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1독서
“나는 너희 조상을 강 건너편에서 데려왔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 약속된 땅으로 데려갔다.”
<여호수아기의 말씀 24,1-13>
그 무렵
1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스켐으로 모이게 하였다.
그가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우두머리들과 판관들과 관리들을 불러내니, 그들이 하느님 앞에 나와 섰다.
2 그러자 여호수아가 온 백성에게 말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옛날에 아브라함의 아버지이며 나호르의 아버지인 테라를 비롯한 너희 조상들은 강 건너편에 살면서 다른 신들을 섬겼다.
3 그런데 나는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건너편에서 데려다가, 온 가나안 땅을 돌아다니게 하고 그의 후손들을 번성하게 하였다.
내가 그에게 이사악을 주고,
4 이사악에게는 야곱과 에사우를 주었다.
그리고 에사우에게는 세이르 산을 주어 차지하게 하였다.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이집트로 내려갔지만,
5 나는 모세와 아론을 보내어, 이집트 가운데에서 그 모든 일을 하여 그곳을 친 다음, 너희를 이끌어 내었다.
6 내가 너희 조상들을 이렇게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었다.
그 뒤에 너희는 바다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집트인들이 병거와 기병을 거느리고 갈대 바다까지 너희 조상들의 뒤를 쫓아왔다.
7 그래서 너희 조상들이 주님에게 부르짖자, 주님이 너희와 이집트인 사이에 암흑을 갖다 놓고 바닷물을 끌어들여 그들을 덮쳐 버렸다.
이렇게 내가 이집트에서 한 일을 너희는 두 눈으로 보았다.
너희가 광야에서 오랫동안 머무른 뒤에,
8 나는 너희를 요르단 건너편에 사는 아모리인들의 땅으로 데려갔다.
그때에 그들이 너희에게 맞서 싸웠으나, 내가 그들을 너희 손에 넘겨주어, 너희가 그들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패망시킨 것이다.
9 그 뒤에 모압 임금, 치포르의 아들 발락이 나서서 이스라엘에게 맞서 싸웠다.
그는 너희를 저주하려고 사람을 보내어 브오르의 아들 발라암을 불러왔다.
10 그러나 나는 발라암의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너희에게 축복해 주었다.
나는 이렇게 너희를 발락의 손에서 구해 주었다.
11 너희가 요르단을 건너서 예리코에 이르렀을 때에는, 예리코의 지주들, 곧 아모리족, 프리즈족, 가나안족, 히타이트족, 기르가스족, 히위족, 여부스족이 너희에게 맞서 싸웠다.
나는 그들도 너희 손에 넘겨주었다.
12 나는 또 너희보다 앞서 말벌을 보내어, 아모리족의 두 임금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었다.
그렇게 한 것은 너희의 칼도 너희의 화살도 아니다.
13 그러고 나서 나는 너희에게 너희가 일구지 않은 땅과 너희가 세우지 않은 성읍들을 주었다.
그래서 너희가 그 안에서 살고, 또 직접 가꾸지도 않은 포도밭과 올리브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게 되었다.’”
✠ 복음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9,3-12>
그때에
3 바리사이들이 다가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읽어 보지 않았느냐?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나서,
5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
6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7 그들이 다시 예수님께,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 하자,
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
10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
12 사실 모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고, 사람들 손에 고자가 된 이들도 있으며,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헤어진다는 것>
남성은 결혼을 통해 정신적 안정을, 여성은 경제적 안정을 얻으려 한다고 합니다.
한 결혼정보업체가 미혼 남녀 56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결혼을 통해 보완하고 싶은 것으로 남성의 54.6%가 ‘정신적 안정 및 풍요’를 꼽았고, 12.1%는 ‘가사에 도움’이라고 답했습니다.
반면에 여성들은 47.2%가 ‘경제적 안정’을 꼽았고, 정신적 안정 및 풍요가 25%, 사회적 지위가 8.3%로 나타났습니다.
