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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한 영의 음성
욥기 4:12-21
12 어떤 말씀이 내게 가만히 이르고 그 가느다란 소리가 내 귀에 들렸었나니
13 사람이 깊이 잠들 즈음 내가 그 밤에 본 환상으로 말미암아 생각이 번거로울 때에
14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러서 모든 뼈마디가 흔들렸느니라
15 그 때에 영이 내 앞으로 지나매 내 몸에 털이 주뼛하였느니라
16 그 영이 서 있는데 나는 그 형상을 알아보지는 못하여도 오직 한 형상이 내 눈 앞에 있었느니라 그 때에 내가 조용한 중에 한 목소리를 들으니
17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깨끗하겠느냐
18 하나님은 그의 종이라도 그대로 믿지 아니하시며 그의 천사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19 하물며 흙 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 앞에서라도 무너질 자이겠느냐
20 아침과 저녁 사이에 부스러져 가루가 되며 영원히 사라지되 기억하는 자가 없으리라
21 장막 줄이 그들에게서 뽑히지 아니하겠느냐 그들은 지혜가 없이 죽느니라
욥기에 대한 가장 중요한 해석은 야고보서에 담겨 있습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 5:10-11).
이때 ‘인내’는 헬라어로 (휴포모네)입니다. 이것은 힘든 ‘상황’ 속에서 견디는 것을 뜻합니다. 욥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의하심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의하심이 죄인인 자신에게서 만족될 수 없기에 욥은 중보자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고 그 중보자를 희미하게 바라며 소망하게 됩니다. 즉, 욥의 믿음이 욥의 인내를 가져오게 하였는데 그 믿음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그 성품에 의해 반드시 등장하게 될 중보자 메시야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따라서 욥은 참된 반석에 믿음을 두었기 때문에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야고보 사도에 따르면 인내는 반드시 ‘끝’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 ‘끝’은 열매입니다. 그 열매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 ‘끝’을 보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한량없이 맛보며 그분의 선하심과 공의하심을 더욱 확신하게 됩니다. 우리 주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의하심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만족됩니다. 그러므로 욥이 그 끝을 보았다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보았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욥과 같은 복음적인 인내는 언제나 열매를 맺습니다. 그 끝을 봅니다. 하나님의 해답인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욥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마침내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뵙니다. 그것이 욥의 인내가 얻은 끝입니다.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사도들은 성도들에게 믿음에서 나는 인내를 권합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 8:14-15).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눅 21:17-19).
여기서 인내는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믿음에서 나는 인내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신자의 ‘인내’를 위해 믿음을 강조합니다.
[
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37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히 10:36-39)
그러므로 성도는 욥처럼 시험 당할 때가 있더라도 믿음 안에서 인내로 견디어야 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2-4).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
한편, 야고보는 욥이 인내로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께서 주신 결말”은 원어로 보면 “주의 끝”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욥기에서 욥의 인내로 인해 닿은 끝은 주가 어떤 분인지를 더욱 분명하게 알게 된 것입니다. 즉,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넘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신기한 것은 야고보는 욥기의 하나님을 그리스도를 칭하는 ‘주’로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자비와 긍휼이 무한하시고 변함없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분입니다. 결론은, 욥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직접 만나뵐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욥의 인내의 ‘끝’입니다. 결실이며 결말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야고보 사도의 간단한 한 줄의 말씀으로부터 욥기 전체를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욥기가 복음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 5:11).
