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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강하게 다가가면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도망갈 것 같아 치산은 한동안 적당한 거리를 두고 금별을 대했다.
이쪽에서 한발 물러나자 다행히도 금별은 이전 같은 모습으로 돌아와 치산의 집을 오가게 되었다.
오랜만에 봄기운이 느껴지는 푸근한 주말이었다.
오찬모임을 마친 치산은 이숙희 여사가 입원 중인 병원으로 향했다.
한동안 회사일이 바빠 3주 만에 방문하는 것이다. 역시나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또 꽃이군요. 그래도 이번엔 장미가 아닌 게 다행입니다.”
“꽃 싫어하는 여자는 세상에서 우리 이여사님 한 명 뿐일 거야.”
“안색이 괜찮은 걸 보니 영양 상태는 나쁘지 않군요. 전에 얘기했던 가사도우미가 역할을 잘 하는 모양입니다.”
“응. 진짜 괜찮은 사람이야. 가능하다면 품 안에 숨겨놓고 혼자만 보고 싶은 심정이야.”
“흐음... 제가 알기론 남자였던 것 같은데... 맞나요?”
치산은 씩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숙희여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아.. 도련님이야 어릴 때부터 워낙 자유분방하고 제멋대로인 아이였으니 이제 와 새삼 설교를 늘어놔봐야 제 입만 아플 것 같군요.”
푸념에 가까운 말에 치산은 역시나 장난스런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데 요즘 좀 상황이 별로야. 그 녀석 수비가 너무 철통같아서 내가 비집고 들어갈 바늘구멍만한 틈도 안 보여준다고. 쳇...”
“연애상담이라면 상대를 잘못 찾아오신 것 같은데요? 아시다시피 전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답니다. 철부지 도련님 뒤치다꺼리 하느라 너무 바빠서 연애 근처에도 못 가봤죠.”
“그러지 말고 내 얘기 좀 들어봐. 어떻게 10년 전 사람을 아직도 못 잊고 살 수가 있어? 그건 너무 미련한 짓 아니야?”
“평생이 가도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는 법이죠.”
“그건 너무 불공평하잖아!”
“대체 누구한테 불공평하다는 거죠?”
“그야!.... 당연히 나한테...”
“도련님.”
이여사가 진지한 눈으로 치산을 바라보았다. 치산은 살짝 긴장감을 느꼈다.
“도련님은 그 사람과 어떤 관계가 되고 싶은 건가요?”
“......”
“구체적으로 그가 도련님을 어떻게 대해주길 바라시죠?”
“.........”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 겁니까?”
“......그건......”
치산은 문뜩 질문의 무게를 느끼고 표정이 굳어졌다.
어떤 ... 관계?...
물론, 지금처럼 비즈니스적인 관계로만 머물고 싶지 않은 건 분명했다.
좀 더 나아가 깊이있는 관계로 발전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
깊이 있는 관계라고?
그러다 또 한 번 스스로에게 흠칫 놀랐다.
이건 호기심도 일시적인 가벼운 바람기도 아니다.
그보단 좀 더 복잡하고, 감정적인 문제다.
보통 동성을 상대로 품에 안고 싶다거나, 키스하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산은 금별을 보면 평소 자신이 이성에게 바라던 욕구를 그대로 원하게 된다.
그건 단순한 육체적 끌림만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본능적인 욕구 뿐 아니라 금별에 관한 개인적인 일까지 속속들이 알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누굴 만나고 있는지 모든 게 알고 싶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시각. 금별의 모든 게 궁금하다.
“가볍게 대답하지 못하는 걸 보니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은 진지하군요.”
“... 나름 진지하다고 생각해.”
“그럴수록 소중하게 대하세요. 무모하게 밀어붙이지 말고.”
“알고 있어. 그래서 최대한 참고 있는 중이야.”
“훗... 우리 도련님을 이렇게 고민하게 만들 상대가 나타나다니... 누군지 궁금하네요. 아주 절세미인이겠는데요?”
“아냐 아냐. 그냥 평범한 녀석이야. 뭐.. 내 눈엔 꽤 귀엽지만...”
치산은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병원을 나와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치산은 이여사가 했던 질문을 계속 머릿속에 떠올렸다.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 건가요?......
금별과의 관계를 앞으로 어떻게 이어나갈지 고민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가까이 하고 싶고, 안고 싶은 사람.
보이지 않으면 불안하고 궁금한 사람.
