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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여호수아기의 말씀 24,14-29>
그 무렵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4 “이제 너희는 주님을 경외하며 그분을 온전하고 진실하게 섬겨라.
그리고 너희 조상이 강 건너편과 이집트에서 섬기던 신들을 버리고 주님을 섬겨라.
15 만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너희 눈에 거슬리면,너희 조상들이 강 건너편에서 섬기던 신들이든, 아니면 너희가 살고 있는 이 땅 아모리족의 신들이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
16 그러자 백성이 대답하였다.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주님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우리에게 없을 것입니다.
17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집에서 데리고 올라오셨으며, 우리 눈앞에서 이 큰 표징들을 일으키신 분이 바로 주 우리 하느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걸어온 그 모든 길에서, 또 우리가 지나온 그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우리를 지켜 주셨습니다.
18 또한 주님께서는 모든 민족들과 이 땅에 사는 아모리족을 우리 앞에서 몰아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19 그러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주님을 섬길 수 없을 것이다.
그분께서는 거룩하신 하느님이시며 질투하시는 하느님으로서, 너희의 잘못과 죄악을 용서하지 않으신다.
20 너희가 주님을 저버리고 낯선 신들을 섬기면,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선을 베푸신 뒤에라도, 돌아서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망시켜 버리실 것이다.”
21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였다.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22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너희가 주님을 선택하고 그분을 섬기겠다고 한 그 말에 대한 증인은 바로 너희 자신이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가 증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3 “그러면 이제 너희 가운데에 있는 낯선 신들을 치워 버리고,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마음을 기울여라.” 하자,
24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주 우리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25 그날 여호수아는 스켐에서 백성과 계약을 맺고 그들을 위한 규정과 법규를 세웠다.
26 여호수아는 이 말씀을 모두 하느님의 율법서에 기록하고, 큰 돌을 가져다가 그곳 주님의 성소에 있는 향엽나무 밑에 세웠다.
27 그러고 나서 여호수아는 온 백성에게 말하였다.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인이 될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다.
그래서 이것은 너희가 너희 하느님을 부정하지 못하게 하는 증인이 될 것이다.”
28 여호수아는 백성을 저마다 상속 재산으로 받은 땅으로 돌려보냈다.
29 이런 일들이 있은 뒤에 주님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죽었다.
그의 나이는 백열 살이었다.
✠ 복음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9,13-15>
13 그때에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1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5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배제되는 이 하나도 없을 때까지>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마태오 19,14)
오늘 어린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을 제자들이 꾸짖자 주님께서 오히려 제자들을 꾸짖는 짧은 얘기를 들으며, 제자들은 왜 어린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을 꾸짖었고, 주님께서는 왜 하느님 나라가 어린이들과 같은 이들의 것이라고 하셨는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본당에 잠깐 있을 때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영세자 교리를 시작하였는데 첫 번째 교리 시간에 젊은 엄마가 아이들을 데리고 교리반에 나온 것입니다.
아이가 하나도 아니고 둘이 있으니 마구 뛰어놀아 교리 시간이 난장판이 되었고 도무지 교육을 할 수 없었지요.
그래서 교육이 끝날 때 다음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오지 말라고 부탁했지요.
그렇게 얘기하고 사제관에 들어와 생각해보니, ‘두 엄마가 아이들을 데리고 오고 싶어서 왔을까? 맡길 데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왔겠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였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젊은 엄마들이 교리반에 나오지 못하겠구나 걱정되고, 이내 오늘 복음이 떠오르면서 제가 얼마나 잘못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실 애를 키워보지 않아서 애 엄마의 어려움을 이해하지 못했던 거지요.
그래서 제가 이런 잘못을 강론 시간에 공개 사과하고, 다음 교리반 시간에 교육을 하며 다른 참석자들에게 오늘 복음을 얘기하며 아이들이 떠들어도 언짢게 생각지 말아 달라고, 하느님 나라는 이런 어린이들을 받아들이는 곳이라고 설득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의 얘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배울 수 있는데, 하느님 나라는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나라라는 것이 그 하나요, 오늘 주님 말씀처럼 어린이와 같은 이들의 것이라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우선 하느님 나라는 아무도 배제하지 않는 나라라는 것을 보겠습니다.
성가시다고, 비천하다고, 죄지었다고, 싫어한다고 배제한다면 그런 나라는 하느님 나라가 아닙니다.