이처럼 욥은 끝까지 믿음으로 인내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선하심을 맛보았습니다. 이 말을 다르게 하면, 욥은 하나님의 복음, 즉, 중보자 그리스도 안에서, 넘치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긍휼과 자비와 동정과 위로를 마침내 받아서 누리며 직접 확인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 사도에 의하면 욥은 그리스도를 믿은 것이고 그 분 안에서 마침내 하나님을 만나 뵌 것입니다. 반면에 욥의 세 친구는 이러한 욥에게 고난과 박해를 가하는 원수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들은 무지와 교만 가운데 사탄의 도구로 쓰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행악자들이요, 거짓 신자들이요, 위선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기에서 세 친구와 욥의 싸움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긍휼과 자비와 동정과 위로가 담긴 복음을 모르는 자들과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라고 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와 동정과 위로를 믿으며 끝까지 인내하고 바라본 참된 신자의 싸움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내로 믿음을 지킨 신자는 결국 주의 끝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없는 영광이요 위로요 그리고 하나님이 칭찬하시고 인정하시는 복된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욥기의 주된 내용은 복음과 비복음의 싸움이고 그 싸움이 바로 욥과 그의 세 친구,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과의 논쟁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과 비복음의 싸움은 아담과 하와를 통해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온 이후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진행되어 왔습니다. 앞으로 주의 재림 때까지 이 전쟁은 점점 더 치열하여질 것입니다.
이 전쟁에 대해 하나님께서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그러나 이 전쟁 예언은 복음 안에서 언제나 여자의 후손이 이길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주의 자녀는 어떤 상황에서도 인내를 통해 승리를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환난이 오면 더욱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늘의 위로와 함께 인내를 이루며 그 끝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아무튼 죄가 인류에 들어온 이후 인류 역사상 이러한 전쟁의 첫째 대결이 바로 가인과 아벨의 제사였습니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번제를 드림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표현하였지만, 가인은 자신의 공로를 상징하는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지만 자기 공로를 믿고 나아온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창 4:3-5).
이로 인해 가인은 그의 아우 아벨을 들에서 쳐죽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복음과 비복음의 영적 전쟁에 대해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을 향해 외치셨습니다. 즉, 그들은 가인처럼 복음의 원수들이었습니다.
[
2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
31 ..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32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 (/* 지옥에 떨어질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
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마 23:29, 31-33, 35)
그런데 복음의 원수들인 이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배후에는 마귀가 있었습니다.
[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7 …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
41 너희는 너희 아비가 행한 일들을 하는도다 …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요 8:34, 37-38, 41)
이들은 예수님이 마리아의 불륜으로 태어난 사생아라고 말하며 근거 없는 낭설과 비방을 토해냅니다. 그러면서 단편적인 진리를 선포합니다.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뱀들이며 독사의 새끼들인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유없이 미워하고 불륜으로 태어난 사생자라고 근거없이 판단하며 외치며 동시에 이 주장을 위해 단편적인 진리를 외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정체를 아시고 말씀하십니다.
[
42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 욥이 그의 세 친구와 논쟁할 때 예수님이 하신 이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
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48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 이들은 예수님을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외치면서 유대인으로 구성된 군중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의심하고 미워하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는 귀신이 들린 자라고 몰아갑니다. */)
4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요 8:34, 37-38, 41-49)
사랑하는 여러분!
욥은 그가 당하는 고통이 그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자 그가 태어난 날을 탄식하며 자신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바람을 친구들 앞에서 나타냈습니다. 그러면서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하며 죽음을 바라는 연약한 모습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에는 친구들을 향한 어떤 악의도 없었고 하나님을 향한 불평이나 저주도 없었습니다. 다만 끝없는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연약하고 비참한 한 인간의 간절한 탄식이 있었을 뿐입니다.
한편,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하게 믿고 있었고, 또한 하늘에서 우리 주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를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가 당하는 특이한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와 마귀의 의도를 알지 못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사실, 욥의 고통은 그의 온전함으로 인한 시험이며, 이 시험 기간에는 하나님께서 잠시 얼굴을 욥에게서 돌리시고 전혀 도움을 주시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욥이 믿음을 잃지 않고 인내로 시험을 이겨야 사탄의 의도를 좌절시켜 그를 무너뜨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욥의 시험은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 고난 받으실 때 하나님께서 우리 주께 얼굴을 돌리시는 상황과 맞물립니다.
