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신> 도대체 시란 어떤 글인가? / 임보 (시인)
로메다 님, 내가 보낸 글을 읽고 시를 쓰고 싶다는 신념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니 반갑기는 합니다만 내가 괜히 조용한 사람의 가슴속에 바람을 불어넣어 '시의 병'을 앓게 하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군요.
이번엔 '도대체 시가 어떤 글인가' 일러달라고 청하셨지요? 평범한 질문 같기는 합니다만 답변이 쉽지 않군요. 한평생 시에 매달려 살아온 나인데도 로메다 님이 만족할 만한 대답을 줄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시시각각으로 변해갑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유구한 세월을 놓고 보면 태산준령도 놀랍도록 변화합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등뼈라고 불리는 거대한 로키산맥은 수억 년 전에는 바다 속에 묻혀있던 흙덩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구한 세월을 두고 천천히 솟아올라 지금 우리가 보는 수천 미터의 웅장한 바위산들이 된 것입니다.
산천이 우리 눈에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 것은 그 변하는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그렇게 느낄 뿐입니다. 거대한 바위는 부서져 작은 모래알들이 되고 푸른 강물은 메말라 거친 사막이 되기도 합니다. 자연의 변화가 이렇거늘 하물며 인간들의 손으로 빚어 만든 문명의 족적들은 얼마나 덧없이 변하겠습니까? 한 세기를 버티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10년, 아니 1년이 멀다하고 바뀌고 혹은 사라지고 말기도 합니다.
너무 서두가 길어졌나요? 그럼 이제 다시 시의 얘기로 되돌아가도록 합시다. 그동안 시라는 글도 많은 변모의 길을 걸었습니다. 언제부터 인간들이 시라는 형식의 글을 쓰게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발견된 문헌 중 가장 오래된 것은 BC 2000년경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의 유적으로 점토판에 설형문자로 새겨진 「Gilgamesh Epoth」라는 기록입니다. 길가메쉬라는 한 영웅의 모험을 찬양하는 내용의 서사시라고 합니다.
동양에서는 공자가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시경(詩經)』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서주(西周) 초기(BC 11세기)로부터 동주(東周) 중기(BC 6세기)에 이르는 약 500년 동안의 노래들을 모은 것이므로 오래된 것은 BC 1000년경의 것도 있겠습니다.
우리의 시가(詩歌)로 오래된 것은 고구려 유리왕의 「황조가(黃鳥歌)」를 드는데 제작 년대를 겨우 BC 17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답니다. 우리 시가의 역사가 그렇게 늦은 것은 우리 민족이 시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였다기보다는 우리의 고유한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다만 기록에서 뒤진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만큼 노래를 즐기는 민족도 드뭅니다. 우리의 번창한 <노래방> 문화가 좋은 증거가 되지 않습니까?)
기록은 이렇게들 남아 있지만 문자를 사용하기 전의 노래들까지를 시의 남상(濫觴)이라고 본다면 시의 역사는 어쩌면 만년을 헤아리게 될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 유구한 세월을 지내오는 동안 시라고 불릴 수 있는 그것들이 얼마나 많은 흥망성쇠를 거듭하면서 변해왔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경우를 한번 간략히 살펴볼까요?
나는 우리시의 출발을 샤먼[무격(巫覡)]의 주사(呪詞) 곧 '천지신명께 기원하는 말'에까지 거슬러올라가고자 합니다만 이 자리에서는 일단 접어두고라도 「황조가(黃鳥歌)」나 「구지가(龜旨歌)」와 같은 고대시가로부터 시작하여 신라의 향가(鄕歌)를 거쳐 고려의 가요(歌謠) 그리고 조선조를 지내면서 시조(時調)와 가사(歌辭) 문학 등으로 발전합니다. 한편 고려 이후부터 구한국 말에 이르기까지 시 장르의 본령은 한시(漢詩)가 점령해 왔습니다. 우리 고유의 시는 거의 노래와 함께 공존해 온 상태입니다.
우리 시가 노래로부터 독립된 것은 겨우 20C에 들어와서부터입니다. 20C 초에 싹이 텄던 소위 신체시가 자유시로 자리잡은 것은 1920년대에 이르러서입니다. 그리고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현대적 특성을 지닌 자유시로 크게 발전하게 됩니다.
한 지역에서의 시의 변천하는 모습도 이렇거늘 세계의 모든 지역들에서 변모해온 시의 양상을 살펴본다면 얼마나 복잡하고 다양하겠습니까?