주님 친히 당신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셨고, 주님 주변에는 늘 죄인들, 병자들, 마귀 들린 자들, 여자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처럼 어린이들이 있었고, 한 마디로 이 세상에서 밀려난 가난한 자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곧 당신이기에 하느님 나라는 이들을 환영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고 주님께서는 최후 만찬 비유에서 말씀하셨지요.
그러니까 하느님 나라는 자기를 중심으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배제하는 힘 있는 자들의 나라가 아니고, 어린이처럼 힘없고 이 세상에서 밀려나는 사람들이 차지하는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얘기하는 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하느님의 나라인가?
배제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가?
저는 가난하고 힘없다고 배제하지 않고 죄지었다고 배제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이런 이들을 배제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여전히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그렇다면 이런 내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
앞서 봤듯이 배제하는 누가 있다면 들어갈 수 없고, 배제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때까지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 작은형제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창조론자의 살리는 사랑, 진화론자의 죽이는 사랑>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하느님 가족입니다.
하느님 가족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의 모임입니다.
어린이들은 사랑할 줄 안다는 뜻입니다.
왜 어른은 사랑할 수 없고 어린이는 사랑할 줄 알까요?
형제간의 우애는 어린이가 좋을까요, 어른이 좋을까요?
당연히 어린이가 좋습니다.
하수구가 있어 자신보다 더 어린 여동생이 건널 수 없게 되자 오빠가 인간 다리가 되어준 동영상은 많은 감동을 줍니다.
그런데 그 오빠는 진정 순수한 사랑으로 그렇게 한 것일까요, 아니면 부모님의 영향이 있었을까요?
당연히 같은 부모님에게서 나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부모에 대한 사랑이 사라지면 형제에 대한 사랑도 사라집니다.
아이들은 ‘부모 때문에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난 너를 사랑해.”라고 말할 때, 그 ‘나’는 뱀과 같은 이기적인 본성입니다.
어제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에서 말씀드렸듯이, 내가 사랑하려 하면 그 나 때문에 그 사랑은 이기적으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나를 만들어주신 분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이것을 압니다.
어렸을 때 아이들은 “엄마, 나 어디서 나왔어?”라고 묻습니다.
이 말은 본성적으로 아이들은 자신이 창조되었음을 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나와 함께 부모로부터 창조된 형제를 부모를 사랑하듯 사랑하겠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춘기 전까지만 영향을 줍니다.
그 이후에 부모가 나의 창조자가 아님을 알게 되면 부모뿐만 아니라 형제들에 대한 사랑도 줄어듭니다.
부모에 대한 사랑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진화론은 내가 어디서 나왔는지 관심을 끄게 만들어 결국엔 사랑을 해도 이기적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래서 ‘진화론’은 세상에도 큰 해악을 끼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은 ‘부모를 위해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이기적인 ‘나’가 죽고 나를 위한 사랑이 아니라 온전히 부모와 형제를 위한 사랑이 되기 때문입니다.
진화론을 믿는 사회는 거짓 사랑으로 가득한 고통스러운 세상이 됩니다.
영화 ‘설국열차’는 지구 온난화 대책으로 온도를 낮추기 위해서 뿌린 냉각제가 온 세상을 얼려버리는 지구 멸망을 초래했다는 배경에서 시작합니다.
열차의 앞칸으로 갈수록 돈과 권력과 쾌락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뒤 칸은 그들을 증오하지만 그들에게서 떨어지는 단백질 덩어리로 박해당하며 살아가는 하층민들이 있습니다.
꼬리 칸의 지도자인 커티스는 반란을 일으켜 한 칸 한 칸 앞쪽으로 나아갑니다.
하지만 남궁민수란 사람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는 빙하기가 끝나가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의미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커티스는 맨 앞칸까지 가서 기차를 만든 윌포드를 만납니다.
그는 어린이들을 엔진 부속품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윌포드로부터 자신의 자리를 이어가라고 제안받습니다.
그러나 커티스는 낮은 자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낮은 자들을 계속 부품으로 이용하며 사는 삶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자기 한쪽 팔을 잃어가면서 부속품으로 있는 아이를 꺼내 냅니다.
그리고 남궁민수에게 기차 문을 열라고 마지막 남은 성냥 하나를 건네줍니다.
