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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렇게 힘든 밤을 보낸 다음날 아침.
다행히 밤새 도로가 복구되어 차들이 정상 운행되고 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어색한 아침식사를 마친 후 치산이 출근을 위해 먼저 집을 나서려 할 때 금별이 입을 열었다.
“저기.. 어제 일은 없었던 걸로 해주세요. 저도 그렇게 생각할게요.”
“.... 으....응...”
치산은 얼떨결에 대답하고 집을 나왔다.
아무도 치워주지 않은 탓에 차 위엔 어젯밤 눈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치산은 차를 포기하고 도로로 나와 택시를 탔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먼저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었다.
샤워를 하고 새 셔츠를 꺼내 입으면서 치산은 집안을 휙 둘러보았다.
하루 집을 비운 탓인지 어딘가 휑하니 썰렁하고 추운 느낌이다.
사람은 없었어도 집안 온도는 늘 자동으로 쾌적하게 유지된다.
그런데도 춥게 느껴지는 건 어젯밤 금별의 집이 유난히 따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주일 만에 출근한 금별은 사뭇 달라진 회사 분위기에 조금 놀랐다.
지나가면 흘끔거리던 직원들도 이젠 전처럼 그냥 무관심하게 지나갔다.
금별은 다행이라고 여기며 전과 다름없이 자신의 일을 해나갔다.
사실 그 사이 치산이 회사에 더 이상 쓸데없는 얘기가 돌지 않도록 직원들에게 단단히 지시를 내렸었다.
며칠이 지나자 소문은 자연스럽게 사그라졌고 더 이상 금별에 관해 수군대는 소리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입장이 난처해진 건 이규철이었다.
당연히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던 금별이 빌딩으로 돌아온 것이다.
소문을 낸 당사자로서 금별을 다시 보는 게 유쾌할 리 없었다.
게다가 싸운 것 때문에 직원들 사이에서 그를 보는 시선이 별로 좋지 않게 변해버렸다.
가뜩이나 마음에 안 드는 담당 부서 때문에 짜증이 나던 차에 사람들과의 관계도 틀어지니 영 출근할 맛이 안 났다.
게다가 복도에서 보란 듯 금별과 마주치자 더더욱 화가 치민다.
금별은 당연히 그를 못 본 척 무시했다.
인철은 부글부글 속이 끓어 당장이라도 유금별의 멱살을 잡고 바닥으로 던져버리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다시 일을 하게 된 금별은 이따금 규철과 마주치는 것 보다 더 곤혹스런 일이 생겨버렸다.
그건 바로 한치산과 마주치는 순간이었다.
우연히 복도에서 맞닥뜨리면 예전엔 그저 짓궂게 장난을 치거나 저녁메뉴를 전달하거나 하는 가벼운 대화가 오갔다면 지금은 마치 명절 때 어쩌다 만나는 친척을 대하듯 어색하고 딱딱한 분위기가 둘 사이를 감쌌다.
“저...저녁때..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면 말씀하세요.”
“어? 아... 저녁... 음.. 글쎄.. 뭐, 아무거나...”
“..그럼... 그냥.. 제가 알아서..”
“아아... 맡길게...”
“저기.. 그럼.. 이만...”
“어.. 어... 수고”
어색한 인사가 끝나자 금별은 청소트레이를 밀고 가버렸다.
치산은 그 뒷모습을 훔쳐보듯 흘끔거렸다.
“뭐하십니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상윤이 어이없단 듯 물었다.
“뭐가?”
“지금 두 사람 뭐하는 거냐고요?”
“우리가 뭘?”
“몰라서 물으세요?”
“...... 모르겠는데..”
“내외하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왜 눈도 못 맞추게 된 거냐고요? 유금별씨랑 무슨 일 있었습니까?”
“뭐?! 무슨 일?!!”
“그야 전 모르죠.”
“없어! 아무 일도 없었어!”
“그렇게 부정하니까 진짜 수상한데요?”
상윤이 눈을 가늘게 뜨며 치산을 주시한다.
“시..시끄러워. 수상하긴.. 내가 뭘 어쨌다고. 이번 달 출시예정인 모바일 게임 설명회가 몇 시 라고 했지?”
“오후 2시입니다.”
“그 전에 대충 살펴보게 보고서 다 챙겨 와.”
“어제 유금별씨 집에서 주무셨습니까?”
“뭐...뭐?!! 그걸 어떻게!!!”
치산이 깜짝 놀란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어제 퇴근 후에 들른다고 하셨잖아요. 그 후에 폭설이 왔으니 꼼짝없이 그 집에 갇혔겠구나 싶었죠. 저도 조금만 늦었으면 도로에서 밤샐 뻔 했거든요.”
