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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자전거와 인간 구조학 원문보기 글쓴이: 세잎크로바
△ 일본에서 출간된 백선엽의 회고록과 회상록 |
△ 간도특설대. 조선과 중국의 항일활동을 진압하기 위해 만든 비밀부대란 설명이 뒤따르고 있다. |
△ 일본판 위키백과(Wikipedia)에 올라있는 백선엽의 경력. 한국판 위키백과에는 이 같은 내용이 없다. |
△ 간도특설대를 설명하고 있는 일본판 위키백과. 주요인물 란에 백선엽과 더불어 박정희의 이름이 또렷하다. 물론, 한국판 위키백과에는 이 같은 내용이 없다. |
KBS가 지난 주말 백선엽을 6·25 전쟁의 영웅으로 미화한 다큐멘터리 <전쟁과 군인>을 내보냈습니다. 24, 25일 이틀간 골든타임인 밤 10시부터 KBS 1TV를 통해 1시간씩 방송됐습니다.
<전쟁과 군인>은 한국전쟁 61주년을 맞아 KBS가 기획한 특집 다큐멘터리입니다. 방송은 시종 백선엽의 기억과 발언에 의존해 그의 활약을 집중조명했습니다. ‘6·25 영상’은 한국군과 미군의 평양 입성, 다부동 전투 등에서 젊은 백선엽의 얼굴이 담긴 장면을 추렸습니다. 91세, 백선엽은 자료영상을 보며 “감개무량합니다. 일생의 최고의 날입니다”라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호텔리어 니콜의
영어실력 화제!
코,이마,턱 성형을
한꺼번에 490만원??‘백선엽 다큐’는 공영방송이 만든 다큐멘터리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한 개인의 기억과 의견만을 추종했습니다. 미공개 영상이란 것도 미군 행렬 같은 게 태반이어서 특별한 사료적 가치는 없어 보였습니다.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이나 열강의 각축 등 무거운 주제는 제외됐고, 전쟁의 참혹한 실상을 냉정하게 짚지도 못했습니다. 혼돈의 시절, 100만명이 넘는 민간인 피해 사실이나 무고한 양민을 빨갱이로 몰아 죽이고 그 가족들을 고통 속에 살게 한 국가 폭력에 대해서는 1초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백선엽에 의한, 백선엽을 위한 방송이었을 뿐입니다. KBS는 “그의 기억은 다시 전장 속으로 걸어가고 있다. 이제 우리는 어떤 역사의 길을 찾아야 할까”라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내레이션을 하며 우리 방송사에 길이 남을 ‘황당 다큐’를 마무리했습니다.
백선엽을 전쟁 영웅으로 미화한 KBS 다큐멘터리 <전쟁과 군인> 방송 화면.
백선엽은 1943년 만주국 소위로 임관해 간도특설대에서 중위까지 복무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일본을 상대로 선전포고하고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던 때입니다. 간도특설대는 만주에서 활약하는 항일무장단체를 토벌하기 위해 조직된 특수부대입니다. “조선독립군은 조선인이 잡아야 한다”는 전략에 따라 일본군 장교의 지휘 아래 친일 조선군인들로 구성됐으며, 대부분 자원입대했습니다. 부대원들은 인간도 아니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잔혹한 토벌작전을 전개해서 일본으로부터 많은 훈포장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독립군의 목을 군도로 자르고 그 옆에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시대의 자랑, 만주의 번영, 징병제의 선구자, 조선의 건아들아. 선구자의 사명 안고 우리는 나섰다.
나도 나섰다. 건군은 짧아도 전투에서 용맹 떨쳐 대화혼(大和魂·일본혼)은 우리를 고무한다.
천황의 뜻을 따르는 특설부대, 천황은 특설부대를 사랑하네.’
간도특설대의 부대가(部隊歌)입니다. 백선엽도 매일 이 부대가를 불렀을 것입니다. 그가 장교로 복무하는 동안 간도특설대는 170명의 조선독립군을 처형했습니다.