그것이 있어야 크로놀을 폭파해 문을 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커티스와 남궁민수는 아이들의 방패막이가 되어주며 두 남녀 아이들만 살아남고 모두 죽게 됩니다.
두 아이는 마치 아담과 하와처럼 빙하기가 끝난 세상의 새로운 인류가 됩니다.
커티스는 짓눌리는 자기 형제들을 위해 세상을 평등하게 만드는 것이 사랑이라 여겼습니다.
윌포드는 자신이 만든 기차 때문에 살아있는 이들을 약간은 부속품으로 여겨도 된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는 사랑은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나’가 죽지 않은 이기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남궁민수는 ‘새로운 창조’를 희망했습니다.
기차로 상징되는 이 세상이 아닌 새로운 아담과 하와를 위한 창조를 위해 자신들이 희생해도 된다고 믿었습니다.
상징적으로 그는 창조자를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창조자가 자신을 창조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야 했듯, 부모가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주었듯, 창조 때문에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의 상징입니다.
사랑은 이 세상에서 나와 가까운 이들의 불합리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새로운 하느님 자녀를 탄생시키는 일입니다.
결국 커티스도 이 사랑에 동참하여 둘은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팔도 잃고 생명도 희생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어린이들의 것인 이유는 어린이들은 겸손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들은 자신이 어디서 나왔는지 찾을 줄 압니다.
그리고 그 부모 때문에 형제를 사랑합니다.
이 말은 부모의 창조에 동참한다는 뜻입니다.
부모가 돌아가셔도 형은 동생을 위해 부모처럼 생명을 바칠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기심이 없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자신 때문에 사랑한 것이기에 사랑을 잃으면 마치 전부를 잃은 것처럼 자기 삶도 포기합니다.
하지만 형제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의 마음을 더는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 죽은 형제의 몫까지 더 살아보기 위해 노력합니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은 바쳐도 남의 생명은 빼앗지 않습니다.
자신의 원천을 찾아야만 하는 이유는 그래야 창조자처럼 형제들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창조자의 본성입니다.
어린이 중 진화론자는 없습니다.
다 부모가 필요합니다.
부모로부터 창조되었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부모의 사랑을 본받습니다.
부모 때문에 형제를 사랑합니다.
우리도 어린이처럼 되어 하늘 나라의 행복을 누리려면 이웃을 내 형제처럼 사랑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 이웃을 창조한 하느님을 부모로 여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인간을 창조하셨기에 다른 이들의 생명을 빼앗아가면서까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이를 기뻐하실 수 없으십니다.
창조자 하느님 때문에 이웃을 사랑할 때 이 세상은 생명이 충만한 하늘 나라가 됩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인간이 만든 가장 불행한 장소인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사랑과 기적의 장소로 변화시켜나간 사제>
연인(戀人)들 사이에서 종종 벌어지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그 누군가에게 눈길을 주거나 가까워지는 모습을 볼 때 즉시 분노가 폭발합니다.
눈에 불길이 이글거리기 시작하며 배신감에 치를 떱니다.
그런 상황을 도무지 견디지 못하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따집니다.
그런데 우리의 하느님 역시 질투의 화신이라고 여호수아는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거룩하신 하느님이시며 질투하시는 하느님으로서, 너희의 잘못과 죄악을 용서하지 않으신다.
너희가 주님을 저버리고 낯선 신들을 섬기면,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선을 베푸신 뒤에라도, 돌아서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망시켜 버리실 것이다.”
(여호수아기 24장 19~20절)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느님에 대한 반역과 불충실, 그리고 진노와 처벌, 회개와 용서, 그리고 화해와 새 출발이 거듭 반복되는 역사였습니다.
하느님 눈을 가장 이글거리게 만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는 우상숭배였습니다.
당신과 맺은 계약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이방신들에게 몰려가는 백성들을 바라보는 그분의 눈에서는 그야말로 불꽃이 튀었습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 마치 우리들의 연인처럼 우리 때문에 분노하시고 눈에서 불꽃이 이글거린다는 것, 생각해보니 참으로 감사하고 은혜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엄청난 거리에 떨어져 계시는 분이 아니라 인격적인 하느님, 우리 인간 각자와 연격적인 관계, 연인 관계를 맺고자 하시는 분이라니, 참으로 놀랍고도 기쁩니다.
오늘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는 것을 못견뎌하십니다.