남성의 지향과 여성의 지향이 다르다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하고 살겠다며 결혼을 합니다.
그러나 초호화 결혼식을 올린 부부도, 잉꼬부부로 알려진 부부도 쉽게 헤어지는 모습을 봅니다.
많은 경우 ‘성격 차’ '경제적 이유' 때문에 도저히 같이 살 수 없다며 각자의 길을 갑니다.
성격이야 서로 다른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상대의 성장 과정이나 환경이 다를진대 어찌 성격이 똑같겠습니까?
쌍둥이로 태어난 사람도 같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서로를 인정하고 부족함을 채워주는 가운데 더 깊은 사랑을 만들어 가는 것이지요.
그러나 너무도 쉽게 너와 내가 다른 것을 ‘네가 틀렸어'로 몰아부치고 맙니다.
그래서 마침내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등을 돌립니다.
'너 아니면 안 된다'고 하던 마음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마태 19,6)
혼인을 하느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헤어질 수 없지만, 단순히 사람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혼을 쉽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하느님과 일가친척 앞에서 서약하였습니다.
남녀는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존재이지, 욕심을 채우는 수단이 아닙니다.
서로는 동반자이면서 서로 사랑을 받고 존경을 받아야 할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단순히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과 우리 자신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원에서부터 인간의 신랑이시고 인간은 하느님의 신부입니다(예레 31,3).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하느님을 향한 믿음의 관계를 지켜야 합니다.
철학자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지혜롭고 의롭고 착한 사람을 소크라테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불행하게도 결혼만은 잘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의 아내 크산디페는 세기의 악처로 이름이 나 있습니다.
물론 집안 살림에는 관심도 없는 남편을 좋아할 아내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남편에게 바가지는 예사이고 심지어는 때리기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태산 같은 인내심으로 이겨 나갔습니다.
하루는 아내가 마구 욕을 해 대다가 아무 대꾸를 하지 않는 소크라테스로 인해 화가 풀리지 않자 걸레를 빤 물을 남편의 머리에 끼얹었습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태연하게 “뇌성벽력이 대단하더니 종래는 비가 오고야 마는군”하였답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문제가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부부간에 크고 작은 고민거리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나 참고 견디면 성공하는 것이요, 인내하지 못하면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남편 된 사람은 자기 아내를 자기 몸같이 사랑하고, 아내 된 사람은 자기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
(에페 5,33).
“결혼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인데 아내는 남편과 헤어져서는 안 됩니다.
만일 헤어졌거든 결혼하지 말고 혼자 지내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 남편과 다시 화해해야 합니다.
또 남편은 자기 아내를 버리면 안 됩니다.”
(1고린 7,10-11)
서로간의 관계 안에서도 신의를 지키고 부족함을 가슴에 담을 수 있는 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던히 참아주고 변화를 기다려주는 넉넉함이 우리를 풍요케 할 것입니다.
헤어지자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전쟁터에 나갈 때는 한 번 기도하고, 바다로 항해를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며, 결혼할 때는 세 번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러시아 속담)
결혼해서 일생을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나 풍랑이 몰아치는 험한 바다보다도 더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 순간 기도하며 애쓰지 않으면 서로의 다른 점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인생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삶으로 엮어야 하겠습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배우자만을 위한 그런 사랑은 없다>
오늘 복음은 결혼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혼의 가장 많은 이유가 ‘성격 차이’라고 합니다.
성격의 차이로 이혼이 가능한 것일까요?
성격이 똑같으면 더 못 살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라는 질문에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라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시며,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혼이 많은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이 배우자를 위해 결혼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배우자만을 위한 사랑이 가능할까요?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아름다운 사랑의 비극이 있습니다.
둘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랑을 하려다가 로미오도 죽고 줄리엣도 따라서 죽습니다.
이들의 사랑은 상대를 위한 것이었을까요?