“소규모이면서도 군기가 잡혀 있는 부대였기에 게릴라를 상대로 커다란 전과를 올렸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주의주장이야 어찌되었건 간에 민중을 위해 한시라도 빨리 평화로운 생활을 하도록 해주는 것이 칼을 쥐고 있는 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간도특설대에서는 대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런 기분을 가지고 토벌에 임하였다….” (1993년 일본에서 출간된 ‘간도특설대의 비밀’ 중 백선엽 회고 부분 발췌)
간도특설대의 훈련 모습. 간도특설대는 간도 지역을 중심으로 항일유격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군이 창설한 조선인 특수부대로 1938년 1기부터 45년 7기까지 배출했다. 발대 당시 명칭은 조선인특설부대였고 후에 간도특설대로 바뀌었다. | 경향신문 자료 사진
백선엽은 회고록에서 조선인을 토벌한 사실을 당당히 밝혔습니다. 그가 해방 후 이제까지 간도특설대의 친일 전력에 대해 참회하거나 반성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백선엽은 같은 동포를 토벌하고 죽이면서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고 후회하지도, 사죄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칼을 쥐고 있는 자의 사명’이라며 자신의 친일행각이 정당하다고 외쳤습니다.
법정에서 유무죄를 다퉈볼 것도 없이 그의 회고록 자체가 민족 반역행위의 시인이요, 자술서입니다. 정상적인 나라였다면 이런 민족 반역자는 온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나치 부역자를 엄혹하게 처단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지구의 절반을 돌며 아르헨티나까지 쫓아가 유대인 학살의 원흉 아돌프 아이히만을 잡아 교수대에 세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1945년 한반도 남쪽에 진주한 미 육군 태평양총사령부가 낸 포고문 제1호는 ‘정부, 공화단체 또는 공공사업에 종사하는 자는 별명이 있을 때까지 종래의 직무에 종사할 것’(제2조)이었습니다. 군정의 총책임자인 하지 중장은 “군정 운영의 효율과 능률을 고려해서”라고 설명했습니다. 해방 후 기득세력이 하지 중장의 귀를 잡고 “지금은 바쁜 때이니 그들을 처단할 수는 없지 않소”(우남실록)라고 입김을 행사한 결과입니다. 하지의 결정으로 미 군정이 고용한 7만5000여명의 한국인 중 대부분은 일제 치하의 옛 관리들이었으며 이들은 종전 자리에 그대로 앉았습니다.
독립운동가의 자손들이 못 배우고 못 먹고 사회 빈곤층에 머무는 사이 이들의 후손은 자자손손 권세와 부귀와 영화를 누렸습니다. 그래서 민간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가 일제강점기에 친일 행위를 한 친일파의 목록을 정리해 2009년 11월8일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했습니다. 이 사전에 수록된 인물은 모두 4776명입니다. 간도특설대의 경우 그 활동이 특히 악랄해 장교는 물론 말단 사병까지 전원 등재됐습니다. 이 사전에 오른 당사자 가족과 우파단체들은 등재 금지 또는 명예훼손 소송을 냈으나 법원은 이를 모두 기각했습니다.
해방 후 간도특설대 출신들은 토벌작전 경험을 무기삼아 제주 4·3사건과 지리산 빨치산 토벌에 주력으로 참여했습니다. 한국전 발발 후 백선엽은 나이 32세에 육군참모총장이 되었습니다. 백선엽이 6·25 전쟁에서 전과를 세웠다는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국가 기간방송을 자처하는 KBS가 백선엽을 우리 민족이 본받아야 할 위대한 군인으로 미화한 것은 ‘미친 짓’이라고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KBS는 항일독립운동단체 등 31개 단체가 ‘친일·독재 찬양 방송 저지 비상대책위’를 구성해 ‘백선엽 다큐’ 방송을 취소할 것을 요구했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백선엽(오른쪽 끝)이 지난 24일 서울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6·25전쟁 제61주년 참전유공자 위로연’에서 이명박 대통령 등 참석자들에게 “이 모든 것을 위하여”라며 건배를 제의하고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KBS는 국가와 민족을 배신하고 개인의 영달을 위해 일본제국주의 군대의 주구(走狗) 노릇을 한 인물을 이 시대 대한민국 최고의 영웅으로 만들었습니다. 백선엽은 보란 듯이 이명박 대통령이 주재한 ‘참전 유공자 위로연’에서 6·25 참전 유공자와 원로 장성 등 전 참석자를 대표해 “이 모든 것을 위하여”라며 건배를 선창했습니다. 화려한 부활입니다. KBS는 8월에 독재자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포장하는 또 다른 특집 다큐멘터리를 방송하기 위해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수신료를 더 올려달라고 하니 통탄할 일입니다.