[
45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 27:45-46)
마찬가지로 욥은 그가 당하는 고통은 주님이 직접 주신 것으로 알기에 주님이 너무나 멀리 계시는 것처럼 느낍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 위로 받고 싶은데 뭔가 꽉 막혀서 전혀 교통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욥은 홀로 외로이 이유도 알 수 없는 고통을 감당하는 시험을 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마귀가 악의를 품고 던지는 온갖 종류의 고통과 육체적 고통을 하나님께서 직접 가하시는 고통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욥의 마음 속에는 사탄이라는 존재에 대해 아무런 인식이나 의식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욥의 표현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의 표현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너무 내용이 많아서 엘리바스와의 대화 중 욥의 답변에서만 몇 군데 인용해 보겠습니다.
[
3:20 어찌하여 고난 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 (/* 여기서 빛은 생명과 같은 의미입니다. */)
23 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6:4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에 대한 공포가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욥 3:20, 23; 욥 6:4, 일부 수정)
한편, 욥이 세 친구와 대화하며 자신을 변론하는 내용 속에서 욥은 결코 자신을 죄없는 사람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놓쳐서는 안 됩니다. 주께 드리는 욥의 말을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거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욥 7:21).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온전할지라도 나를 정죄하시리라”(욥 9:20).
“내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오니 주께서 나를 죄 없다고 여기지 않으실 줄을 아나이다 내가 정죄하심을 당할진대 어찌 헛되이 수고하리이까”(욥 9:28-29).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시옵고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욥 10:2).
“주의 날이 어찌 사람의 날과 같으며 주의 해가 어찌 인생의 해와 같기로 나의 허물을 찾으시며 나의 죄를 들추어내시나이까”(욥 10:5-6).
“그러하온데 이제 주께서 나의 걸음을 세시오니 나의 죄를 감찰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주는 내 허물을 주머니에 봉하시고 내 죄악을 싸매시나이다”(욥 14:16-17).
욥의 이 고백과 대답은 욥 자신이 아무리 의로운 삶을 철저하게 살아왔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가 있을 수 밖에 없고 욥 자신도 얼마든지 하나님 앞에서 지은 허물과 죄악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말들입니다. 즉, 욥은 자신이 예수님처럼 “죄가 없다”는 인식을 가진 적도 없고 그러한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실제로 어떤 죄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그러나 욥은 자신이 얼마나 부패하고 부족한지를 잘 알고 있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비롯한 모든 자녀들을 위해 주기적으로 ‘번제’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욥이 ‘내가 죄가 없다’라고 주장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욥의 주장은 이러한 ‘죄 없음’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의 말씀을 철저하게 순종하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욥기 6장 9-10절에 이러한 내용이 나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이 기꺼이 내 생명을 끊어 나를 죽이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할지라도 내가 그칠 줄 모르는 이 고통 가운데서도 한 가지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은 것이라”(욥 6:9-10, 스데반 황 역)
이런 면에서 욥은 친구들 앞에서 자신을 변론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욥의 친구들은 욥이 당한 끔찍한 재앙을 보며 그가 뭔가 천벌을 받을 만한 어떤 죄악을 저질러 놓고도 모든 사람 앞에서 숨기고 있다고 비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욥의 변론은 이러합니다.
“너희는 내가 절망 가운데 탄식하며 한 몇 마디 말을 붙들고 그것으로 책잡으려고 하느냐 그러지 말고 내가 저지른 죄악이 무엇인지 드러내기 바란다. 그러면 내가 잠잠하리라”(욥 6:26, 24, 스데반 황 역)
그러면서 욥은 비록 자신이 하나님을 만나뵐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진심을 다해 온전한 삶을 살아왔다고 회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욥 23:8-12).
지금 이 말씀은 비록 지금은 욥을 피하시며 응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주를 향해 온전함을 지켜며 믿고 나가겠다는 다짐을 보이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런 고난 가운데 계속 온전함을 지켜나가면 자신은 과거보다 더욱더 순금 같이 되어 나올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욥의 배경 설명을 충분히 하였으니 이제 본문을 다루겠습니다.
