"를 향해 나아갑니다.
한편, 멀리서 그를 발견한 아버지가 그를 향해 달립니다.
이미 한 번 시작된 사랑은 멈출 수 없습니다.
끊어낼 수도, 없었던 일처럼 무효화시킬 수도 없기에, 아들의 부재 동안
내면으로 더 절절히 동동거리면서도 외적으로 잠시 멈추어 있던 아버지의 사랑에 발동이 걸립니다.
그동안에도 마음은 늘 그를 향해 달렸기에 발걸음을 다시 시작하는 건 문제도 안 됩니다.
아들의 돌아오는 발걸음은 굶주림과 불안에 지쳐 무겁지만
그를 향해 달리는 아버지의 발걸음은 노구임에도 재빠릅니다.
행여 괜한 자존심으로 작은아들 맘이 변할까 조급하기까지 하지요.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루카 15,20)
마침내 서로를 향한 방향성과 운동성이 접점을 찾습니다.
목을 껴안는 것은 반가움과 친밀감의 표현인 동시에
다시는 서로를 잃고 싶지 않다는 결속의 욕구입니다.
입맞춤은... 아, 이 아름다운 입맞춤은 우리를 창세기의 한 대목으로 이끌어 갑니다.
"주 하느님께서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
하느님께서 입 맞추심으로 사람이 생명을 얻었듯이,
죄로 죽었던 작은아들이 아버지의 입맞춤으로 새 생명을 얻습니다.
이 입맞춤으로 방종과 굶주림, 구걸과 거부 당함로 무너졌던 그의 자존감이 되살아나고,
떠나기 전에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기억해 낼 수 있게 됩니다.
아버지의 입맞춤은 흡사 마술과 같습니다. 사랑의 마술입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다음의 말씀으로 군더더기 없이 정리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 5,17)
서로를 향해 나아간 두 존재의 만남에서 사랑의 절정이 "화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한 쪽이 일방적으로 잘못을 저지르고 다른 한 쪽이 일방적으로 당했다면 "화해"라는 과정보다
"회개와 용서"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요.
"화해"라면 자기 허물에 대해 쌍방이 인정을 하고,
각자의 과실에 대해 상대방에게 동시에 사과하고
또 서로를 용서해 주면서 이루어지는 과정이라 볼 수 있고요.
그런데 사도 바오로는 제2독서에 짧게 인용된 본문에서 "화해"(2코린 5,18.19.20)라는 말씀을
다섯 차례나 반복하다가 급기야는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라고 직설을 날립니다.
감히 하느님과 화해라뇨? 하느님께서 뭘 잘못하셨다고?
"그분이야 그저 잘못한 사람이 엎드려 빌면 용서해 주시는 입장이지 화해는 무슨..." 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 허물은 아버지 품을 떠나고 곁길에서 방종하고 죄지은 사람 편의 문제이고,
하느님은 아무 잘못이 없으시니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회개와 용서"의 관계일 때는,
한쪽이 다가가 빌면 다른 쪽이 받아들이고 풀어주는, 일방적인 방향성과 운동성을 지녔고,
"화해"일 경우는 서로가 서로를 향해 동시에 나아가는 방향성과 운동성을 지녔다고요.
복음의 아버지처럼 하느님도 달리십니다.
돌아오는, 아니 돌아갈까 마음먹기도 전에 우리를 향해 달리기 시작하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먼저 화해하고 싶어 하십니다.
아무 잘못도 없이, 아니 굳이 잘못이라면 잘못하는 우리의 자유의지를 허용한 잘못 밖에 없으면서,
우리와 화해하고 싶어 하십니다.
용서를 빌기도 전에 목을 껴안고 입 맞추며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해 주시려 늘 만반의 준비가 되어 계십니다.
영화 촬영 때 고Go 사인이나 큐Q 사인 직전에 외치는
"레디~~"나 "스텐바이~~" 상태로 항상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잠시 큰아들과 아버지의 방향성, 운동성도 봅니다.
큰 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습니다."(루카 15,28)
사랑을 향하다 말고 "멈춤"입니다. 정체되고 고착됩니다.
사랑은 특성상 흘러야 하는데 이처럼 멈추어 고이기 시작하면 탁해지고 썩게 됩니다.
그러니 아버지는 또 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지요".
상대방이 어떻건 간에 아버지는 여전히 사랑의 방향성과 운동성을 지니고 급박하게 움직입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잠재적 죄인 또는 활성화된 죄인인 우리에 대해 하느님께서도 그러고 계십니다.
제1독서는 모세 사후에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인도로 요르단 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간 이야기를 전합니다.
거기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할례를 받게 하시어 "이집트의 수치를 치워"(여호 5,9) 버리시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예리고 벌판에서 하느님의 업적과 그 완성을 기리며 파스카 축제를 지내지요.
이집트 탈출 후 여기에 이르기까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그들은 하느님과 함께 끊임없이 움직여 왔습니다.
구름기둥, 불기둥, 장막이 하느님 현존의 표징입니다.
오로지 한 방향성, 한 운동성을 지니고 배신과 징벌 간청과 용서 등 우여곡절 끝에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들어오게 하신 겁니다.
그리고 여기서 척박한 광야 살이 중 하느님 사랑의 또 다른 징표였던 "만나가 멎습니다."(여호 5,12)
함께 한 방향으로 움직이건, 서로를 향해 움직여서 만남을 이루건,
하느님과 우리는 끊임없이 함께 움직입니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움직이기 마련인데다, 특히 사랑이 본성상 그렇게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약속의 땅에 들어선 이들은 축제를 벌입니다.
또 아버지와 아들의 감동적인 만남 이후에도 잔치가 벌어지지요.
큰아들과 아버지의 만남은 어떻게 귀결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건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정착 후 어떻게 살아갔는지,
작은아들이 귀향 후 어떻게 변화되었는지의 문제처럼 열려 있습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역사는 일회적 회개와 용서, 화해를 이룬 뒤 동화 속 이야기처럼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끝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범죄도 실수도 용서도 화해도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반복될 것입니다.
어디서 누구와 어떤 상태가 되더라도 아버지, 아버지 집, 아버지 품,
즉 제자리를 향한 방향성과 운동성만은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분은 이미, 여전히 우리를 향해 움직이고, 또 움직이실 것이니
우리만 그 자리의 기억을 놓치지 않으면 됩니다. 아멘.
3월 한 달도 말씀 안에서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