하느님 당신을 뒤로 하고 점집으로, 무속인에게로, 사주관상 봐주는 집으로, 사이비 종교로 걸어가는 것을 참아내지 못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녀들이 세상의 좋은 것들에 한눈이 팔려 당신께서 2순위, 3순위, 4순위로 밀려나는 것을 크게 슬퍼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선택에 있어서 최우선권이 어디에 있는지 잘 성찰해봐야겠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하느님의 눈길에 불꽃을 튀기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는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을 최우선 순위로 선택하신 전형적인 인물입니다.
특히 지금 이 순간 고통당하고 울며 있는 이웃들 안에 계신 하느님을 최우선적으로 선택한 결과가 위대한 사랑의 순교로 이어졌습니다.
콜베 신부님의 일대기를 읽고 묵상하면서 떠오른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그의 순교는 1941년 8월 14일 단 한번에, 혹은 순식간에 또는 엉겁결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제로서, 성모님의 종으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매일 순교를 준비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의 감동적인 죽음은 그가 매일 매일 살아온 삶의 결론이었습니다.
콜베 신부님과 함께 죽음의 수용소 생활을 견뎌낸 생존자들의 증언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그는 폐결핵으로 인해 가장 병약한 수감자중의 한 사람이었음에도 늘 동료들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했답니다.
자신에게 배당된 말라비틀어진 작은 빵 한조각도 허기로 고생하는 젊은 동료들에게 양보해주었습니다.
매일 배당되는 강제노역 가운데 가장 힘든 일을 먼저 선택했답니다.
간수들의 번득이는 경계의 눈초리를 피해가며 동료 수감자들에게 사목자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영적지도와 고해성사를 통해 지옥의 도가니 속에서도 깊은 마음의 평화와 위로를 얻었으며 또한 자살충동을 극복했는지 모릅니다.
그는 인간이 만든 가장 불행한 장소인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사랑과 기적의 장소로 변화시켜나갔습니다.
폭력과 증오심을 기도와 사랑으로 이겨냈습니다.
지하 아사 감방으로 내려간 후에도 그의 영웅적 덕행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죽음의 공포에 부들부들 떠는 동료들 한명 한명에게 종부성사를 베풀었습니다.
동료들은 그의 무릎에 얼굴을 기대고 평온한 얼굴로 하느님 나라로 건너갔습니다.
- 살레시오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기도손이 아름답다>
구역미사에 가면 어린이들은 따로 한 방을 차지하고 자기들만의 놀이에 열중합니다.
어른들 ‘미사에 시끄럽게 굴지 말아라.’하면서 특혜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미사참례는 어른이나 하는 줄로 압니다.
시끄러우면 좀 어떻습니까?
좀 더 거룩한 분위기에서 미사 봉헌하기에 앞서 어린이들에게서 거룩한 미사참례의 기회를 빼앗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들을 통해 그들의 순수성을 배우려면 그들 곁에 있어 봐야 합니다.
진득하게 오래 견디지는 못할지라도 ‘기도손’한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진정 어린이들로부터 하느님의 은총을 빼앗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레지오 마리애 회합에는 3~5살박이 미카엘라, 젬마, 새랑이도 참석합니다.
모임을 갖는 동안 말썽 없이 기도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헤어질 때는 두 손을 가지런히 배꼽에 모으고는 허리를 90도로 굽혀 인사합니다.
예수님이 어디 계시냐고 하면 십자고상을 가리키고, 성모상을 바라보며 성호를 그을 줄도 압니다.
어린이는 어른과 달리 자기에게 주어지는 것을 계산하지 않고 잘 받아들입니다.
어린이들은 부모님이 가르쳐주는 것을 금방 따라 합니다.
그러므로 어려서부터 기도의 분위기를 잘 만들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어미새의 소리를 듣고 노래를 배우는 어린 새들과 같이 어린 아이들도 세상에서 그들을 가르치기로 되어 있는 아주 열심한 부모 곁에서 하느님 사랑의 숭고한 노래와 덕행의 지식을 배워야 합니다.”
(성녀 소화 데레사)
또한 우리도 어린이의 단순함과 의존성을 배워 자기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선뜻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어린이가 부모의 가르침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듯이 우리도 주님의 가르침을 그렇게 받아들일 때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어린이는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어른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젖 떨어진 어린 아기, 어미 품에 안긴 듯이” (시편 131,2) 주님의 품에 안겨 평온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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