자, 엘리바스는 욥의 탄식을 듣자마자 그의 허접한 신학 지식과 논리로 욥을 공격하였습니다.
“생각하여 보게. 죄 없이 망한 자가 있겠는가? 정직한 사람이 갑자기 망하거나 자네의 자녀들처럼 돌연사하는 일이 있겠는가!”
그리고 자기 경험을 말하였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경험하고 확인한 바로는, 악의 밭을 갈고 죄를 심는 자들은 뿌린 대로 거두며, 하나님의 입 기운에 망하고, 하나님의 진노에 끝장이 난다네. 그래서 사자의 우는 소리와 젊은 사자의 소리가 그치고 어린 사자의 이가 부러지며 사자는 사냥한 것이 없어 죽어가고 암사자의 새끼들이 흩어지는 것이라오.”
엘리바스는 욥을 빗대어 말하기를 욥이 모든 소유물을 다 잃고 거지가 된 것과 심지어 그의 열 자녀들이 하루에 한꺼번에 다 죽은 것은 욥과 그의 가족이 숨기고 있는 큰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네가 지금 이러한 꼴이 된 것은 여러 큰 죄악들이 많은 까닭이라네. 자네가 자녀들을 다 잃은 것도 너의 가정에 숨겨진 큰 죄악이 있기 때문일세. 그러므로 너는 정직하지 않아. 너는 하나님께 천벌을 받아서 이렇게 끊어진 것이야.”
그리고 엘리바스는 이 말을 하고 곧바로 그 말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인 것처럼 속입니다.
“어떤 말씀이 내게 가만히 이르고 그 가느다란 소리가 내 귀에 들렸었나니 사람이 깊이 잠들 즈음 내가 그 밤에 본 환상으로 말미암아 생각이 번거로울 때에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러서 모든 뼈마디가 흔들렸느니라 그 때에 영이 내 앞으로 지나매 내 몸에 털이 주뼛하였느니라 그 영이 서 있는데 나는 그 형상을 알아보지는 못하여도 오직 한 형상이 내 눈 앞에 있었느니라 그 때에 내가 조용한 중에 한 목소리를 들으니”(욥 4:12-16)
우리는 여기서 엘리바스가 만난 영이 누구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을 만난 것인지, 아니면 사탄의 영을 만난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이 결정이 어려운 이유는 엘리바스가 그 영에게 들었다며 한 말이 너무나 그럴 듯하고 멋지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들어보기 바랍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깨끗하겠느냐 하나님은 그의 종이라도 그대로 믿지 아니하시며 그의 천사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욥 4:17-18)
그리고 5장에서 이어지는 내용들입니다. 물론, 5장의 내용은 엘리바스의 의견입니다. 그리고 그 의견은 엘리바스 개인의 의견이라기보다 엘리바스와 그의 두 친구가 서로 동의한 의견입니다.
“볼지어다 우리가 연구한 바가 이와 같으니 너는 들어 보라 그러면 네가 알리라”(욥 5:27).
여기서 연구했다는 것은 히브리어로 (하콰르)인데 그들의 체험을 통해 조사하고 알아보고 확인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4장 8절과 5장 3절을 보면, 엘리바스는 그의 경험을 통해 확인된 것을 말합니다.
