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행복-새벽을 여는 사람들
나는 세상사를 인연의 이어짐으로 본다.
지금 이 순간의 모습이 어느 날 불현듯이 생긴 것이 아니라, 뭔가의 연줄이 잇고 이어져 지금에 이른 것으로 보는 것이다.
43년 전으로 거슬러, 내가 국가공무원 9급인 검찰서기보로 대검찰청 총무과에 발령받아 첫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을 때, 그때 같은 부서에 근무하던 여직원들이 나를 두고 수군거리면 흉본 말이 있었다.
곧 이 말이었다.
‘짚북데기 속에서 방금 기어 나온 것 같은 촌놈’
내 그 흉본 말을 알게 된 것은 그때부터 6년이라는 세월이 더 흘러 나를 흉본 여직원 중의 하나인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고 난 그 이후였다.
나를 흉을 봤던 여직원과의 결혼, 그게 그저 굴러온 떡처럼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오뚝이처럼 내침을 당하고도 또 다가가는 그런 끊임없는 꼬드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검찰수사관 생활을 하는 31년 9개월 그 오랜 세월에도 그랬다.
새벽 같이 일어나서 출근을 서둘렀다.
그래서 남들이 출근하기 전에 그날 할 일을 미리 챙겨보는 부지런함이 있었기에 대학도 못 다닌 학력으로 국가공무원 3급인 검찰부이사관이라는 명예직급까지 오르는 영예를 안게 된 것이다.
서울 서초동에서 ‘작은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법무사사무소를 내고 있는 지금의 내 삶도 마찬가지다.
감나무 아래 누워서 홍시 떨어지기를 바라듯 하지 않았다.
거래처 한 곳 한 곳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고, 직원들 하나하나 토라지지 않게 하려고 애썼다.
그 모두가 눈물겨운 일과였었다.
게다가 그 하루의 일상을 글로 남기는 것을 좋아해서, 글쓰기에도 소홀함이 없어야 했으니, 하루 24시간으로는 내 그 하루 삶의 구석구석들을 일일이 소화해내기가 버겁다 할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내 하루는 남보다 빨리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은 아내가 깊은 잠에 빠져있는 새벽 세 시 네 시에 집을 나서기 일쑤였고, 심지어는 자정의 시간에도 툴툴 털고 사무실로 나온 적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 아파트에도 이미 호가 났다.
말하기를 ‘새벽을 여는 사람’이라고 했다.
2016년 9월 8일 목요일인 오늘도 그랬다.
새벽 4시에 집을 나섰다.
신일학원 김창호 선생의 재산상속 등기와 관련해서 경북 영천까지 먼 길을 가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떠나기 전에 밀린 글 몇 편도 써야 했다.
그러니 그 시간에 사무실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 시간이면 아무도 길거리에 없을 줄 알았다.
아니었다.
있었다.
빈 택시도 한 대 지나가고 있었고, 종이 줍는 할머니 한 분도 이미 그 시간에 작은 리어카를 끌고 골목길을 누비고 있었다.
다들 새벽을 여는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