조국 광복의 일념으로 차디찬 이국땅에서 피흘리며 쓰러진 순국 선열들께 부끄럽고 부끄럽습니다. 간도특설대에 학살된 애국지사들께 죄송하고 죄송합니다. 선열들께서 후손에게 물려주려 한 해방 조국은 이런 나라가 아니었을 터이지만, 대한민국의 정의는 아직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했습니다.
※ 칼럼은 경향닷컴 ‘편집장의 눈’(http://khross.khan.kr/89)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국방부가 내년 6·25전쟁 60주년을 기념해 참전자들의 자긍심을 높이고
국민들의 안보의식을 고취하기 위해서 백선엽(89) 예비역 대장을
명예원수’로 추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물론 남북화해와 평화공존이라는 시대적 흐름을 거꾸로 돌리고 싶은 국방부의 간절한 소망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이 보도가 나오자마자 백선엽의 친일행적이 누리꾼들 사이에서 급격히 번지며 국방부의 행태에 비난이 쏟아졌다.
자신들의 자랑스런 원로인 백선엽을 위한다는 것이 그만 망신을 준 꼴이 되고 만 것이다.
△ 일본에서 출간된 백선엽의 회고록과 회상록
이 처럼 백선엽의 친일행적이 상대적으로 소상하게 널리 알려진 이유는 아마도 ‘실록 지리산’과 ‘군과 나’라는 자서전 때문일 것이다.
‘실록 지리산’은 여수ㆍ순천 사건 직후인 1949년 7월부터 1950년 4월까지 백선엽이 광주 주둔 제5사단장으로 발령받아,
직접 서남지구 빨치산 토벌을 지휘하면서 겪은 이야기며, ‘군과 나’는 6ㆍ25전쟁을 비롯한 자신의 군 생활 전반을 다룬 회고록이다.
이 책들은 각각 1992년과 1989년에 출간되었다.
당시로서 친일문제가 거의 언급되지 않던 시절이었던 만큼 백선엽은 아무 거리낌 없이
어쩌면 자랑스럽게 자신의 군 경력을 회고했을 지도 모른다.
1920년생으로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군관을 양성하던 봉천군관학교(중앙육군훈련처) 9기로 졸업(1941년)하고
해방 때까지 간도특설대에서 만주군 중위로 근무했던 백선엽에게 있어서 아마도 가장 치명적인 이력은 바로 간도특설대 근무 경력일 것이다.
△ 간도특설대. 조선과 중국의 항일활동을 진압하기 위해 만든 비밀부대란 설명이 뒤따르고 있다.
간도특설대는 동북지역의 항일유격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인 지휘관 일부를 제외하곤 모두 조선인들로만 구성된 악명 높은 특수부대였다.
이런 행적 때문에 백선엽은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로 선정된 상태이다.
지금도 원로 중국동포 사이에선 간도특설대의 활동에 대해 치를 떠는 분들이 많다고 한다.
실제로 간도특설대원들은 항일부대원을 잡으면 순순히 사살하지 않고 가장 잔혹한 수단을 동원했다.
간도특설대원들의 잔혹한 행위는 항일부대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효과와 더불어 일본인 상관 앞에서 자신들의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이들에게 조선인 포로들은 더 없이 좋은 사냥감이었던 것이다.
연변 작가 류연산씨가 쓴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다’에 언급된 특설부대원들의 만행을 일부 인용한다.
- 1939년 5월 야간 토벌 작전 중 산나물을 뜯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불태워 죽였다.
- 1939년 7월 자신들의 충혼비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전사한 항일부대원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 빈 통조림통에 넣었다.
- 1941년 겨울 포로로 잡힌 항일부대원의 머리를 군도로 자르고 잘린 머리채를 들고 기념촬영을 했다.
- 1941년 1월 포로로 잡힌 여성 항일부대원 4명을 강간하려다 실패하자 살해했다.
- 1944년 4월 팔로군을 숨겨준 마을 원로를 죽인 후 그의 머리를 잘라 솥에 삶은 후 두개골을 장식품을 만들었다.
△ 일본판 위키백과(Wikipedia)에 올라있는 백선엽의 경력. 한국판 위키백과에는 이 같은 내용이 없다.
1937년 11월 만주국 간도성장에 임명된 이범익(1883-?, 일제하에서 충남도지사, 중추원참의,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 등 역임)
은 일본의 환심을 사려고 자발적으로 조선총독부에 간도특설대 설립을 제안해 이듬해인 1938년 12월 15일 1기 입대식을 열린다.