“내가 확인한 경험에 따르면,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더라”(욥 4:8, 스데반 황 역)
“내가 경험으로 확인한 바에 따르면 미련한 자가 잠시 성공하다가도 갑자기 저주를 받아 일순간에 무너지더라”(욥 5:3, 스데반 황 역)
그런데 빌닷과 소발과 함께 엘리바스가 연구한 내용 역시 놀랍도록 멋하게 들립니다. 특히 고통 당하는 욥에게 매우 위로가 되는 말로도 들립니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
9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큰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10 비를 땅에 내리시고 물을 밭에 보내시며
11 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애곡하는 자를 일으키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느니라
12 하나님은 교활한 자의 계교를 꺾으사 그들의 손이 성공하지 못하게 하시며
13 지혜로운 자가 자기의 계략에 빠지게 하시며 간교한 자의 계략을 무너뜨리시므로
14 그들은 낮에도 어두움을 만나고 대낮에도 더듬기를 밤과 같이 하느니라
15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강한 자의 칼과 그 입에서, 또한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주시나니
16 그러므로 가난한 자가 희망이 있고 악행이 스스로 입을 다무느니라
17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18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
19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20 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의 위협에서 너를 구원하실 터인즉
21 네가 혀의 채찍을 피하여 숨을 수가 있고 멸망이 올 때에도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22 너는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하지 말라
23 들에 있는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목하게 살 것이니라
24 네가 네 장막의 평안함을 알고 네 우리를 살펴도 잃은 것이 없을 것이며
25 네 자손이 많아지며 네 후손이 땅의 풀과 같이 될 줄을 네가 알 것이라
26 네가 장수하다가 무덤에 이르리니 마치 곡식단을 제 때에 들어올림 같으니라
](욥 5:9-26)
그런데 신기한 것은 엘리바스는 자신의 음성을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하지 않고 어떤 영을 만나서 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욥기 42장 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엘리바스에게 말씀하신 적이 없다고 합니다.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그러므로 만일 엘리바스에게 나타난 영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라면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모순입니다.
그렇다면 엘리바스는 누구에게 들은 것입니까? 무엇을 본 것입니까? 고린도후서 11장 14절을 보면 사탄은 자신을 광명한 천사로 가장한다고 말합니다.
[
4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13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14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5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고후 11:4, 13-15)
사랑하는 여러분!
회유라는 단어를 아시는지요? 검사가 어떤 죄인으로 추정되는 자에게 죄를 지었다는 고백을 받아내려고 할 때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합니다. 한 가지는 공갈과 협박이고 다른 하나는 당근을 주며 사탕발린 말을 하는 회유입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죄지은 사람이 죄를 토설하지 않으니 토설토록 만들기 위함입니다.
자, 이제 저는 여러분에게 뭔가를 말할 것입니다. 이 말이 누가 말하는 것인지 듣고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
자비로우시고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으로온 우주를 창조하신
주님이신 하나님께 찬미를 드리나이다주님은
자애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심판의 날을 주관하시도다우리는 주 하나님만을 경배하오며 주께만
구원을 비노니저희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그 길은 주께서 축복을 내리신 길이며 노여움을 받은 자나 방황하는 자들이 걷지 않는 가장 바른 길이옵니다.
](무슬림의 기도)
이 기도는 전 세계의 무슬림이면 다 외우고 있는 기도입니다. 그들은 이 기도를 암송하고 있다가 하루에 5번씩 그들의 알라 신 앞에 꿇어 엎드려 기도합니다.
하지만 이 기도가 하나님의 영에게서 나왔겠습니까? 마호메트가 만나서 받은 계시인 꾸란이 우리 주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입니까?
주후 610년에 마호메트(무함마드)가 히라(Hira)산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마호메트가 신에 의해 예언자로 택함을 받았다고 알렸다고 합니다. 그때 마호메트는 마치 '새벽 빛'과 같은 놀라운 비전을 보았고 근엄한 목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 소리는 '지금부터 너는 신의 사자다'라는 소리였습니다. 이 환상을 보고 이 소리를 경험한 마호메트는 지칠대로 지치며 공포로 떨었습니다. 그후 마호메트는 ‘운명의 밤’에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계시인 꾸란을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마호메트가 받은 꾸란에 나타나는 하나님 알라는 엘리바스가 받은 영이 알려주는 신보다 더욱 구체적이고 더욱 준엄합니다. 다음은 꾸란이 묘사하는 알라신입니다.
