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신> 시의 한 독자에게 / 임보 (시인)
로메다님, 내 글을 읽고 일기 쓰기를 다시 시작하셨다고요? 잘 하셨습니다. 가능하면 마음에 맞는 친구에게 긴 편지도 자주 써 보시기 바랍니다. 글을 잘 쓸 수 있는 길은 옛날 중국 송나라의 문인 구양수(歐陽修)가 일찍이 간파했던 삼다(三多)의 교훈을 능가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삼다는 다독(多讀) 다작(多作) 그리고 다상량(多商量)이 아닙니까? 좋은 글을 많이 읽고 자신이 손수 글을 많이 써 보고, 그리고 생각을 늘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써 놓은 좋은 글을 우선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좋은 글을 어떻게 고를 것인가에 대해 오늘은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침 내가 이미 써놓은 「시의 한 독자에게」라는 서간체의 수필이 있군요. 그것을 먼저 보여드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詩의 한 독자에게 시를 좋아한다고요? 그래서 시를 즐겨 읽는다고요? 시의 무엇이 그렇게 좋던가요? 시를 읽고 나면 마음이 평온해지던가요? 어떤 시들을 즐겨 읽나요? 달콤한 사랑의 시가 좋던가요? 날카로운 풍자시가 마음에 들던가요? 아니면 깊은 사색의 시에 매력을 느끼나요?
아무튼 현대와 같은 각박한 시대에 아직도 시라는 것에 미련을 못 버리고 있는 당신을 보니 꽤나 딱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남들은 한 푼이라도 더 벌겠다고 돈이 되는 일에 매달려 아귀다툼인데, 당신은 생계에 하등의 보탬도 되지 못한 그 시라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니 그렇지 않습니까? 그거야 평생 시에 매달려 살아가는 시인들도 있는데, 그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딴은 그렇군요.
당신을 보면 가난한 자선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어렵게 행상을 해서 모은 전 재산을 양로원이나 보육원 같은 곳에 희사하는 분들 말입니다. 또한 외로운 낙도를 전전하면서 어려운 섬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해 주며 살아가는 선량한 의료인들의 모습도 떠오릅니다. 아마도 당신은 실리에 무척 밝거나 세상살이에 너무 영악스럽지도 못하지요? 어딘가 수더분하고 인정이 넘치는 그런 사람일 것 같군요. 남의 말을 잘 믿고 슬픈 영화를 보면 눈물도 쉬 흘리지요? 네 틀림없습니다. 당신이야말로 이 세상을 보다 평화롭고 아름답게 가꿀 수 있는 꽤나 괜찮은 분입니다. 신이 만일 내게 이상적인 공화국을 하나 만들도록 허락해 준다면 그 나라의 일등 시민으로 당신을 가장 먼저 초대하고 싶습니다. 당신을 보면 '딱하다'는 느낌이 든다는 처음의 내 발언은 본심과는 전혀 다른 역설임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요즈음의 시들이 어렵다고요? 잘 이해할 수도 없는 골치 아픈 시들이 적지 않다고요? 그런 시들은 읽지 마세요. 당신을 괴롭히는 그런 글들은 그냥 팽개치세요. 그래도 차마 그럴 수 없다고요? 역시 무척 착하시군요. 그러나 당신처럼 그렇게 선량한 독자를 괴롭힌다면 이는 고약한 시인임에 틀림없습니다. 남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기만의 아집에 사로잡힌 고집스런 자임에 틀림없을 테니까요. 그들은 당신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떤 시들을 읽는 게 바람직하냐고요? 글쎄요. 추천하기가 쉽지 않군요. 감미롭게 속삭이는 출판사의 화려한 광고에 현혹되지 마세요. 그럴듯한 신문기사나 비평가의 서평에도 넘어가지 마세요. 겉으로는 공정한 척하지만 그들은 어쩌면 당신 편이 아니라 출판사의 편일 수도 있습니다.
베스트셀러에 너무 마음을 빼앗기지 마세요. 지나치게 달콤한 맛이 나는 작품들도 경계하세요. 조미료와 설탕의 힘을 빌어 만든 음식에 잘못 길들면 우리의 미각을 잃고 드디어는 건강까지도 해를 입게 되지 않습니까? 작품도 그렇습니다. 당신이 지불할 인세에 마음이 팔려 사탕발림의 글을 쓰는 자들도 적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세요.