약을 먹고 죽은 것처럼 쓰러져 있는 줄리엣을 발견한 로미오는 자신도 자살합니다.
줄리엣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로미오가 죽은 것을 보고 줄리엣도 자살합니다.
이것이 정말 아름다운 사랑일까요?
상대가 없으면 죽어야만 하는 사랑은 그것 자체로 ‘상대를 위한 사랑’이 아닌 ‘나를 위한 사랑’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없어져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죽겠다는 말은 상대를 이용해 나의 행복을 채우겠다는 이기적인 마음입니다.
사실 그런 마음으로 결혼을 했어도 그 결혼에 실패합니다.
사랑은 결코 이기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을 방해하는 것은 가족들이었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사랑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결혼이라는 것이 제 부모를 떠나 새로운 사람과 결합하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사실 로미오와 줄리엣도 부모를 떠나 사랑을 완성하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부모를 떠나서는 절대 이기적인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상대가 자신에게 더는 행복을 주지 못하면 그런 사랑은 곧 비극으로 끝나고 맙니다.
상대를 사랑한다는 거짓으로 나의 행복을 채우려는 이기적인 사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아를 버리는 순종적인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자아를 통제할 줄 알도록 나를 교육해 준 분들은 부모님입니다.
따라서 부모에게 순종하여 결혼하는 것이 혼자 결정하여 결혼하기 위해 집을 뛰쳐나가는 결혼보다 훨씬 오래 갑니다.
부모를 위한 결혼처럼 보일 수 있어도 누군가를 위한 결혼을 하며 자기를 위한 이기적인 결혼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부모 앞에서만은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애라도 씁니다.
그렇게 부모를 위해 사랑하려고 합니다.
이 정도만 해도 부모와 상관없이 혼자 사랑하겠다는 이기심에서 많이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결혼도 한계가 있습니다.
부모를 위한 결혼을 해도 자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기 자식이 이 세상에서 잘 되기를 바라기에 부모의 마음을 따르다가는 자신도 그런 이기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칫 ‘정략결혼’처럼 됩니다.
부모를 위한 결혼을 하는 사람이라면 부모의 마음에 안 들면 자신도 배우자를 마음에 안 들어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부모가 반대하면 결혼도 못 하고 이혼도 못 하고 때에 따라서는 이혼을 해야만 합니다.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부모의 반대로 배우자에 대한 사랑이 흔들리는 수많은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기적인 사랑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요?
부모도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은 자기 생존을 위해 이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완전히 이타적인 분은 창조자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위한 사랑은 그분의 뜻에 따라 이타적인 사랑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에게 결혼을 허락받을 줄은 알면서도 왜 하느님께 허락받는 것은 생각하지 못할까요?
팔다리가 없었던 닉 부이치치는 8살 때 이미 자살 시도를 했고 아내의 손을 잡고 걸을 수도 없는 자신과 누가 결혼해 주겠느냐는 걱정을 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닉 부이치치’는 일본계 미국인 ‘카나에 미야하라’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는 미야하라에게 첫눈에 반하여 사랑을 고백했지만, 미야하라는 평생을 그 사람과 함께 살 자신이 없었습니다.
이때 닉 부이치치는 자신들의 사랑을 하느님께 맡겨보자고 합니다.
1년 동안 만나지 말고 1년 뒤에 다시 만났을 때 서로의 사랑이 더 증가하였다면 그것을 하느님께서 사랑을 허락해 주신 표징으로 믿자고 하였습니다.
어쩌면 미야하라는 단 몇 번 본 그 팔다리 없는 사람을 1년 뒤 더 사랑하게 될 것이란 것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1년 뒤 그녀는 하루하루 닉에 대한 사랑이 더 증가한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하느님을 위한 사랑은 하느님을 위하는 마음 때문에 자아의 이기심이 죽으며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사랑을 하게 됩니다.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하느님 사랑을 닮은 사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온전히 부모로부터 떠나게 됩니다.