“아아...”
“그래서 그 집에서 진짜 신세 진 겁니까?”
“응.”
“그럼 유금별씨랑 친해지면 친해졌지 왜 더 어색해졌어요?”
“어색하지 않다니까!”
“누가 봐도 어색한데요? 딱 연애 시작하는 십대처럼.”
“뭐?!!”
“설마.....”
“......”
“에이, 설마. 아무리 하반신 가벼운 대표님이라지만 남자를... 여자가 끊이지 않는 대표님이 그럴 리가 없죠.”
“시끄러워!! 대체 회사 복도에서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당장 보고서 싹 다 모아 갖고 내 방으로 와!”
“네네, 알겠습니다. 대표님.”
상윤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연신 입술 끝을 씰룩거리며 가버렸다.
혼자 엘리베이터에 올라 사무실로 돌아온 치산은 화끈거리는 속을 달래려 찬물에 얼음을 가득 채워 벌컥벌컥 들이켰다.
저 능구렁이 비서 녀석은 사람 속 꿰뚫어 보는 덴 일가견이 있다.
괜히 어제 일을 들켰다간 두고두고 놀림 받을 게 뻔했다.
그나저나 보통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금별을 보자 자연스레 그 입술로만 시선이 간다.
그리고는 당연하단 듯 어젯밤의 키스가 떠오른다.
그 이상의 것도......
치산은 남은 물을 들이켜고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사라져라. 사라져!
제발 좀 내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려!!
주문처럼 외워보지만 효과는 없었다.
그날 저녁, 금별은 치산의 맨션으로 향했다.
어느 정도 각오를 한 덕분인지 처음 그 집에 들어섰을 때 같은 충격은 없었다.
잔뜩 늘어놓은 부엌을 치우고 저녁준비를 서둘렀다.
그 사이 빨래를 돌리고 간단하게나마 청소도 했다.
치산은 청소가 막 끝났을 때 돌아왔다.
“역시 맛있어.”
장을 못 봐서 냉장고에 있던 걸로 가볍게 차린 저녁밥을 치산은 어느 때보다 맛있게 먹어 치웠다.
흡족해하는 모습에 금별은 마음이 뿌듯해졌다.
“이거 받아.”
밥을 다 먹고 나자 치산은 작은 쇼핑백 하나를 금별에게 건넸다.
“이게 뭔데요?”
“어제 신세진 것도 있고 해서 그냥... 싼 거니까 부담 갖지 마.”
쇼핑백 안엔 남성용 지갑이 들어 있었다.
싼 거라고 했지만 명품이라고는 써 본적 없는 금별도 아는 브랜드 로고가 박혀 있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 일로 이런 거 받을 수 없어요.”
금별이 손사래를 치며 지갑을 도로 쇼핑백에 넣어 내밀었다.
조금 늦는다싶더니 이걸 사러 백화점에 들른 모양이었다.
“작은 성의 표시야. 내가 이것저것 귀찮게 요구하는 것도 많잖아.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뜻으로.”
“괜찮아요. 공짜로 하는 것도 아니고 저도 돈 받으며 하는 일인걸요. 당연한 일 하는 걸로 선물을 받을 순 없죠.”
“그냥 좀 받아. 유금별씨 주려고 산거야.”
“그러니까 왜 이런 걸 사세요. 전 필요 없어요.”
“거 참! 좀 받으라고!”
자꾸 사양하는 모습에 어쩐지 짜증이 나 큰소리를 내고 말았다.
“싫다고 했잖아요! 생일도 아닌데 이런 선물을 왜 받아요!”
“그럼 생일이 언젠데!”
“지났어요!”
“그럼 생일 선물인 셈 쳐!”
“싫어요!”
“유금별씨!”
“왜요! 대표님!”
두 사람은 식탁을 마주하고 서로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으르렁대고 있었다.
“아아, 알았어. 정 싫다면 할 수 없지. 어차피 안 가질 거라면 버리겠어.”
“..!!..”
치산은 그대로 쇼핑백을 쓰레기통에 던지려했다.
“지금 뭐하는 짓이에요?!”
금별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안 갖겠다며? 그럼 버려야지!”
“그런 논리가 어디 있어요?”
“여기 있다!”
“하아...... 무슨 초딩도 아니고.”
“뭐?!”
“......알았어요. 받을게요.”
“진짜?”
“네.”
“훗. 좋아.”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씩 웃는 치산이었다.
금별은 너무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억지로 쇼핑백을 다시 떠안은 금별은 한숨을 푹 내쉬며 지갑을 꺼내 들었다.