유명한 시인의 작품을 골라 읽는다고요? 그 방법도 별로 권장하고 싶지 않군요. 세상 사람들을 보세요. 유명한 사람치고 훌륭한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특히 살아 생전에 이름을 얻은 사람 가운데 믿을 만한 사람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유명한 시인 가운데는 차라리 정치가가 되었더라면 더 어울리겠다 싶은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수상(受賞) 경력이 많은 시인의 작품을 골라 읽는다고요? 글쎄요. 그 방법도 별로 찬성하고 싶질 않군요. 그것은 상(賞)이 공정하게 시행되는 사회에서나 기대할 수 있는 방법이니까요.
시와 시인에 대해 너무 부정적으로만 얘기해서 혼란스럽지요? 아무튼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요란한 시인들의 작품은 읽지 마세요. 그들의 작품을 읽어 주기엔 우리들의 생애가 너무 짧습니다. 그러한 작품들은 당신이 아니더라도 눈먼 독자들이 많이 읽어 줄 테니까 미안해 할 것도 없습니다. 세상에는 마치 흙 속에 묻혀 빛을 보지 못하는 보석처럼 소중한 작품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한 작품들은 당신 같은 현명한 독자들이 찾아 읽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지요. 차라리 선배나 친구가 읽고 권하는 시집을 읽으세요. 가능하면 책방에 들러 스스로 읽어보고 믿을 만한 시인이 누군가를 찾으세요.
예술은 결코 양이 아니라 질이 문제입니다.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은 천 명의 잡다한 작곡가보다는 하나의 모차르트입니다. 저질의 예술품들은 세계를 정화하기는커녕 지상을 어지럽히는 공해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킬 수 있는 그런 양질의 시를 찾아 읽으세요. 그런 시의 주인공― 당신이 존경할 만한 시인은 아직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어딘가에 지금 묻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를 찾아보세요. 그는 그늘진 곳에서 혼자 외롭게 유서를 쓰듯 시를 쓰며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시인을 하나 찾아 그의 후원자가 되세요. 물질적으로 돕는 후원자가 아니라, 그가 용기를 잃지 않고 계속 시를 쓸 수 있도록 격려를 보내주고, 때로는 그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후견인이 되세요. 그의 아름다운 시를 주위 사람들에게 소개도 하고 혹 그가 모처럼 소중한 시집을 만들어냈다면 그의 시집을 몇 권 사서 가까운 이웃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세요.
당신이 그렇게 하는 것이 별로 대단한 도움이 못된다고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시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간절할 때, 당신은 불행한 한 시인의 생명을 건질 수도 있습니다. 어떤 비관적인 한 시인이 세상을 떠나려고 독배를 들려는 순간 그대가 보낸 한 통의 편지를 읽었다고 칩시다. 그리고 생면부지의 독자로부터 그의 작품에 대한 찬사를 들었다면, 그의 죽음은 잠시 유예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경우에 따라서는 잠시가 아니라 평생 유예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아름다운 시들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이 지상에 시인다운 시인은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에 시가 사라지지 않고 존속될 수 있기를 원하십니까? 시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곧 시의 생명입니다. 당신이 좋은 시들을 찾아 읽는 한, 이 지상에서 훌륭한 시인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시의 수호자입니다.
로메다 님, 읽기가 좀 지루했나요? 시를 좋아하는 한 독자에게 보내는 글이었습니다. 좋은 책 고르기가 힘들면 우선 고전부터 읽으시기 바랍니다. 좀 낡았더라도 이미 정평이 나 있는 책들을 고르십시오. 이 책들은 긴 세월을 두고 많은 사람들에게 검증된 것이니까 비교적 안심하고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집이나 소설 등 문학서적들뿐만 아니라, 역사나 철학 그리고 과학에 이르기까지 다른 분야의 고전들도 소홀히 하지말고 열심히 읽으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읽은 좋은 책들이 언젠가는 당신이 좋은 글을 쓰는데 보이지 않은 자양분이 될 터이니까요. 오늘도 즐거운 하루 지내시길 바랍니다.
- 임보 교수 시창작교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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