어느새 정신 차리고 보면 머릿속이 온통 그 사람 생각뿐이다.
이건 그저 단순한 끌림 정도가 아니다.
그렇다면 ......
끼이이익---
차가 도로 한복판에서 멈춰 섰다.
뒤따르던 차들이 줄줄이 급정거를 하며 사정없이 경적을 울려댄다.
“좋아하는 구나... 나 그 녀석을.. 엄청 좋아하는 거야.”
단순히 사랑스럽다거나 귀엽다는 차원을 넘어 좋아하는 것이다.
그런 거라면 모든 게 이해된다.
만지고, 안고 싶은 감정들은 모두 좋아한다는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다.
김유환이란 과거에 집착하는 모습에 화가 난 건 질투 때문이었다.
아직도 옛 사랑을 잊지 못하는 그가 싫었던 것이다.
그래서 심술부리듯 짓궂게 행동했다.
폭설이 내리던 날 밤 기어이 집까지 찾아가 사과하고 돌아와 달라 부탁한 것도 두 번 다시 그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집안일을 잘 하는 사람이야 찾자고 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음식이 마음에 든다, 일을 깔끔하게 잘 한다는 등의 이유는 다 핑계일 뿐이었다.
어떻게든 금별과 다시 관계를 이어야 했기에 필요했던 이유들이다.
모든 걸 인정하고 나자 불현듯 금별이 너무도 보고 싶었다.
당장 이 마음을 고백하고 싶어 한껏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치산은 다시 차를 출발시키며 빠르게 속력을 높였다.
그가 미치도록 보고 싶다.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우자마자 뛰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그 짧은 시간이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 연신 초조하게 서성였다.
그러다 문이 열리자 스프링처럼 튀어나가 현관문을 열었다.
차버리듯 신발을 벗어던지고 성큼성큼 복도를 걸어 주방으로 향했다.
“아.. 생각보다 빨리 오셨네요. 아직 저녁준비가 다 안 됐.... 대표님?..”
심상찮은 얼굴로 빠르게 다가온 치산이 금별을 와락 끌어안았다.
“대표님!”
“잠깐만... 부탁이야. 잠깐만 이대로 있어줘.”
100미터 달리기라도 한 듯 숨을 크게 내쉬는 치산. 금별은 맞닿은 가슴에서 치산의 심장이 세차게 고동치는 걸 느꼈다.
“무슨 일.. 있으세요?”
금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응. 큰일 났어.”
치산은 금별을 꽉 끌어안은 채 한숨을 푹 내쉬며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회사에 무슨 안 좋은 일 있어요?”
큰일이란 말에 금별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서린다.
“아니... 회사는.. 알아서 잘 돌아가고 있어.”
“그런데 뭐가 문젠데요? 혹시.. 오늘 병원 다녀오신다더니 무슨 안 좋은 소식이라도...”
금별이 조심스레 물었다.
치산은 말없이 고개만 가로저었다.
“그럼 대체 무슨......”
“좋아해.”
“..!!..”
순간 금별의 표정이 굳었다. 그 뿐 아니라 몸까지 경직됐다.
금별을 안고 있던 치산은 그 찰나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나 진짜로 유금별씨가 좋아졌어. 아니, 이미 전부터 좋아하고 있었어. 이제 깨달았지만...... 진짜 큰일 났지?”
“......”
금별은 한동안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갑작스런 고백에 놀라 한순간 사고가 정지 돼버린 것 같았다.
그 이후에 찾아온 건 불안한 떨림.
금별은 최대한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으려 애쓰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 네.. 정말.. 큰일이네요.”
“아아.. 냉정하게 말하지 말아줘. 유금별씨가 너무 좋다고. 누군가에게 먼저 고백하는 건 유치원때 이후로 처음이야. 나 지금 엄청 심각해.”
“......죄송해요... 저는...”
“쉿. 알아. 알고 있어.”
“........”
“그래도 역시 유금별씨가 좋아. 이렇게 안고 있으니까 좋아서 미칠 것 같아. 키스해도 돼?”
“안돼요!”
“조금만.. 응?”
“글쎄 안 된..... 읍!”
결국 참지 못하고 치산은 그대로 금별의 입술을 막아버렸다.
“그..그만!!”
금별은 고개를 돌려 피하려했지만 마구 흔들어 놓은 맥주캔을 딴 듯 한번 터지기 시작한 치산의 감정은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하아.. 하아.. 좋아해.. 정말.. 당신이 미치도록 좋아.”
