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신> 영롱한 언어의 사리(舍利) / 임보 (시인)
로메다 님, 보내주신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지금 이 글을 씁니다. 지난번 편지는 시가 무엇인가를 묻는 물음에 답하는 글이었는데 막상 써 놓고 보니 시를 이해하고자 하는 로메다 님을 오히려 더 혼란스럽게 만들고 만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군요.
읽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면서 보내드린 첨부자료 <시에 대한 정의들>까지도 다 읽었다고요? 건실한 모범생이군요. 이해가 잘 되던가요? 아마 시를 이해하는데 별로 큰 도움이 되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미리 그런 글을 읽어둔 것도 언젠가는 혹 도움이 될지 모르니 잘 하셨습니다.
나는 지난번 편지에서 시라는 글은 너무 변화무쌍한 것이어서 절대불변의 정의를 내리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세상의 모든 시에 대해 한꺼번에 다 알려고 하지말고 욕심을 줄여, <오늘의 우리시>에 관해서만 관심을 갖도록 해 봅시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오늘의 한국 현대시처럼 쓰기 쉬운 글은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쉽게 납득이 안 가겠지요?
시는 원래 일정한 형식을 요구하는 정형시였습니다. 말하자면 시가 될 수 있는 필요조건이 있어서 그 조건을 갖추지 못한 글은 시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한시(漢詩)의 대표적인 정형시인 절구(絶句)의 경우를 생각해 볼까요? ① 우선 4행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② 각 행의 글자수를 5자이거나 혹은 7자로 통일해야 하며 ③ 짝수 행의 끝에 같은 종류의 소리[韻]를 달아야 하는 등 그밖에도 복잡한 평층법(平仄法)에 의해 글자 배열을 통제했습니다.
서구의 대표적인 정형시인 소네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① 전 14행으로 각 연들이 4, 4, 3, 3행의 4연으로 구분되고 ② 각 행의 음절수가 나라에 따라서 10∼12음절로 제한되며 ③ 각 행의 끝에 규칙적인 압운(押韻)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로메다 님, 이런 번잡한 내용들을 염두에 둘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정형시가 매우 복잡한 조건을 필요로 했다는 사실만 기억하면 됩니다. 정형시가 주도하던 당시에는 언어에 대단한 재능을 따고난 사람이 아니고는 시인이 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시는 평민들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귀족문학으로 군림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정형시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우리의 대표적인 정형시는 시조인데 정해진 규칙이 별로 엄격하지 않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평시조의 형식은 ① 전 3행으로 되어 있고 ② 각 행은 4음보(4어절, 4마디)이며 ③ 다만 제3행(종장)의 처음 두 음보가 3음절과 5음절이라는 제약이 있을 뿐입니다. 행의 끝에 동류의 음을 달아야 한다는 압운의 규제도 없고 한 음보를 이루는 음절의 수효도 고정되지 않고 유연합니다. 숫자를 헤아리는 데 있어서도 '서넛' '대여섯' 같은 용어들을 즐겨 사용하는 걸 보면 애초부터 우리 민족은 융통성을 지녔던 것 같습니다.
어떻든 정형시는 구속의 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풍조가 변하다 보니 즉 군주주의가 허물어지기 시작하고 개인의 주권과 자유를 옹호하는 풍조가 일어나면서 구속과 통제의 문화들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런 자유의 물결 속에서 시도 속박의 틀로부터 벗어납니다. 그래서 자유시가 비롯된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 자유시는 아무런 통제도 받지 않습니다. 행도 마음대로 나누고 나누고 싶지 않으면 산문처럼 이어 쓰기도 합니다. 소재의 제한도 없고 운율에 대한 배려도 거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니 무엇이든 아무렇게나 써도 상관없는 글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쓰기 쉬운 글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로메다 님, 시를 쓰기는 쉽지만 좋은 시를 쓰기는 쉽지 않습니다. 마치 누구든 그림을 그릴 수는 있지만 좋은 그림을 그리는 일이 쉽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시란 어떤 글일까? 어떻게 쓴 시가 좋은 글, 바람직한 글이겠습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글입니다. 즉 감동을 주는 글이지요. 무엇을 어떻게 쓰든 독자의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만 있다면 나는 좋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심오하고 훌륭한 내용을 담았더라도 독자를 감동시킬 수 없는 글이라면 나는 좋은 글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감동적인 글' 만들기가 쉽지 않군요.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요인들은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나는 그 요인들 가운데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을 '아름다움'으로 잡습니다. 바람직한 시 곧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시가 되기 위해서는 아름다움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즉 시란 '아름다운 언어들의 결집'이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나는 학생들에게 시에 대해 정의하기를 '영롱한 언어의 사리(舍利)'라고 합니다.
절에서 스님들이 세상을 떠날 때 다비(茶毘, 화장)를 하지 않습니까? 육신이 다 타고 남은 재 속에서 영롱한 결정체(結晶體)가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를 사리(舍利)라고 부릅니다. 고승의 경우일수록 많은 사리를 얻게 된다고 합니다. 불타는 육신 속에서 만들어진 영롱한 결정체 사리는 참 신비로운 보석처럼 느껴집니다. 그 사리는 고승의 육신과 정신과 불과 그 밖에 우리가 알 수 없는 수많은 요소들이 협동하여 빚어낸 아름다움입니다. 사리는 고승의 육신으로 빚어낸 시(詩)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수십만 어휘의 숲 속에서 작업을 합니다. 그들은 마치 직녀(織女)가 필요한 색실을 하나씩 뽑아 비단에 아름다운 수(繡)를 놓아가듯이 필요한 언어를 하나씩 선택하여 아름다운 언어의 결정체를 만들어 갑니다. 선택된 언어와 언어들이 잘 결합하여 해조(諧調)를 이루면 영롱한 빛이 납니다. 시는 수만 개의 어휘들 가운데서 선택된 몇 개의 언어들이 아름답게 결합된 영롱한 결정체― 곧 언어의 사리입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영롱한 언어의 사리를 빚을 것인지 그것이 우리가 풀어가야 할 과제입니다.
로메다 님, 오늘도 얘기가 길어졌군요. 그러나 시에 대해 어리둥절하기는 아직도 마찬가지지요? 하지만 너무 조급히 생각지 마세요. 시는 이미 당신 곁에 한 걸음 가까이 와 있을 것입니다.
장마가 그치려나 드리운 능소화 줄기 사이로 햇살이 환합니다. 주황빛 꽃이 시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짤막한 시 한 편 보냅니다.
능소화 / 임보
지가 무슨 화냥년이라고
분홍 속살 다 드러내 놓고
남의 집 담장에 기어올라
한여름을 흔들며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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