“고맙습니다. 잘 쓸게요. 대신에 앞으론 절대 안 받을 거예요.”
“알았어. 다음엔 같이 가서 사자. 유금별씨 마음에 드는 걸로 직접 골라.”
“......”
학습능력이 없는 건지, 남의 얘길 안 듣는 건지 너무 제멋대로라 도무지 적응하기가 힘들다.
그래도 이런 쓸데없는 대화 덕분에 딱딱하고 어색했던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스르르 녹아 없어졌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금별은 치산이 준 지갑을 다시 꺼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갖고 다니기엔 너무 고가의 명품이다.
종류별로 다양한 카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지갑에 어울리는 고액권을 넣어 다니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속은 비고 겉만 번지르르한 지갑을 들고 다닐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그래도 사준 성의가 있으니 갖고 다니지 않으면 치산의 성격으로 보아 이유가 뭐냐고 꼬치꼬치 캐물으며 귀찮게 쫓아다닐 것 같아 하는 수 없이 쓰기로 했다.
낡고 오래된 지갑에 있던 것들을 새 지갑으로 옮겼다.
그러다 문뜩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요즘 틈만 나면 한치산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말았다.
자꾸 생각나고, 키스가 떠오르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런 건 좋지 않다.
금별은 주머니에서 유환의 이름표를 꺼내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입 속으로 연신 미안해, 미안해를 중얼거리며 기도하듯 눈을 감았다.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더는 가까워지지 않도록 최대한 거리를 둘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혼자만 행복해지지 않겠다고 10년 전 유환의 죽음 앞에 맹세했다.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
마음을 다잡은 덕분에 금별은 다음날 치산과 마주쳐도 모르는 사람처럼 간단히 목례만 한 뒤 지나쳤다.
그가 준 지갑도 사용하려고 했지만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다시 쇼핑백 안에 넣어 집안 한쪽 구석에 그대로 두었다.
치산은 갑자기 차가워진 금별의 태도에 적잖이 당황했다.
원래 살갑거나 친근하게 대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보란 듯 밀어내는 태도는 보이지 않았었다.
“오늘 저녁 메뉴는 뭐야?”
치산이 일부러 다가가 묻자 금별은 외면하듯 방향을 바꾸며
“드시고 싶은 게 정해지면 나중에 문자로 알려주세요.”
라고 말한 뒤 가버렸다.
“둘이 싸웠어요?”
치산의 옆에 있던 비서 상윤이 고개를 갸웃한다.
“아니. 김비서가 봐도 좀 이상하지?”
“흠...... 대표님이 뭐 실수한 거 아닙니까?”
“내가??”
“잘 생각해 보세요.”
“지갑 준 거 때문에 아직도 화났나?”
“지갑 선물하셨어요?”
“어. 나름 좋은 걸로 샀는데...”
“무슨 브랜드를 좋아하는지 확인은 하고 사셨겠죠?”
“... 아니”
“하아, 그러니까 대표님 옆에 여자가 끊이지 않아도 오래 머물질 않는 겁니다. 선물을 하기 전에 먼저 상대방의 취향을 살폈어야죠.”
“하지만 지갑 일은 어제 다 마무리가 됐는데...”
“그건 대표님 혼자만의 판단인 거겠죠. 저 냉랭한 태도로 보아 선물이 엄청나게 마음에 안 들었나 본데요. 다른 걸 선물 하세요. 이번엔 본인 취향에 딱 맞는 걸로.”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역시 자넨 유능한 비서야.”
“당연하죠.”
마주보고 웃는 두 사람은 흡사 덤앤 더머를 연상시켰다.
일에 있어선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는 파트너였지만 사생활 면에선 엉뚱한 곳에서 빈틈이 생기는 그들이었다.
그날 저녁, 일을 마치고 빌딩을 나서던 금별은 대기중이던 치산의 차로 납치당하듯 태워졌다.
“오늘은 오랜만에 중국음식이 먹고 싶어. 혼자 먹긴 싫으니 저녁 차리는 대신 같이 가줘.”
일단 싫다고 거절해 봤지만 이미 출발한 차 안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기껏 거리를 두자고 생각한지 얼마 안 됐는데 나란히 차이니즈 레스토랑에 앉아있다니... 이건 금별의 결심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치산은 줄줄이 값비싼 요리와 도수 높은 술을 시켜댔다.
“그동안 내가 유금별씨한테 참 무심했던 거 같아. 빌딩 청소에 집안일까지 하느라 힘들었지? 이렇게 가끔 쉬어가기도 해야지.”