정신 나간 사람처럼 속삭이며 금별의 입술을, 귓불을, 목덜미를 미친 듯이 훑어갔다.
금별은 어떻게든 밀어내려 버둥대며 저항했지만 체력의 차이만큼이나 힘의 격차도 컸다.
치산은 꿈쩍도 않은 채 그대로 금별을 주방 바닥으로 쓰러뜨린 후 그 위에 올라탔다.
“아...안 돼!.. 흣!..”
잡아 뜯듯이 겉옷을 밀어 올리고 가슴을 더듬는가 하면 나직한 배에 얼굴을 묻고 핥았다.
이런 무식한 공격에 금별은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다.
머리로는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에 점점 힘이 빠져 저항은 약해져만 갔다.
뭔지 모를 소용돌이에 휩쓸리듯 금별은 치산이 몰아세우는 대로 떠밀려가고 있었다.
뒤통수를 맞은 듯 번쩍 정신이 든 건 찌지직하며 바지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를 들었을 때였다.
“그..그만!”
퍽!
있는 힘을 다해 다리를 쳐 올렸는데 무릎이 정확히 치산의 명치를 가격하고 말았다.
제대로 급소를 맞은 그는 비명은커녕 한동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컥컥거리며 바닥을 뒹굴었다.
“괜찮아요?! 대표님! 대표님!!”
놀란 건 금별도 마찬가지였다.
저항해야겠다는 의지는 있었지만 이렇게 상대를 때려눕힐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숨을 컥컥대며 괴로워하는 치산의 상체를 끌어안고 금별은 어쩔 줄 몰라 쩔쩔매고만 있었다.
“119! 당장 119 부를게요!”
“...크.....괘......괜....찮.....읏..”
“대표님!!”
“그..냥... 후우..후우... 잠시만.. 이대로...”
치산은 조금 전 자신의 명치를 사정없이 쳤던 금별의 무릎을 베고 새우처럼 구부려 누운 채 통증이 가라앉길 기다렸다.
제대로 얻어맞긴 했지만 야단법석을 떨며 응급실을 찾을 정도는 아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가슴에 뻐근함만 남을 뿐 간신히 진정되었다.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
“...... 창피해.”
“네?”
“억지로 덮치려다 걷어차이고 뻗어버렸잖아. 완전 꼴사나워.”
“...풋....”
“웃지 마. 이불 속에 얼굴이라도 쳐 박고 싶은 심정이니까.”
“하하.. 하하하..”
“자꾸 비웃을 거야?”
“하하하하!”
얼마 만에 이렇게 소리 내어 웃어보는 지 모른다.
금별은 자꾸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 없어 큰 소리로 웃어버렸다.
어느 모로 보나 완벽해 보이는 이 남자의 허술한 모습이라니... 한껏 풀이 죽어 시무룩해진 얼굴이 사랑스러워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그만 웃어 진짜!”
“풋....하하하”
“너 은근히 못됐구나. 남의 아픔을 그렇게 비웃다니.”
“쿡...쿡쿡..”
“자꾸 웃으면 가만 안 둔다.”
치산은 여전히 금별의 무릎을 베고 누운 채 위를 올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 사랑해.”
“...!!...”
거짓말처럼 금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천천히 시선을 내리자 자신을 똑바로 올려다보는 치산의 진지한 얼굴과 마주쳤다.
그의 팔이 금별의 목을 감싸더니 가만히 끌어당긴다.
자석에 이끌리듯 서서히 좁혀지는 두 사람의 거리.
입술이 맞닿았다.
혀를 얽고 깊이 빨아들이는 뜨거운 키스가 아니었다.
그저 가만히 입술만 맞대고 있었다.
다른 곳보다 얇고 예민한 입술 점막 아래로 뜨거운 피가 몰려든다.
“하아.......”
금별은 그 뜨거움과 숨 막힘을 참지 못해 탄식하듯 긴 한숨을 뱉어냈다.
그제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치산의 혀끝이 달콤한 사탕을 핥듯 가만히 입술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고른 치열을 슬며시 훑은 뒤 입천장과 혀 밑까지 꼼꼼하고 느긋하게 음미해 간다.
자꾸만 흠칫흠칫 물러나는 금별의 혀를 달래듯 휘감아 천천히 빨아들였다.
금별은 치산의 입술과 혀가 전하는 마법 같은 달콤함에 서서히 빠져 들어갔다.