설립당시 명칭은 조선인특설부대였고 후에 간도특설부대로 바뀌었다.
특설대는 해방되는 순간까지 모두 108번, 한 달에 한 번꼴로 항일부대와 전투를 싸워 170명의 항일부대원을 사살하고 139명을 체포했다.
이러한 전과로 조선인 특설부대원 167명이 훈장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들이 즐겨 불렀을 ‘특설부대가’를 보면 그들의 당시 내면을 짐작할 수 있을 법하다.
시대의 자랑, 만주의 번영 위한 / 징병제의 선구자 조선의 건아들아 / 선구자의 사명을 안고 / 우리는 나섰다 나도 나섰다 /
건군은 짧아도 / 전투에서 용맹 떨쳐 / 대화혼은 우리를 고무한다 / 천황의 뜻을 받든 특설부대 / 천황은 특설부대를 사랑한다
‘천황의 뜻을 받든 특설부대’는 해방 후인 1945년 8월 29일까지도 팔로군과의 전투를 계속벌이다가 뒤늦게야 일본의 패망 소식을 듣고 투항한다.
백선엽은 소련군에 의해 무장해제 당한 후 소련군을 따라온 한인 통역에게서 “조선은 곧 독립된다. 당신은 여기 있으면 붙잡혀 시베리아로 유배된다.
빨리 고향으로 가라”는 말을 듣고 9월 말 고향인 평양에 숨어 있다가 12월 말 38선을 넘어 월남한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간도특설대원 백선엽에게 38선 이남은 기회의 땅이었다.
백선엽을 비롯해 특설대원 대부분은 한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들어가
일본군 경력을 인정받아 단번에 군의 요직을 차지했으며 후에 5ㆍ16쿠데타의 주역이 되었다.
대표적인 사람들 꼽자면 정일권(국무총리), 김일환(내부장관), 이한림(육사교장, 건설부장관),
원용덕(헌병사령관), 이주일(감사원장), 김석범(해병대사령관) 등이다.
이들 중에서 박정희와 정일권을 제외하면 백선엽의 승승장구가 가장 눈에 띈다.
어쩌면 부하의 손에 비명횡사한 박정희나 정인숙 스캔들로 불명예를 안은 정일권에 비하면 백선엽은 조용한 가운데 실리와 명예를 동시에 챙겼다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백선엽은 ‘6ㆍ25전쟁의 영웅’으로 불리며 한국군 최초의 4성 장군으로 전역한 뒤
대만,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캐나다 대사, 교통부장관, 한국종합화학(현 한화) 사장 등을 지내는가 하면
친동생인 백인엽과 함께 인천대학을 설립하는 등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관운을 과시한다.
△ 간도특설대를 설명하고 있는 일본판 위키백과. 주요인물 란에 백선엽과 더불어 박정희의 이름이 또렷하다. 물론, 한국판 위키백과에는 이 같은 내용이 없다.
그러나 자신과 자기 동생의 이름에서 한자씩을 따서 이름 붙인 학교법인
선인학원은 1994년 3월 인천시가 인천대학의 운영자로 변경되기 전까지 대표적인 사학 비리의 온상으로 지탄받아 왔다.
현재 시립 인천대 누리집 그 어디에도 백선엽, 인엽 형제의 이름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한국의 군벌 안에서 백선엽이 차지하는 위치는 독보적이어서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위원장’ ‘전쟁기념사업후원회장’ ‘성우회 회장’ ‘대한민국육군협회장’ 등을 맡고 있다.
백선엽이 거쳐 간 여러 직함 중에는 1999년 11월부터 2001년 1월까지 정부의 ‘노근리 사건 대책단 자문위원장’도 있다.
6·25전쟁 당시 미군과 한국군에 의해서 전국적으로 수없이 자행된
민간인 학살에 책임자 중 한명이라 할 수 있는 그자를 노근리 사건 대책단 자문위원장에 앉힌 것이다.
당시 연구소는 그의 자문위원장 임명을 반대했지만 소용없었다.
급기야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지금 그는 더욱 바빠진 모습이다.
건국60주년기념사업회 고문에 대통령 자문 국민원로회의 위원 등.
그를 내세워 ‘잃어버린 10년’을 찾겠다는 것일까.
백선엽, 그가 바빠질수록 우리는 불안하다.
그가 미워서가 아니라 그가 풍미했던 시절이 반대로
우리 역사에는 피비린내 나는 시련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