부모가 주는 이기적인 뜻으로부터 떠나게 되어 더는 부부의 사랑이 자신들의 부모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 사랑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사랑이라는 확신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랑은 영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맺어주시지 않는 사랑은 항상 이기적이고 그래서 한계를 경험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혼인은 성사입니다>
혼인은 성사입니다.
하느님 안에 이루어진 거룩한 계약입니다.
이혼 앞에서 더욱 심사숙고를 거듭해야 마땅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 기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의 복음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면서 느끼셨던 보람이 참으로 컸을 것입니다.
오랜 병고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예수님 당신의 손길을 통해 치유되고 새 삶을 시작했습니다.
말씀에 목말라하던 사람들이 생명수 같은 당신의 신선한 말씀을 통해 큰 위로와 힘을 얻었습니다.
감사하고 환호하는 백성들을 바라보는 예수님 역시 무척 기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오랜 악습과 죄에서 돌아서 회개하는 백성들의 모습에 힘이 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께서 크게 실망하시고 슬퍼하신 적도 부지지수였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니고 있던 완고함 때문에 눈물도 많이 흘리셨습니다.
특히 당신 수난과 죽음이 이제 바로 코앞인데, 끝끝내 당신의 강력한 구원 의지와 당신 백성들을 향한 절절한 사랑을 몰라주는 사람들의 완고함 앞에 그분께서도 굵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완고함 때문에 슬퍼하시고 눈물 흘리십니다.
이글거리며 불타오르는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조금도 몰라주는 우리의 냉담함과 완고함에 앞에 슬피 우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못마땅해 하시는 완고함과 냉담함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된 특징이었습니다.
사실 모세가 처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결혼생활을 지탱해나가기가 힘들 때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라고 흔쾌히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한번 맺은 혼약은 절대로 갈라서서는 안 된다고 그토록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찾아오고 또 찾아오고 집요하게 떼를 쓰고 하다 보니, 아주 특별한 케이스에 한해서 예외적으로 허락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리사이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확대 해석해서 너무나도 당연히 이혼장 운운하고 있는 것입니다.
완고하고 독선적이며, 아전인수의 대가인 바리사이들 앞에 예수님은 더 이상 뒤로 물러서지 않으십니다.
아주 강경하게 결혼과 관련된 불변의 원칙을 재천명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마태오 복음 19장 6절)
예수님 시대 당시 ‘이혼장’이 악용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습관은 신명기 24장 1-4절에 근거한 것이지요.
거기 제시된 율법에 따르면, 아내에게 무엇인가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한 남편은 그 여인을 쫒아내기 전에 이혼장을 써야만 했습니다.
이 이혼장을 손에 쥔 여인은 전 남편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혼장은 또한 재혼을 위해 필요한 서류였습니다.
모세는 너무도 문란한 결혼생활, 또 그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들을 최소화하기 위해 예외적으로 이혼장을 사용할 것을 당부했지만, 유대인들은 이 관습을 남용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아내와 이혼할 수 있다는 자신들의 이 관습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혼장은 점점 더 남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내에게 수치스런 일’이란 원래 아내의 불륜만을 지칭했지만, 후에는 그에 대한 적용이 더 확대되었습니다.
결혼 후 10년이 지나도 아이가 없는 아내, 남편과 말다툼 하는 아내, 친척 앞에서 불손한 태도를 취하는 아내, 베일을 쓰지 않고 외출한 아내, 다른 남자와 말을 하는 아내, 고기를 지나치게 바싹 구운 아내, 국을 끓였는데, 간을 제대로 못 맞춘 아내, 가정사를 남에게 퍼트린 아내 등 별의 별 이유를 들어 아내를 내쫒게 되었습니다.