어느새 두 사람의 자세는 바뀌어 있었다.
몸을 일으킨 치산은 그대로 금별의 허리를 바짝 끌어안은 채 키스했다.
손가락 끝으로 힘이 모조리 빠져나간 듯 금별은 치산의 품 안에 맥없이 기대있었다.
치산의 옷깃조차 잡을 힘이 없었다.
그저 중간 중간 잠시 입술이 떨어져나간 사이 숨을 헐떡이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곧 치산의 입술로 막혀버렸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키스였다.
몇 번이고 각도를 바꿔가며 치산은 지치지도 않고 금별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길고 뜨거운 키스에 점점 몸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금별은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비틀며 엉덩이를 뒤로 뺐다.
그러나 치산은 그마저도 용납지 않고 더 바짝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몸이 한 치의 틈도 없이 맞닿았다.
서로의 욕망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금별은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몸이 뜨거워진 것도 그렇지만 이런 모습을 치산이 모두 알고 있다는 게 부끄러웠다.
금별은 다시 도망치려 꿈틀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또다시 쫓아온 치산의 입술을 피할 수 없었다.
이젠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심장이 아프도록 뛰고 몸은 더할 수 없이 뜨겁게 달궈졌다.
사로잡힌 입술에선 달콤한 한숨만 새어나올 뿐이다.
조용한 집안에 두 사람의 거칠어진 숨소리와 입술사이로 들리는 마찰음만이 가득하다.
치산은 금별의 부드럽고 따뜻한 입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몇 번을 맛보아도 그 달콤함은 어떤 것과도 비교가 안 된다.
마음을 준 상대와의 키스는 단순한 행위 그 이상의 의미였다.
그건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의 교감이었고 한껏 마음을 채워주는 충족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입술로만 전달될 수 있는 행복이었다.
같은 마음이 아니고서야 이런 행복한 키스가 가능한 걸까?
치산은 문뜩 의구심이 들었다.
무아지경에서 한 걸음 물러나 슬쩍 실눈을 뜨자 두 눈을 꼭 감은 채 잔뜩 상기되어 있는 금별의 얼굴이 보인다.
양 뺨이 붉어진 게 너무나 사랑스럽다.
이런 무방비한 모습으로 빠져있다니......
금별의 얼굴을 보자 치산은 더욱 확신에 차버렸다.
이건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자 억누를 수 없는 기쁨이 솟구쳤다.
한껏 고무되어 이대로 금별을 쓰러뜨리려는 순간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금별이 치산의 가슴을 밀어냈다.
“괜찮아. 저딴 건 무시해버려.”
치산은 식탁 위에 올려둔 휴대폰으로는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잠시 떨어져 나간 금별의 입술을 다시 찾았다.
“안돼요! 전화... 받으세요.”
하지만 이미 제정신으로 돌아온 금별은 완강히 거부하며 고개를 돌렸다.
긴 키스의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치산은 다시 차가워진 금별의 태도에 낙담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몸을 일으켜 여전히 세차게 울려대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액정을 확인하자 그의 비서 김상윤이었다.
“뭐야!!”
확 솟구치는 화를 주체하지 못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깜짝이야! 귀청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뭐냐고!! 왜 전화 했냐고!”
[내일 오후에 김회장님과 골프약속 있는 거 잊지 않으셨죠? 어렵게 잡은 시간이니까 늦지 않게..]
“안가! 안가!!”
치산은 전화를 확 끊어버렸다. 그리고는 아예 배터리까지 빼버렸다.
“미안, 김비서가 별 중요하지도 않은 용건으로 ... ?!.. 유금별씨?..”
홧김에 배터리를 빼 식탁에 올려놓고 돌아서자 그곳에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황급히 둘러보자 어느새 겉옷을 챙겨들고 조용히 현관으로 걸어 나가는 금별이 보인다.
“잠깐만! 이대로 가는 게 어딨어!”
“안녕히 계세요!”
금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쳐 나왔다.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뛰어 올라 연신 닫힘버튼을 눌렀다.
“유금별씨! 어이! 유금별!!”
뒤쫓아 온 치산의 얼굴이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에 가려져 가늘어졌다 이내 사라진다.
좁은 공간에 혼자가 되자 금별은 그제야 크게 숨을 내쉬며 풀썩 주저앉았다.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고 열이라도 나는 듯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오른다.
그 남자는 위험하다고 생각했었다.