[
알라는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고 그것을 유지하고 공급하며 통치하는 초월자이나 창조물에 가까이 존재하는 내재성이 있다. … 그분은 스스로 모든 것을 충족시키며 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그의 능력과 힘은 무한하고 한계가 없으며 자신이 원하는 것과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해내고 이룰 수가 있다. 우주에 존재하는 그 어떠한 것도 그 권위와 명령에 저항 및 방해, 도전조차 할 수 없으며 모든 것과 모든 일들이 전능하고 절대적인 알라신에 의해 진행된다. 모든 존재의 운명이 알라신에게 달려있고 알라 신은 모든 사건을 통제하고 다스린다. 알라신은 모든 자연 현상을 통제하며 자연의 흐름을 바꾸어 기적을 행할 수 있고 모든 행동과 의도를 공정하게 평가하고 병자를 치료하고 예배하는 자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며 과거, 현재, 미래 등 모든 것을 완전히 알고 모든 존재의 생각과 의도를 포함해 존재의 모든 세부 사항을 포괄할 만큼 모든 것을 아신다. 그분은 모든 것들을 보고 들을 수 있으며 어디에든 있으며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히 존재이고 모든 피조물의 그 어떠한 도움과 필요도 없이 스스로 존재하신다
](꾸란 요약)
자, 그렇다면 꾸란은 우리 주 하나님이 마호메트에게 주신 계시입니까? 만일 꾸란이 하나님이 주신 계시라면 우리는 꾸란을 읽고 그 내용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 안 믿습니까? 우리는 꾸란은 간교한 사탄이 마호에트에게 준 거짓 계시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확신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꾸란이 묘사하는 알라가 하나님이 아니라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현대의 말일 성도 예수 그리스도교는 요셉 스미스가 어떤 천사로부터 받은 몰몬경에 서 있는 이단 종파입니다. 어떤 거짓 선지자처럼 그는 어제 어떤 영을 보았고 천사를 만나 들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만난 두 천사는 광명한 천사가 가장한 사탄인 것을 압니다. 그러나 몰몬경이 얼마나 많은 단편적 진리를 담고 있는지 아십니까?
카톨릭에서 믿고 신뢰하는 메시지가 있는데 마리아가 출현하여 주는 계시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수녀들이 발현한 마리아로부터 계시를 받아 그 계시를 온 세상에 전하고 있습니다. 그 계시는 카톨릭 교회에 어머 어마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는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로서 그들에게는 여자 하나님, 즉 여신이기 때문입니다. 소위 마리아는 엄마 하나님입니다.
이때 마리아가 나타나서 전하는 메시지는 매우 은혜롭고 따스합니다. 많은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마귀의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의 영으로 계시를 받는다는 거짓 목사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은 사망한 이재록 씨가 얼마나 많은 계시를 받았습니까? 얼마나 많은 이단의 교주들이 하나님의 영을 만났다고 하며 헛소리를 합니까? 얼마나 많은 엉터리 목사들이 자주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헛소리를 합니까?
‘지난 밤에 성령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당회 결정을 이렇게 내리라고 친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 건물을 구입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시대의 많은 이단들이 엘리바스가 말한 멋진 단편적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까? 이단들이 엘리바스가 말한 그 정도의 말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까? 엘리바스가 말한 그러한 회유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까?
욥기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번제입니다. 구속자입니다. 자기 종 욥을 끝까지 믿어주시고 사랑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사실 욥기 1장과 2장을 보면, 소위 하나님은 욥을 ‘엄청’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엄청’ 믿으셨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시기하고 하나님께 도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탄은 욥으로 하여금 그의 세 친구를 통해 하나님을 오해하게 만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위대해서 너 같은 흙으로 만든 사람에게 관심 없어. 너 같은 자가 하나님을 향해 온전함을 지킨다고? 네가 이런 천벌을 받은 것을 보니 너는 하나님이 미워하는 자야! 자, 그러지 말고, 내 죄악을 실토하거라. 그러면 하나님이 너를 축복하실 것이야, 네 시작은 미약하지만 다시 창대해질 거야. 자! 비밀로 지켜줄테니, 너와 네 가족이 지은 죄악을 실토해봐!”
