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발푸르기스의 거봉
김혜린
커다랗고 탐스러운 포도 봉우리가 짙게 빛나고 있다
알이 크고 빽빽한 거봉은 익기 전에 속부터 썩어 들어갈 것이다
나는 모두가 썩기 전에 서둘러 포도알을 솎아야 한다
이건 너희에겐 할 수 없었던 이야기야
죽은 사람이 또 죽는 꿈을 꾸었다
숯이 또 재가 되는 것처럼
타오르는 배경 안에서
나는 무너지는 몸을 안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무도 묻지 않았다
아무도 묻을 수 없었다
꿈속에서
내 몸은 무덤이 된다
송이송이 열리는 열매들은 곧 시체가 된다
검고 짙은 보랏빛 무덤은
어느 가정의 베개처럼 습하고 눅눅하다
포도알 위로 포도알들이 쏟아진다
왜 죽은 사람이 또 죽을 수 있는 걸까
어디선가 흘러 들어온 여자들은
맨발로 무덤을 밟으며 봉우리를 넘어간다
오른발을 땅에 딛고 왼발은 허공을 차며 춤을 춘다
모닥불은 환하고
점멸하던 윤곽들이 모여든다
각다귀와 마른 지푸라기, 구상나무 숲, 흔들리는 몸짓들
까만 발바닥과 눈동자
흙 안에서 썩어 가는 다른 이의 시체를 딛고
계절을 넘어간다
꿈과 모닥불은 산산이 무너져 내린다
어느새 발골 된 가지만 심지처럼 남기고
어둠이 조용히 흘러간다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은 죽음을 주는 게…….
하지 못한 말이 달게 입안에 고인다
어둠 안에 어둠을 그러모으면 명도는 낮아질까
그래서 포도는 달아질까,
―《문장웹진》 2023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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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린 / 1995년 서울 출생. 202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시 등단.