“...저는 괜찮습니다. 어차피 다 돈 받고 하는 일이니까요. 그러니까 이런 건...”
“그래도 유금별씨처럼 내 마음에 들게 하는 사람은 없었어.”
“그렇게 생각해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그때 개별실 문이 열리며 음식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처음 보는 화려한 요리가 테이블 가득 들어찼다.
치산은 직접 음식들을 덜어 금별의 앞에 놓아준다.
여자들이 좋아할만한 자연스런 행동이었다.
하지만 금별은 불편하기만 했다.
“중식은 별로 안 좋아해? 그럼 다음엔 다른 거 먹으러 갈까? 프랑스요리 잘하는 곳도 있어. 아, 와인 좋아하나?”
음식을 깨작거리는 금별을 보며 치산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금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술은 맥주 한 캔이 전부였다. 그 이상은 거의 마셔본 적도 없다.
“음.. 그럼 한정식이 좋겠군. 일산에 한정식 제대로 하는 집 있어. 아! 한식하면 역시 전라도지. 남도 한정식을 먹어 봐야 진정한 미식가라 할 수 있지. 이번 주말에 고속도로 한번 탈까? 시간 괜찮지? 나도 오랜만에 약속 없는 주말이니까 토요일에 갔다 일요일에 오는 거 어때?”
“......”
“자고 오는 건 싫어? 그럼 당일치기도 괜찮아. 비행기로 가면 도로에서 시간 오래 안 뺐기고 괜찮지. 티켓 예매 할까?”
“대표님.”
“응? 왜? 뭐 더 먹고 싶은 거 있어?”
“전... 이런 거 불편합니다.”
“어? 뭐가?”
“이렇게 대표님이랑 밖에서 밥 먹는 거라던가... 자꾸 저한테 스스럼없이 대하시는 거.... 불편해요. 그냥.... 고용인으로만 대해주세요.”
금별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놓고 진지하게 말했다.
순간 치산도 말이 막힌 듯 한동안 멍하니 금별을 바라보았다.
“불편해? 대체 뭐가?”
그러더니 살짝 짜증이 난 표정으로 어이없단 듯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이런 자리라던가... 아무튼 전 그저 대표님댁에서 일을 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유금별씨.”
“네.”
“당신도 알다시피 난 비교적 라이프 스타일이 자유로운 편이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렇고. 꼭 친구나 지인하고만 어울려 노는 건 아니잖아. 어쩌다 만난 사람이지만 대화가 잘 통하면 오래 사귄 친구보다 더 편하게 얘기를 나눌 수도 있고, 여행을 갈 수도 있는 거잖아. 가만히 보면 유금별씨는 주위에 너무 벽을 쌓고 사는 것 같아. 좀 더 주변과 교류를 나누며 사는 게 재밌지 않겠어?”
별로 재미를 위해 사는 건 아니라서요....
문뜩 반발심이 치밀며 내뱉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금별은 조용히 참았다.
“누구나 사는 방식도 성격도 다르잖아요. 전 대표님처럼 사교적이지도 않고, 자유분방하지도 않습니다. 친하지 않은 사람과 어울린다거나 여행을 간다거나 하는 건 생각할 수도 없어요.”
“난 유금별씨랑 나름 친하다고 생각하는데?”
“네? 하지만 저는...”
“우린 키스도 한 사이잖아.”
“..!!..”
상대방이 당황하는 걸 즐기듯 식탁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괸 채 뚫어져라 금별을 바라보는 치산.
“무..무슨!.. 그건 없었던 일로 하기로 했잖아요!”
“말은 그래도 어떻게 한 걸 안했다고 하겠어.”
“대표님!”
치산은 금별이 자꾸만 고집스럽게 벽을 세우고 자신을 몰아내는 것 같아 괜스레 짜증이 났다.
“게다가 가슴까지 만졌는걸.”
“대표님!!”
더 이상 못 참고 벌떡 일어선 금별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아... 틀렸어.. 젠장, 너무 귀엽잖아.
그런 금별의 모습에 마냥 눈길이 가는 치산이었다.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다시 한 번 키스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화가 나 아랫입술을 깨문 채 노려보는 모습조차도 사랑스럽다.
뭐?? 사랑스러워??
그러다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흠칫 놀라고 만다.
어느새 치산은 금별을 단순히 귀엽다를 넘어 사랑스럽다고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으아... 망했다....
그는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고개를 숙였다.
“...대표님?.. 왜 그러세요? 어디 아프세요?”
화를 내다가도 갑자기 치산이 머리를 감싸 쥐자 걱정스런 말투로 묻는 금별.
