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에고 리베라
출생-사망 : 1886.12.8 ~ 1957.11.24
국적 : 멕시코
활동분야 : 예술
출생지 : 멕시코 과나후아토
주요작품 《아라메다 공원의 일요일의 꿈》(1948) 《헬렌 윌스 무디의 초상》(1930)
멕시코의 화가. 멕시코내란 종식과 함께 귀국하여 미술가협회를 결성, 활발한 벽화운동을 전개하였다. 멕시코의 신화·역사·서민생활 등을 민중에게 직접 이야기할 수 있도록 공공건축물에 늠름한 감각과 힘에 넘치는 벽화를 그렸다. 민중에 대한 애정이 넘쳐 흐르며, 유럽회화의 전통을 멕시코의 전통에 결합시키려 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
멕시코 과나후아토에서 출생하였다. 쌍둥이로 태어났으나 1살 때 형이 죽고 어머니는 신경쇠약에걸려 유모에게 위탁되어 자랐다. 어린시절부터 그림에 대한 재능을 나타냈으며, 10세에 산카를로스미술학교에 들어가서 약 6년간 교육을 받았다. 이 당시 멕시코의 민중예술을 이끌었던 화가 호세 과달루페 포사다(José Guadalupe Posada 1852~1913)를 만나 멕시코 민중예술의 대한 그의 사상과 작품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리베라는 멕시코의 전통적인 아름다움에 매료되었고 해골로 표현된 멕시코 원주민의 전통적 주술적 형상을 통해 고대 멕시코를 지배했던 원주민의 문화를 새롭게 자각했다. 또한 유럽과 미국에 의해 지배당했던 멕시코 민족의 고통을 자신의 주요 작품 대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하지만 당시 불안정 했던 멕시코의 정세와 민중의 고통에 대한 디에고의 인식은 피상적인 것이었다. 23세에 주지사의 장학금으로 에스파냐로 떠났으며 유럽 거장들의 작품을 통해 미술에 대한 보다 넓은 시야를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1907년 에스파냐에서, 다음해에 예술의 중심도시 파리로 옮겼다. 1910년 고국 멕시코에 귀국하였다가 멕시코혁명을 직접 겪게 되었지만 멕시코혁명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1911년 파리로 돌아갔으며 파리 체재 중 피카소, G.브라크, P.클레 등과 교제하게 되었고 입체파(큐비즘)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와 친분이 두터웠다. 이 당시 러시아 출신의 여인 안젤리나 벨로프를 만나 결혼했다. 하지만 리베라는 여성편력이 심해 문란한 생활을 하였으며 부인의 친구인 마리에브나 보로베라 스테벨스카라는 러시아 출신의 여인을 만나 딸을 낳았다. 하지만 자신의 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그녀가 휘두른 칼에 맞아 목에 상처를 남기기도 하였다. 파리에서 방황하며 암울한 시절을 보내며 오로지 예술에만 심취했다. 1918년 뇌막염을 앓던 아들을 잃고 심한 충격에 빠졌으며 파리 생활했던 모든 것을 버리고 이탈리아로 떠났다. 리베라는 무엇보다도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들의 대벽화에 가장 깊은 감명을 받았다. 또한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혁명은 그에게 새로운 자각의 계기가 되었으며 자신의 고국 멕시코의 민중혁명에 대한 열정을 가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리베라는 더 이상 유럽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멕시코혁명의 종식과 함께 귀국하여 D.A.시케이로스(David Alfaro Siqueiros),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José Clemente Orozco) 등과 미술가협회를 결성, 활발한 벽화운동을 전개하였다. 리베라는 이탈리아에서 목격한 르네상스를 멕시코에서 요구되는 문화운동으로 연상했다. 멕시코의 마야 문명의 신화와 역사에 대한 인식을 하고 멕시코 민중생활 등을 민중에게 직접 이야기할 수 있도록 공공건축물의 벽면에 멕시코의 전통적인 조형감각과 힘에 넘치는 벽화를 그렸다. 리베라는 멕시코 문화운동을 주도하는 대표적인 작가로 등장했다. 하지만 바람둥이 또는 거칠고 야만스럽다는 자신에 대한 좋지않은 평판도 항상 뒤따랐지만 낙천적인 기질로 인해 개의치 않았다. 루프 마린이라는 연인이 있었지만 국립예비학교 학생이었던 프리다 칼로(Frida Kahlo)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21살의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두사람은 연인이 되었다. 두사람의 관계를 두고 우려가 많았지만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는 관계가 되었다.
1924년 멕시코 공산당을 지지했던 리베라는 소련의 초청으로 모스크바로 갔으며 스탈린을 만났고 그의 초상화를 그렸다. 자신의 기대와는 달랐던 4개월 동안 모스크바 여행으로 혁명과 정치에 대한 환멸을 느끼게 되었고, 자신의 작품세계에 더욱 빠져들게 되었다. 1929년 프리다 칼로와 결혼을 하면서 세간의 관심이 되기도 하였다. 그해 공산당과는 결별을 선언하였고 예술적인 진실을 추구하는데 열중하였다. 하지만 동료였던 시케이로스와 오로스코도 그의 행적과 작품을 비난하였고 정치적 논쟁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1930년 초청을 받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떠났다가 1931년 멕시코로 돌아왔으며, 리베라는 이제 미국에서도 인정받는 유명한 작가였다. 1931년 12월에는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리베라 개인전을 열었고 1932년 미국 디트로이트 미술관으로부터 벽화 제작을 요청받아 작품을 제작했다. 록펠러재단의 요청을 받아 록펠러센터 라디오시티홀에 벽화를 제작했지만, 혁명과 노동자를 찬양하는 내용에다 레닌의 얼굴을 그려넣은 것 때문에 제작이 취소되고 벽화는 파괴되었다. 리베라는 예술이 대중을 지향하는 것이며 민중을 위한 것으로 존재하기를 원했다. 1933년 12월 무일푼이 된 리베라는 미국에 분노하면서 혁명적 화가로 변모하여 멕시코로 돌아왔다.
문란한 사생활과 수많은 스캔들 때문에 부인 프리다 칼로와는 1939년에 이혼하였다가 1940년 다시 재결합하였다. 하지만 디에고의 여성편력은 계속되었다. 자신의 예술적인 창조성은 여성과의 관계에서 나온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자신의 행동에 죄의식이나 도덕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부인 프리다 칼로의 영향으로 멕시코의 역사와 민중의식이 진지해졌고 멕시코 원주민의 토속적인 조형과 색체에 매료되었다. 멕시코 민중을 주제로 한 작품을 제작하였으며 1954년 다시 멕시코 공산당 당원이 되었다. 그해 프리다 칼로가 사망하자 1955년 출판 편집자 '엠마 우르타도'라는 여성과 결혼했다. 건강이 나빠져 모스크바에 신병치료를 다녀왔으나 1956년 11월 24일 뇌일혈로 사망하였다.
대표작으로 프라드호텔의 대벽화 《아라메다 공원의 일요일의 꿈》(1948) 《헬렌 윌스 무디의 초상》(1930) 《농민지도자 사파타》(1931) 등과 중앙정청, 교육부, 차핑고농업학교 등의 벽화 및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주식거래소의 장식화 등이 있다. 작품의 특색은 멕시코 민중에 대한 애정이 넘쳐 흐르며, 유럽회화의 전통을 멕시코의 전통에 결합시키려 한 점에 있으며, 멕시코 근대회화의 4대 거장, 즉 리베라, 시케이로스, J.C.오로츠코, R.타마요 중에서도 가장 멕시코적인 화가로 평가받는다.
아라메다 공원의 일요일의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