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부선과 이수가 식당에서 갈릴레이관으로 가는 지름길을 따라 걸어가는 중에, 저 앞에서 현승(D)이 걸어온다. 현승(D)이 둘을 알아본 듯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자그마한 나무 앞에서 셋이 만난다. 나무 옆에는 작은 벤치가 놓여 있다.
“전화 주신 장현승(D)씨인가요? 잠깐 앉을까요?”
이수가 벤치를 가리키며 이야기를 하고는 부선, 이수, 현승(D)의 순서로 작은 나무의 왼쪽에 있는 벤치에 앉는다.
“이준호(C)씨와 룸메이트시라구요? 혹시 이준호(C)씨와 연락이 되셨나요?”
“저도,, 좀 전에 전화 드리고 나서, 준호(C)랑 통화해봤는데, 전화를 안 받더라구요. 문자를 해도 대답이 없고.. 백현(A)이가 그렇게 되어서 충격이 많이 컸을 거에요.. 어려서부터 가깝게 지냈고, 가족들도 다 아는 사이이고 하니까..”
약간은 어눌한 말투로 이야기하는 현승(D),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리는 듯하다.
다시 이수가 현승에게 묻는다.
“아, 그렇구나. 혹시 죽은 변백현(A)씨는 어떻게 아시나요?”
“네, 백현(A)이랑 준호(C)랑은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동창이라는 이야기에 뭔가 실마리가 조금 나올 것 같은지, 이수의 목소리가 커진다.
“아, 그래요? 전공은 어떻게 되시죠?”
“네, 물리학과 석사 과정이요..”
“아, 네.. 그럼 변백현(A)씨와 같은 학과네요? 연구하는 분야도 비슷한가요?”
“네? 네..”
“죽은 변백현(A)씨가 양자역학이 전공이라던데.. 현승(D)씨도 그렇다는 거죠?”
“네.. 근데 랩은 다르고, 연구하는 부분도 조금 달라요..”
현승(D)이 억지로 대답을 하는 듯 하다. 물리 얘기가 계속 나오자, 옆에 가만히 앉아있던 부선이 끼어든다.
“아효, 그나저나 그 어려운 걸 어떻게들 공부한대.. 내가 고등학교 때 제일 싫어했던 과목이 물린데..”
현승(D)을 바라보며 이야기하던 부선이, 이수에게 묻는다.
“김형사는 어땠어?”
“네? 저야 뭐..”
15.
흰색 벤츠 승용차 한 대가 ‘한성과학고’라는 팻말이 놓인 학교의 정문으로 들어간다. 키도 크고 미인형인 김이수가 언니인 듯한 어머니와 함께 차에서 내리자 주위가 약간 술렁인다. 전형적으로 공부를 잘하게 생긴 여학생들이 흘끗 김이수를 쳐다보고 썩 내켜하지 않는 표정이고, 남학생들은 내색하려 하지 않지만, 얼굴이 밝아진다. 이수는 약간의 긴장을 안고 시험장에 들어간다.
국어, 영어, 수학, 과학. 1교시, 2교시, 3교시 모두 비교적 수월하게 넘어갔다. 열심히 준비한만큼 합격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번에는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켜 드릴 수 있을 것 같아 희망에 부푼 이수에게 불행은 4교시에 찾아왔다. 복잡한 물리 문제를 앞에 두고, 생각을 너무 깊게 한 나머지, 시험 시간이 끝날 때까지 한 문제를 계속 붙잡고 있게 되었고, 뒤에 있는 3문제를 풀지 못하게 되었다.
물리는 이수에게 늘 거북스런 과목이었다. 알 듯, 알 듯, 알 수 없는 과목이었던 물리.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를 접한 후부터, 물리는 이수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었으나, 또한 가장 어려운 과목이기도 하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마음이 급해져, 답안을 옮겨적는 과정에서 답을 밀려쓰고야 만다. 아뿔싸, 답안에 마지막 한 칸이 비어있다.
16.
이수가 부선의 질문에 답을 피하며 현승(D)에게 묻는다.
“최근에 변백현(A)씨에게 뭐 좀 특이한 점이 있었나요?”
“어, 네.. 최근에 백현(A)이 친누나가 죽었어요.. 보름쯤 되었을 거에요. 아이 낳다가 합병증으로 죽었다고 하던데,, 백현(A)이도 충격으로 병원 치료를 좀 받았구요.”
“아, 네..”
이수, 문득 오전에 시체의 팔에서 보았던 주사자국이 떠오른다.
“평소에는 힘든 내색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최근에는 힘들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어요. 그래도 그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현승(D)이 눈물을 흘린다.
이야기가 자꾸 깊어지려하자, 부선이 다시 대화에 끼어든다.
“아휴, 친한 친구가 그렇게 되어서 얼마나 힘들어요.. 미안해요, 괜히 힘들게 했네.”
부선이 현승(D)을 달래고는 이수에게 핀잔을 준다.
“그러게 왜 자꾸 물어봐.. 공부하는 학생들 자꾸 힘들게 하지 말고 이제 가자 김형사.”
부선이 대화를 끝내려 하지만, 이수가 다시 현승(D)에게 묻는다.
“혹시 변백현(A)씨와 친했던 여자분은 없었을까요?”
“네? 그게..”
현승(D)이 이수에게 무언가를 다시 이야기 해준다.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부선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현승(D)과 이수도 따라서 일어난다.
걸음을 옮기려던 이수, 잔디밭에 놓여 있눈 비석을 확인하고는 가까이 다가가 비석의 내용을 살핀다. 최근에 자살한 다른 학생을 추모하는 비석이었다. 뒤에 있는 자그마한 나무도 그 때 심어진 것 같다.
“왜? 뭔데?”
부선이 이수쪽으로 오며 묻고는, 바닥에 놓여 있는 비석을 확인한다.
“아, 추모비구나. 공부가 힘들긴 한가 보다. 쯧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