“윽.... 안 좋아...”
“정말요? 어디가 안 좋은데요? 갑자기 왜 그러지? 급체했나?”
금별이 테이블을 돌아 치산에게로 다가왔다.
“대표님, 괜찮으세요?”
걱정스런 표정으로 치산의 얼굴을 보려 허리를 숙인 순간,
“읍!!”
벌떡 일어선 치산이 금별을 끌어안고 입술을 맞댔다.
갑작스런 공격에 놀라 버둥거렸지만 치산의 팔이 허리와 뒷목을 완전히 감싸 안는 바람에 금별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아... 미치겠다...
치산은 놀라 벌어진 금별의 입 속으로 혀를 밀어 넣어 마음껏 휘저으며 점점 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좀 더.. 조금만 더 깊게 느끼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이대로 가다간 이성이 날아가고 그대로 금별을 바닥에 눕힌 채 어떻게든 해 버릴 것 같았다.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행위를 강제로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건 폭력일 뿐이란 걸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성이 금별에게만은 잘 조절이 되지 않는다.
왜 그런지는 조금 전 깨달았다.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치산은 지금 금별에게 강하게 끌리고 있는 것이다.
이 무표정하고 담담해 보이는 남자가 사랑스러워 보일 만큼 아주 강하게.....
[똑똑]
점점 고조되어 가는 열기에 찬물을 끼얹은 노크소리에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 떨어졌다.
직원이 마지막 디저트를 서빙하고 나갈 때 까지 두 사람은 조금 떨어져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문이 닫히고 두 사람만 남자 그제야 멈췄던 시계바늘이 다시 째깍째깍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금별은 치산을 외면한 채 가방을 들고 문으로 향했다.
“잠깐만.”
하지만 몇 발자국 가지 못해 팔이 붙들렸다.
“동의 없이 키스한 건 미안해.”
“......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그런데 말야... 미안하지만 또 해도 될까?”
“대표님! 장난도 정도껏 치세요! 또 이러시면 그땐 정말 일 그만두겠습니다!”
“장난 아니야. 그래서 나도 곤란해.”
“...전... 싫어요. 호기심 때문에 이러는 거라면 사양하겠습니다.”
“호기심?”
“제가 호모라고 하니까 궁금해지셨나요? 호모라면 아무 남자나 집적대도 기뻐할 거라고 생각하셨어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난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그럼 앞으로는 이러지 마세요. 불쾌합니다.”
“유금별씨. 순수한 마음으로 다가오려는 사람을 이런 식으로 내쳐도 되는 거야? 불쾌하다고?”
“네! 저한테 다가오지 마세요! 싫습니다!”
“그런 식으로 사람 대하면 평생 혼자 살게 될 거야. 아무도 옆에 있으려고 안 할 테니까!”
“그래요. 그게 제가 바라는 겁니다. 누구와도 얽히지 않고 평생 혼자 살 거예요.”
“그런 억지가.......”
“억지 아닙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결심한 거예요. 그러니까 가벼운 마음이나 호기심으로 저한테 다가오지 마세요. 전 누구도 받아들일 생각이 없습니다. 가볍게 즐길 생각도 전혀 없고요. 단순한 비즈니스관계가 아닌 그 이상을 원하신다면 더 이상 대표님댁 일은 할 수 없을 것 같네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찬바람이 돌 정도로 냉랭하게 말하고는 돌아서서 나가버리는 금별.
“저 똥고집!... 쳇... 나도 바라는 바야. 제발 가벼운 호기심이었으면 좋겠다!!”
치산은 금별이 나간 문에 대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식당을 나와 집으로 향하던 금별은 자책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차가운 손끝으로 불안하게 떨리는 입술을 문질렀다.
자꾸 마음이 흔들린다.
숨 막힐 듯 꽉 끌어 안겼을 때의 그 아찔함과 떨림이 되살아나 자신도 모르게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뜨겁게 덮쳐오던 입술도 입 안을 헤집던 부드러운 혀도 더는 떠올려선 안 된다.
힘껏 저항했지만 벗어날 수 없었던 그의 품처럼 이대로 한 발만 내딛으면 빠져나올 수 없는 감정의 늪에 잠겨버릴 것 같다.
또 다시 그런 마음을 품게 되는 게 무엇보다 두려웠다.
실패는 한번으로 족하다.
과거와 같은 그런 일을 또 겪게 된다면 이번에야 말로 견딜 수 없을 것이다.
힘겹게 벗어난 길고 긴 터널....
자진해서 그 어둠 속으로 걸어들어 갈 수는 없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01.26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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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