계속 무의식 속에서 경고음이 울리고 있었다.
한번 멀어졌을 때 알아채고 외면했어야 했는데 어리석게 또 다시 걸려들고 말았다.
깨닫고 싶지 않았던 진실이 어쩔 수 없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금별은 괴로움에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안 돼... 이럴 순 없어. 난.......’
행복해 질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오래전 괴로워하는 연인을 잡아주지 못하고 허무하게 떠나보냈다.
그래놓고 이제 와 혼자만 행복해질 순 없다.
그건 죽은 연인에 대한 배신이고 부정한 마음이다.
금별은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좋아하지 않아... 좋아하지 않아.”
주문처럼 몇 번이나 되 뇌이며 스스로를 책망했다.
그 이후 다시 만난 금별의 태도는 완강하고 단호했다.
깊이 나누었던 키스도 “실수였어요. 죄송하지만 잊어주세요.”라는 차가운 한마디로 무시해버렸다.
치산은 미칠 것 같았다.
키스를 하며 깨달은 건 금별 또한 자신의 마음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당사자가 끈질기게 인정하지 않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치산은 일하고 있는 금별을 강제로 끌고 와 자신의 사무실에 밀어 넣었다.
부드럽게 설득도 해 보고, 협박하듯 강압적으로 밀어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금별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대표님의 마음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계속 강요하신다면 일을 그만두겠습니다.”
“또 그 말이야?! 대체 그 협박은 몇 번을 써먹는 거야!”
“통한다면 몇 번이라도 쓰겠습니다.”
“제기랄!!”
이대로 일을 그만두고 금별이 자신의 시야에서 멀어지는 것. 그건 지금 치산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었다.
그러니 그 협박이 먹히지 않을 리 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일을 그만두겠다는 얘긴 하지 말아줘. 부탁이야.”
“그럼 제 부탁도 들어주세요. 더 이상 제게 마음 쓰지 마세요. 대표님은 저에게... 과분한 분이십니다. 대표님과 어울리는 사람과 만나세요. 누가 보더라도 저는 아니에요.”
금별 역시 치산이 한 때의 감정으로 이러는 것이라 여기고 차분히 이 시기가 넘어가길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치산의 마음은 한 때라고 말하기엔 깊이가 달랐다.
그걸 금별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당장 유금별씨 마음을 달라고 조르진 않겠어. 대신, 내 감정까지 가볍게 치부하진 말아줘. 당신을 좋아하는 내 마음이 부정당할 필욘 없잖아.”
“.....죄송합니다. 전 다만...”
“알았어. 강요하지 않을게. 그 대신 기다릴 테니까 언제라도 내게 마음을 열어줘.”
“대표님...”
“그리고 또 하나. 내 눈 앞에서 사라지지 마. 도망치는 건 용서 못해.”
금별은 아무 말 못하고 사무실을 나와야했다.
연애에 있어서 한없이 가벼워 보이던 저 남자에게 이런 끈기와 순수가 남아 있을 줄은 몰랐다.
호기심이 길어져 이상한 끌림으로 발전한 거라 여기며 그저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흥미로운 누군가에게 눈길이 가겠지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괜히 마음이 씁쓸해져 혼자 민망해하곤 했다.
그런데 그런 줄만 알았던 사람이 진지한 얼굴과 말투로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어디까지가 즉흥적인 감정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기다리겠다는 말과 도망치지 말라는 말에 가슴이 뛰었다.
표정을 감추느라 애를 써야 할 만큼 감정이 동요했다.
강해지자고.. 혼자서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자고 10년 간 수없이 다짐했는데 치산을 만난 이후 자꾸만 흔들리고 약해지는 것 같아 두려웠다.
첫댓글 인정했네 인정했어~~
글 잘 읽고 가요
^^ 쿨(?)하게 인정했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너무재밌어요~!! 잘 읽고갑니다
고마워요~ 크리스마스 즐겁게 보내세요~
너무 좋아요~ 다음편이 기대 되요~
다음편 지금 막 올렸어요. 얼른 읽어주세요~~
잘읽었습니다!! 금별이 행복해졌음 좋겠어요
감사해요^^ 힘들었던 만큼 행복해져야죠!
너무 재미있게 잘봤습니다! 어서 빨리 다음편도 보고싶네요ㅎㅎ
재밌게 봐주셨다는 말이 그저 감사하네요. ^-^ 고맙습니다~!
너무 잘읽었어요 정말 재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