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첫날이다.
삶
덧없고
부질없지만
살아가는 동안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야한다.
잠시
내
삶을 돌아본다.
5살
10살(이때 삶의 허무를 느꼈던 일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고)
20살
30살
40살
50살
60살
요런조런 기억들이 스치고 지나간다.
이번
설날에
어머님과 함께 봤던
옛
사진중에서
한장
아버님의 군복부 시절의 사진이다.
1932년생
군
복무
내가 서부전선
동생이 동부전선
막내는 중부전선에서 만기전역을 했다.
물론
고딩핵교
대핵교에서 받은 교련훈련으로 군복무 혜택도 받았고(최고 6개월 정도 : 만기 36개월에서 30개월까지 줄어들던 시절)
그리고
아들이 포천에서 만기전역
조카는 강원도 고성 골짜기에서 만기전역
요늠은
함씩 군대생활을 얘기하면 휴가를 독수리타고 왔다고 농담을 한다.
동생은
인제와 원통에서
군생활을 했는데 내가 제대하고 복학후
제대하는 늠이
밀양
어머님께 전화를 했다.
ㅋㅋ
동생이
총을 잃어버려 수습을 해야하는데 돈을 부치라고(분명 요늠은 운이 좋았다.)
내가
부산에서
밀양으로
바로
야간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가서
버스로
인제에 도착하고 보안대와 헌병대에 연락을 했다.
헌병지프(?)
동생이 놀라서 왔다.
제대하는 늠 중에서 혹은 제대하고 나가는 늠 중에서 바로 확인을 하고 잡으면 되는데 일단 헌병대에 맡기고
목소리
얼빠진 늠이 바로 했으니
그때
인제읍내
지금
인제읍내는
하늘과 땅보다 그 차이가 많다.
세상을
살다보면
사건
사고
끊이지 않는데
우리는
그것을 알고도 혹은 모르고 지나가는 삶을 살아간다.
그게
우리네 인생이다.
처가
처남과 조카 둘
다
군복무를 만기로 제대했고
전역
제대
어느 말이 맞는지 모르겠는데 나중에 사전을 함 찾아봐야겠다.
외가
조카 셋중에서
하나는 방위이고 나머지 둘은 현역으로 만기제대를 했는데 장남은 고생을 많이 했고 막내는 우리 동네 뒷산에 근무
중간은
밀양에서 방위를 마쳤다.(유도 6단의 몸인데 : 몇단까지 갔는지 가물가물)
내
사랑하는
조국
대한민국 국민으로
의무
했으면
권리
반드시 스스로 찾아야한다.(그게 안타깝지만 현실이다.)
누가
가져다주지 않는다.
이제
나도 군생활
훈련
왜
그렇게 많았던지 이해를 한다.
보병에서
200km 행군을 두번이나 하고 팀스프리트 훈련까지 해서 또 겨울은 동계훈련
처음에는
대대장
진급을 위한 개인적인 욕심이라고 다 생각을 했는데
신교대 소대장
9사단 28연대 배치를 받으니
했던
이야기가 그때는 무심하게 지나갔는데 세월이 지나서 어느정도 다 이해가 되니 그게 세월의 힘이다.
두번
고생을 했다.
한번은
신교대에서 일어나니 갑자기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
두번째
자대 배치를 받고 200km 행군후
동계훈련에서
자고 일어나니 몸이 굳어 하나도 움직이지 않아 옆에 얘기를 했더니 냉동인간처럼
내가
제대후
세상에 나와서
다
들어주고 이해를 하는 이유다.
실제
꾀병을 부려도
조퇴
결근
다
알면서도(관리이사) 봐줬던 이유가 내가 경험을 해보니 삶은 우리가 아는 것 보다도 더 알 수 없는 현상이 많다는 것을
부부생활
가족
애들의 거짓말도
다
이해를 하면 쉽게 풀리지만 오해를 하면 다툼이 일어난다.
의심
최악의 단어중에 하나
설날
아버님 산소
마눌과 둘이서 다녀왔다.
장인 산소도 함께
딱
10년 간격으로 아버님과 장인어른이 함께 했다.
1932년 출
2001년 졸
1942년 출
2011년 졸
두분의 출생과 사망년대다.
내가
매월 초하루에 절에 가서
부처님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세분께 비는 것은 어머님과 장모님이 향후 3년동안 아프지않고 건강하게 지내시게 해달라는 것이다.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