천 년 전 당나라의 이백(李白)이 생각했던 시와 백 년 전 독일의 릴케가 생각했던 시는 얼마나 거리가 멀겠습니까? 그야말로 천양지차(天壤之差)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시대의 시라고 해도 지역에 따라 다 다릅니다. 서양의 시와 동양의 시가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서구라도 프랑스의 시와 영국의 시가 같지 않고 같은 동양이라도 중국의 시와 한국의 시가 같을 수가 없습니다. 아니, 동일한 시대 동일한 지역이라고 해도 개인에 따라 얼마나 차이가 있던가요? 비슷한 시대에 살았던 소월(素月)과 이상(李箱)의 시가 얼마나 다른가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동안 역대의 수많은 시인들과 시 이론가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에 대한 정의를 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정의들 가운데 보편 타당한 정의는 아직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이 내린 정의는 다만 그가 살았던 당대의 그가 체험한 시에 대해 주관적인 견해를 피력했을 뿐입니다. 앞으로의 어느 누구도 시공을 초월한 금과옥조(金科玉條)의 시에 대한 불변의 정의를 내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시는 계속 변해갈 것이니까요.
로메다 님, 정의를 내릴 수 없다는 내 얘기를 듣고 실망하셨나요? 그러나 로메다 님, 너무 실망할 것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시들을 아우를 수 있는 절대 불변의 정의는 불가능하지만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람직한 시'에 관해서는 들려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오늘의 얘기가 너무 번거롭게 길어졌으므로 '바람직한 시'에 대한 나의 견해를 들려주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어야 되겠군요. 7월의 장마가 지루합니다. 즐거운 나날 지내세요. - - <임보 교수님의 시창작교실> -
P. S. : 역대의 저명한 사람들이 내린 시에 대한 정의들 가운데에서 몇 개 골라 첨부 파일로 보냅니다. 내가 <시론> 강의를 할 때 학생들에게 보여준 참고 자료입니다. 귀찮으면 읽지 않아도 무방합니다. 읽고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을 만나더라도 당황해 할 것 없습니다. 그러나 버리지는 마시고 간직해 두시기 바랍니다. 언제 필요한 경우 들추어 설명할 수 있는 기회가 혹 있을지 모르니까요.
[첨부 파일]
시에 대한 정의들
"시는 운율적인 언어에 의한 모방" ―Aristotle『Poetics』
"좋은 시는 힘찬 감정의 자연적 발로" ―W. Wordsworth 『Lyrical Ballads』서문 (For all, good poetry is the spontaneous overflow of powerful feelings)
"시는 영원한 진실 속에 표현된 삶의 이미지" ―P. B. Shelly 『Defence of Poetry』 (A poem is the very image of life expressed in it`s eternal truth)
"시는 상상과 정렬의 언어" ―W. Hazlitt 『Lecture on the English Poets』 (Poetry is the language of the imagination and the passions)
"시는 미의 운율적 창조" ―E. A. Poe 『The Poetic Principle』 (Poetry is the rhythmic creation of beauty)
"시는 유익함이나 기쁨을 주는 일 곧 교훈과 함께 즐거움을 줄 수 있도록 결합하는 일을 목적으로 한다" ―Horace 『The Art of Poetry』 (Poets aim at giving either profit or delight, or at combing the giving of pleasure with some useful percepts)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 思無邪" ―공자 『論語』 (시경에 수록된 삼백 수의 작품들은 한 마디로 말해 시 속의 생각들이 다 바르고 정직하다)
"시는 언어의 건축이다" ―김기림 『시론』
"시는 생소한 소재들로 이루어진 논리성이 약한 구조물이다" ―J. C. Ransom『The New Criticism』 (The poem is a loose logical structure with an irrelevant local texture)
"詩言志 歌永言" ―『書經 ; 舜典』 (시는 우리들의 의지(소망)를 말에 담은 것이고 노래는 그 말을 길게 늘여서 표현한 것이다)
"詩者 志之所之也 在心爲志 發言爲詩" ― 『詩經;大序』 (시란 뜻(소망)에서 빚어진 것, 마음 속에 있을 땐 뜻, 말로 나타내면 시가 된다)
"시는 우주의 생명적 본질이 인간의 감성적 작용을 통하여 표현되는 통일한 구상(具象)이다"
― 조지훈 『시의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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