이처럼 엘리바스와 그의 두 친구가 연구한 멋진 내용은 단편적인 진리이지만 그 저의는 욥으로 하여금 끔찍한 죄악을 범한 죄인으로 몰고가면서 그 죄악을 토설하면 이러한 멋진 복을 받을 것이라고 사탕발림의 말을 한 것입니다. 이에 욥의 입장에서는 없는 죄악을 자꾸 토설하라고 하니 더욱 분노가 치솟게 되는 것이고 그 소리가 만일 주의 음성으로 믿어진다면 하나님을 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정확히 알고 있게 때문에 엘리바스가 만난 영의 소리에 속을 리가 없습니다. 이제 엘리바스가 만난 영이 욥을 빗대어 하는 독한 저주의 말을 들어봅시다.
“하물며 흙 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 앞에서라도 무너질 자이겠느냐 아침과 저녁 사이에 부스러져 가루가 되며 영원히 사라지되 기억하는 자가 없으리라 장막 줄이 그들에게서 뽑히지 아니하겠느냐 그들은 지혜가 없이 죽느니라”(욥 4:19-21).
그러므로 욥은 엘리바스와 그가 본 영의 저의를 분명히 알고 대답합니다.
“나는 죄인이지만, 너희가 말하는 이런 천벌을 받을 만한 죄악을 저지른 적은 없어. 내 양심이 이 사실을 말하고 있어. 나는 정말 온 마음을 다해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름대로 주께 온전한 삶과 성품을 가지려고 노력해 왔어. 정말이야.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사랑하는 여러분!
사탄의 간계함은 인간의 이성과 능력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없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그 간계를 알아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간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앞에서 설 곳이 없습니다. 대속의 우리 주님, 그리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 앞에 사탄은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오직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속량하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절대 진리의 기준으로 삼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주신 정경 66권만을 믿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오직 성경 66권으로 진리의 기준으로 삼으며 그 성경이 증거하는 우리 주 예수님만을 절대 진리로 삼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이 책에, 이 성경에)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그러므로 복음까지 이르지 못한 모든 신학은 죄사함과 영생을 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도록 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죄성을 이길 수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능력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에 이르지 못한 신학은 비참과 죄악 가운데 영원한 멸망만 남길 뿐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이 빠진 진리는 비록 단편적으로 옳은 말일지라도 결국 아무런 가치도 없고 심지어 마귀도 맘껏 악용할 수 있는 부분적인 진리일 뿐입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
그러므로 모든 단편적 진리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자리를 잡을 때에야 온전할 수 있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복음 안에서 영생을 얻은 상태에서 수만 가지 단편적인 진리들을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서 만유의 주가 되신 그리스도로 이어지지 않는 종교적인 말은 그것이 아무리 단편적인 진리를 포함하고 있을지라도 결국 가인과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과 이슬람교와 수많은 이단들과 거짓 목사들의 신학 지식 및 사탕 발림의 회유로 쓰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인간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계시는 결국 그리스도의 대속 및 부활에 대한 것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그분의 부활만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죄를 위한 영원한 속죄 제물의 효력을 누리게 하고 또한 영원한 대제사장을 만나게 하는 모든 진리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기 위해 성경은 성삼위 하나님을 계시하여 주고, 삼위 중 독생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셔서 그리스도가 되신 것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 주 예수께서 만유의 주와 구원의 주가 되신 것을 알려줍니다.
[
6 그(그리스도 예수)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 2:6-11)
오늘도 우리의 영원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인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 우리의 남은 삶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며 모든 상황 가운데 욥처럼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인내함으로 항상 영원한 열매를 맺으며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pyright@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출처] 불확실한 영의 음성 (욥기 4:12-21)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 작성자 그리스도의보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