이혼장은 유다 백성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고집 센 기질, 굳어진 마음, 문란한 생활, 끝도 없는 타락 때문에 겨우 예외를 허락해 준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입법자로서의 모세는 당연히 이혼을 금하는 법령을 제정하고 일관되게 밀고 나갔어야 했는데, 히브리 민족의 윤리적 타락이 그것을 불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을 돌아봅니다.
숱한 이혼들로 인한 사회적 문제가 심각합니다.
물론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결혼생활보다는 이혼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도 예외적인 규정을 정해 이혼한 사람들을 구제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억할 것은 혼인은 성사입니다.
하느님 안에 이루어진 거룩한 계약입니다.
이혼 앞에서 더욱 심사숙고를 거듭해야 마땅합니다.
- 살레시오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인간은 자유를 좋아하고 자유로워야 합니다.
인간이 자유로워야 하는 이유는 자유가 우선 인간의 기본권이기 때문인데, 그런데 기본권이라고 함은 자유가 남이 주거나 뺏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침범할 수 없도록 누구에게나 주어진 권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유로워야 하는 더 큰 이유는 자유가 사랑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사랑하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지요.
내가 만일 누구로부터 사랑을 받고자 하면 사랑받고 싶은 그에게 자유를 줘야 합니다.
사랑을 강요하면 할수록 사랑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유를 이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
자유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자유입니다.
전근대를 지나 근대에 들어서면서 개인이 탄생하였다고 하는데, 이때 개인이 탄생하였다고 함은 없던 개인이 탄생한 것이 아니라 집단에 의해 무시되고 희생된 개인이 개인으로 있게 되었다는 뜻이지요.
전근대 시대에는 집단만 있고 개인과 개인의 자유는 무시되고 없었습니다.
무시라는 말이 없을 無에 볼 視니 있는데도 없다고 보는 거라는 뜻이지요.
그러니까 집단에 의해 개인이 무시된다는 것은 엄연히 개인이 있는데 개인은 없는 것처럼 여겨지고 그 자유를 박탈한다는 뜻이지요.
그 대표적인 것이 혼인입니다.
결혼하는 것은 나인데 결혼 상대를 내가 아니라 집안끼리 정합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개인의 자유와 사랑의 자유를 더 중대하고 심각하게 무시하고 침해하는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근대에 들어 결혼 풍습이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결혼, 사랑으로 인연을 맺는 결혼으로 바뀐 것은 바람직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는 반드시 사랑의 자유여야만 바람직하지, 그렇지 않은 자유는 바람직하다 할 것이 못되고 특히 결혼과 관련해서는 더더욱 그렇지요.
근대를 지나 탈근대 시대에 접어든 지금 개인주의와 자유는 타락을 하여 사랑과 일치는 사라지고, 이기주의적이고 배타적인 개인주의가 되었고, 개인은 고립을 살게 되었지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듯이 사랑해서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좋으면 결혼하고 싫어지면 이혼하게 되었으며 이마저도 싫은 사람은 아예 결혼하지 않고 혼족과 혼밥과 혼술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자주 지적하듯이 요즘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은 말버릇도 이상합니다.
사랑한다고 해야 할 것을 '나 너 좋아해'라고 합니다.
좋아하는 것이 좋은 것 같지만 실은 싫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다 자기중심적이고 소유적이기 때문이고, 그래서 좋을 때는 소유하고 싫어지면 물건 버리듯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놀랍게도 그 옛날 바리사이들도 같은 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라며 마치 물건 버리듯 아내를 버려도 되는지 묻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같이 살 생각을 하지 않고 버릴 이유만 찾는 겁니다.
놀랍게도 자유연애를 하는 지금이든 그 옛날이든 사랑하지 않으면 사람을 사물화하여 좋을 때는 소유하고 싫어지면 버리게 되는 거지요.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인간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며, 사랑하라고 짝지어주신 것이며, 마음대로 소유했다가 마음대로 버려도 되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의 선택이 아닌 인간의 자유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으로 저에게 들리는 오늘 이 아침입니다.
- 작은형제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